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메이드
아이린 크로닌 지음, 김성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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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일린 크로닌은 작품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여성  현직 작가입니다. 그러나 전 미국에 그녀의 이름을 알린 건 바로 이 자전적 에세이, <머메이드>입니다. 한 다리가 불구인 채 태어났고, 다른 한 다리는 유아기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부러졌습니다. 손가락 역시 온전치 못한 합지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는 의사의 조치로 간신히 바른 모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임산부가 회임기간 중 "탈리도마이드"란 약품을 복용했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으로, 1960년대 초 기형아의 대거 출산으로 엄청난 사회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습니다. 다만 아일린의 어머니 조이 크로닌(조이 팽어)은 이 사실(자신이 해당 약품을 섭취)을 부정하는데, 책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진위가 드러나진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인지부조화를 보이는 것일 수 있고, 조이 크로닌 여사는 여러 이유로 중년에 조울증 증상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으니 진술을 다 믿을 건 못 되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여튼 "태어나고 보니 내 몸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랐다"는 충격적 깨달음은, 어린 생명이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을 이루는 데에 얼마나 큰 방해가 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아일린 크로닌은 이 책에서 10대 초반~ 대학생 시절까지의 청춘기를 회상,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어느어느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 정도는, 작가나 특별한 정신적 능력이 없더라도 대개는 기억하고 삽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그런 이벤트, 사건, 추억, 악몽 속에 깃든 자신의 "그 당시 느낌"을, 생생하고 창의적인 언어로 적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내가 중학생 때 학업 최우수상을 탔다, 친구와 대판 싸웠다, 선생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같은 건, 언제나 느낌과 함께 기억이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동생, 언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반응이나 소통에 무슨 감정이 느껴졌다, 혹은 12살경 친구들과 동네에서 무슨 놀이를 했고 그때의 느낌이 어떠했다 같은 건, 당시 본인이 적은 "그림일기" 따위를 찾아보지 않고선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사건은 기억해도, 그에 접착된 "당시의 느낌"은 웬만해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사전 정보 없이 읽어나갈 때, 다리가 불구이지만 "현재" 그 역경을 딛고 발랄하게, 다른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어린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미셀러니처럼 착각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마가 1960년대에 초에 자신을 낳았다든가, 신시내티 레즈의 조 넉스홀(책에는 "눅스홀"로 적혀 있더군요)이 활약했다든가 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저자분이 지금은 나이를 꽤 드셨겠구나 하는 추측은 곧 할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는 정말 10대 소녀의 조잘거림처럼, 제법 두꺼운 책 분량 내내 경쾌하게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화자가 생의 어느 순간에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확증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체 장애를 생각하면 즐거운 기분도 한순간에 꺼질 수 있을 텐데(어린 소녀임을 감안하면 더욱), 아일린은 때론 자신의 곤경을 농담의 소재로도 삼고, 마치 어른들이 집 밖에 나왔다가 지갑을 잃은 것처럼 일시적인 난처함을 현실로 인정한 후 대책을 찾는 태연함과 침착함을 가지듯, 자신의 장애에 대해 대체로 "쿨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성이 이 정도 의연함을 보이는 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사정은, "어려서부터 죽 익숙해 왔다"는 사정으로 정서적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변수가 결코 아니겠기 때문이죠.

 

아일린 크로닌은 범상치 않은 가문에서 나고 자란 여성입니다. "나의 출생, 나의 존재는 한때 우리 집안에서 입에 올리는 게 금기였다"는 문장에서 다소는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가정은 제법 부(富)와 명성을 지역에서 누리는 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조부가 자수성가로 큰 재산을 일군 인사이고, 아버지 역시 괜찮은 수완을 발휘하여 명사로서 행세하는 쪽입니다. 한편 어머니 조이 팽어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집 출신이며, 친부(즉 아일린의 외할아버지)가 알콜 중독과 도박 등의 습벽으로 가출(조이 팽어의 회고에 따르면 "축출")한, 결손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녀(조이 팽어)의 성격이 정상이 아닌 건 유전적 요소보다 이같은 후천적 환경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책에는 아일린 크로닌의 부모가 "독일계, 아일랜드계"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크로닌(아일랜드계)+팽어(독일계)"라는 건지, 아니면 양친 모두 "저먼 아이리쉬"라는 건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 전체 맥락으로 봐서는 후자인 것 같은데요.

