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 여행 : 규슈 7대 조선 가마 편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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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물과 큰 차이가 나는 점은, 생존을 위한 필수 양분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는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날것을 아무렇게나 절단, 저작하여 소화하는 게 동물이고, 반대로 인류라면 원 재료를 "조리"한 후 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식중독 따위를 예방할 수 있고, 섭취할 수 있는 재료의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나아가 풍미의 향유라는 인간만의 쾌락 영역을 확보합니다. 어떤 종류의 "그릇'이건 이를 필수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인간뿐이며, 처음에 그저 식사의 장치로 사용했던 것을 나중에 완롱, 감상의 고유 대상으로 삼은 건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동 단계에서 벗어나 일종의 문화 생활을 누리는 수준으로 접어들었는지의 여부는, 손쉽게 도자기류의 구비가 얼마나 그 문화권에서 보편화되었는지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동양에 대해 언제나 잉여 쾌락(주로 정신적)의 향유 면에서 큰 열등감을 느껴 왔던 서양이 근대 이후 필사적으로 도자기의 수입, 제조 기술 습득에 열을 올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조용준 선생님께서 몇 년 전부터 펴내고 계신 <OOO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퀄리티가 진귀하고 텍스트(책) 취지에 부합하는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게 초보자에게는 엄청 큰 응원이 되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소리지만) 이 분야 입문자에게는 기초부터 착실히 가르쳐 주시면서도 한 권 떼고 나면 소양이 엄청 늘게 도와 주는, 도자기학의 친절한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이런 알찬 내용이 기행문의 형식으로(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부한 역사적 배경, 맥락의 설명과 함께 곁들여져 있으니(역사도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누구나 좋아하죠), 예쁜 도자기 공부도 공부지만 책을 읽는 사람의 영혼과 정신이 몇 뼘은 더 자란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유럽 도자기에 대해 그토록 간곡한 사연과 깊이 있는 문화, 역사적 내력이 숨어 있음을 전 저작들을 통해 배웠던 독자로서는, 이 일본 도자기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책이 오히려 좀 늦게 나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마치 유홍준 선생의 "일본 문화 유산 답사편"이 가장 늦게 나온 것과도 비슷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과는 또 경우가 다르니까요(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리즈와 이 조용준 선생님의 기획을 동렬에 놓거나, 더 좋아합니다). 아무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설렘으로 책을 읽었고, 역시 대만족이었네요.

특히 제가 첫부분부터 눈을 크게 뜨고 읽은 대목은 소위 "엔슈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일본 도자기의 시원은 그저 정유재란 후 조선 땅의 도공들을 대거 납치하여 규슈 일대에 가둬 둔 후 외부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 아이템을 제작하게 한 데서 잡아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가깝지만, 저자께서는 이 팩트가 남긴 과도한 자부심과 자아도취가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했다며 일침을 가합니다. 우선 도공 집단이 해외로 끌려가 국부의 주요 섹터가 유실되었음에도 당국은 그저 내국인들의 송환 이슈로 여겼을 뿐 산업적 중요도에 대한 자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장인들의 송환이 극히 지지부진했을 뿐 아니라, 규슈 현지에서 오히려 더 합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이들이 새 환경에서 더 의욕을 낸 것도 엄연한 사실이죠. 재능과 기예가 부가가치에 기여한 바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후진적인 조선의 시스템이 결국 국가적 고립과 경제적 피폐를 자초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저자의 관점은 결국 "왜란 이후 새로이 일어선 일본 도자기 산업과 그 예술적, 문화적 성취는 독보적이고도 광범위한 것"이라는 쪽입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킨 게 마냥 자랑일 수가 없고, 좀 과장하자면 탱자가 회수 이남을 건너 비로소 귤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엔슈 류(流)"는 코보리 마사카즈가 도토미(遠江), 즉 엔슈(遠州)에 부임해 온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앞의 것은 훈독, 뒤의 것은 음독이라서 같은 한자인데도 발음이 저렇게 다르죠. 예전 일본 소설 번역판 같은 데서는 한결같이 "도토우미"라고 쓰던 기억도 있네요.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책에서 일부 내용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둘이 합쳐져 이룬 "엔슈- 다카토리 (콜라보)"의 한쪽 부모가 어떤 내력이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 독자로서 제가 미흡하나마 작은 지식이 있던 것도, 이 책에서 아주 자세히 나오는 세이잔 여사의 사연이 그나마 한국인들에게 조금은 알려진 이유에서입니다. 세이잔 여사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 벌써 40년 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일로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적이 있고(부끄럽게도, 물론 몰랐던 이들이 더 많을 줄 압니다만), 이때 두 분 어린 제자를 받아 일본 현지에서 사사(師事)하게도 했습니다. 책에도 나옵니다만 이 두 분(당시에는 청년)은 결국 병역 문제를 해결 못 해 중도 귀국해야만 했는데요. 이 당시 비슷한 케이스로는 바둑 기사 조훈현씨,  야구 선수(당시 경동고를 갓 졸업한) 백인천 씨 등이 있습니다. 어떤 원칙이 없었는지 그나마 일본 현지 체류가 가능했던 이는 이들 중 딱 한 사람밖에 없죠. 저자는 이 과정을 설명하며 한국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에 대해 크게 개탄합니다. 참고로 다카토리 가마는 후쿠오카 소재이며,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심수관 선생 가문은 사쓰마에 터잡은 분들입니다. 八山을 하치야마, 혹은 야쓰야마가 아닌 "팔산(파루산-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히기를 고집하는 이 가문의 고집에서 뭉클한 민족정신을 접한 독자가 많을 것 같네요.



