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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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어디에 존재할까요. 경계선 근방에 놓인 여러 표본은 인류 역사 오랜 초기 단계부터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니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이런 걸 두고 누가 시비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경계(이것부터가 모호한 개념이지만)에서 멀리 떨어진 개체, 범주를 두고는, 우리는 그것(들)이 특히 현실에서 힘을 못 쓰는 열위의 권력속성을 지닐 때, "비정상"의 낙인을 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권의식의 향상과 휴머니티, 계몽사상의 확산과 더불어, 우리는 소위 "장애"라는 것에 대해서도 종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시작했고, "다양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점차 긴 스펙트럼의 바깥쪽에 위치한 "연장의 특수 지점" 정도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피부색에 대한 차별이 "야만"으로 여겨지는 거나 마찬가지로, "신체 특정 부위의 이상 발현"에 대해서도, "우리와 이어져 있으며, 고립된 섬은 아님"에 동의를 보내는 이들이 점차 늘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불순한 이익을 위해 과도한 합리화, 무리한 논리 비약을 일삼는 이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최소한 "진화는 심지어 생존적합성의 목적도 갖지 않는, 그저 맹목의 변태"라는 관점도 힘을 얻음에 따라, (다소 맥빠지는 일이긴 하나) 신체나 정신의 이상행태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용이  부여되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맥빠진다"고 제가 표현한 건, 결국 이 책의 관점(과 비슷한 견해)에 따르면서 계속 (멀리) 나가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상(이 역시도 의미 없는 목표가 됩니다. 누구의 기준에 의한 향상이며, 그 이전에 "향해야 할 위[上]"가 있기나 하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죠)시키고 발전을 도모한다는, 뿌듯한 노력이 결국 무의미한 도로(徒勞)가 될테니 말입니다. 타고난 재능에 대해서도, 사회적 승인이 철회된 채 "그저 비정상태의 일종"이라고 미지근한 규정만 이뤄진다면, 아마 보다 나은 생산성을 이루고자 하는 어떤 발버둥도 그 발판과 동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건 당사자뿐 아니라, 수월성을 지닌 분자들에 의해 어떤 혜택이라도 입을 수 있는 나머지 모두를 위해 불행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정상/비정상의 사회학적 기준의 설정과 담론적 의의보다는(그런 것도 없지는 않지만), 과학적, 실험적, 혹은 연구의 기반이 마련된 범위 안에서, 대체로 우리 동시대인들의 합의가 가능할 어떤 인식틀을 마련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멘델이 "유전자"라는 개념을 창안해서 처음 세상에 알렸을 때만 해도, 무엇이 그 부모로부터 자식 개체에게 전달이 되긴 하는 줄로만 알았지, 어떤 구체적인 기제에 의해 이것이 이뤄지는지는 전적인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러던 것이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왓슨, 크릭의 연구에 의해 나선형 구조를 지닌 어떤 DNA, 핵산의 본체를 띤 물리, 화학적 실체의 구명이 있었고, 밀레니엄의 전환에 즈음해서야 미흡하나마 지도 비슷한 걸 손에 넣게 되었죠. 책의 2장(본격 논의의 시작)은 특히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다양한 행태에 대해 지시의 직접 책임이 있는 "뇌"와, DNA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얽혀 있는지 자세한 해명을 시도합니다. 특히 재미있는 건, "성격"이란 게 과연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어느 정도나 그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유전적 형질, 즉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지, 흉금을 터 놓은 여러 논의를 펼칩니다.

 

