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생각에 속을까 - 자신도 속는 판단, 결정, 행동의 비밀
크리스 페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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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하는 일 중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일까요. 대부분은 1) 우리 스스로(즉 우리의 "의식")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2)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 페일리는, 1). 2) 모두 틀렸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1-1) 우리가 하는 일이나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무의식의 몫이다.
1-2) 전혀 엉뚱한 동기, 과정을 통해 결과가 나온 건데도, 우리는 사후적으로 "이러이러한 이유, 순서를 통해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며 끼워맞추기를 시도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저 "당신이 알고 있던 건 틀렸다"고 말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당신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건 대부분이 착각이거나 자기 기만"이란 지적을 받는다면, 기분이 나빠질 뿐 아니라 그런 지적을 수용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서론과 본론 5부, 그리고 간단한 맺음말로 이뤄져 있습니다. 본론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챕터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데, 모두 우리의 상식(과, 더 나아가 신조에 가까운 것)에 크게 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동작 중 상당수가 "뇌의 의식적인 명령"에 의하지 않고, 그저 몸이 익숙해 온 대로 이뤄진다는 건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해 온 "무의식"의 가치, 비중은 그 선에 그칩니다. 그러나 저자는, "무의식이 하는 기능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당신의 의식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들을 자신이 한 거라며 끊임 없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성)과 함께 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 왔다면, 나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걸까요? 까마득히 높은 데에 매달려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 사람은, 다리를 건너는 도중 내내 심한 긴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한 직후 어떤 이성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위험 수위가 높은 체험을 통해  부수적으로 딸려 온 "두근거림"을, 이성에 대한 설렘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른바 "무드"가 있는 곳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고백을 받은 사람은, 분위기의 도움을 얻어 감정이 고조되었을 뿐인데도, 자신이 그 이성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걸로 오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저자는 이런 설명 끝에, "10대 커플이 둘이서 자주 공포 영화를 같이 보러 가는 건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러 영화가 안긴 감흥을 이성으로부터 받았다고 착각하는 거죠. 저자가 직접 이 책에서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저는 저자의 다른 주장이 이 사례로부터 추가 확증을 얻는다고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커플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시에 의해 같이 영화관에 가는 거죠(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이 평소보다 더 커짐). 물론 그들은 의식의 기만에 의해  자신들이 스스로 공포 영화가 보고 싶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합리화하지만, 사실은 감각의 오해를 유발하며 애정의 밀도를 높이려는 게 진짜 동기인 겁니다. 만약 "의식이 우리 행동의 진짜 주인이라면" 이 커플에게 물어 보았을 때 이런 진짜 이유를 댈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일관된 대답은 "그저 공포 영화가 보고 싶어서 갔을 뿐이에요."이겠죠. 이때 그들은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의식이 없고, 정말로 자신들이 그렇게 여기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기만당하고, "그들 자신의 의식이 시키는 가짜 이유"까지 끌어대고 있는 거죠.

사랑에 빠진 어리고 어리석은 커플만 이런 대답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법 진지하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며, 의식에 의해 주가로 기만당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책 말고도 여러 다른 저술에서 인용되는 "뚱뚱한 남자와 기찻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분명하고 정당한 도덕적 동기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 역시, 결국 최종 결정은 감정에 의해 내리고 만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이 절을 읽고 나면 제아무리 "일관되고 논리적인 동기, 판단"을 유지한다고 믿는 이들도 그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개인적 성향이 좀 짖궂은 분 아닌가 싶은 느낌을, 책을 읽어가며 저는 여러 번 받았는데요. "결국 공리적으로 우월한 결정을 언제나 척척 내리는 사람은, 감정이 거세당한 사이코패스 유형 뿐이다"는 암시를 하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사실이라면 "비윤리적인 인간이 가장 윤리적인 결정을 꺼리낌 없이 내리는 법"이라는,. 참으로 역설적인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무의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 유명한 서브리미널 광고 사태, 즉 몇백분의 일 초 동안(의식이 감지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주입된 메시지에 지배당하는 무력한 대중의 사례 관련 제임스 비카리의 케이스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죠. 현재 여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대론도 유력한 편이니, 책을 읽으실 때는 그 점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저자는 저 비카리를 "협잡꾼"으로 규정하면서도(일단 이 한국어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브리미널의 실체와 의의, 기능에 대해서는 분명히 긍정하고 있습니다(이 책의 전제와 논지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습니다만). 제임스 비카리 이후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수많은 실험과 연구 결과 중 몇몇을 추가로 들며, 저자는 무의식을 공략당할 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해지고 조종당하기 쉬운지, 그러면서도 당사자들은 필사적으로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한 행동, 선택"이라고 우기고 드는지를 실감나고 신랄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얼마나 기만적으로 동작하느냐면, 심지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인식조차 근거가 빈약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착각하며", 그 체험을 하기 전 이미 의식이 정해 놓은 대로 짜맞추기 결론을, 마치 고장난 로봇처럼 내리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는 거죠, 더 치명적인 건, "과연 내가 이런 판단을 하는 게 정확한 걸까?"라는 메타적 생각에 아주 소홀한 게 우리들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이면서도(혹은 의식에 의해 속으면서도)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극력 회피하는, 이중으로 나쁜 습성의 노예라는 거죠.