 

조이 팽어 여사가 딸 아일린 앞에서 "너의 외할머니는 교황이 인정한 성자(성녀)란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저 주관적으로 그렇게 평가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이다 부르헬 팽어라는 이름은 가톨릭 성인 명단에서 제가 못 찾았기 때문에, 이는 그저 본인의 주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대단히 아름답기는 하나(솜털 하나도 내가 본받아야 할 혈통의 증거였다, 라는 말까지 딸 입에서 나옵니다), 성격이 정상이 안 되었던 어머니 때문에, 이 대가족은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물론 조울증을 빼면 조이는 착하고 다정하며 순진한 편에 속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참고로 아일린의 양친은 아일린 외에도 슬하에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둘 정도로 금슬이 좋은 사이로 나옵니다. 1960년대라고는 하나 미국에서 이는 대단히 드문 풍경입니다.

 

아일린과 언니들은 나이 차가 제법 나서,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이미 언니 브리짓은 결혼도 했습니다. 보통 같은 민족끼리 맺어지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을 텐데, 브리짓은 무려(아일린의 표현입니다), 무려, 이탈리아인 남성과 결혼합니다. 책에는 "언니는 점점 다이앤 키튼을 닮아가고 있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해당 배우가 영화 <대부>에서 앵글로색슨 혈통으로 마피아 가문의 며느리가 된 케이 역을 맡은 걸 두고 꺼낸 비유입니다. 왜 하필 다이앤 키튼인지는 이런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일린 자신도 첫사랑을 무려 쿠바계 백인인 제임스 카브레라와 어설프게나마 시도합니다. 장애인의 육체적 욕망이 어떻게 외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이 책 13장의 그 소동 묘사가 잘 보여줍니다. 이런 대목이 이 책의 가장 뚜렷한 매력인 "가감없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정신적 첫사랑은 프랭크 오빠라고 볼 수 있는데, 작품 후반에 나오듯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말죠. 그녀를 "인어(머메이드)"라고 처음 언급하는 장면에서, 아일린은 "아, 그 탐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에서처럼?"이라고 대꾸하는데,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대릴 해너 주연의 그 영화입니다. 1960년대 초반 생이니 그녀가 대학생 때 개봉한 영화가 거론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좀 더 나가면 바버라 부시도 이름이 나오는데, 사적인 성장 스토리만 말하는 것 같지만 이처럼 세심하게 그 시대의 특징적 코드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또래들과 구체적인 시대를 호흡하며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은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출판사 책이 대부분 그렇듯 장정이 예쁘고 읽기가 참 편합니다. 역주가 많아서 아일린 크로닌 본인의 개성과 어조가 그대로 살아나는(의역이 최소화한) 체제가 돋보입니다. 의욕이 안 생기고 정신적 슬럼프다 싶을 때 읽어 보면 좋은 자극이 되겠습니다. 한 번에 읽는 것보다 하루에 한 챕터씩 마치면서, 작가가 사실 이 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 보는 것도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 스타일은 현재 트렌드를 대표할 만큼 감각적이고 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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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자 2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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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의 지도에 잘 나온 것처럼, 이 소설은 중국 남단 복건성에서 유구(류큐, 오늘날의 일본 영토 오키나와입니다)를 거쳐 조와(자와 혹은 자바)를 지나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 제일란트(책에는 "젤란트"라고 표기됩니다)까지 흘러들어가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양 회화 낭만주의 사조의 대표적 거장이었던 루벤스의  어느 그림에까지 모델로 등장한 걸로 여겨지는 "조선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존 인물은 아니고 작가님의 기발한 상상이 치밀한 연구와 기획에 의해 장편 소설로 옮겨진 중에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지도와 연표, 그리고 소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은 이 2권의 부록으로 실려 있으니, 1권만 보신 분들은 1권 내용의 충분한 감상과 이해를 위해서라도 이 2권까지 같이 구해서 읽으셔야겠습니다.

