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타이쿤 환상의 숲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근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은 본디, 가문의 배경이나 번쩍이는 학벌 같은 것의 도움 없이, 그저 밑바닥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타고난 재치와 약삭빠름, 대담함, 번득이는 한순간의 영감 같은 것만 믿고 힘차게 거리를 누비며 거부(巨富)를 그러모은, 업스타트 제왕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는 건,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런 자수성가형 야심가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그려낸 데에도 한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라스트 타이쿤>은 미완성작입니다. 한국어 역자와 편집자 에드먼드 윌슨의 평가에 따르면, 작가에게 불과 몇 주의 시간만 더 주어졌어도 대작 하나가 멋진 모습으로 완성되어, 문학사상 금자탑 하나가 우뚝 세워졌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작가 사후 신속히, 그리고 꼼꼼한 성의가 기울여져 탄생한 이 판본만 보아도,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드라마, 그 속에 녹아 있는 사회에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이 점은 중요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채 보이지 않던 개성이요 성취라서입니다) 등을 충분히 음미하고 그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따라서 까뮈의 <최초의 인간>과는 경우가 다르게, 완성작이 주는 것 못지 않은 감흥과 들뜸을 완독 독자들에게 충분히 안겨 줍니다. 사십 년 전 이미 영화로도 한 번 만들어졌으며(작품이 쓰여진 때로부터는 대략 삽십 년 후였습니다), 최근 TV 미니시리즈로도 새로 제작이 이뤄진다는 소식입니다. 오히려 미완성작이기에, 열성과 상상력을 동시에 지닌 독자들에게는, 오픈된 여백에 마음껏 뛰어들어 인물들의 품평을 하고, 나 같으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겠다는 식으로 "참여"를 할 여지마저 던져 줍니다. 특히 편집자 E 윌슨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후 그가 남긴 원고와 메모, 집필 계획 등을 모두 모아 자신의 해설과 함께 이 책에 실었는데, 독자로서는 "일류 소설가의 작업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하는 생각에, 미처 못 채워 온 호기심을 마음껏 달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먼로 스타입니다. 그의 이름 철자는 Stahr이지만, 발음이 유사하기에 읽는 이들은 이 "신동" 제작자가 주체로 행하는 동작, 주어로 기능하는 문장에서 일일이 "하늘에 뜬 찬란한 별"로 동일시하는 (자발적) 착오마저 저지릅니다. 비단 독자만의 과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를 경계하거나, 그를 두려워하거나, 그를 지독히 혐오하여 죽이려 들거나, 그에게 굴복하거나, 그를 존경하거나, 그를.. 사랑하거나, 여하의 입장 차이에 관계 없이, 그를 항성 삼아 주위의 궤도를 도는 행성, 위성과도 같은 위치를 잡고 있습니다.

먼로 스타의 직업은 영화 제작자입니다. 이 소설에서 (한국어 번역본에서도 물론)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프로듀서"입니다. 한국의 어느 방송국 PD가 미국에 업무차  방문했는데, 자신의 신분을 "producer"로 소개한 명함을 내미니까 다들 이상한 눈으로 보더랍니다. 이렇게 젊고 행색도 캐주얼한 차림이 무슨 producer냐는 거죠. 미국에서 producer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대자본을 갖고 영화 산업을 운영하는, 혹은 개별 기획을 발주하는 사업가이지, 고용된 director, 연출 감독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이도 지긋할 뿐더러, 거동시에는 리무진과 스포츠카를 편의에 따라서 골라 몰 재력이 되어야 하며, 이 책에 잘 나오는 묘사처럼 유능한 스탭, 재주꾼들을 상황에 따라 고용하고 부리고 지휘하며 "짜를" 수 있는 독재자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재능보다 남들의 재능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단, 남들의 무능에 대해서도 가차없다는 게 함정).



영화 제작자란 명함을 내밀며 행세할 수 있는 저명인사가 미국 전체(동부, 서부 통틀어)에서 몇 되지도 않지만, 사업가 중에서도 "프로듀서"라고 하면 대단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사업 감각도 좋아야 하고, 큰 조직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 조율,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외에, 대중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 꿈과 기호를 (환상 속에서나마) 충족시켜 주는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가와 예술가 노릇을 모두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재능과 자질이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먼로 스타가 하는 일(비즈니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타 씨의 나이가 몇이냐 하면 서른 일곱입니다. 남 밑에서 일하는 처지라면 이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혹 프리랜서라고 해도, 이미 크리에이티브가 시들어 갈 때입니다. 그러나 먼로 스타는 제작자, 회장님입니다. 남들 애써 노력해서 이제 중역 명찰을 달아 볼까 고민하는 나이에, 그는 수백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수십만 명이 버는 급료 상당액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수천 만 관객을 웃겼다 울렸다 할 수 있는 위치라는 뜻입니다. 이러니 그가 나이 서른 일곱에 "신동"이라는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 비록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그 반대가 아닙니다) 대학교 3학년 여학생 세실리아 브래디에게는 "손을 대기에 난 너무 늙었어."라며 의뭉을 떨지만 말입니다.