이 책에는 신기한 사례가 많이 나와서,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건 안 하건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재미만 취한 후, 저자의 논리에는 설득당하지 않고 저자가 애써 제시한 결론은 슬쩍 잊어버리는 걸로 마음 편한 "습관, 무의식"에 또다시 자신을 맡기는 독자들에게, "그럴 줄 알았다"며 마지막에 독설 한 마디를 날리는(정말 생각이 없는 독자라면 이게 독설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저자는, "셀프 레퍼런스"의 기막힌 역설을 심리학 아닌 인문 차원에서 이해하는 멋을 지닌 사람입니다. "좌뇌-우뇌" 구분 가설이 이미 효용을 잃었다고 보는 최신 이론에는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등 논란의 여지를 제법 많이 유발하는 책이지만, 독자가 자신만의 결론을 어떻게 내든 간에 읽어가는 도중에는 상당한 몰입감과 흥미를 주는 책인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의식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발달시켜 온 것"이라는, 진회심리학 박사 출신인 저자 다운 결론도 독자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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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7
오쿠다 히데오 지음, 정숙경 옮김 / 북스토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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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일식 정찬 코스처럼 모범적이고 깔끔한 단편 다섯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의 외관이나 편집도, 수록된 작품들의 완성도와 개성마냥 예쁘고 단정합니다.

다섯 편은 모두, 40대, 남성, 대기업 중간 관리직, 성실하고 적당히 유능하지만, 삶의 정열과 독기가 거의 다 사그라든, 평범한 중산층 세대의 가장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나 일본인들이나 사는 모습, 의식 구조, 관행, 루틴들이 너무도 서로 닮아 있기에, 이 단편들의 주인공과 매우 비슷한 처지일 남성들이 읽으면, 몰입, 공감의 눈물, 그리고 달관, 통찰이 고루 서린 미소가 절로 지어질 지 모르겠습니다. 잔잔하면서도 끝에 가서 분위기가 크게 한번 요동치다, 독자의 웃음보를 크게 한번 터뜨린 후에는 흐뭇한 관조 모드로 들어가게 해 주는, 노련하고 "착한" 작품들입니다.



주인공을 하나같이 저런 신분(특히 더 흔할 중소기업도 아닌 대기업 과장들로 잡은 독특합니다)으로 설정했으면서, 품고 있는 이야기의 빛깔과 주제는 각기 다 다릅니다.  어찌 그리 대기업이란 조직의 생리와 풍속도에 사실적으로 훤하신지, 또 그로부터 보편의 교훈과 감동을 잘 끄집어 내시는지..... 이런 것도 읽는 사람마다 감흥은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상당히 착해지는 느낌은 공통이지 싶습니다.

<마돈나>. 단어 "마돈나"의 이 작품 속에서 뜻은 별 것 없고, 새로 입사한 신출내기 여사원을 두고, 상급자, 선배, 같은 또래 여성들이 모두 호감을 보내는 데서, 이 참한 여성이 영업3과의 마돈나로 떠올랐다는 그런 정도입니다. 예쁘긴 하지만 남성 직원 모두를 휘어잡고 마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그런 팜므 파탈형은 아니고, 착하고 일솜씨 좋으며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매너를 지닌 데서 오는 매력의 소유자, 거기서 벗어나지는 않지 싶습니다. 그러나, 애가 둘이나 딸려 있고 15년 전 사내 연애를 통해 결혼한 와이프도 곁에 두고 있는 오기노 하루히코 과장이, 정말 터무니없게도 이 여성에게 반해 버렸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떤 칙칙한 불륜이나 사악하고 불결한 성적 종속 관계 따위를 도모하는 건 아닙니다. 그럴 위인도 못 되고, 다만 혼자만의 상상에서 그녀와 데이트 끝에 적당한 모텔로 데려가는 데까지만 상상하는, 매우 양심적인 40대, 전형적인 일본 아저씨 타입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아 제발 티 좀 내지 마시라고요.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같은 조마조마함이, 읽는 내내 독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큰 촌극이 빚어지고 마는데, 내적-외적 갈등을, 참으로 철없는 사내아이들처럼 해결하는 모습에서 독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 단편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과장 부인 노리코입니다. 중간쯤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하도 핸섬해서 나도 설레었다"고 말할 때, 저는 잠시 맞바람 비슷한 불길한 기운을 느꼈으나, 다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니 그것과는 정반대 의미겠더군요. 남자는 영원한 어린이일 수 밖에 없고, 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린 후 그럴 수도 있으니 부끄러워하지도(나 역시 마찬가지니) 불안해 하지도 말라는, 너무도 사려 깊은 배려의 한 마디였던 거죠.

