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
정승욱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1) 흔히 일본의 장기 불황을 가리켜 "잃어버린 30년"이란 표현을 쓰곤 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이란 수식어는,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들어도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한 것 없이 세월 날렸다"는 소립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남들 뛸 때 자신만 한 게 없다면, 현재건 미래건 형편이 넉넉하길 바랄 수가 없죠. 당연한 이치입니다.
2) 게다가 우리 나라에선, 대략 3년 전쯤 "일본 망국론"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대진재(대지진)이다 원전 사고다 하는 게 물론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일본 국채 상환 만기일이 한꺼번에 닥치는데, 당시 일본 정부의 국고 상황이 전혀 호의적이지 못하니, 국가 부도가 눈 앞에 다가온 것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요즘은 어떤 선동이랄까, 한 가지 프로파간다를 일시에 대거 복사- 붙여넣기 해서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전에 비해)적어졌지만, 저 당시만 해도 넷상에서 다수 여론이 저러니 맞는 결론처럼 통하곤 했습니다.
이 책은 위에 적은 1), 2)에 대개 근거를 둔, "머지 않아 일본은 침몰"이란 전망이 전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까운 장래에 "일본 부흥, 급부상"이란 사태까지 우리가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이게 다 보편 타당한 논리와 구체적인 팩트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간 찜찜하게 저 망각의 창고 안에 쟁여 두었던 근심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경각심을 확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뭔가 재앙의 씨앗이 있었으면 그걸 주관적으로 눈만 혼자 감고 애써 잊으려 든다고 객관적 실체가 저절로 사라지는 행운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1- 1) 경기가 좋을 때에는 그 좋은 흐름을 타고 사업을 크게 벌여 일단은 돈 잘 버는 친구가 대개 인기가 좋습니다. 그 친구가 현재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건, 상환해야 할 투자금이 얼마나 크건 무관하게, 당장 수입이 좋은 친구 옆에 붙어 있으면 떨어지는 떡고물이 큽니다. 그 친구도 갚아야 할 빚이 얼마건 간에, 지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자기 친구에게 밥 사주고 술 사줄 기회가 (원컨 않건 간에) 더 잦을 겁니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시시한 PC방이나 주식카페 따위로 간판을 차렸을망정, 쌓아 놓은 돈(부모로부터의 증여, 상속분이든, 혹은 한때 잘나갈때 왕창 꿍쳐 놓은 밑천이든)이 많아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당장 잘못될 걱정이 없는 친구가 더 인기 좋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성장 면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30년 바로 앞의 다른 30년 동안, 거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폭등 성장기와 대조할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30년 바로 앞의 "미칠 듯 잘나간 30년" 동안, 그들은 이미 남이 넘볼 수 없는 엄청난 부를 모아 놓았지요. 그리고 이 부(富. stock으로서의 wealth)는, 양적으로야 크게 덩치를 못 부풀렸을지 몰라도(왜냐면 저성장이었으니까), 질적으로는 그간 놀았던 게 아니라 미래에의 무서운 활력으로 기능할 만큼 탈바꿈을 이뤘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 보면, 지난 달 전세계를 뜨겁게 달군 뉴스였던 "브렉시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께서는 "공교롭게도 이 책 주장 내용의 타당성을 입증할 사건이 그새(집필과 출간의 짧은 사이에) 또 터지고 말았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이냐면, 세계 경기 전망이 불확실성에 휩싸이는 지금(당시), 투자자들의 자금이 "어떤 일이 터져도 기본은 보장되는" 안전 자산에 몰리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 "안전 자산"으로 엔화가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미국 달러야 패권국의 통화니 그렇다 쳐도, 일본은 저성장이다 지진이다 중국과의 갈등이다 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라인데, 왜 그 나라의 통화가 "안전자산" 평가를 받으며 외국의 돈(투자 수요)이 몰려드냐는 겁니다(차라리 미래의 패권국이라는 중국 위안화에 쏠리든지 말이죠. 근데 중국에선 그 시점에서도 돈이 빠져 나가고 있었거든요). 이게 이상해서 시청자나 일반 투자자들도 (TV에 출연한) 애널리스트에 이유를 묻곤 하는데, 대답이란 게 영 피상적이거나 시원찮습니다. 제대로 알지를 못하거나, 혹은 말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죠. 한 달 전에 그게 궁금하셨던 분들은 이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뭘 알아도 확실히 알고 말하는 사람의 답, 혹은 설명의 유효 기간이 제법 긴 답(내일이면 틀리게 되는 일시적인 답이 아닌)이 들어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1980년대 중반에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7 국가 재무 정책 최고 책임자들이 모여, 주로 일본의 환율을 인위적으로 절상한 결과를 도출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도대체가 일본의 소비자들은 남의 나라 물건을 살 생각을 않는데, 자기 나라(미, 영, 불) 소비자들은 일제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드니, 이걸 방치했다간 나라가 망하겠다 싶어 미국이 영, 불을 들러리로 세운 후 이 일을 벌였죠. 하루 아침에 남의 나라 환율을 300%퍼센트 올렸으니 양아치짓도 그런 양아치짓이 없었는데, 이런 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 없는, 지금의 중국 같은 독재국가도 함부로 못 할 짓입니다. 이 일을 두고, 5년 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중국이 "너네 일본은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면 굴복하는 나라 아니냐?"고 조롱했으며, 아베 직전 수상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좀 과장된 면이 있네요. 이 책에도 잘 나오지만, 물론 환율이 저렇게 일거에 절상되면 수출이 안 됩니다. 당연하죠. 비싼 물건을 누가 사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보유한 자산의 가치가 올라갔으니 그걸 갖고 다른 나라의 물건, 자산, 혹은 어떤 가치의 체화물이든 이제는 1/3 값에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듯이 당시 대장상(현재는 "재무대신"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을 지낸 다케시타 노보루(이때 나카소네 수상 밑에 있었구요. 이후에 일본 총리직에 올랐으나 리쿠르트 스캔들로 사임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가, "드디어 2차 대전의 치욕을 갚았다"고 감개 어린 멘트까지 내뱉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지금 결과론으로 편하게 왜곡하는 사정과, 플라자 합의가 당시에 가졌던 가능성과 전망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는 걸 증명합니다.