미완결작이니 장담은 못 해도, 먼로 스타 회장님은 정말 세실리아 브래디(교차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는 대목에서 나레이터이기도 합니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어려서 여자로 안 보이기도 하고, 진성 워커홀릭이라 일이 애인인 이유도 있습니다. 그의 라이벌이자 일시 동업자인 세실리아의 부친 브래독 브래디와는 이 점에서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도 않고, 오로지 탐욕과 야수적 적개심에만 움직인 채, 이 주인공 스타를 파멸시키려 획책합니다. 브래디 씨의 이런 약탈자 기질은, 훨씬 나이 어린 비서와 밀통하다 딸 세실리아에 들켜("아빠 어디 아프세요? 왜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시고 기운도 없어 보여요?") 망신을 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지만(그리고 자신을 딸로서 지독히 아끼고 자랑스러워 한다지만), 이런 비열하고 부족한 남자,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알아차렸기에, 세실리아는 반발심에서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먼로 스타에게 접근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너무도 아릅다운 눈빛, 일에 몰두할 때 꿈꾸는 듯한 특유의 표정" 운운하는 걸로 보아, 진짜 한 남성으로의 매력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와일리 화이트와 사귀고 있긴 하나(스타 회장은 신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 남자는 2순위일 뿐입니다.

사업상 라이벌이자 감정적 원수인 자의 딸과 묘한 관계에 놓인다는 설정은, 이 소설이 나오고 십여 년 후에 발표된 에드나 퍼버의 장편 <자이언트>에서 베네딕트와 링크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물론 1) 베네딕트가 누대의 지주 명문 가문 출신인 반면, 브래디와 스타는 둘 다 밑바닥 출신이라는 점, 2) 먼로 스타는 순수한 마음을 아직 잃지 않은 영혼이고, 브래디는 구제불능으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자이언트>와는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업판에서야 아직 어린(?) 나이라서인지, 스타의 마음씀씀이나 감정의 동선이 참 순진한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는 직원이나 거래 상대방에게 직선적 어조로 면박을 주기도 하고, 현장에서 한창 작업 중인 감독(스탭 레벨이 아니고 무려 감독입니다- 레드 라이딩우드- 이름도 참...)을 바로 짜르고 현장에서 대체 감독을 바로 불러들이기도 하합니다("찍던 씬은 마저 찍고 갈게요.""아니, 다른 감독이 벌써 들어와서 찍고 있습니다. 당신 코트는 내가 여기 가져 왔으니 다시 들어갈 필요 없소, 미안하게 되었네요. 다음 기회에 같이 일합시다.").

작가의 생리도 훤히 깨치고 있어서, 능률을 못 발휘한다 싶은 작가(보통 2인 1조로 돌립니다)가 보이면 바로 다른 팀을 투입합니다("작가로서 지나친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쉬시고 집에서 몇 개월 정도 쉬며 부담 없는 창작에 먼저 몰두해 보십시오."). 이렇게 소모품으로 부려지는 "작가(원어는 writer입니다. 이 단어는 author와는 구별되죠)"와는 달리, 영국 본토에서 모셔 온 진짜 작가(author)에게는 그 대접이 깍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제작자가 왜 제작자인지, 영화 따위라며 애써 경멸하려 드는 구세대 인사에게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실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어때요? 이러면 관객이 정말 다음 씬이 궁금해서 계속 보지 않겠습니까?" "대체... 그런 솜씨가 있으면서 왜 당신은 내게 페이를 지급하는 거죠?(직접 쓰면 될 것을- 진심 탄복해서 하는 말입니다)"

경영자는 (이 소설에서 스타 본인의 입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무엇이 어디에 있고 그게 필요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용인술입니다. "내가 커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구(그래서 자기가 사장이라는 뜻)." 하지만 그는 경영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어느 예술가 못지 않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먼로 스타를 대신할 사람은, 이 헐리웃 바닥에 거의 없습니다. 밑바닥에서 숱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성장하고 이치를 터득한 자라, 사람들 마음을 파악하고 급소를 찌르는 일에 아주 능합니다.

이 소설은 이런 영화판의 비사, 생리만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대공황 이후 극심해진 빈부 격차, 그로 인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예리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이런 대목에서는 "(스스로 인정하듯)배운 게 없는" 먼로 스타가 나설 수 없고, 부친에 대한 반항심에서 리버럴로 기우는 듯한 세실리아가 역을 맡아, 상류층이 바라보는 좌경화에 대한 경계, 혁명에 대한 공포, 속물스러운 동류 계급에 대한 거리두기 등 모순된 감정의 복합을,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공황을 미국 신흥 부유층이 주도한 "사다리 걷어차기"로 규정하는 작가 피츠제럴드 본인의 견해도 은근 짙게 묻어납니다. 이무렵 경제적으로 대단히 고전하던 그에게(더군다나 지식인이었던 처지로), 혁명 분자들의 이런저런 주장이 그에게 결코 남의 사정이 아니었겠죠. 먼로 스타는 스스로를 "러시아에 대해 지극히 공정한 태도"를 유지한다고 평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도 같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배역은 안 되고,... 뭐랄까 몰락한 러시아 귀족 역을 맡기면 딱이겠군.""사실입니다. 망명 귀족이에요..... 단, 소신이 공산주의라 그 역은 절대 안 맡겠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독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 이 작품의 원제는 The Love of the Last Tycoon입니다. love of 가 빠진 건 영화제목에서만 그렇습니다. 세실리아는 일방적으로 스타를 좋아했지만, 스타 씨가 좋아한 여성은 따로 있습니다. 죽은 처와 너무도 닮은 캐슬린 무어가 바로 그 대상입니다. 영리하고 빈틈없는 그는, 누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아내와 닮은 배우 하나를 고용한 것 아닌가 처음엔 의심합니다. 헌데, 예리한 그의 눈으로도 보면 볼수록 캐슬린은, 자신의 the one 그 자체였습니다.... 쿨한 콜걸(나중에 정체가 밝혀지죠) 에드나의 친절한 소개로 캐슬린을 만나게 된 먼로 스타는, 그녀와 하룻밤 진한 정사를 나누고 지속적 관계를 맺으려 하나 여의치 않습니다. 소설의 애정 관계는 이처럼 밀도를 잃지 않은 다각적 양상으로 이어지는 게 또한 빼어난 점입니다.

