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정요 - 열린 정치와 소통하는 리더십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오긍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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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는 보통 제왕학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고전입니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주로 유념하던 사서 삼경 등 과거 시험 출제에 애용되던 텍스트와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그 중요성과 연혁에 비해서는 현대인들에게 그 지명도가 낮은 듯 보입니다. 이 고전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건 모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그 취임까지의 준비 기간에 이 책을 읽었다는 일화가 널리 퍼지고부터입니다. 사실 조선조, 고려조에 이 책을 읽은 축은 그저 제왕들에 그친 게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명신, 충신들처럼 군주를 잘 보좌해야 할 재상과 판서 들, 혹은 장래 일신의 높은 영달을 바랄 당상관, 당하관들도 넉넉히 가까이해야 할 잠재적 독서층이었겠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바른 처신으로 동료와 상사의 신망을 얻고자 할 모든 직장인 역시, 이 책의 저자가 먼 시점부터 염두에 둔 청자(聽者)가 아니었을까요.

정관정요는 몇 년 전부터 여러 역자분들에 의해 완역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김원중 선생님의 한국어역의 특징이라면 1) 타 저자의 주가 아닌 텍스트 본문에서 한문 텍스트의 누락이 없고 꼼꼼한 옮김입니다. 2) 김원중 교수님의 해설엔 초보자를 넉넉히 고려하는 친절함이 깃듭니다. 기본적인 사항을 언제나 먼저 짚고, 혹시 필요하다면 여러 주석본을 인용하여 부가 설명을 하십니다. 3) 편집에 가독성이 높습니다. 이는 책이 펴내어진 출판사에 따라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4) 윤문이 꼼꼼하여 문법 오류나 오탈자가 매우 드물고 문장이 평이하게 잘 읽힙니다. 특히 이 <정관정요>는 어떤 심오한 경전의 의의를 탐구하기보다, 다분히 실용적(처세적) 목적에서 읽혀야 하겠으므로 이런 미덕이 더 절실히 요구됩니다.

당태종은 수천 년에 달하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해, 학자나 민중을 불문하고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객관적으로 그는 "사실상의" 창업 군주로서 제국의 기초를 튼실히 닦은 공덕이 크죠.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선 무단히 고구려를 침공하다 국력을 낭비했다는 점에서 비난과 빈축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이조차도 그는 "즉시" 과오를 뉘우치고 갓 성립된 체제의 내실을 다지는 게 진력했다는 점이 탁월합니다. 이 과정에서 "위징이 살아 있었던들 그가 진언을 삼갔겠으며 끝내 내가 이 무리한 원정을 시도했겠는가!"라고 개탄했다는 그의 회오 속에, 이 고전 <정관정요>의 주된 저술 모티브인 그 유명한 명신이 또 등장하여 인연을 잇는군요.

그는 군주의 인품과 태도 면에서 또한 기념비적인 덕성을 갖춘 걸물이었습니다. 인신(人臣)된 자로 제갈량의 전범이, 학자로서 수신의 미덕을 갖춘 자로 동중서 같은 이의 롤 모델이 꼽히겠으나, 제왕으로서 만인(이라기보다 군주의 후계자 될 자들)의 거울이 될 처신이라면 당연 당태종의 그것이 거론됩니다. 이는, 건국 군주(부친 고조보다 사실상 더 큰 공헌)로서 손에 피를 끔찍히도 묻혔으며, 무엇보다 제 피붙이를 둘씩이나 죽인 패륜과 악행을 저지른 이로서, 향후 원만한 정국 수습과 차분한 나라 살림이 거의 기대되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헌데 일단 보위에 오르자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적이자 자신의 패륜 행각의 가장 큰 표적, 피해자였던 형의 최측근 위징을 등용하여 국사의 매 면모를 직간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위징의 처신 역시 볼 만한데, 죽다가 살아난 목숨 그저 일신의 안위나 돌보자는 생각에 굴신과 아첨, 복지부동으로 일관하지 않고, 군주(한때는 주군의 정적)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오히려 말마다 폐부와 정곡을 찌르는 충언, 냉정한 국정 운영으로 응수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일부러 비위를 긁는(즉 국사와 직접 관련 없는 삐딱선) 제스처도 취했는데, 이 역시 바보가 아닌 그로서 매 순간 목숨을 거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세민의 성격이 간단치 않고, 친형제의 생명을 둘이나 앗은 이가 일개 재상 따위의 행보에 겁 먹을 게 뭐겠습니까. 여튼 그는 어차피 거두어졌다 다시 들인 여분의 생을 산다고 생각하고, 신하로서 남아로서 국가의 신민으로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언행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군주와 신하가, 서로 속을 훤히 꿰뚫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통 큰 제스처를 취하는 건 중화 문명에서 실력자, 대인으로 천하에 보이려는 모든 야심가들의 공통점입니다. 서안 사변을 기술할 때 유시민도 자신의 <거꾸로..>에서, 장개석과 장학량, 주은래의 쇼맨십을 두고 이런 평가를한 적 있습니다. 당 태종 역시 천하에 "내가 결코 냉혈한이나 속 좁은 독재자가 아님"을 보여 주려 했고, 위징 역시 그런 "쇼"에 철저히 조연으로 부응했습니다. 때로는 주연의 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버액션까지 할 정도였는데, 이 역시 당 태종은 바로 그 속내를 간파하고 케미를 맞췄지요.