여기서 제가 "흉금을 터 놓았다"고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저자 역시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선 확정적 결론을 유보하는 솔직한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입니다. 갈레노스 등의 고대 현인(오늘날의 관점에서 "의학자"라고 엄격히 정하기 힘든) 등이, 담즘 등의 분비에 따라 넷으로 가른 "성격론"에 대해, 계몽주의 이래 많은 이들은 "몽매한 과거의 유물"이라며 평가절하해 왔습니다(문학 작품에는 의외로 인기 있게 취급되는데, 그 비슷한 걸 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책은 겸허한 마음으로, "어떻게 고대인들이 그만큼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가?" 같은 경이를 원용하는 쪽입니다. "성격, 기질"이라는 모호하고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 현대 의학이 저 고대인들의 성과에다 의미 있게 추가시킨 증분은 거의 없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는 셈입니다. 이 "성격론"이야말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가르는 실익이 가장 날카롭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일 텐데도 말입니다. 당장 우리가 사회에서 정치적 다툼을 벌일 때, 누구 하나를 두고 "저건 성격이 비정상"이라는 규정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 쟁투는 이런 주장 중 어느 편이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농담과 위트가 매우 자주 발휘됩니다. 대중서(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서입니다)에서 영미권 저자들이 다 이런 식으로 캐주얼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건 아닙니다. 권위라든가, 어떤 확증적 진단을 (자신이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척척 내세우고 내어놓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대단히 친근히 다가섭니다. 벌써 "비정상/정상을 가르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주제부터가 그런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책은 그런 주제를 전달하고 구체화하는 그 태도에서까지도 자신의 주제를 배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좀 희한한 (제2의)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요, 저는 이 책이 육아서로 쓰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완독하면서 아주 자주 했습니다. 특히 3장, 5장, 7장, 8장이 그렇습니다. 2장에도 후생유전학에 대한 논의가 잠시 나오고, 어떤 인간 개체가 정규분포의 몇 시그마를 초과하는 구간에 존재하느냐 하는 게,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전제를 깔고 벌이는 주장이 많이 등장하며,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도) 우리 아이가 지능이나 매력만은 저 멀리 식스 시그마의 오른편에 존재하되, 체형의 결함이나 충동의 조절 능력에 있어서만은 한가운데의 폴(pole)에 꽁꽁 묶여 있었으면 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바람(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척 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으로 돌변할 모든 젊은 여성들에게 다 해당될 희망사항!)을 (의도하지 않게?) 잘 대변하는 대목입니다. 잘 읽어 보시면 (물론 저자는 부정하는 스탠스입니다만) 육아에 도움될 만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저자는 "특별히, 매력적으로 비정상적인 우월 개체를 키우기 위한 그 모든 몸부림"에 대해, 그 과학적 근거를 부정하면서도, 그 박약한 근거에 악착같이 매달리고 싶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는 멋진 문장력(?)으로, 우리 독자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은 그저 <THE OTHER SIDE OF NORMAL>입니다. NORMAL 앞에 정관사 the가 빠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정상" 개념에 대해 취하는 작가의 회의적 스탠스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제목에 들어 있는 "과학"에 너무 짓눌리지 마십시오, 정상/비정상의 기준은 결국 "과학"도 모르겠더라는 게 결론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기준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건 저자의 "인문 사회학적" 결론이고 말입니다. 최근 뇌신경과학, 행태론 기반 여러 학문이 일궈 낸 여러 성과를, 이처럼 독특한 프레임 안에서 일별 조망하는 일은, 저자 뿐 아니라 우리 독자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체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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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아픔
소피 칼 지음, 배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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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25일 금요일.


이 날은, 당시 서른 두 살이 채 안 되었던 여인 소피가, douleur exquise, 칼로 찌르는 듯한 이별의 아픔을 겪은 날입니다. 가상의 날짜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대열에 끼인 시각들,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부지런히 돌고 있던 흔적의, 뚜렷이 실존하는 물리적 일부분입니다. 생년생일이 저 날짜 근처이신 분들은 특히, 이 서늘하게 시려 오는 아픔을 담은 기록이, 픽션이 아닌 현실의 호흡으로, 그 요일과 날짜의 돌이킬 수 없는 만남까지가 실감될 것입니다.



소피 칼은, 수필가, 설치 미술가, 사진작가이며, 물론 현재도 활동 중인 예술가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실연의 모진 슬픔을 겪었던 "그날"을 중심으로 삼고, 그 전의 92일, 그리고 그 후의 99일을, 다이어리 형식으로 써 간 책입니다. 192일 중 빠진 날도 있고, 이별의 그 날은 이미지 하나로 처리되어 있으며, 이별 후의 99일은 좀 빠른 템포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 "기록"을 보았을 때, "이런 책도 다 있구나," "책이 아니라 다른 분의 다이어리를 훔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텍스트의 양적 비중이 매우 적고,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사진으로만 채워진 책 같습니다. 말투와 포맷이 지극히 사적(私的)이라,  공개적으로 출판된 책이 아니라 자유롭게 쓰여진 누군가의 일기장을, 별 죄의식 없이 구경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분명히 사진인데도 손으로 그린 화첩을 보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사진에 이런저런 기법이 많이 가해진 이유가 있겠고, 색감이 꽤 다채로운, 그러면서도 원색적이지는 않은 이유도 있겠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날짜에 자신이 느낀 감정의 색채, 상흔의 입체감을, 잘 어울리는, 잘 대변하는 사진 한 컷(혹은 여러 컷)을 내세워, 몇십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용한 그녀의 솜씨가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미지가 독자를 압도하는 책이지만(확실히 이런 예를 보면, 사진은 아무나 찍는 게 아닙니다), 텍스트 역시 평범한 심상이 아닙니다. 일본의 어느 곳, 중국의 어느 곳(아직 1980년대 중반인데도요),인도의 어느 곳들을 들렀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았다 같은, 일상의 직서만 남겼다고 생각되는 페이지에서도, 그녀의 남다른 느낌, 깊은 감상이 짙게 배어납니다. 절제된 스타일의 모더니즘 산문시(詩)를 감상하는 것 같습니다.

