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 의사.의과대 학생.직업 전문가가 들려주는 의사의 모든 것 꿈결 잡 시리즈
고정민 외 지음 / 꿈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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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이 불확실성이 만연한 세상에선 어린 시절부터 진로와 그에 따른 전략을 확실히 결정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직업이라면, 사회적 존경과 높은 보수가 보장되다시피한 "의사"이겠습니다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맹목적 선호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도 자신의 성격과 능력, 가치관 등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긴 시간의 학업과 수련을 요하는 자격 취득부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자격을 얻는다 한들 개업을 할 본인 자신이 행복해질 지가 의문이기 때문이죠. 남들 따라서 진로를 선택했고, 좋아 보여서 그 길을 밟았지만, 많은 기대를 품은 자신을 막상 기다리는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여간 낭패가 아닙니다. 반면, 너무 어려워 보여서 선택이 망설여졌는데, 좋은 선배들(의대생들)과 성공한 개업의들이 들려 주는 충고와 조언을 듣고 "이게 내 길이었구나!"하는 반가운 각성이 밀려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로 탐색에는 그래서 구체적인 경험담, 현장감 있는 정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책의 부제는 "의사, 의사를 말하다"인데요. 모두 아홉 분의 글이 실렸습니다. 여섯 분은 현직 의사, 한 분은 법의학자, 한 분은 직업 전문가(고용노동부 공무원), 그리고 한 분은 모두가 선망하는 명문대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독자인 제 생각 같아선 의대생들의 합격 수기가 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도 싶었지만, 이 책은 "직업" 자체를 탐방, 분석하는 목적이지 입시용 서적이 아니므로 이 정도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서울대 의대를 합격할 정도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까, 아찔한 느낌이 우선 들 것 같습니다. 의예과 1학년 신재문(19)은 먼저 "수학 공부를 생활화하라."고 조언합니다. 많은 이들이 수학이라고 하면 대뜸 어렵다,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떠올리는데, 일단 그런 부정적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야 이 과목에 대한 정복... 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접근이나 "교분"이 가능하죠. 수학은 사실 의대를 들어가고 나면 쓸 일이 적어지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접하기로는 의사 선생님들도 특히 응급 환자를 다룰 때 무슨 처방부터 써야 할 건지, 치료 과정에서 어떤 단계부터 밟아야 환자가 가장 덜 아파할지를 결정할 때, 이 "문제 풀이, 최적해 도출"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여기부터 먼저 손 대면, 환자가 아파서 누워 있지를 못한다고." 일류 의사는 기계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대응을 보여야 한다는 알고리즘만 머리에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여러 징후가 한꺼번에 닥쳤을 때 각각의 단계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현명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것도 갖기 쉬운 건 아니지만)만으로는 부족하죠. "사랑"에도 지혜가 깃들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박주연 선생님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산부인과 전문의입니다. 이분이 인턴 시절 쓴 일기의 한 토막을 소개하는데, 독자로서 해당 대목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느껴지더군요. 다 귀한 집에서 자란 따님들인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문 기능을 습득하려니 저렇게 잘 시간도 없이 배우고 수련하느라 고생하는구나.. 그러나 산부인과야말로 우수한 인력들의 세심한 손길이 특히 요구되는 분야입니다(어디인들 안 그런 곳이 없겠습니다만). 아직 젊으신 분인데도 박 선생님은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전부다."라는 의젓한 말씀을 하십니다. 근래 수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산부인과가 기피되는 과목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렇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분들이 계속 늘어나야겠고, 이런 책을 읽으며 돈보다는 보람으로 자신의 장래를 설계하는 학생들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박 선생님이 인용하신 좋은 말, "직업은 꿈이 아니다. (그 직업을 갖고 나서 어떻게 살지가 꿈이 되어야 한다). 꿈이 만약 그저 의사라면, 의사고시 합격하고 나서 꿈이 끝나는 인생이 되고 만다." 어떤 의사로 남은 긴 인생을 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자는 뜻이겠는데, 모두가 마음에 잘 새겨야 할 것 같네요.



윤준택 원장님은 페이닥터로 2년 정도 경력을 쌓고 개원하신 분입니다. 이분은 해외 봉사 활동에도 수 년 간 몸소 참여하신 경험담을 털어 놓으십니다. 안과의사인 그는 비전케어라는 봉사 단체에 몸을 담으셨다고 하는데요. 백내장에 걸려 실명 직전이었던 다롄의 노인, 캄보디아의 어느 가난한 소녀 등이 그가 도움을 준 환자들로 소개됩니다.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고, 많은 꿈을 품고 키워나갈 어린 나이에 포기와 좌절이라는 아픈 상처를 걸머지어야 할 소녀들에게 다시 희망을 찾아 주는 건, 세상에서 의료인 말고는 누가 대신 수행할 수 없는 크나큰 보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재진 한림대 교수님은 초등학생인 두 딸을 둔 흉부외과 전문의입니다. 그는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을 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고백하시는군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분과는 의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영역이 늘어나고,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마주칠 수 있는 난관도 덩덜아 증가할, 책임이 막중한 분야라는 거죠. 심장과 폐는 인체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다루기가 복잡하고 환자의 고통도 그만큼 더 절박한 기관인데, 이런 까닭에 어지간한 사명감 없이는 배겨날 수 없는 하중으로 전문의를 짓누르는 전공이라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교수님이 강조하는 건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이며, 이것이 없이는 의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없다는 자못 엄숙한 고백으로 들립니다.

