하우스 스캔들 - 은밀하고 달콤 살벌한 집의 역사
루시 워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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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은 우리 존재의 은밀하고 아늑하고 자랑스러우며 소름끼치게 하는 기억과 자아의 외-내면을 모두 담은 곳입니다. 집은 "나" 뿐 아니라 나와 가장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가까운 타인들(가족이라는 이름의)과 감정, 추억을 형성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집은 사적(私的)인 흔적일 뿐 아니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나 이상의 거대한 자아(공동체, 민족 등)가 내게 소통을 꾀한 사적(史的) 자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은, 그 거주한 개인의 내력을 들출 수 있는 유력한 증거집합일 뿐 아니라, 역사를 추적하는 최초 출발점으로 쓸모있게 기능하는 좌표입니다.

이 책은 그런 "집"의 생활사, 발전사를 재미있게 요약, 혹은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또, 이 "집"이 살아온 궤적과, 문명사(대체로 동시대인이 공감하는 스토리의)이 서로 교차한 지점을 훑음으로써, 세계사 전체에 대한 회고와 조망을 시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집"이 어떠어떠한 경로로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게 되었으며, 거대한 역사가 결국 나라는 작은 존재에 미치고 간 영향을, "집"이라는 공적(公的)이면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프레임 삼아 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읽기에 쉬우면서도 그 담고 있는 깊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을 자랑합니다. 프랑스어권 저자들에 의해서는 이런 시도가 종종 행해졌으나, 대개 지나친 형이상학, 주관적 요설로 빠졌다는 게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이 책은 영국 학자답게, 현학적이지 않고 실용적, 일상적 용어로 "당신들의 집, 나의 집"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집"이라는 미시사와, 정치적 이벤트, 경제적 격변을 두루 포괄할 거시사, 그리고 평범한 독자의 심리까지 넉넉히, 오밀조밀히 꿰고 있어야 이런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양인들이 흔히 타 문명권에 대해 갖는 오만과 우월감의 근거가, 청결한 신체 유지를 위해 개인 목욕 시설을 집에 일찍부터 들여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만 해도, 현대식 주택에 샤워 시설, 터브가 갖춰진 역사가 극히 짧고, 별도의 설비를 따로 애써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닭장집에 불과한" 저소득층 거주의 상징이라 해야 할 아파트가 기이하게도 대중의 선망이 되었다는 게 이를 반증합니다. 그러나 최근 서양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여러 대중서들에서 일부를 접할 수 있었듯,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이 오물에 의복이 더럽혀지지 않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게 바로 저들의 생활사이며,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그토록 많은 전염병이 창궐했던 게(그뿐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인구가 희생되었는지요), 저들 스스로 부끄러이 고백하고 있는 지난 역사입니다. 이 책은 "목욕의 몰락"이라는 제목 하에 이 역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목욕, 아니 샤워라고 해도, 구석구석 씻는 버릇을 들이는 게 세련된 사회인, 부지런한 경제인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식입니다. 그들이 구어에서 흔히 쓰는 말로 "귀 뒤까지 싹싹 씻는" 같은 말이 이를 잘 드러내죠. 그러나 각종 애널에서 드러나는 진상의 기록들은, 지난 역사에서 그들이 얼마나 더럽게 일상을 영위했는지 잘 폭로하고 있습니다. 너무 깨끗하게 씻는 습관(이라고 해 봐야 우리가 현재 평균적으로 시도하는 정도)은 터부시되었고, 심지어 종교적 우려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이 목욕은 대체로 공공 장소에서 이뤄졌는데, 옷을 벗는다는 그 과정에 불순하게 얽힌 채 매매춘의 편한 집결지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욕하러 간다는 말은 곧 "추잡하고 떳떳지 못한 재미 좀 보러 간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아마 미시사보다는 본격 역사(부당한 표현입니다만)에만 관심이 있음을 자부(근거 없는 허영입니다만)하는 독자들도, 이 책의 12장 "왕과의 동침"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흥미를 감출 수 없을 것 같네요. 역사서를 읽다 보면 자주도 접하는 게, 해산하는 왕비의 모습을 "증인"으로 지켜 보기 위해 그 개인적 공간에 버젓이 입실해 있는 늙은 중신들의 모습입니다. 요즘처럼 DNA 검사를 자유롭게 행할 수 없던 시절,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사항과 권위는, 유력한 이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이 토픽은 2장 "출생"에서도 다른 각도로 조명됩니다). 왕과 왕후의 침실에, 그런 드문 이벤트가 아니라도 드나들 수 있는 위치는, 바로 그 사람의 권력과 위상을 드러내는 최우선 표징이었습니다. 그 점유자의 가장 가식없고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침실, 그것이 최고 권력자의 소유일 때 역사는 어떤 방법으로 거칠거나 유약한 면모를 우리 현대에게 속삭이거나 목청 높여 폭로하고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게 읽어낸 부분이었습니다.

