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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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중 등장인물 미란다의 한 대사에서 따온 이 유명한 제목은, 요정계에서 더 근사하고 더 도덕적으로 완결된 세상을 접해 왔을 그녀 입장에서 내뱉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 표시입니다. new할지언정, 뭐가 brave하다는 걸까요? 이 소담출판사 판의 번역자 안정효 선생은, 저 영단어 brave의 뜻에 대해, 각주로 부연하고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비천하고 한심한 모럴을 지녔으며 질서 전반을 위협하는 "불안정성" 요소가 상주하고 있어도, 감정을 지닌 필멸의 존재들이 아둥바둥하면서 엮어가는 이 인간 세상만큼, 위대하고 멋진 세상도 다시 없다는 취지의, 더 우월한 존재로부터 나온 찬탄이기에, 이 대사가 그토록 명대사로 평가받는 것이겠습니다.

마법사 프로스페로의 착하고 아름다운 딸 미란다는 그 위대한 희극 속에서, 자신의 눈 앞에 희망적인 양상으로 가득 펼쳐진 미래를 두고 저 감탄사를 터뜨리지만, 20세기에 다다라 물질 문명 발달의 불길한 양상만을 지켜 보고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창조해 낸 A. 헉슬리는, "우리가 목도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진정 멋진 신세계로구나!" "미란다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비친 누리를 어쩌다가 우리들이 이토록 망쳐 놓았던가!" 같은 소회로부터 저런 작명을 했을 법합니다.

작중 "야만인 선생"은 이런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여, 두 번에 걸쳐 멋진 신세계란 표현을 토해 놓습니다. 한 번은 야만인 유보 구역(reservation)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막 귀환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이 문명 세상에서 이방인인 자신이나 원 주인인 소위 "현대인"들에게나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비탄에 젖을 때입니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원작 <템페스트>에서도 혹여 우리 미란다에게, 아버지의 본향 인간계(그녀 자신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로 귀환한 후, 어떤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인 환멸, 각성이 이후 그녀를 덮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신세계>는 "다시 찾아 본 템페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이 안정효 선생 번역본은, 기존 텍스트들과 많은 차별점을 보입니다. 원작부터 사실 아주 가독성 좋게 독자를 흡입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비범한 두뇌와 초인적 통찰력을 지녔던 최고 지성인의 음울한 예언적 계시가 문학의 몸을 빌린 것이니만치, (이미 당대에도 유행했던) 소프트 SF장르의 접근용이성을 현대 독자들이 기대해선 곤란하겠습니다. 내용이 워낙 기발하고 소름끼치는 영감을 제시해서, 준비 안 된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 뿐이지, 본래부터가 술술 읽히는 포맷은 전혀 아닙니다.

안정효 선생은 최대한 많은 어휘와 표현들을 두고, 우리 말로 읽어서 의미가 바로 와닿게 텍스트상 세심한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타 번역본에서 다른 분이 그저 '"오르지, 포지"라고 원문을 노출했던 걸, 이 책에서는 "흥겹고도 흥겹구나"라고 고쳐 놓고 있습니다. "새비지"를 "야만인"이라고 일일이 의역하는 점도 이런 태도와 궤를 같이합니다. 이는 번역가로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해 온 원칙의 실천이기도 하겠습니다.