최유경 원장님은 연년생 두 딸을 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입니다. 이 책에 사진이 실린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고 선량한 분위기라는 게 공통점인데요. 꼬마들을 키우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의사라서 가장 좋은 점"이라면 서슴없이 "내 아이들이 아플 때 정확하고 빠르게 돌볼 수 있다"는 점을 꼽으십니다. 한국에서 전문직 여성들이 겪는 이중고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보편적인 고민인데요. 최 원장님은 그나마 "내가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했기에 고충이 반으로 줄었다"며 웃으시는군요. 이처럼 내 아이를 다루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린 환자들을 챙기는 의사 선생님들이 늘어갈 때 사회와 국가가 보다 살기 좋고 복리가 증진될 수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너무 감사할 뿐이죠.



외국 드라마를 보면 "병리학자(영드 셜록에서 몰리 같은 사람)"와 검시관(코로너), 법의관 등의 용어가 다 다르게 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의사를 보조하는 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어 보면 코로너 중에 전문 지식이 빈약해서 주위로부터 경멸 받는 이도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는 뜻도 되죠. 이상한 경북대 교수님은, 요즘 특히 CSI 같은 드라마 덕에 주목을 받기도 하는 이 법의학 관련 종사자들에 대해 의문을 잘 풀어 주십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이런 법의학 전문가가 되려면, 당연하지만 의사로서의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다른 의사와 차이가 있다면, "전문의 취득 코스"가 없다는 정도인데, 이 역시 얼마 안 있어 마련될 전망이 크죠. 선생님은 자신의 직분상 1) 교육, 2) 병원 진료 3) 연구를 병행하는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여기까지는 다른 의대 교수님들에 공통되는 애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4) 자주는 아니라도 사법 당국으로부터 요청되는 부검까지 업무의 일환으로 책임지니, 이 점이 다른 분들과 차별되는 고충이겠지요. 역시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이 아니면 수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검이란 "변사체", 그것도 유별나게 큰 손상을 입은 시신이 대부분이겠는데, 일반인이라면 이를 흘낏 보는 체험만으로도 충격이 올 만하죠.

책의 마지막에 인터뷰이로 참여하신 허희진 전문의(동국대 일산병원)께서는, 어려서는 막연히 "나이팅게일의 모자와 에이프런이 예뻐서" 의료인을 꿈꿨으나, 교사이신 아버지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의 도시락을 싸 주는 모습을 보고, 사회적 약자의 구호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다지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시네요. 버젓한 전문의로서 사회의 소금과도 같은 역할을 해 내는 그녀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힘든 건 공부"라며 "다시 돌아가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길"에 대해 손사래칩니다.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선 이런 각별한 소명의식을 갖고 직분에 임하는 분들의 재능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직업인들이 늘어나려면, 어려서부터 확고한 목적 의식이 교육 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배양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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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조종 교과서 - 기내식에 만족하지 않는 마니아를 위한 항공 메커니즘 해설 지적생활자를 위한 교과서 시리즈 9
나카무라 간지 지음, 김정환 옮김, 김영남 감수 / 보누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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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라이트 형제에 의해 발명된 지 근 백 년이 지났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망만큼 인류의 뇌리, 가슴에서 오래 자리하고 성장해 온 꿈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비행기라는 문명의 이기는 두 가지 점에서 미스테리한 구석이 있습니다. 1) 대형 여객기, 초음속 전투기까지 개발되었지만 아직도 그 비행 원리를 설명하라고 하면 (전문가들조차) 어딘가 좀 복잡해진다. 2) 아직도 그 "자가용"화가 요원하다. 1)에 대해서는 비행기가 특히, 자연과학보다 실용적 공학의 발전에 더 직접적으로 기댄 발명품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물론 거의 모든 기계, 시설, 발명품은 둘 이상의 과학 원리에 의해 운용되고, 과학자는 원리를 탐구하는 사람이지 기계 만드는 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정말로, 현장의 엔지니어들이 숱한 시행 착오를 거듭하다 "어 이러니 되네?" 같은, 현장의 땀과 노고의 산물 그 성격이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고층 건물이 그 엄청난 하중을 견디고 지속되는 이유, 디젤 기관이 상상을 초월하는 질량을 쾌속으로 운반하는 이유 등은 반면 정말 몇 가지, 몇 가지 심원한 과학 원리(중고딩들도 다 배우는)로만 설명(설명만큼)은 가능합니다. 이론상으로도 쉽게 납득이 잘 안 되는 게 비행기의 운항 원리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그런 걸 가르치는 내용은 아니고요. 만약 당신이 어떤 이유에서건 비행기의 조종간을 직접 잡을 일이 있다면, 그게 자동차를 모는 것과는 어디서 어떻게 다른가(대부분 자동차 운전 면허는 있겠으므로), 무슨 장치와 핸들이 무슨 기능을 각각 떠맡고 있는가, 혹시나 반드시 유념해야 할 기술적 원칙과 자연과학 원리(비행기 제작에 관련된 게 아닌, 운행과 조작에 필요한)가 있다면 무엇인가 등을, 시원시원한 그림과 함께 가르쳐 줍니다. 그걸 어디다가 써먹을까 싶어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인데요. 사람이 꿈을 품고 한번쯤은 이렇게 기능을 써먹을 날이 있겠거니 진지하게 계획을 가져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미래의 충실도 면에서 제법 큰 차이가 난다고 말이죠. 심지어 이런 기술은, 언젠가 내가 자가용 비행기를 가져야지 하다가 정말 굴리게 되는 그런 순간 말고, 여객기에 탑승했다가 불시착이라도 했을 때, 아 저번에 그 책 알차게 읽었으면 그나마 대처가 지금 쉬울 텐데, 같은 아쉬움으로 만날 가능성이 더 크죠. 그게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고요? 어차피 확률은 탁상 위의 계산 테마일 때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49%든 0.0001%이든). 닥치고 나면 비로소 100%의 절박함으로 당사자의 코 앞에 디밀어지는 거죠. 흠.