연예인처럼 화려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자신이 몸담은 체제와 사회에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지식인적 냉정을 지키려 했던 스콧 피츠제럴드. 미완인 상태로도 워낙 웅대한 스케일과 치밀한 계획으로 시작한 작품이기에, 거진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읽어도 여전한 몰입감과 감동을 줍니다. 한국어로 이 작을 드디어 접할 수 있는 게 행운이었고, 상세하고 친절한 역자 후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2 - 누구를 사랑하든, 누구와 일하든 당당하게 살고 싶은 나를 위한 심리학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2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당한 나로 사는 것, 말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엔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미는 자아가 있고, 속으로 상처 받으며 약한 모습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자아가 따로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상처"가 두려워 몸을 움추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란 본래가 이렇게 약한 존재인가, 학교에서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원활한 대인관계를 가꾸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진짜 상처가 무엇인지, 상처를 낫우고 아문 자리 위에서 새롭고 건강하며 매 순간이 기쁨 가득한 관계를 새로 구축하는 비결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아니 일방적으로 뭔가를 전달하려 든다기보다, 독자와 청중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몇몇 전문가의 시도, 그리고 그 성과물인 저서들은 참 고맙기까지 합니다.

 

고답적인 형이상학 담론 저술도 저술이지만,  사회에서의 경제활동 참여에 열심인 일반인을 위한 실용서의 제작에도 성의를 소홀히하지 않는 독일어권 저자들의 좋은 챋책이 요즘 부쩍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트렌드에 속한 일군의 도서 중 처음 읽은 것은 "번아웃 증후군"을 다룬 어느 독일 신경생리학자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일 중독, 성과(成果) 강박, 속도에 치어 태생적으로 지닌 리듬과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주위에 끌려가며 사는, 우리네 직장인들의 모습과 독일인들의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면,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그로부터 수십 년 앞서 달성해냈습니다(어구의 기원이나 성격이 분명치 않다는 지적도 있긴 합니다만). 이처럼 폐허 속에서 각오를 다지며 당대와 후세에 무엇인가를 남기려 분투한 근성과 열의 면에서 두 민족(국가) 사이에 유사한 점이 많기에, 일류 전문가-저술가의 작품이 우리 독자들에게도 호소하는 바 많은 건 어쩌면 분명한 인과가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저자 배르벨 바르데츠키 박사님의 책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은, 우리 한국에서도 정말 많은 독자들이 찾아 읽은 화제작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 독자들의 대열에 참여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힐링을 그 목적으로 표방한 책은 여러 수십 권이 이미 서점에서 독자를 만난 바 있습니다. 인생사 별스러운 바 없는지라 결론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서인지, 아니면 저자들이 서로를 참조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용을 보면 비슷비슷 대동소이, 어느새 책과 책을 오가 본 독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 책은,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다짐과 오기, 그리고 강한 자존감이 적절히 배어나는 선명한 느낌의 제목도 제목이지만, 세심하게 편집된 챕터마다 진정성 있는 저자의 사연, 조언이 꼭꼭 채워져 있어서 그토록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두번째 책의 원제는 <Souverän & Selbstbewusst>입니다. "자신만만하고 자의식 강한 (나)"의 의미인데, 확실히 한국어 번역 제목이 잘 붙은 것 같습니다. 책 내용이 한 문장 안에 다 압축이 되며, "너에게 부당하게 상처 입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선을 넘어 너에게 어떤 상처를 주지도 않겠다. 나는 관계의 참된 승자가 되겠다"는 은근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1권도 그렇고 이 후속작도 그런 저자의 주장과 격려가 곳곳에 녹아 있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소외감 없는 과정을 통해 자발적 힐링이 가능하게 돕고 있습니다. 1권이 "상처(Kränkung)를 입고서도 잘해 나가는 관계"를 표방했다면, 이 후속작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잘 어루만져 가며 이끌어 나가는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2권에서(우리처럼 1,2 하는 넘버링은 없지만 독일어 원서들도 두 권이 깊은 연계를 갖고 전후작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이 왜 상처를 받는가? 그것은 자기 회의감 때문이다. 라는 전제적 문답으로 책 전체의 논의를 일관되이 꾸려가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어원상 "(자기)회의"는, 둘(zwei)로 쪼개어진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의 doubt도 마찬가지로서, 잘 보면 안에 double이 들어 있습니다. (대상이) 하나라면 고민할 게 없는데, 둘로 쪼개지니 이건지 저건지 확신이 안 생기는 거죠. 저자는 "원시 시대 거대한 매머드를 만난 혼자인 인간이, 무기를 들고 그대로 돌진할지 아니면 멈춰 서야 할지 '회의'가 들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지"를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며, 오히려 효과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장치라고 정리합니다.