소설은 "포드님", "포드 기원" 같은 지극히 냉소적인 어구에서 알 수 있듯, 효율성과 정연한 질서야말로 문명화한 인간이 추구,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비극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지만, 불멸의 영혼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홀딱 반한 미란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극한의 합리성이 지배, 통제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장점을 모두 잃어버린 비극을 목도한 채, 절망 속에 울부짖는 "야만인 선생"을 통해 헉슬리는 셰익스피어가 시작한 희망의 노래를 이제 자신의 손을 통해 처절한 만가로  바꿔 놓겠다며 지옥 아닌 지옥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냉철하고 침착한 영국인에 비해, 아일랜드인이니 스페인인이니 하는 부류들은 "피 속에 알콜 함량이 높아 어리석고 감정적"이라는 식의 평가, 통념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통제와 인위적 조절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제 분수에 충실하여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고유 기능만 수행하게 하는 시스템은, 이처럼 시끄럽고 불안정한 사회보다 오히려 발전한 면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최하 등급의 구성원 역시, 자신들만의 거리낌없는 쾌락의 시간이 주어져 고된 노동의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 비록 존엄이 뿌리채 박탈되었을망정 본인들은 전혀 인식을 못한 채 행복할 뿐 오히려 현대의 노동계급보다 나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위도 아래도 다 만족이며, 기초적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일절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그 누리는 효용도 훨씬 높은 수준이니, "멋진 신세계"가 맞긴 합니다. 보카노프스키 그룹에 편성되어도 좋으니 당장 그리 보내달라는 이들이, 지금 우리 중에도 없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흉칙하고 야만적으로 들리는 세상, 누구나 다 무부, 무모의 존재로 세상에 던져져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서 부속품처럼 소모되다 세상을 마치는 모습, 괴로울 것도 없고 일견 완벽한 감각적 만족, 흠 없는 자기기만이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혀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이게 사람 사는 양상이 결코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야만인 선생은 이런 더럽고 구원 못 받을 타락한 세상에 잠시나마 몸 담고 더렵혀진 영혼를 씻어내려는 뜻에서, 중세의 편타 고행자처럼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서커스 관람 이상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수위 높은 성적 묘사를 시도하고도 있는데, 그게 오늘날 일부 엔터테인먼트 문학에서 꾀하는 의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오히려 은밀한 쾌감을 기대하는 독자를 꾸짖으려는 계산이었음을 안다면,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요. 이 소설을 읽고도 남 이야긴 줄로만 아는 우리들이야말로 "소마 1그램"에 취해 고귀한 존재의 본분을 망각한 "멋진 신세계"의 멍청이들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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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조선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8
김소연 지음 / 비룡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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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초의 조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러시아와 조선은 국토의 크기, 인종적 구성, 역사의 궤적 등 모든 면에서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도무지 나란히 선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열강과 청 제국의 분쟁을 거중조정하고 방대한 영토를 할양받은 후, 우리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 자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접경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와중에서 대원군의 외교정책이 좌절, 이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라는 비극을 부르기도 했고요. 인천 개항 후 러시아는 다른 열강들처럼 반도에서 이권 침탈 경쟁에 적극 개입하고, 절영도(현 부산 영도) 조차 등 한반도를 자국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느라 온갖 책동을 부린 바도 있습니다. 소설의 태도와 무관하게, 이 점은 역사적 진실로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소설이 시작하는 지점은 1905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고, 내우외환이라더니 마침 국내에선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도저히 국가 역량을 전쟁 수행에 기울일 분위기가 못 되던 시국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청년 장교 알렉세이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조선이란 나라의 정세와 환경적 조건을 면밀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시달 받습니다.

귀족 출신 자제들이 구성의 주류를 이루던 러시아 장교단이지만, 그 중에는 계몽 의식을 지니고 민중들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지닌 부류도 많았습니다. 이 소설 후반에도 나오지만, "황제 폐하가 안 계신 궁정에 무슨 요구 사항이니 뭐니를 가지고 난입하려는, 그 자체가 이미 폭동이다!"라고 외치는 대공 같은 이도 있고, 그에 반대하며 신중한 처사를 유도하려는 알렉세이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알렉세이의 이런 동정적(compassionate)한 태도는, 도적 무리의 약탈 때문에 기초적인 안보 여건도 누릴 수 없던 당시 국경 부근 거주 조선인들에 대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란 자들이 백성의 가장 긴급한 현안에 대해서도 외면, 방관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알렉세이는 윗사람들이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물린 밥상을 두고 "일하는 마부에게 주면 어떨지" 하는 의사 타진을 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자상한 마음씀이 현지 조선측 관리에게 칭찬 받습니다. 보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뿐이고요.

