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중 누미디아 왕국에서 포로로 끌려 온 섭정왕 유구르타가 말하는 내용 중 이런 게 있습니다. "대체 왜, 로마인들은 저처럼 강한가?"

 

누군가의 지속적인 보호 하에 놓이는 신세란, 따지고 보면 "노예 상태"를 바꾸어 부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중해 건너 누미디아는 로마의 피보호국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정을 스스로 살피지 못하며,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받는 채로, 자신들의 왕을 세우고 내리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누미디아는 약하고, 로마는 강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명예로운 귀족 가문의 지위를 유지 못 한 시민은, 자신의 대에 설사 큰 업적을 쌓았다 해도, 다른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 했습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장군은 특히 군사 부문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누대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집정관 등 고위 관직에 당선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에게는, 특정 명망가의 피보호민 출신이라는 누명마저 따라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명백한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구르타의 누미디아는 위신에 크게 상처를 입은 채 섭정이 적국에 볼모로 잡혀 와야 했습니다. 이제 몇 년 후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자격에 걸맞은 직책을 따 내지 못한 마리우스는, 이름 없는 퇴물로 원로원 말석이나 지키다 한 줌 재로 화할 운명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구르타와 마리우스는 공교롭게도 젊은 시절 친한 교분을 쌓은 바 있습니다. 두 청년이 가지지 못한 바를 모두 지니고 있었고, 대신 두 청년이 넉넉히 향유한 바를 전혀 지니지 못했던 "똥돼지" 메텔루스 카이길리우스 역시, 이 두 청년과 같은 또래였죠. 두 청년에게 오물 범벅인 돼지우리에 처박히는 모욕적 경험을 한 후, 이 명문가 자제는 이후 수십 년이 이어질 큰 원한을 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자기 재능과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일일이 장벽에 가로막히는 건, 메텔루스가 실질적으로 훼방을 놓은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십 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인생이 풀리지 않은 이유를 잘 압니다. 특정 개인과의 악연이 그 원인이 아니라, 로마라는 사회 체제, 혹은 국가 단위가, 안에서, 혹은 밖에서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불운이 초래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제거되어도 또 하나의 실력자가 출현, 적의 도전을 막아내는 로마 공화정의 시스템을 유구르타 같은 전제 왕정의 총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한번 군주가 무너지면 나라 자체의 운명이 끝이었기 때문이죠. 왕을 제외한 나머지 신민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노예처럼 굴다 일생을 마치는 체제 바로 그 모순이, 자신의 나라가 약하고 적국이 강한 비결이었음을,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마리우스는, 가문의 후광, 그리고 선명한 로마인의 혈통 외, 모든 것을 소유한 멋진 남자였음에도 불구, 바로 그 결격 사유 때문에 일인자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전성기를 의미 없이 보내는, 참으로 처량한 처지입니다. 그 역시, "강하고 효율적인 로마 공화정"의 탄탄한 저력 때문에, 개인의 야망을 실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정을 다 아는 처지의 그가, 공화정을 전복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반역이나 배덕은, 마리우스 같은 인격자에게 차라리 죽음만도 못한 치욕이기 때문이죠.

 

앙앙불락하는 두 남자 외에, 술라라는 귀족 청년, 흠잡을 데 없는 귀족 혈통에 힙입어 마치 남신으로 착각할 만한 완벽한 외모(마리우스의 말입니다)를 지닌 그는, 이 둘보다는 많이 나이가 어립니다. 이 사람은 능력과 가문의 후광은 지녔으나, 경제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처럼, 이 소설의 초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세 남자는, 각각 무엇인가 한 요소가 부족하여 웅비를 못하는 모습으로, 작가는 파악하여 무대에 캐릭터로서 내세워지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 모두가 잘 알듯, 로마 공화정 하면 두 말이 필요 없는 그 대표적 아이콘이,  바로 줄리어스 시저, 혹은 라틴어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이름을 지닌 대 영웅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의 할아버지가, 마리우스, 술라라는 양대 거인의 시대에 함께 산, 중요 정치인으로 내세워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독단이나 상상만은 아닌 것이, 실제 역사상 이 老 카이사르는, 마리우스, 술라에게 각각 자신의 두 딸을 주어, 사위로 맞이하고 그들의 저력을 자신의 가문 자산 일부로 삼은 인물입니다. 이런 분명한 실제 행적만으로도,  앞날을 멀리 내다본 통찰력의 소유자로 평가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우스는 큰 부호에 군사적 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으나 나이가 많고 가격(家格)이 너무 떨어진다는 흠을, 술라는 나이와 외모, 가문의 품격 모두 적합하나 개인적 평판이 나쁘고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흠을, 각각 가졌습니다. 그저그런 속물 귀족이었다면 그저 세평이 편히 용납하는 바를 좇아 살고, 괜한 모험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텝니다.

