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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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칸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인간의 지각과 이성에 대해 대단히 유보적인 정의를 내려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공리에 대해서도, 그 출발점은 "동시대인 사이에서 합의된 선지식"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을 정도죠. 그 이른 시기에조차 "절대 진리"에 대한 섣부른 인정을 이처럼 꺼리고 있는 신중함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가시광선 7색이 섞이고 교차하며 빚어내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에 대해서도, 그저 "인간의 망막과 광선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한계" 안에서의 현상이라는 점을 명확히하고 있습니다. 객관적 실재(만약 그런 게 있다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고, 다만 우리 눈에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 색깔, 모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나서야, 사실주의, 고전주의 이후에 꽃을 핀 그 모든 개성적인 화풍이, 제각기 자기만의 타당성 있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이성적 사유 이전에도, 우리는 마네, 쇠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중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심상을 아득히 먼 이전으로부터 끌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눈에 비치고 우리의 뇌가 해석하는 바 한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사진을 제외한 모든 시각 예술품들은 그저 우리 마음만 산란하게 하는 유해물일 것입니다. 화가들이 그런 파격을행하고도 우리의 환영을 받는 건, 현실 혹은 형이상에 대한 그런 식의 포착이, 지금 우리 망막이 놓치고 있는 어떤 비주얼을 "영혼의 눈"을 통해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이 책 저자인 이소영 대표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그런 쪽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요즘 9호선 연장 때문에 배차간격이 늘어서, 해당 노선 이용하시는 분들은 극한의 불편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건, 그나마 그 시간을 독서 등에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걸 꿈도 못 꾸게 되었으니 실망이 더 크죠.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 마음을 푸근하게 이끌어 주는 그림, 조형은 어떻게 해서건 출근길의 벗이 되어 줄 수 있더군요. 이 책은 요일에 따라 총 7부로 나뉘어 편집되었는데,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해당 페이지를 펼치고 내 눈에 뚜렷하게 이미지를 새겨 놓습니다(마치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 야외에서 재빨리 스케치를 한 후, 기억을 되살려 아뜰리에에서 채색 작업을 하던 이전의 화가들처럼 -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철에 몸을 실으면 눈을 감고(사람이 많으니 손잡이를 잡을 필요도 없고, 때가 되면 인파에 쓸려 저절로 내려지죠), 그 그림의 이미지만 재생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동시에 그 그림 밑에 저자 이 대표가 적어 놓으신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예컨대 "당연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짜증을 가라앉힙니다. 그림을 통해 이 각박한 물리계를 넘어 저 피안의 조형도 떠올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마음 수양도 하니 일석 이조입니다.



이 책은 기계적이지 않은 구성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요일에 따라 7부로 나뉜 각 챕터는, 챕터마다 시대에 따른 유파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그런 책들을 익히 읽은 우리 독자들도 웬만한 지식은 갖추고 있단 말이죠. 이 책은 그런 우리 심리를 미리 꿰뚤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교과서적인 설명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얼핏 보아) 신변잡기나 개인 회상 같은 작가 개인의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해설(이 역시 필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물론 개인 감상이라 해도 전문가의 그것이니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니, 그냥 친구나 아는 분이 옆에서 들려 주는 이야기 같아 공감이 더 빠르게 이뤄지더군요.



설명도 입체감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보통 보면 필치와 기법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나열하거나, 앞 유파, 그리고 이후의 전개와 고립된, 당해 트렌드에 대해서만 자세한 이해를 의도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책은 (때로 느닷없다 싶은) 통시대적 설명이 적시에 끼어드는 게 좋았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처럼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넘나드는 건, 저자가 오랜 세월 이 주제와 밀착한 환경에서 살아올 수 있었기에 이런 정직한 표백이 가능했을 텝니다. 자신만의 아이템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뻔하고 흔한 구호의 나열 끝에, 세상이 자기 부모처럼 제 응석을 안 받아주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싸구려 무족보 페미니즘 타령과 얼기설기 섞은 넋두리와는 크게 구별됩니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인상파와 입체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대에 신고전주의 터치를 고수한, 일종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기 인상주의 파트 뒤에 이 사람 이야기를 뜬금없이 싣고, 또 그의 대표작 몇 점을 같이 실어 독자에게 감상을 권합니다. "나는 그가 좋았고, 이런 그림을 남겨 준 그에게 감사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독자 중 한 사람인 저도 그의 선명하고 깨끗한 화풍이 마음에 들더군요. "스타일을 개창하고 열어 젖힌 사람뿐 아니라, 그를 마무리하고 떠난 이에 대한 기념도 있어야 한다." 사실 고드워드 같은 사람은 "마무리를 했다"고 하기엔, 루벤스 등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죠. 피카소 같은 이도 그런 기법 구사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법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기에 대가가 될 수 있었겠죠. 고드워드 같은 이는 사실 안이하게 자기 세계에만 머물렀지, 거듭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에 그가 동시대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은 건 당연합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잘하는 걸 계속하겠다!"라는 타협과 거짓 없는 그의 정신은 그러나 높이 평가해야 하겠죠. 다만 저는, 고드워드가 작품 제목을 잘 지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시회를 자주 가 보지 않으면, 유명한 화가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감을 잡기 힘듭니다. 전시회란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 중 어떤 피스들을 모았느냐를 통해서도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오너십이 단일하지 않은 그 작품들을 한 장소에 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대가들의 대표작 아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컷 여럿을 싣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소개할 때에도, 사진 중에 번호를 삽입하지 않고(사소하나마 벌써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죠), 매개 인덱스를 거치는 방식을 쓰신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림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저자 이 대표는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겨 온 다른 미디어에서의 체험과 감상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도, 이 책이 입체적 개성을 지니게 하는 비결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서양고전음악, 대중가요, 소설(예를 들어 최근 히트작인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또한 그런 추억을 환기하는 배경으로는 반드시 홍대, 건대앞 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파리 등이 곁들여져, 일종의 공감각 효과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심오한 감상이나 상념이 아니라, "서른을 넘기니 불안하다" 같은, 친근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대부분이라서, 이 책에 실린 그림들과 우리 평범한 독자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이나 업적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 중 일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겠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평범한 대중인 우리 같은, 관객과 청중이 있어야 그 존재 의의도 사는 법입니다. 심각하지도, 고매하지도 않은 채, 그저 팍팍한 일상을 사는 우리 곁에 머물며 작은 위안을 주고, 다시 일선의 경제활동으로 복귀한 우리들에게 재생산의 활력을 부여하는 그런 그림들이야말로, 예술을 넘어 영원의 가치에 기여하는 그런 불멸의 존재로 남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각의 창조와 해석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절대로 아니겠습니다. 정직한 인생과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고유의 해석권이 주어지는, 완벽한 민주주의의 장이 바로 그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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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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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 상이라고 하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에게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 상 중 문학 부문에서 이뤄지는 영예를 입은 사람이라면, 그 기쁨과 긍지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부럽지 않을 정도죠. 이 귀하고 존엄한 상을,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에 처녀 소설집으로  받아낸 줌파 람피리는, 미국 문단의 기린아로 부상(浮上)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다작을 하는 편이 아니며, 이 책으로 문단에 데뷔한 지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권의 단편 모음과 두 권의 장편 소설을 펴 내며 알찬 비블리오그래피를 일궈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초장의 상쾌한 출발이 도리어 "루키의 저주"가 되었다 할 만큼 이후의 성장에 부담, 멍에로 작용하는 수도 있지만, 그녀는 두 번째 단편집 <Unaccustomed Earth> 역시 대성공을 거둬 그해 미국 문단에서 선정하는 주요 상 다수를 휩쓸었습니다. 이게 이 첫 단편 <축복받은 집>이 나온 후 9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제 오십을 바라 보는 그녀로선 중견 작가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다졌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두 단편집과 두 장편소설은 한국어로도 모두 번역되어 이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펴낸 에디션으로 판매되고 있는데요. 두 번째 단편집 <Unaccustomed Earth>은 한국어판 제목이 "그저 좋은 사람"으로 붙어 있습니다. 두번째 단편집도 이 책처럼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다만 차이라면 1부와 2 부로 나뉘어 각각 5편과 4편의 작품을 나누어 싣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저 좋은 사람"은 1부의 네번째 작품이며, 원서의 표제작 "길들지 않은 땅"은 1부의 첫 작품이자 책 전체의 서두를 장식하는 단편입니다.