지금 한국은 국제 정세상 대단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중국 당국은 이례적으로 "한국의 친구들(朋友們. 붕우문)"이란 표현까지 써 가며 재고를 촉구했으나, 이내 "90% 이상의 네티즌이 제재 원해" 같은 여론전을 쓰는 등(환구시보) 국익 앞에 체면을 돌보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 가지 정책으로 일관하며 융통성을 잃는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다음 한 수가 무엇인지 알고 현명하고도 실리적인 외교를 펴야 하며, 아마도 단지 일국의 통치자로서 발휘해야 할 지혜를 넘어, 국가 간 치열한 외교전에서 십분 채용해야 할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지혜가 이 책 안에 담겨 있는 만큼, 당국자들이 넉넉히 참고해야 할 인문 고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런 위기의 시국일수록 나라의 참 주인인 우리 국민들이 더욱 열독하여 냉철한 집단 지성을 가다듬는 데에도 이 책은 유용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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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발칙한 혁명 - 비틀스, 보브컷, 미니스커트 - 거리를 바꾸고 세상을 뒤집다
로빈 모건.아리엘 리브 지음, 김경주 옮김 / 예문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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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를 즐기는 이에게 책은 아름다운 여성과도 같습니다. 예쁜 외모에다 담고 있는 정신 세계까지 꽉 찬 내실이라면 그녀와의 만남은 반나절이 촌음처럼 지나갑니다. 제게는 지난 한때의 문화사 단면을 매우 소프트하게, 그러나 비비드하게 싣고 채운 이 책이 그런 교양 있는 미인처럼 느껴졌습니다. 날씨가 더울수록 미인을 만나고 다녀야 한다는 진리를 확인이나 시켜 주듯요^^

이 책은 거센 혁명과도 같이 당대를 찾아왔던 1963년의 여러 문화적 사건들을, 대중 문화의 창조, 비평, 체계화에 앞장 섰던 여러 예인, 평론가, 저널리스트 등의 입을 빌려 회고하는 형식입니다. 영미권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물들이 묵직하면서도 생생하고 진실된 증언으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데요.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도 결코 낯설지만은 않을 기라성 같은 가수, 작곡가, 패션 디자이너, 영화 배우, 모델 들의 이름과 발언이 마치 올스타 퍼레이드처럼 지면상의 행진을 계속합니다.

만약 문화사나 사회학 관련 서적(대학 교과서든 대중서든 불문)을 꼼꼼히 읽어 온 독자라면, 이 책 인터뷰 거의 35% 가량을 채우는 각종 매체의 기자, 편집장, 기획사 CEO, 사진 작가 등의 이름도 상당히 친숙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영화도 올스타 캐스팅으로 꾸려진 작품이 있듯이, 이 책도 이처럼이나 유명한 인사들을 일일이 만나 짧지도 않은 인터뷰를 따오기도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화려한 면모입니다. 인터뷰만으로도 값진 컨텐츠인데, 이 책에는 적지 않은 분량의 사진까지 실려 있는데. 인터넷이나 다른 책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귀한 아이템들이기까지 합니다.