<댄스>애서 저 제목 겸 키워드는 두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는, 비록 대기업 중견 사원으로 그럭저럭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긴 하나, 하나 있는 아들이 근래 부쩍 공부를 소홀히하며 속을 썩이더니, 급기야 전업 댄서의 길을 걷겠다고 포부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궤도에서 착실한 삶을 살아 온 전형적인 중년 가장이 이를 용납할 리 없으나, 꽉 짜여진 듯 빈틈 없는 조직에서 원초적 야성을 모두 잃은 다나카 과장은 이제 아들을 혼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는 최후의 보루"라면서 개입을 아껴 뒀다가 마지막에 나선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의 영이 안 서는 걸 엄청 두려워하는 겁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아이 어머니를 통해 간접으로 전해 오는 녀석의 뜻은 "아버지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길들여지듯 사는 삶이 싫어서 댄서가 되겠다"는 것이니.... 여튼 다나카 과장은 자신이 회사에서 유지하는 스탠스처럼, 현상의 아슬아슬한 유지 쪽을 일단 택합니다. "폭발, 격노, 반항"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고, "대세 순응"만이 유일한 신조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그걸로 생계도 변변히 유지 못 할 것 같은 춤꾼의 길을 걷는 건, 참을 수 있는 선을 넘는 겁니다. 당장의 파국은 피하더라도, 결국 틈을 봐서 저지하고 말 생각입니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부친으로서 무슨 수라도 나겠지요.

다른 의미는 직장 동기이자 같은 과장인 아사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서구형 개인주의가 몸에 밴 스타일인 이 사람은, 상관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부하직원들에게도 방임형으로 대합니다. 이런 사람이 일까지 못하면 벌써 대리 시절에 조직 밖으로 내쫓겼겠습니다만, 맡은 업무 처리 하나는 또 확실하니 진정 계륵이고, 여직원들 사이에 특히 인기가 좋다 보니 부당한 조치는 위에서 선뜻 취하기가 힘들군요. 다나카와 그를 동시에 부리는 이지마 부장은 언젠 한번 단단히 이 괴팍한 반항아를 중인환시리에 망신을 주어, 자신의 권위를 한껏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다나카 과장은 두 사람의 충돌을 막고 조직의 운용이 지금처럼만이라도 매끄럽게 돌아가길 원하는 바람에서 필사적 중재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선택을 하고 말았으니......

<총무는 마누라>는 어쩌면 우리 동양인들이 영원히 떨쳐 버리지 못할, 공과 사의 혼동, 정실주의, 그리고 "우리 못난 것들은 뒤에서 부정부패라도 하는 재미에 살지, 그런 낙도 없다면...."에 결국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탁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풍토를, 마치 채만식의 작풍(作風)처럼 새타이어하는 단편입니다. 온조 히로시는 이 작품집에 실린 다섯 편의 (같은 또래) 주인공들 중 아마 가장 유능한 간부이며, 가장 규모가 큰 대기업에 소속된 캐릭터일 겁니다(다들 괜찮은 직장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요). 유럽연합 국적의 기라성 같은 기업을 거래 상대로, 처음에는 해외파가 아니라서 고전도 했지만, 빼어난 적응력을 발휘하여 결국 손 대는 건수마다 주위를 놀라게 할 성과를 거두고 이제 별 달기 직전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총무과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냥 놀면서 보수만 챙기면 그만인데, 현장 최일선에서 감각과 야성을 최고조로 갈고 닦아 온 그에게는, 금쪽 같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며 조직에 해를 끼치는(그의 생각입니다) 것만큼 혐오스러운 게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도(영전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불만스럽거니와, 밥벌레처럼 스포츠 신문, 만화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직원들을 보면 거의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너희들 영업부에선 지금 얼마나 피말리는 전쟁 분위기로 일선을 뛰는지 알기나 하냐!"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 총무부 산하 각 부서는 엄청난 비리로 회삿돈을 축내고 있는 실정이 포착되고, 비리 연루 사내외 당사자들은 그를 회유하려 들기까지 합니다. 융통성이 없다거나 성미가 꼬장꼬장해서라기보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노른자 지위만 골라 거쳐 온 엘리트로서의 자부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우리나라도 제발 좀 이래야 하는데). 근데 그는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총무부서는 마누라와도 같다"는 말을 누군가에게로부터 환기 받습니다. 그게 과연 무슨 뜻이며, 온조 과장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요?

<보스>는 여러 점에서,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를 닮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결말에서, 빙허의 그 작품은 호러, 혐오, 연민의 미학적 효과를 자아내는 반면, 이 작품은 무진장 귀여움의 발산으로 독자와 주인공 시게노리의 닭살을 돋게 하는 데에 있다고나 할까요. 해외파라기보다 정체성이 해외 그 자체인 요코 부장의 실감나는 성격 구현에서 작가는 대단히 빼어난 솜씨를 보입니다. "멸군실에 들어선 바퀴벌레 느낌", "수족관에사 유영하는 시라칸드 기분" 같은 재치있는 표현도 나옵니다.