한국의 도자기 하면 청자나 백자 외에 떠오르는 게 없음이 우리 못난 자손들의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저자께서는 다른 권위자(신한균 회장님)의 지지를 얻어, 이 다카토리 도자기, 그리고 (다음에 새로 등장하는) 아가노 도자기의 근원이 회령 자기라고 의견을 개진하십니다(이후에 소위 4대 지방요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심). 이 회령 자기라고 할 때 회령은 물론 함경북도의 그 회령입니다. 우리는 함경도 일대 거주민들에 대해 그저 조선 내내 차별 받던 반(半) 여진족의 후예 정도로 치부하기 일쑤입니다만 이처럼 민족 문화의 중요한 한 자락을 구성하는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요삼채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북방 유목 민족이라고 마냥 고급 문화의 창조에 어두웠던 건 아니죠. 저자는 이 회령 자기의 원조를 허난(하남. 사기 근성과 손버릇 나쁜 걸로 유명한 그 하남 성입니다) 자기에서 유래했다고 보시는데요. 그게 어떻게 해서 두만강 일대를 거쳐 회령에 정착했는가. 이유는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쉬이 납득이 됩니다. 여진인이 송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허난 성의 카이펑(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대량)에 도읍한 후 고유의 도자기 제조법을 발달시켰고, 이후 몽골에 쫓겨 도로 제 고장으로 밀린 후 그 도공들을 데려 와 기반을 잡게 한 게 연원이었다는 주장입니다(p102 본문 설명에다 약간 첨가). 이러던 게 임란 훨씬 이전 함경도 일대 동해 연안을 침범하던 왜구가 현지인들을 납치해 간 게 이들 유파의 일본식 기원이 되었다는 건데, 읽으면 읽을수록 안타깝습니다. 물론 저자님의 관점에 따르면 이후 일본에서 훨씬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기법을 발전시킨 그 이후의 과정이, 반도 내에서의 산업, 기예 침체상과 대조할 때 더 부끄러운 실상이지만요. 이어령 선생도 지적합니다만 일본인들은 문화를 수입해 오는 데도 거침이 없고, 그 수입 문화를 열도식으로 변용, 변형하는 데에도 언제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당연히 (원) 회령자기는 남성답고 투박하며 거친 맛이지만, 이게 아가노 풍으로 정착하면서는 (저자님의 표현대로) 고분고분하게 스타일과 심미적 구조가 변했다는 거죠.

앞에서 잠시 음식 섭취 문화를 거론했지만, 도자기 문화는 그 자체로 완상용이지 반드시 안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 게 아니며,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에 함부로 뭘 담다가는 큰일나죠. 그러나 히젠 나고야로 건너와서 사가 현(역시 역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고장입니다)의 가라쓰야키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른바 "음식과의 합일이 이뤄진" 경지를 또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처럼 국지적 생활문화가 한번 집중적으로 발전하면 그 집착이랄까 종교적 숭배 경향이 아주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이 책에 나오는 여러 도자기(각 유파를 대표하는)라든가, 풍신수길 집정기에 극성을 이룬 다도 문화에서 한 벌 고가 세트가 성 한 채 가격에 육박했다는 설 등을 접하면 정말 한국인으로서는 아연실색해질 뿐입니다. 물론 특수 기예와 장인의 일가를 이룬 성취에 대해 그만큼의 존중이 있는 문화였기에 가능했던 부작용(?)이기도 했지만 말이죠.