이 책은 인터뷰의 모음입니다만, 인물별 편제가 아니라 주제어, 키워드에 따라 편집되었더군요. 책은 모두 4파트로 나뉘었는데, 각 파트는 2~3개씩의 키워드가 이끄는 작은 챕터로 다시 나뉩니다. 이 챕터들을 리드하는 소제목은 모두 알파벳 A로 시작하는 영단어들입니다. 1963년을 대중 문화가 세계인의 행동 양식과 시스템을 장악한 기원의 해로 보는 저자들의 관점이 반영된 포맷이겠습니다. 인물별 인터뷰로 책의 편제를 꾸리는 게 일반적이고, 그 중 가장 성공했고 유명해진 예라면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지금은 사세 퇴조로 아랍 갑부가 인수했죠)가 펴낸 <젊은이여 오늘을 이야기하자>같은 책이 있죠. 묘하게도 그 책 역시 1960년대의 노도와 같던 흐름을 대변한 여러 학자, 운동가, 예술가 들을 다룹니다. 그 책의 비중이 학자나 사상가들에 압도적으로 치우쳤다면, 이 책이 다룬 인터뷰이(interviewee)의 비중이 대중 문화 종사자 쪽으로 거의 90% 이상이라는 게, 두 책이 각각 발간된 시점 사이의 간격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1960년대가 아직도 지식인에 의해 점령된 시대였다면, 이 책이 우리를 만난 21세기의 지배자, 리더, influencer는 누가 뭐래도 대중문화예술인들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돕는군요. 혁명이 현재진행형이던 시점에도 여튼 그 진단과 해석은 교수들의 입에서 나와야만 했던 게 과거라면, 지금은 당연 그 현상의 담지자, 추진자들인 예술인 스스로 입을 열게 하게 이를 들으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 당연한 사실이 반 세기 전 과거에는 당연하게 인정되지들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이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완독한 독자인 제가 대중해 보건대 85% 정도가 영국인들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저자 서문에도 잠시 언급되듯 시대상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이 단지 대중문화 풍속도 모음에 그치지 않고 진지한 역사서의 한 가닥에 이어짐을 증명(아, 어쩌면 이렇게 책의 태도에 따른 분류를 하고 들어가는 태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습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던 밥 딜런이나 키스 리처즈가 알면 많이 떼찌할 수도 있겠네요)하는 대목이기도 하구요. 영국은 비록 2차대전에서 승리했지만, 피로스의 승리였음을 스스로 폭로하기라도 하듯 너무도 비싼 대가를 치르고 국가적 위상에 있어 많은 층계를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첫째로 영국은 제국을 잃었습니다. 인도를 비롯 광대한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켜야 했고, 수에즈 운하 운영권도 1950년대에 나세르 등 민족주의자들의 과감한 액션에 의해 내줘야만 했습니다. 해외에서 지킬 자산이 없으니, 청년들을 징병하여 군대를 만들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성년이 되는 해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끌려갈 악몽"에서 해방된 소년들은 이제 청춘을 보다 자신의 욕망과 꿈의 실현에 정직히 쓸 짬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와 애국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둘째로 영국은 대전 당시 노동자계급의 무수한 인명 희생과 헌신에 의해 국가를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대가로 역사상 처음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는 경험을 맞이했습니다. 이 책 저자는 "처칠 수상에 신물이 난(그가 나치로부터 국가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천황의 내각을 옹립한 충격을 여러 대목에서 술회합니다. 영국의 정치판을 갈아엎은 것도 노동계급이며, 그로부터 십 년 후 지식인과 정치인으로부터 대중예술인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혁명"을 이끈 것도 노동계급이라는 사실입니다(이런 단정적인 문장은 저자의 견해도 아니고 책에 표현도 안 되어 있습니다만, 결국 독자가 deduce할 수 있는 주제가 한 마디로 이것이라고 제 개인적으로 정리합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이 책은 촬영 각도를 달리한 "역사책"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딱딱하냐면 그렇지는 전혀 않고요,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듯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유명인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인터뷰어의 질문이 명시적으로 나눠지지 않고(아마도 그 "질문"은 챕터들의 소제목, 키워드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뷰이들만 자꾸 튀어나와 (대체 뭐라고 질문을 받았기에)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그땐 이랬어"를 수다 떨고 있습니다. 이 수다가 아주 즐겁고, 때로는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합니다. 솔직한 말을 털어 놓고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는 게 예술인들의 장기입니다. 지식인들의 현학적 어투, 정치인들의 범죄적 거짓말에 질린 대중들이 아닙니까. 이들 예술인들은 대중을 의식하기에 정직할 수밖에 없고, 그를 떠나 천성이 솔직한 영혼들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 중, 대략 계산하건대 80% 정도는 노동 계급 출신입니다. 이유는 앞서 말했습니다. 대전이 끝나고 제국이 해체되자 이 계급은 비로소 정직하고 건강한 자각을 시작한 겁니다. 1963 대중 문화 혁명을 이룬 주역들이, 허울과 가식을 집어던지고 새로운 소통을 이룬 거대한 움직임을 이끈 건 논리적으로 실물적으로 필연이었습니다. 또한 애초에 노동계급이니 중산계급, 상류층이니 나누는 것 자체가 다분히 영국적 현실에 적용될 만한 인식 작용입니다. 프랑스만 해도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귀족의 족보부터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걸로 여겼고, 독일은 호언촐러른 왕가가 축출되면서 귀족의 위신이 현저히 추락했습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근본 없는 이민자들이 몰려 가 세운 나라입니다. 오로지 영국만이 20세기의 절반이 지나도록 제국의 체통에 얽매이며 계급적 구분이 사회적 실체로 존재했습니다. 이 노동 계급이 더 이상 꺼리낄 것 없다는 듯 맹렬히 사회의 장벽을, 문화 섹터에서 소프트하게 밀어붙인 혁명이 바로 이 책의 주제입니다. 20세기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바로 이런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책에 나오는 진술과 증언들은 정말로 진솔합니다. 이 중에는 프로퓨머 스캔들로 애스터 자작과 큰 물의를 빚었던 맨디 라이스데이비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의 소개는 "모델, 배우 겸 작가"라고 합니다만, 사실 당대인들에게 천하의 몹쓸 창녀로 찍히다시피 한 사람입니다. 하긴, 어제 제가 SBS 스포츠 채널에서 방영된 "무하마드 알리 특집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만, 그 레전드 복서도 자신의 시대에는 "반역자, 징병 기피자, 과격 테러리스트"로 혹심한 비난을 받았죠. 공교롭게도 그 역시 19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유명인이죠(연예인이 아닌 운동선수이긴 하지만). 라이스데이비스는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 영국에서 윈저 왕가 다음으로 성골 혈통으로 꼽는 애스터 가의 로드 윌리엄 3세(이 사람은 sir가 아니라 lord입니다)와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엄중한 귀족의 구차한 변명과 땅에 떨어진 위신이 우습다는 듯 "He would, wouldn't he?"라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이 쿼트가 책 p19에 인용되어 있는데요. 다만 이상하게도 여기서는 그 당사자가 누군지 이름이 전혀 없네요. 본문 중 네 차례나 등장하는 맨디 라이스데이비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은 착오 없으시길).

마이클 케인도 우리는 맨날 폼 잡는 영감님으로 나온 걸 봐서 잘 모르지만 사실 이 시기 "혁명"을 주도한 주역 중 하나죠. 이 시절의 그를 회고하는 배우는 "도통 귀족 역을 못 맡던 배우"로 기억하는데, 당연합니다. 케인은 지금도 런던 코크니 사투리로 한몫보는 사람인데 누가 그에게 귀족 배역을 주겠습니까? 이 대목은 배경을 뻔히 아는 사람끼리 즐기는 농담에 가깝죠. 마치 우리가 이덕화 씨 하면 대머리를, 이상민 하면 거액의 빚을, 샵의 서지영 하면 금수저(와 다른 어떤 사건)를 바로 연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터뷰 내용대로 <줄루 전쟁>(이 영화는 1964년작인데, 책 중에서 특히 언급된 게 이 까닭입니다)에서 새파란 중위로 나오긴 하는데, 많이 무리하는 모습이죠. 나이 들고 나서는 독일군 장교 역으로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튼 그는 이제 이름 앞에 sir를 붙이는 신분이니 한 사람의 말투와  작위를 동시에 접할 때 이만한 아이러니도 없겠습니다.