"조선 남자"는 이 소설(특히 이 2권) 속에서 자신의 본향을 딛고 누비는 모습은 거의 없고, 원양의 거친 물결을 헤쳐 가는 배 위에서의 활약, 그리고 네덜란드 젤란트에서의 눈부신 족적과..... 비장하다 못해 참담한 운명을 맞이하는 행보만 독자에게 보여 줍니다. 이국에서야 현지인들이 당연히 그를 "조선 남자"라고 부르겠지만, 설사 조선 땅 안에서라 한들 그 누구도 그가 전형적인 "조선 남자"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성에게 다정하고, 같은 민족, 동포가 부당한 처우를 입으면 내 일처럼 나서서 한풀이를 해 줘야 직성이 풀리고, (이게 중요한데요) 흑인이건 미개한 남방인이건 약자가 강자에게 잔혹한 대접을 받으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비분강개 열혈지사입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도 다 이렇지 않습니까?(아닐까요...) 주인공 "조선 남자"는 그래서 루벤스의 그림 속에 생소한 변칙 복식을 하고 있는 이유에서만 조선 남자가 아니라,. 개성과 용모, 정신적 지향,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조선 선비"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란 이유에서 "조선 남자"입니다. 생김새도 준수하고 태도에 기품이 있을 뿐 아니라, 의로운 정신으로 세상사를 다루는 인격이 누구 눈에도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국 땅에서 만나는 여성들마다 이 "조선 남자"에게 반하고, 그에게 정조를 아끼지 않으며,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해로하길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1권의 유구 여성 고미가 그러했고, 2권에서는 다나가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의탁하여 도움을 받는 것 외에도 그에게 남성으로 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젤란트의 어느 노부인은 그의 손을 잡으며 "젊은이, 내 아들이 인도에 있는데 조선과는 거리가 먼가?"라며 묻는 장면도 나옵니다. 워낙 질 나쁜 악다구니들이 많이 나와서 그렇지, 품격 있는 평균적 시민들에게였다면 이 서양 땅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다만 우리의 "조선 남자"는 너무도 힘이 없습니다. 육체적 완력은 "양귀"나 "흑귀"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익힌 해동의 무예에 통달한 그이기에, 덩치 크고 힘깨나 쓰는 자들이 설사 흉기까지 들고 덤벼도 퍽퍽 나가떨어집니다. 지옥과도 같은 세계 일주길에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는 장부입니다. 문제는, 이 주인공이 너무 정보가 부족하고, 개인 차원에서의 의협심만 갖고 서양에서 "무구의 본(총기류나 화포의 도면, 시방서를 말합니다)"을 가져 오겠답시고 아무 권한 위임도 못 받은 채 조국을 뜬 터라, 바다 위, 혹은 정박 항구에서 어느 천한 불한당들에게 개죽음을 해도 따질 곳 하나 없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너무 잘 믿고, 자신이 선하니 남도 내 맘만 같을 줄 압니다. 이런 주인공이 만약 통쾌한 미션 완수를 해 내는 결말이라면 그게 오히려 개연성 부족이었을 겁니다.

특히 이 2권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야심가 "카피탄(그냥 캡틴의 와전입니다)", 신흥 부호들에게 기득권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공작, 이익을 추구한다기보다 배신 그 자체를 즐기는 악종 중 악종인 경리관, 구세주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보다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표출하는 데에 온 정력을 다 바치다시피하는 늙은 목사 등의 속고 속이는 음모와 모략이 주축인 전개라서, 주인공이 "조선 남자"라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들이 주인공으로서 존재감이 드러나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게임 속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처럼, 패악질 자체가 존재의 목적인 양 이를 갈고 날을 세우는 비인격체만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2권은, 사람이 아니라 "지옥"이 주인공을 겸하는 배경 요소입니다. 조와(자바), 젤란트, 넓고 넓은 공해,.. 어디 가릴 것도 없이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고 기뻐 날뛰는 모든 곳이 다 지옥입니다.  이런 지옥에서 주인공 혼자 공맹의 도(道)와 조선 고유의 풍류 정신을 실천하는 선인(善人)이니 무슨 재주로 제 의지를 관철하며 목숨인들 부지하겠습니까.



어쩌면, 넓은 세상에 만연한 악(惡)과 만행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자기들끼리 예를 갖추고 염치를 지키며 안온하게 살던 우리 겨레가, 외방과 교류를 트고 못된 재주는 충분히 배우고 익혀 이웃의 허술한 태세를 용케도 알아차리고 탐욕을 채우려 쳐들어온 왜놈들에게 짓밟힌 건 역사의 필연이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약(弱)한 것이야말로 악(惡)한 것이다, 약하면 제 아내와 노부모, 어린 자식도 지키지 못하고 몹쓸 욕을 보는 꼴을 지켜 봐야 한다... 조선 남자는 외방을 떠돌며 비로소 그가 고이 배우고 지켜 온 유림의 도가 현실에서 아무 쓸모 없다는 걸 깨달았을 터입니다. 설사 그가 제 소임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한들, 1권에서 "뱃놈"이 조소한 대로, 허락도 없이 밖을 다니다 왔으니 손에 뭘 쥐고 있건 그 자체로 죽은 목숨일 지도 모릅니다. 시스템이 이 모양인데 개인이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2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실 다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슬픈 장면밖에 없어서 말하기가좀 그렇지만, 첫째 동생 자라가, 조선 남자는 물론이고 두 누나와 자신의 정체성까지 재판관 앞에서 모조리 부정하는 장면입니다. 누나인 다나는 그가 어린 동생이니까 "저것이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럴까"하고 다 이해를 하지만, 읽는 독자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존엄까지 팽개친 그 적나라한 몸부림에 그저 전율할 뿐입니다. "조선 남자"가 등가죽이 벗겨지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선고도 소름끼치는데, 자라는 "등뼈가 드러나도록 태형을 당하게 하라"는 판결을 받는 대목에선 정말.... 두번째로는 젤란트로 오는 도중에서, 노예선의 혹사를 당하는 흑인들의 참상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눈 한쪽에 구더기가 끓는 소년의 넋나간 모습... 이런 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자라가 아마 그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한 거겠죠. 세번째로는 혼령으로 바다 위를 떠도는 OOO이, 자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다나의 모습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장면입니다.



