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림자놀이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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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휴, 너무 잘 읽었습니다. "너무"라는 부사, 부사어가 문법적 혹은 화용적 오용이 아니라고 강변이 주저없이 나올 만큼, 이런 고퀄의 작품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 가볍게 읽은 것 아닌지 하는 죄스러움이 느껴질 만큼인데요. 뒤표지에 보면 이 작품이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이유 중 하나로 "...가독성이 좋고.... "를 들고 계십니다만, 사실 웹소설처럼 가독성도 좋으면서(진짜 좋습니다), 재미는 따로 재미대로 안기고, 묵직한 울림, 감동, 뭔지 모를 벅참까지 선사하는 작품은 정말 보기 드물게 접해 본 것 같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가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좀 송구스러운데, 그런 좋은 책을 읽고 독후감까지를 쓴다고 하면 이건 한 열 번 정도 더 읽고 서평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들지만, 그래도 일단 쓰긴 써야 할 것 같네요.



처음 조생과 최생 두 백수(...) 선비가 등장하며 여차여차한 곡절을 빙자하여 구성지고 재미진 이야기 두엇이 끼어들 땐(이들은 낙방거사 과거폐인을 넘어 이제 소설폐인까지 겸하려 합니다), 액자는 그저 빈약해도 이런 삽입 설화가 무척 흥미로운 패턴으로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근데 그건 저의 큰 착각이었고, 소설 속 소설인 <아수라>의 창작 동기, 작가, 배후의 사연(과 혹 음모)를 밝혀내려는 본 줄기가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강력했습니다. 나중에는 다소 충격적인(그러면서도 많이 "열린") 결말까지 마련하는데.. 이 강렬한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이야기에 취해서 속독을 하기보다, 미스테리 소설 읽듯 머리로 재구성, 추측을 해 가며 몰입을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분명한 마무리가 충분히 가능하게 전개되는 플롯이면서도, 구태여 작가(이 작품의 실제 작가, 혹은 작중 작가로 제시되는 다른 캐릭터들)는 반쯤은 열린 채로 개개 에피소드를 꾸려 넣고 있는데, 바깥 액자까지도 끝이 그런 식이라 전체가 부분을, 부분이 전체를 모방하는 기묘한 프랙털 구조가 연상됩니다. 소설이면서 소설의 의의("현실의 반영이요 그림자")를 논하는 점에서 자기 지시의 역설을 품고 있기도 한, 다층 독해가 가능한 걸작이었습니다.

 


일단 재미만 느끼려면 액자는 무시하고 아홉 편의 단편만 읽어도 됩니다. <아수라>까지 포함하면 열 편인데, 이 <아수라>는 본편의 복제(..)이므로 수에 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홉 편도, 우리에게 익숙한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 왔거나, 아예 definite(or extended) edition으로 개작한 것도 있을 만큼, 전혀 낯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 가락이라도 어느 소리꾼, 광대, 전기수의 리사이틀을 통하느냐에 따라 감동과 재미의 폭, 깊이가 다르듯, <바보 온달>과 <박씨전>이 이처럼 재미있는 이야기였던가 하는 생각에 새삼 신선한 각성이 몰려왔습니다. 사실 저 두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축약판일 수도 있는데, 뭔가 말 못할 사정 때문에 흐릿하고 모호한 표현에 알듯모를듯 상징만 잔뜩 담아낸 이야기를, 우리 작가님이 현대적으로 화끈하게 복원, 재구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아니, 그게 그런 이야기였어?"). 같은 이야기라도 참 재미있게 풀어내는 분, 박식한 사항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는 작가도 물론 있지만, 원형의 얼개, 함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억지스러운 이념 투사, 논리 비약 폭주는 물론 없고) 이처럼 자기만의 색깔을 잘 꾸려넣는 모습(그러면서도 뭔가 흐릿하던 게 눈에 확실히 어느 순간 들어오게 하는 내공! 마치 "비유를 통해 어려운 이치를 쉽게 가르쳤다는 이어도 표류의 그 스님 같네요),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신 분들은 남들이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메우거나 극복할 수 없는 어떤 갭을, 독특한 솜씨를 통해 반드시 작품 속에 만들어 놓습니다. 학벌, 이거 절대 무시 못하죠.



금오신화나 기타 설화 문학에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나 서사처럼, <능텅감투>에서 주인공이나 스토리는 누가 무슨 잘못으로 그런 비극적 파국을 빚었다는 건지 끝내 모호합니다. 오시원은 먼 친척(인척) 뻘이 될 별당아씨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으나, 금도를 범할 배짱은 전혀 갖지 못한 좀스런 사내입니다. 정체를 모를 도깨비(혹시 별당아씨의 죽은 남편- 자신에겐 먼 조카뻘이나 됨직한 - 의 귀신일지도 모르죠)에게 능소(能消)감투-이게 소위 "도깨비 감투"입니다- 을 빌리고, 꿈 같은 운우의 쾌락을 맛봅니다. 허나, 날이 새고 집에 돌아와 보니 오생은 과연 세상에 공짜가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처용 설화의 처용 역시 그저 관대해서 역신에게 노여움을 자제한 게 아니라, 뭔가 사전에 deal이 있었기에 그렇게나 초연(체념과 허탈함이 가득 밴)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해셕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네요.