한국어판 추천사는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가 썼네요. 우리 나라 이 분야 1세대를 이양일 선생 같은 분으로 꼽는다면, 임진모씨는 그 세대가 공유할 만한 비판적 역사관(마일드한 편입니다만)과 신세대 문화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1963을 증언할 자격을 갖춘 몇 안 되는 인사입니다. 물론 한국에서 이 "1963"은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먼 메아리처럼 찾아왔습니다만, 오히려 이 덕분에 60년대 부근에 출생한 이들이 자신들의 청춘기에 이 도도한 시대의 물결을 그만의 감성으로 수용하여 재생산할 수 있었겠습니다. "지금 그 시대의 영상을 보니 비틀즈가 섹스 피스톨즈처럼 보였다."는 본문 중 증언처럼,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이 시대에는 세상을 파괴할 반항이자 불순한 책동이었습니다. 인터뷰이들의 화제 근 40% 가량은 비틀즈 이야기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이제는 늙어서 민망해 보이게(그래봐야 20대 중반이었는데)" 만든 1963의 혁명아들의 자부심 넘치는 표백이 가득한 만큼, 최소한 비틀즈 팬이기만 해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이 책은 또한 피사체들이 살아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넬 듯 생생한 흑백 사진이 가득합니다. 특히, "비달 사순의 트레이드마크인 바가지 머리"라는 표현을 그저 텍스트로 접하는 것과, 이 책의 사진처럼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패셔니스타, 트렌드 세터들이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오는 걸 눈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흑백 사진만이 전달할 수 있다는 속설의 타당함을 다시 확인하게도 됩니다. 1963을 그저 역사의 일부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축복인지 불운인지도 잠시 생각하게 합니다. 악명 높은 폴란드 이민자 출신 지주 이름이 "피터 라흐만(라크만이 맞고요)"으로, p234의 비치콤버("코머"가 맞습니다) 같은 오타가 다소 아쉬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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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보는 미국사 -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
박진빈 지음 / 책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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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성공한 국가와, 그렇지 않고 실패한 국가가 있습니다. 서양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신대륙"이라 불렸던 지역에 숱한 이주민들이 원 거주자를 몰아내고 정착했으며, 복잡다단한 투쟁 과정을 거쳐 오늘날 볼 수 있는 여러 근대 국가들이 성립했지만, 이 중 성공한 국가라 불릴 수 있는 사례는 몇 없습니다. 대부분이 치안 부재 상태, 혹은 격심한 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죠. 유일하게 미국만이, 풍요로운 시민 사회 일반의 번영 단계를 넘어 초강대국으로서의 패권까지 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미국은 결코 다른 나라들처럼 토착민 중심의 자연적 확장과 정착을 이루지 않았으며, 철저히 이민자, 혹은 "침입자" 위주의 계획되고 치밀한 절차에 따른, 도시 중심의 발전사를 가꿔 왔죠. 세계에서 도시 위주로 이처럼 지속적인 국가의 발전을 도모해 온 나라의 예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이야말로, 도시의 발달, 혹은 흥망 패턴을 중심으로 그 성장과 확장의 단계를 고찰하기에 적절한, 어쩌면 유일한 국가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아메리칸 시티, 혁신과 투쟁의 연대기"입니다. 어구의 전반부는 "미국의 역사 = 곧 도시들의 역사"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후반부의 "혁신"과 "투쟁"은 도시사의 내포 핵심을 이루는 두 키워드입니다. 미국의 도시들, 혹은 미국 그 자체가, 인류 문명이 가장 성공적으로 가꿔 온 혁신의 결정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오늘날 세계의 패권을 쥐고 군림하는 미국이라는 실체를 애써 부정하려 드는 오류에 빠지며, 무엇보다 이렇게 예쁜 외관에 콤팩트한 내용으로 꽉 짜여진 책부터가 애초에 저술되어 우리 독자들 앞에 제시될 수가 없는 거죠. 책이 아무리 미국 근대사(근대사밖에 없는 국가이니)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유지해도, 결과적, 총체적으로 그들이 "성공한 정치- 경제 단위"임은 도저히 부정 못 합니다. 선명한 광채를 빛내는 그들의 위엄 뒤에, 만만치 않는 채도로 대지에 새겨진 그늘을 동시에, 균형감 있게 고찰하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파운딩 파더 중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마치 한국의 정주영 현대 창업주처럼 소년 시절 대뜸 집을 뛰쳐 나와 자수성가의 기틀을 닦은, 그의 자서전의 가장 주된 배경인 필라델피아는 과연 미국사를 개관할 때 첫머리에 등장할 만한, 미국 도시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한 시기의 필라델피아에 대해서는 상론이 필요 없을 만큼 초기 13주 시절 교역과 생산의 중추 기능을 수행한 도시였으나, 이 책은 특히 독립 100주년 전후(남북 전쟁의 혼란이 막 수습되던 미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한)의 여러 사연과 곡절에 대해 비중 있게 분석합니다. 꼭 쇠퇴의 변곡점에 접어든 도시라야 대거 신흥 이민자들이 유입하여 하부 노동력을 공급하는 건 아닙니다. 이 시기 뉴욕 역시 아일랜드, 남부 이탈리아 출신들이 대거 몰려들어와 슬럼을 형성한 것은 마찬가지였죠. 다만 전반적으로 입지 조건의 유리함을 상실한 도시에서, 특히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이 어떤 농간을 벌여 이익을 취하고 "먹튀하는지" 그 과정을 냉철히 분석하는데, 이 부분이 독자로서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대에야 그 땅을 딛고 각자의 생업에 성실히 종사하던 이들에게 정직한 땀의 과실을 돌려 주는 얼마나 뿌듯한 이름이었겠습니까만, 이제 이 "형제애의 도시"는 그 명칭의 본의를 철저히 뒤집는 양상으로 "번영의 양지와 음지"을 극명히 가르는 비정성시로 탈바꿈하고 말았네요.