트로이에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는 객관적으로 성공적인 귀향을 할 가망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트로이의 원혼들이 끈질기게 그의 운명에 저주를 내린 탓인지, 바다의 괴물과 몹쓸 귀신들은 모조리 그의 항햇길에 들러붙어 영웅의 금의환향, 개선을 방해하고 있고, 설사 이타카로 돌아온다 한들 성질 사납고 불의한 토족들의 손에 그는 무사하지 못할 공산이 컸습니다. 신들의 가호로 그는 목숨을 건지고, 악한들을 토멸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편의를 위해 개종한 "조선남자"는 마뜩지 않게 보았는지, 도와줄 듯 말듯 하다 결국 무참히 운명의 바닥으로 내던져 버립니다. 하지만 조선 남자는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도 감연히 의(義)를 위해 목숨을 걸었기에, 그의 모험과 절조, 의기는 오디세우스의 그것보다 더 거룩한 면마저 풍기기도 합니다.

책 뒤의 연표를 보면 이미 작가님이 조선 남자와 다나 사이에 생긴 아이가 커서 루벤스를 만나는 장면 등을 구상하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기대하는 건, 유구의 고미(덕천 막부군이 침략한 와중에 죽지 않았다면)가 낳은 아들, 그리고 조선 고국에서 노모가 키운 본처 소생 아들, 이 셋이 힘을 합쳐 죽은 부친의 원수를 풀고 오대양에 정의가 회복되는 활약을 해 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현실에서 역사가 그린 궤적이 엄연히 있기에 너무 무리를 하실 수는 없겠지만, 이로부터 백 년 안짝이면 영국이 공식적으로 노예 무역을 정부 차원에서 불법화합니다. 그 이면에 이 배다른 3형제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고 하면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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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자 1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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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상님께 물려 받은 강토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내몰았다고는 하나 마음의 상처는 씻을 길이 없습니다. 죽은 가족과 잃은 재산은 회복할 길이 없고, 잡혀 간 포로들도 몸값을 주고 찾아와야 한다니 그걸 두고 이긴 전쟁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뼈대 있는 집안에서 올곧은 가르침을 받고 자란 주인공 "나"는 의분을 가눌 수 없습니다. 복수를 해서 저 무도한 왜국들에게 올바른 인간의 길이 뭔지 깨우쳐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벌은 의기나 선의만으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실력이 있고 도구가 완비되어야 합니다. 저들 왜구는 대량의 조총으로 조선 민, 군의 혼을 빼놓았습니다. 먼 서방 땅에서 양귀들이 개발한 것을 들여 왔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 무기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설욕과 창의(倡義)를 못 할 바 없을 것 같습니다. 조정에서 그러나 딱히 의욕하는 바 보이지 않기에, "나"는 개인자격으로도 혈혈단신 서양에 건너 가, 왜구들에게 인류의 도를 깨닫게 해 줄 수단을 강구하고 싶습니다. 독자로서 이 주인공에 대해 거의 무조건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2권 중반에 접어들면서 크게 후회하게 될망정)