성(性)에 대한 탐구는 제법 여러 군데에서 이뤄지는데, 7장은 아예 제목부터가 "성"입니다. 9장은 (성의) 비정상적 패턴과 자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3장은 (꼭 성적인 것에 한하지 않고 예컨대 수유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지나) 유방, 가슴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과 평가이며, 4장은 우리의 치부 중 가장 은밀한 곳을 감싸는 "속바지" 이야기입니다. 24장은 "월경"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집 자체"와 무슨 상관인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은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하십시오. 에두아르트 푹스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한 저인데도, 이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남다른 덕인지 정말 재미있고 "신선하게" 읽혔습니다. 아마도 "성"을 정면에서 다루기보다, 짐승이 아닌 이상 오픈된 공간에서 성을 향유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방이 벽으로 둘러쳐진 건조물, 그 중에서도 "나의 배타적 공간"이라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욕의 해소를 시도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저자의 안목이 탁월했다는 바로 그 이유가 작용해서 아닐까 생각합니다.

집은 꼭 무슨 욕구를 푸는 공간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고, 활력의 재충전을 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 안에서, 어떤 "자세"를 반드시 취하며 지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 "꼿꼿한 자세"와 "편안한 자세"를 별개의 장으로 설정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거실의 역사>라는 상위 단위로 묶여서 제시됩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부엌의 역사>인데, 익히 예상할 수 있듯 요리 과정과 그  뒤처리에 대한 갖가지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촌극이 거의 다 다뤄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위 "먹방"을 보며 "음식 포르노"라는 극단적 평가를 하기도 하던데, "食"과 "性"이 결코 동일 시간에 양립할 수는 없지만(그런 분이 있을까요?), 동일 공간에서 병존하는 건 거의 당연한 사리라는 점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예전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닙니다. 집은 화석이 아니라, 현재상과 현실태에 대한 생생한 연속체이므로, 이 책은 당연히 20세기의 여러 생활사를 커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부터가 집을 의식(意識)의 확장으로 삼는 묘한 버릇이 있으므로, 집을 모르고 인간을 알 수 없고, 인간을 알면 반드시 그 집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 그리고 "나"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동화를 들려 주듯 가르쳐 준 이 책은, 1회독 후에도 한동안은 제 책상에서 곁에 머물 것 같습니다. 그림과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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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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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Huit Cent Treize>이므로, 우리말로 읽을 때는 "팔백 십 삼"이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팔일삼"이라고 발음하면, 여튼 뭔가 좀 더 내용 누설을 하는 셈이 되겠는데,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고지식하게 십진법대로 읽으면, 진상이 좀 더 감춰지는 느낌도 듭니다. 어차피 독자가 풀 수 없기로는 매한가지고, 르블랑도 이걸 의식했는지 "만약 답을 알고 나면, 세상에 그런 시시한 속임수를 쓰냐며 비난이 폭주할 것"이란 말을, 다른 맥락 속에 슬쩍 끼워 넣는 방법으로 부담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미스테리 작가라면 멋진 암호물 하나 정도는 세상에 척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르블랑은 심혈을 기울여 이 작품을 썼겠으나, 냉정히 말해 이 작품 역시 <기암성>, 혹은 전작 단편들과 마찬가지로 암호 트릭 자체는 볼 것이 없습니다. 익히 보던 "또 그 장치"가 그대로 나옵니다.