조용준 선생님의 책에는 첫째 현지를 직접 답사한 저자의 성실한 노력과 실감나는 감상, 현지에서 직접 겪은 이만 토로할 수 있는 지방색과 여행자의 격정이 그대로 배어납니다. 둘째 어떤 대목은 역사적 지식이 좀 있어야 매끄러운 소화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 쉽고 재미있는 역사 공붓거리입니다. 셋째로 대상을 포착한 모든 사진과, 지도 등등 보조 미디어가 텍스트에 하나하나 달라붙는 적실성을 지녀 독자의 이해가 몇 배는 더 높아지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두꺼운 책이 고작 규슈의 7대 가마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께서 장담하셨듯 이제 혼슈로 이어지는 대장정이 예쁜 책(언제나 예쁘죠) 안에 또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 벌써부터 기대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네요. 별 스무 개도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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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글쓰기를 부탁해 - 꿈과 끼를 찾는 십대를 위한 글쓰기의 모든 것
한경화 지음, 유영근 그림 / 꿈결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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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최근에 도입된 "자유학기제"를 고려하여 짜여진 글쓰기 교재입니다. 저는 요즘 학생들이 맞게 될 가장 큰 정책상의 전환, 그리고 그 전환이 줄 혜택이 바로 "참여의 확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TV 어느 채널에서 한 여배우가 "참여"라는 단어에 풍성한 감정을 넣으며 발성하는 게 들리는데요. 이처럼이나 "참여"란 창의성 있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특별한 의의를 갖는 개념입니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끌려다니며 지식을 주입당하는 대상"이 아닌, 자기 힘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살아 있는 영혼으로 성장할 비전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어떤 동료 신입생이 "우리는 시청각 세대이다."를 선언하며, 지나친 부담을 주는 글읽기와 쓰기를 지양하려는 듯한 의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딴에는 그게 시대정신이었다고 여겼는지 모르며, 또 당시에는 "포스트모던"의 잘못된 수용, 오해가 그런 트렌드를 일각에서 부추긴 점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교육의 바른 방향은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글쓰기, 글읽기를 배제하고선 이뤄질 수 없다는 데에 다시 굳은 합의가 형성된 듯도 합니다. 수동적으로 시청각 컨텐츠를 소비하기만 하는 정신은, 참여와 창조가 시민의 덕목으로 요구되는 현대 민주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와 각성을 정리된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된 행복을 구가,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영혼이 가장 불행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테니 말입니다.



책은 정말 아무 부담 없이 누구나 열어 보고, 또 거기 쓰인 내용을 따라할 수 있는 포맷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미국 학부생이 공부하는 교재로 수업을 받으면서 느낀 점이, 우리와는 너무도 달리 인트로와 본문이 내내 쉬운 말로 쓰여 있고, 독자의 흥미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형식이었다는 건데요. 이런 책들의 핵심은 단원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연습문제"였습니다. 물론 지도하는 교수님이 꼼꼼하게 그 과제를 챙겨야 실효가 생기죠. 이 과정에서 창의력 전반과 전공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싹트고, 수업은 교수님께 끌려 다니는 게 아닌 학습자의 "참여와 각성"이 메인이 되는 방향을 갖춥니다. 요즘 한국에서 나오는 교재들은 이처럼 중학생들이 보는 책조차도 이런 방향성을 가진다는 게 부러운 점입니다. 그냥 쉬운 게 다가 아니고, 아이들이 읽어가다 보면 저자들의 깊은 의도를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게 좋습니다.

1부는 "창의톡톡 글쓰기"라고 제목이 붙었는데요. 물론 포인트는 "창의"에 놓여 있습니다만, 주로 우리 현대인들이 직접 노출되어 있는 글쓰기 환경에 올바로 적응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저는 이런 내용과 인스트럭션이 책의 맨처음에 놓인 게 의외였습니다. SNS에서 바른 덧글(댓글) 달기, 웹소설 감상하기와 나도 한 번 써 보기, 웹툰 창작하기(웹툰은 순수하게 쓰기의 영역이라기보다 그리기 활동이 결합되어 있음에도) 등이 주된 과제입니다. 기존의 경직된 작문 교육이 아닌, 아이들이 자신들의 실생활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직접 접할 환경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임할지를 "교육"하는 이런 포맷이 신선하기도 했고, 세상이 이처럼이나 바뀌어 가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2부부터는 어른, 기성 세대가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려가며 아이들의 글쓰기 과정을 먼저 고민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읽을 책이라고는 하나, 먼저 아이들을 지도할 위치에 있는 부모님, 학교 교사들이 읽어 보고 실천적 고민을 해 봐야 함은 당연하겠습니다. 시 쓰기, 시와 잘 어울리는 시화(詩畵) 완성하기, 기행문 쓰기 등이 제시됩니다. 특히 기행문을 내실 있게 쓰는 과제는, 변화한 교육 환경인 "자유학기제"와 결부되어 이전과는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먼저 내가 직접 방문하여 겪어 보고 싶은 타지, 타향을 선택하고,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내가 예상, 기대했던 바와 직접 체험한 환경이 어디에서 달랐고 독특한 감흥을 불렀는지 자신과의 밀도 있는 대화를 요구합니다. 인터넷이나 SNS 등 다양한 채널과 매개체, 소통 방식을 통해 격지의 풍광과 지방색을 미리 접하고 일정한 기대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의 변화에서, 기행문의 쓰기 역시 이전과는 좀 다른 형식과 성취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물론 글을 쓰는 아이 자신의 자아 성장과 만족이 최우선 과제임은 두말할 것도 없겠구요.



