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은행에는 이자가 없다
해리스 이르판 지음, 강찬구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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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행을 비롯 모든 금융제도는 채무자에게 대여한 자금 원본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의 수취를 기반으로 유지됩니다. 이자를 받지 않고 수요자에게 돈을 빌려 주는 시스템은, "자선 사업"이라 불릴 수는 있을망정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본격 산업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슬람권의 은행은 그렇지가 않다고 하네요?

 

최근 최경환 부총리가 주택구입자금 대출 요건(DTI 비율 등)을 다시 강화하고, 거치 기간을 대폭 축소한 후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모색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빚을 내어 집 사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확정 금리의 이익까지 줄이겠다는 건가." 같은 반발이 거셌는데요. 사실 자본 차입의 시간기반 기회비용인 이자는, 많은 경우 경제적 약자로 시작한 이들의 입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핵심 팩터 중 하나입니다.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지역에서건,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는 이미 고대부터, 무슬림 사이에 수수되는 이자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예언자 모하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고 유일신 알라의 권능에 대한 복종을 맹세한 이는 피부색과 혈통을 막론하고 모두 형제라는 공감대에 따라, 인간 대 인간의 교류와 소통을 막는, 오로지 시간의 경과라는 자연적 현상에 의거한 이자 발생에 대해, 원천적 정당성을 부인하고 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고리를 수취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풍요의 혜택을 고루 나눠 가지는 사회가 도래할까요? 예언자 무함마드는 그런 이상향을 꿈꾸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이슬람 사회는 그렇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문명권보다 더 나쁜 구시대적 한계에 봉착한 면마저 있습니다. 이자 제도의 부인만으로는 사해평등 만민형제의 이념 실현에 아무래도 미흡한 바 있나 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진짜 하려는 말은 지금부터입니다. 저자는 비 이슬람권 일반인이 듣기에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을 소개하고, 그 사실 이면에 어떤 원리와 비결이 작동하는지를  책 전체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방식으로 "돈"의 수요와 공급 섹터 사이에 이해의 조율, 혹은 win - win 을 시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우선 이슬람권에서 이자를 부인하는 건, 반드시 샤리아의 강제에 따른다는 배경 없이도, 세속적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비교적 오랜 관습이라는 겁니다. 1950년대 이집트에서 일종의 투자은행(1990년대 후반까지 미국 등에서 엄격한 틀을 유지하던 그 투자은행 포맷과 대단히 유사합니다)으로, 수에즈 국유화 단행 이후 나세르 정권에서 시행되었던 시스템은, 역시 이자를 일절 금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럼 채권자는 무슨 동기에서 사업에 참여하는가? 자신이 돈을 투자한 사업에서 발생한 수익을 배분 받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결국 이자가 다른 이름으로 탈바꿈만 한 것이군." 혹은 "교묘하게 율법의 규제를 우회하는 수법인데?" 같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역시 아주 틀린 시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고 마는 사람들은,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겁니다.

 

사업의 수익 일부를 배분 받는 시스템이다 보니, 채권자 역시 자신의 돈이 쓰이는 사업의 구조와 내실을 꼼꼼히 살피고, 공동 운명체로서의 절박함이 있다 보니 그저 빚 독촉에 그치지 않고 아이디어나 기술적 기여를 함께 진행하게 됩니다. 채무자는 일단 눈 먼 돈 빌려 쓰고 보자는 식의 모럴 해저드가 줄어들고, 중개 기관 역시 그저 기계적 중개인으로서 형식적 계약 의무만 이행하고 끝이라는 식의 무책임함이 줄어듭니다. 신용의 심사나 사업 타당성의 실사가 다분히 내실을 기하게 된다는 점에서,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 확률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이는 단지 사태의 긍정적 측면만 부각하려는 일방적 주장이 아닙니다. 2009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금융 산업은 전 세계 규모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슬람 금융으로, 타 권역의 추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높은 수익률을 기록, 많은 관측자들로부터 대안으로서의 기대까지 품게 만들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는 이슬람 금융의 구조를 보면 간단히 해명이 되는 현상입니다. 경기 활황- 기준 금리 인하 같은 일률적,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사업자가 추진하는 개별 건수의 전망에 따르는 금융이니, 신용 경색이나 연쇄 도산의 여파를 맞을 확률이 낮은 게 사실입니다.