 

저자 바르데츠키 박사님의 책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은, 1) 자신이 강연이나 수업, 연구를 통해 접한 많은 사례를 잘 정리, 소화하여 책에 담아 실감, 공감 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점, 2) 독자 여러분과 내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며, 예컨대 여러분만 쉽사리 상처를 입곤 하는 못난이가 아니라, 상처의 힐링을 도와주려 나선 나 역시 쉽게 상처받고 자기 회의감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동병상련 처지"임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녀는 구체적이고 감정이 살아나는 서술을 통해, "상처는 누구나 받고 입고 지니고 가는 일상인데, 왜 당신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괴로워하는가? 다만 당신이 빨리 상처를 정리하면 할수록, 당신이 남들보다 더 행복해질 수는 있다."는 사실을, 친절하고도 진실되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회의에 쉽게 빠지지 않거나, 빠지더라도 곧 벗어나 평정심을 찾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심지가 굳다"란 말을 씁니다. 근거 없는 자기확신에 빠져 파멸, 실패로 무모하게 돌진하라는 게 아닙니다. 결국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가감 없는 성찰이, 든든한 기반의 자기 확신을 마련하고(최소한, 바닥 없는 자기 회의에 빠지는 걸 막고), 타인으로부터 상처 입지 않는 바탕까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결국 현실은, 이 세상은, 살기에 겪기에 제법 괜찮은 곳임을 알게 됩니다. 혹시 나의 환상을 깨는 순간 세상이 지옥이 되어 나를 덮칠 것 같다는 괜한 두려움을 버린다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장벽과 허울도 어느새 사라지고, 상처보다는 활력과 기쁨의 원천이 주위에 더 많다는 점도 안도하며 깨닫게 될 것 같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연대 - 비정한 사회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이승욱 지음 / 레드우드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대(solidarity)란 프랑스 혁명 3대 정신 중 하나인 "박애"와 매우 밀접한 관계입니다.  동양에서도 옛 성현들은 "군자는 화이부동"이라 하여, 시류에 간사하게 영합하는 처신을 소인배의 가장 큰 악덕으로 보되, 주위의 공론과 대세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처세의 미덕도 잊지 않고 떠올리게 했습니다. 소인은 힘에 버거워 애써 쫓아가는 시류를 두고 "대세"라고 애써 미화, 왜곡하지만, 둘의 차이는 건전한 양식을 지닌 모두의 눈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판명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디 사회적 존재라서, 아무리 자유로운 개성, 자각, 자긍을 갖고 사는 개인이라도 고립된 섬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소통, 관계의 패턴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갈 것이냐 하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이런 전제에서, "연대"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정신분석가인 저자 이승욱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바는, "마음의 연대"입니다. 사악한 인간, 남의 정당한 몫을 뺏으려 드는 인간, 질서를 파괴하고 지배욕을 떳떳지 못한 방법으로 충족하려 드는 인간, 중상모략으로 검은 속을 채우려 드는 인간들도, 자신들끼리, 아니면 순진한 타인들을 꾀어 "검은 연대"를 꾀할 수는 있습니다. 저자분이 내세우는 건 그런 연대가 아니라, 바른 마음 열린 자세를 지닌 양식 있는 모두가 내릴 수 있는 판단으로, 파멸적 경쟁(이 역시 그를 부추기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의 책동이 있죠)이 아닌, 파편화하고 원자화되어 무기력해진 개인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연대, 전선을 구축하자는 제의입니다.

 

처음에 책을 펴기 전에는 "제목이 별로 임팩트가 없다"고 느꼈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책에 붙을 제목은 이것 말고는 없었겠고, 책을 위해 책 제목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의 연대라는 주제를 위해 책의 몸을 그저 빌렸을 뿐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처럼 체제 위기가 고조되고, 생산성이나 효율성은 그것대로 부진하며, 정치적으로나 경제 구조상으로나 양극화가 진행된다는 실상을 감안하면, 이 "마음의 연대"는 새로운 시대 정신(Zeitgeist)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독자도 그 수가 제법 되는지, 인터넷 서핑하다 보면 "마음의 연대가 필요한데!"를 외치는 글도 제가 간간히 구경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서서히 연대의 작은 불씨가 피어나 마침내 온 들을 뒤덮게 되는 걸까요. "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이 책은 우리 사회의 근본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그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 "심리학적 도구"를 쓰고 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사실 인간의 행동이 왜 그런 패턴으로 이뤄지는가, 저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려면 그게 인간의 거동(bewegung)인 이상 심리의 발생, 전개 기제를 더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사회 전체에 적용하려면, 그 사전 준비 작업으로서 역사에 대한 고찰이 또 필요할 수밖에 없죠. 저자는 유난히 질곡과 고비가 많았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며, 왜 특정 세대가 특정 정치인에 대해 특정한 감정과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일종의 발달 과정상 심리 구명(究明) 방법론을 개인이 아닌 집단, 세대 전체에 적용해 "부가가치 창출, 신분-계층 상승, 저축 잔고의 증대, 위신의 유지"에 대한 거대한 규모의 총체적 강박이 오늘날의 정치 지형 고착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성장지향의 가치관(때에 따라 윤리관)을, 환경상의 궁핍이 낳은 정신적 장애 요소로 꼽는 것입니다. "왜 OOO을 지지하는가? 정신이 병들어서이다." 이게 정치 이야기로 시작해서 나온 결론이라면 심드렁하게 지나칠 수 있는데, 심리학 베이스에서 출발하니 다른 관심과 주목을 모으는 거죠.