이 책은 비행사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가, 혹은 대체로 출발 전에 동료(주로 동료가 있을 법한 인력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입니다)들과 어떤 루틴을 거치는가 등에 대해서도 곰살궂은 설명을 베풀고 시작합니다. 그 후, 비행기에 탑승하여 무슨 장치를 어떻게 점검하고 어디에 눈금들을 둔 채 "띄워야"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치네요. 사실 비행기 운전을 책으로 배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운전은 그게 경차 운전이라 해도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 뭘 만져 봐고(물론 현행법에 저촉 안 되게) 밟아 보고 도로를 달려 봐야 그게 몸에 배는 기술이지, 이론으로 만족하고 넘어갈 게 따로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런데 이 책을 넘기면서 느낀 건, 정말 매뉴얼 단계에서라도 무슨 개념을 잡고 시작해야 한다면, 실물로 계기반을 만지기 전에 이런 책, 이렇게 쉽게 가르쳐 주는 책은 꼭 읽어야 한다는 거죠. 비행기 모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따로 있어서 발품 팔고 찾아가는 게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자동차는 엔진 추력의 크기를 몰라도 비탈길을 모는 데 지장이 없지만(그렇죠? 그냥 몰기만 하면 됩니다) 비행기는 추력의 크기를 알아야 뜰 수가 있다." 저는 이런 문장이, 독자에게 무엇, 아주 복잡한 그 무엇을 알려 주는데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추력"은 비행기가 나는 데 필요한 4대 힘 중 하나입니다. 이상하게 이런 건 상식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라 제목 그대로 비행기를 모는 법을 가르쳐 주는 요령을 담았다"고 생각한 저자의 실용적인 태도일 수도 있죠. 자동차에서도 엔진이 중요합니다만 비행기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제트 엔진"을 달고 있음은 또 우리가 다들 아는 상식이죠. 자동차는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는 거의 모든 아날로그(혹은 디지털) 지침을 두고 주인과 소통하지만, 이 추력을 직접 지시하는 장치는 없다고 합니다. 이는, 오너 드라이버의 경우 그저 소비자일 뿐이지만, 비행기 조종사는 대부분이 엔지니어, 혹은 그 이상의 소양을 쌓은 이들이기 때문에 다른 장치를 보고 "추측(이 책의 표현입니다)"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장치들은 N1(팬 등의 회전도를 잼)계, EPR계(엔진의 압축도를 잼) 두 개라고 하는군요.

비행기 아니라 어느 엔진이라도 흡입, 압축, 폭발, 배기라는 4공정을 거치는 건 공통입니다. 중학교 때 기술가정 시간에 이걸 배우긴 했는데, 나중에 아무 쓸모도 없고 입시에도 도움 안 되는 이런 걸 뭐하러 가르치냐고 원망하며 지옥 같은 암기를 했습니다만, 그걸 이렇게 다시 마주치는군요. 지식이란 뭐라도 머리에 넣어 둬서 해로울 게 없습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탓해야 할 자기 머리가 아니라 지식을 엉뚱하게도 적대하기 마련이지만("저딴 건 필요없어!" "응, 너한테는.").