3부는 "글쓰기"를 위한 단원이라기보다, 현실에의 참여와 비판, 시민 의식의 성숙을 위해 "글쓰기"를 어떤 과정, 단계로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곳이더군요. 인용되는 교재로는 시사주간지 TIME도 나오고, 우리의 이웃과 먼 나라의 시민들이 주로 어떤 모순과 난관 때문에 어려움과 아픔, 상처를 겪는지 자세히 가르칩니다. 비판과 지적,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위해 어떤 덕목과 기술적 수단이 필요한지,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해 볼 것을 가르칩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마냥 덮으려고만 드는 일본에 대한 비판도 있고, 게임과 스마트폰에 빠져 살면서도 그게 중독인지 모르는 청소년 자신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비판은 타자, 타인만을 향한 것이어서는 곤란하죠. 글쓰기가 바른 인성을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인성 발전 과정 그 자체라는 점 다시 인식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왠지 똑똑해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죠?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갖기 쉬운 고정관념인데, 아주 근거가 없지도 않습니다. 똑똑해 보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글을 더 잘 써 나가게 되는 과정에서 학생 본인의 지성이 발달하게 돕는 게 이 책의 장점입니다. 바른 글쓰기는 바른 방법으로 학생의 지능을 균형 잡게 키우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책의 이 단원은 영화 보고 나서 감상 쓰기, 특히 마틴 루서 킹 2세의 그 유명한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 시대를 바꾼 명연설문을 읽고 자신도 자신만의 연설문을 써 보기 등 재미있는 과제를 많이 부여합니다. 자유학기제 아래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아이들은 참 행복할 것 같네요.

글을 쓰는 건 예컨대 입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면도 있지만, 글을 쓰는 활동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고,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지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분명한 과제를 부여하는, 실천적 - 미래 형성적 커리큘럼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챕터로 나뉜 다섯 가지 큰 제목이, 사실은 어른들에게도 미처 다 마치지 못한 인생의 과제를 "글쓰기"를 통해 정리해 주는 의의를 갖기도 하더군요. 청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초심을 되찾는다는 목적, 마치 <문장강화>에서 능숙하고 세련된 글쓰기를 가르치듯 기본기를 다듬어 보자는 목적도 있었는데, 읽다 보니 글쓰기는 그저 기술일 수 없는, 인간됨됨이 형성의 필수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먼저 꼭 한 번 읽어 보고, 자유학기제라는 축복된 환경에서 산뜻한 인생을 가득한 희망으로 설계할 아이들에게 권해 줄 만한 멋진 교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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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까? - 공자와 십대가 나누는 30가지 인성 이야기 꿈결 청소년 교양서 시리즈 꿈의 비행 12
김미성 선생님과 제자들 엮고 지음, 방상호 그림 / 꿈결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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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의 모습만 하고 태어났다고 해서 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주위에서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 합당한 처신을 하고, 그런 처신을 할 정신적 각성이 이뤄져야 그게 온전한 사람입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람에게 우선 요구되는 덕목은 그래서 "인성"이어야 함이 유난히 강조되는 요즘이죠. 이런 인성 역시, 지식이나 특정 감수성 못지 않게 어려서부터 계발되어야 함에도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른 인성 함양에 대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확실한 지침과 사표가 될 분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인 공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공자님 같은 대성현의 가르침을 자구까지 정확히 익힌 인재라야 높은 관직이 보장되는 풍토에서 살고 있었죠. 그래서 예전에는 지식뿐 아니라 인성까지 동시에 학습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가르침의 한복판에 공자의 사상이 자리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인문적 지식과 학습자의 인품, 인성, 인격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교육 체계란 대단히 효율적이고 동시에 이상적이라는 판단이 드는데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여러 모순과 문제들이, 이처럼 우리 조상들에 의해 직접적인 해법이 오래 전부터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고개가 숙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자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원전에서 그대로 배우고 이해하며 실천에 옮기기엔, 첫째 중국의 언어(한문)로 쓰여졌다는 점, 둘째 너무도 오래 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아이들에게 익히고 읽히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내용을 보다 쉽게 풀고 우리 아이들의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상황에 적용하도록 어른의 지도가 꼭 필요한 편인데요. 이 책은 현직 중학교 국어교사인 김미성 선생님이 오랜 지도 경험을 살려 아이들의 눈높이에 꼭 맞는 서술로 독자(아이들과 학부모)들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합니다. 책을 읽어 보니 내용이 쉬울 뿐 아니라, "아 그 말이 그런 뜻이었나?" 하는 깨달음이 올 만큼, 해의가 깊이 있으면서도 참신합니다. 쉽다고 무작정 좋은 게 아니라, 그 가르침의 핵심을 정확히 꿰뚷는 설명이라야 교육적 효과가 있겠죠. 이 책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인데, 게다가 꿈결의 책이 언제나 그렇듯 편집이 예쁩니다. 아이들에게 조금만 의욕을 불어넣어 줘도 술술 읽히고 내용 소화도 완벽하게 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진짜 장점은, 저자이자 지도교사인 김미성 선생님이 성인, 어른, 교사의 언어로 쓴 게 아니라, 자신이 지도하는 중학생 아이들의 표현과 깨달음, 느낌으로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이해한 바 그대로를 정직하게 쓰고 있으니, 비슷한 또래들의 마음에 더 쉽게 이해되고 다가올 수 있죠. 어른은 아무리 쉽게 쓰려 해도 감성의 레이어가 이미 다르게 형성되었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내용을 배운 친구들이, 생활 속에서 자신이 느끼고 겪은 바를 대화하듯 전달하는 게, 공자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습니다.