 

지금의 세대는 다르다는 거죠.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할아버지가 겪은 시대의 제약, 아픔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지난 세대가 깔아 놓고 지나친 시대의 또다른 모순과 부작용을, 온갖 상처를 받으며 부대껴야 하는 그들에게, 지난 세대가 "그들만의 역경"을 헤쳐 온 방식으로 극복하라고 조언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1) 환경 조건, 문제의 성질이 다르고, 2) 애초에 지난 세대가 가친 가치관부터가 뭔가 근본적 잘못을 안고 있기에, 지금 세대가 귀따갑게 듣고 있는 처방 아닌 처방, 훈계 아닌 훈계는 그들의 상처를 전혀 치유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치유는 고사하고 오히려 상처에 독극물을 주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게 저자의 시야입니다.

 

효율성의 극대화, 타인보다 나은 지표의 달성, 오늘보다 수치상 반드시 개선되어야 하는 내일, 일초일각도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는 모든 시간의 자본화, 이런 패러다임으로는 시스템의 붕괴, 파산을 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전망. 이 대표님은 진단에 이어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연대입니다. 왜 남성은 여성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유지하는가? 왜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서까지 부당한 굴레를 씌우는가? 폭력은 결코 소통의 방편이 될 수 없음에도, 약자조차 종종 폭력에 의존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부모들은 자기 친자식에게조차 혈연이 빚은 자연스러운 소통 경로를 통하지 않고 "외부의 프레임"을 통해 대하고 마주치며 대립하는가? 신자유주의가 모순에 가득한 건, 결국 인간 본성을 배반하는 출발점에서 그 태생을 맞이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소신입니다. 이를 해소하고 지양(止揚)할 방법은,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연대" 뿐이라는 게 결국 최종적 결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어의 무지개 - 언어학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종석 선생님의 언어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정책적 제안, 한때 논란 대상이 되었던 현안에 대한 견해,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던지는 주장 등도 포함되어 있지만,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본격 언어학의 토픽과 논제에 대한 저자만의 명쾌한, 그리고 대단히 이지적인 분석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훌륭한 글쓰기 선생님이 되기 위해 꼭 언어학을 천착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장가이자 비평가인 그의 빼어난 글, 저술, 기사들이 어떤 지적 배경에서 탄생을 할 수 있었는지 독자로서 잘 배울 수 있는 책인 점은 분명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이나, 울림이 깊은 경구를, 능숙히 짓고 구사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자신과 타인이 진술한 바를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당부당을 논하거나, 최소한 자신의 뜻하는 바를 오해의 여지까지 최소화하면서 정확히 전달하는 문객들은 정말 보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잘 쓰려면 이처럼이나 탄탄한 이론적(문장론, 소설 작법론 등을 떠나 언어학에까지 이르는) 베이스가 깔려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평소에 일상을 대하고 개념을 접하는 태도가 이처럼이나 치열하고 면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각성, 최소한 자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꼭 전문 작가, 저술가라야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무직 종사자라면 우리는 누구나 업무를 처리할 때 글, 글월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행합니다. 아니, 사무직이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결국 글은 올바르고 정확한 생각의 반영이기에, 글 잘 쓰려면 먼저 그 생각이 건실하고 명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어떤 직분에 종사하든, 우리의 삶을 올바르고 건강히 살아 내려면, 생각이 맑고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글쓰기 공부는 곧 삶의 건강성과 성실성을 확보하는 과정과도 통합니다.

 