2장에서 조종 장치의 점검과 여러 계기반 세팅을 가르칩니다만, 추력 세팅이 그만큼이나 중요한지 (관제 당국으로부터 이륙 허가가 떨어지면) 다시 한 번 이를 살피고, 본격적으로 "이륙에 알맞은" 추력 게이지로 올려 놓을 것을 지시하네요. 이게 제트 엔진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소형 경량이지만(비행기에서 이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겠습니까)" 회전수의 가속이 느린 편이라고 합니다(제일 빠른 건 오토바이 엔진이죠). 이 때문에 아이들(idle) 상태에서 바로 가속이 이뤄지면, 이상(異常) 연소를 일으킬 위협이 높다는 겁니다. 왜 영화 같은 데서 멀쩡한 비행기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키고 엔진이 어쩌구 저쩌구 떠들까 했는데 말이죠. 다 그게 비행기 모는 걸 어깨너머로나 구경한 작가들의 나름 능력 발휘였다는 걸..

자동차의 선회는 그저 핸들(휠)만 꺾으면 됩니다만, 비행기의 경우 좀 더 복잡한 조작 메커니즘이 끼어듭니다. 이 저자는 참 적절하게도, "(심지어) 종이 비행기의 경우도 좌우 균형이 안 맞으면 날지 않는다"는 예시를 들며, 조종간과 사이드스틱의 조작을 통해 "양력"과 "항력"의 재배분으로 방향을 트는 그 원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양력"은 양력이라지만 항력이 왜 나올까 했는데, 바로 이처럼 방향 선회에 필요한 힘의 원리로 기능합니다. 힘의 본성을 규명하는 건 자연과학자들의 몫이지만, 현실에서 성질이 다른 두 힘(혹은 네 힘)이 어떻게 얽히고 합력을 이루며 상호작용하는지 예리한 센스를 통해 알아내는 건 엔지니어들의 역량입니다.

언제나 비행기의 속도는 마하(음속의 배수)로 단위를 잡죠. 이 마하는 사실 "마하"가 아니라 철학자 "마흐"의 이름에서 딴 것인데(외래어 표기법 개정 전엔 "마하". "바하" 등), 이 사람의 철학적 업적은 아인슈타인의 연구에도 직접 영감을 줬습니다. 비행기의 속도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니라 소리와의 상대 속도로서만 수치 측정이 쓸모가 있습니다. 음속의 몇 배(물론 1 미만일 수 있습니다)이냐가 조종사로선 유용하게 쓸 정보라서, 구태여 초속 340m/s니 뭐니 하고 환산을 안 하는 거죠. 이처럼 이 책은 기술적 지식으로서의 비행기 조종 뿐 아니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자연과학적 기초 지식이 이런 첨단 기술 속에서 어떻게 필수 부속으로 활용되는지 생각할 여지까지 독자에게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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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이 아닌 해암으로 다스려라 - 현명한 암치료 선택을 위한 통합의학 가이드
윤성우 지음 / 와이겔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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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어디 저 외딴 산골에서 혼자 요양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려 애 쓰고, 자신의 지난 과거와 화해하면서 암이 저절로 나았다는 회고가 자주 나돕니다. 물론 그 중에는 못 믿을 과장이나 허풍도 많지만, 여튼 암이란 질병이 그 암만 집중 상대해서 격파한다고 금방 낫거나, 원상의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는 질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설사 암이 나아도 몸의 다른 기관이 망가지거나, 얼마 안 되어 재발하는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서구식 현대의학이 취한 전략은 "항암" 즉, anti-cancer treatment인데, 이게 기본적으로는 대증(對症) 요법이라 사람의 몸 근본에서 싹트는 어떤 병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하긴 그렇게 따지면 거의 모든 현대의학의 치료법이 (외과시술을 비롯해) 대증요법인데, 총체적 불신을 버리지 못한다면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 드러눕는 게 고작 아닌가, 뭐 이런 반론도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암이란, 뭔가 다른 병들과는 접근을 달리해야 할, 마음가짐이라든가 스트레스 많은 환경, 체질의 근본 요인과 관계 있는 병 같습니다. 제가 1년 몇 개월 전에 읽은 책 중에는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주장도 담은 게 있는데, 이게 성격이라든가 암을 키우는 체질 따위를 의미하는 걸로 밝혀질지 더 지켜 봐야 하며, 만약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복이 어려운지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겠지요.

이 책은 한국에서 한방의학 분야에선 최고의 권위를 지닌 윤성우 박사님이 지은 책입니다. 그간 통합(통합이라 함은 양방, 한방 학제간 연구) 암학회 등에서 확고한 명성을 남기셨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명의로 소문난 분이시죠. 이번에 대중을 위한 안내서로는 이 책을 처음 펴내신 셈인데, 첫째 체계적인 정보와 자기성찰적(객관적) 관점, 둘째 일반인이 알기 쉬운 설명, 셋째 대중의 상식에 부합하는 유병 과정 해설과 대응에 대한 충고 등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이 염두에 두는 첫째 전제는 "한방의 과학성에 대한 의심은 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온화하신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과 어투는 책 어디에서건 괜한 대립적 언사를 자제하십니다. 한방은 귀납적으로, 다양한 임상 체험과 구체적 처방의 경과를 보고 오랜 시간 지혜가 축적된 의학이지만, 서양 의학은 자연과학에서의 확고한 성과, 의심할 수 없는 법칙(주로 화학 관련이겠습니만)을 토대로 "연역"되어온 학문 체계라는 겁니다. 귀납과 연역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대체하거나 부정할 수 없고, 상호 보완적으로 진리 탐구에 병용되어야 할 방법론입니다. 의학이란 환자를 위해 적용되고 발전되어야 할 수단이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인 지식과 요법인 양 통용될 수 없다는 거죠.