 

그러나 카이사르 그는 예사 귀족이 아닌, 대(大) 파트리키의 후손이고 일원이었습니다. 현재 가세가 빈한할 뿐, 만약 다소의 재력이 갖춰져 중앙 정계로 들어서면, 로마의 모든 세력가와 귀족들은 그의 외모 자체가 바로 증명하는, 베누스 신의 직계로까지 이어지는 그의 혈통과 존엄에 대해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말 것입니다. 최소한 로마는 이런 데에 아주 약한 면을 가졌으며, 바로 이런 관습이  반대편에선 저 마리우스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거죠.

 

카이사르의 큰딸 율리아는 마리우스를 두고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보다 나이가 많기까지 한 그분은, 아빠와 너무도 다르면서도 또한 닮은 분이에요."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처럼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등장인물들도 알고 우리 독자들도 압니다. 율리아의 마음, 진정을 저보다 더 잘 표현한 말도 없다는 걸. 그녀는 같이 즐길 남자보다, 진심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배필로 바라고 있었다는 걸.

 

이 결혼은 누가 봐도 정략결혼이며, 거의 사업상 거래이기까지 합니다. 이상한 건, 그토록 명예와 염치를 중시하는 카이사르 노인이, 태연하게 마리우스 앞에서 금전적 조건을 흥정하듯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마리우스는? 얼핏 들어 큰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노인 측의 노골적 흥정에, 처음엔 불쾌감을 표현했으나, 곧 상대의 진의와 인격 깊이를 가늠하고선, 마치 이런 제의를 기다렸다는 듯 부대 조건을 달거나 수정하지 않고 모든 사항을 응낙합니다. 이 와중에도 "어린 아가씨가 날 싫어한다면? 다른 젊은 연인을 이미 두고 있다면?" 같은 걱정을 품고, 그 경우 어떻게 해서 부녀가 상처 받지 않게 이 혼담을 무마할지 요량부터 하는, 참으로 속 깊은 사내입니다. 율리아의 말을 조금  패러디하면, "가장 전형적, 노골적 정략 결혼인데. 또 전혀 정략결혼이 아닌 결혼"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로마 공화정이 얼마나 튼실한 체제였고, 그 성취한 물질 정신 문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으면, 이런 고아한 인물들이 대거 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메텔루스 똥돼지는 어떻습니까? 이 자야말로, 공화정의 모순과 부패, 속물성  자가 치유 능력 결여를 한 몸으로 대변하는 듯 질이 나쁜 인간입니다. 술라? 곧 나오지만 그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 빼고 모든 걸 다 가진 내가, 돈 때문에 주저앉는데서야 말이 되는가. 귀족의 자부심을 야수와 같은 생존욕구, 근성으로 치환시킨 그는, 이제 한 인간이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지 그 가장 나쁜 예를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 없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실천하는 인문학 - 꽉 막힌 세상, 문사철에서 길을 찾다
최효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공이란 말을 쉽게 꺼내고 쓰는 요즘의 우리들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진지한 개념어로서 고안되었다기보다, 무협지 등에 널리 쓰이던 말버릇 비슷한 투가 정식 어휘로 고정된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만만치 않은 정신적 저력" 따위를 의미하는 용례와는 대조적으로, 이 단어에선 아직도 다분히 장난스런 뉘앙스가 풍기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여튼 아무리 가벼운 느낌으로 즐기다 덮는 무협지라 해도, 만약 그 주인공들이 실제 세계에 그 초능력을 지니고 등장이라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공"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TV 토론, 대담 프로그램에서 통상의 출연자들이 보이는 기량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며 저 먼 신세계의 경지로 좌중을 휘어잡는 논객들을 우리는 가끔 봅니다. 이때 이런 분들이 소위 "넘사벽"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비결 중 상당 부분이, 세부 기술적 지식에의 숙련도보다는, 당사자의 인문적 소양에 빚지고 있음은 이미 우리들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동종 체급에서 차원이 달라 보이게 만드는 지적 자산, 정신적 역량은, 거의 전적으로 인문의 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구더러 "책 좀 읽으라"며 쓴소리를 할 때, 그 책이란 것의 영역은 대부분 인문 쪽을 염두에 두고 꺼내는 말입니다. 사람의 품격을 업그레이드하는 가장 손쉬운 지름길은 (비록 "손쉬운", "지름길" 같은 말이 다소 反인문적 냄새를 풍길망정) 인문을 파고 새기며 그 핵심, 정수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비교적 단시간 내에, 저 방대한 인문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대단히 답하기,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가장 빨리 질러가는 길임과 동시에, 가장 정도(正道)에 가까운 선택이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책, 그리고 10년 전 출간되어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을 지으신 최효찬 선생님은 이에 대해 1) 깊이 있는 나만의 독서 방법 개발 2) 독서를 마친 후 깊이 사색에 잠기기(내면화) 3) 초서(抄書)하기 등 세 가지 방법론을 동시에 실행할 것을 권장합니다. 1)과 2)는 예로부터 동양의 선현들이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지 말고 고루 비중을 둘 것을 강조해 온 바 있으며, 3)은 근래 들어 여러 독서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테크닉입니다.