 


출판사의 방침이라 할 만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인지, 이 책 역시 원서는 "질병 통역사"가 표제작이었던 것을 This Blessed House(축복받은 집)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단편 소설의 완성도만 놓고 봤을 때는 "질병 통역사"가 풍자의 맛, 톡 쏘는 구성의 충격을 안겨서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편집 전체 분위기를 대표로 묻어내는 역량은 "축복받은 집"이 더 빼어나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컬렉션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별 구성품을 하나의 코드, 맥락으로 꿰어 내어야만 하는 건 아니고, 이 책도 그렇듯 서로 발표시기를 달리한 채 간격을 두고 나온 작품들이 어떤 공통점을 또렷이 가지길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어느 작가도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작품집을 이루는 개개 단편들이 표제작의 컬러 아래 어떤 연관을 지닌 듯 보이는 건 작가 라히리 여사의 개인적 사연이나 인종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소재들의 특성에서 연유했을 뿐 아닐까, 그러면서도 이분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그 많은 심상과 주제의식이라는 게, 어느 작가의 경우나 마찬가지이듯 작가의 아이덴티티와 떼어 놓고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이 컬렉션 하나만을 두고 선명한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그리 억지스럽지 않겠다고 여겼습니다.

1. 일시적인 문제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학생 신분"에 머물러야 하는 두 대학원생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혹은 이미 어엿한 사회적 기반을 잡은 또래들로부터, 어딘가 마뜩지 않은 시선을 받을 소지가 있다는 강박관념에 적잖이 시달리는 모습입니다. 만족스러운 논문이 지지부진인 상황과 대칭적으로, 이들 부부는 아이를 수월히 가지지를 못합니다. 논문도 난산이고, 2세를 물리적으로 빚는 일도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결벽적이다 싶게 순수히 유지하는 부부입니다. 그들의 행복과 성취를 방해하는 요소는 사실 간단치도 않고, 그들의 주변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만성적 인자에 가깝기 때문에, 밖에서 보나 안에서 판단하나 그들의 장래는 큰 희망을 품기 어려운 부류라 하겠습니다.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건 물론 일시적인 문제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불은 다시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하루이틀 거주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열악한 주거가 끼치는 지속적인 손해라면, 그것은 이미 "일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쇼바와 슈쿠마 두 학생 부부가 겪는 모든 문제, 불편한 상황은, 일시적 문제들의 구조적 지속이란 속성을 지니기에, 단속적으로 아픈 현실을 깨닫는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를 "이국 땅에서 유학생, 소수 인종 출신이 겪는 비애"까지로 확장시키느냐 아니냐는 개별 독자의 몫이겠습니다.

2.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


 

작품에 어떤 에쓰닉한 요소를 집어 넣는 것과, 모종의 역사의식을 주제화하여 강조하는 건 서로 구별됩니다. 인도인, 그 중에서도 뱅골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특유의 고민을 소설 안에 한 장치로서 꾸려넣는 건 이 작품집 전체에 공통된 점이지만, 이 두번째 단편에서는 "이제 어떤 뱅골인은, 뱅골인일 뿐 인도인이 아니다."는 언명을, 작중 인물의 말을 통해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 책에 수록된 아홉 편 중 가장 뚜렷한 역사의식이라 할 만한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심지어,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캄캄하게 모르고 있으니, 요즘 학교에선 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가!"라며 개탄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아내는 "요즘 아이들은 역사 외에도 배울 게 많아요."라며 분위기를 달래려 들지만, 사실 아버지의 저 말은 현실감을 잠시나마 잊은 판단입니다. 이곳은 그들이 이민 온 미국이며, 그들의 아이들이 미국 시민권자라면 미국 역사를 우선적으로 배울 테고, 미국 역사를 배우기도 버거운 아이들이 (비록 그들의 고국일망정) 지구 반대편(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이죠. 이 책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의 작은 나라(문제의 방글라데시는 인구 대국이지만 국토는 아주 작습니다)의 최근 사정을 알 수 있을리가 없죠. 더군다나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감안하면 이는 역사라기보다 시사 사항이기도 합니다.

이제 인도인이 아닌, 방글라데시 사람으로서 정찬("식사"보다는 원어의 의미에 맞게 "정찬"으로 옮겨야, 손님을 환대한다는 분위기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을 함께하는 피르자다 씨, 이분은 아이들에게 매우 자상한 분입니다. 아이들 부모가 "그렇게 잘해주시면 아이들 버릇이 나빠집니다."라고 하자, "저는 버릇이 결코 안 나빠질 아이들만 골라 버릇을 나쁘게 하는 걸요."라고 대답합니다. 얼마나 온화한 신사입니까. 국적이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었다가, 30여년 만에 다시 어디로 또 바뀌는 사정은,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고 같은 근원이라는 동질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남아시아인들의 살가운 소통에 있어 어떤 장애가 되질 않습니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역사의 아픈 곡절을, 현지 출신다운 명쾌한 비유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인도에서 떨어져 나간 일은, 마치 캘리포니아와 코네티컷이 합중국에서 분리독립하는 형국과 비슷하다는 설명이 그 하나입니다. 인더스 강 유역의 드넓은 평야는 사실 인도 역사에 있어 중핵을 이루던 정치적, 경제적 본간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파키스탄"이란 이름으로 갈라졌으니, 인도 역사는 문명 발생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큰 상처를 입은 셈이죠. 그 파키스탄에서 다시 분리된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은 서부 인더스 강 유역보다는 늦게 정착이 이뤄진 곳인데, 마치 미국에서 동부와 서부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듯, 갠지스(강게스) 강 유역 사람들도 서쪽의 지배자들에게 뿌리 깊은 이질감과 대항의식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광동인들이 흔히 자신들을 중국인이라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광동인"이라고 자칭하듯, 이 뱅골인들도 독자적 자긍심과 정체성이 무지 강해서 "인도인"이란 말을 잘 입에 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이 점을, 뱅골인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작가 줌파 라히리 여사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터입니다. 하물며 종교의 분계를 기준으로 이미 다른 국적으로 갈라져 있던 "방글라데시인"이야 더 말할 게 없겠습니다(그 나라 옆에는 인도의 한 주를 이루는 "웨스트뱅골"이 따로 있으며, 이 지역의 거주자는 힌두교인이 다수입니다).

또 하나는, 동파키스탄으로 아직 남아있던 시절, 서파키스탄 군대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현지의 독립 추진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한 사실입니다. 이 소설 처음에는 "군인들이 교사들을 끌고 가 처형하고, 여인들은 잡아다 강간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미- 파키스탄 진영과, 소련- 인도- 방글라데시 진영이 대립한 사실은 알아도, 그 과정에서 그런 비극이 발생한 줄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3. 질병 통역사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꿈을 크게, 아름답게 간직하고 꾸기도 합니다만, 성장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혀 상처를 입다, 마침내 상황의 제약과 타협을 이루게 마련입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주인공도 그런 사람입니다. 아니 어디서든 누구의 인생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도는 인종이 아니라 언어를 권계면으로 해서 주와 지역의 경계가 나뉘는 나라입니다. 그는 실제로 인도의 각 토착어를 고루 구사할 수 있어서, 자신에게 어학적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라서는 다양한 유럽계의 언어들까지 습득하여 외교관으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TV로 외국 컨텐츠를 즐기는 자신의 아이들보다 외국어 능력이 더 뒤떨어짐을 자인합니다.