 

대출금 원본 상환 보장을 위한 제도적 수단은,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 민사법상의 저당권 제도와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만, 원본(원금) 변제의 큰 비중을 담보물 환매수로 해결한다는 데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걸 구태여 우리 식으로 따지면 소위 "강한 의미의 양도담보"와도 유사한데, 일단 채권자에게 확정적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은행이 대출 희망자에게 무조건 소유 부동산에 저당권부터 설정할 것을 강요하고 보는 천편일률적 관행과는 다르더군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이슬람 율법의 정신을 꼭 반영하는 취지도 아니라는 게 더 놀랍습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투자 은행의 활동을 위해선 이슬람 색채를 애써 내세우지 않으려 한다는 건데요.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 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에서 채권-채무자 간의 협업이 더 강조되기 위함임을, 그들은 외부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1970년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무리하게 "무이자 계정 전환"을 통해 금융기관의 샤리아식 통제를 강요함으로써, 그나마 잘 돌아가던 경제를 경색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자 없는 은행"이란 착상은, 물론 종교적 명분의 도움을 거부하진 않지만, 종교색을 벗을 때 더 높은 실용성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저자의 통찰은 인류 문명사 3000년에 두루 미치고 있어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대도시에서, 고리대 때문에 저소득층은 지속적으로 노예 계급의 창출원 노릇을 했고(디폴트 시 노예로 떨어짐), 이 때문에 인간 이하의 처지로 떨어져 심각한 사회 부조리의 근원을 만들거나, 반대로 노예 상태에서 탈출, 외부에서 힘을 키워 무력 침입, 문명 파괴를 통해 오히려 신 지배계급으로 대두하기도 하는 악순환이 이뤄졌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 어지러운 문명사의 흥망 부침에, 가혹한 이자 수취 제도가 원인으로 기능했기에, 율법이 이를 금지했을 뿐 그 반대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신약성서에도 나오는 예수의 일갈, "너희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더러운 돈놀이를 하느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고 저자는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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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칼 힐티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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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 제목만 보아도 그윽한 사색, 안온한 휴식, 그리고 근원적 평화
에 젖어들게 하는 게 있습니다. 사실 책을 처음에 휘릭 한 번 훑으면, 이 책은 제목을 배신하는 그런 류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처럼, 쉽게 손을 뻗어 그 직접 효용만 취하고 남은 과대포장용기는 휴지통으로 직행하게 하는 나쁜 습관에 젖은 이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은 실망감까지 안길 수도 있습니다.

"뭐야 이거, 잠이 안 와서 도움을 좀 받으려 했더니, 웬 설교?"

이 책은 무려 한 세기도 넘은 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전, 저자 칼 힐티는 이미 그런 미래의 독자들이 보일 법한 경박한 반응을 다 예측이나 하고 있었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수면제란 결국 인체와 이질적인 화학 약품의 거친 처방에 불과하다. 당신이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당신 영혼의 가난과 불안정 때문이며, 이 원인을 다스리지 않고는 그 불면의 고통으로부터, 무슨 약을 쓰더라도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명쾌하고도 앞을 내다 본 단언일까요. 불면에 대해 그저 기술적이고 대증요법적 접근만을 취하는 입장은, 이 책이 쓰여진 때로부터 근 한 세기 동안 엄청난 양적 연구 결과를 축적해 왔습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벌어들인 돈만 해도, 따로 flow를 측정하자면 천문학적 액수일 겁니다. 하지만, 불면증이 무슨 암이나 에이즈처럼 까다로운 구조를 가졌다고, 때로 치명적 결과를 낳기도 하는 이 질환에 대해 무슨 특효약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불면증"은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난치병"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그 치유를 위한 접근 방법이 근본에서부터 잘못되었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칼 힐티는 "마음을 낫우지 않고는, 당신은 결코 불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방법만 잘 찾아 들어갔으면, 불면증은 과학의 도움 없이도 이미 (최소) 한 세기 전에 정복될 수 있었던 질병인 셈입니다. 이 책을 읽어 보니, 과연 사람이 불면증 아니라 그 어떤 고질의 난치병으로부터도, 마음만 깨끗이 다스리고 다잡으면 못 나을 바 없지 않을까 하는, 먼 해원으로부터의 웅장한 노도와 같은 보호감이 밀려 왔습니다. 한 세기 전 칼 힐티가 비록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만큼의 물질적 풍요는 누리지 못했을망정, 깨달음과 마음의 안식 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나 조지 소로스, 혹은 빌 게이츠도 다다르고 향유하지 못했을 경지를 이미 보고 느끼고 개척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과연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그의 우화 속에서 자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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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깊은 떨림 - 부모와 자녀가 꼭 함께 읽어야 할 세계 명시 100
강주헌 엮음, 최용대 그림 / 나무생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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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에 읽는 시는, 그 읽은 이의 영혼 과육을 살찌우는 태양빛과도 같습니다. 식물이 단지 빛을 주 원료로 하여 광합성이란 기적을 날마다 일궈 내듯, 시는 아마도 들인 수고 없이 나의 내면에서 환희와 재생의 에너지를 거저 빚어 내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 아닐지요.

