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
정승욱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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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일본의 장기 불황을 가리켜 "잃어버린 30년"이란 표현을 쓰곤 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이란 수식어는,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들어도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한 것 없이 세월 날렸다"는 소립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남들 뛸 때 자신만 한 게 없다면, 현재건 미래건 형편이 넉넉하길 바랄 수가 없죠. 당연한 이치입니다.

2) 게다가 우리 나라에선, 대략 3년 전쯤 "일본 망국론"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대진재(대지진)이다 원전 사고다 하는 게 물론 보통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일본 국채 상환 만기일이 한꺼번에 닥치는데, 당시 일본 정부의 국고 상황이 전혀 호의적이지 못하니, 국가 부도가 눈 앞에 다가온 것 아니냐는 논리였습니다. 요즘은 어떤 선동이랄까, 한 가지 프로파간다를 일시에 대거 복사- 붙여넣기 해서 여론을 왜곡하는 일이 (전에 비해)적어졌지만, 저 당시만 해도 넷상에서 다수 여론이 저러니 맞는 결론처럼 통하곤 했습니다.

이 책은 위에 적은 1), 2)에 대개 근거를 둔, "머지 않아 일본은 침몰"이란 전망이 전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까운 장래에 "일본 부흥, 급부상"이란 사태까지 우리가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이게 다 보편 타당한 논리와 구체적인 팩트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간 찜찜하게 저 망각의 창고 안에 쟁여 두었던 근심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경각심을 확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뭔가 재앙의 씨앗이 있었으면 그걸 주관적으로 눈만 혼자 감고 애써 잊으려 든다고 객관적 실체가 저절로 사라지는 행운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1- 1) 경기가 좋을 때에는 그 좋은 흐름을 타고 사업을 크게 벌여 일단은 돈 잘 버는 친구가 대개 인기가 좋습니다. 그 친구가 현재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건, 상환해야 할 투자금이 얼마나 크건 무관하게, 당장 수입이 좋은 친구 옆에 붙어 있으면 떨어지는 떡고물이 큽니다. 그 친구도 갚아야 할 빚이 얼마건 간에, 지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자기 친구에게 밥 사주고 술 사줄 기회가 (원컨 않건 간에) 더 잦을 겁니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시시한 PC방이나 주식카페 따위로 간판을 차렸을망정, 쌓아 놓은 돈(부모로부터의 증여, 상속분이든, 혹은 한때 잘나갈때 왕창 꿍쳐 놓은 밑천이든)이 많아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당장 잘못될 걱정이 없는 친구가 더 인기 좋죠.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성장 면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30년 바로 앞의 다른 30년 동안, 거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폭등 성장기와 대조할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30년 바로 앞의 "미칠 듯 잘나간 30년" 동안, 그들은 이미 남이 넘볼 수 없는 엄청난 부를 모아 놓았지요. 그리고 이 부(富. stock으로서의 wealth)는, 양적으로야 크게 덩치를 못 부풀렸을지 몰라도(왜냐면 저성장이었으니까), 질적으로는 그간 놀았던 게 아니라 미래에의 무서운 활력으로 기능할 만큼 탈바꿈을 이뤘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이 책의 머리말에 보면, 지난 달 전세계를 뜨겁게 달군 뉴스였던 "브렉시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께서는 "공교롭게도 이 책 주장 내용의 타당성을 입증할 사건이 그새(집필과 출간의 짧은 사이에) 또 터지고 말았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이냐면, 세계 경기 전망이 불확실성에 휩싸이는 지금(당시), 투자자들의 자금이 "어떤 일이 터져도 기본은 보장되는" 안전 자산에 몰리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 "안전 자산"으로 엔화가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미국 달러야 패권국의 통화니 그렇다 쳐도, 일본은 저성장이다 지진이다 중국과의 갈등이다 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라인데, 왜 그 나라의 통화가 "안전자산" 평가를 받으며 외국의 돈(투자 수요)이 몰려드냐는 겁니다(차라리 미래의 패권국이라는 중국 위안화에 쏠리든지 말이죠. 근데 중국에선 그 시점에서도 돈이 빠져 나가고 있었거든요). 이게 이상해서 시청자나 일반 투자자들도 (TV에 출연한) 애널리스트에 이유를 묻곤 하는데, 대답이란 게 영 피상적이거나 시원찮습니다. 제대로 알지를 못하거나, 혹은 말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죠. 한 달 전에 그게 궁금하셨던 분들은 이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뭘 알아도 확실히 알고 말하는 사람의 답, 혹은 설명의 유효 기간이 제법 긴 답(내일이면 틀리게 되는 일시적인 답이 아닌)이 들어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1980년대 중반에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7 국가 재무 정책 최고 책임자들이 모여, 주로 일본의 환율을 인위적으로 절상한 결과를 도출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도대체가 일본의 소비자들은 남의 나라 물건을 살 생각을 않는데, 자기 나라(미, 영, 불) 소비자들은 일제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드니, 이걸 방치했다간 나라가 망하겠다 싶어 미국이 영, 불을 들러리로 세운 후 이 일을 벌였죠. 하루 아침에 남의 나라 환율을 300%퍼센트 올렸으니 양아치짓도 그런 양아치짓이 없었는데, 이런 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 없는, 지금의 중국 같은 독재국가도 함부로 못 할 짓입니다. 이 일을 두고, 5년 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중국이 "너네 일본은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면 굴복하는 나라 아니냐?"고 조롱했으며, 아베 직전 수상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좀 과장된 면이 있네요. 이 책에도 잘 나오지만, 물론 환율이 저렇게 일거에 절상되면 수출이 안 됩니다. 당연하죠. 비싼 물건을 누가 사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보유한 자산의 가치가 올라갔으니 그걸 갖고 다른 나라의 물건, 자산, 혹은 어떤 가치의 체화물이든 이제는 1/3 값에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듯이 당시 대장상(현재는 "재무대신"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을 지낸 다케시타 노보루(이때 나카소네 수상 밑에 있었구요. 이후에 일본 총리직에 올랐으나 리쿠르트 스캔들로 사임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가, "드디어 2차 대전의 치욕을 갚았다"고 감개 어린 멘트까지 내뱉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지금 결과론으로 편하게 왜곡하는 사정과, 플라자 합의가 당시에 가졌던 가능성과 전망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는 걸 증명합니다.