 

나만의 독서라 함은 추세에 영합하지 않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독서를 의미합니다. 형식적으로, 읽는 시늉만 하는 독서가 아니라, 저자와 지면을 통한 대화를 나누는 중 독자로서의 자신이 끊김 없이 의식이 깨어 있는 능동적 정신 작용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독서 후 사색은 이미 읽은 내용을 정신의 합당한 장소에 요긴히 저장하는 내면화의 작업입니다. 배운 바 없이 생각(자아류)만 많은 사람이 위험하듯, 반대로 자기 것으로 충분히 소화도 하지 못한 채 경박하게 단기 메모리의 지식만 조자룡 헌 창 쓰듯 꺼내 쓰는 사람은 실속이 없고 무능하기 일쑤입니다. 두 가지 노력이 고루 균형을 이뤄야 독서의 보람이 있음은 당연합니다. 초서의 중요성은 의식이 이해한 지식과 정보를 무의식의 밭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게 돌보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이런 3단계 방법론을 전제로 하여, 머리말 포함 48가지 꼭지를 통해 인문의 달인이 되는 길을 독자에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48개의 챕터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위의 3대 지침에 대해 각론을 유기적으로 형성하고 있어, 매일 한 꼭지씩 읽어 나가도 좋고, 마음이 급한 이라면 한 번에 흡수, 소화하겠다는 각오로 통독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문의 내공화랄까 독자 자신만의 내면 계발을 위해서는 여러 저자들이 각자의 지론을 흥미롭게 펼치고들 있지만, 저는 이 최효찬 선생의 여러 제언, 그리고 체계 잡힌 실천론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다 읽고 나서 추측해 본 바로는, 그의 저널리스트 경력과 아카데미즘 내공이 조화롭게 잘 융합한 결과가 그 비결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정통 인문 영역에선 사실 1순위로 강조하지는 않는 게 "새로움, 창의성"입니다. 법고창신이란 말이 있듯, 설사 새로움을 운위하더라도 그 기반은 반드시 오래 전부터 이어온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주류의 입장에 가깝죠. 하지만 최효찬 선생님은 "일단 과감하게 틀을 깨어 보라"고 주문합니다. 저는 이처럼, 경제의 실무에서 요구되는 바를 인문에 실천적, 실용적으로 적용한다는 그 절실함을 이해해 주시는 게, 현장을 누비던 저널리스트 전력의 인문학자에게만 가능한 것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모든 분야를 꿰뚫는 그윽한 내공의 인문 달인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형 지혜인이 그 이상형이거든요.

 

창의력의 발휘로 실무에서 두루 인정을 받고, 큰 성취를 쌓았다 해도 그 인생이 그것만으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인문의 실용적 쓰임새가 1장에서 설명되었다면, 이제 2장부터는 "당사자의 마음 수련" 등 동양적 인문의 본령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능력보다 인성이라는 명제는, 사실 기술적, 실무 능력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고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이 곧 인성 내공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능력은 인성"이라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1장에서는 또한 "자신의 분야에 빠삭해야만 내공의 기초가 쌓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바로 미루어 보아, 허울 좋은 말로만 자신의 인성을 포장하는 행태는, 능력도 인성도 모두 결여한 소인배의 특성임을 지적하심도 우리 독자가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결국 고전을 공부함은, 국지적 실무 능력의 배양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의미의 제너럴리스트, 혹은 능력과 인성의 혼연일체 경지에 오른 달인을 지향하는, 장대한 공부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성이란 물론 혼자 있을 때에도 그 진가가 발휘되지만(소위 "愼其獨也"), 그보다는 나 외에 타인들과의 원만하고 능수능란하며 도덕적인 관계 형성에서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고전에 그토록 많은 처세 요령의 깨우침이 실려 있는 게, 혼자 있을 때에만 군자 성인으로 노릇한다면 벌써 반쪽짜리 인재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한 소이입니다.