한방이 본디 성격과 기질, 마음가짐의 요인을 강조하긴 하지만, 서양 의학도 예컨대 막 실려온 환자에게 "절대 안정 요망" 같은 추상적 당부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도 저자께서는 "비록 후천적 요인이 암 발생의 8, 90%를 차지한다고는 하나, 아직 이론적으로 명확히 환경 요소와 병발의 인과과계가 구명된 건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저자께서는 서양 의학계의 최신 동향 중 일부를 소개하며, psycho-neuro- endocrino- immunology라는 신 분파를 거명합니다. 앞의 psycho-라는 접두사가 중요한데, "정신"이 신경, 내분비, 면역을 일괄하여 영향을 끼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분야입니다. 마음가짐의 어떤 상태가 특정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며, 이것들이 인체에 어떤 총체적 영향을 남기는지 밝히는 게 목적입니다. 그렇고 보면 윤 박사님 같은 분들의 업적이 서양 의학에 일정 부분 자극을 준 게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이 더 인체와 의식에 스트레스를 안긴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막연한 스트레스라는 개념에 상당히 적절한 병인 포섭을 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황기(黃芪. 두번째 글자는 "단너삼 기" 자 입니다)란 약재는 이미 서양 의학에서도 채택했다고 합니다. 논문(<Cancer Letters>에 수록)에 의하면 직접 암세포에다 독성 효과(cytotoxic effect)를 내는 게 아니라, 이런 암세포의 확산을 막는 정지 효과(cytostatic)를 보게 하는 처방으로 쓰인다고 하는군요. 다만 이 역시 저체중자에게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효능 중의 하나로, 한방이 취하는 태도가 양방과 어떻게 다른지를 단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약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책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죠. 항암은 말 그대로 암과 맞서 싸우며 암의 덩어리를 파괴, 소멸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침투해 온 병원체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가 타당해도, 어쩌면 나의 타고난 체질과 지속적인 습관이 몸 안에서 만들어낸, 내 몸의 일부나 다름 없는 게 어쩌다 혹을 키워 암이 되었다면, 이런 상대를 놓고서는 "잘 달래어 스스로가 무장 해제를 한 후 몸의 원 성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발본색원 처방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암과 싸우지 말고 화해하며 같이 살 생각할 하니 낫더라"는 고백을 하는 것도 많이 들었습니다.

양한방 협진시스템도 많은 권위자들이 환자에게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저자께서 몸 담는 경희대에 잘 마련되었다고 하시는데요. 경희의료원이 이런 통합적 접근을 선구적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잘 발전시켜 온 내력이 있기도 합니다. 반면 "한방 단독 치료"의 유효성 역시 저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방법 중 하나로 권하시는데요. 한방에서는 본디 종기를 "반쯤만 죽여 놓은 후" 나머지는 살려 놓은 채 체질의 강화에 보다 주력하는 방법을 취한다는 겁니다(역시, 항암이 아닌 해암이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전략입니다). 적극적으로 암을 공격하는 걸 "공법", 반쯤 죽여 놓은 후 약해진 신체의 기를 살리고 체질을 보강하는 걸 "보법'이라고 붕른다는데, 저자의 결론은 "단독 한방 치료가 더 적용확대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보완의학, 대체의학, 통합의학 등에 대해 저자는 엄격한 준별을 행합니다. 특히 대체의학은 아직 허황하고 위험한 부분이 많으며, 검증 없이 통용되는 각종 약재도 그 복용에 극히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의술은 인술(仁術)이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저자분의 여러 충고, 특히 마음가짐이 바르고 남 탓을 하는 잡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는 말씀은, 사람 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환자의 몸이 낫는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병이 낫는 건 그게 기적이 아니라, 결국은 당사자 자신이 병을 키우기도 하고 낫우기도 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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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평전 - 선지자에서 인간으로
하메드 압드엘-사마드 지음, 배명자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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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지자, 예언자라고 할 때 어느 종족, 국민이나 자기네, 혹은 다른 겨레 역사상의 여러 사람을 떠올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유독 아랍에서만은, 그저 "예언자"라고만 해도 단 한 사람만을 상기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처럼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게 그만큼이나 이 사람이 위대하고 거룩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세계에서 유독 이 사람들만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서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전자가 옳다면 아랍 인들뿐 아니라 당장 우리 한국인들부터도 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르침 앞에 무릎 꿇고 당장 해당 종교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해당 종교의 신자들이 저렇게나 확신을 갖고 행동하며, 심지어는 목적이 수단을 정말 정당화하기라도 하는지 잔혹한 테러를 일삼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긴 한가보다 라고 눈길이 쏠리기도 합니다(물론 농담이었습니다).