<파티오>는 오랜 수명의 나무와, 전직 대기업 간부로 이제 생을 정리하는 시기에 접어들어 고독을 즐기는 어느 정체불명의 노인, 그리고 이 두 심상에 자신의 늙은 아버지를 대입, 교차시키는 (역시 성실하고 윗선에 잘 안 대드는 대기업 과장) 스즈키 노부히사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담담한 문장 속에 잘 담아낸 단편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 중 가장 상징 레토릭이 효과적으로 쓰였다는 인상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결 더, 대기업 내부의 업무 추진 분위기,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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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떻게 설계되는가 - 경제학과 심리학으로 파헤친 행복 성장의 조건
폴 돌런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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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얻어내고 이뤄내려면 정당한 노력이 앞서야 합니다. 아무도 그저 요행만으로 행복이 내 것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곤란하다는 데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 "행복을 설계"하라는 주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습니다. 뭔가 열정적이면서도 앞뒤 재지 않는 손길과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 같은 게 행복의 전제조건이지, 타산적이고 빈틈 없는 "설계"를 통해 이뤄지는 행복을 두고는, 왠지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위화감이 드는 게 보통 아닐까요?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이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당신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행복해지고 싶으면 그에 맞는 합리적이고 적실한 방법을 모색하는 게 우선이라며 우리 독자들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어떻게 생각되세요? 흔쾌히 동의하기 망설여지거나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면, 책에서 제시하는 구체적인 제안과 근거를 보고 판단을 해 볼 일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떠오른 생각은, 카너먼 등이 주창한 "행동경제학"의 여파가 이처럼이나 길고 깊은 파장, 영향을 남겼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경제학과 심리학이란 사실 그 초기, 성숙기 발전 경로에서는 둘 사이에 서로 접합, 교차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시든 거시 스케일이든 경제학이야말로 인간 심리의 미묘한 흐름과 조우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이른바 선택의 "균형(equilibrium)"이 결정되는 과정을 다룬 학문이요, 그 심리에 비합리적 요소나 감정이 개입할 바 없다면 모르겠으나(이 경우 건조한 기계적 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답이 도출됩니다), 그렇지 않고 비이성적 요소가 개입한다면 이는 필수적으로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한편, 심리학은 결국 인간 마음의 가닥과 꼴을 알아내 보자는 학문 체계입니다. 마음의 모습을 안다는 건 (순수 학문 영역을 잠시 떠나 있자면) 어떤 직접 효용이 있을까요? 다름 아닌 "행복의 모색"입니다. 그 행복이 철저히 주관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고 육신의 감각적, 물질적 만족에 기반을 (어느 정도라도) 둔 성격이라면, 이는 경제학의 효용 측정 도구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죠. 결국 행동경제학이라는 첨단 분야에서 역시 "바로 쓸모"를 찾아 보자면 이는 행복의 추구이겠으며, 또한 그런 물질적, 현세적 행복은 경제학적 분석틀의 도움을 얻어야 체계적인 추구가 가능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행동경제학의 가장 큰 존재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행복 설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신적, 육체적 장애가 있다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여러 타인과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조건상, 그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튼 인생은 초기 조건이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눈 딱 감고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하는 현실의 레이스이기에, 만약 성실한 사람이라면 결국 경기의 종반에 가서 자신만의 행복을 이뤄 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넘어, 그 사람이 사려깊고 공동체지향적 모럴을 가진 사람이기까지 하다면, 그 사람은 이런 자신의 모색에서 시행 착오를 발판 삼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참고할 수 있게, 아예 행복 설계 매뉴얼 하나를 내가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폴 돌런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성이 뛰어나고 호감 가는 외모를 지녔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통상의 능숙함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듣는 사람이 민망해할 만큼 서투른 발성, 조음습관을 지녔다면, 그는 아마 정상적인 사회적 소통이나 유리한 평판을 얻어 내기 힘들 것입니다. 폴 돌런 박사는 말을 꽤 더듬는 편이었으며, 이런 시련, 핸디캡을 어깨에 지고 남들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남보다 몇 배는 더 애쓰는 과정에서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일부는 자신의 정신적 성숙 과정, 일부는 자신의 직업적 본분인 학문적 도구를 통해, 그는 어떻게 하면 개인이 성공적으로 행복을 설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처럼 잘 정리된 매뉴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행복을 추구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 설파하는 책들은, "당신의 관점이나 태도를 바꾸거나, 욕망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먼저 다스리고 마음의 평온을 찾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다들 이게 정석의 길인 줄 알며, 이 때문에 우리는 "행복"과 "설계"라는 두 개념, 단어를 결합함에 있어 그토록 불편함을 느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런 박사는 "자신에게 정직해지지 않고(때로는 자신을 속여 가면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행복에 이른다는 건 차라리 자기기만"이라고 말합니다. 그 자신이 만만찮은 고난을 뚫고 행복을 쟁취해 낸 체험이 있기에, 그의 방법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가 자동차 몇 대 소유, 배우자 동반 여부, 거주하는 주택의 면적, 학위나 직장의 서열 등 표피적이고 물질적인 지표로만 행복을 평가하는 건 또 아닙니다. 그런 시도라면 전에도 여러 번 있었고, 그런 양적(量的) 어프로치로는 역시 정확한 진단과 질적 측정에 곤란함이 지적된 것도 사실이죠. 여기서 돌런 박사만의 균형 잡히고 창의적인 제안이 돋보입니다. 그는 물질적 지표, 가시적 환경을 결코 경시히지 않되, 그런 조건들이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개별 파급 경로를, 통찰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으로 가중치를 둬 가며, 주관적이고 질적인 행복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분석하고 있습니다. 즉, 돈, 체험, 성취, 소통 등이, 구체적 개인의 마음에 자리한 각기 다른 코드 하나하나를 어떻게 자극하는지 제시하고, 이런 구체적 경로를 전제로 하여 개인별 맞춤 행복이 설계되는 모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목적의식과 즉시의 쾌락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라는 게 결국 한 마디의 요약입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게 젊은 세대의 신조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만족을 위해 무작정 놀고 즐기면 미래의 행복이 크게 희생될 겁니다. 워커홀릭이라는 부류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결국 불확실성에 싸여 있는 미래를 위해 현세의 기쁨을 희생합니다. "중용"이 행복의 요체임을 일찍부터 갈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처럼, 돌런 박사도 균형의 추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보통 무엇에 가치의 중심을 둘 것인지에만 집중하여 의견 대립을 보이던 기존의 학설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돌런 박사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에도 한계가 있지만, 그런 행복을 추구하려 들이는 주의, 집중에도 또한 한계가 있음"을 환기합니다. 이 이중의 한계라는 제약 조건 속에, 인간 본연의 이성과 태생적 비합리성 사이에서, 자신의 의지와 충동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수련하는 과정이 곧 "행복의 설계"이고, 이를 통해 실용적인 설계가 가능함을 돌런 박사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실제 적용례를 많이 제시하고 있으므로, 독자는 폭 넓은 pool 속에서 자신에 알맞은 처방을 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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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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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읽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 작품은 읽는 이의 마음을 내내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스릴러이기도 하고, 억압받는 여성의 통쾌한 복수극 속에 일본 사회의 후진성, 구조적 문제를 단편적으로나마 진지하게 짚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이 소설은, 일본 사회가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어느덧 상수(constant)에 가까운 근심거리가 되어 버린 "중국 팩터"에 대해서도, 소설 곳곳에서 배경, 캐릭터, 중요 사건 소재 등으로 삼으며 직설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독자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돕는 충실한 읽을거리였습니다. 그렇다고 재미가 빠져서는 그의 독자들에게 좀 곤란한 면이 있는데, 그가 언제나 성공해 왔듯 이 작품 역시 페이지가 참 잘 넘어갑니다.