<오백 년 해당화 향기>는 제목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몽침 시기 끝까지 고려의 자주혼을 지키려다 죽은 김통정 장군과 그 무리들의 원혼 이야기입니다. 특히 저는 "...한때 귀족과 권귀의 사병, 개돼지 노릇을 하며 기생충처럼 민생과 국부를 갉아먹던 우리였으나, 이곳에서 백성의 인심을 얻고 그들을 대변하며 싸우다가 참된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사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삼별초의 정체성에 대해 학습하며 혼란을 느끼곤 하는데, 작가는 이처럼 간단하게 얽힌 가닥을 풀어주는 군요.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잘하고 볼 일입니다. 제주도란 고장의 저항사와 토색(土色)적 한(恨), 민족 항쟁의 의미, 유생, 학자의 본분에 대한 고찰 등이 두루 잘 압축된 설화다 싶더군요.


<사다리를 오르지 마라>는 괴담, 처세술, 도참비기, 애욕, 미스테리 등 다양한 소재가 들어 있는 제법 긴 분량이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불우한 서생 이은처럼 보이지만, 주제와 이야기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악하는 이는 무시무시한 권력욕과 의지를 지닌 "대감마님"이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작은 용원설화, 구토지설의 변용태인데, 용왕이 토끼나 자라 등에 속거나 무기력하게 의존하지 않고, 뒤에서 기미조정하는 무서운 존재로 거듭났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은은 주인공답지 않게운명의 장난(이 사실은 아니었고 대감님의 마수)에 팔랑개비처럼 맥없이 놀아나는데, 어찌 보면 이 역시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설정입니다. 자세한 건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하시고... 전 개인적으로 (모호하고 뜬금없는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언은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으니..... " 그런데 대감님과 난이는 결국 다 어디로 간 건가요?

<황금비늘>이야기가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평강 공주가 출궁 후 온달과 맺어지는 과정에 큰 설득력과 필연성이 부여되는! 그냥 이 버전을 정통 정본으로 삼고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야 할까 봅니다(다만 에로틱 묘사는 다 순화 - 이 책에는 야한 표현 걸쭉한 묘사가 은근 많으니 조심이 필요합니다). 임금이란 밖에서 넘보고 안에서 찌르며 밑에서 치받는 위험천만한 자리인데 평민을 무슨 명분으로 사위에 들이겠냐는 평원왕의 대사는 정말 실감이 났고, 옛 약혼자이자 왕족 고씨 청년이 마지막에서야 "온달에게 자신 따위는 넘보지도 못할 용기와 기품이 있었음"을 통렬히 깨닫고 그의 부탁(...)을 들어 주는 장면도 마음이 짠하더군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설화 유형의 모든 매력을 다 담아내는 솜씨.

아홉 편의 이야기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지막 단편 <광대와 여인>은 진정 소름이 돋고 영혼이 감동에 관통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연도 충격적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잠언이고 십계명이고 신들린 법열의 산물이더군요. 여기다 한 구절 한 구절 인용해 보고 싶지만 저만의 감흥이 깨어질 것 같아서 그냥 자제하렵니다. 사실 이처럼 감동의 농도가 높으면 서평 쓰기보다 그저 내밀한 느낌만으로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간직하고 싶습니다만.... 웹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 톨스토이처럼 심오하고 미당처럼 미려한 문장, 표현에다, 박경리선생처럼 토속적 아름다움을 담은, 독자로서 그저 황송하고 감사할 뿐인 작품(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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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차이나 -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KBS <슈퍼차이나> 제작팀 지음 / 가나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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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시니카, 과연 중국의 세기가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누구나 절반의 확률로 맞힐 수 있습니다.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요. 한 십 년 전만 해도 반미감정이 절정에 달할 때라 그의 부수 효과였는지, 모 명문대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중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1위였습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일각에서 혐중 트렌드가 자생할 만큼, 이 잠자다 거하게 기지개를 켜는 사자에 대해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는 행태로 봐서 아직 중국은 멀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한테 영토 야욕을 보이는 모습으로 볼 때,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가 결코 안심할 게 아니다(원교근공으로 여전히 친미)"는 의견도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국토, 인구, 자원 등의 잠재력으로 보아, 미국 추월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미 구매력 기준 GDP로는 1위)이라며, 대세의 전환에 미리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유일한 방책이라는 입장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중국 대세론"에 편하게 가담하면, 현실주의, 실리주의에 진보적(....) 색채까지 겸한, 두루두루 폼도 나고 범용으로 둘러치기 좋은 스탠스였는데, 중국이 어지간히 커 버린 지금은 오히려 생각이 짧다며 지적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친중 성향 분들은 "아무리 그래봐야 이미 물꼬가 터진 대세를 무슨 수로 거스르냐"며 자못 느긋해하는 모습입니다. 근데 실리를 따짐에 있어 "시간"이란 제법 중요한 변수라서, 예컨대 오십 년 뒤에 초대박나는 주식이라며 목돈을 한 푼 수익 없이 한 품목에 마냥 묻어 두는 건 그리 현명한 투자가 아니죠. 우리 손자 대(代)에 가서나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다면, 당분간은 미국에 줄 서는 게 더 큰 실리를 거두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주권국가가 자주적으로 활로를 모색할 생각은 않고, 어느 강대국에 부화뇌동하는 게 "실용 노선"인 줄 착각하는 게 근본적 오류라는 건 지적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인데도, 당면 현안과 본분에 충실할 생각은 없이 소모적 내부 갈등으로 정력을 낭비하는 걸 보면 "누가 이기든 우리는 지는 것 아닌가" 하는 비관주의가 피어오르지만 말이죠.