이별을 겪기 전- 정확하게는 "그"가 약속한 장소, 시각에 나타나지 않고, 호텔 프런트를 통해 전달된 전보로, 비루하고 간접적으로 "현장에의 반(半) 고의적 부재"를 알려 온 그날, 소피(가끔 "안나"로도 둘러서 일컬어지는)가 거의 인생의 분기점으로 지각할 만한 그날로부터, 자신도 모른 채 D-Day를 슬금슬금 맞이하고 있던 그 시간들의 태평스러움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태평스럽다고는 하나, 여인 특유의 예리한 직감으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방향에서 이 타격과 이 붕괴점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음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선명하게 직관하지 못했다는 데에 대해, 그녀는 무려 이십여 년 가까이 회한을 가득 품어 오다, 2004년 마침내 책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그 작품을, 10년 가까이 지나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입니다. 이 쓰라린 아픔의 기억은, 책뿐 아니라 사진전, 그리고 행위예술로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했습니다.



책은 마치, 복수 여권에 visa 스탬프가 소인(消印)으로 찍혀 나가듯, 파국을 향해 속절없이 지워져 나가는 날들, 날들이, D-Day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정말로 텍스트와 사진 위에 -인쇄이지만- 빨간 스탬프가 찍혀 있고, 이 빨간 색은 책의 옆면 전체에 코팅된 붉은 색과 손 잡듯 이어지며 여러 느낌을 전달합니다). D-Day는 말 그대로의 뜻일 수도 있고, 여기서는 douleur의 d를 특별히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열차편으로 모스크바와 시베리아를 경유, 베이징을 지나 뉴델리까지 왔습니다. 지구 거죽 둘레 1/4에 가까운 거리를 육로로 거쳤습니다. 막상 도달해 보니, "그"는 무성의한 전보 한 장을 보내왔을 뿐입니다. 여인이라면 -그녀와 같은 섬세한 타입이 아니라도- 이 엽기적이고 악랄한(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바라맞힘"에 대해, 일생을 두고 치를 떨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쓰라린 체험, 감정상의 격동을 속으로 숨겨둬야 한다고 일단 여기는 건 지구 어디서나 여자에게 공통인 심리일까요. 소피 칼의 이런 절절한 표백과 공포는, 우선 선행하는, 선행하였던, 수치심, 망설임, 자기 보호 본능에서 유래한 바쁜 심리의 가닥들이 가슴 속에 무수히 스쳐갔음을 (역설적이게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안에 다른 시점 다른 맥락의 텍스트, 로그도 실려 있습니다. p76~79에는 에르베 기베르, 당시 르몽드紙 소속 기자로서 그녀 소피 칼을 인터뷰했던 이가, 유력지에다 그렇게 큰 비중으로 정성들여 소개한 기사를 실어 주고도, 본인 사진 원본을 제때 돌려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온갖 소동을 다 부린 일에 대해, 기베르의 시점으로 적은 기록 일부가 발췌되어 있습니다. 이런 변칙 편집을 통해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사정을 객관화하여 전달도 하고, 아마도 먼저 세상에 알려졌을 그 사건의 "기베르 버전"에 대해 해명과 (어쩌면) 사과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주를 통해 기베르의 자전 소설에서 pp. 122~125를 인용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나도 끔찍한 실연의 악몽은 여인의 영혼 한 구석을 점유한 채 쉬이 놔 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을 더욱 몸서리치게 하는 건, 그 실연이 전혀 예기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엄습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는, 지독한 감상과 자기 연민으로 텍스트와 화면이 채워져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은근한 유머와 의연한 태도, 혹은 여태 살면서 소피 자신이 남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도 회고하는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감성과 회고가, 겉으로만 봐서는 건조한 일상을 기록한 일기처럼 겉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게 특이합니다. 담담한 기록 속에, 여백, 그리고 (느닷 단절된) 맥락이, 이 여인의 아픔과 당혹을, 구구절절한 말의 연속보다 더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D-Day 당일의 페이지는, 호텔 객실의 전화를 찍은 사진(수채화 같습니다. 왜 제가 묵는 호텔 방은 이런 색감이 안 피어나죠?)와, "이런이런 전보가 왔다."는 진술뿐입니다. 자제된 언어 속에, 천 가닥 심회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행위예술로까지 승화되어 타인과 공유하는, 버려진, 버려졌던 어느 여인의 아픔은, 개인의 마음풀이를 넘어 불특정 다수에게 공공 백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닌 독자에게도, 여인들의 상처와 그 마음 가는 길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서평에 사진을 더 많이 담아야 하는데, 잘 나온 사진 찍으려고 책을 넓게 벌릴 엄두가 안 나는 애서가라서 요 정도만 업로드함을 양해해 주세요. 온-오프라인에서 래핑되어 유통되는 게 보통인데, 책을 처음 받아 들고 비닐을 뜯는 데에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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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100대 기업 - 삼성증권과 중국 차이나윈도우가 뽑은 중국.홍콩 대표 최강 주식 100
삼성증권.차이나윈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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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그랬었고, 한창 고도의 성장 추세를 보이는 개발도상국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곳은 그 나라의 주식시장입니다. 왜 최고조의 실물 경제 성장보다 주식 호황이 한 발짝 정도 늦게 출현하는가? 개발도상국에서 제조업, 여타의 산업 자체야 모방과 학습을 통해 발전시킬 수는 있어도, 증권시장의 발달 같은 고도의 시스템은 쉽사리 자국 토양에 안착시키기 힘들어서입니다. . 1980년 딱 한 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이래 줄곧 쾌속질주를 해 온 한국경제인데도, 놀랍게도 외국인 참여를 자유롭게 허용한 것조차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일 뿐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대중이 소위 "개미"의 모습으로 증시에 대거 참여한 건 1987년경(민주화 조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중산층, 아니 중상층 가문에서는, 아이들에게 돈 좀 쥐어 주고 주식 실전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감을 잡혀 놓지 않으면 어른 되어서 실력이 안 는다는 이유에서인데, 제가 지켜 봐 온 결과 망하는 사람은 매번 망하는 게 다 이것과 관련이 있더군요.