 

책은 세계의 명시 중 우리의 가슴을 때로는 이글거리는 정열로 불태우고, 때로는 번잡한 오뇌로 공연히 달구어진 마음에 시원한 단비로 내려 청량감을 선사해 주는 주옥 같은 작품들로 꾸려져 있습니다. 그 첫째 편은, 당연히도 주제가 "사랑"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그 반대로 신이 우리 안에 있게 하라는 게, 칼릴 지브란의 상냥하면서도 영감 어린 조언입니다. 사랑을 밖에서 찾지 않고, 우리 내면에 마련된 넉넉한 가능성에서 찾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신, 절대 선, 평화, 안식, 그리고 불멸에 다다르는 첫걸음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다독여 주며 이릅니다.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나를 바른 사랑으로 이끌러 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밤낮으로 뒤척이고 마음을 베이고 아파할 수 있길 기도할 줄 알아야, 그 사람이 사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이런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려고만 드는 이기적인 영혼은 아닙니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이미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아는 시심이, 이제 다만 자신이 빠진 사랑의 깊이와 폭이 어느 지경인지만을 짧고도 강렬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에 자리를 비워 주기 위해 그(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소소한 기쁨을 다 잊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 성인들에 대해 오래 품어 온 외경과 숭배도 한켠으로 밀어버렸습니다. 오롯이 내 사랑을 마음에 채우고 피워 내려면, 바로 그 사랑 외에 다른 감정과 가치가 파고 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시 <If thou must love me>는, 1996년작 영화 <에비타>에 오리지널 스코어로 삽입된 어느 아리아의 창작에 강력한 영향을 준 유명한 작품이죠. 브라우닝은 "다정한 어조, 호감가는 눈빛, 따스한 피부의 감촉" 따위 때문에, 혹은 그 모든 것이 빚어낸 추억 때문에 누굴 사랑하지는 말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라나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행하는 사랑만이, 세월이 부과하는 시련이나 나 자신이 변덕스레 사악하게 부려대는 감정의 침식으로부터 굳건히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풍스런 제목 <O mistress mine>을 달고 있는 젊고 발랄하며 직정적 언사로 가득한 짧은 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입니다. "내일 우리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오늘의 기쁨을 내일로 미루"냐면서, 우리의 이 타오르는 감정에 망설임 없이 정직하자는 게 젊은 그의 제안입니다. 젊은 날은 길지 않고, 신이 그토록 짧은 젊음만 인간에게 허락한 이치가 무엇이겠냐는 거죠. 유전하는 만물이 무상하고도 무상한 법칙에 자신을 맥없이 맡기는 그 모습이 서럽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청춘을 남김 없이 사르면서 사멸해 가는 아름다움을 찰나에서 영원으로 잡아내자는 뜻이겠습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 서로 같고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pp.37~38에 실린 작자 미상의 시(잠언?)는, 지금껏 두 애틋한 추상과 애타는 구상 사이에서 방황해 온 우리 모두의 공감을 자아낼 만한 모든 정의와 해명을 베풀고 있습니다. "우정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미소(일 뿐이지만), 사랑은 그 마음까지 파고드는 손길"이라고 하며, "따라서 우정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사랑은 사랑 만으로 겨울의 냉기와 죽음의 마수를 떨칠 수 있는 위대한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우정 다음 단계인 사랑을, 설령 설익은 풋사과의 맛으로라도 체험해 본 후에야 온전한 어른이 되고, 나아가 지상에 약한 두 발을 한번 디뎌나 보고 스러진 보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He wishes for the cloth of Heaven>은 예이츠의 작품입니다. 강주헌 선생은 이걸 "하늘에 수놓은 천이 있다면"으로 번역했는데, 여태 감이 잘 오던 의미, 심상이 아주 뚜렷해지는 느낌입니다. "나에게 그런 천이 있다면, 이는 내 꿈이오니, 가난한 내가 당신을 위해 당신 발 밑에 깔아드릴 융단이라곤 이 내 꿈밖에 없습니다" 조금 풀어서 쓰자면 이 정도입니다. 결국 cloth of heaven은 시인으로서 자신이 가꿔 온 모든 꿈과 희망, 이상, 낭만 같은 것입니다. 그걸 사랑하는 이 발 밑에 드리워서 밟고 지나가게 하겠다는 거죠. 다소 피학적, 원망적 어조로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는 소월의 시적 화자와는, 뭔가 기사도적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요.