 

르블랑의 최대 장기는 역시, 휘몰아치듯 독자를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박진감에 있습니다. 개연성의 부족을 탓할 수는 있으나 우연의 지나친 개입은 그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데, 뤼팽의 존재 자체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이죠. 어려서 제가 읽었을 때도 어렴풋이나마 이야기가 중간에서 한 번 툭 끊어지더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데(약간 무서운 삽화와 함께), 지금 읽어도 르노르망 국장의 안타까운 실종과 그 "뒤처리"는 다소 무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연작을 읽는 독자는 전적으로 뤼팽의 팬이 되어 그가 모는 쾌속의 사두마차에 합승하는 것이므로,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암성> 뿐 아니라 뤼팽 시리즈 중 장편은 거의 모두 (좋게 말해서) 엄청나게 큰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이 작품도, 상테 교도소에 다시 수감된 뤼팽은, 탈옥을 이룰 마땅한 방도가 없어, 거의 공매도 수준의 언플을 세계구급으로 펼치는데, 낚시에 걸려 든 사람은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후예"입니다. "카이사르의 후예"라는 표현에 민감할 건 없습니다. 이로부터 200여년 전, 루이 15세는 합스부르크 가와 역사적인 국혼을 맺으며(이를 "동맹의 반전", 혹은 외교 혁명이라 일컬었죠), "내가 시저의 딸을 며느리로 맞다니.,.."라고 그 감회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황제 칭호를 쓰는 군주에게 으레 베풀어주는 수식어입니다. 민감한 독자는 이 부분을 읽어 가면서 뤼팽이 자꾸 좀처럼 내비치지 않던 긴장감을 내색하며, 기적, 기적을 되뇌는게 무슨 이유인가 궁금해할 만합니다. 뤼팽(르블랑)이 수다스럽기는 해도, 이런 강도 높은 표현을 여태 잘 쓰지 않았기 때문이죠.

 

과거 판본이나 성귀수 선생님 책엔 그 군주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OOO가 그대로 표기되었는데, 이 책에는 그 말을 쓰지 않고 그저 일반명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스포일러라서 이 정도밖에 못 적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독자라면 "그"가 느닷 OO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헉!"하고 몸에 전율이 일어야 합니다(저는 이 서평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소름이 돋네요). 그런데 이런 효과는, OOO라고 원어 그대로를 쓰면 몇 배로 증폭되던데, 그냥 저런 평범한 말을 써서 그게 좀 아쉬웠습니다, 한국어 번역본 대개는 제목을 그저 <813>이라고 하지 않고, "~의 수수께끼" 등등 해서 뒤에 뭘 붙여도 붙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원어대로 그냥 <813>이라고만 하고 마는데, 다른 D출판사 책도 이런 태도입니다.

 

여기서 모 재상의 제자였으며, 등극 후에는 안면을 바꾸고 그 재상을 숙청해 버린 어느 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태도와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말로 살짝 띄워주다가, 문제의 현장에 도착하자 "예의는 다 걷어버리고 아랫사람 막대하듯하는" 본색이 드러났다는 둥 좀 민망한 폄하를 하기도 합니다. 사실 외국의 이 정도 고위 인사(?)를 등장시키는 것도 큰 결례인데(이렇게 막나가는 사람이니 고작 이웃 섬나라의 캐릭터를 두고 개 취급한 정도야 놀랄 것도 없죠), 그 묘사조차 무엄한 구석이 많으니,... 허나 이후의 작품에서 이분에 대고 "일국의 지존치고는 그에 걸맞는 품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같은 막말까지 한 것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이 당시 불-독 양국의 적대감정이 극단에 치달은 걸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면도 있긴 하지만(모로코 인시던트 같은 건 본문에 그대로 언급이 됩니다).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소설은 프랑스의 국무총리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당적이 급진당 운운하는 걸로 보아, 그 무렵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가 그 모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물론 밋밋한 캐릭터라 모델 운운하는 게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만. 뤼팽이 대체 무슨 이유로 개인적 한까지 저리 절절히 품을까 싶은 알사스-로렌 문제에 대해, 이 클레망소가 이로부터 4년 뒤에 발발하고 8년 뒤에 승전으로 마무리된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프랑스측 전권 대표로 참석하여 당당히 재병합을 이뤄낸 점을 생각하면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죠. "급진당"은 당명이 어떤 착각을 부르기 쉽지만, 그렇게 과격한 무리들이 이룬 정파는 아닙니다. 그냥 중도좌파보다 더 색깔이 선명한 팩션 정도로 생각하면 되고, 아직도 이 이름과 법통을 이은 정당이 현존합니다.