 

인생은 알고 보면 허무합니다. 공자가 중심소욕 불유구를 선언했을 때 벌써 그의 나이 칠십, 성인이 도를 깨우치고도 이미 당대인 평균 수명을 훨씬 나이를 지나쳤을 뿐입니다. 청춘의 시절은 이미 간 데 없이, 얼굴에 미운 주름만 가득 남은 채 온전한 마음의 평안만 얻는 게 무슨 소용일까도 싶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럴수록,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뼛속 깊이 깨당고 성숙해질수록 "반전을 꾀하라"고 충언합니다. 사실 무상한 것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세속의 풍진에 그렇게나 애정을 두면서도 막상 노린 바를 손에 못 넣는 게 보통이죠, 마음을 비운 이가 오히려 작심한 낚시꾼보다 성과가 좋습니다.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건 결국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 후 그 허를 틈타 창의적 반전에 성공한 덕분이요. 그런 세속의 실리를 채운 후엔 다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찾으라는 것, 그래서 두 배는 더 자란 사람이 되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비우고 채우는 건 부질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가 아니라, 오로지 인문의 공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한 선순환 피드백이라는 말씀으로 새기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조로아스터교 체계에서 절대 선(善)과 동전의 양면처럼 일체의 체계를 이루는 건 절대 악(惡)입니다. 작가 코넌 도일은 정확히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수학자 출신의 모리어티 교수를 갑자기 등장시켜, 지하의 모든 범죄를 관장, 후원하는 악의 총책이라며 독자 앞에 제시합니다. 초인적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명탐정 홈즈의 호적수로 설정된 이 자는, 그렇게나 탁월한 홈즈가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평소에 보이지 않던 두려움을 노출하는 모습을 통해, 독자에게는 몇 배나 증폭된 공포감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두 사람은 무기를 쓰지 않은 육탄전을 벌이다가, 결국 동시에 행방불명이 되어 버리며, 가공할 악인을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택하여 홈즈가 결국 자기 목숨을 바쳤음을 알게 된 독자들은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이후, 독자들의 집요한 항의를 받은 코난 도일은, 몇 년 후 <빈 집의 모험>을 통해, 세바스천 모런 대령의 본격 등장과 함께 홈즈의 "부활"을 피치 못해 완수하기에 이릅니다.

법의 힘으로 처단할 수 없는 악당을 명탐정이 직접 나서 이런 방법으로 사회로부터 격리한다는 아이디어는 이후 크리스티 여사가 자신의 캐릭터 포와로를 통해 다시 답습하기도 했습니다. 명탐정에게 이 이상 더 어울리는 퇴장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작가들의 고육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리어티는 홈즈와 호각을 이룬 그 가공할 만한 지력과 실천력을 보유했었다는 이유 하나로, 도일 경이 사망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지금에도 여전히 홈즈 월드 속에서 독자들에게 거의 주인공에 버금가는 열광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서브컬처와 각종 비공식 스핀오프, 파생 장르 속에서 모습을 달리해가며 꾸준히 청중을 맞이해 왔습니다. "모습을 달리해갔다"고 표현한 건, 도일 경의 정전 속에서 이 인물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묘사를 한 적도 없고, 잦은 등장이 이뤄진 바도 없기에, 후대 창작자들이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넣을 여지가 제법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일 재단으로부터 공식 작가로 지명 받은 앤터니 호로비츠가 두 번째 장편으로 내놓은 이 소설은, 영국도 아닌 미국 소재, 핑커튼 사설 탐정 사무소 소속의 프레드릭 체이스라는 40대의 기민한 남성을 새로 등장시켜, 왓슨, 홈즈 그 누구도 아닌 이 새로운 인물의 입으로 사건을 기록하게 합니다. 여기에, 정전(正典) <4인의 서명>에 잠시 등장했던 애설니 존스 경감이 이 소설에선 본격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평소에 홈즈를 열렬히 존경해 왔던 그답게, 홈즈의 스타일을 그대로 복제하여, 홈즈가 떠나고 난(?) 세상에서 그의 공백을 아쉬운 대로 잘 메꿔 주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탐정 체이스는 존스 경감보다 몇 살 위지만, 이런 그의 능력에 진심으로 탄복한다고 표현하며, 새로운 홈즈에 어울리는 새로운 왓슨 노릇을 다짐하며 현장에서 혹은 일상에서 그를 보조합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재단으로부터 공인받은 정전 체계의 연장선상에 뚜렷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 홈즈와 왓슨 그 누구도 출연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마치 <배스커빌 가의 개>에서 왓슨만 내내 나오다 거의 종반에 가서나 홈즈가 나타나 집약적 활약을 보인 예처럼, 저는 독서 초입에 "진주인공들의 후반 등장"을 예상했더랬습니다.