그나마 교육 받은 인도인이라면 어느 정도 구사가 가능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주말에는 관광 가이드라는 부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된 생업은 "병원에서 의사를 보조하는 일"인데, 구자라트어를 할 줄 모르는 의사를 위해 이를 통역해 주는 일입니다. 구자라트는 고대로부터 페르시아와 잦은 교역을 이뤄 온 지역이며, 인도의 다른 지방과는 사뭇 구별되는 풍토로 경제적 번영을 누려 온 곳입니다. 간디도 이곳 출신이고, 이곳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지닌 자이나 교 신자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구자라트 인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따라서 경제적 전망이 좋다는 암시도 됩니다. 하필 소설에서 구자라트를 배경으로 삼은 건 이런 내역이 있습니다. 여기는 안 나오지만 구자라트에는 자이나 교 신도 공동체 말고도 파르시인들의 커뮤니티가 따로 있는데, 이들 역시 경제력이 막강한 인도 내 소수파들로 유명합니다. 에이즈로 죽은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도 이쪽 혈통이죠.


자신이 언제나 꿈꾸던 신분이나 생활, 그 비슷한 레벨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다스 씨 부부를 맞아, 그 주말에 주인공은 가이드를 맡게 됩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사내애가 유난히 피부가 흽니다(나중에 나오지만 다스 부인이 저지른 뷸륜, 부정의 징표입니다). 체구가 자그마하나 중산층 부인 특유의 세련미와 고혹적 분위기를 풍기는 다스 부인을 두고, 주인공은 남모를 연정 비슷한 것에 빠져 듭니다. 이런 착각에 기반한 짝사랑이 흔히 밟는 패턴이 그렇듯, 그는 여인 역시 자신에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무럭무럭 키워 나갑니다. 찍은 사진들을 자신에게 보내려면 항공 우편으로 육 주 정도가 소요되겠지만, 그 정도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미 아내가 있고 -그녀는 병원 통역사라는 남편의 직업을 존중하지 않은 채 그저 "보조"로 부릅니다 - 나이도 지긋한 그이지만, 현실 감각 떨어지는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즐거운 성적 판타지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다가, 잘 짜여진 단편의 주인공들이 흔히 맞는 운명처럼 드라마틱한 파탄으로 마무리됩니다. 마지막에서 "주소를 적은 쪽지"가 바람에 날아가는" 줄 자신만 알고 있었다고 처리한 건, 그나마 남은 자존을 지킬 줄 아는 주인공의 안간힘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우편을 받아 보려고 그 사실을 부인 혹은 다른 가족에게 알려주거나, 혹은 부인이 일부러 버리는 구성이었다면, 주인공의 알량한 위신은 어디서도 챙길 수 없었을 텝니다).

압권이다 싶었던 건, "결국 정직이 최상이다" 싶어 나름 직언을 해 줬는데. 다스 부인은 어이없어 하며, 반박을 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그를 무시해버리는 장면이었습니다. 부인의 심리야 우리 독자가 알아서 해석하게 내버려 둬도 되었을 텐데, 주인공(아니, 전지적 작가)은 그 정확한 상황 묘사를 일일이 독자에게 전달하기까지 합니다. 연인으로 내심 간주한 상대 여인이, 자신을 그저 아버지뻘 되는 익명의 휴지통으로, 제 마음만 편하고자 임의대로 취급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평소 아내에게 무시받고 살던 상처를 보상 받으려 했던 이 중년 남성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마치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에서처럼, 신랄한 해학과 골계미가 풍기는 소설이었습니다.

4. 진짜 경비원


durwan 은 그저 힌디어라기보다, 거의 영어 코르푸스에 깊숙히 들어온 외래어이기도 합니다. 이 durwan은 그저 "수위"라거나, "경비원"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예전에 왜 저기 식모, 입주 가정교사 등이 존중받는 직종이 아니라 남의 집 하인 비슷한 존재였듯, 이 durwan 역시 갈데 없는 처지의 하층민이 남의 집에 입주해 살면서, 방세 지불 대신 방호의 업무를 대신해 주는 개념입니다. 이걸 수위, 경비원 등으로 옮기면 의미가 안 살아나는데, 그 이유를 지금부터 적어 보겠습니다.

"부리 마"라는 이름을 지닌 할머니는 이 공동주택의 durwan입니다. 남들에게 천시받는 처지지만 그녀는 대단한 자존심과 입담으로 이웃들에게 가끔 경이감을 선사하는데, 듣는 이들은 이 노파를 일종의 구연 광대 취급하고 있습니다. 노파가 떠드는 사연을 믿지 않으려 드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지요. 사람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을 두고서도, 미미한 근거를 들어 자신이 낫다고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물며, 만약 현재의 처지가 자신만 못한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은 과거에도 역시 자신보다 나은 적이 없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이들이 지닌 뇌 용량은, 서로 모순되는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역량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과거에건 현재에건 어떤 타인이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은, 그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당사자의 머리에 과부하를 주고, 감정상의 반감을 유발합니다. 일개 durwan인 노파에게 뭐하러 그런 수고를 들여서 내 뇌를 피곤하게 만들겠습니까? 그들은 현재 우월자로 섬기고 있는 그 누군가(직장상사, 지주 등)의 허풍과 거짓에 대해 일일이 순종하며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일만으로도 바쁘고 지칩니다.

여기서 "애정남" 캐릭터 한 분이 등장하시는데, 바로 차터지란 이름의 노인입니다. 그는 묘한 말로 상황을 정리하는데, 일단 "부리마의 입은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며 모두의 "감정"을 존중합니다(우리말에서 "입"과 "부리"가 묘하게 의미연속체상에 놓인 단어라서, 이 말이 한국어번역판 한정으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물론 여기서 "부리"는 힌디어일 뿐이므로 제가 한 말은 그저 농담입니다만). 그러나 부리마의 구체적 진술에 담긴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고, 부리마 노파가 지금 이 공동주텍에서 행하는 유용한 기능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녀도 시대 변화의 피해자"라는 모호한 말로 비호를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실용적 모호성은 결말에 가서 잔인한 효과 하나를 발휘합니다. 말은 역시 애매하게 내뱉어야 나중에 책임질 일이 안 생기나 봅니다.

부리 마 역시, 나이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불에서 자꾸 진드기들이 나와 자기 등을 갉아먹는다면서 끊임 없이 이불을 털어내는데, 열악한 주거 환경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실상은 그저 등에 땀띠가 난 것뿐입니다. 만약 진드기의 잘못이라면, 이건 그녀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정입니다. 그러나 그게 낡은 이불의 잘못이라면, 이불을 교체할 수 없는 경제형편이란 그녀가 좌우할 수 없는 상황 변수입니다. 부리마 노파 역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나쁜 습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들을 탓할 것도 없습니다. 이웃들이나 부리 마 자신이나 다 낡은 과거의 잔재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공동주택에 살던 이들은 현대화의 바람에 힘입어(인도판 새마을 운동?) 세면대 등 가구 집기를 교체하며 들뜬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해당 사항 없는 가구는 혼자 사는 빈민인 부리 마 노파 뿐입니다. 공사를 위해 인부들이 무시로 드나들자, 낯선 사람을 차단하고 계단을 청소해야 하는 durwan으로서의 임무는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그녀는 하릴없이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이때 불운하게도 평생 모은 돈을 보관한 전대와 열쇠꾸러미를 소매치기당합니다. 늙은 분의 재산을 가로채다니 도둑 중에서도 참으로 나쁜 도둑인데, 이 도둑의 정체에 대해서는 소설이 끝나도록 전혀 단서가 안 주어집니다.