인류 문명이 개화한 후 연대적 비중으로 팔 할 이상은 내내 중국의 세기였으니, 잠시 동안의 "일탈"이 마무리되고 이제 노멀로 복귀할 뿐이라는 입장도 있습니다. 중국인들만의 강변이 아니라, 서유럽, 미국에서도 이런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서구 문명의 가장 큰 강점은, 이렇게 자기자신을 객관화해서 판단할 줄 알고, 본질적 이해관계를 두고 가장 보수적(비관적) 기준을 적용할 줄 아는 그 유연성과 여유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중국도, 겉으로 티만 안 낼 뿐 자신들의 취약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냉정한 분석을 하고 있을 겁니다. 세상 형편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우리만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해 눈을 감고 우리 편할 대로 생각하며 부족히고 불리한 현실을 애써 호도, 미화하는 것 아닌지 그저 걱정만 될 뿐입니다.

이 책은 주로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세계를 향해 웅비하는 초강대국, 미국처럼 불과 이백년 안짝의 기간에 자립한 신출내기가 아닌, 언제나 의젓한 주인 노릇을 해 온 관록의 중국이, 오늘날에 이르러 어떻게 굴욕의 시기를 딛고 이처럼 천지를 진동할 만한 위용으로 우뚝 서게 되었는지, 호방하고 거침 없는 어조와 비전으로 독자에게 표방, 설시, 웅변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 그대로입니다. "천지가 생긴 이래 중국과 같은 나라가 어디 있었으며, 뻗어나가는 그 기세로 볼 때 앞으로 누가 감히 중국에 대적하겠는가?" 마치 건륭제가 영국 특사 매카트니를 불러다 놓고 알현할 때, "이 중국에는 나지 않는 물자가 없고, 돌지 않는 물산이 없으니, 너희 외방 만인(蠻人)들과 교류할 아무 이유가  없도다."라고 한 그 위세, 그 존엄이 다시 살아나는 태세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페이스에 서유럽, 미국이 공동 전선을 이루지 못하고 눈치만 보면서 끌려다니는 것도, 물론 공산당 당국이 영리한 책략으로 상황을 요리하는 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으로부터 배제된 나라가 내부 경제를 온전히 건사할 재간과 방도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한 번 혼이 났고, 희토류 반출 금지 조치로 일본은 하루 만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국이 만약 중국으로부터 여하한 무역 규제라도 당한다면, 그날로 실물/금융 시장에 무슨 변고가 닥칠 지 모릅니다. 마음에 안 들고 서글퍼도 이게 엄연한 현실이죠.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와 시각이 있지만, 특히 결제 관련 츨랫폼을 시스템에 유기적으로 통합한 그 실력만큼은, "경영상의 창의와 혁신의 총아"란 칭송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십오억 거대 시장을 배경으로 했기에 1인 잭팟이 운좋게 터진 걸로 볼 수 없고, 중국인의 본능적 상인기질에다 테크놀로지의 유효한 학습이 절묘한 시너지를 빚은 결과입니다. 국내용이었으면 냉정한 월가에서 대박을 낼 수 없고, 중국인으로서 미국 심장부 한복판에서 거의 개인의 힘으로 일종의 "정복 쾌거"를 이뤄낸 것입니다. 책은 이를 두고 "중국의 성취, 성공"으로까지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 정상 등극의 단맛을 채 누리기도 전에 그 자리를 위협하고 들언온 백색가전의 거인 하이얼, "짝퉁에서 차르(czar)로 위상이 바뀐" 샤오미 등의 위상은, 중국 붐이 더 이상 관제, 관치의 산물이 아닌, 자생적 추동력을 갖춘 자본주의 본류의 적성을 구비해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군사력은 어떠한가. 미국에 비하면 전력상 아직 열위지만, 중국의 위상은 이제 거뜬히 지역 패권의 현상 변경을 운위할 만큼 격상되었습니다. 시장에서도 독점, 과점 사업자는 가격설정자(price setter) 노릇을 하고, 완전경쟁에서의 개별기업은 그저 수용용자(price taker)에 머물듯, 덩치가 커진 중국은 더 이상 수동적인 플레이이가 아닌,게임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거대 독립 변수가 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그들은 주동작위(主動作爲)라고 칭합니다. 미국에 대항하여 삼개 방면에서 전개할 대함대를 거느리는가 하면,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할 중앙아메리카에까지 한 발을 들여 놓고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하는 초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이미 크게 화제가 되었고, 미국의 천하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이들에게는 마치 北齊와 北周가 번갈아 汾河의 얼음을 깬 고사가 떠오를 법도 합니다.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 설치하려 들 때 바로 핵전쟁 불사를 외치며 대서양을 막아선 과거를 생각하면 더욱 무상감이 느껴지죠. 물론 어디까지나 경제 역사(役事)를 두고 딴지를 걸 명분도 없고, ICBM 체계가 오래 전 완비된 중국의 이런 행보에 새삼 신경전 벌일 이유도 없지만요. 