 

1인칭 화자인 탐정 프레드릭 체이스는 이야기의 시작을 다소 충격적인 표백으로 운을 띄우고 있습니다. "누가 라이헨바흐 폭포의 결투를, 실제 사건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겠는가?" 사실 이 말은 충직한 독자에게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게, 홈즈의 두번째 퇴장까지 모두를 공인 유니버스에서 지켜 본 입장에서, 일단 홈즈와  왓슨의 진술 자체는 사실인 걸로 간주하고 넘어간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이스의 의심이 타당하다면, 홈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을 했고, 왓슨은 처음에는 속은 채로 홈즈의 설명을 옮겼으나 이후 진상을 알게 되었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당초의 입장을 수정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애설니 존스는 최소한 한 번 정도나마 우리가 만난 인물이지만, 이 체이스란 사람은 본인의 신원도 아니고 기껏해야 그 소속 직장명이, 도일 경이 직접 창조한 세계도 아닌 호로비츠의 작품 1권 속에 잠시 언급된 정도에 불과한데, 그런 미미한 비중의(?) 인물이 진술하는 바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신뢰와 권위를 주어야할지도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 눈에는 미국에서 건너 온 신출내기에 불과하지만, 하는 말에는 또 그 나름대로 조리가 서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데,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홈즈와 모리어티 양웅(兩雄)의 실종 사건은, 미국에서 건너와 영국의 지하세계를 접수하려는 무시무시한 야망을 지닌 클레런스 데버루라는 또 한 명의 조직 범죄 수괴를 추적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통에, 독자와 두 주인공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집니다(과연?).

 

이후에는 데버루의 검거를 둘러싸고, 존스의 집요한 노력과 체이스의 추적이 멋진 협업을 잘 이루면서, 악당 데버루 자신도 놀랄 만큼 조직의 핵심에 파고들며 그의 입지를 위협하고 의도를 좌절시키기 직전까지 갑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클레런스 데버루란 작자가 과연 실존 인물이기나 한가?"면서 큰 소리로 의문을 표시하고, 저는 사실 작가의 전작 <실크하우스의 모험>에서 작가가 쓴 트릭을 염두에 두고, 레스트레이드의 저 외마디 표현에 지지를 표시하며 제 나름의 가설을 세웠더랬습니다. 영리한 작가라면 그러나 한 번 쓴 수법을 두 번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상은, 조금 다른 것이더군요.

 

이 소설에는 전작과 연계한 두 가지 코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캐릭터 모리어티 교수이며(제목부터가 "모리어티의 죽음"이죠), 다른 하나는 핑커튼 탐정 사무소입니다. 전작에서 무심하게 흘려 보냈거나 본격 이야기의 진행을 위한 양념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았던 이 두 요소는,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무게와 충격을 몇 배나 부풀리는 효모 역할을 하며 독자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활극의 중심으로 몰고 갑니다. 미스테리에 스릴러, 액션까지 결합한 이 소설은, 조직 범죄라는 소재를 플롯의 중심에 배치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위로 조직 범죄가 종래의 소소한 잡범 레벨을 넘어 거대한 사회악으로 진화하는지 소름끼치는 묘사로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말미에는 단편 하나가 독립적으로 삽입되어 있는데, 홈즈 이야기에 홈즈가 안 나오는데 대한 작은 보상일 수 있고, 다음 3편을 위한 작가의 복선일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존 그리샴의 작품은 언제나 1) 재미있는 이야기의 힘 2) 정의의 승리라는 건전한 주제의식 추구, 이 두 가지 점에서 독자를 흐뭇하게 해 줍니다. "믿고 읽는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그의 작품이야말로 그의 이름을 믿고 고른 이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이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베스트셀러작가입니다.