노파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 와 보니, 입주한 사람들이 전부 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난리입니다. 사람들은 부리 마 노파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데, 일단 durwan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했다고 매도하며, 한 술 더 떠 "직접 훔치지는 않았어도 도둑에게 정보를 주었다"며 범죄의 혐의까지 씌웁니다. 우리 독자는 바로 앞에서 부리 마 역시 소매치기의 피해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동정과 연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소설에는 끝까지 한 마디 암시도 없지만, 우리 독자는 도둑의 정체가 아마 집에 드나들면서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 부리 마 노파가 전대에 평생 모은 돈을 보관한다는 사실까지 - 어느 공사 인부의 소행임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부리 마가 책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여 선동을 시작한 이 중에 도둑이 있었을 텝니다. 그저, 소설 속으로 들어가 정의의 주먹을 날릴 수 없는 게 분하기만 한 게 우리 독자고요.


"먹고 살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었어?"

여기서 냉혈한처럼 보이는 애정남 할배가 다시 나옵니다. "부리 마의 입은 거짓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건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 새로운 사실은, 이 건물의 표정이 바뀌고 있다는 거고, 이 건물에 진짜 경비원이 필요하단 거야."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진짜 식모, 진짜 머슴, 뭐 이런 말을 쓰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최신식 쥐덫"이란 말이 웃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과거의 잔해에는, "진짜"니 "첨단"이니 하는 엘리베이션이 필요 없는 겁니다. 그것들은, 저 위에서 차터지 노인이 말한 대로, "시대 변화의 희생양"으로서, 그저 새로 등장한 대체물에 의해 쓸려 나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durwan이란 초라한 말 앞에 "진짜"가 붙는다는 자체가 웃기는 거죠. 우리는 1990년대 초에 법제를 정비하여, 부동산 중개업을 허가제로 바꾸었습니다. "복덕방"은 그래서 동네의 할 일 없는 노인들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법률 지식 최소한을 머리 속에서 부릴 줄 아는 준(準) 전문직으로 대체되어 멀리멀리 시대의 저편으로 쓸려나갔습니다. 공인중개사면 공인중개사지, 그걸 두고 "진짜 복덕방", "첨단 복덕방"이라고 부르나요? 이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런 시대의 변화에 떠밀려 사회의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선 약자들이 겪는 설움과, 과거의 때를 벗어내려는 인간들의 무정함, 이기심, 뭐 이런 쪽입니다.


5. 섹시


이 단편은 그저 흔하디흔한 불륜 이야기를 다룬 게 아닙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性의 실체,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인간 관계의 한 단면을 냉엄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이, 하나하나가 다 수학적 증명과 같은 클래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시에 던져지는 재담이나, 삶의 이면 그 진실을 짚어내는 날카로운 표현, 대사가 일품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죠(예를 들면 위 작품 "진짜 경비원"에서, 낡은 이불이 요쿠르트처럼 되었다는 표현이라든가). 평론가들의 화려한 언사가 주는 권위에 주눅이 들어, 그들이 기계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근거가 부족한 언명에까지 일일이 동의를 보내는 독자가 과연 얼마나 진실성, 정직함을 갖춘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이 스토킹까지 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여기서 제 머리를 강타했던 한 마디는, 엄마뻘인 미란다에게 꼬마 로힌이 던진 말입니다. "아줌마는 참 섹시한 것 같아요." "넌 섹시하단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고 그러니?" "섹시하다는 건,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꼬마 로힌이 자기 나름으로 내린 "섹시함의 정의"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바로 섹시함의 뜻"라는 이 명제의 전제에는, "사랑은 아는 사람끼리만 해야 하는 것"이란 요구가 먼저 깔려 있습니다. 사랑이란, 아는 사람끼리만 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선 사랑이 이뤄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 모르는 사람끼리의 금지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섹시"라는, 순수하기도 하고 고루하기도 한 정의가 바로 이 꼬마가 수행한 작업입니다.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예전에 남녀가 교류를 트기 위해서는 양가 부모 등 어른들의 분위기 조성이나,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가 있어야 그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합"이 아닌 건전한 남녀 사이의 교제였습니다. 인도도 우리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겠으나, 꼬마 로힌이 꺼낸 건 그 정도로 제한된 함의는 아닐 것입니다. 이 꼬마의 말은 "사전에 정신적 교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육체적으로 첫눈에 반해 끌리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면, 먼저 그 사람의 정신, 개성, 영혼의 컬러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몸으로 먼저 번지는 충동과 애정이, 혹시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섹시'라는 게 이 꼬마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섹시'는, 사악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데비가 미랜다(미란다)에게 하는 말, "당신의 이름 일부에는 인도식 요소를 갖고 있네요."라 말은, 아무 타당성이 없는 헛소리입니다. "미라"는 인도에서, "미란다(이 한국어판은 구태여 "미랜다"라고 발음대로 옮겨서 소양 없는 일부 독자를 헷갈리게 합니다. 안 그러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는 영미에서, 각각 여자 이름으로 흔해 빠진 아이템들입니다. 미란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그리고 얼마나 영어권에서 오래된 전통을 가진 이름인데 - 당장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의 딸 이름이 미란다 아닙니까? "오, 얼마나 멋진 신세계인가!를 외치는 그 처녀), 이름이 미란다라고 해서 그 사람의 정체성 일부가 인도스럽게 된다는 건가요? 소설을 잘 읽어 보면,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진 데비가, 미란다에게 작업을 용이하게 걸기 위한 일종의 친근감 수작으로 해석하는 게 무난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미라니 미란다니 하는 이름은, 바로 뒤의 단편 "센 아주머니네 집"에서 나오는 "센"만큼이나 흔하고 흔한 이름입니다.

중국의 장씨 처녀: 자기 이름에는 중국인의 정체성 일부가 들어 있네?
한국의 이씨 총각: 설마? 우리 만옥이 또 뻥치시네. 훗.
장: 이씨는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거든. 몰랐지 명박아? 오늘부터 자기는 절반은 중국 사람이야, 알겠지?
이: ............ ?????


꼬마 로힌의 킬링 라인이 비록 나오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구석도 참 많더군요. 미란다는 자기 이름을 힌디 글자(데바나가리)로 쓰며, 글씨가 서툴러서 "미라"인지 "마라"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데바나가리의 필기 구조를 알면 나올 수가 없는 말입니다.




"마"는 이것이고

मि
"미"는 이것입니다. "마"라는 글자 머리 위에서부터 왼쪽으로 내려오며 꼬리를 덧댄게 "미"입니다. 따라서, "모", "무", "마아" 같은 것과 헷갈릴 수는 있어도, 아무 것도 안 붙인 "마"와 헷갈릴 수는 없는 게 "미"입니다. 헷갈릴 수가 없는 걸 헷갈린다고 하는 건, "악마"라는 의미의 '마라"와 억지로 연결을 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이걸 영어로 쓰면 독자들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으나, 힌디 권 사람들이 읽으면 피식 실소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미란다는 초딩일까요?

아까 그 이씨 총각: 내 이름은 잘못 쓰거나 발음하면 "면박"이 된다. 남에게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주는 걸 면박이라고 한다. 내 이름에 나의 숙명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었단 말인가?