우리는 보통 마오가 공산 혁명에 성공한 후에는 실정을 거듭했다고 알고 있으나, 기실 국민당 정권 하에서 극심한 부정부패와 생산체계의 모순, 끝도 없는 지역할거와 정정 불안상에 시달려 왔던 중국 민중에게는, 1950년대의 더딘 발전도 큰 축복이었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천만의 아사자가 발생했으나, 경자유전의 원칙이 시행된 조치만으로도 4억 인구가 두 배 넘게 이미 폭증할 수 있었지요. 이 책은 (다소 관제화한 홍보 문구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공산 혁명이란 모멘텀이 없었으면, 중국은 현 시점에조차 지리멸렬 무지몽매의 반식민지 상태를 면하지 못했으리라는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슈퍼차이나의 턱 밑에 붙어 있는 우리 한국의 장래가,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이 책은, 특히 제주도에 진출한 중국인들의 대거 투자에 주목하며, 국익과 경제적 실리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잘 잡아야 하는지 (책의 다른 챕터와는 다분히 기조를 달리해가며) 심각한 분위기로 의제를 짚어 가고 있습니다. 영토 문제, 주권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적지 않은 터라, 문단에 따라 "(중국의) 야욕"이라는 표혀현을 쓴 대목도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 논조의 혼란도 느껴지지만, 이 문제가 결코 안이하게 대처할 성질이 아니기에, 책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모든 외교, 정치, 경제 이슈를, 초강대국 중국의 군림이라는 "현실"과 함께 진지한 고민의 대상으로 삼자는 게 본지입니다.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는, 가급적이면 보수적(비관적. 나에게 불리하게 보자는 의미에서)으로 접근하는 게 현명할 때가 많다는 의미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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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트루스 - 진실을 읽는 관계의 기술
메리앤 커린치 지음, 조병학.황선영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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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마주치는 도전 중,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가려 내는 과제만큼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도 별로 많지 않을 듯합니다. 의사 결정을 하고 사리를 판단함에 있어 난마처럼 꼬인 진상의 맥을 꿰뚫어보고,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행동만 영리하게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손 대는 과업마다 대부분 눈부신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말이나 정보, 스토리의 진위를 구별하는 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판단할 수 없거나 판단에 많은 노력을 들이기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는 대개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린 후 일을 마무리합니다. 부정확하고 부실하게 매조지한 일처리가 남기는 파장은 사소할 수도 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중대한 인과 관계로 이어져 우리의 앞날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결과가 악화된 후에도 우리는 판단 작용의 비효율, 오작동, 게으름 등에 귀인(歸因)시키려 들지 않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으로 치부하고 만다는 데에 있습니다. 과정이 나쁜 것도 문제지만, 피드백과 리뷰 프로세스가 형편 없이 기능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책은 전직 CIA 요원인 메리앤 커린치라는 분이 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법"에 주안을 둔 실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금 거짓을 말하는지, 그 반대인지 표정이나 제스처만 척 보고서도, 내 머리의 회로가 성능 좋은 거짓말 탐지기처럼 작동한다면, 그것 참 기분도 상쾌할 뿐더러 일을 할 때의 성과도 엄청 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다년 간 범죄 용의자나 수상쩍인 일에 연루된 증인 등을 대면 접촉해서 정보를 얻거나, 직접 수사 대상으로 삼아 심문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그저그런 요원이라기보다 맡은 일을 아주 잘 해내는, 동료나 관계자들이 보고 경탄했을 만한 능력의 보유자였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군데군데 비춰지는 사담[私談] 여럿으로 짐작건대).



그녀는 예컨대, 3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TV에 나와 인터뷰하는 모습만 보고, 저 사람이 지금 머리 속에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그에 끼워맞춰 가며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음을 바로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직장 후배뻘 정도 될 수 있었던 스노든이었기에, 또 개인적 소신이나 성향 면에서 크게 어긋나는 점이 많아 보이는 인사였기에, 이런 판단은 어느 정도 사감(私感)이 끼어들었을 수 있습니다(그녀가 이 문장 뒤에 덧붙이고 있는, "내 판단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이 더 자격을 많이 갖춘 유형이었다." 같은 말도, 역시 독자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언술로 공식화하긴 어려워도, 해당 분야에 오래 종사해 온 구루들의 직관이나 직감이, 소위 "과학적 분석의 결과"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도 주장되고, 이미 다른 믿을 만한 권위 있는 소스를 통한 학습에 의해 내심으로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결론이죠.