 

뤼팽은 여러 장면에서 우스운 대사와 모습을 많이 드러내죠. 2권 마지막에 보면 구멍이 뚫린 배 안에서, 멀리 포위해 오는 경찰들을 향해 "그 사격 솜씨로 어디 나를 맞추겠어?"라며 조롱하다가, 정작 자신은 별 겨냥도 하지 않고 멋지게 명중시켜 버리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경탄과 폭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 장편에서도 루돌프 케셀바흐의 권총에 미리 손을 써 놓고는, "선생의 총에는 아마 공기와 적막이 장전되어 있나 보죠?"라고 그를 놀리는 대사가 너무도 우스웠습니다. "나는 세계의 그 어떤 부자보다 부유하니, 그자의 재산이 이미 내 재산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과연 월드클라스 도둑놈 아니면 칠 수 없는 멋진 허풍이요 개드립입니다. 그 뒤에 이 앞 어구와 병치를 이루는 다른 말도 덧붙이는데, 이 부분에서는 헛소리지 싶었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일종의 복선 노릇을 하는 걸로도 해석이 되어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네요.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 제법 은근한 암시가 (르블랑의 타 작품에 비해) 군데군데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크게 칭찬할 건 못 되고, 그저 다른 작품에 비해선 독자에게 친절한 장난을 좀 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 작품은 범인이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한번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정체가 머리에서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전에 읽은 후의 다시 만남이라 해도, 마치 간격 없는 재독 삼독의 경우처럼, 소설의 복기가 매우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이 있죠. 아마 처음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제법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르노르망이 지하에 고립되어 익사 직전의 위기에 몰릴 무렵, "너무 고통스러워 원인이 뭘까 생각해 봤더니 배가 고팠던 것이었다"는 (과연 노인네 입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를 담은) 문장에선 실소가 폭소로 바뀌었는데, 결국 이것도 일종의 서술 트릭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다른 많은 독자들처럼) 이 <813>을 뤼팽 등장작 중 최고로 꼽습니다. 여기 나오는 주느비에브는 제가 독서 이력 중 처음으로 만난 그 이름의 캐릭터이고, 이 이름이 보통 연상하는 바 그대로 한없이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선량한 여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나나 무스쿠리가 부른 샹송 <pardonne moi>에도 이 여성형 이름 Genevieve가 나오는 걸로 착각했었는데, 가사는 나중에 알고 보니 Je viens 라 하고 있더군요.... 여튼, 처음에 뤼팽이 그 가난한 시인에게 왜 그리 잔혹하게 구나 싶었는데(사실 그런 게으르고 나약한 자는 당해도 싸죠), 알고보니 뤼팽은 OO감을 고르고 있었으니.... 물론 신분 사기극을 벌이기 위한 괴뢰를 찾고 있던 것이긴 하나(이 역시 독자로선 처음에 이해가 안 가죠. 구태여 가짜 상속인을 내세울 필요는 없을 텐데... 허나 뤼팽은 차원이 다른, 국가 규모의 사기를 이미 이때부터 칠 요량이었다는...),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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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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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음모론"이 숨겨진 정의를 대변한다는 믿음도 꽤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리버 스톤이 (당연히 실존 인물인) 짐 개리슨과 협력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배후에 당대 기득권층이 총체적으로 합작,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영화 흥행의 성공은 물론 스톤이란 인물 자신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인문, 사회, 심지어 실정법상 중대한 파장을 미국 전체에 몰고 왔습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스톤 하면 그저 음모론자"라는 편한 범주화, 나아가 주장 제기 전체에 대한 피로감이 더 지배적 반응으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음모론에 대해 부정적인 전제를 깔고, 음모론이 왜 사회에서 지지를 얻는가, 음모론이 어떤 경로로 구체적 실체를 형성하는가, 음모론으로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음모론의 불건강한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가, 음모론이 쉽사리 침투하는 계층이나 유형의 의식 구조는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등의 토픽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원 제목도 <Conspiracy Theories and Other Dangerous Ideas>이지만, 사실 이 책이 취급하는 논의는 "음모론"의 범주를 제법 벗어나,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 국내, 또는 국제정치학적 현상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장은 총괄 서론입니다. 왜 이 책이 쓰여졌는가. 음모론은 왜 사회를 불길하게 감싸고 돌며, 그 무익함과 유해함이 드러난 후에도 왜 사멸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깔끔한 조망과 개설을 펼치고 있습니다. 2장부터 8장까지는 (저자의 판단으로) 소모적 논쟁이라 생각되는 몇 가지 토픽에 대한 중립적 틀 안에서의 메타적 분석(이 역시 저자의 견해일 뿐이고,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이 이뤄지거나, 미국 전체를 양분하며 치열한 논쟁(꼭 소모적이라고 할 수 없는)에 대해, 역시 저자가 마련한 프레임을 통해, 감정과 정치적 이견 다툼이 말끔히 제거된 상태에서 바라본, "사실 겉보기보다 대단히 단순한 구조를 지녔던 뜨거운 감자"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일종의 "토론 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반성과 제안"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진보주의"라고 명명한 일련의 입장에 대해, "그들은 중도파가 아니"라는 출발점에서 여러 각도의 비판을 시도합니다. 