이 책은 최소한 해당 분야의 학부에서 익히 다룰 만한 언어학상의 여러 논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평소 생각해 볼 만한 기회를 전혀 갖지 않았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감에 있어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의 글쓰기 이론서에 대해 큰 공명을 가질 수 있었던 독자도, 이 책에 이르러서는 그리 독해, 소화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헌데, 역시 평소에 약간만이라도 성실한 고민을 가져 본 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경이로운 성취를 달성하고 있는지 감탄하게 될 겁니다. 해당 학문(즉 언어학)을 학부 수준에서 다뤄 본 이라 해도, 그리고 제법 만족할 만한 성과를 체험한 이라 해도, 언어학 자체가 워낙 기술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에(노엄 촘스키가 괜히 천재라 불리는 게 아니죠), 초급 교과서가 다루는 내용의 완전한 터득도 그리 수월한 단계가 아닙니다. 결코요. 그런데 이 책은, 그 어려운 주제와 기술을 참으로 쉽게 풀어 주고 있습니다. 이해했던(혹은 주관적으로 그리 여겼던) 내용에 대해서도, "거기에 이런 의미까지 담겨 있었던가?"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거의 매 페이지마다 저자 고 선생님은 독자에게 안겨 주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의 지식이 대부분의 학생, 독자들에게, 그저 죽은 텍스트로 머물고 마는 건 결국 내용 이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용의 이해가 십분 이뤄졌다 한들, 자신이 부대끼고 살을 맞대는 현실과 유리되어 지식이 딴 공간에서 따로 놀고 있다면, 그런 지식은 그저 죽은 지식일 뿐 어떤 영혼, 정신에게도 감화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고 선생님의 이 책은, 익히 알던 지식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풍습, 유행, 습벽 등과 밀접히 연관지어 설명, 혹은 논설하는 특유의 치열한 방법론 덕에, 언어학이 언어학을 넘어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과 교감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갖게 해 주었습니다. "~학"이라는 접미사를 다 떼어도 됩니다. 언어, 언어학의 문제가, 바로 참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라는 점을, 이 시원시원하고 빈틈 없는 저술은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문도 깁니다. 우리가 아는 한국어의 정체성, 단일성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또 그 실체적 "단단함"은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 줘야 하는가? 우리가 그토록 당연히 여겨 온 "한국어의 유니크함"에 대해, 저자는 그 근본에서부터 의문을 제기합니다. 보통 교과서에 잘 나오는 얘기로, "우리-여기선 영국인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혹은 그 이전의 문헌을 읽을 때,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토스카나 방언으로 된 <신곡>을 읽을 때, 현대 이탈리아인들은 훨씬 적은 수고만을 들일 뿐이다."가 있습니다. 고 선생은 이 서문에서 그와 비슷한 얘길 하십니다. "우리는 신라의 향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때에는 양주동 선생이 행한 공인된(?) 해석을 통해 공부했다. 허나 그 해석이 과연 유일한 해의인지, 아니면 큰 오류를 드러냈는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대략 이런 취지로 선생은 예시를 들면서, "저렇게 먼 고대까지 갈 것도 없이, 15세기 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공시적 방언의 관계"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방언도 아닌 별개 외국어의 관계인지도 모르나, "어족의 구획에도 정치적 고려가 끼어들듯, 널리 방언에 포함시켜야 할 범주도 정치적 고려에 따라 경계가 신축되기 마련이다"는 요지로 이야기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걸까요? 물론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순수 학문에서 연구 대상이 되는 모든 논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죠.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닌 고종석 선생이기 때문에, 이런 인트로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책 초중반에 나오는, 그리고 대략 10여년 전 큰 반향과 소란(?)을 불렀던,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논의가 그 현실적합성의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절대적 수호 대상, 지향 가치로서의 "한국어"가 허상에 불과하다면, 현실을 보다 편하고 원활히 살아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영어"를, 법적 공용어로 포함시키고 본격 공교육, 활용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에 훨씬, 심리적 저항이 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의는 그 자체로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한국어, 한국 문학이고, 어디서부터가 외래성을 띤 순화 대상인가?"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소득의 획득 경쟁에 있어, 신분 혹은 능력상의 중추적 준별 표지로 작용하는 게 영어 구사 능력입니다. 즉, 공용어로 쓰든 그렇지 않든 이미 영어의 지배력은 한국 사회에 엄연한 현실로 끼어 들어 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종석 선생의 이 "언어학 수상록"은, 그 자체로 학문적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지금 지성계, 혹은 정책 결정 당국자들 사이에 바로 핫 이슈로 떠오를 민감한 문제에 도화선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는 거죠.

 

언어1.jpg

 

외래어가 무분별하게(이 역시 막연한 표현입니다. 어디까지가 분별이고 무분별인지, 어떤 통일적 기준이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유입, 유통(통용)되고 있으니, 순화를 해야 한다며 국어원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무슨 지침 같은 것을 내어 놓습니다. 다 좋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수백 년 독일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언어학자들, 혹은 운동가들이 내놓고 전개한 바 있습니다. 초기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흔적의 제거를 부르짖었고,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서는 영어 흔적을 몰아내려는 쪽으로 노력했습니다(이 문장까지, 책에 그대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시도 중 어떤 것은 성공했지만, 많은 것은 실패했습니다. 사실 경과야 더 지켜 봐야 할 일이었는데, 20세기가 그 절반을 채 지나기 전 히틀러가 광기의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국제 사회에서 독일이라는 (매우 우수한 저력과 성취를 자기 것으로 했던) 나라는 위신을 거의 상실했고, 국가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이 땅에 떨어지자 그 언어의 위신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독일인들 역시 배타적 성향을 버리고, 미국 문화, 제도의 압도적 트렌드 생성력을 거부하지 않은 채, 일상에조차 태연히 영어를 섞어 쓰기에 이르릅니다. 고 선생은 책에서(정확히 말하면 이 책 출간 시점 이전에 타 매체에 기고한 논설에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독일, 프랑스 신문을 보면, 이 나라 기자들이 영어 섞어 쓰기를 얼마나 즐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신문뿐에서만의 사정이 아닙니다(고 선생이 언론인 출신이므로 맨 먼저 신문에 눈이 가시겠습니다만). 전방위 전영역에서의 현실입니다. "섞어 쓴다"는 의식도 없습니다.