 

그럼 뭐 이런 사랑에 비해, 우정이란 영 쓸데없는 하급의 모조품이기라도 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포의 영원한 라이벌 롱펠로는, "내가 시위에서 당겨 쏘았으나 내 눈이 그 자취를 미처 좇지 못해(p52)" 잃어버린 화살이, 이제 보니 내 친구의 마음 속에 머무르고 있더라고 합니다. 우정이란 이처럼, 무심히 편안히 교류하고 공감할 수 있고, 애써 단장을 하지 않은 채로도 환대할 수 있고, 뜬금없는 방문이 무례가 아니며, 생각없이 내뱉어도 오해가 생기지 않는 오랜 거실의 안온한 대화와도 같습니다.

 

깊고 깊은 규중에서 험한 바깥 세상의 폭풍을 묘파하고 순치할 줄 알았던 에밀리 브론테는, 오히려 우정을 사랑보다 한 수 위로 놓습니다. 요란스레 치장하고 번잡한 빛깔로 눈을 현혹하지만 12월의 삭풍이 채 오기도 전 맥없이 스러지는 들장미가 "사랑"이라면, 정원을 가꾸는 이 곁에 언제나 있어 줄 줄 아는 진득한 호랑가시나무의 넉넉한 심성에서, 우리는 우정이란 녀석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녀다운 진단이자 고백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의 아쉬움과 가능성을 노래했다면, 로버트 서비스(영국의 역사학자와는 동명이인입니다)은 "외로운 길(The lone trail)"의 고독한 의로움을 말합니다. 어떤 길은 남들이 가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정당함을 갖추고, 사악한 자들의 간교한 발걸음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를 빛낸다고 합니다. 좁은 문, 외로운 길은 처음에야 일개 희미한 자취로만 눈에 띄다, 어느 새 뜻을 같이하는 밝은 눈의 주목을 받고, 그 빛이 모이고 뜻이 한 갈래로 만나 거대하고 뚜렷한 대로를 이룹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다고 했던가요. "좇아야 할 가치가 있고 구해야 할 정의가 있기에" 오늘도 서쪽 하늘은 어제처럼 환히 물들고, 전장에서 스러져 간 불요불굴의 용사들은 "결코 투쟁이 헛되지 않음"을 먼 땅에서 증언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향토에 대한 애정,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영원한 충성까지, 잘 엮인 명시 모음 한 권에서 가장 순일한 이데아의 형태로 만날 수 있었던 그 체험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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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정승구 지음 / 아카넷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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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자 정승구 감독님 세대에게는 쿠바라는 나라가 여러 의미로, 그것도 강렬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영원한 투사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친구 피델을 도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바로 그 본고장이고, 그 세대가 어려서부터 열광하며 보고 자란 야구라는 스포츠에 무지막지하게 강한 나라이기도 한 나라가 쿠바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체 게바라라는, 너무도 멋지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불멸의 게릴라, 투사에 대해선, 386 세대가 탐독하던 소위 불온서적에서나 만날 수 있었을 뿐 한국에선 한동안 잊혀졌다가, 15년 전쯤 어느 평전의 히트와 함께 전혀 다른 세대를 중심으로 열기가 리바이벌되었죠. 종주국 미국을 제껴두고 세계 최강의 국대 실력이라는 전설만 자자했던 쿠바 야구팀에 대한 동경, 이미지도, 특정 세대가 아니고선 설사 야구팬이라고 해도 공유하는 자산이 아닙니다. 이렇듯 한국의 특정 세대에게는, 쿠바라는 나라가 정말 각별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금단의 땅이었고, 소련, 중국도 참여한 1988 서울 올림픽에조차 불참한 골수 친북 국가인 쿠바를, 실제로 방문하여 두 눈으로 보고 "호흡"하는 건 소수에게만 허여된 특권이었을 겁니다.