그는 마침, 유구의 군주와 관리들이 명(明) 황실로부터 밀조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반도에 침입하여 멀리서나마 중원의 평화를 위협하려 들었던 왜구는 어렵사리 격퇴했으나, 그 허를 틈타 이번에는 오랜 세월 동안 골칫거리였던 야인들이 발호하는 기운이 엿보입니다. 무용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엄청난 화력을 지닌 대포 앞에 일개 기병들이 힘을 쓸 수는 없습니다. "홍이포"란 별칭을 지닌 이 가공할 신무기를 유럽의 양귀들에게서 입수해 오라는 게 대국의 뜻입니다. 좁은 섬나라지만 총관, 수관(이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들은 요량하는 바도 비상하고,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고 "조선 남자"의 국량을 크게 평가하여, 험난하고 먼 해로를 통해 중임을 완수하는 데에 동행시킵니다. 조선 남자는 자신의 평생 숙원을 이룰 유일한 기회다 싶어 그들의 배에 동승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같은 조선인인 "뱃놈(역시 이름은 없습니다)"에게 아주 악질적인 배신을 당하는 곤란을 겪습니다. 제가 인상 깊게 본 건, 주인공인 "나"가 결국 이 배신자를 너그럽게 용서하여, 악귀의 소굴과도 같은 유구의 사창가에서 그의 누이를 속량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평소 "조선 남자"를 높이 평가하여 갖은 호의를 베풀던 수관은, 거친 흥정을 통해 어렵사리 챙긴 매매대금 중 큰 몫을 떼어 몸값으로 선뜻 내어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조선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아무 유대를 가질 이유가 없으며,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배신행위까지 겪은 "조선남자"로서는 도움은커녕 해코지를 해도 시원찮은 판국인데, 양반으로서, 그리고 공맹의 도를 배우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지닌 엘리트로서, "양반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착한 백성이 화를 입다 보니 저렇게까지 타락한 것"이라 받아들인 그는, 약간의 양식을 주어 두 오누이를 배편으로 고국에 돌아가게 배려합니다. 하지만 "뱃놈"의 누이는 이미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몸이 망가진데다. 고향에서 다시 받을 천시와 냉대를 감당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1권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구성인데요. 한편으로는 이미 화란 젤란트에 도착해 있는 "조선 남자"의 사정이 나오고, 다음 장에서는 젤란트에 도착하기까지 온갖 곡절을 겪는 조선남자와 유구 상인들의 사연이 교대로 나오는 식입니다. 젤란트에 여장을 풀고 "무구의 본"을 구하려 드는 그는 여기서 우연히, 화형으로 죽을 위기에 몰린 처녀 로라와 그 동생들의 딱한 사정을 접하게 됩니다. 로라의 죄목은 "이단을 신봉했다"는 건데, 알고 보면 네덜란드에서 수백 년 간 믿어오던 가톨릭 신앙을, 세상이 신교도 천지가 되고 보니 하루아침에 버릴 것을 강요받은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음모와 모략을 통해 재산을 뺏고 정치권력을 재편하려는 쪽의 허울 좋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비슷한 느낌이겠지만, 로라가 거의 발가벗겨진 채 입에다가는 끓는 쇳물이 억지로 부어넣어지고, 형체도 망그러져가는 몸은 십자가에 대못으로 박히고(일본에서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에도 실제 못을 박기까지는 잘 이르지 않았습니다. 매달고 창으로 찌르는 식이었을 뿐) 마지막으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등 사람의 머리로 상상 가능한 최악의 혹형을 어린 여성에게 가하는 그 장면이.... 인상깊다기보다는 솔직히 트라우마로 남는군요. 아, 멋도 모르고 읽었다가 지금까지 정신적 대미지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인상에 남는 장면은 루벤스, 아직 자리를 잡기 전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궁정화가로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려 동분서주하는 젊은 루벤스가 "조선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입니다. 물론 조선남자는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 이해가 없습니다. 조선남자의 인식 수준으로는, 종교로 갈려 피터지게 싸우는 저들 양귀들이, 신부가 이끄는 구교는 "죄인과 더불어 그 모친과 다른 훌륭한 사람까지 같이 믿자는 입장"이고, 목사가 이끄는 신교는 "그저 죄인만 믿자는 입장"일 뿐입니다. 공권력에 의해 죄인으로 판정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를 왜 신봉하는 건지부터가 그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정입니다. 게다가 신부가 이끄는 무리는, 지난 왜란 때 왜장 소서(고니시)에 조력하여 금수강산을 짓밟은 자들이기도 하니... 그로선 왜 인류를 구원하려든다는 무리들이 조선인들을 못살게 구는 행렬에 동참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선남자를 두고, 화가로서의 야심과 재능으로 똘똘 뭉친 루벤스는, 이처럼 기막힌 분위기를 풍기는 모델로서 도무지 그냥 놓쳐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저 기술적 도구의 일종인 "좋은 모델"로만 그를 보았던 루벤스는, 나중(2권에 나옵니다)에서야 어떤 기독교의 성인 못지 않게 위대한 품성을 지닌 "조선남자"에게 감복하여, 다른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 소설에는 신앙의 성질을 둘러싸고 남북으로 갈려 일종의 동족 상잔을 벌이는 네덜란드인들의 처참한 사정이 나옵니다. 아마도 작가님은 이 배경을 통해 역시 남북으로 분단되어 소모적인 대결을 벌이는 한반도의 정세를 환기하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보-혁 대결 양상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우리 남한의 자화상을 묘파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목표지의 살벌한 형편이야 아랑곳하지 않고, 조국의 위신과 정의의 회복을 위해 "무구의 본"을 찾아 떠나는 "조선 남자"의 모습은, 목적의 달성 뿐 아니라 여행의 험로를 겪음으로써 종전의 자신보다 더 큰 인간이 되려하는, 금양모피(fleece)를 찾아떠나는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아손"의 이름은  "치유하는 자"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과 동족이 입은 정신적 상흔을 달래고, 힘이 자라는 바 세계 만방에 공통의 정의가 있음을 상기시켜, 병든 인간의 혼을 치유하려는 꿈도 있습니다. 유구의 수관에게 "아랫사람은 인의의 도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건네자 수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다 이 취지에 동감해서일 겁니다. (그런데 이 작자가 2권에선.....)