누가 이런 말을 하면 그게 재미있고 재치있거나 심오하게 보일까요? 한국인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6. 센 아주머니의 집


이 단편은 기묘한 슬픔을 자아냅니다. 센 아주머니란 분은 베이비 시터 구직란에 오른 이름인데, 소개엔 "교수의 부인임. 책임감이 강함"이란 코멘트가 있습니다. 교수의 부인이 뭐하러 이런 허드렛일을 해야 할까요? 수학, 공학 교육 열기가 드높은 인도에서, 자기 분야에 두드러진 재능을 발휘하여 이곳 미국에서 교수 자리까지 얻었지만, 아직 평판을 굳히고 넉넉한 보수를 받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이런 수고까지 해야 하는 형편인데, 여기에도 유색인종, 아시아 에쓰닉 아이덴티티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쓸쓸한 처지가 묻어나는 설정입니다.

아이 엘리엇을 센 부인이 돌보기보다, 여러 모로 서투르고 영어도 잘 못하는 센 부인을 엘리엇이 챙겨줘야 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엘리엇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서 보모가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럿을 바꿔가며 계속 베이비시터를 두는 이유는 그저 그 부모가 이 점에서 있어서만 좀 유난스럽기 때문입니다. 베이비시터는 엘리엇네 집으로 출퇴근을 하는 게 정상인데, 이 센 부인이 운전을 못하다 보니(여기서 배경이 드러나죠. 차 없이는 어딜 갈 수가 없는), 엘리엇이 하교 후 센 부인 집으로 가야 합니다.

센 부인은 정말 본인이 "베이비시터"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외로움도 많이 타는 성격인데, 전화번호부에 이름인 "센"인 사람은 자기네밖에 없다며 씁쓸해합니다. 자신의 고향에 가면 발에 채는 게 "센"인데 말이죠.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키운 토양을 그리워하고, 넉넉하게 살았건 어느 카스트에 속헸건 저를 낳아준 땅의 공기와 풍광을 몽매간에도 못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그녀가 기어이 교통사고를 내 베이비시팅은커녕 돌보는 아이와 자신에게 큰 피해를 줄 뻔한 건 그야말로 신의 가호라 하겠습니다. 이런 골칫덩어리 마누라가 있으니, 센 교수는 남의 나라에서 출세하기 글렀군요.



7. 축복받은 집


이 단편도, 미국에 와서 한번 신세 펴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데, 두 군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어느 젊은 이민자 전문직 남성의 사연입니다. 하나는 갓 결혼한 자신의 아내가, 순수하고 귀엽긴 하지만, 어딘가 칠칠맞고 살림도 못 하는 데서 연유한 불안감과 불만족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자기 문제인데, 남자 자신은 미처 못 깨닫고 있지만, 힌디적 정체성에 과하게 집착하며 무의식 중에 확고히 간직한, 미국 기독교 백인 문화에 대한 반감입니다. 이 두 요소가, 거침 없이 뻗어나갈 것만 같은 자기 장래에 깔린 프릭티브 팩터라고 하겠습니다.

원제는 정관사 the 도 아니고, 지시형용사 this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이 축복받은 집" 정도의 의미인데, 여기서 this는 다소 대상과 거리를 두며 냉소적 감정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한국말로도 어느 정도 그 느낌이 전달됩니다). 저렇게 그저 "축복받은 집이라고만 하면, 막연히 따스하고 은혜롭고 해피하고... 이런 심상만 떠오르는데, 소설을 읽은 이들은 알겠지만 이 내용이 그런 내용이 아니죠.

새로 장만한 집은, 젊은 나이에 회사 중역직을 맡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깔끔하고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돈도 많고, 이민자들이 언제나 중시하는 "고향의 배경"도 잘 갖춘 사람입니다. 이민 와서 새로 잡은 기반만 버젓해선 안 됩니다. 자기가 고향에 두고 온 커넥션도 좋아야 그게 조건 완성이 됩니다. 사실 그는 마음대로 신붓감을 골라잡을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카스트도 좋고, 돈도 많고, 매력도 적절하며, 야심과 비전도 있습니다. 이런 처지인데도 그는 평소처럼 주도면밀하고 치사한 계산을 하지 않은 채, 순전히 느낌에만 이끌려 아내를 골랐습니다. 결혼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사업인데도 말입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는 가치 있는 기독교 미술품이 자꾸 발견됩니다. 아내는 그것들이 너무 예뻐서 잘 간직하자고 하나, 남편은 이런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비록 현실의 요구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 일은 하고 있지만, 혼이나 정신에까지 이교의 요소가 들어오는 건 질색이라, 그는 이 정신사나운 건 눈에서 얼른 치웠으면 할 뿐입니다. 아내는 마룻바닥에 흠이 안 생기게 한다거나, 가구를 잘 관리하는 일(이런 것들은 이 집의 부동산 가치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합니다)은 못하면서, 좀 갖다 버려야 할 건 반대로 집착을 보입니다. 자신과는 가치 지향이 정반대로 꼬인 셈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며칠 뒤에 "아차"라는 후회가 갑자기 드는 예가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셈이죠.

이제 직장 동료들을 불러 집들이를 해야 합니다만, 주인공은 자꾸 준비에 엇박자를 부르는 아내가 밉기만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일 파티가 열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내가 자연스럽게 중 심에 서서 모든 이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 파티를 완전 살게 만드는데, 반대로 이것저것 정치적 기술적 배려를 해 온 자신은 오히려 곁다리로 밀리네요. 결과는 만족스러워지지만, 뭔가 남편 자신의 통제 방향, 기대와는 어긋난 느낌이라 이걸 좋아해야 할지는 망설여지는 기분입니다. 이 와중에 웬수 같았던 기독교 미술품은 자연스럽게 "보물 찾기" 게임을 유발하여, 주인공은 새 집에서 맞게 되는 이 "내키지 않는 축복"에 대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8. 비비 할다르의 치료


 


마지막 두 작품은 사뭇 대조되는 분위기입니다.


비비 할다르는 자꾸만 어디가 아픈 노처녀인데, 돌팔이 토착 의사들은 갖가지 엉터리 모순된 처방을 내놓아 노처녀와 가족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킵니다. 저 위 "진짜 경비원"처럼 인도만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고 편견과 인습에 가득찬 모습이라,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저러다 자신과 주위에 큰 피해를 주지나 않을지 보기에 아슬아슬하기만 합니다. 순수함이란, 그것이 무지와 몽매를 요람으로 할 경우, 아무 미덕도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다시 일깨우기도 합니다. 비비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 하나를 출산하고서야, 그 정체 불명의 증상들이 말끔히 나았는데, 병이 치료되었다는 안도에 그 주변 사람들은 여인의 과거를 묻는 번거로움을 애써 회피합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그들이 선택한 현명한 태도였습니다.



 

9, 그리고 대단원


 

"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이 문구 자체로서 갖는 의미는 plain 할 뿐입니다. 아시아에서 나고, 유럽을 거쳐, 이제 아메리카에 제 자리를 잡은 아버지의 사연입니다. 이 마지막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와, 그 함의한 메시지는 너무도 뻔해서, 앞의 여덟 작품으로부터 잘 소화되지 않고 남은 잔유물만 그러모은, 잉여 구색맞춤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처음에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 보면, 이 작품에는 한 세기를 살아 오며 미 대륙의 현대사를 지켜 봐 온 아이 위트니스, 크로포트 부인이 나와 "나"와 진정어린 소통을 이룹니다.