 

출판사와 역자는 이 작품을 두고 예전 헐리웃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소설판으로까지 규정합니다만, 그 영화만 해도 벌써 나온 지가 이십 년이 넘었고, 미국의 경우 제도와 구성원 의식 모든 면에서 "매맞는 여인, 특히 아내"에 대한 구제책이 (더군다나 현 시점이라면) 넉넉히 마련되어 있습니다(부작용이 생길 만큼). 이 소설에 등장한 문제는 사실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화적, 구조적, 의식적 폐습을 그 원인으로 지닌, 오랜 시절 동안 속으로 곪아 온 것이라서, 사실 저런 미국 영화 등과 비교하긴 좀 삼가지는 점도 있습니다.

 

핫토리 가나코는, 그럭저럭 중산층 범주에 속할 만한 집안의 아들인데다 일단 겉보기에 버젓한 직업인 은행원 신분으로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이 남편이 그런데 폭력 성향이 강합니다.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며 아내 가나코의 얼굴을 구타하고, 밥 먹다가 뜨거운 된장국을 끼얹는 등 행위의 질도 상당히 나쁩니다. 그렇다고 중증 정신병에 가까운 새디스트라든가 하는 정도는 아닌데, 여튼 가나코에게는 "마시는 물도 쓴 맛이 날 정도"로 이미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냥 체념 상태에서 참고 사는 거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결혼 생활이 전혀 아닙니다. 이런 남편과 원활한 성 생활이 영위될 리 없고, 그녀는 강요에 못 이겨 잠자리에 임하지만 언제나 피임약을 사전 복용합니다. 이런 까닭에 아직 아이가 없습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대학 친구 오다 나오미와 함께 "아가씨들"이라는 말을 택시기사에게 들을 만큼(혹은 그 앞장면에서 현장 답사를 갔다가 외딴 도로의 트럭 운전수에게 눈길을 받을 만큼) 가나코는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아주 젊지도 물론 않아서, 동년배인 나오미가 "'젊은 여성'이라는 마법의 카드를 더 이상 쓸  수 없는 서른을 넘어가고 있다."는 방백이 나오는 대목도 있습니다. 나오미는 아직 미혼인데, 백화점 말단 외판원 신분인 그녀가 어떤 멋진 커리어를 다듬어 나간다거나 해서는 아니고, 역시 폭력 성향이 강한 그녀의 아버지(와 폭력의 희생양이 된 어머니)를 내내 지켜 본 결과 결혼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되어서입니다.