 

독일어는 외국어의 영향을 맹렬히 거부했고, 영어는 그렇지 않아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고 먼 혈족 관계에 놓인 독일어와 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품었습니다. 사용 주체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하는 언어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여, 결국 자체 생명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논의가 왜 민감한 부분이냐면, 영어 배척론(?), 혹은 극성스러운 공용화 반대 입장과, 그와 대립하는 진영의 다툼이, 최소한 10년 전에는 진보 좌파와 자유주의(보수 진영) 간의 대립으로 고스란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잘못 꺼냈다 하면 또 정치 싸움이 되고 마는 겁니다. 새삼 강조할 것도 없이, 고 선생은 진보 진영에서도 대표 주자로 나설 만한 논객입니다. 그가 이 주장을 이렇게 불편하게, 혹은 공을 들여 전개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진영(?) 사람들의 몰이해상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2.jpg

 

선생은 참 재미있는 논점도 짚고 있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지식인, 귀족들간의 공용어 노릇을 했던 라틴어는, 마치 동아시아의 한자가 수행한 기능처럼, 신분 간의 장벽을 치고 특권의 표식으로 기능한 "원초적 한계를 지닌 보편어"였습니다. 허나 영어는 어떻습니까? 물론 영어도 여러 층위가 있고, 수평적 관계의 방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풍성한 구어 표현, 권위를 가장하지 않는 일상의 자연스런 모습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문자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을 척척 끄집어 내어 말로 옮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조선조에서 한문 잘하는 사람이란. 남들이 잘 쓰지 않는 까다로운 말과 어휘를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권위와 원칙적으로 유리되었다는 점에서(독일어만 해도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책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영어는 오히려 경계를 허무는 진보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서평 쓰는 제가 제 나름대로 정리하는 거라 저자가 쓰신 본문의 표현과는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하지만 큰 뜻에서는 서로 무리 없이 통할 것입니다). 어찌 좌파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못할망정 이를 막고 나설 일이겠습니까? 이건 저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절감한 부분입니다. 한문은 남들 안 쓰는 말, 알쏭달쏭하거나 심오한 말을 써야 그게 유식한 겁니다. 하지만 영어는, 그저 기발하고 적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게 영어가, 그 고답적인 한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진화한 흔적입니다.

 

선생은 "영어가 이처럼 독보적 지위로 군림하게 된 건, 영어 vs 프랑스어 라는 단일 전선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예를 들듯(저 위에 적었습니다), 독일에서 일어난 소위 "순화 운동"도, 종국에는 영어vs독일어의 뚜렷이 형성된 전선의 예증입니다. 또한 "정치적, 인종적, 민족적 배타성이 정치적으로 개입, 그 영향을 받은 언어는 결국 바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고 하시나, 그 예로 스페인어를 드심은 비록 자세한 논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으나, "단일 국가 내부의 까딸루냐, 바스크 등에서조차 수용되지 못함 → 결국 세계어로서의 기초 발판은커녕 국경 안에서의 공용어 지위도 취약 → 그러나 영어는 포용성 덕에 웨일즈, 스코틀랜드, 식민지에서도 널리 수용됨 → 한 나라를 넘어 세계적으로 수용된 언어" 라는 전제를 깐 결론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극심한 대립상을 보인 아일랜드(에이레)에서 왜 영어가 확실한 공용어(내지는 모국어)로 자리잡았으며, 정치적 패퇴와 지리멸렬상과는 무관하게 라틴아메리카의 수 억 인구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현실과는 이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이 명제는, 오로지 히틀러가 제대로 진로를 망쳐 놓은 "독일어"에만 적용될 것 같습니다.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논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책 후반부에는 한국어 고유의 특질과 최근의 흥미로운 변화 추이에 대해 자세한 논급이 있습니다. 이중모음 ㅚ 와 ㅙ(심지어는 ㅞ까지)가 이미 변식력을 상실했다는 말씀(그래서 외적과 왜적은 이미 구별이 안 되는 웃지 못할 현실), 서울 방언의 특성은 그 높낮이 없이 밋밋한 어조에 있다는 지적(오히려 독특한 억양을 발전시키는 게 다른 나라 대도회에서의 경향인데도 불구), 부엌은 현실에서 이미 부억이 되어 버렸다는 진단 등은, 언어학에 대해 아무 지식이나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도 흥미를 당기게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여러 시점,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논문, 기고를 모은 것이므로, 완전한 구조적 통일성과 논의의 일관성을 갖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의 비판 정신과 학문적 논조가 일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 책은 한 번에 저술된 기획처럼, 기술적 지식 외에 수미일관한 논리의 힘으로 독자를 매료시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 - 가사로 읽는 한대수의 음악과 삶
한대수 글.사진 / 북하우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표지 사진도 그렇고, 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사다 모으신 몇 장의 앨범 재킷도 그렇고, 한대수 선생의 얼굴을 담은 컷들은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한 번 보면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마스크, 표정, 주름살, 눈빛... 저는 그분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도 아니고, 지금 들어도 그리 깊은 공감을 이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들으며(혹은 들을 뻔하며) 대학 시절을 보낸 어른들, 그리고 (세대를 초월하여) 여러 뮤지션들은, 그의 가사, 곡조, 보컬에 녹아 있는 깊은 feel과 자유혼에 완전히 매료된다고 합니다. 한대수의 음악은 지구상에서 한대수만이 만들고 부르고 연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이작 도이처는 레온 트로츠키의 전기 3부작을 쓰면서 마지막 권의 제목을 <추방당한 예언자>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이 한대수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이분 역시 그런 별칭으로 (감히)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말끔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신의 음성을 전달했다기보다, 일종의 법열에 들떠 피안의 진리, 묵시의 비전을 대중에게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대수 선생이, 엄혹한 군사 독재가 민중의 숨줄을 짓누르던 시절, 노래를 통해 작시(作詩)를 통해 이 땅의 민중과 교감하려 했던 바는, 자유와 해방과 인간 본연의 기쁨의 회복 같은, 특정 신앙에 구애 받지 않는 보편의 휴머니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음악이 나왔을까 싶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투박하고, 그의 가사는 몽환적입니다. 이 책은 별권부록으로 악보집이 함께 딸려 있고, 본권에는 그가 찍은 사진, 그가 만들고 부른 대표곡들의 가사, 그리고 그의 비밀스런 사연과 가족사,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과 세계인들을 향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명문 경남중을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고교를 나왔고, 대학 졸업 후 유력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다 낸 음반이 모조리 판금 조치가 되는 바람에 다시 도미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첫번째 부인은, 안정된 생활의 보장도 마다하고 "당신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미국으로 가자"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결국 파경을 맞으시긴 하나, 저는 당시의 여성이 이 정도로 과감하고 깨어 있는 생각,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부창부수, 과연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싶었습니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가사도 사실 난해합니다. 그의 음악에 공명하는 이들은 그런 문자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열광을 보내었습니다만, 이제 칠순을 바라보시는(그리고 건강도 썩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이 거장의 세계를 후대인들이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처럼 작시, 작사의 동기가 무엇인지, 각 시어가 어떤 해의로 다가와야 하는지, 아티스트, 포우이트 본인이 직접 내린 "유권해석"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도 출간이 적실했습니다. 우리 젊은 세대는 가사만 보아서는 전폭 몰입이 어려우며,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배경음악으로 그의 마스터피스를 깔아 놓고 독해해야 비로소 온전한 감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작사는 그의 작곡만큼이나 그의 유니크한 감성, 예술혼의 산물이기에, 애써 독립문학으로 간주하자면 그에 알맞은 해석론 전개가 역시 가능하긴 할 것입니다.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거론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입니다.