유구는 이 소설에서 조선과 같은 편을 먹는 거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고미는 "조선 남자"의 늠름한 풍채와 인격에 반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하는데.... 결국 2권까지 가서도 이 처연한 여인은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후속편이 이어진다면 세월이 흘러 제법 나이가 들었을 이 고미의 후일담이 좀 자세히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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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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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을 할 때 "말린다, 말려서 졌다"라는 표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의 "말리다"는 그저 동사 "말다"의 수동형이 아니라, "남의 수작에 말려들다"를 속되게 일컫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근거와 정당성이 객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쪽이, 반대로 기세 좋고 치밀하게 덫을 놓고 상대를 몰아붙이다 보니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방어만 하다, 초기의 승세를 놓치고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이런 말을 씁니다. 이런 식으로 싸움에서 이기는 쪽은 정말 기술이 노련하다고 봐야 하는데, 미국에선 조지 W 부시를 두 번이나 당선시킨 선거전문가 칼 로브에게 이런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죠.

 

저는 조지 레이코프의 저술을 읽을 때마다, 반 세기 전 혜성처럼 등장해서 세상을 보는 새 시야 하나를 마련해 준 경제학자 케인즈가 떠오르곤 합니다. 정치적 성향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케인즈가 대단히 귀족적 리버럴이었다는 점에서 레이코프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세상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절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고 지시하는 데에 정면으로, 최초로, 그리고 가장 명징한 언어를 통해 반박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지적 의미에서의 프로메테우스들"이라고 불려져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체제는 더 이상 억압의 기제를 통해 사고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달콤하거나 휩쓸리기 편안한 "프레임"하나를 던져 주고, 그 색칠된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유도합니다. 영어 동사 frame에는, "사람, 대상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왜곡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대중들에게 "반유태주의. 인종주의"를 그저 강요나 폭력에 의해 퍼뜨린 게 아닙니다. 그는 세계사상 최초로 "프레임"을 활용할 줄 알았던 독재자였습니다. 대중은 이 노련한 정치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기 이해와 복리, 그리고 양심을 포기하며 불의에 봉사하려 들었죠.

 

우리는 보통 눈에 의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빛이 망막에 조영하는 대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매우 다릅니다. 유명한 사이먼스-채브리스 실험에서 잘 입증된 것처럼, 사람은 눈 앞에 고릴라가 지나가도 딴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질 수 없을 만큼 뚜렷한 존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시각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사고와 정신이 고릴라를 "당분간 미미한 변수"로 미리 설정해 놓았기에, 오관은 이 대뇌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어 뜬눈으로 거대 객체 포착을 포기하고 만 겁니다. "방금 뭐였지?"도 아니라, "아예 없었음"이 되고 만다는 게 마치 마법 같습니다.