조선에서 지도층으로 군림하던 양반들의 낙후한 의식에 대한 비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아라사(러시아)도 10년 전 청국처럼 일본에 패배하는 걸 보라고. 속 빈 강정이나 아닐지?" 이렇게 열강 간의 우열을 간사하게 가늠하면서도, 정작 자국의 내실을 다지는 실천적 과업에는 무관심합니다. "강상의 도를 부인한 채 폭동을 일삼는 무리들(동학도 지칭)은 이미 나라의 백성이 아니오!" 외국인인 알렉세이가 더 황당해하는, 소위 지배층이란 이들의 뒤떨어진 봉건 의식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언사입니다.


알렉세이는 "근석"이라는 이름(러시아인에게는 그 발음이 상당히 어려운)을 가진 아이 하나를, 가이드, 하인, 말동무 삼아 일정 중 자신과 일행을 수행하게 합니다. 삼천리 강역 곳곳에서 암담하고 희망 없는 모습을 주로 목도하며, 국경의 한 모피상(작가 모파상이 아닙니다)이 일러준 대로, "무책임하고 게으른 민족"으로서 이 험난한 국제 정세 속에 열강들의 각축에 밀려 그대로 사멸할 것 같은 이 민족의 참상 중에 그나마 이 어린 소년의 총기와 활력을 보고 어렴풋한 희망을 갖습니다.

소설 제목 "굿바이 조선"은 그저 주인공 알렉세이가 제 할 일을 마치고 이땅에 고하는 작별인사만은 아닙니다. 마침내 이 머나먼 땅 조선에도 양심과 역사의식, 불굴의 재생 의지를 놓지 않은 민중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태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알렉세이, 그리고 그의 "벗" 근석(알렉세이는 소설 초두에서, 부관 비빅이 근석을 호되게 구타하려 할 때 엄한 추궁을 하며 제지하죠)이, 같이 "낡은 조선"을 향해 고하는 이별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조선은,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 잔재를 일소하여, 정의와 평등이 먼 시골 구석까지 민생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보게 될 조선은, 무기력하고 나태와 인습에 젖은 백조의 나라가 아니라, 불의에 단호히 저항하고 자유와 자존을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산신" 호랑이와도 같은 의병의 나라입니다. "한번 러시아인은 영원한 러시아인"을 되뇌는 비빅처럼, 한번 조선인의 영혼과 정체성을 새긴 겨레는 그 생령을 놓고 결코 이민족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소년 근석의 두 눈빛에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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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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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께 따님이 있어서, 생전에 부친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듬뿍 사랑을 받았다가, 투병 중 별세하셨다는, 소위 "참척"의 아픔을 보셨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이미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당신의 저작을 통해선 좀처럼 이 말을 잘 안 꺼내시다가, 비교적 최근에 낸 책 중에서 간간히 따님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그 예입니다.

박사님이 워낙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사요 석학이시다 보니, 사실 그 전후 경위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나, 당신의 입으로 직접 그 아픈 마음을 표현하시는 건 극히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이 책이. 온전히 그 화제에만 집중하여 한 권으로 엮여져 나왔네요. 박사님의 책은 어떤 주제와 의도 하에 쓰여진 것이라도, 최소 그 아름다운 문장 하나만으로도 탐독의 가치가 있지만, 박사님의 인간적 면모까지를 존경해 온 독자로선, 따님에 대한 그 간곡한 소회가 담겨 있을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굿나잇 키스"는 다음 날 아침을 기약하는 달콤한 다짐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이에 대한 비통한 고별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이 책 제목은 그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육신을 가지고 호흡, 생동하던 이승에서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고했지만, 영혼으로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 매듭을 결코 풀지 않은 채, 구천과 예토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녀 지간의 애틋한 정을 이어갈 테니 말입니다.

선생 연배의 어르신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을 맑은 흙과 상쾌한 공기가 뿜던 그 정기를 흡수하며 시골에서 자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설사 자신이 도회에서의 세속적 성취, 즉 "출세"에 성공했어도, 자신의 아들딸들에게 결코 도시의 콘크리트가 내뿜는 독기에 그 혼이 압사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역시, 장항선편 그 낡은 삼등 열차간에서 지극히 서민적인 메뉴인 삶은 계란을 사먹이며, 금지옥엽이신 따님에게 "인생의 본맛"이 무엇인지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가르치려 했습니다.