실제로 일본이 이런 좋은 기회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부동산 버블로 다 날렸다는 둥 결과가 안 좋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버블 붕괴는 원칙적으로 그 나라 안의 사정입니다(예외도 있습니다만). 뭐가 전망이 좋다고 하니 몇 푼 안 되던 푼돈이나 빚까지 내어서 투자를 했는데, 이게 시쳇말로 "상투 잡는 꼴"이 되어 시세 판단에 둔했던 이가 더 가난해지는 게 버블 붕괴의 부작용이죠. 즉 일본이라는 국가 안에서, 영리한 이들에게 부가 더 편중되었다는 것뿐이지 국부 전체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결과가 경제정의에 반한다는 논의는 또 별개입니다만.

반면 우리나라는 어땠습니까? 1997년 무능한 대통령의 실책으로 나라가 부도위기까지 갔었는데, 이때 성장 동력이 완전히 꺼지고 외채를 갚는다고 IMF 총재가 국가 경제 정책 지침을 대신 내려 주었으며, 알짜 기업체(고도성장기에 그나마 국내에 잘 축적되었던 자산)가 외국에 떼로 팔려 나갔습니다. "잃어버린 몇 십 년"은 이런 나라에다 대고 쓰는 겁니다. 삼성이 그나마 불가사의한 혁신을 이뤄 나머지를 먹여 살렸고(우리는 무슨 삼성이 나머지 국민의 먹고살거리를 다 뺏어 간 것처럼 착각하죠. 한국은 그 이전에 이미 망했던 거에요), 뜻하지 않게 중국이 고도성장을 구가해서 그나마 소소한 기업들이 재미(지속가능한 게 아닙니다. 중국이 단물만 빼먹고 다 털어낼 거니까)를 본 게 있을 뿐 성장의 질적 측면(양적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은 이루말할 수 없이 나빴습니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큰 동요가 있었고(버블 붕괴), 이로 인해 그 잘나가던성장이 둔화되었을 뿐 과거 성장의 과실은 그대로 숙성되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지속적인 R&D가 이뤄진 자동차 산업의 경우, 마쓰다가 "엔진은 우리의 영혼"이라고 공언할 만큼, 대체 불가능한 원천 기술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용케도 한국의 현기차가 (이 책에 잘 나온 것처럼) 수소자동차를 먼저 상용화했습니다만, 일본은 얼마 걸리지도 않아 반값이라는 충격적 스펙으로 다시 시장 점유율을 높였죠. 이 책의 호러스러운 대목은 지금부터입니다. 일본 기업들은 "정신 나간" R&D를 지난 30년 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기술력 면에서 (그 엄청난 자원과 자본과 영토를 지닌) 미국을 능가할 정도였는데, 딴 짓도 안 하고 계속 연구만 했으니 그 내공이 어느 정도겠습니까? 이 책은 우리에게 이 충격적인, 그리고 차마 외면하고만 싶은 사실을 적나라하게 까고 있습니다.