저는 이분의 존재감을 2000년경, 김현철이 진행하던 KBS FM 심야프로애서 게스트로 출연하셨을 때 청취자로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도 그 무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는 HOT가 한국의 음반시장을 독식할 때였다. 내 봐야 팔리지도 않을 한대수의 음반을 누가 제작할 것인가?" 손무현 등 뜻 있는 뮤지션들이 힘을 모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며, 그는 책에서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HOT와 한대수.... 생각해 보니 정말 모든 코드에서 극과 극이라 할 만한 이들이었네요. 저 무렵만 해도 아직 정력 좋아 보이는, 기질 드세고 직정적인 이미지의 아저씨였는데, 이제 그는 누구의 눈으로도 노화를 부인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 방송에서도 그렇게나 "사랑"을 강조하시더군요.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사랑을 못하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이 책에도 에이즈 관련한 여러 언급이 나옵니다만, 당시의 그는 국제 에이즈 퇴치 기금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이 20대, 혹은 그 부유한 가정에서 귀하게 자란 아동 시절 어떤 모습이셨을까가 궁금했는데, 책 말미에 여러 컷이 실려 있어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최소한 저는 한 선생의 부친이 어떤 경위로 어린 아들,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핵물리학자인 그는 (이 책에서 아들인 한대수 선생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미국 정부에 의해 모종의 조치를 당하여, 납치 후 강제 기억 상실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언급하며 그는 소련의 스파이란 혐의를 쓰고 사형당한 "긴즈버그 부부"의 예를 드시고 있는데, 긴즈버그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 주자며, 그 사건의 주인공은 로젠버그 부부입니다. 집필 중 착오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기억을 잃어 버린 그는 미국인 여성과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이분을 한대수씨는 "미국 엄마"라고 부르시더군요. 물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바대로, 한대수씨에게는 그의 10대~20대를 열성으로 보호해 준 유명 피아니스트인 모친이 따로 계십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 그는 조부모부터 해서 실로 화려한 가계를 지닌 분입니다.

15년 전 방송 출연시에도, 선생은 두번째로 맞은 아내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이 차가 이십 년 가까이 나는 러시아 국적의 여성이시죠. 그 당시엔 언급이 없으셨는데, 이후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생겼나 봅니다. "양호"라는 이름의 귀여운 소녀가 이 책 곳곳에 모습이 나옵니다. 선생도 노령이지만 아내분도 임신 당시 노산이라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아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 이름을 그리 지으셨다고 합니다. 책에는 부인 옥사나 알페로바 여사의 누드가 두 컷인데, 풀 프론틀 샷이니 주의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앨범 자켓에 쓰자고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단 말밖에 안 나옵니다. 아내 사랑이 극진함을 여러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었고,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책 말미에 나오듯 여사는 현재 알코올 의존증으로 매우 큰 고통을 치르시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이 이러시니, 보는 이들이 깊은 우려를 떨칠 수 없겠죠.

책은 깔끔하고 담백한 구성입니다. 다 읽고 나서 "그렇게도 무거운 내용이었던가?"를 생각하며 잠시 놀랐을 만큼요. 신중현은 10.26이후 "하늘이 나를 살리고 박정희를 데려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한대수 선생만큼 한반도의 1970년대를 몸으로 치열히 살아낸 분도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이 유행어로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선생은 그 살아 있는 표본으로서 순일한 이데아를 보여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