"무함마드 평전"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은, 카이로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는 지식인인 하미드 압드엘-사마드 씨의 저술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대목에서 잠시 쉬어가며 생각을 정리해야만 다음 파트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책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장이 충격적인 건 얼마든지 책에 따라 그럴 수 있고, 그런 책을 한두 권 접한 것도 아니겠거니와, 그 사람의 개인적 주장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태도는 대단히 "고증적"인데, 그 제시하는 논거들이 대단히 탄탄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요구될 만한 논리적 방법론에 의해 전개되고 있기에 그의 주장은 그저 저자의 주장이겠거니 하고 걸러들을 수만은 없었네요.

비록 만주족의 정권이 들어선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으나 청대에 이르러서야 공자나 기타 유가의 성현들, 혹은 고전들에 대해 비로소 비판적 시각을 던지고 논리와 실증에 따라 그 진위와 존부를 일절 검증받은 중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활동한 고증학자들의 기여로, 지금 우리는 유교 경전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 수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슬람은 그 토대가 확고히 놓여진 8, 9세기 이래 단 한 번도 진지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저자의 획기적인 접근, 때로는 충격적인 분석이, 이슬람 최초의 "고증학적 스탠스" 중 하나로 기려져야 하지 않을까, 독자로서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사실 "평전"이란 게 "예언자"를 대상으로 저술되기가 이슬람에서는 교리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쿠란에 기술된 대로, 문자 그대로의 이해가 신자들에게 요구될 뿐, 그의 생애나 가르침에 무슨 "평가"를 한다는 게 불경스럽고, 쿠란이 이미 존재하는데 따로 다른 버전의 줄거리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우선, "이슬람"이니 "쿠란"이니 하는 말 자체가, 7세기 이 종교의 성립 당시에는 기록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옴미아드), 아바스 왕조 등이 자신의 질서와 체제를 세운 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없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죠. 물론 저자는 균형 잡힌 관점의 지식인답게 강력한 반론도 함께 소개는 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위력을 떨치는 집단이 펴는 논리(반론)라고는 하나, 자기가 쓰는 책 안에서는 저자가 곧 군주인데, 여튼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보기 좋습니다. 로마 제국이 영역 내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크리스트 교의 체제 내 편입을 도모했듯, 집권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이들 신흥 왕조가 신민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없던 정통성과 신성함"을 작위적으로 구축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쿠란의 진정성에 대해 통째 의심하고 드는 태도입니다. 예언자에 대해 불리한 사실, 기사나, 예언자 자신이 말한 내용과 정면 배치되는(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가 어기는) 내용도 버젓이 쿠란에 실려 있는데, 만약 전면 조작이라면 경전에 이런 내용이 잔존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예언자에 대한 존경심이 퇴색할 만한 꽤나 불미스러운 일화도 상당수인데도 말입니다. 쿠란의 역사적 성립 진정(眞正)은 그래도 신뢰할 만하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 저자가 반론을 공정하게 소개하는 분이라 데까지는 인정할 수 있는 서술들입니다.

해당 종교와 아무 관계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안타깝게 다가온 부분은, "이슬람(책에 따르자면 아직 이름도 없던 시절이라고는 하나)은 본디 폭력적일 때 가장 기세를 떨쳤고, 설교를 통한 평화와 연대의 강조는 아무 효과도 못 거두었다"는 저자의 분석입니다. 이는 사실 쿠란 본문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됩니다. 예언자가 자기 권위를 확실히 한 계기는 메디나와 메카의 군사적 정복이었다는 건 어느 역사서나 의견 일치가 이뤄지기도 하고요. 저자는 이를 두고, "비스마르크의 제2 제국 성립에 비길 업적인지, 아니면 코사 노스트라의 대부와 빗댈 것인지"라는 논제를 꺼냅니다. 전자라면 대개는 긍정적 뉘앙스이겠으며, 후자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죠. 저자는 이후 중동 일대에 찾아온 평화와 안정을 거론하며 역사적 가치를 논하지만, 그마저도 "예언자 본인의 업적이라기보다 직후의 칼리파,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의 권력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이라고 정리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락까에서 IS 지도자들이 펼치는 그 나름의 선정도 저 무하마드의 치적에 비해 그리 낮잡을 바 없다고까지 하네요. 무하마드도 피지배자를 무자비하게 다루고, 전쟁에서 잡아온 "성노예"들을 부하들에게 나눠 준 건 똑같다는 점에서요.