책의 결론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일부에서 대기업에 엄청난 규모의 R&D 예산을 지원하는 데에 반대하는 입장이,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중국은 본래가 민-관이 구분되지 않는 체제입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출발점을 가졌을 뿐 아니라, 보유한 원천 기술의깊이와 폭이 아예 다릅니다. 한국에서, 벤처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 지원은 이미 상당한 부작용을 낳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대기업이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국가가 방치하는 게, 더군다나 R&D에 쏟는 지원을 끊는다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요? 국가의 알짜 자산이 일부 극소수 대기업에 몰려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나마 그 손에 머물러야 올바른 성장이 가능한 현실적 제약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앞에서 일본 국채 상환의 심각성이 언급되었지만, 그게 채권자가 국내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가는 망해라 나는 빚잔치하련다 같은 생각을 품을 자가 최소한 일본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남 이야기할 게 아니라 우리나 정신 차리고, 아까운 재산이 해외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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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가진 소녀 BIS 비블리오 배틀부 1
야마모토 히로시 지음, 이승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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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에 있어 우리 인간은 다양한 문제와 난관을 맞닥뜨릴 뿐 아니라, 때로는 반대로 감당 못 할 듯한 희열과 행운을 맞기도 합니다. 지나친 기쁨과 몰입 역시 안정적 삶을 지켜나가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데요. 이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책읽기는 여전히 우리의 지침과 등불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혹 책읽기 자체가 과도한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여전한 혹은 더 큰 재앙의 시작이 되지는 않을까요?

좁은 땅에서 한정된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놓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벌이다 보니,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어린 나이때부터 "배틀"이라는 개념, 혹은 엄연한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동료인 타인들과 협력, 동맹, 박애, 연대 같은 관계에 더 자주 노출되는 게 정상인 데도 말입니다. 헌데 이 살벌한 경쟁 풍토 속에서도, 그 "배틀"이란 게 독서를 놓고 그간 쌓은 내공과 관심사의 깊이를 겨루는, 소위 "비블리오 배틀"이라면, 이건 흥미로울 뿐 아니라 뭔가 상황이 귀여워지기까지 합니다. 쌓은 지식의 깊이가 형성되어 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그 수단이 살벌한 독기와 무자비한 폭력 따위가 아닌 "지식"의 그윽한 경지를 서로 겨루는 설정이라면, 사실 이야말로 인간다운 다툼일 뿐 아니라 (그 비현실성 때문에라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움"이 풍겨지는 게 보통일 겁니다.

저는 이런 설정과 소재가, 소설의 영역에서 쓰일 수 있다는 자체가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우리 나라라면 소설가나 독자나 (둘 다 책에 대한 사랑으로는 서로 지지 않으려 드는 집단일 텐데도) 이런 발상에 대해선 지레 재미 없다거나 억지스럽다거나 하며 서로 미루거나 배척하지 않을까요? "왜, 이런 재미있는 소설, 그것도 장편이 만들어질 수 있잖아?" 책에 대한 흥미와 몰입, 탐구, 때로는 투쟁을 다루는 메타적 문예는 이 작품 말고도 그간 여럿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흥미를 보이는 건, 그런 기발한 발상이 발상으로 그치지 않고, 이처럼 결과물 하나가 버젓이 빚어지고 난 후의 "안전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때입니다. 이미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호응을 보내고 상업적 성공을 거둔 후라 검증이 끝났다면, 우리들은 사전의 모험이나 리스크가 면제됩니다. 이후에 보이는 흥미의 "낌새"는, 그걸 놓고 순수하다거나 정직하다고 평가하기 쉽지 않죠.