 

가나코의 남편 핫토리 다쓰로도 그렇고, 나오미의 아버지 되는 이도 자식들한테까지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정신 이상자들은 아닙니다. 작가가 이렇게 성격을 설정한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죠. 극단적 성향을 가진 자라면 일단 이성과 법적 혼인을 맺는 것부터가 어려울 테고, 소설 속에 그런 자가 등장하면 그건 극소수 이상성격자의 문제일 뿐 보편성을 갖지 못합니다. 이렇게 적당히(?) 폭력적인 남성이 등장해야,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니 같이 고민해 보자는 식의 공감 토대가 형성되는 거죠. 적당히(...) 폭력적이니 용인해 주자는 게 물론 아니고, 어떤 폭력도 아내를 향해 행사되는 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향하는 건 물론 당연합니다.

 

오다 나오미가 그렇게까지 가나코를 "도우려고" 드는 동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는 역자분의 말도 있습니다만, 나오미는 (제가 위에 적은 대로) 폭력남편에 대한 원초적 증오감을 자신의 부친 탓에 계속 지녀 온 상황에 몰렸다든가, 대학 때 타 부원들에게 폐를 끼친 후배 커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혼쭐을 내 줬다든가, 아주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만 타게 되어 있던 놀이시설을 두고 "강력 항의한 끝에" 순번제가 성별 차별 없이 이용하게 만들었다든가, 부쩍 늙은 어머니를 두고 이혼을 권유하다 "너 그게 부모한테 할 소리니?"라는 말을 (어머니 본인에게) 듣는다든가 하는 일화를 끼어 넣으며, 작가는 "결행"의 근거를 제법 부지런히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성격부터가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잘못한 녀석에게는 "천벌이 내려져야(본인 입으로 말한 것)" 직성이 풀리는 그런 타입입니다. 성격 요소와 환경 변수가 적당히 어우러지면 이런 사건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더군요.

 

나오미의 그런 성향이 꼭 복수심이나 트라우마, 피해의식의 산물이라곤 보기 힘듭니다. 저 대학 후배 오리엔티어링 사건처럼, 권력관계상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이들을 상대로도 "잘못은 불결한 것이며, 정화되어야 한다"는 식의, 응보 관념이 투철한 걸로 보입니다. 나오미의 부모, 언니가 가정 폭력에 대해 "나오미짱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봐서, 어린 시절의 상처가 크게 응어리져서 이런 대형 사고(....)를 치게 되었다는 식은 아니고, 정의감과 평등 의식을 건전히 자각한 표준적인 현대 일본 여성을 무난히 대변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비록 말단 외판원직이지만 오다 나오미는 그럭저럭 수완이 좋습니다. 중국인 리 아케미가 그토록 그녀를 도우려 한 건(오히려 독자에 따라선 이 대목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요령 있고 수완 좋고 그러면서도 너무 발랑 까지지 않은 채 단호할 때 단호한 그녀 성격이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던 덕입니다. "중국에 가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사실 전문 직능이 뭐 하나 확실히 갖춰진 건 아니지만, 더 클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여성 억압적인 사회 구조 때문에 이런 일이나 하고 있다는 암시를, 작가는 은근 던지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나오미가 아주 능력이 출중하거나 하지는 않고요, 적당히 똑똑한 선에 그쳐야 (아마도 여성 독자들이) 쉽게 공감을 보낼 수 있겠죠.

 

가나코는 영어 검정 시험 우등 자격을 갖고 있으며 대학 졸업 후 회사에 근무한 경력도 있습니다. 이런 그녀가 시댁과 남편으로부터는 무슨 자격 미달자가 과분한 혼사를 맺은 양 지청구에 시달리는 것도 독자는 부당하게 느낄 상황입니다. 시험 성적만 있을 뿐 실무 능력이 출중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편에게 맞고 살며 부엌데기처럼 살림만 하는 노예로 지낼 이유는 (가나코 아니라 누구라도) 없습니다. 반면 시누이 요코는 소설이 끝나갈 무렵 "니가 뭔데 내 경력을 망치려 드니.... "라며 제발 알아서 좀 xx 달라는(스포일러) 요구를 하는데, 처음에는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싶다"로 오해했으나, 다시 읽어보니 "폭력을 휘두르다 아내 손에 죽은 남편"이 자기 오빠라고 소문이 나면 자신의 평판에 큰 흠집이 날 걸 염려한 뜻이더군요. 너 혼자 곱게 xx면, 남 보기도 좋고 니 죗값도 치르는 셈이며 내 장래에 지장도 안 주는 것 아니냔 건데, 이러면 이 사건이 영원히 묻히므로 공범 나오미가 최종적으로 형사 소추로부터 해방된다는 (의외의) 효과도 있습니다. 물론 이미 의식이 깨고 단호해진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가나코는 단칼에 거절하죠.