구성도 참 많은 숙고를 거친 편제인데요. 첫째 파트는 (공자님을 통해 알게 되는) 나 자신의 모습, 둘째 파트는 마주하는 상대로서의 "너", 셋째 파트는 나와 네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는 유교, 유학의 오랜 교리인 삼강령 팔조목의 핵심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한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각 파트마다 아이들이 쓴 글 열 편이 담겨 있고, 그 글들에는 공자의 가르침 중 대표적이라 할 만한, 그리고 주제에 부합하는 도그마가 주제로 꼽혔습니다.



구본혁 학생의 글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비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가의 학원이나 교습을 받는 애들이 부럽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초라하게 보입니다. 어떤 애들은 처음부터 별 노력 없이 척척 어려운 과업을 해 내는 듯합니다. 이럴 때 아이들은 분노와 좌절감을 키우기 쉬운데, 세상은 어차피 미숙한 개인들이 숙련과 사회화 과정을 거쳐 조직의 성원으로 편입됨을 알지 못하는 탓에, 이런 감정이 인성에 그릇된 영향을 항구적으로 남기기 쉽습니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허구에 불과한 통념입니다. 공자님의 가르침인 "잘못을 알고도 고치치 않는 게 가장 나쁘다(過則勿憚改. 잘못이 있으면 그를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가 이렇게 실생활에서 다가올 줄은 몰랐네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치를 내면화할 생각을 해야지, 무시받고 따돌림당했다는 과거의 상처를 비뚤어진 권력욕으로 바꿔서, 유치하고 미숙한 자아만을 꽁꽁 싸매고 감싸는 것처럼 잘못된 선택이 또 없습니다.

이가희 학생의 글은 매우 짧지만, 어른들도 미처 이해하지 못한 깊은 가르침을 잘 전달하는 느낌입니다. 미혹(迷惑)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사리 분별을 못 하는 단계를, 아주 쉽게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잘 풀어내는 것같네요. 사람은 좋은 감정이건 나쁜 감정이건 자신의 격정에 휘말리면 사리의 바른 분별을 못 이루는 수가 많습니다. 공자님은 일찍이 이 감정이 이성을 그르치는 위험을 내다보고, 제자들에게 마음을 침착히 다스릴 것을 주문했던 것입니다. 종심소욕 불유구라는 궁극의 경지가 공자 자신도 나이 칠십에 이르러 도달했다는 진솔한 술회를 보면 이야말로 인격자가 성취하기 가장 어려운 과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성적 부진으로 인한 부모님 간의 다툼에 비유하여, 중학생 수준에서 가장 깊이 소화하려 애쓴 점이 정말 돋보이네요.



공자님의 가르침 중에는 딱딱하고 엄숙한 윤리적 교훈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를 바라본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털어 놓는 감회가 "못하는 게 없으시니 진정 성인이시다"인데, <시경>은 춘추 시대의 노래 가사집이지만 공자는 이를 두고 "시 삼백은 한 마디로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음이다"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사람이 누굴 좋아하고 애모할 때 솟아나는 정직한 감정에는, 남을 해코지하거나 그릇된 물욕을 추구하려는 못된 마음이 전혀 끼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심지어 어린 학생들도, 그 나이에 맞는 연모의 감정이 무엇인지 건전하게 느끼고 겪을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진 학생의 글은 시경을 자주 인용하는 공자의 습관에 주목하여, "로맨티스트로서의 공자"에게 어린 학생들이 배워야 할 바가 무엇인지 재치 있게 풀고 있네요. 나와 너의 관계가 사랑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그런 너와 나의 바른 관계가 모이고 모여 형성되는 세상과 사회 역시 부도덕한 다툼과 미움이 사라진, 참된 공동체로 바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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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오스카 - 호스피스 고양이가 선물하는 특별한 하루
데이비드 도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문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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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그 서두가 얼마나 함축적인 문장이 쓰였는지를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멋만 부린 의도가 드러나서도 곤란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스피스 고양이 오스카의 실제 동선(?)을 따라 담담하게 술회된 이야기들(실화)이 대부분입니다. 오스카에게 너무 감정 이입하지도 않고, 저자께서 주목하는 건 분명히, 의지할 데 없는 노인 병약자분들일 뿐, 오스카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혹은 독자인 우리들에게 기대를 크게 걸라는 듯) 사연을 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태연한 태도 덕분에, 이 책에서 고양이 오스카가 펼치는 여러 "활약, 능력"은 다분히 신기하게, 혹은 신비하게 들립니다. 저자께서는 의학박사이자 명문의대의 교수진이므로 이런 에피소드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죠.