서맨사(Samantha)는 아직 서른을 채 넘기지 않은 여성으로, 두 주(州)에서 변호사 자격 시험에 통과한, 말 그대로 앞날이 촉망되는 재원입니다. 스컬리 & 퍼싱 이라는 미국 유수의 로펌, 업계 제4위에 랭크된 거대 회사에 로스쿨 졸업 후 바로 스카웃된 그녀는, 흠 없는 경력을 관리하며 조만간 어소시에이트로 승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8년 월 스트릿을 강타하며 쟁쟁한 기업들을 연쇄 도산시킨 리먼 쇼크 같은 대형 악재의 파장이, 자신의 앞길에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울 줄은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녀일 텝니다.

책 중에도 여러 번 언급되는 "대공황" 같은 건,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정도나 그것도 실업과 궁핍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둔 채 지켜 본 "역사 속의 사건"에 불과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상사 앤디 그룹만이 과장되이 언급하듯, "여기 우리들이 언제 모두 무료 급식소에서 모일 지 모르게 만든" 대재앙의 할퀴는 발톱으로 그녀의 실제 삶에 바짝 다가와 냉풍을 내뿜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해고된 건 아니지만(앤디는 엄청 생색을 내며, 자신의 노력으로 이 지경까지 가는 걸 피할 수 있었다고 떠듭니다), 12개월 무급 인턴으로 회사에서 권고하는 타 조직에서 근무한 후, 상황에 따라 복직할 수 있는 계약직 신분으로 떨어지는 서맨사에게, 간신히 의료 보험 혜택은 남겨진다는 이 조건은 사실상 퇴사 통보만큼이나 큰 굴욕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능력 있는 그녀가 받아들일 만한 오퍼가 못 되죠.


한때 유수의 로펌에서 집요하고 매혹적인 스카웃 제의를 여럿 동시에 받기도 한 그녀지만, 지금은 무료로 장기 봉사하겠다는 인턴 지원도 하루에 열 번을 거절당하는 신세입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똑똑한 그녀로선 나이 서른 즈음에야 처음 겪어 보는 냉대와 무시였겠습니다. 물론 그녀만이 겪는 난리는 아니어서, 로펌에서, 혹은 굴지의 금융 기관에서 일순위로 해고된 젊은 인재들이, 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까닭에 초고등 실업자가 구직 시장의 잉여 공간을 가득 채우는 기현상의 와중 흔히 보는 희생자의 한 명이 그녀일 뿐입니다. 여튼 이 뜻밖의 횡액을 계기로, 한 번도 그럴 기회가 없었던 서맨사는 자신의 행운과 사회의 모순, 그리고 자신의 지나온 선택이 과연 진정한 삶의 기쁨과 보람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현명하고 정직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속 깊은 반성을 가지는 계기로 삼습니다. 작가 존 그리샴이 실제 역사로서의 서브모기지 프라임 파동을 효과적으로 제재화한 노련한 솜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는 문학 작품, 그리고 영화 속에서, 무지하고 가난하며 폐쇄적인 사람들이 바깥 세상으로부터의 멸시와 편견을 견뎌 내며, 공고한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사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됩니다. 근친혼, 무모한 원시 생활에의 집착 등 부정적 면모 부각이 주종을 이루지만, 간혹 이 환경적 악조건을 딛고 세상 밖으로 나와 제 앞가림을 하는 데 성공한 소수는, 엄청난 자부심과 카리스마가 결합한 희귀 퍼스낼리티를 앞세워 독자의 이목을 끄는 주인공으로 내세워지기도 합니다. 그리샴의 이 신작에선 도노번 그레이라는 (아직) 젊은 이혼남이 등장하는데, 물론 그는 저런 전형적 애팔래치안으로 세팅되지는 않았고, 똑똑하고 합리적이며 정의감도 넘치는 자상한 지성인이나, 다만 자신의 가족사나 독특한 출신 배경 탓에 가지게 된 다소 비정상적인 집념, 복수심이 정신을 지배하는 유형으로 독자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맨사는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바쁜 모범생형 삶을 살아온 타입이라 어떤 상처를 받고 그 때문에 엇나간다든가 하진 않았지만, 가정에 불충실하고 부인을 버린 전력이 있는 바람둥이 아버지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는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성상을 미래의 배필로 상상해 왔을 법합니다. 배우 지망생과도 잠시 교제를 한 적 있는데, 비전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남자의 돈, 능력은 그닥 보지 않는 편인가 봅니다. 그녀의 부친은, 정말 훤칠한 외모에, 고수익 고위험의 목표만을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며 살아온 헌터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자부심도 안겨 주었으나(그 탁월한 능력으로 식구들에 온갖 호사를 제공), 지독히 이기적인 성향, 변호사이면서도 질서와 규범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무법자 스타일로 동시에 근원적 불안감을 심어 준, 애증 교차의 양가형 가장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묘한 종류의 정의감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태생적으로 지닌 반(反)기업 성향을 자기 돈벌이에 활용한, 다소 희귀한 타입의 능력자로, 대기업의 비위와 법률적 실책을 포착하는 데에 초인적 후각을 지니고 있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사건을 서민이나 약자, 억울한 희생자 편에서 승소시켜 주는 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상한 방식으로 임꺽정, 조로 플레이를 하는 법정의 의적입니다. 이런 사람이 합법의 경계 안에 얌전히 머물 까닭이 없어, 남편에게 배신당한 처(즉 서맨사의 엄마)가 수집, 적시한 각종 불법 행각이 당국에 제시된 후 그는 졸지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전과자가 되어 버립니다.