선생은 결혼을 하신 후에도 문인 특유의 무책임한(?) 삶을 그대로 이어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던 분이, 딸을 슬하에 보고서야 그 고고히 천상을 향하던 눈을 내리고, 땅만 쳐다보며 일상에 집착하는 "속물(본인의 표현)"이 되셨다는군요. 사실 선생은 워낙 젊은 시절부터 문명을 날린 스타였기 때문에, 세들어 살던 시절에도 집주인이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자신을 두고 그는 스스로 메롭스란 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 알듯 박사님의 따님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미국 현지에서 법조인으로 활약하기도 한 분입니다. 박사님이 문화부 (초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 따님은 미국 내 흑인 폭동과 관련, 특정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되어, 현직 관료로서 재외국민의 고충 해결 사무에 잠시 관여하던 부친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 사건 관련, 박사님은 자세한 사연을 적어 두고 계신데,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자료도 되겠습니다. 물론 이 대목 회고는 저자 이어령 박사님 입장에서야 돌아가신 따님에 대한 애끊는 부정이 그 저술 동기겠지만서도요.

책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1부가, 이런 식의 절절한 사연의 행렬이라면, 2부는 다소 뜻밖에도 박사님이 직접 지으신 여러 시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박사님 솜씨라 그 완성도야 뭐라 말을 꺼내는 게 무엄할 뿐이고... 3부는 영애 이민아 변호사의 서신,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열림원에서 낸 모든 책이 다 그렇듯 이 책도 디자인과 장정이 참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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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5-07-10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중국의 大전환, 한국의 大기회
전병서 지음 / 참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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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서 선생의 책들이 대개 그렇지만, 자세한 논증과 풍부한 근거자료, 도표의 보강 못지 않게, 그 문장이 주는 힘이 실로 강력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중국통이자, 앞으로 좋든 싫든 중국에 목을 매고 살아야 할 우리들이라며 특유의 비전을 제시하는 경세가로서의 면모도 과시하는 전 소장님은, 연단에서뿐 아니라 지면상으로도, 명강사의 제스처와 아우라를 그대로 뿜어내는 듯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예언자의 잠언을 계시받는 느낌입니다. 그의 문장은 결코 길지 않고, "읽는 분들 시간 없고 주의력 딸리는 것 잘 아니까, 뭘 해야 하는지 결론만 딱딱 짚어 줄게"라고 작심이나 한 것 같습니다. 워낙 깊은 분석, 반추 과정을 밀도 있게 겪은 후 명제화한 결론들이라, 무슨 모세의 십계가 풍기는 양 카리스마가 구절구절 묻어납니다.

이 신간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줄이면 "중국은 앞으로 금융업이 뜨니, 지금 유망주에 돈을 묻어 두라"는 것입니다. 전작에서 그는 "외환 위기를 겪고 지난 10년 동안 동력과 활기를 상실한 한국 경제가 연명할 수 있었던 건, 신흥 공업국으로서의 중국이 힘차게 제조업 엔진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시기 특히 한국의 중간재 섹터, 대표적으로 포스코가 (여전히) 잘나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쉼 없이 질주하며 한국의 중간재 생산을 독려하고 있었던 덕이란 거죠.

그러던 중국이라지만 1) 어느 단계를 지나고서까지 철강, 정유 따위를 인접국 시설에 마냥 기대지는 않을 테고(자체 역량 확보) 2) 이미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수출 대신 자국 시장 내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그들이, 더 이상 한국과 윈-윈 하기보다 자국 실리를 두터이 챙기려 드는 게 또한 당연하다는 겁니다(스테이지 전환).

