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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다이어 1
미셸 호드킨 지음, 이혜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로설의 흔한 패턴은 1)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더 완벽한 집안 배경과 함께 느닷 나타나서 2) 당돌하고 유니크한 매력은 있지만 왠지 남주에겐 좀 부족한 듯한 여자 주인공에게 벼락처럼 사랑에 빠지며 3) 둘은 밀당을 벌이다(여자 쪽이 더 튕김) 결국 서로의 거짓 없는 마음을 이해하고 결합에 성공한다는 식입니다. 이 책 역시 중간까지만 읽으면 이런 영 애덜트 공식에서 별로 벗어나는 것 같지 않다고 독자는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렇게 착각한 후 딱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는다 해도 별 실망은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으니까 말입니다. 1) 일단 여고생 마라 다이어의 입담, 특유의 블랙 유머와 반어법이 듣기만 해도 유쾌합니다. 2) 그런데 이 여고생이 그냥 걱정 없이 사는 애가 아닙니다. 물론 집안이야 물질적으로 유복한 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끔찍한 사고를 겪은 후 일종의 PTSD를 앓고 있죠. 이런 애가 "곧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지만 여튼 현재까진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나 하듯, 천연스레 농담 반 독설 반 현실과 악몽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1인칭 시점에서 풀고 있습니다. 가끔 "이상한 체험"에 대해 말하는데, 아직 어리고 여자애니까 신경과민이려니 하며 독자는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중반을 확실히 넘기고 나면, 그렇게 안이하게 판단했던 독자는, 슬슬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히 드러나는 진상을 목격해 가며, 자신이 확실하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아이, 마라 다이어라는 아이는 뭔가 초자연적 현상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 여태 벌어졌던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자신도 모르게 유발한 원인이었던 겁니다! 독자는 그제서야 "어, 어, 이거 봐라....?" 하며 긴장의 끈을 확 당기며, '로설이 다 그렇지 뭐' 하던 심드렁함에서 후다닥 각성하게 되는 거죠. 작가가 제법 큰 이야기 꾸러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독자는 비로소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여고생이라 심사가 복잡하고 감성이 예민해서 저리 말이 많았나 보다 싶었어도, 이제부터는 '처음부터 특별한 아이라서 무심결에 흘리는 말 같았던 게 사실은 심각했었구나' 정도로 인식이 바뀌게 됩니다.
여고생 마라 다이어가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겪게 되는 소동도, 뻔한 듯하면서도 사실 심각한 사건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라를 찍은 학교 최고의 킹카이자 명문가 출신의 황태자인 노아 쇼 때문에, 그녀는 교내 모든 여학생의 질시를 한몸에 받게 되고, 사실상 일진이나 마찬가지인 안나 패거리의 집요한 공작으로 여러 번 곤경에 몰립니다. 스페인어 교사 모랄레스는 개인적 감정으로 그녀에게 심히 불공정한 처분을 일삼는데(후반에 가서 결국 큰 사건이 터집니다), 부호의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고등학교(짬짬이 언급되는 내용을 보니 교과 과정이 매우 수준 높더군요)에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사로 재직할 수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이름과 인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라는 수학이 타 과목에 비해 약한 편인데, 제이미라는 흑인 동급생(나이는 어리지만 두뇌가 우수하여 월반)이 여러 모로 도와 줘서 그럭저럭 성적을 올립니다. 이 제이미가, 예의 킹카인 노아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심어 주는 바람에 마라가 괜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셋 사이의 오해만큼은 이 1부의 끝에서 다 해결됩니다. 제이미가 마라와 노아에게 필요 이상으로 동조해 주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결과가 생기긴 하지만 말입니다(사실 노아 쇼도 이 여친 마라 때문에, 귀한 몸에 위협이나 상처가 남을 뻔한 게 여러 번이더군요. 하지만 사랑이란 본디...).
이 책은 전체 3부작 중 첫째 권입니다. 아직 엄청난 이야기가 갓 시작되려 자세만 잡았을 뿐이고, 마지막 장면 충격적인 총격 사건의 발생 때문에 독자는 깜짝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음 권에 이어질 사연을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순결한 도덕성을 간직한 여고생 주인공 마라 다이어가, 자신이 책임지거나 통제할 수 없는(없었던) 일련의 비극에 대해 지나치게 자책하다가, 정말 다른 사람(인격체)이 되어 버리거나 미치는 것 아닌지 하는 거에요(바꿔 말하면, 아직까지는 그 부모와 오빠의 우려완 달리 정신이 말짱하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녀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노아 쇼라는 남고생(우수한 두뇌, 우월한 혈통, 강인한 체력, 퍼펙트 외모를 모두 갖춘)의 장래와 영혼마저도 이 마라의 그것과 연동하여 움직이는 형편이라, 이 기괴한 사연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내가 정말 데쓰노트 같은 수단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적 개입, 실행 없이도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면, 나의 귀책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요? 법학에서 밝혀낸 바로는, 어떤 행위는 결과에 대해 그 원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인되거나, 대단히 약한 정도로만 인과에 기여한 걸로 판정됩니다. 마라는 이 복잡미묘한 연쇄 작용에 대해, 지나칠 만큼 자기 부죄(負罪)를 시도하고 있어서, 이를 지켜 보는 우리 독자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법률 전문가인 부친 다이어 씨에게 자문하면 명쾌한 답이 나올 테지만, 이런 이야기를 대체 누구더러 믿으라고, 그 이치와 논리의 세계에 사는 분에게 꺼낼 수나 있겠습니까.
"마라, 그들은 그런 꼴이 되게 자초한 거라구."
우리도 이 노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무튼 여고생 마라는 죄의식과는 별개로, 자신이 과연 무슨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심각한 공포에 빠지는데, 이를 도와 줄 수 있는 이도 "운명의 남친" 노아 쇼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빠져 눈이 먼 남자 외에, 누가 이런 미친 사연을 곧이 들어 주겠습니까.
노아 쇼의 의붓어머니(그리고 죽은 친어머니)가 가담한 "동물 해방 전선"은, 공교롭게도 바로 며칠 전 밍크를 대량 방사했다고 해서 뉴스를 탄 바로 그 단체입니다. 소설에서의 설명대로, 이 단체의 이런 행동은 이제 일종의 테러로서, 실정법상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p288:14의 문장 주어 "제이미가"는 "노아가"로 바뀌어야 문맥이 통합니다. 한스미디어의 책들이 언제나 그렇지만, 번역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외국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뮤지컬 <애니>와 영화 <스타워즈>에서 사용된 맥락 원용에 대해 친절한 역주가 적절히 삽입된 점도 독자로서 고마운 부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