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이 반대 팩션으로부터의 공박이라기보다, 논의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메타적 트리밍으로 보입니다(이 역시 그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신이야말로 중도파가 아니다!"는 반발이 나올 수 있습니다). 최소주의와 중간주의에 대한 여러 설명과 정리는, 건전한 시민의식을 지닌 참여자로서 그저 논쟁에서의 승리(나아가, 어떤 숨겨진 정치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공동선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접근 방법과 시야에 대해 저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 바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법학자, 그리고 행동경제학자로서의 이력을 대변하듯, 책은 깔끔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다양한 사회학적, 법학적 개념등을 동원하여 논의를 전개합니다. 저자 고유의 논리만 도구로 쓰이는 책보다는, 이처럼 이미 확립된 타인의 분석틀이나 명제가 (간명하게) 인용되어 핵심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술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법학자들의 저술이나 태도에서 곧잘 보이는 미덕이죠. 법학에서의 주요 방법론 중 하나가 케이스 스터디인데, 이 책 역시 2장부터 8장까지는 논의의 발전적 전개라기보다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대입한 결과를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 토픽과 직접 연관은 그리 깊지 않다고도 여겨질 수 있죠.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자면(이 역시, 저자가 제안한 최소주의 방법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모든 음모론이 다 "음모론"이라는 범주에 묶여 도매금으로 비판받을 것은 아니러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절름발이 인식"이라는 컨셉으로, 개인이 감성적으로 선호하는 어떤 지향에 어긋나는 바가 출현할 때, 인지적 거부의 방식으로 이런 음모론이 생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회에서 음모론이 곧 힘을 잃는 건, 그 음모론이 "다른 상황적 인식의 집합"과 곧 충돌하므로, 인지적 균형을 이루려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곧 버림을 받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어떤 "여타의 인식 집합"이 더 바람직하고 더 열등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랍권에서 "911자작극론"이 더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그 사실 하나만을 놓고, 그들의 인식이 영미권의 그것보다 더 결핍되고 일탈된 성격이라 바로 규정할 수는 업습니다(그럴 가능성이 설사 높긴 하다 해도). 저자의 입장에 아주 충실히 따른다 해도, 이는 역시 미제의 과제로서 겸손하게 확정 진단을 미루는 게 바람직할 뿐입니다. 또, 음모론에 해당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주장들에 대해, 역시 개별적 접근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게 저자의 입장에서조차 일관된 태도입니다. 최소주의로 접근해도, JFK의 죽음 경위에서는 여전히 석연찮은 구석들이, 보편 논리에 입각한 분석을 통해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책은 재미있고, 상식에 입각한 사고 과정에 의해 전개되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의 명료한 스타일 덕분이지는 모르겠으나 번역 역시 막히는 대목 없이 무난하게 읽혀져 나갑니다. 치열하게 정치적 논쟁이 달아오를 때, 그저 내 생각이 무작정 맞는 건데 상대는 왜 나의 말귀를 못 알아먹는가 하고 분통만 터뜨릴 건 아닙니다. 사실 내 주장만 관철하겠다고, 그저 패거리만 모아 파쟁을 벌이는 사람이라면 논쟁에 참여할 자격도, 애국심이나 공동선을 명분으로 내세울 자격도 없습니다. 어떤 입장이나 세계관을 떠나 이 책이 타당성을 가지는 점은, 나 자신을 메타적 시각에서 냉정히 바라볼 기회를 정중하고 지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바로 그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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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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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도 있고, 뤼팽 특유의, 아니 르블랑 고질의 과대망상 쇼비니즘이 병폐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폄하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취학 전 아동 시절부터 뤼팽의 빠도리였고, 지금도 그 단심(丹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단점(短點)에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내가 그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그를 적대자들로부터 요령 있게 효과적으로, 사전에 실드를 쳐 줄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했기에 헤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살갗이 해어지도록 물어뜯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유치원 다니기도 전에 이 <기암성>을 읽었는데요(어린이판이 아니라 성인용 텍스트로 읽었습니다). 활극도 활극이지만 이 소설의 큰 재미는 그 암호문 풀이에 있다는 점 다 동의하실 겁니다. 그런데 유아 입장에서 설사 스토리의 트위스팅에 기막힌 묘미가 있음을 알았다 해도, 우리 한글과는 제자 용자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프랑스어의 암호 풀이에 대해선, 무슨 평가는커녕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커서 프랑스어를 꼭 공부해야지!"란 다짐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했더랬습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적이 없지만, 지금 떠듬떠듬 수준이나마 해독이 가능한 건 이 <기암성>을 읽고 받은 감동이 평생의 내적 동기로 작용한 덕이 큽니다.