이 책은, 타인의 거짓과 진실을 준별해 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메타적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신이, 기질적으로 범하기 쉬운 인지 오류들에 빠져 있으면, 남의 거짓말인들 그게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습니다. 저 사람의 거짓말이 "평소에 내가 믿고 싶었던 바"와 일치하면, 여러 객관적 징후들이 정형화한 시그널로 눈에 뻔히 들어 와도, 이미 프레임이 지배하는 두뇌에 잡히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는 거죠. 반대로,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이미 듣기 전부터 나의 정서가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항에 대해서는, 논리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초기 단계에서 이미 기각을 해 버린다는 겁니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슈가, "발화자가 자신 역시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경우" 그리고 "발화자는 철석같이 사실로 믿고 있으나 사실은 착오, 망각, 기타 여러 비정상적 인지 작용에 의해 객관적 거짓을 말하는 경우", 각각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심리학의 영역에 들어오기 전, 이미 지난 몇 세기 전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용의자를 심문하거나 증인의 진술을 청취하는 일을 맡은 공직자가, 감쪽같은 거짓에 속아 넘어가거나, (거짓말 탐지기가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착오에 의한 확신을 어떻게 현명하게 처리해야 할지는 실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먼저 판단의 주체 자신부터, 본인이 일상에서 처리하는 갖가지 귀인 추론, 사실의 해석을 두고, 자기 비판적 - 객관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이를 대상으로 적절한 작업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진술에는 여러 차원, 범주적 개성을 띤 것이 있습니다. 이 중, 그 진위값을 뻔히 밖으로 드러내고 있는 건 극히 드뭅니다. 일면에서 진실성을 띠고 있는 게, 다른 면에서 고찰하면 철저한 허위로 판명납니다. 이때 어느 각도에서 허점을 파고 들어서, 최종적으로 진실을 파악해 낼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끝에 "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심문 대상자의 진술을 공박하는 요령을, 저자는 치밀하게 분류된 진술 유형론에서 각각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진술(혹은 그 진술을 말하는 이) 개개에 대해 공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싶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기만, 속임수가 난무하는 곳이니만큼, 이 책에 나온 이론이나 노하우는 공감되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진실을 다가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더 큰 진실을 밝혀낼 것인가. 흔히 사실과 진실을 구별할 때,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을 투영하여 "구미에 맞는 쪽"을 진실이라며 우기는 경향을 봅니다. 그래서는 단체 차원은 물론, 개인 레벨에서도 답이 나올 리가 없죠. "진실"과 개인의 신념을 먼저 준별하는 게, 이 책에서 말하는 "더 트루스"를 발견하고 이치에 맞는 판단을 내리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원제는 <Nothing But the Truth>인데, 이 말은 본디 미국에서 재판 등의 공적 절차에 앞서 필요한 경우 증인에게 선서를 시킬 때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를 말할 것을 요구하는 정해진 문구에서 온 것입니다. 두번째 어구에서 the whole truth라 함은, 국지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진실일 뿐, 전체적 의미 체계 안에서는 오히려 거짓에 가까운 건 진실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의 2부에서 "더 큰 진실"이라 함은 그를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는, "진실을 알고 싶으면 먼저 당신 머리에 있는 선입견이나 비합리적 선호 체계로부터 해방되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신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어야, 남들의 참말 거짓말도 바르게 가려 내고 수용할 수 있다는 요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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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기업이 위대한 기업이다 - 직원을 생각하는 작은 행동이 위대함을 결정한다
류성 지음 / 비즈니스맵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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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면서부터 선한 존재이지만, 성장하면서 나쁜 환경, 대인 관계의 상처 때문에 악행의 습성이 몸에 배는 걸까요, 아니면 그 반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짐승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으나, 좋은 교육을 받고 적절한 사회화가 이뤄지면서 (이른바)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걸까요. 고대 맹자와 순자 같은 현철들도 답을 내지 못한 질문이니 우리가 이 난문을 해결할 가망은 거의 없긴 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조직에서 위로 직급이 올라갈수록 "짜식들은 좋은 말로 하면 알아먹지를 못해!" 같은, 보편적 인간의 자질, 성품에 대한 회의적 태도, 불신을 표현하시는 경우가 많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좋은 말로 타일러도 될 걸 꼭 저러실 필요가 있나? 저렇게까지 해서 권력욕을 해소해야 하나?" 같은 불만을 털어놓는 빈도가 잦더라는 것입니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윗분들은 성악설, 아랫사람들은 성선설을 신봉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업 문화가 확실히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기업에선 당연하고, 작은 규모의 회사라고 해도 예외 없이(경우에 따라 더 지독하게), 직원들을 들들 볶는 문화가 조직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산업 혁명 직후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박봉만 지급한 채 "밥값을 하라"며 사정없이 피용인들을 몰아세우는 풍토가, 생산직은 물론 사무직을 부리는 방식에서도 예외 없이 팽배했습니다. 그 악명 높은 사용자였던 헨리 포드가, 동종 업계 대우에 비해 파격적인 기본급 상향 조치를 취하고, 유례가 없던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한 선택만으로도 "경영관의 혁신"이라며  그토록 칭송을 받은 것도 이런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시장 논리에 따르지만 않고, 일 못하는 직원을 닦달만 하고 해고의 위협만 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일 잘하는 직원에게 포상을 하는 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경영자로서 너그럽고 탁월하다는 평판의 형성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물론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대인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조직 문화에선 아직 요원한 감이 느껴지는 화제입니다만, "직원을 존중해야 일이 잘 되고 성과의 질이 높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확산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대량 생산 - 대량 소비로 대표되는 근대 생산 체제에서는, 거대 설비를 마련하고 많은 직공을 고용해서 획일화한 작업을 정해진 일정에 맞춰 시키기만 하면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의 기호, 취향, 소비 패턴이 다양해진 현대에는, 거대 공룡이 운신하는 폭이 오히려 줄어들고, (한국에서는 아직 실감할 수 없는 진단이지만) 확실한 메리트를 지닌 분야, 업종에서 치고빠지기에 능한 소규모 기업(대부분 벤처 기업이기도 합니다)들이, 대기업의 서툴고 느린 추격을 농락하며 큰 이윤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작업의 양이 아닌 "질'이 중시되는 산업 구도에서, 고용주가 직원들 기분, 사기를 상하게 하면 그건 고용주의 손해로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구조가 점점 대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과, 사장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신이 나서 하는 일은, 그 완성도와 고객 만족의 파장 면에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소규모 기업의 경우) 사장이 아무리 똑똑해도, 그저그런 직원 십여 명이 종래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에서 불쑥 내어놓는 아이디어를 모두 대체, 능가할 만한 활약상을 보이기란 불가능합니다. 월급 주고 부리는 직원에게서, 그 포텐의 최상이 터지게 하지 못 하면, 그게 바로 사장의 손해겠죠.

펀 경영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물적 자원을 낭비 없이 최대한 투입, 활용하는 게 영리한 경영이듯, 인적 자원의 효율을 최고치로 높이는 게 탁월한 기업의 수완이 라는 거죠. 물론 살살 기분만 띄워준다는 얕은 속셈으로 접근하면 그게 통할 리 없습니다(그마저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처음부터 자신이 공을 들여 뽑은 인재이니만치, 그 인재의 특성과 기질을 빨리 파악하여, 살 맛 나는 직장에서 스스로 책임감, 참여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한다는 기분을 들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의 CEO는 폭군형이나 음험한 사기꾼 타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잘 꿰뚫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인격자라야, 거래처나 소비자는 물론 매일같이 얼굴을 대하고 부대끼는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거죠. 일본 전국시대에 "그 주군은 그 부하들을 반하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격언이, 사실 리더십의 요체를 몇 백 년 앞서 통찰한 소치입니다.