서맨사의 인간형은 이처럼, 법의 제약 위에서 놀길 즐기는 프리랜서 아버지와, 유능하나 고지식하고 원칙에 집착하는 공무원 어머니로부터 고루 형질을 물려 받은 구성으로 이뤄졌습니다. 아버지처럼 명예와 위신을 더렵혀가며 부와 스릴, 그리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삶은 질색이지만, 공교롭게도 실직자 신분이 되어 커리어 관리를 더 이상 신경 쓸 수 없게 된 후로는, 아빠에게 물려 받은 정의감만(이 과연 맞는지는 의문이지만)은 그 올바른 방식으로 발휘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커졌습니다. "진짜 법률 일"은 지난 3년 동안 정작 맡아보지 못한 채, 따분한 사무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던 그녀로는, 이번이 오히려 참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입니다. 올바른 사명감과 정의의 회복에 정력을 바치는 모습이 남자답게 여겨지는 도노반 그레이로부터, 그녀는 그간 봉합해 온 상처랄까 제 모습으로 발현되지 못한 자아존중감을 꽃피울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찾을 수 있겠다는 묘한 기대에 들뜹니다.

꼭 납득이 가는 구성만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렇게 우수한 두뇌를 보유했다는 서맨사가 왜 대형 로펌에서 지루한 페이퍼워크만 수행했는지도 의문이고, 그런 식의 무사안일 커리어로는 이후 고위직으로 승급이 어려울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금융위기 속에서 맨 처음으로 밀려나게 된 건 이런 점에서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무튼 그리샴은 환경 파괴 문제, 계약의 불이행, 법인격의 규율 제도 그 맹점을 교묘히 악용하는 대기업, 혹은 거대 자본의 사악한 행태를, 젊은 남녀 변호사의 일견 가망 없어 보이는 투쟁을 통해, 멋지고 재미있는 또 한 편의 활극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읽고 나면 독자인 내가 정의에 동참하여 뭔가를 같이 해 낸 듯 성취감과 도덕적 만족감을 안겨 주는 그의 작품, 이 신작에서도 그의 내공과 수완은 여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지음 / 열림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정호승 시인의 이 산문집은 모습을 조금 달리해서 이미 세상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언급이 낀 글도 보이는 점으로 봐서 최근에 쓰신 글 여러 편이 업데이트되었음은 눈에 바로 들어옵니다. 구판에서 어느 글들이 빠지기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객체로서 텍스트상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시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 내 자신이 그간 얼마나 변했는지 더 실감할 수 있었던 독서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이미 우리 셈법으로 예순 다섯. 넉넉히 노인으로 대접받으실 만한 연세입니다. 시인께서 예전에 쓰신 글 중에는, 성철 스님을 지척에서 뵙고 말씀을 나눈 기록도 있습니다. "큰스님이 열반하신 지 십 년...."이란 대목에서, 당해 기록의 연대를 우리는 어림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꽤 이른 나이에 등단하신 편이고, 시인 스스로도 고백한 적 있지만 "특별히 시대를 앞서가거나 하진 않은", 치열한 현실참여와는 조금 거리를 두신 편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대표 산문을 엮은 이 책의 내용 곳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고, 그 유명한 안치환의 노래 가사 한 구절인 이 책 제목(시인이 직접 작사)만 봐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알게모르게 시대의 아픔을 느낀 흔적을 그의 활동 자취 곳곳에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 이 책 구판을 읽을 때에는 "시인은 산문을 써도 이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쓰는구나." 같은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잖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시인은 당신의 생에서 의외로 아픔이 많으셨고, 그 아픔을 글에다 가감없이, 부끄러워할 것 없이 절절하게 표현을 하셨더랬구나, 이런 생각이 더 먼저 들더군요. 시대의 어둠과 모순에 아파할 줄 아셨던 시인(시인이란 직분의 본 정체성 중 하나겠죠)이었지만, 개인사 곳곳에서 마주친 그 모든 일상의 더러움, 한심함, 그리고 인간 존재 본질에서 빚어지는 악함에 대해, 시인은 우리 평범한 독자들과 다를 바도 없는 여리디여림으로 그 느낌을 털어놓고, 애써 강한 척할 것 없이 영혼의 비명을 그대로 지르고 있었습니다.

