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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조선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8
김소연 지음 / 비룡소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이방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초의 조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러시아와 조선은 국토의 크기, 인종적 구성, 역사의 궤적 등 모든 면에서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도무지 나란히 선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열강과 청 제국의 분쟁을 거중조정하고 방대한 영토를 할양받은 후, 우리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 자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접경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와중에서 대원군의 외교정책이 좌절, 이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라는 비극을 부르기도 했고요. 인천 개항 후 러시아는 다른 열강들처럼 반도에서 이권 침탈 경쟁에 적극 개입하고, 절영도(현 부산 영도) 조차 등 한반도를 자국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느라 온갖 책동을 부린 바도 있습니다. 소설의 태도와 무관하게, 이 점은 역사적 진실로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소설이 시작하는 지점은 1905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고, 내우외환이라더니 마침 국내에선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도저히 국가 역량을 전쟁 수행에 기울일 분위기가 못 되던 시국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청년 장교 알렉세이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조선이란 나라의 정세와 환경적 조건을 면밀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시달 받습니다.
귀족 출신 자제들이 구성의 주류를 이루던 러시아 장교단이지만, 그 중에는 계몽 의식을 지니고 민중들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지닌 부류도 많았습니다. 이 소설 후반에도 나오지만, "황제 폐하가 안 계신 궁정에 무슨 요구 사항이니 뭐니를 가지고 난입하려는, 그 자체가 이미 폭동이다!"라고 외치는 대공 같은 이도 있고, 그에 반대하며 신중한 처사를 유도하려는 알렉세이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알렉세이의 이런 동정적(compassionate)한 태도는, 도적 무리의 약탈 때문에 기초적인 안보 여건도 누릴 수 없던 당시 국경 부근 거주 조선인들에 대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란 자들이 백성의 가장 긴급한 현안에 대해서도 외면, 방관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알렉세이는 윗사람들이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물린 밥상을 두고 "일하는 마부에게 주면 어떨지" 하는 의사 타진을 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자상한 마음씀이 현지 조선측 관리에게 칭찬 받습니다. 보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뿐이고요.
조선에서 지도층으로 군림하던 양반들의 낙후한 의식에 대한 비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아라사(러시아)도 10년 전 청국처럼 일본에 패배하는 걸 보라고. 속 빈 강정이나 아닐지?" 이렇게 열강 간의 우열을 간사하게 가늠하면서도, 정작 자국의 내실을 다지는 실천적 과업에는 무관심합니다. "강상의 도를 부인한 채 폭동을 일삼는 무리들(동학도 지칭)은 이미 나라의 백성이 아니오!" 외국인인 알렉세이가 더 황당해하는, 소위 지배층이란 이들의 뒤떨어진 봉건 의식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언사입니다.
알렉세이는 "근석"이라는 이름(러시아인에게는 그 발음이 상당히 어려운)을 가진 아이 하나를, 가이드, 하인, 말동무 삼아 일정 중 자신과 일행을 수행하게 합니다. 삼천리 강역 곳곳에서 암담하고 희망 없는 모습을 주로 목도하며, 국경의 한 모피상(작가 모파상이 아닙니다)이 일러준 대로, "무책임하고 게으른 민족"으로서 이 험난한 국제 정세 속에 열강들의 각축에 밀려 그대로 사멸할 것 같은 이 민족의 참상 중에 그나마 이 어린 소년의 총기와 활력을 보고 어렴풋한 희망을 갖습니다.
소설 제목 "굿바이 조선"은 그저 주인공 알렉세이가 제 할 일을 마치고 이땅에 고하는 작별인사만은 아닙니다. 마침내 이 머나먼 땅 조선에도 양심과 역사의식, 불굴의 재생 의지를 놓지 않은 민중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태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알렉세이, 그리고 그의 "벗" 근석(알렉세이는 소설 초두에서, 부관 비빅이 근석을 호되게 구타하려 할 때 엄한 추궁을 하며 제지하죠)이, 같이 "낡은 조선"을 향해 고하는 이별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조선은,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 잔재를 일소하여, 정의와 평등이 먼 시골 구석까지 민생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보게 될 조선은, 무기력하고 나태와 인습에 젖은 백조의 나라가 아니라, 불의에 단호히 저항하고 자유와 자존을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산신" 호랑이와도 같은 의병의 나라입니다. "한번 러시아인은 영원한 러시아인"을 되뇌는 비빅처럼, 한번 조선인의 영혼과 정체성을 새긴 겨레는 그 생령을 놓고 결코 이민족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소년 근석의 두 눈빛에 아로새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