미국 서안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온갖 인종의 용광로와도 같은 복잡한 주민 구성, 미국형 도시 자치와 개방형 자본주의의 성패 여부를 가를 지표식물과도 같은 LA. 도대체 이 도시 하나만 놓고 10년기(decade)史를 써도 책 몇 권이 나올 분량의 사연을 안겠지만, 저는 이 챕터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슬프고도 의미심장한 정착사 언급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2차 대전사를 다룬 책이나, 미국 현대사의 단면을 분석한 어떤 책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루스벨트 집권기 대일 선전 포고 직후 (마치 나치 치하의 유대인처럼) 타당한 이유 없이 집단 수용된 사실은 꼭 언급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일본인들의 처절한 정착, 투쟁(대단히 소극적이었지만)사를 처음 접한 적이 있는데요, 저자분도 이 부분 서술을 위해 연구를 진행하며 "집단 수용이라는 야만적 조치가 이미 그 전 단계에서부터 그럴 만한 빌미,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음"을 비로소 파악하신 듯한 느낌을 표현하더군요. FDR이 괜히 변덕을 부리거나 신경과민성 정책을 편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점증하던 백인들의 반일 감정의 비열한 표출이 결국 때를 만나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는 뜻에서요. 이건 일본인들이 겪은 봉변이라며 우리가 고소해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토록 부조리한 만행을 저지른 국가, 정부가 용케도 응보를 받지 않고 살아남았구나 하는 느낌을 부를 만큼 개탄스러운 일이죠.

며칠 전 저 남부 달라스에서 또다시 인종 갈등의 소산인 인명 피해가 발생해 미국 전역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다만,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폭발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급성장을 보인 시카고의 역사는 어찌 보면 미국이란 신생국의 성장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본에 가까운 성격입니다. 책은 적절하게도 시카고의 폭등에 가까운 성장세를 고찰함에 있어, 미국의 영토가 급격히 증가한, 나폴레옹 1세와의 거래 "루이지애나 구입"을 기점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루이지애나는 물론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를 가리키는 게 아니며, 책에 수록된 지도에서 보듯 현재까지도 "중서부"라 일컬어지는, 북미를 남북으로 거의 종단하다시피하는 광대한 영역 전체를 포함합니다. 종래 프랑스의 형식적 관할 하에 있던 이 지역이, 혈기왕성한 미국인들의 수중에 비로소 들어옴에 따라, 시카고(이름부터가 너무도 토착민스러워 전혀 그 실질을 반영하지 않는 듯한)는 그 발전의 거점으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저자께서는 이 과정에서 "예의 바른 인종주의", 혹은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는 이율배반적 정치 술책이 거주민들의 선거구 책정과 함께 어떻게 교활하게 구현되는지 흥미롭게 서술합니다. 여튼 시카고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고, 또 번성했습니다. 정의의 타락이나 공평의 실패보다는, 혁신의 긍정적 측면이 더 크게 기능한 덕입니다. 이 시카고를 품은 일리노이가 배출한 가장 큰 현대사 인물이 바로 버락 오바마란 사실은 우리가 진실을 돌아볼 때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팩트입니다(그러고 보니 힐러리 클린턴도 있네요).

흔히 애틀란타를 두고 낡은 인종차별 관행과 기독교 보수주의(남부 침례교)의 본산처럼 여기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1996년 하계 올림픽이 이 도시에서 개최되었을 때, 마지막 성화 점화자가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로 결정되어 진한 감동을 안긴 사실은, 역으로 보면 그만큼 이 도시가 따가운 선입견에 시달려 왔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의 폐습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지역이라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죠. 애틀란타의 호황과 번영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라면, 왜 정해진 도식에 따라 이 도시가 응보를 받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만도 합니다. 책은 상당히 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 도시가 치명적인 쇠퇴로 빠질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의 성과와 빼어난 미덕을 잘 반영하는 한 챕터만 고르라면 저는 이 애틀란타 파트를 꼽고 싶습니다. 도시의 발전은 결코 단선적인 흑백논리에 따라 선과 악을 판명하는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보는 시야가 극히 좁은 독자만이, 이해도 극히 미흡한 주제에 대해 과도한 단순화로 치닫는 폭거를 저지를 수 있죠. "너무 바빠서 미워할 틈이 없다"는 한 줄의 코멘트가, 어떻게 위선과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경제적 실리를 도모할 수 있는지 잘 요약합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요즘 세계 각지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적 증오"를 말합니다. 묘하게도 이 단어는 불어에서도 heine로서 같은 어원, 같은 의미를 나타내더군요. 사족으로, 저자께서는 이 일대의 공화당 지지세 확산, 보수화를 우려하십니다만, 그 반대로 플로리다, 혹은 저 서부 해안에서 인종 구성으로나 다른 배경으로나 진보 성향의 유권자가 엄청 늘어나고도 있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전혀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애틀란타와 정반대로, 실패한 도시의 전형이 될 만한 게 세인트루이스입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재건을 위한 야심작 중, 책에 나온 대로 "프루잇-아이고 프로젝트"는 서류상으로만 볼 때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대안이었으나, 정치인들과 건축업자, 그리고 배후에서 불측한 이익을 도모한 비양심적인 세력에 의해 최악의 재앙을 맞이했다는 줄거리죠. 사실 이 사례는 역사학 뿐 아니라 경제학 교과서에서 더 자주 인용되는 형편입니다. 임대차 시세를 최고가격 설정으로 제한해도, 타산이 맞지 않는 임대업자들의 관리 태만으로 인해 결국 더 큰 피해가 세입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결론으로 말이죠. 외부 불순 세력의 지속적인 교란 시도도 있었으나, 빈민들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자포자기 행태도 결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초반에 있었던 한국의 광주대단지 사건과 매우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알카트래즈는 예상대로 원주민들의 정치적 점거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되더군요. 본문 중에도 언급됩니다만 사실 무작정 원주민(네이티브 아메리칸)을 편들 일은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설사 백인의 계약 위반과 협정의 폭력적 파기가 있었다고 해도(양아치처럼요), 그 계약과 직접 연고가 없는 다른 종족의 후손, 그리고 이 섬 알카트래즈에 그 보상, 대상(代償)의 효과가 그대로 이전될 수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미국 백인 정부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원주민들이 행동에 나섰다고 하나, 이 실력 점거 역시 논리를 갖췄다고는 못 합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대목은, 원주민들만의 해방구를 형성한 그 십 수 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내부 자치 질서가 결국 엉망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DC는 선거를 치러 보면 거의 90% 넘게 민주당 표가 나오는 지역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더군요. 이유는 이 책의 해당 파트에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미국 심장부 중의 심장부가 그토록 진보적인 이념에 물들어 있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주최의 역사적 이벤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 이 지역의 성향이나 개성만 고찰해도, 미국이란 나라가 생각보다 뿌리 깊은 건강성과 역동성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성에서 혁신이 나오고, 역동성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할 투쟁이 나옵니다.