 

이 소설에서 독자의 미움을 한 몸에 살 캐릭터는 시누이 요코일 겁니다. 그녀는 사회 생활 경험도 많고 능력도 있으며 자기 의지를 효율적으로(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식이 아니라) 관철할 수완이라든가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눈썰미도 좋은 편입니다. 위의 나오미보다 훨씬 고소득자며 지능도 뛰어납니다. 그녀는 오빠가 올케에게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나 이기적으로 이를 방관하고(같은 여자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었죠),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오빠의 "실종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짐짓 올케의 마음을 떠볼 생각으로 전화상으로 교묘히 늘어놓는 교활한 모습입니다. 올케를 충분히 의심하지만 밤마다 전화를 걸어서 "니가 무슨 일 저지른 것 맞지? 이 망할 x아 대답을 하라구 대답을!" 같은 추궁을 퍼붓지도 않습니다(한국형 막장 드라마에 잘 어울리는 이런 선택이 오히려 가나코에게는 효과적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의심을 하되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까지 올케와의 연락을 일절 끊고, 결정적 물증을 남김 없이 구비하고서야 찾아가서 마지막 담판을 벌일 만큼 이 요코는 영리하고 냉정한 여성이더군요.

 

이 소설에서 중국은 여러 면을 지닌 문화 코드,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중국인은 이기적이고 법질서에 대한 근원적 disrespect를 가지고 있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게 분명히 여러 장면을 통해 표현됩니다(여기까지 읽으면 무슨 혐중 문학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두 여성, 숨막힐 듯 조여오는 여성 억압의 기제를 모면하려다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 이들에게, 질서 잘 지키고 정직하며 깨끗하고 교란 없는 일본 사회의 미덕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작가는 "죄 없이 고통을 겪는 여성들에게 일본은 중국만도 못한 땅"임을 제법 심각한 울림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 상하이 같으면 그런 남편은 여자 친정 가족이 나서서 죽여 버리거나, 갱단한테 부탁해서 깔끔하게 처리하지." 사실 중국이 근 백 년 간 반식민지 상태로 지낸 건 저런 비공식적 분쟁 해결 수단이 공권력과 보편 정의를 압도해서인데, 사회주의 오십년 통치를 거친 지금 다시 장개석의 국민당 시절에나 보던 사회상이 또 만연하니(소설 묘사를 떠나 이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참 아이러니하다 하겠습니다.

 

"친구의 죽어 마땅한 남편"을 깔끔하게 clear하고(나오미의 표현입니다) 완전 범죄를 도모하는 과정은, 독자의 공감과 응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긴박감 넘치고 재미있습니다. 이 과정이 소설의 절반인 "1장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 여성일 뿐인데, 어디서 그런 요량과 배짱이 나오는지 독자는 경탄하게 되고, 여러 행운이 도와(이 점이 중요합니다. 운이 나빴으면 어림 없었을 진행이, 여러 천행이 겹쳐 일이 그 단계까지 가기라도 한 거죠) 살인은 그저 먼 후지산자락 어느 모퉁이에 그냥 묻히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나머지 절반 "2부 가나코"에서, 완전 범죄라며 섣불리 안도했던 이 계획이 사실은 구멍 투성이였음을 독자에게 깨우치며, 공들여 쌓은 두 여인의 탑을 밑둥부터 무너뜨립니다.

 

앞에서 말했듯 작가는 심지어 주인공 둘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폭력 남편을 향해서도 너무 지나친 소외, 추방은 시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남자는 (일본에서라면) 독자 바로 당신, 혹은 당신의 남편일 수도 있다!' 정도죠. 그래서, 두 여인이 완전 범죄를 무난히 저지르게 놔 두질 않습니다. 여튼 범죄는 범죄고, 그래서 그 미화, 합리화를 경계하며, 오히려 "과연 그렇게까지 두 여인이 했어여만 했던가!" 같은 逆비판의 여지도 충분히 남겨 놓습니다. 좋은 문학 작품은 이처럼 하나의 신조, 인물, 주제를 위해 폭주하지 않고, 독자에게 많은 공간을 배려, 예비하는 게 또 공통적인 특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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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여인 - 한일 역사기행
곽경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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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한 연령대의 신사 몇 분이,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이국 땅을 찾아가서 깊은 고찰과 상념에 잠기는데, 마침 현지에 사는 묘령의 여인이 홀연 나타나, 영감과 각성의 계기가 되는 알찬 조언을 베풀어 준다.... 예전 서양 문학 여럿에서 보아 익숙한 설정만 같습니다만, 현역 건축가이신 저자가 일본 오사카를 방문할 때 직접 겪은 바입니다. 물론 그 주제는 중세 유럽 어느 백작의 낭만적 고성(古城)에 얽힌 사연이거나 한 건 아니고, 수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전체에 큰 비극의 역사를 남긴 한-중-일 3국의 근원, 현재, 전망에 얽힌 것입니다. 미래지향 프렌드십을 공동 정책 과제로 삼은 게 불과 십 몇 년 전 일인데, 부분적으로는 일본 우경화 바람, 부분적으로는 중국 패권 행보의 본격화 때문에, 이제 동아시아 3국의 관계는 근 한 세기 들어 최악의 긴장, 대립, 불안 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조어대에서 어느 나라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진다 해도 아주 많이 놀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국 때문에, 도대체 수천 년 전 고대에, 특히 한반도와 현해탄, 일본 열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후손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긴 모습으로만 보면 특히 서양인들 눈으로는 구분이 안 갈 만큼 닮았는데, 왜 이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고 안달인 걸까요. 특히 열도에 사는 저들 겨레는, 역사를 통틀어 일정 주기를 두고 반도를 향해 탐욕스런 시선을 두며 그 침략의 호기를 수시로 노려 왔습니다. 저자는 이런 역사의 이면에는 일본 열도 안에서, 풍신수길로 대표되는 반(反) 한반도 성향의 세력과,  성숙한 의식으로 국제 평화를 보다 배려해 온 그 반대 진영 간의 역학 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형성되었는지가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과 연합하여 반도의 패권을 노리고 여, 제 양국을 멸망시킨 게 신라의 소위 삼국 통일인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건 백제라는 정치 단위가 산둥 반도 일대, 한반도 남서부, 그리고 규슈, 시코쿠, 간사이 일대에 걸쳐 큰 세력을 형성한 제국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열도의 백제 세력은 언제나 반도 일부에 대해 모국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외교 관계를 기반으로 "내지"로부터 선진 문화의 유입, 이식을 지속적으로 이뤄 왔는데, 그것이 대륙의 이질적 세력과 결탁한 신라 측의 대반격을 통해 최종적으로 파탄이 났다는 거죠. 신라가 통일한 반도는 열도의 백제 세력에게 망국의 한을 심어 준 엄청난 트라우마의 진원으로 인식되었고, 이때로부터 열도의 일부 정치 세력이 항구적으로 반(反) 반도 성향을 띠게 되었다는 겁니다.