실제로 일본이 이런 좋은 기회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부동산 버블로 다 날렸다는 둥 결과가 안 좋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버블 붕괴는 원칙적으로 그 나라 안의 사정입니다(예외도 있습니다만). 뭐가 전망이 좋다고 하니 몇 푼 안 되던 푼돈이나 빚까지 내어서 투자를 했는데, 이게 시쳇말로 "상투 잡는 꼴"이 되어 시세 판단에 둔했던 이가 더 가난해지는 게 버블 붕괴의 부작용이죠. 즉 일본이라는 국가 안에서, 영리한 이들에게 부가 더 편중되었다는 것뿐이지 국부 전체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결과가 경제정의에 반한다는 논의는 또 별개입니다만.
반면 우리나라는 어땠습니까? 1997년 무능한 대통령의 실책으로 나라가 부도위기까지 갔었는데, 이때 성장 동력이 완전히 꺼지고 외채를 갚는다고 IMF 총재가 국가 경제 정책 지침을 대신 내려 주었으며, 알짜 기업체(고도성장기에 그나마 국내에 잘 축적되었던 자산)가 외국에 떼로 팔려 나갔습니다. "잃어버린 몇 십 년"은 이런 나라에다 대고 쓰는 겁니다. 삼성이 그나마 불가사의한 혁신을 이뤄 나머지를 먹여 살렸고(우리는 무슨 삼성이 나머지 국민의 먹고살거리를 다 뺏어 간 것처럼 착각하죠. 한국은 그 이전에 이미 망했던 거에요), 뜻하지 않게 중국이 고도성장을 구가해서 그나마 소소한 기업들이 재미(지속가능한 게 아닙니다. 중국이 단물만 빼먹고 다 털어낼 거니까)를 본 게 있을 뿐 성장의 질적 측면(양적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은 이루말할 수 없이 나빴습니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큰 동요가 있었고(버블 붕괴), 이로 인해 그 잘나가던성장이 둔화되었을 뿐 과거 성장의 과실은 그대로 숙성되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지속적인 R&D가 이뤄진 자동차 산업의 경우, 마쓰다가 "엔진은 우리의 영혼"이라고 공언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원천 기술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용케도 한국의 현기차가 (이 책에 잘 나온 것처럼) 수소자동차를 먼저 상용화했습니다만, 일본은 얼마 걸리지도 않아 반값이라는 충격적 스펙으로 다시 시장 점유율을 높였죠. 이 책의 호러스러운 대목은 지금부터입니다. 일본 기업들은 "정신 나간" R&D를 지난 30년 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기술력 면에서 (그 엄청난 자원과 자본과 영토를 지닌) 미국을 능가할 정도였는데, 딴 짓도 안 하고 계속 연구만 했으니 그 내공이 어느 정도겠습니까?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충격적인, 그리고 차마 외면하고만 싶은 사실을 적나라하게 까고 있습니다.
책의 결론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일부에서 대기업에 엄청난 규모의 R&D 예산을 지원하는 데에 반대하는 입장이,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중국은 본래가 민-관이 구분되지 않는 체제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출발점을 가졌을 뿐 아니라, 보유한 원천 기술의깊이와 폭이 아예 다릅니다. 한국에서, 벤처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 지원은 이미 상당한 부작용을 낳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대기업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국가가 방치하는 게, 더군다나 R&D에 쏟는 지원을 끊는다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요? 국가의 알짜 자산이 일부 극소수 대기업에 몰려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 그 손에 머물러야 올바른 성장이 가능한 현실적 제약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앞에서 일본 국채 상환의 심각성이 언급되었지만, 그게 채권자가 국내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가는 망해라 나는 빚잔치하련다 같은 생각을 품을 자가 최소한 일본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남 이야기할 게 아니라 우리나 정신 차리고, 아까운 재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