마지막 장 뉴욕은 사실 뉴욕이란 고유명사를 빼고 현대 세계 도시 일반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1990년대의 관악구 일대, 2000년대 초반의 마포, 용산 일원의 재개발 사업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좋은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시 발달사로 고찰한 미국 현대사가 이처럼이나 보편적 실상을 드러내는 뉴욕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어쩌면 가장 성공한, 혹은 가장 실패와 거리가 먼 도시를 거느린 국가 미국의 위상을 상징합니다. 독자로서 제가 내린 이 결론은, 젠트리피케이션이 갖는 긍정적 의의만을 애써 부각하고자 함이 물론 아닙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빈민들이 자본의 냉혹한 손에 떠밀려(신자유주의 프레임으로도 고찰 가능합니다) 곳곳에서 속출하는 주거 모순적 현상을 비판하고자 고안된 용어이지, 결코 물질적 번영을 자랑스러워할 함의가 들어 있지 않았죠. 탁상 공론이 아닌 현실에서, 그 중에서도 살벌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냉엄히 살필 것은, 우리 가운데 얼마나 현실의 지갑이 넉넉히 채워지는 기쁨과 성과 측정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현지의 실상을 그저 책을 통해 접하지 않고 풍부한 배경 지식을 통해 주제를 꿰뚫으시는 저자의 필치 덕분에 더욱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제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 레시피에 따라 여유 있게 소재를 다루는 셰프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뉴욕 시장의 이름을 에드워드 코치라고 정확히 표기하신 점이나(다른 책을 보면 "코흐"등 별의별 오기가 다 나옵니다), neighborhood를 "동네"로 간명히 번역하는("이웃" 따위가 아닌) 대목에서 책에 대한 신뢰가 더 두터워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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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영화로 배우다 - 십대가 꼭 지녀야 할 12가지 인성 꿈결 청소년 교양서 시리즈 꿈의 비행 11
라제기.백승찬.이형석 지음, 남동윤 그림 / 꿈결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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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갈수록 조직화되고, 조직 안에서는 혁신이 강조되고, 혁신을 위해서는 조직원 사이의 협업이 강조되는 추세입니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개인이라도, 불건전한 파벌 형성 따위의 시도로 조직의 협화(協和)를 깨뜨린다면 이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능력조차 보잘것없는 개인이 비열한 책동으로 가뜩이나 불안정한 조직 내 입지를 지키려는 의도를 갖는다면, 그 개인이나 조직을 위해 대단히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이런 분열적인 행태를, 안목 있는 지도자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들부터가 먼저 감지하고 경계하는 분위기더군요. 인화와 융화가 그만큼 중요하며, 개인주의를 그처럼 강조하는 서구 사회에서 오히려 더 강조되는 덕목이 이런 고차원적 협업 지향 인성입니다. 부회뇌동하면서 조직의 분열을 뒤에서 부추기는 이중인격자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그런 고차원적 인성이, 어린 나이에서부터 내면에 바로 자리할 수 있도록 돕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공감이니 협동이니 하는 게 그저 눈치나 살살 살피고, 남들의 성과에 묻어 가면서 사실상의 태업을 벌이는 행태를 의미하는 게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죠. 참된 인성이 무엇인지, 목적과 효율을 바람직한 지향성까지 갖추면서 현실화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겉과 속이 다른 책략을 구사하지 않고 회사 등의 조직에서 참된 능력을 발휘하려면, 창의성이나 혁신 역량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 올바른 개념이 갖춰져야 함이 자명합니다. 이 책은 바른 인성의 구체적 덕목을 모두 열 두 가지로 잡으면서, 어린 독자(제 생각에는 중학생 고학년 정도부터가 적당한 것 같았습니다)와 심도 있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책의 어조는 차분히, 그러나 가볍지 않게 독자를 설득하려는 품입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어린 독자에게 이와 같은 인성을 가르치는 "교재", 매개체를 영화로 잡고 있습니다. 영화처럼 인생의 진실(단면이든 총제적 조망이든)을 강렬하고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서사가 또 없죠. 영화 안에는 감상자의 정서를 자극하고 공감과 설복을 유도하며 세계에 대한 비전의 변화를 촉구하는 강렬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런 주제 지향의 설득은 얼마든지 다양한 층위를 갖춘 스펙트럼으로 분화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어린 독자(동시에 학교라는 집단 안에서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며, 앞으로 더욱 복잡한 2차 집단의 한 자리를 차지할)에게 그 나이에 걸맞는 성장 단계가 요구하는 인성 덕목을 예리하고 섬세한 의도로 키우려 들고 있습니다. 영화는 올바로 선택되고 건전하게 해석될 때, 가장 좋은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대단히 넓은 범위에서 "교재(물론 영화)"를 선택했고, 건전하면서도 밀도 높게 "인성 형성"을 위한 메시지를 뽑아 냅니다. 쉽게 보여도 이런 작업을 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게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 주연의 한국 영화로, TV에서도 자주 방영하여 한 번 정도는 관람한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아 우스운 모습, 외관이라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듯 착각을 부르지만, 엄연히 질환의 결과로 빚어진 비정상의 불운한 조합이기 때문에 결코 당사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왕따 같은 행태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야 할 상황. 부모보다 늙어 보이고 추한 겉모습을 가진 아이. 분명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개인(타인)은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을 구태여 상정한 건, 오히려 다수와 소수 간의 작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빚어질 수 있는 집단 따돌림의 해악을 잘 강조하려는 주제의식 덕분이죠. 하나 유감인 건 해당 파트의 뒷부분에서 영화의 결말이 먼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아이와 함께 영화를 먼저 감상한 후 부모가 함께 읽는(그리고 대화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 파트가 끝난 후, 유사한 주제를 다룬 다른 영화들을 추천하는 방식인데요, 저는 1980년작 존 허트가 주연한 <엘리펀트 맨>을 같이 권하고 싶습니다. 몇몇 장면이 어린 관객에게 충격적일 수 있지만 어차피 그런 점은 이 <두근두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글러브>는 청각 장애인 선수들로 구성된 고교 야구단의 사연입니다. 강우석 감독의 연출인데, 일견 따분하고 그저 인위적 감동만 강요할 것 같은 이런 소재를 두고 너무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려나가서, 감독의 전달 솜씨가 이처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잘 단련된 관객에게까지 깨우쳐 준 좋은 실례였습니다. 저 역시 저자분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건 "특별 대우"가 아니라,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열린 태도라는 거죠. 제가 이 작품을 보며 놀란 건, 감독이나 배우들부터가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찍었기에 이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공유되고 설득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주제나 메시지 전달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관객에게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는 태도가, 감독 특유의 유능함과 결합한 결과입니다.