 

열도의 주민 구성은 본디 도래인과 피지배 토착인이라는 이원적 성격 뿐 아니라, 그 지배층 내부적으로도 백제계와 신라계라는 서로 대등한 이중의 레이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중 후자를 대변하는 도쿠가와(德川) 세력이 최종적으로 열도의 패권을 장악했을 때  동아시아에는 평화가 정착되었고, 한반도에서 파견된 통신사 일행은 장기간에 걸쳐 열도 전역을 순방하며 융숭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조선 측에는 "향후 가능할 전쟁 도발 움직임을 미리 시찰하며, 통신사가 받는 대접 자체가 전란에 대한 진사(陳謝)의 표현"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덕천 막부로선 막대한 접대비를 번 측에 부담시킴으로써 반란 예방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풍신수길이 쌓은 오사카 성 뿐 아니라, 먼 규슈의 변방, 아니 그 어느 다른 지방이라도, 현지에 쌓은 성주의 본성, 외성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 철옹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축조된 어느 성곽도 이런 구조가 아니며, 심지어 왕이 거주하는 궁궐도 그저 야트막한 담장을 둘렀을 뿐입니다. 이는 어리숙하고 권위가 부족한 체제의 약점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안정적 중앙집권 체제를 그 이른 시절부터 구축한 조선만의 장점을 보여 주는 거죠. 반란의 우려가 적을 뿐 아니라, 혹시 누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그 행위의 정당성이 확보되기가 어려웠기에, 어차피 투철한 방비를 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겁니다.

 

메이지 유신은 기본적으로 쿠데타였으며, 비현실적 대박을 노리고 무리수를 둔 간사이 세력이 요행히 주류로 재등장한, 일본 현대사 그 비극의 물꼬를 튼 변칙적 사건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묘하게도 백제 왕녀의 현신으로 보이는 이쓰코 여사도 이런 저자의 의견에 흔쾌히 동의합니다(결국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완전한 파멸을 맞았기에). 나아가 폐쇄적 성벽을 쌓고 배타적 지역 할거에 몰두하며, 씨족과 주군의 복수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쟁을 일삼음이 무려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역사를 두고, 저자는 영주마다 마련한 독특한 가문(家紋)까지, "정부와 사회보다 사(私)의 권익을 앞세운 전근대성"의 예증이라며 통박합니다. 오히려 이 점에서 조선이, 유럽과 일본보다 더 근대적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주장에 이쓰코 씨는 처음에 반발하다, 나중에는 저자의 견해에 설복되고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 강점기에 조선 문화에 대한 미학적 연구를 대단히 화려한 문장 속에 담아 발표한 문필가죠. 이 사람은 1980년대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는데, 동대문 남대문 등의 철거를 막아 문화 유적의 보존에 기여했다는 게 그 사유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여러 논거를 들며 柳宗悅의 주장이 허구에 가득한 궤변임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건축가로서 지닌 독자적인 관점을 통해, 아마츄어에 가까운 야나기 씨의 억지 논변(조선 건축 곡선의 미라든가 비애의 표현 등)을 논파하고 있습니다.

 

한일 비교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김슬옹 박사의 평처럼, 이 책은 상대 화자를 (백제 왕녀의 화신인) 이쓰코라는 신비의 여인으로 설정하여, 특히 한국 독자에게 흥미진진한 서사 구조를 베풀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학생 시절(서울대 건축과) 읽은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역시 화제작이었으며 처음부터 일어로 쓰여진) 그 책을 이 "오사카의 여인"도 읽었던 터라,  두 사람 간의 대화는 더욱 심도 있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건조한 문화 논의만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흥미로운 배경과 장치가 여럿 깔려 있으므로, 문외한인 독자도 쉽게 책장을 넘기며 몰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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