사실 "신빙성"이란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여러 재미있는 실화들은, 그런 선입견이나 짐작을 갖고 보면 "허, 그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구?"처럼 거리를 둔 무관심한 태도로는 그저 일상적 수다처럼 간주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이 책을 다 읽은 후 이야기를 추려서 주위에 들려 주니, 전하는 사람의 태도가 건조해서인지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더 많더군요. 그러니 뭘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저자님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신의 일터가 멋져 보인다." 대개 우리 동양인보다는 서양인들이, 영혼과 육신이 완전 사멸하는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종교가 그만큼이나 번성했고, 아직도 "죽어서 지옥 가는 게" 그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이겠죠. 그러기에, 죽음을 앞둔 노인들을 수발하고 간호하는 시설에서 일한다는 게, (저자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대체로 비슷한 우려를 부르는 것 같네요. 우리는 그저 보수만 넉넉하면, 그리고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수고만 따르지 않으면 그 직장의 환경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한 편 아닐까요? 더군다나 저자처럼 시설의 감독자 내지 핵심 사무 담당자인 "닥터"라면 그가 어느 병과에서 근무하는지를 놓고는 "아 괜찮겠네" 정도로 넘어가는 게 보통일 겁니다.

저자는 자신의 근무처를, 적성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경우에 가깝습니다(미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듯요). 실제로 저자가 관찰하는 노인 환자분들은, 죽어가는 자신의 신변을 숭엄하게 정리하고, 주변에 적잖은 배려를 베풀며, 어쩌면 생전 그 어느 시점보다 더 인간적인 자신을 찾아가는, 가장 대하기 편안하고(막 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들입니다(저자에게는요). 우리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도 흐트러지고, 어린아이처럼 자제력도 잃고, 무엇보다 배변 등의 습관에서 최소한의 품위도 잃은 채 동물에 가까워지는 추한 존재들... 이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되겠으나 이게 우리의 정직한 태도나 실정에 가까운 표현일 것입니다. 저자분은 최소한, 자신의 직무와 환경, 그리고 환자들을 이와는 정반대의 자세, 소명의식으로 대하는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에는 아마도, 양친 모두가 메디컬 닥터였던, 흔치 않은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바 있을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게 마련이죠. 부모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깊은 지적 소양과 확고한 도덕성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저자에게도,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이미 이 시설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고양이들이 크게 살갑게 와 닿지는 않았나 봅니다. 처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대고도 절을 한다는데(우리말 속담은 참 표현이 실감나죠 ㅎㅎ), 어디까지나 오차 없는(혹은 드문)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생리 현상을 그 오랜 시간 동안 공부한 닥터로서, 무슨 고양이가 예지력을 갖는다느니 하는 "미신"에 대해서라면, 아예 고양이를 실물로 만나기 전부터 나쁜 선입견을 가졌을 만도 합니다. 허나 그 역시, 많은 환자들의 케이스를 다루고 나서, 실제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의 상태를 고양이가 용케 알아채곤 하는 "능력"의 타당성을, 자기 자신이 직접 다룬 환자의 통계로 실감하고 나서야 다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네요. 척척 맞추는 데야 뭐라고 트집을 잡겠습니까. 이를 "신비"의 영역으로 몰고가지 않으려면, 고양이의 센서(감각 능력)에 여태 인간이 알아내지 못한 어떤 특별한 기제가 존재함을 해명하는 수밖에 없죠. 설명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문제는 "죽음이 임박함"을 어떻게 정의할지 의학계에서도 아직 완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장기 기능의 현저한 둔화? 세포 상태의 질적인 단계 변이? 무엇으로 정의하든 간에, 고양이가 "감지'하는 그 어떤 바이털 사인의 크리티컬함이 기준이 되면 대단히 실용적이긴 할 것 같네요.