"타문화 이해", 그리고 "인간 문명에 대한 지나친 경외와 치우침"을 경계하자는 주제로, 블록버스터인 <혹성 탈출>을 이해하자는 저자분의 시각이 돋보였습니다(행성/혹성 표기 논쟁은 일단 차치하고). 사실 <스타 워즈>같은 SF 컨셉에서도 그 기괴한 모습을 한 외계인, 괴물 들의 비주얼은 타인종, 타민족 등이 주류 백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은유한 것이거든요. 이 <혹성 탈출>에서도, 겉으로는 진화의 그 느린 단계에서 (과학적으로야 있을 수 없지만) 특정 국면(phase) 둘이 동일 시기를 공유하며 빚어지는 아찔한 충돌과 갈등, 생존 투쟁을 다룬 이야기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우리 시대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인 문명 충돌, 인종 차별의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먼 나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남아 등지에서 이주해 온 이들 때문에 바로 우리의 현실 일부가 되고 있는 다문화의 심각하고 절실한 얼굴을 바로 직면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과제요 도전입니다. 어른 세대는 이 문제를 학교에서 교육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이처럼 미숙하게 대처하지만, 어른들보다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이 이슈를 맞닥뜨릴 지금의 10대들은, 바르고 체계적인 접근이 더 필요합니다. 책에 나온 여러 논변과 담론들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먼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주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해야 올바른 답이 나옵니다. 어린 독자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이런 책을 읽고 사회에서 부대끼는 여러 복잡다단한 문제를 총괄적으로 해결해 줄 "인성"이란 자질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계기가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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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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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양도 아득한 옛날 삼황 오제와 요 임금, 순 임금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관습, 최소한 도학적, 문학적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 역시 그렇게나 오래 전에 자신들의 먼 조상(꼭 혈연으로 닿지는 않는다 해도)들이, 타인의 전횡적 지배를 거부하고, 중의(衆義)를 모아 공무의 방향을 결정하며, 나아가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결연한 싸움을 벌였던 전통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이 구사하는 우아한 언어보다 훨씬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 가며 타인의 감정과 논리를 자신의 것에 끌어오려는 문치(文治)의 우위를 비중 있게 믿었음 역시 경이로워 하죠.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일컬음은 이처럼 "말로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고상한 전통이 사라지고 창과 기마술로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개탄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로마, 특히 공화정 로마 시대는 이처럼 정치한 논리와 고아한 수사로 상대를 설득하고 보다 정의로운 총의를 모으려는 의사의 전통이 모두를 고개 숙이게 하던 시절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이러던 것이,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어찌 보면 모두를 승복하게 하고 진두에서 이끌어갈 덕목을 고루 갖췄다고 볼 수 없는, 하자 있는 지도자들이 오랜 전통을 정면에서 깨뜨린 이래, 타르퀴니우스 이래 존재하지 않던 폭군의 악폐를 악몽처럼 다시 공동체에 들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절도 있고 우아하며 고풍의 품위 있는 지배를 받던 체제가 아닙니다. 폭풍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과거처럼 드세고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나(1부), 차별 받던 변두리의 서자들이 오랜 세월 품어오던 불만 따위(2부)가 아닌, 바로 로마 스스로가 품은 내부의 모순 때문입니다. 이 3부는 자신과 싸우는 로마의 분투기입니다. 소설 중에도 직설적인 서술이 있듯, 오랜 전통을 지키려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술라와, 기사와 상인 계급의 관심을 더 돌보려는 카르보 등의 두 패로, 귀족에서 하층민까지 철저히 갈려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만큼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예전 남의 조상들 사연이 아닌,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도 전혀 거리가 멀다고는 못 할 사정이기도 하죠.