솔직히 이런 소설을 어떤 작위적 계획이 아니라, 쓰는 이 본인이 흥에 겨워 자연스러운 창작의 대상으로 삼자면, (보기에는 쉬워도) 많은 준비와 체계적인 노력, 처음부터 독서를 즐기고 외경할 수 있었던 지성,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는 순수함이 고루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답이 없어 보이는 오타쿠, 균형 감각이 결여된 미스핏들인 것만 같지만, 아무리 제한된 분야라도 이렇게 한 방향으로나마 집요한 탐구와 애정을 지속하려면 여간한 진정성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하물며, 이 모든 캐릭터의 실감을 다 창조해 낸 이는 작가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기묘한 사연을 인상 잔뜩 쓰고 무게 잡으며 들려 주는 게 아니라, 일본 서브컬쳐의 익숙하고 정해진 공식에 맞춰, 친근하게 풀어 주는 그 태도도 놀라웠는데, 저 같으면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장르"를 택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렵게 번 돈을 유쾌하게 고층 빌딩 위에서 확 뿌려주는 화통함, 또 그 많은 돈을 애초에 벌어 수중에 간직했던 "능력"이 다 입증되는 이벤트였다고나 할지.

플롯 속에선 "배틀"이 벌어지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그 한심하거나 진지하거나 한 캐릭터들을 한 마당에 모아 놓은 축제를 빚는 셈입니다. 세상 사는 게 아무리 투쟁의 연속이라 해도, 그 다툼의 방식이 지혜와 양식의 깊이와 폭을 놓고 벌이는 모습이라면 이미 원초적인 갈등은 모두 지양되거나 해소된 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무리 (짐짓 가장된) 오타쿠들의 덜 떨어져 보이는 난리통을 머리에 이고 있어도, 앞서 말했듯 황당하면서도 흐뭇하고 귀엽습니다. 우리 나라 작가들도(다 만만찮은 고뇌와 난관을 헤치고 그 자리에 선 이들일 텐데) 이런 참신하고도 따뜻한 세계를 좀 만들어 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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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 루브르를 거닐며 인문학을 향유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안현배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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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본디 텍스트로 된 인문과 구상을 갖춘 회화, 조소는 생각만큼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을 눈으로 받아가며 <천지창조>를 완성하는 고달픔이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고 해도, 펜을 쥐고 개념을 정초하는 이들의 당혹과 고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으니 누구의 일이 더 고상하며 편안했다고 단정할 것도 아닙니다. 또, 예술품이나 텍스트나 결국은 당대인(중 소양 있는 이들)의 공감과 합의를 담은 사상의 구체화이기 때문에, 전자의 해석, 후자의 구상화가 손쉽게 서로 통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작이라고 평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 책은 미술품의 여러 사례를 통해 그 안에 담긴 메시지, 배경 설화, 작가의 개성, 실제 역사를 어떻게 읽어낼 지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선명하고 깨끗한, 그리고 부분에 초점을 뒀을 경우 어디에 주 시선을 두어야 할 지에 대해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책이더군요. 이런 책들이 사례를 들고 도상학을 가르칠 때("도상학"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에게 쉽게 알려 주어야 성공입니다), 그리 많은 실례를 들지 않는 게 그간 불만이었습니다. 이런 분야에선 도그마화한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작품 앞에서 얼마나 무리 없이, 융통성 있게 "이야기"를 풀어주느냐 하는 게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도상학에서 일단은 개별 작품이 무리 없이 설명되고 그를 보는 "독자"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도상학은 예술과 유리된 별개의 "독재"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경험담, 혹은 실수에 대한 회고로 "디도"의 예를 듭니다. 본문에서 주로 설명되는 건 카이요의 조각이고, 사진으로는 뒤러의 회화도 제시됩니다. 카이요의 조각에 대해 "설화와는 달리 앳되어 보인다"고 저자는 평하시는데, 디도가 실제로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죠. 여왕이면 으레 나이를 먹었겠거니 여기는 것도 선입견일 수 있고, 도생 망명하는 아이네이아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아 이 중년 남성과 비슷한 또래겠구나 짐작하는 것도 꼭 정확하다고는 못합니다. "자결"이 반드시 루크레치아를 연상시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디도는 주로 그 시신이 활활 타오르는 게 대뜸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여튼 반례가 이렇게 융력한 것만으로도 두 점이나 있으니.. 1990년대 말에 "다이도"란 외국 가수가 갑자기 한국 대중에게 부상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저 디도에서 따온 거죠. 프랑스어의 경우 어미(ending. 語尾)가 -n이 붙어 이상하다고 하시는데, 확실히 이 디도의 경우는 이상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원어도 여튼 오메가로 끝나므로 어미 없는 꼴처럼 보이고, 다른 언어의 표기례는 그저 -o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니 말입니다. 영어는 반대로 무조건 떨어뜨리고 보는 게 습관이라 짜증이 나지만요.