그러나 우리가 호스피스 고양이의 신통함을 절감하게 되는 건, 그 현저한 비사교성(ㅎㅎ 이 이상한 성격 규정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차원에서 환자와 나누는 그 신비한 정서적 교감입니다. 사람 중에는 뇌의 손상이나 불구 상태 때문에 타인과 정서적 교류를 선천적으로 못 나누는 이가 있다는 게 최근의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연구 결과를 터무니없이 왜곡하는, 진성 교감 불능자들이 부쩍 늘어나 뭔가 한 마디씩을 떠드는 것도 희극적 풍경 중 하나입니다만,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고 빨리, 혹은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 자체가 아직까지는 미지의 베일에 싸여(쌓여 X) 있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우리 새침한 오스카의 신기한 능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면, 역으로 우리 인간의 교감 메커니즘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이거나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착각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은근한 기대를 몸에 받은 고양이들이 제 할 일(?)을 더 열심히, 더 효율적으로 해낼 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척 남겨 두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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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역량 핵심인재 - 조직과 개인의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이홍민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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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 "핵심인재"에 포커스를 두고 저는 책을 열었는데, 총 3파트 중 첫째 부분이 "조직역량"입니다. 그 다음이 (보다 범위를 줄여) "인적자원역량", 그리고 마지막이 "핵심인재"로 구성되었네요. 하긴, 조직역량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인재(인적 자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인적 자원 중에서도 대체 가능한 잉여를 고려에서 제외한 채 핵심만을 추려 기업의 성장 동력으로 적극 활용하자는 게 책의 주제입니다. CEO의 입장에서는 조직 역량 강화를 인적 자원(HR) 분야에서 적극 도모할 수 있는 매뉴얼의 점검이 되겠고, 직원의 입장에선 먼저 조직역량의 강화를 고려한 후 자신의 개인 역량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조감도 노릇을 할 수 있는 책이겠습니다. 조직 입장에선 핵심 인재의 양성과 보유에 소홀한 채 물적 시스템 강화만으로 생존과 성장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조직에 소속된 개인들은 무엇이 자신이 속한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인지 그 비전을 명확히한 자기계발을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파트 1은 경영학의 구식 패러다임에 익숙한 분들에겐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지만, 이미 필립 코틀러나 그 훨씬 이전 피터 드러커부터가 개념의 내포로 강조했던 어젠다인, "사회적 책임(CSR)"을 깊숙이 체질화한 논의입니다. UN 등에서 이미 지난 1990년대에 확고히 체계화한 "지속 가능한 발전(전지구적 과제, 혹은 공적 섹터가 유념해야 할 목표)"을, 개별 기업에도 적용한 게 바로 "지속 가능한 경영"입니다. 이때의 "지속가능(sustainable)함"이란, 기업의 윤리 경영, 준법 의식의 확립, 나아가 공감대적 가치의 선도적 창안 같은 것을 뜻하며, 기업이 고객과 함께 이익과 번영을 누리고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여, 소비자가 생산자(좁게는 경영자)를 타자 아닌 이웃으로 인식하는 단계를 궁극의 비전으로 간주합니다. 소비자에게 잉여를 거두어 기업만의 배타적 잇속을 챙기려는 전략으론 결국 시장에서의 생존에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상황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데, 어떤 도덕적 각성이라고 꼭 보기보다는 객관적으로 시장의 체질과 구조가 엄연히 소비자 위주로 재편된 환경의 변화가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게 사실입니다. (알아서 착해진 게 아니라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역량"인데, 원어는 competence입니다. 이 competence는 지능(intelligence)와도 다르고, 적성(aptitude)와도 차별되는 개념이죠. 지능은 쉽게 말해 "머리가 좋다"고, 적성은 "(일이나 과업과) 잘 맞는다" 정도입니다. 머리가 나빠도 왠지 그 일이 좋고 끌리고 몰두하면 행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재가 노력하는 놈 못 이긴다"라는 말도 있는데, 함정이라면 대개 천재는 적성까지 함께 갖춘 게 보통이라, 노력도 평범한 사람보다 몇 배는 더 한다는 거죠. 재능은 있는데 적성이 부족한 천재(아주 드묾)를 타겟으로 삼아야 승산이 있습니다. 헌데, "역량"은 이런 초기 조건(타고난 조건)과는 좀 별개의 개념입니다. 얼마 전 구속되어 큰 물의를 일으킨 화장품 차르 정 아무개씨도, 사실 다른 두 덕목보다 한 가지 팩터에서 압도적인 사람이었기에 학력이니 집안이니 아무 배경도 없이 그만큼이나 (일단은) 성공할 수 있었던 건데, 그게 바로 "능력"입니다. 남자는 외모니 학력이니 이런 것보다 "능력"이 있어야 여자 고생 안 시킨다고도들 하는데, 이 쉽게 표현되는 세칭 "능력"이, 경영학 교과서 등에서 어렵게 말하는 "역량'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역량"은 물론 지능이나 적성과도 상당 부분이 겹치는 개념이지만, 그 사람 특유의 근성이나 경험에서 쌓은 관록, 혹은 행운 등을 두루두루 지칭하는 개념이죠. 앞서 말한 정 모씨 같은 경우 이런 "역량" 개념을 써야 그의 사업 성공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p87에 보면 데이빗 매클레란의 연구를 인용하여 197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이 "역량" 개념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어느 선배(같은 학교는 아니고)가 "학문이란 결국 누구나 다 알고 쉬운 걸 멋있는 언어로 포장하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거기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을 뿐더러 사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립니다. 그야말로 지능이 딸리는 사람이 공부를 못 쫓아가서 자기 위안으로 둘러대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데, 모르겠습니다, 일용 노동자가 이런 말을 하면 그건 그분 입장에선 정직하고 타당한 언명이기라도 하죠. 뭐 알지도 못하는 말을 떠들면서 없는 지식을 가장하는 것보다는 솔직해서 좋을지 모르지만. 여튼, 이 "역량"은 그 개념 연구의 동인(동기)부터도 그렇고, 그 연구의 결과도 철저히, "사업 성공" 등 세속적 성취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인자(factor)를 잡아내는 것이었고, 보통 우리 주변에서 말하는 "그 사람 능력 있네" 따위와 정확히 일치하는 외연, 내포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건 없고, 다만 이 책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그저 약탈적이고 성과 지향적인 "역량"이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는 앞으로 인재가 가져야 할 덕목과 목표라는 점에서 장차 완성되어야 할(채워져야 할) 미래지향적 개념이라는 게 최근 연구의 성과입니다. 만약 전자로만 개념을 새기면 소위 "지속 가능 경영" 혹은 "사회적 책임" 등과 앞뒤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오죠.