 



여튼 그래서 중국에서 적극적으로 외자 유치를, 이번에는 증시 제도 선진화를 통해 발벗고 나서는 모습은, 사실 늦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한국의 대중들이, 다소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 보니 이런 대세가 늦게 확산된 감마저 있습니다. 외국 증시에의 투자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과연 기업공개와 실사가 투명하고 신뢰성 있게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제도적 문제입니다. 이 책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습니다. 말이 없다는 건, "이제 신뢰성 문제를 거론할 타이밍은 지나갔다. G2의 한 멤버인 중국이 아니냐" 같은 전제를 벌써 깔고 있는 것입니다.

1994년의 런던 금융시장 개혁(소위 "빅뱅")처럼, 이번 "후강퉁"도, 최근 침체에 빠진(우리는 중국 증시에 대해 워낙 관심도 없고 소식이 늦다 보니, 벌써 최활황을 지나고 지금 지수가 많이 빠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게 보통입니다) 중국 증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당국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겠습니다. "후강퉁"이란, 상하이의 별칭인 沪에서 앞 글자를, 그리고 "홍콩(香港)"의 뒷글자를 하나씩 따다 약칭, 혹은 신조어를 만든 것입니다. 沪(호)라는 글자는 예전부터 지명으로 쓰이던 글자인데, 沪라고만 쓰면 모르는 분들도 원자로 滬(호)라고 쓰면 눈에 익어하더군요.



사실, 이처럼 중국 증시를 해외에 소개하는 붐이 이는 것도, 최근 거품이 빠지는 듯(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합니다만) 보이는 증시에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필사적 몸부림 중 하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국도 1992년 내수 침체와 중기(中企) 연쇄 부도 사태, 전반적 성장 동력 상실, 이로 인한 주가 대폭락 때문에 고생깨나 하다, 인위적 부양 정책과 반도체 특수(삼전이 원탑으로 올라서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라고 봐야 하는데, 진짜 원탑으로 자리를 굳힌 건 그로부터 10년 뒤나 되어서입니다. 아이러니라면 이제는 삼전의 전망이 심상찮은 모습으로 장기 하강 추세라는 것), 이동전화 시장 신규 창설이라는 거대한 출구로 숨통이 트이는가 했습니다만, 결국 외환위기로 치명타를 맞고 반 타의에 의해 시장을 열었죠. 중국이 이 분야에서 고전하는 모습도 지난 우리의 행적과 따지고보면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이 신뢰를 일단 보낼 수 있는 대목은, 이 책 필진의 면면입니다. 결국 이 정도 전문가들로 짜여진 진용의 말도 신뢰를 못 한다면, TV나 경제지에 나오는 어떤 애널리스트들의 진단도 못 믿을 것들입니다. 요즘 이런 책들의 편제 중 공통 요소로, 인포그래픽 포맷의 적극 활용을 들 수 있는데, 이 책 역시 다양한 수치와 자료를, 컬러풀하고 가독성 좋은 형식으로 최대한 독자 친화적 소통을 꾀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데다 보기까지 편한 편집이요 컨텐츠를 담은 책입니다.