 

칼 로브가 그리 승산 없어 보이던(지적으로나 외견상으로나 앨 고어가 더 매력적이었죠) 선거를 이긴 건 그의 탁월한 프레임 설정 능력 덕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번 선거는 사상 최초로 성 (性) 간 선호가 극명히 갈리는 승부다"란 프레임까지 만들어 내어 언론에 흘렸습니다. 아무래도 여성들에게 고어 후보가 더 어필하는 외모(이는 부시 측에게 불리한 요소죠)인 점을 감안해, 남성 레드넥의 질투심을 자극한 겁니다. 나아가 "고어는 여자들이나 찍는 후보!"란 인식을 퍼뜨려, 머릿수에서 앞서는 남성 유권자의 표 결집을 유도했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런 전법이 2000년 선거 당시에는 먹혔다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고릴라가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마법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위력인데, 그게 프레임인지 뭔지 대중들은 레이코프가 인터넷에서(나중에는 이 책 초판을 비롯한 그의 저술에서) 부지런히 설파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에 어떤 고정된 틀이 여유공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머리는 그 프레임이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복잡한 사회, 정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프레임 없이는 제대로 정리조차 할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듭니다. "뭔지 혼란스럽지? 이렇게 봐야 하는 거야!" 이때 미리 설정된 프레임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교활하게 짜여진 프레임은 결국 원래 뜻한 대로 판국을 몰고 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성공적인 프레임은 설사 논쟁에서 패배해도 설정자를 사이비 순교자로 만들기 때문에, 선동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결과에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기면 이기는 거고, 져도 이기는 겁니다. 이게 프레임의 마력이죠.

 

저는 케인즈나 레이코프 같은 이가 제시한 이런 획기적인 비전을, 저런 사악한 프레임에 대비되는 "고마운 프레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차피 우리 뇌와 감정은 모든 광학 작용을 남김 없이 쓸어담는 방대한 필름 같은 게 아닙니다. 가이드 없이는 어떤 인지도 불가능합니다. 나의 생존, 나의 의지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내가 내 노력으로 타인 아닌 나의 복리에 이바지하게 도와 주는 프레임은, 선하고 고마운 프레임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라고 할 때 그 각성을 도와 주는 삼각대 하나를 마련해 준 이 기념비적 저작에 대한 경탄으로 독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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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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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주로 내 뜻한대로 뭐가 잘 안 이뤄질 때 그런 느낌을 갖곤 하지만, 애도 아니고 내 일 안 풀린다고 해서 그런 마음을 품으면 남 보기도 창피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별로 떳떳하질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이치가 원망스럽다 싶을 때 남 핑계를 곧잘 갖다 댑니다. "저 불쌍한 사람이 대체 뭔 잘못이 있다고 저런 불행을 겪어야 하나요?" 그게 사실 그 사람을 딱히 동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실패를 묘하게 명백한 불합리에다 끼워팔기하려는 이기적 속셈이기 쉽습니다.

 

존엄한 신이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방기하고 있으니, 이제는 어디서 악마의 도움이라도 빌려 와야 하겠습니다.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그 찜찜한 죄의식도 이렇게 해서 무마되고 달래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에 나오는, 빌려준 원본 몇 백 배로 이자를 쳐서 받아가는 무시무시한 채권자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덩치도 크고(?) 말도 잘하고 빈틈도 없는(빈틈이 있으면 그게 과연 악마인가요?) 그런 진성 사탄이 아니라, 몸도 쬐그맣고 아첨에 잘 넘어가고 정서적 약점도 있고 허술함 투성이인데 능력만 전능에 가까운(전지까지는 아닌가 봅니다. 모르는 게 많더라구요) 그런 악마가 있다면, 그건 가까이에 두면 왠지 재미도 있고 여기저기다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존재는 사실 그냥 고마운 친구지 악마까지 가지도 않아서 나중에 된통 당하겠다는 우려도 없고요.

 