혹시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정승구 감독님은 야구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이십니다^^ 영화감독님이 쓴 책답게 이 책은 그가 순간에 포착한 여러 아름다운 이미지(사진 컷)로 가득 차 있고, 쿠바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근사한 건물(알고 보면 역사  속에서 그들 나름대로 치욕적인 기억이 배었거나, 반대로 자부심이 담긴)들에 대한 예술가적 논평이 빠짐없이 지면을 채우며, 정 감독님과 함께 이 책의 공동 주연인 쿠바의 청춘 커플, 페페와 다리아나는 내내 그를 "디렉또르"라 부르고 있죠.(야구 감독은 영어로 "매니저"입니다)



페페는 정 감독님이 쿠바에 머문 숙소 호텔 여주인 "씨뇨라" 마그다의 아들입니다. 성년이지만 아직도 정신연령이 열 살 정도라며 어머니의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하지만 페페 본인은 "내가 본래 스마트하다니까요!"를 입에 달고 살며 아무 근심 없이, 잘생긴 외모(물라토로서 양친의 좋은 점만 물려받았다고 하네요)에 어울리는 쾌활한 매너로 정 감독님과 거리낌 없는 소통을 이어갑니다. 페페에게는 잘 어울리는 여친이 있는데, 이름이 다리아나인 그녀는 본디 발레리나가 꿈이었으나 교통 사고 이후 감을 잃고 평범한(그러나 여전히 꽤나 미인인) 여성으로서, 이것저것 돈되는 알바를 하며(정 감독은 내내 그 내막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 저 나이에 자기 수입만으로 저런 사치를...?) 젊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정 감독의 소신은 이렇습니다. "한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나라의 젊은이들과 먼저 접촉하고 소통하라." 학자니 관료니 지식인이니 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잔영이고,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알고 싶은 것만 입에 담고 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꾸밈이 없고, 자신의 나라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누구보다 발달한 감각으로 예리하게 꿰기 마련입니다. 우연한 만남과 인연일 뿐이었지만, 페페와 다리아나는 정 감독 같은 이에게 최적 최상의 가이드가 된 셈입니다.

쿠바는 지난 냉전 시기 동과 서가 가장 첨예한 대립상을 보이며 충돌한 전선이었을 뿐 아니라, 풍요한 북과 빈곤한 남이 교차, 공존하는 상징과도 같았고, 심지어 흑과 백이 뒤섞여 구 식민시대의 모순과 폐단을 그대로 노출하는 적나라한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역사를 지닌 쿠바가, 그 국토 곳곳에 소위 절충주의(eclecticism)의 반영물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은 인과의 필연이라 하겠습니다. 정 감독님처럼 예술에 대해 민감한 안목을 지닌 분에게는 무엇보다 이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터입니다.



시가 하면 쿠바산이 예나 지금이나 최고로 꼽히죠. 처칠을 찍은 사진 중에 시가를 물고 기관총을 점검하는 포즈를 담은 게 있는데, 처칠의 반대 진영(나치 독일)은 이를 악용해서(특히 선전선동의 대가 괴벨스) 대중 조작에 큰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가 하면 처칠이 (긍정이건 부정이건) 퍼뜩 연상되는 건 아주 자연스럽죠. 이 처칠이 실제 쿠바에 와서, 미-서 전쟁 당시 관전 무관(당시엔 이런 제도가 있었죠) 신분이었다는 건 저로선 처음 안 사실이었습니다. 처칠 이후 기라성 같은 정치인, 연예 스타가 묵고 간 유서 깊은 호텔은, 본의 아니게 세계사 격변의 중심이 된 이 나라의 굴곡 많은 역사를 혼자 몸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주 늦은 시점까지 노예 제도가 엄존하여 흑과 백이 극심한 분열, 대립상을 보였던 나라가 쿠바입니다. 카스트로의 혁명 후 이런 폐습은 일소되었으나, 그 동생 라울이 집권하며 제한적 개방 정책을 펴고, 관광 산업이 외화 획득원으로 자리하면서, 관광업 부대 서비스직이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큰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자리로 떠올랐습니다. 흑인이나 혼혈보다, 관광객들은 백인 종업원을 선호하기에, 이제 이 나라에는 다시, 생각지도 않았던 섹터에서 불길한 인종차별주의의 망령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세대 간 갈등, 혹은 세대 내 갈등의 새로운 근본 원인도 여기서 비롯하는 기운이 뚜렷하구요.