앙리 4세가 사랑했던 정부(情婦)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의 동생을 그린 유명한 회화(이게 작자 미상이죠)는 사실 일개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게 분에 넘치게 회자되는 경우입니다. 저자께서도 "어딘가 엉성하고, 마땅히 배웠어야 할 시대의 첨단 기교(이런 걸 영어로 state of the art라고 합니다)가 반영되지 못했다"고 하시는군요. 과감하게도 외설적이고 짖궂은 제스처를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의 성취보다는 정치 풍자의 의도가 짙은 작품인데, 당시에는 이 두 영역이 미처 분화되지 못한 이유도 있겠고, 당대인들에게 그토록 큰 화젯거리를 던져 준 작품을 쉬이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내지 못한 미련도 한몫하지 않았을지 짐작합니다. 처가로는 발루아, 모계로는 나바르(나바라)의 적통을 이어받은 앙리 4세는 사실 전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축복 받은 군주였습니다. 일개 초라한 방계 왕족에 지나지 않았던 부르봉의 명자(존재감도 없었던)는 오로지 그로 인해 프랑스 왕실의 대명사처럼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죠.

"혁명의 피를 그만 멈추어라!" 납치되었던 사비니(사비눔)의 여인들이 이제 돌아와 "이미 우리는 로마 아기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며 양측의 싸움을 말리는 장면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극단적 대결을 부추기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남들이 이만큼 나아갔을 때 그에 미치지 못하고 뒤처진 이들입니다. 남들이 상황에 대해 이만큼 각성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때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 (저 혼자) 몸부림치는, 아주 일방적이고 미숙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낙오자죠. 이런 사람들이 자기 인생 망가진 게 억울해서 무리를 선동하고 평지풍파를 일으킵니다. 싸움을 말리는 게 여인으로 채 자라지 못하고 미숙한 유아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아닌, 아이를 낳고 세상의 다른 국면을 겪어 본 이들이라는 게 유독 눈에 띕니다. 물론 애를 낳고 키워도 여전히 철이 못 든 인간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시몽 부에의 작품 둘을 들며 특히 작품에서 풍기는 우의(의 힘을 가르치는 저자의 태도인데요. 사실 도상학의 출발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림은 물감과 붓과 종이를 통해 쓴 인문의 표현이자, 궁극의 이데아를 재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펜과 개념으로만 이뤄진 텍스트로서의 인문과 분단되거나, 별개의 영역으로 갇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까다롭게 여겨지고 따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건 선입견에 불과한데, 이상하게도 제가 유년기에 읽었던 학생백과사전 미술편에도 "미술은 으레 어려우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전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연예인 뒷담화처럼 때로는 천박하기도 하고, 종교의 오의를 가르치는 신비함과 신성함도 때로는 담습니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지만 딱히 무람히 여길 것만도 아닌, 우리의 고상함과 가벼움, 사악함과 활기참을 그대로 담은, 인간 정신의 모상이자 자녀를 대하는 눈으로 미술을 대하는 게 정답이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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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동을 말하다 - 이슬람.테러.석유를 넘어, 중동의 어제와 오늘
서정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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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란- 이라크 사이의 전쟁, 팔레스타인 일대에서의 이스라엘과 PLO 사이의 갈등, 그리고 레바논 안 기독교- 무슬림 세력 사이의 충돌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이 세 지역에서의 말썽은 과거에 비해서는 그나마 잦아든 편인데요(이스라엘 일부 지역에서 아직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합니다만). 대신 서방 세계와 무슬림 사이의 전면적 적대관계가 큰 규모로 비화하여, 어떻게 된 게 눈만 뜨면 접하는 게 세계적 범위에서의 테러 소식입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데에는 우선 부시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이슈 핸들링이 큰 비난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근원적 이유를 찾자면 서방 세계 거주자들의 전반적 시각, 그리고 이들에 표준을 맞추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점까지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네요. 한마디로, "남을 욕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인데요, 이 책의 저자께서 독자들에게 촉구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이슬람 혹은 중동을 호의적으로 보건 비판하건 개인의 자유이나, 팩트를 정확히 안 후에 그런 시도를 해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거죠.