(주)놀공발전소의 대표 피터 리는 아직 젊은 나이의 경영자입니다(이분 뿐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CEO들은 대부분 이 또래더군요). 이분의 철학은, "노력하지들 마세요. 노력하시는 직원분은 그 자리에서 해고합니다." 라고 합니다. 딴청피우지 말고 일좀 하라며 눈을 부라리는 게 상사, 오너의 습성인데, 노력하는 직원을 오히려 짜른다니 슨 말인가. 이 기업의 특성상, 지루하게, 혹은 필사적으로 일을 하면 그 결과물이 시장에서 찬밥취급 당하는 일이 잦다는 겁니다. 저학년 아동용 교육 아이템을 제작하는 이 회사는, 사명이 말해주듯 "놀듯이 공부하게 도와준다"가 회사의 모토입니다. 아이들보고는 노는 것처럼 공부하라면서, 학습 애플리케이션은 절박한 마인드로 기일에 쫓겨 마지못해 만든 티가 팍팍 나면, 문장 하나 레이아웃 하나에서 그 기분이 어린 독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려면, 제작자부터가 그런 기분으로 제작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즐기면서 일을 하라. 즐기면서 만든 컨텐츠가 아이들에게 즐겁게 소비된다." 비단 이 방법론이 이 영역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37세의 김봉진 대표님은 요즘 나오는 경영서마다 언급이 빠지는 게 드문,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성공사례의 모범이 된 분입니다. 본업보다 이곳저곳 강연 스케줄이 더 바쁠 때가 있을 정도죠. 이분이 만든 "배달의민족"은 벤처 성공 신화의 센세이션을 유발했고, 이분이 개발자로서 프로젝트에 임한 자세뿐 아니라 조직을 관리하는 탁월한 기법도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습니다. 상처 받은 직원, 자긍심을 갖지 못한 직원에게서 건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으니, 일에 찌들지 않고 항상 상상력이 저 먼 창공에서 날개짓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게 대표님의 철학입니다. 도서 구입비를 전폭 지원하고, 살찌고 몸매 망가지는 게 자신의 회사에서는 흉이 안 되게, 건물 곳곳에다 과일 등 간식거리를 잔뜩 비치하는 것도 (주)우아한 형제들만의 독특한 풍경입니다.

광고기획사 이노레드를 이끄는 박현우 대표님은, 어느날 정말 힘들게 따낸 수주를 클라이언트에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걸작입니다. "우리 직원들이 이 건 때문에 야근에 휴일 근무에 몹시 힘들어합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일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거래처에서 보인 반응이 더 의외였습니다. "박 대표님, 존경합니다. 이노레드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누구보다 행복한 분들이겠군요." 마치 홍보용으로 제작된 에피소드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박 대표의 진실한 가득 묻어나는 표정과 풍채, 광고인답지 않은 비주얼을 보고서야 독자에게 놀라운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한 건 잘 마쳐 내고 장사 접을 거 아니라는, 매우 속된 계산에서도 이 전략은 타당하며, 그런 얕은 계산을 떠나서도, 광고처럼 농도 짙은 크리에이티브를 요구하는 업종에서 "진정한 소통이야말로 궁극의 경영 비결"이란 점에서도 박 대표님의 이런 선택은 멀리 내다보고 깊이 들여다보는 경영 통찰입니다.

(주)이심전심은 떡볶이회사 체인점입니다. 이 회사는 우수사원에게는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합니다. 정말로 "회사 경영권을 제게 넘기세요." "하늘의 별을 따다 주세요." 같은 무리한 소원을 말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우려에, "백지수표에다 가장 적정한 금액을 써 내듯, 존중받는 직원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라는 게 CEO의 답입니다. 최근 대한항공 사건에서, 해당 스튜어디스와 사무장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내가 대접 못 받는다 싶으면 상황이 허용하는 극한까지 가고 보는 게 사람 심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 이치도 현실에서 통하겠다 싶은 짐작 역시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심규태 대표님의 탁월함은, 대담하고 진정성 있는 신뢰의 제스처를 직원들에게 바로 행동으로 보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직 기간 중 150만원 상당의 월세를 지원하고, 최신 외제차 모델을 제공하는 결단은, 모든 직원에게 "아버지처럼 친형처럼 품어주는 사장님"이란 믿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회사의 경우, 인적자원 관리뿐 아니라 개별 점포들과의 관계에서도 놀라운 파격 행보를 보이더군요. 각 지점이 공식 레시피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 시도를 하게 하며, 불리한 약관 개정이나 지침 변경은 전체 가맹점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합니다. 이 정도면 갑을 문화를 전면 거부하는, 거의 시민사회운동 단계입니다. 역발상 그 자체라고 해야 할 대단한 파이팅이라고 할까요.