쿠바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은 건, 역설적으로 이곳이 진정 천국과도 같은 기후와 자연 경관의 혜택을 받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제국주의가 패퇴하고 난 후엔 미국 마피아들이 이 나라를 자기 뒷마당 텃밭처럼 가꾸며 알토란 같은 수익을 챙겼는데, 마피아 본진의 고향이 시칠리아이며, 그 섬 역시 아름다운 기후와 풍요로운 물산 때문에 숱한 외침의 표적이 되었다는 역사를 생각하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책엔 그런 말이 없긴 하지만 말이죠).

저는 예전 세계 배구 선수권 대회(지금 하는 월드리그 말고요 그 훨씬 전)에서, 쿠바 선수들이 경기를 하다 감정이 격해져서 상대 소련 선수들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걸 본 적 있습니다. 더운 지방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다혈질 아닐까 생각하기 쉬운데, 정 감독님 보기로는 지극히 평화주의적인 성격들이랍니다. 저자의 표현으론 "한번 세상을 뒤엎은 경험이 있는 이들 특유의 초연함"이라나요. 모든 게 평등하고, 아프면 국가에서 병이 나을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 조건이 보장된 이 나라의 현실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비를 댈 능력이 없을 때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미국보다 나은 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진부한 선전이 아니라, 정말 여러 모로 "천국"을 연상케하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경제 봉쇄와 소련 붕괴 후 큰 시련을 겪은 쿠바인들은, 이제 빗장을 풀고 다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와 교류를 트려는 모험에 나서려 합니다. 완벽한 국가 후원 체계가 자리한 사회에서라면, 사실 부모도 "세상이 무서운 곳"이라며 세뇨라 마그다처럼 자식 페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역사가 자신들에게 새로 부여한 시련에 맞서 "레솔베르"의 정신으로 그 도도한 파고를  직시, 감연히 응전해 나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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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피그 - 로마의 명탐정 팔코 1 밀리언셀러 클럽 22
린지 데이비스 지음, 정회성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최영 장군이 남기신 말 중에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게 있습니다. 저 말의 "황금"을 "백은"으로 바꿔도 그 타당성이나 깊은 교훈성에 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대 로마가 변방 경영, 특히 브리타니아 같은 기후도 나쁘고 원주민의 기질도 고약한 땅을 왜 그토록 공을 들여 관리했냐면, 바로 각종 광물이 풍성히 매장되어 있는 고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황금이나 백은 따위를 돌 같이 무심히 보지 않고, 제국 경영의 기초로 삼기 위해, 노예들을 시켜 광석을 캐어 제련한 후 그 결과물을 알토란 같은 덩이(이걸 ingot이라 하며, 이 책에서 번역 없이 "잉곳"이란 음사 형태로 내내 노출되어 있습니다)로 농축시킨 그들. 다만 잉곳을 말끔히 다듬어 본토 로마로 이송해야 할 공직자, 장군들은 그야말로 최영 장군(그들의 시대로부터 1400년 후대 지구 반대편에서 활약한 사람입니다만)의 정신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몸에 배게 한 재목들이라야 했습니다. 아니라면 이거 국가 체제 근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로마 멸망의 원인에 대해 납 중독이다 기후변화다 게르만 족의 외침이다 말도 많지만, 가장 근원적 사유를 꼽으라면 고위 공직자, 사회 지도층의 부정 부패지 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잉곳(ingot)은 자기가 있을 곳에 있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이걸로 국가는 금화, 은화를 주조해서 "시민 여러분 제국 신민 여러분! 그리고 로마의 통치 영역 밖에 있는, 어제 기나긴 핵 협상을 타개하고 30여년 만에 세계와 다시 교류의 문을 연 페르시아 국민 여러분! 로마가 보증하는 이 순도 높은 리걸 텐더로 마음 놓고 물품 거래를 하세요! 불편하게 물물 거래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함량을 믿을 수 없는 다른 나라 불량 동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저희 제국의 주화는 외국인도 무조건 믿고 쓰는 겁니다!"라고 장담하는 게 가능하죠. 근데 이 잉곳을 뒷구멍으로 슬슬 빼돌리는 못된 공무원, 썩은 장사꾼들이 있다? 그럼 대원군 말년처럼 국가는 부도 수표를 남발하다 기둥 뿌리가 썩어가면서, 서까래 아래 태평스레 살고 있던 국민을 모두 깔아죽이며 붕괴하고 마는 거죠. 외세의 침략은 차라리 부차적 요인입니다.