 

홈즈는 여기서 극단적인 찌질이로 나오는데요, 충격인 건 명탐정인 그가, 이 활극의 핵심 뼈대인 "암호 해독"에 거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냥 비열한 인질극으로, 중간 과정 일절 생략하고 뤼팽의 목줄기를 매복 상태에서 물고 늘어지는 게 고작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 역시 고수의 수단인가?" 하고 그것도 나름 깊은 의미가 있으려니 여겼는데(심지어, 해협을 건너 온 그가 극이 시작하자마자 뤼팽에 납치되어 무대에 아예 모습을 못 드러내는 것도, <배스커빌 가의 개>에서 그가 극도로 출연을 자제하는 만큼이나 의의가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지금보니 그냥 르블랑이 이 위대한 탐정을 "개" 취급하고 만 거네요. 마치, 어느 여인이 목석 같은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려 들었다가 매몰찬 냉대와 거절을 당하자, "내가 저런 따위를 좋아했었다니!" 하고 격분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おとり人形나 voodoo effigy를 보는 느낌입니다. "죽어! 죽으라고!"

 

사실 이 소설에서 핵심 퀘스트로 향하는 관문인 암호풀이는, 그닥 세련된 구조를 지니지도 못합니다. "뤼팽"이라는 그 이름부터를 르블랑이 따온, 뒤팽의 창조주 포우가 쓴 <황금 벌레>에서 등장하는 솜씨가 훨씬 낫습니다. <춤추는 인형의 비밀>에서 "... 영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철자는 e인데.."로 시작하는 그 멋진 논리는 또 어떻습니까. 냉정히 살피면, 이 소설의 암호는 저런 전례에 대면 암호라고 할 것도 못되는 아주 원시적이고 단순한 구조입니다. 단지 그를 둘러싸고 착각에 빠지는 현대인(20세기인)들의 실수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하긴 고대인, 중세인들(그게 누구인지는 스포일러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이 고안해 낸 "매뉴얼"이라고 하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모순이기도 하죠.

 

서구어들은 공통으로, 좁은 지명에서 시작해서 넓은 단위를 뒤에 붙이는 관습을 갖고 있습니다. "뉴욕 뉴욕"에서 앞의 뉴욕이 도시이며 뒤의 것이 "주(州)" 이름입니다. 한편 프랑스어 등 로망스어 계열(그 중에서도 프랑스어가 특히 심합니다만)은,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는 통사 구조입니다. 따라서 소문자로 쓴 "에기유 크뢰즈 aiguille creuse"는, 불어의 컨벤션에 익숙하면 할수록 "빈 바늘"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creuse는 본디 모습이 creux이며, 이것이 여성명사를 수식하면서 변한 꼴입니다. 이걸 지명 나열로 대뜸 받아들이는 건 오히려 외국인에게 더 그럴 법한 경우의 수입니다. 이지도르 보트를레 정도의 수재라면 이런 역발상에 능할 만도 한데, 현지에 가서야 비로소 감이 왔다는 건 좀 납득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creuse를 단박에 Creuse로 보는 게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요.