예전에 나온 책들도, 비슷한 전망과 권고를 담은 것들이 제법 있었는데요, 이 책은 그 책들보다  1) 보기가 편하고, 2) 보다 다양한 종목을 망라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2)는 신뢰성 면에서도 중요한 덕목인데요. 애널리스트가 할 일은 고객에 선택의 POOL을 제시하고 권유를 하는 쪽이지, "사이비 족집게" 흉내를 내다 투자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입니다. 2)는 이 책이, 꼭 투자 포트폴리오 구상이 목적이 아니라도, 장기적으로 중국 거시 경제 전반이 어떤 양상으로 굴러갈 것인지에 대한 탐색 목적으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일단 예전부터 자주 화제가 되던 게, 중국 대륙 동서남북을 가로지를 고속철 사업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가 중국에 절절 매었던 것도, 이 고속철 사업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산을 놓고 텃밭 다툼을 벌이는 처지라 중국과 근본적 이해충돌을 빚는데도 사정이 이러했습니다. 확실히, 고속철이란 중국처럼 거대 영토를 단일 주권 하에 두고, 많은 유동인구를 보유하고, 그 인구가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은 나라, 더군다나 아직 항공교통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고, 국민 평균 소득이 국내선이라도 자유롭게 이용할 만큼 높지 않은 나라에서 최적으로 채택될 만한 수단입니다. 한국의 경우, 너무 많은 역을 통과하기에 이미 고속철 아닌 저속철로 전락했고, 비싼 로열티를 주고 사 온 기술을 자체 발전시킨 바도 별반 없기에, 이런 중국측의 건실한 약진을 부러운 시선으로 손 빨고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다들 알겠지만, 법인 형태로는 남차와 북차 두 군데가 여태 있었다가,  최근에 들어 합병이 이뤄졌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역시 다 아는 사실이지만, 흔히 "인수 합병"이라고 해도 어느 한쪽이 더 큰 비중으로 대세를 번갈아가며 타는 게 보통인데, 중국의 경우 "(외국 우량 기업의) 인수"와, 이처럼 "(자국 내 경쟁 기업의) 합병"이 동시다발적으로, 그것도 건실한 방향으로 이뤄지는 게 놀랍습니다. 이런 (자국내 기업들 간의) 합병이 자주 성사되는 건,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제살깎아먹기"의 회피가 주된 목적이죠. 그건 중국의 사정일 뿐이 아니라, 본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 모순 중 하나입니다. 경쟁보다는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독점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이런 독점을 시스템적으로 확고히 유지할 방안은 단일 법인으로의 합병뿐입니다. 중요한 건, 중국이란 나라가 일당 지배의 사회주의 시스템이다 보니, 이런 모습이 대단히 자연스럽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고속철 사업은 공익 목적을 지녀, 처음부터 국가 주도로 이뤄졌어도 별반 이상할 게 없는 성격이니 말입니다(예를 들면 한국처럼).

이 책에서 자주(정도가 아니라 거의 매 페이지에 걸쳐 등장하는) 용어로 股分(고분)이 있습니다. 중국어로는 "구펜"이라고 읽는데요. 이게 우리말로 "주식"입니다. 물론 몰라도 읽다보면 저절로 눈치가 채어지고, 내용 이해하는 데에 지장이 되지도 않습니다. p104에 보면 "은하오락집단 유한공사"가 소개되는데, 주의해야 할 건, 이때의 "유한공사"는 한국의 "유한회사"라든가, 최근 도입된 "유한책임회사"와도 다르며, 오히려 "주식회사"와 비슷합니다. 즉, "고분유한공사"와 실전에서 같이 취급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공사=회사"라고 해서, "유한공사=유한회사"가 절대로 아니라는 데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유한회사는 "유한책임공사"라고 중국에서 따로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지분 양도 요건이 엄격하여 증시에 상장을 못합니다(그 예로 "한국피자헛"). 유한공사와 고분유한공사가 실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니 이런 책에서 함께 다뤄지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여튼, 이 회사에 대한 이 책의 전망은 대체로 낙관적이지만, 현재 마카오(마카우) 카지노 산업 전반은 시 주석의 최근 반부패 조치와 맞물려 위기라는 진단이 지배적이니, 읽는 분들은 최신 뉴스까지를 다 참고해야만 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새로이 부상하는 업종 중 하나가, 환경보호-쓰레기 소각 관련 분야입니다. 환경 오염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중국에서 이런 산업이 발전한다니 이상하게 들리지만, 환경 오염이 심각하니 이는 반대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재벌(우리식 용어입니다만) 그룹인 광대(廣大)에서 거느리는 계열사, 그리고 다른 한 회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국도 최근 서울시 쓰레기매립장 부지 문제로 재활용 분류 방침 개정에 큰 물의가 빚어진 일도 있었습니다만, 과연 이 업종이 어떻게 글로벌 선도 양상으로 성장해 나갈지, 어찌 보면 성장의 내실을 측정하는 한 바로미터로 잡아도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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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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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의 작품에 붙은 제목 <운수 좋은 날>이 지독한 반어(反語)이듯, 이 소설의 제목 <행복만을 보았다>도, 내용이 담고 있는 그 갑갑하고 암울하며 대단히 충격적으로 치닫는 일련의 심리 흐름, 행동, 사건, 파국을 고려하면 예사롭지 않은 명명상의 부조리입니다. 제목이 주는 착시 땜에 무슨 달달한 이야기나 기대하고 이 책을 펴신 독자-이를테면 저-라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삐질삐질 땀깨나 흘리셨을 것 같습니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연 내러티브는 "척 봐서 안 그럴 것 같은 외모인데, 알고 보니 지독한 찌질이"의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적인 반어는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이 제목은 진짜 반어법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작품 속에 흐르는 진짜 스토리를 못 읽었거나, 주인공 안토니오에 대해 지나치게 냉혹한 정서적 거리를 두었거나(이 혐의는 솔직히, 소설 완독이 끝난 지금도 제가 벗을 수 없습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와의 공감을 위해, 혹은 진정을 전달하기 위해 무지하게 애쓴) 작가의 본의 -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대체로) 취하면서도, 정말 독자에게 정확한 소통을 이루기 위해 작가는 애를 씁니다- 를 고의로 왜곡하는 셈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내내 진정 갑갑한 사연과 넋두리가 이어질망정) "행복을 보았고, 혹은 행복만을 보려 애 쓴" "수난 3대"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역사성과는 그닥 큰 관련이 없긴 해도 말입니다.