 

연산군이 재위할 때 조선은 아직 싱싱하고 건실하게 체제가 돌아가던 효율적이고 젊은 국가였습니다. 마르쿠스 디디우스 팔코가 살던, 그리고 이 패기만만한 공화주의자(거의 반체제 분자처럼 위험한)의 가치를 알아본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림하던 시기 로마도, 네로 같은 광인을 권좌에서 막 몰아낸 소동을 겪었을망정 아직 모든 면에서 잘 돌아가는 젊은 국가였습니다. 그러니까 팔코 같은 젊은이가 타락한 세태에 찌들지 않고 이처럼 건전한 사회관을 유지할 수 있는 거죠(단 팔코는 물론 가공의 인물입니다).

 

팔코는 로마의 명탐정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1권에서 제가 본 팔코는 그러나 명탐정이라기보다는, 명탐정이 될 재목에 가까운 미완의 대기입니다. 그는 1) 일단 너무 자주 얻어터지고 실수를 저지르며, 죽음의 위기에 세 차례나 몰립니다. 일부는 오판 때문에, 일부는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서였습니다. 그렇게 얻어 맞고 코가 내려앉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회복이 빠르고, 외려 끓어오르는 복수욕까지 장착한 채 더 강인한 정신으로 거듭나는 건, 그가 아직 스물 아홉(이 소설에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습니다)이란 젊은 나이의 사내이기 때문입니다.

 

2) 그는 명탐정이 되기에 지나치게 잘생겼습니다. 마르쿠스 디디우스 팔코 본인 입으로 떠들질 않아 그렇지, 주위 여성들은 한결같이 그를 "잘생긴 녀석"으로 일단 인식하는 그런 행운아형 타입입니다. 이게 명탐정 노릇하는 데 방해가 되는가 아님 그 반대인가. 최소한 몰래 잠입하고 다니면서 정보를 캐야 하는 그로서는 누군가의 주목을 강렬하게 받는다는 게 방해면 방해지, 자연스럽게 환경 속에 녹아드는 강점으로 활용하긴 힘든 것 같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듯 "난 훌륭한 정보원이 아니다."가 맞는 말이며, 그러기에 방세도 제때 못 내고 주인 등쌀에 시달리며 도망 다니다 걸려 가끔 난폭한 채권 추심단(그냥 깡패들) 때문에 몰매도 맞는 겁니다.

 

3) 그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어떤 때는 반대로 터무니없이 냉혈한 같은 "추리"를 내세워, 범인으로 결코 몰 수 없는 이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독자로서 책을 읽어나가다가 "아니 이 자식이 지금 제정신임?"하고 벙찌기도 했는데, 이게 다 아직 팔코가 경험이 덜 쌓인 형편이라 그렇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팔코를 위협하는 범인은 OOO를 하며 "이게 팔코 네놈의 약점이지!"를 내뱉으며 비열한 시도를 하지만, 팔코는 지지않고 "아니, 오히려 강점인걸!"로 맞받습니다. 저 위에 제가 적은 팔코의 단점들은, 사실 그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선량한 남성이며, 무능할망정 한번 정의감이 발동하면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는 무모한 헌신(거의 불구자가 될 뻔한)을 하고도 후회가 없는 진짜 사나이죠. 그가 황제의 군림기에 시대착오적 공화주의자로 남은 것도, 저 최영장군처럼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는" 청렴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때 안 묻은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한국어 번역판은 400여페이지의 두꺼운 볼륨인데, 언제 다 읽었을지 모를 만큼 재미있고 스케일도 큰 모험담, 그리고 미스테리가 펼쳐집니다. 미스테리의 공식에 잘 맞게 곳곳에 독자를 위한 단서가 숨겨져 있으며,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게 바로 복선이니 주의를 느슨히하지 말길 바랍니다. 작가는 꽤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럽거나 좀 장난이 심한 서술 트릭을 많이 쓰는 편이니 독자는 해당 대목에서 괜히 발을 헛디딘 채 넘어지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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