"코사 노스트라의 대부" 운운하는 서술도 그저 비유적 의미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역 치안을 현저히 위협하고 대체 정부로까지 기능했던 시칠리아 현지의 마피아의 경우, 폭력을 통해 패권을 추구하는 방식이 무하마드 무리의 그것과 거의 같다는 겁니다. 보통 "마피아"의 어원에 대해 프랑스 관련설이 지배적이지만, 이 저자는 아랍어 기원설에 더 중점을 둡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성장 과정에서 명예 살인의 당위성을 내내 주입하는 것도 아랍 민족만의 특징인데, 시칠리아는 역사를 통해 아랍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아 항구적 속성을 피 속에 내려받기도 했다는 거죠. 시칠리아의 아랍 피침과 그 유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으므로 이 역시 개인의 억단이라 폄하할 수 없습니다. 무하마드를 비롯 아랍인의 야만적이고 폭력적 전통이 시칠리아 마피아를 낳았고(실제로 이탈리아 다른 지방에서는 이렇게까지 깡패들이 발호한 적이 없죠) 그 다른 갈래의 후손이 지금 IS를 만들어 설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시사점입니다.

저는 책을 읽던 도중 서문과 책날개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 이 책 저자께서 이미 교단의 파문을 받고 신변의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 책의 내용 중 이런 개탄스러운 조치를 빚는 데 가장 결정적인 건, 예언자 개인의 신상과 혈통에 대한 험담에 가까운 기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이 대목은 인신 공격에 가까울 뿐 아니라, 과연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도출될 결론이 그 한 가지 가능성뿐일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개인의 강박적 습관이 그 까다로운 이슬람 예식과 율법 조항의 기원이라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좀 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불편하게 한 건, 여튼 세계 질서의 중요한 한 기둥을 떠받드는 거대한 종교 세력이, 이처럼이나 한심한 기반 위에 서 있었던가 하는 허무한 환멸이 아니었을지.... "이슬람은 결코 폭력을 교사하지 않으며, 사랑과 우애와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럼 그렇지, 같은 인간의 탈을 쓰고 최소한의 교감이 이처럼 개명된 세상에 없을 수 있을까" 같은 안도를 느끼곤 했죠. 그러나 이 책 저자분의 설명 같은 걸 들으면...

책의 결론은 "이슬람에는 마르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 같은 (풍자적 계몽 정신을 일깨울) 이가 필요하다"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조롱과 희화화의 시도는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할 가능성이 높고요. 제가 언제나 의아하게 생각한 건, 왜 이슬람 교단 안에서는 보-혁, 노-소, 완-급의 갈등이 도통 발생하지 않느냐는 점이었습니다. 하다못해 유가에서도 주-육의 대립, 명과 실의 충돌이 있었고, 불교는 소-대승의 분열을 통해 오히려 외연을 확장했죠. 이런 교착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완고한 율법학자들, 사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그들이 모종의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이들은 숨어서 율법을 어기거나 도덕적 타락을 범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중세 기독교의 패착과 대조됨) 오히려 더 적폐 해소에 장애가 됩니다(역설적이지만). 아무튼 자신의 안위를 내 걸고 용감한 주장을 펴 그들 내부에서도 다른 가능성이 얼마든지 싹트고 있음을 알려준 그 공로에 고마움을 갖습니다. 국외자들이 뭐라도 좀 도와야 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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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신화여행 - 신화, 끝없는 이야기를 창조하다
강정식 외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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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믿음, 근거 없는 주장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판단을 지배하는 것." 신화(myth)의 정의(定義)에는 (아마도 후대에 추가되었겠으나) 저런 풀이도 끼어 있습니다. 학교 교육이나 독서를 통해 합리적이고 계몽된 정신을 단련하길 원하는 이들은, 신화를 그저 흥미를 돋우는 이야깃거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티프로만 받아들입니다. 재미있게 여길망정 진지하게는 수용하지 않습니다. "단군 신화" 같은 것에는 그나마 재미도 없다며 형식적인 경의만 표할 뿐입니다. 우리가 지적인 관심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그저 "역사"이며, "전설"과 "설화"는 인문, 문학적 교양의 원천 이상이 아니라고 쉽게 봐 넘깁니다.