 

어렸을 때 무난하게 행복한 가정에서 적절한 사랑을 못 받고 컸다는 게, 다 자란 성인에게 이처럼 큰 상처를 남기는 걸까요. 후....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일의 사달은 일단 "자기 감정에 충실하려고만 했던" 화학자인 아버지 -즉 레옹과 조세핀의 할아버지- 에게 있습니다. 그의 처였던 주인공의 친어머니도, 그저 자기 생각만 했다는 점에서 큰 잘못이 있습니다. 이 세대에서 그나마 긍정할 수 있는 인간형은, 주인공의 의붓어머니이자, 친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간호하며 그 최후를 보살핀 콜레트입니다.  나름 의붓자식들에게 잘하려고 했던 그녀를 상당 기간 동안 미숙하게(그리고 의도적으로) 거부한 주인공도,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격으로, 잘하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었다는 점에서 이때부터 벌써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아버지의 매력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았는지, 주인공은 (평균적인) 여성들에게는 꽤나 눈길을 끄는 타입이었나 봅니다. 멕시코의 해변에서 그저그런 이들에게, 이미 심신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게다가 나이는 40을 훌쩍 넘긴 주제에) 호감을 그토록 끈 걸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을 줍니다. 다만 주인공은 매력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루저입니다. 그가 루저가 된 까닭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기만 했지, 그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정적 시점에서 그 아버지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고 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처럼 살기가 너무나 싫었던" 그는, "아버지가 살아 온 행보와는 정반대의 선택"만 좇습니다. 그런데 이는 그의 철저한 착각입니다. 아버지가 선택한 정반대만 골라 걷는다는 건, 방향만 반대일 뿐 결국 그 아버지란 사람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 아닙니까? 삐딱선은 극복이 아니라, 되레 집착이고 추종입니다. 나이 삼십을 넘기고도 그 간단한 이치를 못 깨달았으니, 나이 사십에 청소년도 안 치는 대형 사고를 친 게 아닙니까. 누구 탓을 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 친어머니라는 사람도 잘못입니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그 사랑의 산물로 낳은 아들에게, 왜 아버지를 깔보고 미워하게 가르친단 말입니까. 제 인생에서 지다 남은 짐을, 아이에게 지우는 몹쓸 부모나 할 짓입니다. 그렇게 못난 엄마 밑에, 아들이라고 못난 성정과 인격이 옮고 닮고 냄새가 배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기 마련이죠. 이래서 어떤 못난 늙은이의 말처럼(이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담던데, 참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도 엄마 따라 그 모양이죠), 덜 떨어진 내력이 3대를 가는 겁니다. 당장 자신부터 각성한 후 그 못난 내력, 못난 입버릇에다 꼴에 겉멋만 좇고 허위의식으로 헛말만 일삼고 정작 머리에 든 거 배운 거 없고, 이런 유전적 악형질을 가뜩이나 방황하는 지 자식한테 안 물려 줄 궁리를 해야죠. 입방정 떠는 것 보니 벌써 글러먹은 일이구요.

 

1부는 이처럼 정신이 불안정한 중년 남자가 끝내 대형 사고를 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야기가 그렇게 치달을 줄이야 몰랐습니다. 억지가 가득 섞이고 유아적 불평이 이어지긴 했어도, 배울 만큼 배우고 겉모습도 멀쩡한 사람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1부는 그래서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2부(저는 그저 독립된 별개의 단편인데, 내적 연관이 있으므로 형식상 2부라고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2부로 이어지더군요)에서, 이 사람이 정말 자기가 꿈꾸던 바로 그곳에 와 있더군요. 이건 이 양반의 환상인가, 아니면 탈옥이라도 한 것인가(그럴리야 물론 없습니다만- 탈옥을 할 주제가 못 되죠). 하지만 독자는 곧바로, 사태가 어떻게 그간 발전한(혹은 꼬인) 것인지 감을 잡습니다. 또, (더 중요한 건데) 수긍하고 동의합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제 죄의 대가를 지독하게 치르고 반 송장이 된 인간을 더 이상 가두어 봐야 뭐하겠습니까. 그게 선진국의 교정 시스템이죠.

 

이 소설이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계속 풀고 있는 형식에 대해, 약간 짜증이 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나"와 "너"가 하도 자주 주객을 교차하니까, 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부에서만 그런 처리가 되어 있고, 대체로 텍스트를 차분히만 따라가도 해결은 되는 문제이며, 더 중요한 건 작가가 일부러 그런 형식을 취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주인공의 주관 안에, 객관적 현실이 "인지 혹은 왜곡"된다는 게 어느 정도 암시되는 거죠. 2부에서 여기자하고 인터뷰할 때는 직접 인용 표시가 분명히 살아납니다. 이때 주인공의 "찌질스러움"이, 여기자의 시선을 통해 아주 잠시 드러납니다. 아주 잠시일 뿐입니다.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는, 철저히 "내재적 접근법"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극악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내부의 타자, 외부의 독자로부터 예상가능한 저주와 비난에 대해서 소설은 철저히 "실드"를 쳐 주고 있습니다. 주제부터가 "극한의 찌질이에게도 한번쯤은 그 자신의 시선에서 전후를 살펴 봐 주자"이니, 이런 형식을 취하는 게 당연합니다.