대체로 저는 1부를 마리우스의 스토리로, 2부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몬 술라와 드루수스의 사연으로 파악했습니다. 1부가 그야말로 로마의 이상적인 공화정 그 전형을 그대로 보여 주듯, 때때로 부패한(그리고 끔찍하게 어리석거나 무능한) 장군과 관료들이 등장하긴 했어도, 말과 설득력, 교양의 높이로 반대 진영을 포용하는, 그야말로 "동양적 군자(혹은 그를 가장한 위선자)"들의 우아미 경연의 장이었다면, 2부는 장년기의 그 원숙한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광인이 되어 버린 마리우스, 그리고 더이상 근시안적 계급 이익 말고는 아무것도 살필 수 없게 된 귀족 계급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이었죠. 그렇다면 이 3부는, 마치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혹은 칼 슈미트적(아니면 마키아벨리적?) 결단의 미덕으로 모든 혼란을 한 큐에 쓸어버릴 난세의 영웅이 등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3부는,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신비한 미모와 고귀한 혈통(일까요?), 신묘한 전법과 불굴의 용맹을 지닌 청년 장군 폼페이우스의 라이징을 그 핵심에 둔 기나긴 사연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술라나 마리우스(특히 후자는 이 매컬로 여사의 작품에서 너무 미화된 느낌이 있습니다만) 들은 우리가 여러 고전, 혹은 대중서에서 충분히 조명되어 대강의 캐릭터가 어렴풋이 그려지기까지 하는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비중임에도,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서 훼방을 놓고 말도 잘 못 하고 우악스럽게 판을 휘젓다 비명에 간 폭한 정도로 오해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실제로 그는 마치 초한 쟁패기의 항우처럼, 혈통도 좋고(일단은 그렇다고 하죠) 군략과 용맹도 뛰어났으나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개인적 기량으로 비교할 때 마리우스가 과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보다 못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이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부계 기준으로 따지면 가문 역시 그리 모두 앞에 내세울 만큼 평판 있는 혈통으로 보기 어려운 게 폼페이우스입니다(마리우스는 정말로 양계 모두 한미한 출신).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모두의 환영을 받고(피케눔 출신 "가노"들은 뭐 그렇다 쳐도)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외모가 빼어나서? 나이가 젊어서? 마리우스에게인들 그런 시절이 한때나마 없었겠습니까?(게다가 폼페이우스는 못 배운 걸로 치면 마리우스를 몇백 배로 압살하죠ㅋ)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정세의 판국이 과거의 가늘가늘 아름다운 전통만 내세워서야 도통 솔루션이 안 보이는 난국으로 접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폼페이우스의 (귀족 답지 않은) 무식한 과단성에 열광했던 것 아닐지요. 여튼 술라와 젊은(어린) 폼페이우스가 만나 서로의 속을 읽어가며 대화하는 장면은, 마치 어제 방영되었던 <38사기동대> 5화에서 마진석(배우 오대환씨가 연기)이 양정도(배우 서인국)에게 "우리 김계장님 내 과네 완전? 응?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라고 하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러나 항우처럼 우직한 무인 기질만으로 상황을 돌파한 건 아니었습니다. 소설 중에 적절한 묘사가 있듯, 폼페이우스는 냉혹한 현실 감각과 끝없는 비전, 꿈을 동시에 갖춘 정신 세계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자만 갖춘 사람은 비천한 정상배가 됩니다. 후자만 갖춘 사람은 백주 대로에서 맞아죽기에나 딱 좋습니다(안됐지만 드루수스 같은 인물). 술라는 이 중 어떤 유형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자기 절제력을 갖추었고, 두뇌가 우수하며, 도광양회하다(ㅋㅋ) 한순간에 결단력을 선보이며 판을 엎어 버리는 실행력이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자유자재로 동화, 소통하는 정서적 안정까지 갖춘 유형이란 점에서, 아니아니, 게다가 외모까지 완벽한! 무슨 기준으로도(심지어 혈통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오랜 가문의 표상! 코그노멘인 술라가 후져서 그렇지) 애송이 폼페이우스보다 우월한 남자였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겁니다. 하필 마리우스 같은 평민 영웅과 역할이 겹쳐 초장에 괜히 진을 빼게 되었고, 슬슬 기를 펴 보려 하니 이번에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군요(피부가 너무 연약하고 아름다웠다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 이건 농담입니다).

만약 술라가 좀 뒤에 태어나서 시저와 자웅을 겨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너무도 용호상박인 두 인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느라 로마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바로 멸망했겠습니까? 아니면 역시 "주워먹는 타입의 정치적 천재"가 또 하나 나타나서(옥타비아누스처럼) 운명적인 제정으로의 발걸음을 틀었겠습니까? 확실한 건 이 폼페이우스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판을 흔들기는 힘들었겠다는 정도. 여튼 그는 자신의 이상과 꿈으로 세계의 현실을 삼켜 버릴(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다른 표현에서 인용합니다) 엄청난 정신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긴 했습니다. 이런 효과적인 안티테제가 나올 수 있었기에, 카이사르 같은 진테제가 결국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3부는 특히 올드 브루투스(원서에는 꼬박꼬박 "올드"를 붙입니다)가 나와 장기 떡밥 큰 덩어리가 촘촘히 뿌려집니다.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고, 번역의 가독성이 좋은 "마스터즈 오브 로마".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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