우선 우리는 이슬람, 무슬림 세계와 중동을 자주 혼용합니다만,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중동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개념이고, 이슬람이니 무슬림이니 하는 건 종교적 프레임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는 이스라엘 인들과도 직분상 자주 접촉하시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이슬람"의 카테고리로 화제를 꺼내면 불쾌해하는 게 당연하죠. 저자분이 우려를 드러내는 건, 특히 한국인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건 사실 한국이란 범위를 벗어나면 바로 오류로 드러나는 게 많습니다. 설사 한국이나 서방 세계 전체가 상식으로 판단하는 사항도, 중동인들에게 이를 들이대면 불쾌해할 수 있는데, 하물며 우리만의  가치관에 불과하다면 오죽하겠습니까. 이는 주체 의식의 결여나 사대주의 같은 게 아니라, 우리가 사업상 상대해야 하는 파트너에 대한 기본적 예의입니다. 거래를 트겠다면서 그들의 비위를 정면으로 거스른다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죠. 과거 중동 지도자들과 상대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규모의 프로젝트 추진에 성공한 최 모 회장, 김 모 회장 같은 분들은 이 점에서 각별히 처신에 능했기에 성공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독재자가 흔히 수십 년 간 국가를 지배하곤 하는 저들의 풍토에 곧잘 거부감을 드러내곤 합니다. 헌데 저자는 특히 중동 정치 문화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동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을 제외한 셈 족은, 강력한 무력 지도자가 하나 출현하면 그 자가 죽을 때까지, 혹은 무력적 우위를 상실할 때까지 그 지배를 용인하는 게 오랜 전통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일단 힘이 곧 정의라는 사고 방식, 그리고 그런 무력에 의해 무질서가 극복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차라리 이익이라는 어떤 합의가 오랜 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ㅎㅎ

독일의 칼 슈미트도 일단 권력이다 힘이다 하는 결단으로, 모두를 위해 헌법 질서가 일단 잡히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고, 홉스 역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건 종식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강조한 바는 있습니다. 아무튼 저들 서아시아인들은 아직도 저런 사고 방식으로 사회와 체제, 질서를 바라본다고 하니 그 점을 유의하고 대화에 임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죠. 이게 사실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큰 갈등이 생기는 대목인데, 1) 일단 서구 사람들의 일방적 가치관을 주입,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2) 막상 현지인들을 이해하려 들고 보니 저런 후진적(이렇게 대뜸 규정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죠?) 사고 방식에 머무르고 그걸 고집하기까지 하는 양상을 어떻게 이해해 줘야 할지, 두 시각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이에 대한 담론 내 토의가 한창 진행 중인, 미해결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슬람 프레임과 서아시아 프레임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렇게 강력한 남성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의지로 무질서를 평정하고 힘에 의한 통치를 펼치는 건, 종교로서 이슬람 교의와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슬람이 종교로 성립한 건 1400년이 갓 넘었을 뿐이고, 서아시아의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는 그 몇 배도 넘는 역사를 갖습니다(구약성경, 혹은 유대교의 토라에 얼마나 지독한 남성 우월주의가 배어 있는지를 떠올리면 요게 실감나죠). 이슬람교는 오히려 이런 막무가내 추세에 적절히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종교로서 이슬람을 비난하거나, 광신적 행태가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비난하는 건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저자는 중동권에서 표기되는 문자인 아랍 글자(물론 유대인은 다른 문자를 씁니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형태인 데 대해, 한국인은 예전부터 이런 표기 관습을 지녔으며(다만 종서[縱書]라는 데서 큰 차이가 있긴 합니다), 지금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는 이를 준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시아 공통의 행태일 뿐인데 왜 이상하게 여기냐는 거죠. 그러나 저는 1) 일본이나 중국도 가로쓰기가 최근 확산되는 추세이며, 2) 합리적인 관행으로 인류가 중지를 모아 살아남은 관행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 같은 비중(가중치)를 주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또, 서양 역시 왼쪽보다 오른쪽에 문화적 타당성을 주어 온 건 우리와 다르지 않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자는 "아랍의 민주화 추세는 결코 우리보다 뒤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근거는 이미 19세기부터 민주주의나 평등 사상이 널리 대중과 지식인 사이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듭니다. 다만 경제 운용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부족장 세력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매우 크며, 이 국민 경제 대부분이 지하자원인 석유의 채굴에 의존한다는 특수한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으나, 앞에서 논급된 "서아시아 고유의 가부장제 문화" 고려와 다소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네요.