 

독자로서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시인은 가톨릭 신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희생, 깨달음, 순명,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을 마치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 인간 예수의 삶에 대해, (한때의 사정이지만)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대목은, 성인(聖人) 비슷하게 저자를 대해 왔던 그의 팬에게는 참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이 글도 예전 판에 수록되어 있었을 텐데 왜 그땐 보지 못했을까요). 이 책에 쓰인 대로, "예수는 성자(聖子) 이전, 사람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그 길지 않은 생애 동안 확실히 보여 주고 떠난" 분. 그런데 그 모범이라는 게, 남아 있는 우리들이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실천이란 말입니다. 이러니 어찌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처럼, 인간으로서 발가벗은 정직한 고뇌를 한때 가졌었고, 그 생각한 바 아파했던 바를 지면에다 독자를 향해 적나라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따라못할 바를 과제로 잔뜩 안기고 떠난 인간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신으로서 섭리한 바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십자가라는 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 십자가만 이렇게 무거워야 합니까? 왜 내가 처한 환경만 이렇게 가혹해야 합니까? 아마 해당 신앙을 간직한 많은 신자분들도, 이런 못된 반항을 단지 입 안으로나마라도 되뇌고 퍼붓고 울부짖은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으실 겁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도 몇 배 늘려 느낄 수 있는 시인이기에, 시인 자신의 운명그 부조리에 대해서만 담담하길 기대하는 건, 어쩌면 십자가에 달린 동안 예수에게 조금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길 요구하는 바나 진배없는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지극히 이기적인 체험으로부터 자신의 영혼 그 안식을 구하는, 범속한 우리들이나 즐겨 찾을 법할 도피적, 편법적 힐링을 꾀하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게 없고 가난하다 여길 때, 역사(驛舍) 주변에 모여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맹인들의 모습을 보라고 합니다. 어떤 맹인은 상점에서 파는 굵기의 두 배나 되는 김밥(시인의 짐작으로는 그 아내가 말아 준)을 먹으며, 그 고달프고 모욕적인 현실 중에서 잠시나마 아픔을 잊습니다. 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 저렇게 극한의 궁핍과 불편 속에서 생의 연명을 도모하는 이도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소한 기쁨과 일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경이로운 신의 축복인가?

 

두 다리가 없는 걸인도,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 유난히 많이 모인 참배객들이 그날따라 후하게 베푼 선심 덕에, 평소의 몇 달치 벌이를 구걸함에 성공하고 행복한 미소를 띱니다. 대각 성인은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통해, 우리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자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인생이 다 그런 바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걸인은 남들과 달리 자신의 하반신에 달리지 않은 두 다리에 대한 아쉬움을 까맣게 잊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상대적 궁핍 같은 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하게 떠들며 나누는 환담 속에 어느새 완전 망각의 영역으로 던져 버립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그토록 불편해하고 못 견뎌하는 물질적 결핍은, 우리 자신이 영혼에다 근원적으로 떠안고 있는 정신적 결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진대, 우리가 일상에서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잊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자신의 과실로 수도관을 터뜨려 놓고는, 도리어 샘퉁한 얼굴로 "피해가 있으면 배상청구하세요."라며 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어느 이기적인 아줌마. 아마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적반하장"과 "역지사지"가 뒤섞여 "역반하장"이란 실언을 하고, 그 실수를 이 후안무치한 이웃에게 교정받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자기 책이 모두 젖어 못 쓰게 된 봉변과 함께, 인간으로서 최소 공감대까지 말살해 버린 듯한 사람과의 이 황당한 체험이 이후까지 얼마나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또 인생입니다. 돈이 없어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고, 돈이 없어서 마음에 안 맞는 자와 벽을 사이에 두고 참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시인의 이 두껍고 아름다운 산문집에는, 소재로서 비루하고 구차한 우리네들의 일상이 가감 없이 녹아들어 있는지라, 오늘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들에게, 그 짊어진 십자가를 경건한 일곱 빛으로 채색해 주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