위대한 기업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가. 무엇이 기업을 탁월하게 만드는가 등을 놓고 여러 학자, 경영인, 평론가, 저널리스트들이 제각각의 해답을 내어 놓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한 하나의 결론입니다. "행복한 기업이 위대한 기업, 끝까지 살아남는 기업이다." 마치 가정도, 돈 많고 풍족하며 여유로운 집안이, 불화와 대립의 요소를 미연에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붕괴, 해체되고, 구성원들은 파멸과 절망을 맛보는 것과 이치가 같습니다. 직원은 사장의 부속품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큰 울타리, 지붕 안에서 유기체의 기관처럼 호흡과 생리, 최종의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새끼손가락 한 군데에 염증이 생겨도, 일상의 과업이 제대로 처리 안 될 만큼 신경이 쓰입니다. 기업의 몸체를 이루는 직원들이 즐겁고 행복한 기업이라야, 그 두뇌라 할 수 있는 경영자의 성취감, 비전도 궁극적으로 충족, 성취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뿐 아니라, 현장에서 독창적인 기법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책임자, 지역에서 신망 받는 약사 등 다양한 사례가 나옵니다. 전체를 꿰뚫는 공통의 코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과 소통"입니다. 인간 소외가 없는 직장이 생산성도 최고로 높인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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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2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기업을 많아야 사람들이 행복해질텐데....불행한 일터가 너무 많아요.ㅠ.ㅠ
 
깊게 돌아봐야 멀리 내다볼 수 있다 - 꿈.사랑.도전
이인태 지음 / 리안메모아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사진이 많이 실려 있지 않으나 인생의 깊고 진득한 사연을 담았다"는 평가를 먼저 접한 후 책을 읽었으나, 이 책에는 사진도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도, 어느 한 번의 여정에서 시리즈로 찍힌 것들이 아니라, 저자분이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갓 취업한 삼성을 다니면서 자주 수행한 해외 출장, 근무시에 틈틈히 찍은 기록들이라서, 긴 세월의 흐름과 변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 제목에 나온 그대로, 젊은 시절 세계를 누비고 다니신,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어느 시니어의 깊고 굵게 살아오신 어느 인생을 통해, 진정 ""깊게 돌아보고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도와 주는, 울림이 묵직한 수상록이었습니다. 해외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실려 있으니 여행기로서의 노릇도 겸하는 책이랄까요.



우리는 보통 중국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1990년대 후반에 문호를 개방한 줄로 알지만,  특히 한국 기업과 사회 유력 인사들이 이 나라를 자주 드나들고 교류를 튼 건 벌써 1980년대 중반입니다. 웬만한(?) 어르신들은 "나 중공 다녀왔다"며 아이들 앞에서 자랑삼아 견문을 늘어놓곤 했었습니다. 거진 우리나라 민주화가 막 시작될 무렵과 궤를 같이하는데, 실제로 천안문(텐안먼) 사태가 발발했다가 덩샤오핑에 의해 며칠 만에 진압된 게 1989년, 한국의 유월항쟁이 있은지 2년 뒤(그리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가 타계한지로부터도 대략 그쯤 지난)이고, 한-중 수교가 있던 해로부터 3년 전 시점입니다. TV 화면에는 북경 시내의 탁 트인 도로로, 널찍이 열린 직장의 문을 향해 "자전거 부대"가 출근하는 장면을 자료로 보여 주던 시절이죠.



당시 한국 서울은 교통 지옥 출근길, 지하철 푸시맨이 화제에 오르던 때였습니다. 신출내기 사회 초년생 티를 아직 못 벗던 저자께서 삼성전자 직원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된 게 딱 이 무렵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2005년 경에 "앞으로 중국어 못하는 사람은 기업에 취직도 못하는 때가 앞으로 몇 년이면 다가올 것"이란 말을 한 적도 있는데, 벌써 1989년에 삼성은 중국에 진출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저 발언은 새삼스러운 말이었다고 생각되기까지 하네요. 여튼 저자분은 공대를 졸업하시고 연구원 신분으로 재직하면서, 당시의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낯설고, 낯설다 못해 금단의 땅이었던 중국에서 치열한 근무를 했던 회고를 적고 계십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단체 여행 다녀온 경험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요즘(이라기보다 대략 10년 전부터 쭉)에조차, 중국인들 잘 안 씻고 다닌다, 부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평균적 시민들은 미개인 같은 인상이다, 등등 폄하하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명동이나 동대문 등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요우커들보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게 보통인 우리들입니다. 하물며 30년 전에는, 그것도 중국 현지(베이징이라고 해도)라면 그 형편이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죠. 진출한 외국 기업이 물론 삼성만은 아니었기에, 중국인들은 체재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여러 전용 시설을 (대단히 미흡하나마)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기가 설치된 현대식 공중 화장실이란 것도 그들로서는 매우 생소했는지, 큰일을 보는 자리에는 앞 칸막이가 아예 없어서, 저자분이 매우 난감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현지 직원 왈 "그래도 여긴 옆 칸막이는 각각 있습니다. 그게 어딘가요." 이러면서 식당에서는 외국인 줄은 따로 서게 하고 식대는 몇 배로 더 받았다는군요. 메뉴의 질이 서로 큰 차이도 없는데 중국인 줄은 그 책정가가 매우 저렴해서 불평을 털어놓으니, "안 씻고 지저분한 차림으로 그냥 중국인 줄에 서서 식사하시죠."라고 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상태 그대로 가셔도 통과되시겠네요." 라고 짖궂은 대꾸를 하는 동료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는 기억도 술회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나, 이 책에 등장하시는 다른 분들의 사정만 꼭 그런 게 아니라,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인은 용모가 비슷해서 구별이 잘 안 되죠. 밖에서 보기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들끼리도, 옷 입은 거나 헤어스타일,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보고, 혹은 주변 환경적 맥락의 도움을 얻어야 가능하지, 사우나에서 다 벗고 마주치면 얼굴만 보고 누가 중국인, 일본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같은 한국인이라도 홀쭉이 뚱뚱이 사이에 더 위화감이 들 겁니다). 저자분의 사연이 아니라 일본에 출장갔던 선배 분의 회고로,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니 주인이 하는 말이 "쉐쉐(謝謝)"였답니다. 그 무렵이라고 하면 (비록 일본이 우리보다 10여년 일찍 중국과 수교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인 방문객이 많을 시절일 텐데, 하필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했다는 점에 더 큰 실소를 터뜨리게 되네요. 센다이 출장 시 빈 호텔 방이 없어 사우나에서 매트 하나에 의지해서 임시로 1박하셨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게 꼭 센다이가 세계적 규모의 관광 도시라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보십시오. 타지인이 출입할 것 같지도 않은 외진 동네에도, 어지간하면 장급 모텔 하나 정도는 꼭 있습니다. 자영업(그 중에서도 숙박업)에 대한 우리 인식이, 미국과 일본 등과는 큰 차이가 나는 소산입니다. 국내 타지 출장이라면 어딜 가서도(심지어 시골이라고 해도) 잘 자리 걱정은 안 하는 게 한국이죠.