중동, 아랍인들은 특히 상술에 능한 민족성으로 유명합니다. 벌써 고려 시대에 무역항 벽란도를 통해 그 먼 거리를 왕래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국제 무역 허브인 당, 송의 항구를 거쳤긴 했지만). 1) 저자께서는 두 가지를 특히 주의하라고 지적합니다. 사재기는 불법이 아니다, 2) 택시 운행 바가지 등 상인이 벌이는 수작은 결코 비난 대상이 아니다. 본래 이들은 이처럼 터무니없이 판을 벌이거나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고, 상대의 깜냥과 배짱에 따라 흥미로운 말장난을 주고 받으면서 흥정을 벌이는 게 관습이라는 거죠. 이걸 불쾌하게 여기거나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은 아주 도량이 협소하고 꽉 막힌 인간으로 취급되어 다시는 거래를 틀 수 없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사업을 벌이려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항이죠.

아랍이 왜 이렇게 경제적으로 후진적 구조에 머무르는가. 이는 문화가 아닌 경제적 수치로 드러나는 현실이므로 편견이라든가 왜곡으로 볼 게 아닙니다. 제조업이 대단히 미비하게 발달했기 때문에, 왜 지난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독재체제가 무너질 때 대뜸 첫째 원인으로 거론된 게 청년 실업이듯, 만성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게 이 사회의 고질병입니다. 이유는 간단한 게, 제조업을 영위하려면 신경 써야 할 건 너무 많고 시설의 덩치는 크고 그 들인 노력을 고려하면 이문도 박한 게 사실입니다. 상업이란, 그에 비하면 적게 투자하고 많이 남기는 게 분명하죠. 대신 제조업은 개인 차원의 부자만 양산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거느리는 노동력 규모가 엄청나고, 한번 흥하면 시시한 상인 따위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부를 크게 쌓습니다. 만약에, 그저 주위의 시시한 사람들, 빈곤층만을 상대로 부자 행세를 하고 싶다면(즉, 더 넓은 세상의 표준이 뭔지 모른 채 자신만의 표준에 갇히고 싶다면) 제조업이란 모험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게 서아시아 경제 체제의 근본 모순입니다. 중동 이야기를 할 것도 없고, 과거 한국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로부터 얻어야 할 시사점은, 제조업을 간절히 갖고 싶으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그들에게 우리의 합작이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한번 인간관계가 뚫리면 대단히 화통하게 구는 그들의 생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수쿠크 등 아랍에서 자리잡은 전통적인 금융 방식에 우리가 전향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전쟁에서 위태하지 않다는데,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이들을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사귀려면 무엇보다 먼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협력도 가능하고, 혹 비판을 하려 들어도 올바른 비판이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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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문이원 엮음, 신연우 감수, 제갈량 / 동아일보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제갈량은 사실 신출귀몰한 지혜주머니(智囊)였다기보다, 원칙에 충실하고 공맹의 가르침, 즉 충효의 도그마에 지행(知行)을 합일시킨 인격자이자, 유능하고 청렴한 관료형 인간에 가까웠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더 정확한 평가입니다. 실제로 <삼국지>의 저자 진 수 라든가, 주를 쓴 배송지 등도 그를 전술적 천재로 보지 않고, "임기응변에 능하기까지 했으면 대적할 자가 없었을 것" 정도로 아쉬움을 표현할 정도죠. 이런 제갈량을 전통적으로 중국 민중들이 사랑하여, 후세에 창작된 연의류에서 그를 책략과 술수에까지 능할 뿐 아니라 호풍환우하는 초인으로까지 과하게 미화한 감이 있습니다. 나관중 등은 이런 민중의 기호에 더 부응했을 뿐이겠고요.

이 짤막한 분량의 <장원>은 그래서 어떤 처세술이나 군략의 비의를 가르친다기보다, 유교의 강직한 충의(忠義)의 도그마를 핵심만 찔러, 그러나 간곡한 문장으로(제갈량은 당대의 문장가이기도 했죠) 표현한 저서입니다. 충의지사는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그 격정과 에너지를 아껴 실천에다 투입합니다. 제갈량이 그 담백한 충성심과 의리를 얼마나 인격 속에 잘 구현한 인물이었는지는 이 책의 표현과 스타일, 체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충의지사는 본디 말이 길지 않습니다.