 

3부는..... 조세핀의 시선에서 쓰여진 기록입니다. 이게 작가가 칭찬받아 마땅한, 구성상의 영리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제 친딸에게 못난 아빠는 온갖 욕과 저주를 다 들어먹습니다. 어떤 부분은 -조세핀 입장에서야 그러고도 남겠다고 우리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어쨌든 자기를 낳아 준 부모한테 그런 막말을 한다는 점에서, 많이 불편합니다.  "암퇘지"라고 극한의 표현을 하는 대목에서는, 이 책을 펴 읽은 걸 잠시 후회했습니다. 누구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그냥 불편하고 더럽다 싶어, 외면하고만 싶은 남들의 사정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정말 불편하게 읽는 분은(이 소설은 애초에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입니다), 기왕 읽은 거 끝까지 읽으십시오. 아마 감정상의 반전을 결말에 가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1부 끝에 알튀세르의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데, 제 손으로 제 아내를 살해해서 법정에 선 사람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는 흔적이죠. 알튀세르 이야기까지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사도 지난 1월,  서초동 사는 모 중년 남성-나이까지 비슷하죠?- 이, 이 책의 사건과 똑같은 패턴이라 할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이 주인공보다야 더 엘리트코스를 밟아왔고 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지만, 하는 말이나 행적, 범행 동기가 너무도 닮았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거의 남은 인생 전부를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겁니다. 여긴 한국이고, 죄인에 대해 그리 너그러운 사법 시스템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죠.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사실 판단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왜 어떤 이들은, 좀 진즉에 만나서 서로 불필요한 상처 안 겪고 미리미리 좋은 사랑 하면서 유한한 시간을 채울 수 없는 운명일까요. 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도, 인연이 좋아 나쁜 이들은 미리미리 거르거나 한참 후에 원나잇 인연 정도로만 스치고, 좋은 사람들은 일찍일찍 마주쳐 가연을 맺었다면, 인명 희생은커녕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순간으로 제 주변까지 뿌듯하게 만들었을 텝니다. 행복만을 보는 게 그토록 어려운 겁니다. 제발 내 옆지기 소중한 줄 알고, 자신 위해 줄 줄 아는 무난한 부모님 둔 걸 그저 감사하고, 당연한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줄 알고, 모든 일에 고마워하면서 살아갑시다. 그게 "행복만을 보는 길"이지 딴 게 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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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 - 어느 영화 소년의 80년대 중국영화 회고론 아시아 총서 14
류원빙 지음, 홍지영 옮김 / 산지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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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많은 느낌이 교차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책은 그 부제가 <중국 영화의 열광적 황금기>입니다. 이 문구만 보면 이 시기(즉 1980년대)에 엄청나게 많은, 양질의 중국 영화가 생산되었다는 뜻 같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양산된 중국 영화를, 마음의 눈이 열려 있는, 자격 있는 팬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제 가치를 평가한 시기라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제3국 출신의, 냉정한 태도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찰자가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는 저자분의 주관적 인식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1980년대는 중국이, 그 내세울 것 없는 국력과 빈약한 경제력으로, 다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 아래 문호를 개방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내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좋은 것들은 다 체험시켜 주겠다"는 의도로 문화 정책을 펴던 시기 같습니다. 개발도상국의 정책 당국이, 이런 순진하고 선한 방침으로 정책 목표를 구체화하는 사례, 특히 문화 분야에서 이런 발걸음을 떼어나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제가 아는 바로는 아예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 당시의 중국이 이에 해당하는 유일한 표본이구나."라고 처음 알았습니다. 마치, 가난하지만 자식 교육 하나는 똑바로 시키려는 억척 같은 부모를 보는 감정이랄까요. 공학, 기술 관련 정책은 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문화 분야에서 그런 생각을 고위 정책 결정자가 갖고 유지하기란 정말 힘듭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것처럼, 외환 보유고가 빈약하니 민간(이라는 게 형성되지도 못한 시절이죠)이나 정부나 무슨 돈이 있어야 컨텐츠를 사 올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케케묵은 옛날 작품을 패키지로 사 오는 게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옛 작품들이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고전들이니, 감수성 풍부한 "될성부를 싹"들의 눈에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런 문화의 전범이라 할 명작을 애써 수입해 온 당국도 기특하지만(그저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일당 독재 체제로 여겨 온 선입견과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그런 명작의 우수한 면, 생산적 요소를 알아 보고 열심히 관람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팬들"의 태도도 정말 감탄스럽더군요.