노부인은 아주 고루하게, 과거의 미풍과 관습에 집착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기 또래와 후손 백인들이 얼마나 자주, 많이, 지켜야 할 가치와 미덕을 저버리고 배신했는지도 한 세기에 걸쳐 지켜 봐 온 사람입니다. 하버드와 MIT 출신이 아니면 하숙을 안 받는다는 그녀(대신 하숙비는 쌉니다)는 인도에서 건너 온 피부가 검은 젊은이를 찬찬히 본 후, "이런 신사가 또 없군!"이라며 recognition을 행합니다. 동족에게도 잘 해주지 않는 이런 인정은, 이 노인에게는 매우 드문 파격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육 개월 정도 머물렀을 뿐이지만, 과묵한 노부인과의 담백한 교감이 있었기에, 마치 육 년은 머문 듯한 착각이 다 듭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딸과 이 하숙집을 다시 찾고 나서 "내가 그렇게도 싼 하숙비를 내고, 그렇게도 짧은 동안만 이곳에 머물렀다는 말인가?"라며 놀라움과 추억에 흠씬 젖습니다. 노부인은 자신의 친자식보다 주인공 부부(나중에     비자를 받아 인도의 아내도 미국에 부르는데, 이때엔 여성을 들일 수 없다는 계약의 조건이 있어 이 하숙집을 나가야 했습니다)를 더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노부인은 첫만남(이자 마지막 대면)에서 그 아내를 두고도 "이런 숙녀가 또 없군!"으로 acknowledgement를 합니다.



 


 

여기서 작가는, 인종 차별이다 뭐다 해도 그 체제를 지탱하는 근저에 도도히 흐르는 공정함, 휴머니티, 정의를 사랑하고 배덕을 경멸하는 미국 사회의 펀더멘털에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크로포트 부인 같은 이가 있고, 그런 작은 배려를  감시히 여겨 잊지 않는 이민자들이 있었기에, 자신 같은 빼어난 작가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었겠고 말이죠. 이게 바로 큰 지붕을 함께 이고 살아 온, 미국이라는 거대한 축복 받은 집이요. 자(自)와 타(他) 사이에 발병의 징후를 보이는 malady를 통역, 전파 하지 않고 차단, 중화하는 합중국의 저력이자 희망이 아닐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의 피력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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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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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아니 유아, 청소년기부터 거의 한 시기도 빼놓지 않고, 엘리트, 정상의 위치만 골라 디뎌 온 인생이 우리 나라애 그리 흔할까요?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해도, 대중의 시선 한복판에 자리하며 전 국민의 선망과 애정이 되기까지 한 경우는, 드물다기보다 아예 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도 이 방송인 백지연씨의 이름은 알 정도니, 한국에서 이분이 얼마나 희귀한 인생을 가꿔 온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사신 분이니만치, 한때나마 어처구니없는 비방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사필귀정이라고 그 모든 소동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질 무렵, 뉴스를 통해 이분이 얼마나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인맥"이라고 하니까 무척 타산적이고 속물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단어 같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의 인맥이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정(情), 그리고 가식 없는 교분을 나눈 "1차 집단"성 지인들을 말합니다. 사회 나와서 쌓은 인맥은, 결정적일 경우 사이가 틀어지는 게 빈번합니다. 혹은 요즘 말로 "갑을권력관계"가 선명해서, 인맥이라기보다 일방통행성 소통에 가까워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문 학교만 거친 백지연씨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출신과 레벨의 인사들을, 오랜 세월 살가운 친구들로 두고 교류하다 보니, 사회 생활의 기반이 누구보다도 탄탄하겠다는 추측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물론 소설입니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무슨 작품이라도 그러하듯이, 허구로 꾸며진 세계라도 자신의 체험과 그 과정에서 얻어진 절실한 생각이, 그 구조와 내용 안에 물씬 묻어나는 법입니다. 백지연씨처럼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지냄 없이, 치열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아 온 분이라면, 그 과정에서 마주쳤을 만한 사람들도 다 자신 못지 않은 순도 높고 성취 가득한 인생들이었을 텝니다. 이분이 처음으로 장편 소설- 방송인들이 자주 시도하는 에세이 집필이 아니라 창작 소설 - 을 펴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주문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아마 자신의 삶 궤적 하나하나와 비교, 대조해서 공감하거나 혹은 선을 긋거나 하는 재미가 있겠습니다만, 남자인 저는 저 위에 적은, 그런 면들에 주안을 두고 솜솜 뜯어 읽어 보는 맛이 있더군요. 제 주위에도, 학생 시절 잘나가다가 최근에 좌절한 친구, 학창 시절 내내 문제아로 찍혀 죽을 쑤다가 성년을 넘기고 의외의 대박을 친 친구, 성적이나 교우 관계나 모두 별볼일 없었지만 여튼 아버지 사업 물려 받아 한량 행세 하는 친구, 초등학교 때 천재 소리 들었으나 부모님과 크게 싸운 후 대학 진학에도 실패한 이래 과연 어떻게 풀렸을지 궁금해지는 친구.. 뭐 다양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때 그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뭐하면서 지낼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절실한 감흥으로 와 닿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꼭 백지연씨 같은 유명인의 그것이 아니라 해도, 누구의 사연이건 제 나름의 답안이건 간에, 재미있고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제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던 이분의 창작 - 다시 말하지만, 어느 창작이라도 순수 픽션은 없습니다 - 이라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마치 19금 소설을 읽을 때처럼 살짝 떨리기도 하더군요(물론 이 책에 그런 점잖지 못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다 읽어 갈 무렵에는(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창 밖에 발그스레하게 동이 터 왔고, 알게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허무함, 해탈이 가득 담긴 미소를 만면에 머금는 그 장면을 본 후처럼...

 

극중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서서, 내러티브를 취합하고 그에 대해 해석을 가하며 지면 밖을 향해 전달하는 이는 백민수입니다. 이름에 무관하게(혹은 깊은 관련을 맺고?), 이 인물은 작가 백지연씨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봐야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교(여고) 졸업 후 지속적으로 만나 온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O 헨리의 <20년 후>처럼, 기억의 한편에 선명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단지 직접 접촉만은 단절되어 왔던 그런 관계더군요. 조금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편 하나에다 6인의 이야기를 쏟아내듯 풀어 놓으려면 이처럼 "어느 날 그녀들을 갑자기 만났더니..." 같은 구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도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후 인생이 어떻게 풀렸건, 다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백지연씨 세대 여성들은, 자신 아닌 다른 변수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면이 크다는 사실,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힘이 센 진리가 아닌가.. 새삼 확인하게 되더군요. 물론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소설(물론 소설이긴 합니다만)에서도, "제 발등을 찍었다"며 큰 아쉬움을 토로하긴 하지만, 결국 별 유감 없이 후련한 인생을 사는 인물은, 어려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는 승미 아니겠습니까?