지금까지 중국이 우리 경제의 성장 지탱에 큰 기여를 해 왔음은, 우리도 알고 그들도 알며 전세계의 진지한 애널리스트들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기대어, 중국은 이번 THAAD 관련 미국과 마찰을 빚을 때, "한국이 경제적 실익을 중국으로부터 취하면서, 이런 사안에 대해 타국 편을 들면 안 된다."고 압박을 가하기도 했죠. 이만큼 막강한 상수로 한국 경제 함수식에 자리를 잡은 중국이, 그 내부 사정으로 말미암아 정책적으로 다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기민하게 전략을 수정해야 함은 당연하다는 게 저자의 기조입니다.

앞으로 제철 제강 정유 등이, 중국 고도 성장기처럼 혜택을 보지 못하는 건 이로서 자명합니다. 지금 중국이 집중하는 건 소위 후강통으로 상징되는 금융 섹터의 육성입니다. 이 분야는 우리가, 아직도 그들이 미처 따라올 수 없는 메리트, 노하우를 많이 축적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그들에게 선도적 입장에서 이익을 취하는 게 바른 선택이라는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 포철, 삼전 주식 사서 묻어둔 이들이 지금 큰 이익을 보았듯, 고성장이 명약관화한 종목, 기업을 골라 베팅하면, 과거에 채 챙기지 못한 기회를 다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는 충언입니다.

지난 4일 동안, 지구 반대편 그리스 위기 국면과 겹쳐, 버블 붕괴로 의심되는 중국발 증시 폭락 사태가 이어져, 아마 이 말대로 중국 주식에 돈 좀 들인 분들(많이 없겠지만)은 당장 큰 피해를 보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국 기업 상당수는 아직 장래가 창창하며, 중국 증시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단계라, 앞으로 국가 자체가 체제 위기를 맞으면 모를까 현재로선 반등의 요인이 몇 배는 더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시황의 분석 중요성과 더불어, 전 소장은 "역대 G2중 중국처럼 G1을 바짝 추격하며, 고도 성장을 길게, 현재진행형으로 이어간  나라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주위 분위기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분명한 원칙을 유지하며 시장의 변화에 대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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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 3 - 에이전트 6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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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데미도프만 극중에서 고생하는 게 아니라, 그의 (말도 안 될 만큼 다사다난한) 동선을 따라가는  우리 독자들도, 걱정, 안도, 불안, 분노, 좌절, 그리고 감동이 몰아닥치는 마음을 간수하느라 거의 초주검이 될 지경입니다. 희망고문을 당하는 건 소비에트 철권 체제로 송환된 레오가 아니라, 과연 이대로 철저한 부조리, 악덕, 기만, 음모가 승리한 채 극을 마무리짓고 말 것인지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핏발 선 눈을 추스려 가며 대치하는 독자입니다.

이 장편은 스릴러로서, 그리고 미스테리로서도 완결성을 갖추었지만 (도중에 이야기가 너무 스케일을 넓혀 나간다고 주의를 흩뜨리지 마십시오. 작가는 이렇게 대담한 서사를 펴 나가면서도 벌여 놓은 가닥은 모두 수습하는 매섭고 무서운 솜씨를 지녔습니다), 그 담은 테마는 마치 앙드레 말로 作  <인간 조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묵직하고 순도 높은 성격입니다. 멋진 장르 문학인데, 그리 편하게 장르물 범주에 넣고 정리하지 못 할, 아찔하고 심오한 메시지가  책을 덮은 후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작품의 무대는 이제 러시아를 넘어, 미국, 아프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소설의 시작이 레오가 라이사를 처음 만난 즈음, 그러니 그가 전쟁 영웅으로 전역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가 사는 지금과 아주 멀리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렇게만), 그러니, 이 <에이전트 6>는 데미도프 트릴러지의 완결편이자, 동시에 시, 공 양면에서 현대사 상당 부분을 커버하는 총괄 정리편이기도 합니다. 아마, <차일드 44>를 제아무리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도, 작가가 이야기를 이렇게 웅대한 규모로 키웠다가 장엄하게 마무리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이 소설 전반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제시 오스틴이라는 캐릭터는, 아마도 실존 인물 폴 롭슨을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1970년대에 (거의) 천수를 다 누리고 타계했으며, 소설에서 묘사되는 그런 비극(이런 게 실제로 벌어질 순 없죠..)에 연루되진 않았습니다. 비천한 가정에서 성장한 인물도 아니고,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로스쿨 졸업으로 학위를 끝낸, 건장한 체격을 한 풋볼 선수 경력에, 헐리웃 영화 다수 출연 경험까지 거친, 두루두루 축복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 부분을 흑인 민권 운동에 헌신하고, 가수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으며, 자신과 똑 같은 열혈 원칙주의자 타입 아내를 두었고, 말년이 가난했으며 정보 기관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점, 그리고 러시아를 몸소 방문한 사실(부부 동반이라는 데서 차이가 납니다만) 등은 이 소설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처음에 조금 나오다 말 줄 알았는데, 이건 웬걸 이 사람을 한 축으로 삼아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이 소설의 중핵을 이루는 미스테리의 발단이 됩니다.