삼성 직원 신분으로 중국보다 먼저 방문, 체류했던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유학에 대해 많은 갈등도 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하시는데(저자분은 서울대에서 학부, 석사까지만 마친 분), 그 이유가 "유학생 부부치고 결국 잘되는 경우가 없었다"란 조언을 윗분에게서 들었다는 이유입니다. 물론 요즘엔 해당 없을 이야기입니다. 저자분이 유학을 하던(혹은 유학을 계획하던) 시절이라면, 도피성 유학 같은 허수 아닌, 진짜 실력되고 능력 있는 알짜 인재만 모색하던 때였죠. 출세도 좋고 학문적 대성을 이루는 일도 좋지만, 가정의 화목과 유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셨는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갖춰 줘야 할 여건으로서, 수영 실력,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적금 통장이라고 하시는군요. 이 역시 제가 어렸을 적 특정 부류의 어르신들이 자주 하던 말씀입니다. 연배는... 저자분보다 조금 손위이시긴 하나...... 꼽으시는 삼대 리스트는 세번째 항목에서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만, 수영과 영어는 꼭 들어가더군요. 사실 그 이유(특히 수영을 두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근무하시던 시절 업무상의 일로 자주 접하시게 된 게 골프였습니다. 처음 손에 잡은 클럽으로 너무도 샷을 잘 날리셔서 "인생의 길을 이참에 아예 바꾸라"는 충고(?)까지 들으셨다고 합니다. 꼭 보면, 공부만 잘하는 것도 부러운데 운동신경까지 탁월해서 이렇게 펑펑 스윙하며 그린을 누비는 분들 보면 시샘이 생깁니다. 골프 실력 외에 회사에서의 순항 승진에 필요한 건 역시 얼굴만 보고도 척 심리를 감 잡는 눈치, 육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 앞에서 "No"를 말할 수 없는 상사분이 계셨는데, 하루는 어느 동료분이 "오늘은 기필코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고 말겠어!"라고 다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보고를 마치자마자 그분 하는 말이 "너 지금 아니요라고 하려고 했지?"라고, 속을 훤히 꿰뚫은 선제 멘트를 날리더라는 거죠. 저자분이 이 챕터를 마무리짓는 문장은 "이분은 이후 사장까지 지내고 물러나셨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고 영예로운 별을 다느냐 하는 점에 대해, 직장인으로서 깊은 생각을 하게 도와 주는 에피소드라 하겠습니다.

휴양지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 책에는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주 근황의 샷이라기보다는 십오륙여 년 전, 어떤 건 이십 년 전쯤의 모습들로 추측됩니다만, 저자분 본인이나 사모님 표정이나 막연한 이미지 등으로 미루어, 그보다 십여 년 전, 혹은 더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셨으며 어떤 집안 출신이시겠다 하는 점까지 (제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습니다. 저자분의 (젊은 시절) 모습도 그렇지만, 평균적인 한국 중류층에서 나고 성장하셔서 조심스레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가꿔 가시는 분들 특유의, 조신하고 소탈하며 겸손한 인상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깜짝 놀란 게, 사모님께서 일본인이셨다는 군요. 위에도 적었지만, 동아시아인들은 본디 잘 구별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전 틀림없는 (그 당시) 강남 중산층 주부님의 이미지를 사진으로부터 받았기에, 이 대목을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리고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특히 어떤 특정 성격, 타입을 지닌 분들이란,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해로를 하는구나 하는 결론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께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까지,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그때도 그 위상이란 마찬가지였죠)에서 청춘을 불사르던 시절, 한국의 청춘은 물론 장년층도 희망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 책 곳곳에서도 저자분의 일에 대한 집념, 애착, 그리고 사랑(이게 포인트죠! 사모님 만난 사연- 그리고 자녀분 이야기들-이 없으면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공허해집니다), 이 모두를 두루두루 돌보며 함께 몰아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권 거주 20대 절반이 백수라는, 놀라운 현실이 대한민국의 어깨를 짓누르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이 시련은, 그간 너무 앞만 보고 다른 걸 희생한 한국인들에 대해, 하늘이 우리들 자신을 돌아다 보라고 부과한 짐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책, (지난 과거를)깊게 돌아보고 (밝아오는 미래를) 널리 내다보길 권하는, 산뜻한 편제의 책을 읽고, 나이든 세대는 추억을 반추하며 공감을 보내고, 젊은 세대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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