 

미묘하게나마 저는, 인터뷰어 백민수가 "수경의 실패"에 대해 다소 안도를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가장 찬란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마땅했던" 그녀가, 저처럼 외화내빈의 피곤한 여정을 끌고 가는 모습이, "난 차라리 괜찮구나."하는 이기적 위안을 제공해 주는 좋은 소재나 아닌지.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인 <물구나무>에도, 제재적으로 가장 잘 부합하는 케이스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는 확실히,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이의 좌절로부터 가장 만족스러운 쾌감을 얻는 속물들이 아닌지.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기에 공감이 되는 공범의 회고담이었다고나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이나 다른이들의 삶이나, 어쩌면 물리적으로 거꾸로 서기 전부터 이미 시선을 뒤집은 채로 지켜 보거나, 훔쳐 보거나, 혹은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한다는 듯 내 욕구를 투사하여 왜곡해 보거나... 그렇게 꿈을 품고, 혹은 욕구와 희원을 덧칠한 대로, 세상의 만화경은 어느 새 그대로의 현실이 되어 이처럼 기묘한 풍속도를 그려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 더 살아 봐야 그 깊은 묘미를 알 수 있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지금의 모습, 추세가 그의 미래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너무나 뻔하고 통속적이어서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끝에 가면 이만큼이나마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불공평해서 공평하고, 속살을 들춰 보면 누구나 고르게 아픔을 나눠 갖는 것, 이 법칙은 누구의 인생에 있어서도 비껴 가지 않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철칙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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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 하는 진짜 리더십 공부 - 사람도 성과도 놓치지 않는 스마트한 팀장 리더십
박봉수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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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단계를 넘어 관리직 초입에 이르면, 나의 능력을 계발하고 다듬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바로 아랫사람들 도닥여 주는 스킬과 요령입니다. 책임이라는 게 그래서 무서운 거고, 사람의 자질을 평가함에 있어서 지식이나 능력보다 더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하는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현장에서 다양한 체험과 인사관리를 맡아 오신, 업무와 조직 경영의 달인이라 할 박봉수 원장님의 저서입니다. 보기 참 편하게 편집되어 있습니다. 일을 해 본 적 없는 분들에게는 "아 역시 다 좋은 말씀이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실제 사람들을 독려하고 윗분 비위 챙겨가면서, 납기와 품질은 그것대로 다 준수, 달성해야 하는 피를 말리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겪어 본 분들한테는, 요즘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지난 시절 유행어처럼 "피가되고 살이되는" 교훈으로 가슴에 와 팍팍 꽂힙니다.




사실 이 책은 내용 중 버릴 게 없는 책입니다. 260여쪽 분량의 얇은 책인데, 이 책에 나온 내용도 도그마, 지짐으로 삼고 소화하지 못한다면 사실 팀장급 이상 관리직으로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개별 근무 환경에 맞춰 이에 더해 몇 가지 현장에 특화된 요령을 더 알아야 최고위직까지, 아니면 임원에까지 승진할 수 있을 테고요. 이 책에 나온 내용은 기본적으로 몸에 배게 하고, 하루에 두 챕터씩 읽고 외우고 마음에 가슴에 새겨야 할 줄 압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박봉수 원장님께서 다양한 기업을 두루 거치고 현재 본인의 컨설팅사 대표까지 지내시는 분이라, 한국 도처에서 각개 약진 중인 그 무수한 기업 환경의 최대공약수라 할 만한 것들만 잘도 추려 주신 것 같습니다.

저의 눈에 일단 먼저 들어 온 가르침은, "일 못하는 사람에게라도 일단 일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긴 대한민국의 노동관계기본법이 무분별한 해고를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실용적인 조언이긴 합니다만(게다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팀장이, 행여 더 고참 사원에게 모질게라도 하면 좋은 평판이 퍼질 리가 없기도 하고요), 박 원장님은 (제 추측으로) 아마 인적 자원(HR)의 효율적인 관리, 운용 차원에서 이 원칙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회사가 그를 적정하게 평가해서 입사시킨 사원인데, 이를 홀대하면 결국 스스로의 안목과 가치 지향을 부정하는 결과도 되니 말입니다.



박 원장님은 여기서 노자의 가르침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물 흐르는 것과 같아서 무리와 압박 등의 수단이 끼어들면 반드시 그 전체가 어그러지게 되어 있다." 자계서의 요즘 첨단 흐름으로서, 중국 고전에의 전거 의존이 이 책에서도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 말 참 공허하게 들리시죠? 제가 중학교 때 기술가정 선생님(담임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타지에서 오신 분인데 아주 근성과 카리스마가 강한 분이었습니다. 신입생 전체 조회 때 갑자기 제 뺨을 꼬집으며 "너 공부 잘혀?" 라고 물으셔서 깜짝 놀랐죠. 이런 분들은 서류 이런 걸 안 봐도 역시 동물적 육감이 남다르신... )이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촌X들은 낡은 차가 부왕! 하는 소리를 내며 뒤에 먼지를 자욱히 일게 하고 달리면, 우와 힘 좋다고 감탄하는데, 그거 다 차 배기통이 낡은 X차서 그런 거여!"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웃겨서 혼났는데, 이 책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할리데이비슨이 그 주행 시 소음이 지독해서 소비자들에게 평판이 일시적으로 나빠졌는데, 이를 해당 제조사는 오히려 홍보의 기회로 삼았다는 거죠. "남성적 주력과 외관을 느껴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역으로 이게 크게 어필해서, 젊은이들에게 그 이상과 활력의 영원한 우상, 상징으로 남았다는 게 업계의 전설입니다. 다만 한국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이래서는 큰일나겠구요. 대림씨티 시리즈가 안정성과 저소음, 내구성으로 시장을 꽉 잡고 있습니다.



태도가 좋아야 한다고 어디서나 강조합니다. 박주영도 아스날 구단주에게 "의외로 태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재능보다 때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태도라는 자질입니다. 의지, 열정, 성품, 도전의 4요소를 이 책에서는 "태도"의 자질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기로는 "성품= 태도"로 알기 쉬운데요. 사실 성격만 좋았지 매사에 무사안일인 직원도 회사 입장에서는 참으로 달갑지 않은 존재입니다. 의지, 열정도 다 갖추었는데 새 분야에 도전을 안 하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입니다. 태도란 이처럼 4요소가 복합적으로 갖춰진 후에야 인재의 자질로 바르게 기능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직설적인 말보다, 은근 돌려 말하는 우회어법이 널리 쓰입니다. 일류 조직 아니라 최근에는 사적인 동창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고위직이나 CEO들은 본인 위신도 있기 때문에 바로 본심이 드러나는 언급을 삼가는 편입니다. 이때 이분들이 쓰는 은유, 메타포어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조언입니다. 은유로 말하는 단계에서 진의를 빨리 캐치해야 하며, 이 단계를 넘어 버리면 사태 수습이 곤란하다는 겁니다. 대개 듣는 이에게 유리한 언사는 은유를 굳이 통하지 않습니다. 상급자가 은유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긴장해야 하더라는 게 제 경험입니다.



훈계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사람도 모이고 모이면 세력이 되고, 그 이전에 이미 마음을 다친 하급자는 결국 나에게 부담의 부메랑이 어떤 모습으로건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하급자가 열의를 잃거나 상심하고, 혹은 적의나 원한을 가지면 나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죠. 당장 쫓아낼 사람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도 기를 살려 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게 올바른 경영이고, 직장 생활의 준칙이라는 점을, 이 깔끔한 책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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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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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가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사실 그가 쓴 글은, 특별한 기회(이 "특별하다"는 말도 그의 기준에서 평가한 말입니다만)에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글들이 특별합니다. 어려서 저는 그의 명작 <장미의 이름>, 그리고 (너무도 어려웠지만) <푸코의 추(초판 제목은 이러했고, 저는 아직도 제가 읽은 첫 판본이라 이 이름이 더 친숙합니다)> 등을 읽었고, 앞으로 성인이 되어 독서를 하고 머리 속에 무엇을 정리하고 가꿔 나가야 할지에 대해 기본 프레임을 정하는 계기로 삼았더랬습니다. 그 후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같은 책을 읽고, 저렇게 똑똑하고 박식한 분도, 그 때문에 짊어져야 할 업보, 숙명 같은 것이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졌더랬습니다.