미국에서의 참변이 봉합된 후, 진실은 유야무야되고 데미도프의 인생은 엉망이 됩니다. <시크릿 스피치>를 읽은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는 이제 무기력한 중노년 남자로서 어느 한지의 공장장 노릇으로 소일하는 신분이 된 반면, 아내 라이사는 학교 교장으로 승진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는, 뭔가 서로 뒤바뀐 형국이 되었더랬는데..... 이제 레오는 그 최소한의 안식도 빼앗긴 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거의 자멸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당국은 그를 체포한 후, 마지막으로 회생, 회개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이상하게도 저는, 이게 관대한 조치처럼 보였는데, 그 느낌이 틀린 건 아니더군요. 나중에 이유가 나옵니다), 1980년대 가망 없는 소련의 도박이었던 아프간 침공의 현장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도로를 점령하지만, 우리(무자헤딘)는 나머지 모두를 다 가진다." 어째 이로부터 반 세기 전 있은 중일전쟁 당시 어느 진영의 모토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레오가 발 디디는 곳은, 도무지 사람이 사람의 참 모습을 간직하고 살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고, 아비가 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린치의 대상이 되게 하고, 정보 기관이 무고한 국민에게 누명을 씌워 불명예, 치욕의 극한에서 죽게 하고,.... 2부까지 읽어 온 독자들은 이게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는 대서양 저 건너편의 사정도 본질적으론 다를 바 없었으며, 오로지 평등과 자유만을 신봉한다는 검은 투사 역시, 결정적 순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바만을 믿기로 결심한다는 걸, 레오는 쓰디쓴 대가를 치르고 깨달으며, 이를 지켜 보는 우리들도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이 소설 전체를 꿰뚫는 키워드는 "일기장"입니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담은 기록이 그 비밀 보전이란 소명을 못 지킬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레오는 또 한 번(사실은 더 앞에 벌어졌지만) 눈 앞에서 끔찍한 경험을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엔, 의붓딸 엘레나(1, 2부에 나온 그 아이입니다)의 일기장을 제때 훔쳐 보지 않은 과실(!)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운명에 처합니다(그는 스스로 이렇게 정리하고 있지만, 어차피 결과가 크게 달랐을까, 개인이 어떻게 정부와 대적하겠는가 하는 게 독자로서 제 생각이었고요).

이 결말을 두고 과연 행복한 엔딩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더버빌가의 테스처럼 빈사지경에서야 간신히 맞는 잠시간의 평안에 우리는 더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사악한 거대 권력(들)도, 레오의 필사적인 인간성 회복과 구원을 향한 몸부림(사적 원한이나 요구 때문이 아닌) 앞에선 잠시 자제하는 분별력을 보이더란 거죠. 굵직굵직한 현대 국제정치사 주요 국면 배후 곳곳에 "그"가 있었더라.... 물론 사정을 알면 웃음은커녕 숙연함에 고개를 못 들 느낌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진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쓰고 있을지, 새삼 전울하게도 됩니다. 무엇보다, 과연 우리는 생의 고비마다 맞는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서, 얼마나 사람답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고르는지, 진정 발가벗은 나의 진짜 내면과 맞대면하는, 깊은 성찰에 잠기게 해 준 독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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