또 하나, 현대 경영학에서의 "역량"은 이른바 구시대적 "능력"과는 달리 막연한 인상 포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치로 측정과 계량이 가능한 객관적 개념입니다. 이래서 한 인재의 역량은 피드백이 가능하고, 그를 평가하는 상사, 동료, 부하들에게 공히 어필할 수 있는 공통된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역량은 물론 개인화한 능력이나, 그 능력은 특정 개인에게 고정 고유 부품으로 쓰이는 게 아니고, 범용으로 표준화하여 조직 내 모든 인재(특히 핵심 인재)가 고루 모듈로 채용할 수 있는 롤 모델입니다. 한 사람의 역량이란 예측 불가하거나 반대로 장기간 불변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시대와 조직의 모럴과 기대에 못 미치는 바 있으면 급격히 수축합니다. 타락하고 배타적인 "능력", 혹은 일시 때를 잘 만나 대박이 터졌던 고정된 요인이 아니고, 상황의 변화에 융통성 있고 적극적으로 적응하며, 한 가지 방향으로 맹목 돌진하는 야수의 본능이 아닌,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계획된 총체적 능력의 발휘입니다.

이렇게 역량 개념을 정리한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 이 개념을 왜 이렇게 정리, 규정해야 하는지 그 반성이 다시 필요합니다. 사실 "개념 정의를 그저 말만 멋있게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저 학문적 깊이만 부족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조직에 몸 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냐. "역량"에 합리적인 정의(definition)를 하려 애쓰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조직 성과와 강력한 연계(플러스 공분산이 절댓값까지 높은)를 가졌다는 가정 하에서고, 둘째 그런 역량을 갖춘 인재를 잘 양성하기 위한 조직 목표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좋은 역량이라도 바로 그 역량을 자기 회사 인재에게 심어줄 수 없다면, 그런 역량은 포기해야 한다는 소립니다. 인재 양성에서 효과적으로, 가시적으로 계발 가능한 역량을 인재에게 함양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개념이 우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과가 우선이며, 개념(역량)은 그에 부차적입니다. 번드르한 말이 전부가 아님은 여기서도 확인 가능하죠.

요즘 조직론, 그리고 HR에서 강조하는 게 "리더십"이란 개념이 또 있습니다. 이 리더십과 개인 역량은 겹치기도 하지만, 리더십은 엄밀히 말해 각론과 응용에 가깝습니다. 개인 역량은 경영학에서 철저히 조직 역량을 전제로 하고 창안한 개념이며, 따라서 모든 개인 역량은 (물론 개인의 적성과 특이 사정에 맞추긴 해도) 조직 역량을 전제로 한 채 발전되어야 합니다. 이 개인 역량 중 리더십 역량이라는 게 있는데, 물론 그 사람이 언제나 진두에 서서 무리를 이끎만을 염두에 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올바른 리더십을 합리적으로 추종할 줄 아는 인재상까지 포섭하는 개념입니다. 흔히 공감 능력이란 말도 하는데, 꼭 보면 공감 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에서 철저히 무능한 자가, 이상한 데서 보상심리를 발동하여 전체 분위기에 추한 방식으로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이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해고와 축출이 답입니다.

기업은 과거와 달리 우수한 여건을 타고난 인재를 밖에서 채용만 해 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평범한 재목이라도 잘 양성하여 일류로 키우는 기능까지 해내야 합니다. 물론 평범한 자가 회사의 HR 역량 미진 핑계만 대다 결국 무능자 신세를 못 면하고 축출되는 경우까지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주로 GE의 모델을 참고로 하는데, 코어그룹, 아웃플레이스먼트 그룹, 계발 그룹, 로테이션 그룹 등 세그먼트별로 접근하는 방식은 이미 기업마다 일반화한 방침이기도 하지만, 특히 핵심 인재에 들어온 자원이라도 언제나 지위가 보장되는 건 아니며, 반대로 밀려난 자원에게도 동기 부여와 트레이닝을 통해 코어 재진입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함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사실 한국의 직장 풍토에서 한 번 실수는 그대로 "끝"을 의미하는데, 이 방침을 융통성 있게 운용하기란 여러 여건의 제약이 따르기 때문입니다(소위 discipline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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