 

총 14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역시 에코 교수는, 자기 책에 달린 부제 한 문구에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어, "특별한 기회에 쓴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간단하게나마 서언에서 해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글들은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어떤 과장이나 미화 같은 의도를 담았다기보다는, 정말로 특별한 투고 요청, 강연, 혹은 주목할 만한 사건 발발에 즈음하여 집필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정이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부담을 지니고 있었는지, "집필 계기가 특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내용까지 창의적("특별"이란 형용사는 피하고 있습니다)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행여 독자나 팬이 쏟을 과도한 기대를 완화하거나, 자신의 부담을 좀 덜려는 "귀여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의 그답게, 책임 회피라든가, 혹은 대가로서 편안하게 루틴, 매너리즘에 젖은 채 비블리오그래피의 길이만 늘이고 인세수입만 늘리려는 마음은 전혀 먹지 않고 있다는 듯, 자신의 새 글들이 실린 이 책에 대해 "(최소한) 독자가 읽기에 즐거운 글들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에는 변함이 없을 테고, 자신은 그러한 (가상의) 요청에 충실한 글을 썼노라 자부한다는 선언을 온건하게 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선, 각 글들이 어떤 동기, 어떤 환경에서 집필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회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책 읽으시려는 분들은 요 파트를 꼼꼼히 읽어 보셔야, 본문의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에코의 책을 읽다가 언제나 중도 포기하시는 분들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배려(독자로서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가의 책을 읽을 때만은,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읽는 것이지 쇼 프로그램을 즐기듯 편안하게 뭘 먹으며 소파에서 즐길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가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나 에코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지, 이미 서언에서 작가 본인이 충분히 힌트를 준 바에 따라 읽어 나가는 게 정석이며, 또 유일한 해독(?) 방법입니다.

 

첫번째 실린 글 <적을 만들다>에서, 에코는 다양한 인용문을 들고 있습니다. 하긴 뭐 언제는 이분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런 재미로 우리는 그의 책을 읽어 나가는 거죠. 혹시 이런 게 지겹다 싶으신 분들은, 자신의 태도를 재고하지 않으시면, 에코 책 읽기는 지속적인 고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본디 이 방대한 문헌의 세계에서 보물 찾기를 하며 "혼자 노는" 사람이며, 이런 데에 공감 못 하는 분들은 처음부터 그의 책을 읽을 이유가 없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에겐 이 세계를 무대로 한, 또 시간의 총체를 배경으로 한 책읽기와 기호 분석이 삶의 유일한 소명이요 존재 이유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에 공감을 못하면 우리 역시 자신의 시간을 더 생산적인 다른 작업에 바쳐야 현명한 태도이겠습니다.

 

그의 인용문을 읽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분들도, 과연 이런 지식을 머리 속에 새로 정리해가며 읽어야 하는지(다시 말해 어느 정도의 암기가 수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에코가 말미에 덧붙이는 코멘트만 소화해 가도 충분한지 갈등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봅니다. 에코의 초심자는 전자의 수고를 하려 들어도, 처음부터 그게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에코 급의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야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책(소설 포함)을 읽다 보면, 그가 인용하는 저자와 문헌에 대해 자연스럽게 흥미가 붙습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지 않으면, 괜한 거리감과 권태감만 첫 단계에서부터 몸에 밸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성문종합영어> 등에서 "Beauty is only skin deep." 같은 말을 접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고 지나칩니다. 어떤 이는 <성문종합영어> 옆 페이지 쯤에 나오는 "용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None but the brave deserve the fair)."와 착각을 일으켜서, 이 말의 출처가 드라이덴인 줄 잘못 아는 수도 있습니다. 이 책 27페이지를 보십시오. 에코는 "10세기에 살았던 클리뉘 수도원장 오도"라는 분이 이 말을 언급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클리뉘 수도원이야 당연히 알아도, 오도 수도원장이란 이름은 태어나서 저는 처음 들어 봅니다. 에코가 이 책에서 "최초"라는 평가나 단정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우리는 저 말의 이제 전거나 출전을 논할 때 이 어카운트를 거론해도 큰 실책은 아니지 않을까 하며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변이나 타인의 땀 같은 체엑이 내 몸에 묻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쳐 한다. 그런데 여자란, 아름다운 피부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이 온통 그런 것들이다." 사실 우리는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군 제대한 예비역 선배들한테 그 비슷한 말을 듣곤 합니다. "여자의 배를 갈라 보면(의대생 등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남자보다 훨씬 많은 지방과  노폐물로 가득차 있다. 여성의 몸은 그저 겉으로만 아름다울 뿐이며, 사실은 남자보다 성분, 체형, 구조면에서 훨씬 추한 존재이다." 하긴 이런 인식이 근래 확산되어 여성들도 몸매 관리, 특히 체지방 관리를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제게 이런 말을 해 준 선배 본인은, 어쩌다 캠퍼스를 지나칠 때마다, 혹은 시내 번화가에서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여성을 곁에 두고 있더군요. 여성분들은 하여튼 말만 번지르르 잘하는 남자한테 절대 솔깃하면 안 됩니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남자한테는 자기 신조와 정반대되는 감언이설을 퍼뜨리는 게 이런 분들이고, 오늘 나한테 잘해주고 내일은 다른 여성에게 더 잘해주는 게 이런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 위의 오고 수도원장 같은 분은 그렇지 않고, 진심과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렇죠, 아름다운 "거죽" 밑에 숨겨진 실체를 상상하면, 마음에서 육욕이 끓어오르더라도 한순간에 스러지고 마는 효과를 내는 게 저 말입니다. 에코는 이 글을 최근에 썼으나,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읽고 머리 속에 정리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장미의 이름>에도 그 비슷한 말이, 윌리엄 수도사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드소가, 마을에서 도둑질하러 온 가무잡잡한 피부의 다람쥐 같은 소녀와 마주치면서, 그녀의
"젊고, 미남이시군요."
한 마디에 넘어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할 열락과 환희의 하룻밤을 겪은 후, 이를 통회하는(아드소는 평생 순결을 서원한 수도사이니까요) 그에게 해 주는 말이 이겁니다.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그 추함, 그 비루함, 그 부조리함, 그 덧없음에 대해, 내가 지금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지금 네 나이에 알 수 있는 지혜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해 주면서 老윌리엄 수도사 역시 평소의 침착을 잃고 어조가 떨리는 품입니다. 서평을 쓰면서 저 역시 타자를 치는 손이 흥분되기도 하네요.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는, 혹시 <전날의 섬>을 읽으며 많은 피로를 느끼셨을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에코의 독자들 중, "왜 이분은 지난 시절의, 이미 극복된 과학 기술에 대해 이렇게 천착, 혹은 집착할까?"하며 불만을 가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학 기술(심지어 경제학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은, 아웃오브데이트 된 것은 이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코는, 본연의 영역을 넘어선 이 경계에 대해 대단히 고집스럽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고 정확하게 연구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흥겨운 분위기로 들려주는 일을 즐기죠(흥겹고 즐거운 건 물론 화자인 그고, 듣는 우리는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인문이란 당대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과 이해 없이는 반쪽짜리의 불구입니다. 둘째, 설령 자연과학의 첨단을 이해하는 순간에도, 그의 지난 과거 이력을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는, 이미 그것은 천박한 암기이거나(공대생들은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이런 길을 밟는 수가 많죠. 예컨대 수학 정리의 증명은 사치입니다. 그냥 외워야 합니다! ㅜㅜ), 부정확한 타협인 수가 많습니다. 어느 교수님 말마따나 "모르면 모르는 거고 알면 아는 거지 그 중간은 없"는 법이니까요.

 

에코는 비판적 성향의 지식인입니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실린 <위키리스크에 관한 고찰>은 누구나 안 읽어 볼 수 없는 중요한 문헌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특히 마지막의 이 아티클을 통해, 에코가 진정 과거에 매몰된 화석이나 고립된 천재가 아닌, 우리 모두와 소통하며 친교를 즐기는 고마운 동시대인임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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