원문부터가 이처럼 소략하니, 고대의 사회와 정치 체제, 그리고 그 속을 살며 일구던 이들의 사고 방식에 여전히 낯설 수밖에 없는 우리 독자들은 더욱 원전에 친근히 다가서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공명 량(亮)의 원저에다 덧붙여, "문이원"의 해제와 해설을 자세히 서술한 구조입니다. "문이원"은 사람 이름이 아니며, 동양 고전 인문을 연구하는 모임의 명칭인데요. 얼핏 보면 자계서마냥 처신의 바름과 정수를 가르치는 모양새이기도 합니다만, 그게 천박한 처세의 편의를 알림이 아니라 성현들의 강직하고 타협 없는 마음 자세, 수양의 올바른 방향을 일깨우는 내용이니 오히려 원문과 번역만 제시된 편제보다 이처럼 친절한(그리고 긴) "주석"이 함께 수록된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將戒>편에 보면, 역자들께서는 이를 "장수의 표본"이라고 옮깁니다. 실용적인 번역 태도로 보이는데, 뭐 구태여 문의에 충실하자면 "장수가 경계할 바" 정도가 되겠지요. 여기서도 공명은 <상서>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며 당대의 지침으로 받드는 모습인데, <상서>는 우리가 잘 아는 사서 삼경 중 "서경"으로도 부르는 그 고전입니다. 춘추 시대의 손자도 그렇고, 본디 중국 사상 체계의 여러 가닥 중 특히 병법을 논하는 영역에서는 공맹의 오랜 훈시와 무관하게 다른 제자 백가의 뿌리에서 비롯한 체계가 많습니다. 하지만 공명은 이처럼, 무장의 몸가짐을 논할 때에도 유가 정통의 교리를 언제나 염두에 두고, 대전제로 삼아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장강(將彊)>편에 보면 재상의 위치에 오르고도 공명은 궁신접수(躬身接水)의 태도를 내내 유지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장원> 본문에 나오는 게 아니라 역자들께서 다른 전거 중 공명의 행적을 일러 뽑은 표현입니다. 이것만 봐도 이 책 편역 방침의 유익함을 엿볼 수 있는데요. 이 편에 보면 재물을 가지고도 그 인간됨됨이가 용렬하여 제대로 쓰지 않다 멸망하는 장수의 패착을 꾸짖습니다. 실제로 이 비슷한 예가, 명나라 말기 황제와 환관들이 서로 숨겨 둔 예산을 아끼고 상대가 먼저 금전을 풀어 모병하기를 기다리다 문 앞에 닥쳐 온 오삼계의 군대, 그리고 여진족의 팔기군을 막지 못 해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합니다. 어리석고 멍청한 자에게 재보는 최소한의 편의도 제공하지 못 한 채 오히려 불운과 재앙을 부르는 불씨가 되는 겁니다.

<便利>편은 역자들이 "전쟁에 유리한 조건"으로 옮기고 있네요. 여기서 역자들은 제갈량의 논변을 뒷받침할 방증으로 오대 십국 시대의 이존욱 등 여러 사례가 보여준 병법의 기발함과 반대 사례를 듭니다. 제갈량이 실제로 임기응변에 능하지는 않았으나, 대신 앞선 전사(戰史)에서 여러 좋은 사례를 들어, 유격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등 모범적인 임기응변의 교리화를 꾀합니다. 과연 제갈량다운, 규칙에 어긋나지 않고 재주꾼의 폭주를 경계하는 조신한 가르침이자 시스템의 정비라고 하겠습니다. 삼국 시대(제갈량의 활동 시기 기준)와 오대 십국기는 거의 700년이라는 시간 차가 나는데도 이처럼이나 적실하게 교훈이 적용되고, 또 서로 다른 사서에서 유사한 예를 끌어온 편역자들의 소양 높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제갈량(연의가 아닌 정사 속 인물)이 이처럼 구체적인 병법 실무를 논한 것도 진귀하게 보는 표본일 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이 전법의 특수한 논변을 실제 처세에, 그것도 군자의 당당한 마음가짐으로 응용할지 깊이 고민하게 돕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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