 

맹자도 천시보다 더 앞서는 게 지리(地利)라고 했습니다. 르블랑의 그럴싸한 변설을 듣고 보니, "노르망디를 쥔 자가 천하를 쥔다!"는 호언이 새로운 역사 법칙으로 자리나 잡는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걸요? 샤를마뉴, 롤로, 정복왕 윌리엄,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를 이어 최후의 적사(適嗣)로 등장한 게 아르센 뤼팽이라니. 이 소설에서 하나 빼어난 건, 전작들의 여러 배경과 사건을 이 장편에서 각각 연계 고리를 가지게 한번 정리해 주고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소위 설정 충돌이 홈즈 시리즈에 비해 적다는 것도 (아직까지는) 뤼팽 프랜차이즈의 장점인데요. 이는 어디까지나 생부(生父)의 애정면에서 두 작가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rhq<기암성>은 구성상 여러 허술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재미있는 활극입니다. 냉정히 살피지 않으면 과연 그런 구멍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독자를 휘어잡는 스피드와 마력이 엄청나다는 걸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면적이라고 비난은 받지만, 우리는 이 현실감 없는,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매혹적 주인공인 뤼팽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와 사랑에 빠진 여성들은 한결같이 위험에 처하거나.... OOOO지만, 흡사 <사막의 여왕>에서 사내들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를 향해 돌아가듯, 이 가공할 마술사의 재주에 독자는 뻔히 알면서도 혼을 팔고 있습니다. 이는 흔한 "옴므 파탈"과는 달리, 뤼팽이야말로 순정에 살고 의리에 죽는 무구의 영혼을 소유한 캐릭터라서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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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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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도 그렇지만 이 2권 역시, 소설을 읽어나가는 재미란 게 있습니다. 3권 <기암성>에서 "철가면"의 설화가 잠시 언급되는데, 이 철가면을 모티브로 한 문예 중 가장 유명한 건 알렉산드르 뒤마의 작품일 것입니다. 르블랑의 소설은 어느 것이나, 이 뒤마적 전통, 스타일을 충실히 계승한, 독자를 정신없이 몰아가며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본격 문학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교양 수준이 높지 않은 당대 대중들에게 특별한 끌림을 제공하는 강점이지만, 동시에 통속 문학이 결국 맞이하게 되는 "짧은 유효기간"이라는 숙명을 피해갈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권도 그렇지만 이 2권도, 내레이터의 수다스러움이 플롯과 분위기, 나아가 캐릭터까지 압도하는 모습입니다. 뤼팽도 말이 참 많은 편인데, 다만 그는 자신이 내뱉은 거의 모든말을 실천으로 일일이 (극악의 난도임에도 불구하고) 옮길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에, 그가 수다쟁이라는 인상은 우리 독자의 뇌리에 남지 않고 비껴갈 뿐입니다. 주인공인 뤼팽도 말이 많은데, 때로는 작중의 허구인 "나", 때로는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전지의 화자까지 끼어들어 인물의 내면과 사건 전개에 대한 설명을 쉬지 않고 (주관적 감상까지 보태어) 늘어 놓으니, 현대의 세련된 스타일에 익숙한(그리고 뤼팽에 애착을 가질 특별한 이유가 없는) 독자들이라면 그 일부는 짜증스러워할 만도 합니다. 우리가 한 세기 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신파극이나 변사 해설 포맷의 드라마를 도저히 참고 보지 못하는 그 기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요즘은 워낙 이런 낡은 스타일이 드물고(시대에 뒤떨어졌으니 당연), 유행은 돌고돈다고 좀처럼 못보던 게 "고전의 아우라"를 쓰고 (재)등장한데다, 여튼 독자란 스스로를 어떤 허위의식으로 기만하든 속은 그저 원초적 흥미만에 목마른 질 낮은 취향의 소유자인 까닭에, 이런 "구닥다리"도 재미있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우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범속한 독자들이니까요.