 

한국에서도 소위 "헐리웃 키드"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던 세대, 시대가 있었습니다. 1950~60년대 즈음, 그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도 최신 미국 상업 영화가 불과 몇 년의 시차만 두고 수입되어, 구경거리에 목마른 눈과 귀를 극장으로 잔뜩 끌어대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정책의 계도적, 계획적 결과가 아니라, "아무 거나 들여와도 돈이 된다는 걸 알아차린" 민간 수입업자들의 상업적 계산 결과였습니다.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중국측 사정이, "당대 히트작 수입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싼 값에 구경할 수 있는 고전 꾸러민만 잔뜩 봐야 했던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굳이 대조를 하자면, 1) 차상위층 가정에서 입 짧은 애들이, 부모가 사다 주는 음식이나 구경거리를 "최신 유행이 아니라며" 퇴짜를 놓는 모습 2) 극빈층 가정에서 그래도 눈썰미 좋은 부모가, 값싼 양질의 물품을 애써 골라 준 걸 그 자녀들이 감사해하며 제 것으로 성실히 소화하는 모습,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1)은 그 이후 그 부모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돈을 벌고, 공부는 안 하고 눈높이만 높이던 애둘에게 억지로 과외를 시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보냈지만 별 열의 없이 현재를 사는 모습, 2)는 부모가 역시 경제적 대박을 치긴 했지만, 그것과는 관계 없이 그 집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들려 정직하게(있는 자원 없는 자원 다 그러모아가며) 학자로 대성한 결과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성장 과정이 2)가 더 건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라 전망도 더 밝습니다.

 

솔직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산이 부족해서 그 대안으로 들여온" 볼거리에 대해, 그처럼 열광을 보낼 마음이 들었을까요?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낸 대륙의 그 문화 소비자들은, 제한적으로 마련된 영화 저널(당시에는 중국 아니라 어디에도, 지면 매체 외에 독자가 참여할 공간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에 열광적으로 참여헸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기로는, 그저 감정적 호불호나 비생산적 꼬투리잡기가 아닌, 치열하고 성실한 학습자(문화 소비자라기보단 그 학구열 때문에 "학습자"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들이 펼치는 간접 토론(실시간 참여 매체가 발달하지 못했으니 순차적 투고 형식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죠)과 담론의 향연이, 국외자에겐 정말 대단하고 부러웠습니다. 이런 성숙한 문화는, 그들보다 앞서 PC 통신이라는 신매체가 생겼던 우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던 현상입니다. 당장 이 자랑스러운 걸음마 단계가  키워낸 지식인, 문화평론가로서 이 책의 저자 류원빙이 지금 도쿄 대 학술연구원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다양한 학술적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우리의 PC 통신 세대들(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 인프라)은 국내용 담론 생산 외에 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영화 분석의 패러다임으로 바쟁의 이론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들이 당시에 접하고 향유하며 소화할 수 있는 평론이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당국에서 검열과 통제를 했다기보다(그런 사정도 있겠지만) 폐쇄적이고 가난한 나라다 보니 그런 문화 이론 포맷의 선진 문물 도입도 채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여튼 저자 류원빙을 비롯, 건전한 문화적 소비 욕구에 가득차 있던 그들은, 입에는 쓰나 몸에는 좋은 양식을 열광적으로 소화하였고, 이는 대륙의 O세대 예술가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양질의 작품을 생신하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한국의 실정은, 21세기인 지금조차 착각과 유치한 자기애에 빠진 감독들, 그리고 예술보다는 정치투쟁의 프락치로 더 뿌듯한 자긍을 형성하는 저질 관람자들로 인해 그 내장이 곪고 있죠.

 

책은 그 서두의 추천사가 정말 좋습니다. 목포대 임춘성 교수님의 글인데, 이분이 다음에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가 보십시오.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본문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읽으면서 정말 놀랐는데, 역자가 원 텍스트 곳곳에 각주로 삽입한 설명들은, 사실 각주가 아니라 독자적인 영화 이론 해설에 가깝습니다. 필자가 당연하다는 듯 꺼내고 적용하는 이론들은, (놀랍게도) 담론에 무지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 맥락에 대해 감이 안 잡힐 수 있다는 배려의 산물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 홍대 등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펼쳐지던 X 세대의 활개 중 가장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가닥이 빚어낸 결과가, 지금 역자 홍지영 선생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런 해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진짜, 역주만 읽어도 회고가 되고 공부가 됩니다. 대륙의 저자(현재는 일본에 기반을 잡고 있는) 류원빙에 거의 한 세대가 뒤지는(한 세대를 앞서도 뭐할 판에) 일군의 문화 평론가 중에 이런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서, 그나마 창피함이 덜해지는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책의 중심 테마로 조안 첸이 잡힌 것도, 저자 류원빙이 소년 시절 열광했던 아이돌이기도 했지만, 이 저자처럼 자신의 조국과 미묘한 스탠스가 잡혀 있는 현실에서도 공통점이 서로 존재합니다. 영화 공부도 될 뿐 아니라, 지식인과 조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가능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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