괴테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곤 하는 천재들의 성취 비결을, "데몬(디먼)의 장난"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천재나 위인의 관찰자가 아니라 본인 자신이 천재였으니만치 이 말에는 그저 "영감(inspiration)"의 문학적 비유라든가, 장난, 희언 비슷한 게 아닌 어느 정도 진정어린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저 사람은 저렇게도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몬"이 그 일을, 알고보면 대신 해 줘서 그렇다는 겁니다. 괴테는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장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 완고했던 골수 가톨릭을 신봉한 고장에서 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사람인데도, 이런 이교적인 믿음에 기울길 별로 꺼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건 짖궂은 장난도 치지만 이처럼 인간에게 친숙한 존재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고지식하고 광신적이며 융통성 없는 태도는 이런 것들을 싸잡아 "이단"으로 몰 수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이런 일체의 초자연적 존재(혹은 개념)에다 "악마"라는 부정확한 범주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겠죠. 아자젤이 "악마"라는 부당한 이름을 지닌 건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아자젤은 못 하는 게 없는 초월적 존재이지만, 수괴 노릇을 하는 더 큰 악마에게 무슨 능력의 일부를 빌려 온다든가 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좀 귀찮고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자기 힘, 정상적인 능력 발휘로, 우리 인간계의 꼼짝 않는 질서를 변동, 교란시킵니다. 이 역시 물리법칙(이게 아자젤의 그 세계도 지배하나 보죠?)의 한계와 예산에서 벗어나지 않아, 요술방망이로 뚝딱 해치우는 식이 아니라 과학적 계산을 통해 조지(주인공입니다) 아저씨(이런 악마를 믿거나 들고 다니기엔 나이를 엄청 먹은 할배입니다)의 얼토당토않은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자젤은 그렇게 전능한 존재지만 재능의 행사에 까탈을 안 부리는 걸로 보아, 자기가 속한 세상에선 그게 별것도 아닌 형편인가 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가장 평범한 수준이나 평균 이하)도 그쪽 동네에 가면 뭔가 톡톡한 쓰임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안기지만, 아자젤이 감정에 치우쳐 판단을 그르치는 모습이 한 번도 안 나오는 걸로 보아, 우리 인간은 이놈의 감정 조절 무능력 때문에 결국 저쪽에 가서도 별 힘을 못 쓰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이 18편의 이야기 속에서도, 아자젤이 애써 이뤄준 "기적들"은, 결국 은혜를 입은 인간들의 배은망덕이나 감정적 오용 때문에 실패나 재앙으로 끝나고 맙니다. 요는,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 해 봐야 인간 존재 자체에 내재한 모순과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도루묵"이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신랄한 냉소나 블랙 유머는 이 주제의 생생한 구현에 이렇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아시모프는 SF를 쓸 때 미사여구나 문학적 기교를 엄청 자제하는 편입니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문장, 아니 초등학생이나 읽으라고 쓴 듯한 문장 때문에 처음에는 그 위대한 고전의 수준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빚어질 정도죠. 그러나 이 소설은 거의 서거를 몇 년 앞둔 시점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했는지 증거라도 보여 주겠다는 듯, 미칠 듯한 유머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한 말장난으로 가득합니다. 아자젤 이야기보다 1인칭 화자와 조지 영감 사이의 대화가 너무 웃겨서 책 진도가 안 나갈 지경입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알고보면 그 방대한 지식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즉, 재미가 없습니다) 동원하는 반면,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 뻬어난 두뇌로 일생 동안 섭취한 지적 자산을 갖고 유쾌하게도, 어린아이처럼 즐기고 놀고 있습니다. 에코의 저술에서 은근 반유대주의 냄새가 나는 건 이 선배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탓도 있다고 저는 짐작합니다.

 

아시모프는 뭔 이유인지 주인공 조지를 통해 셀프 디스 개그를 이 단편들에서 쉴 새 없이 구사합니다. "한 번 강연에 몇 천 달러를 대가로 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미적지근하죠? 공짜로 시작한 강연에 참석한 청중들에게 당신이 '이제 몇 천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이 강연을 계속 이어가버리겠어!'라고 협박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폴로 13호가 사실은 여행 중독자 한 사람을 태우고 달나라로 그대로 가 버렸다는 미친듯 웃기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원더링 쥬(방황하는 유태인)"까지 슬쩍 끼워넣고 있습니다. 만약 아시모프가 유태인이 아닌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엄청난 물의가 빚어질 소지도 있는데 말이죠. 그런가 하면 웬 할아버지가 Y담을 이렇게 좋아하나 싶게, 성적인 코드가 물씬 묻어나는 제법 위험 수위에 도달한 개그도 많이 나옵니다. 처음 절반은 다분히 교훈적이고 소프트 SF스러운 이야기가 많은데, 나중에 가면 작정하고 개그를 치겠다는 듯 아무도 못 말릴 난장판(그러나 지적인)으로 흐릅니다. 특히 <갈라테아>편은 읽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면 내용 이해를 못 한 것이니 다시 잘 살펴 보십시오.

 

살다보면 짜증이 날 때가 많습니다. "이 빌어먹을 신호등은 내가 오기만 하면 full로 빨간불이야!" 그래서 내 주위의 엔트로피를 일괄적으로 낮춰 놓았더니, 그 정연한 질서 때문에 삶에 분노할 일이 없어 자극이 없고, 자극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 결국 두뇌가 퇴화하더라는 겁니다. 무질서에 감사할 줄 알고, 빈곤에 고마운 줄 알아야 제 인생이 풍요와 보람으로 가득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박식할 뿐 아니라 세상 이치에 달통한 노인 아시모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그래서 전능하지만 전지하지 못한 말썽꾸러기 아자젤보다, 혹은 도라에몽보다, 부족한 우리네에게 더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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