 

여튼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재미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전이다!"라는 외경감을 갖고 보면 더 좋습니다. 기왕 속을 작정이라면 즐겁게 속는 게 그나마 더 현명한 선택이겠죠. 해협을 건너와서까지 선풍적 인기를 몰던, 얄미운 섬나라에서 개발된 신 장르물에 침식되어가는 독자들을 보고, 신성한 민족 감정에 의해 바른 길로 그 오염된 정서를 돌려 놓기 위해서라도 이런 "맞불"이 필요하다는 자못 캠페인적 동기에 르블랑이 크게 기울었다는 주장도 물론 유력합니다만, 저는 이 2권의 창작이 그보다는 "팬심"에 의해 더 많은 동력이 주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증거? 바로 이 2권입니다. 르블랑은 이 2권에서 셜록 홈즈(헐록 숌즈)를 참으로 공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숌즈의 추리는 도일 경의 "정전"에서 묘사되는 그 개성 그 엄정함 그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도일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지명 받은 작가들의 스핀오프보다, (소위 안티 홈즈였다는) 르블랑의 재현이 훨씬 더 오리지널에 근사한 모습입니다. 돋보기를 들고 사다리를 놓은 가짜 흔적의 간격을 재는 모습, 불한당과 맞닥뜨릴 때 지체 없이 주먹이 나가는 아마츄어 복서로서의 면모, 친구(왓슨. 혹은 윌슨)의 어리석음, 때로 자신의 조사를 (고의 아니게)훼방하고 오도하기까지하는 아둔함을 보고 죽여버리기라도 할 듯 화를 내는 천재 특유의 자기중심성을 보이다가도, "내 친구의 목숨에 위해가 가해졌다면 너도 바로 죽은 목숨이다!"를 외치며 돌진하는 절대 우정의 표현까지, 도일 경의 정전을 어지간히 철저히 연구한 이가 아니면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홈즈의 캐릭터는 이 2권에서 그저 뤼팽의 장식물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2권에서는 뤼팽이 찌질하게 나옵니다. 홈즈는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뿐인 친구 하나만 동행한 채, 범상치 않은 체력, 의지력과 더 범상치 않은 지성으로, 거의 혈혈단신으로 적수에 맞서고 의뢰받은 사건의 진상까지 풀어내어야 합니다. 반면 뤼팽은? 뤼팽 혹은 홈즈 그 누구의 편에 선 독자라도, 바로 동의하거나 동의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뤼팽은 "조직 폭력단의 두목"이라는 겁니다.  두 천재가 맞붙는데 한쪽은 그냥 맨몸의 개인이고, 한쪽은 중무장한 갱단이라면 이게 게임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뤼팽은 그저 문제를 출제할 뿐이고, 홈즈는 그 문제를 풀면서 동시에 신체에 가해지는 위해까지 일일이 방어해 내어야 합니다. 이런 원초적 불공정 게임은 홈즈가 져도 무승부요, 뤼팽이 이긴다 한들 그건 이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무대는 뤼팽의 홈그라운드인 프랑스가 아닙니까. "이 작자가 도전을 해 왔으니, 세계의 수도(파리를 가리킵니다)로 우리는 해협을 건너 가는 수밖에!"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렇게 영웅적인 면모로 소위 "홈즈, 나아가 영국적인 그 모든 것의 안티"라는 르블랑은, 남이 만들어낸 캐릭터에 가능한 최상의 예우를 가하며 이 2권에서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이 2권의 주인공은 홈즈라고 봐야 하며, 사건의 전개도 철저히 홈즈의 시점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최후의 승자라는 영예까지 그의 몫으로 돌려 주는 건 아닙니다. 철저히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전형적 프랑스인인 르블랑이 그럴 리가 없죠. 이 2권의 1부에서, 홈즈는 남의 나라에서 교란되고 훼손된 정의를 회복시키는 데 그럭저럭 성공적인 결과를 보입니다. 문제는 2부입니다. 수수께끼를 거의 다 풀고, 진범을 (다소의 삐걱거림 끝에) 밝혀 내나, 결국 그 지적이고 기계적이며 이성적인 노력은, 처음부터 안 기울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융통성 없는,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기계적 접근보다, 사태의 본질을 더 정확히 아우를 수 있는 변칙적 접근이 (한 가정의 평화 유지, 한 피용인의 생계 보전 등) 여러 목적을 위해 더 유용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프랑스적 가치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르블랑의 본의였을 텝니다. 처음부터 법질서의 반대편에 선, 불리한 스탠스에서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뤼팽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근원적 정의"를 회복하는 데에 더 실용적인 해결사로 명탐정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애교어린 공존의 제스처일 뿐, 극복이나 능욕 같은 의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는 이 순간만까지만 해도 존경하는 선배를 향해 일종의 재롱을 부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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