물론 신화를 그렇게만 활용하거나 이해해도,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유용한 문화적 자원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조상들, 혹은 다른 겨레의 선조들(아마도 현명하고 사려깊기까지 했을)이 남겨 준 알쏭달쏭한 이야기들은, 그저 듣고 나면 마음이 넉넉하거나 깨끗해지는 어떤 감동과 교화의 매개일 뿐이 아니었습니다. 신화는 우리 정신 깊은 곳에 자리한 남모를 특질, 개성을 파악하게 도와 줍니다. 게다가 신화는, 명확한 모습으로 채 기록되지 못한 아득한 옛적의 역사 몇 자락을 에두른 말로 일깨워주는 스승이기까지 하더군요. 이 책을 읽고 독자로서 까맣게 몰랐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엄청 많이 접했을 뿐 아니라, 고갱의 유명한 그림 제목처럼,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깊고 심각한 고민을 해 보게도 되었습니다.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미국-서유럽 중심으로 본격화하면서 우리 나라도 자신의 시원을 추적할 때 자연스럽게 남방계, 북방계 하는 혈통을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G, A, T, C 라 이름 붙은 이런 단백질 계열 분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절양장의 혼란만 가중하자, 지성계는 자연스럽게 더 익숙한, 그러나 소홀히 다뤄 왔던 신화의 영역 탐구로 그 방법론의 무게 중심을 옮기게도 되었습니다. 실제로 신화의 여러 화소(話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면, 민족과 종족 간의 근연 관계 같은 난제에서 의외로 쉽게 해답이 얻어지기도 합니다. 김헌선 교수님의 명쾌한 프레임 설정, 즉 무신론 대 유신론의 논쟁 중 에드워드 윌슨의 입장이 "신화의 해석을 통해 많은 난제가 해명 가능하다"라는 정리는, 꼭 도킨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 도구로서의 신화 탐구가 우리에게 얼마나 흥미롭고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 주는지에 대해 보다 후련한 설명이 되었습니다. 배설, 성관계, 혼인, 출산, 번식에 대해 각국의 신화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특히 아시아의 남방계 여러 신화에 대승불교적 요소가 어떻게 끼어들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지적이 유익했습니다.

경기도 오산 같은 곳이 독자적인 "창세 설화"를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독자로서, 박종성 교수님의 "시루말"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흔히 큰 활을 잘 다루어 "동이(夷)"족이라고 이름붙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비류와 온조가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 주무대가 되었던 경기 일원에 유독 "쇠로 만든 활" 화소가 널리 퍼져 있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오해와 왜곡이 끼어들기 쉬운 작위적 문자 풀이보다, 풍성하고 직접적인 아날로그의 향연인 신화, 그 이야기의 몸뚱아리에 무슨 무늬가 새겨졌는가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주도는 남방계 신화가 원형이 훼손되거나 다른 모티브와 타협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보고와도 같은 지방이죠. 사실 저로서는 그동안 할머니 등이 재미있게 들려 주신 이야기 보따리 정도로만 이들 설화를 이해했고, 그나마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습니다만, 이들 하나하나가 우리의 근원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될 소중한 신화라는 점을 강정식 소장님의 이 강연 기록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래 아 모음 발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주도의 방언은, 정확한 발음으로 읽힐 때 또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여러 신화의 개념과 이름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파트 뿐 아니라 다른 장에서도 아래 아 표기가 그래야 할 곳에서 각각 정확하게 이뤄져서, 강연자가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가 더 잘 와 닿았습니다. 장례와 같은 흉사를 시급히 처리하기 위해, 부자와 빈자가 차별을 두지 않고 제기(祭器)를 공유했다는 설명에서, 신화가 어떻게 종족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지 잘 배울 수 있었네요.

오키나와는 우리보다 규모가 훨씬 작긴 하나,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꾀하고자 여러 설움을 겪었던 동병상련의 역사를 공유하는 고장이기도 합니다. 마을의 탄생, 민족 시조의 남매혼(婚), 태양, 군주의 농사 지도 등 신화의 여러 모티브를 통해, 류큐 인(엄밀하게는 범위가 불일치합니다만)들의 심성과 심상, 이상과 좌절 등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일본과 그토록 오랜 동안 대립하면서 남방계 한 지류의 특징을 간직하려 애쓴 흔적을 보며, 우리와 어디가 닮았고 또 다른지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더군요. 꼭 지배국과 피지배국의 관계를 떠나, "국가"라는 독점적 폭력 집단이 인간 본연의 생존에 얼마나 해로울 수 있는지를 잘 깨우치는 게 그들의 신화였습니다. 이는 또한, 신화가 열심히 (정치적)현실과 소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덧입고 성장하는 좋은 예인 듯합니다. 반미 운동, 그리고 반일 운동의 한 중심에 서 있는 게 저들 오키나와의 사회 단쳬이며, 그들 신화의 새로운 의미가 구명되는 것도 이들의 노력 덕분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매장, 농경, 식인 등은 여러 지점에서 서로를 연결하며, 각국의 신화에서 공통점과 분기점을 형성하는 화소입니다. 인도네시아의 하이누웰레 신화는 이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의 신화들에까지 전면 재해석과 연계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소스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이 5강에서는 하이누웰레의 분석을 통해,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그리스의 크로노스 신화 등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모-친자-의붓딸의 오랜 갈등을 다룬 신데렐라 설화의 근원까지 파헤치며, 인류가 그 까마득한 옛적 어디서 서로 만나고 다시 흩어졌는지에 대해서도 건강한 영감을 자극하더군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을 넘어 세계적 성공을 거둔 데는, 그가 자국뿐 아니라 세계 신화의 본질을 꿴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이에서 우리는 신화라는 문화 유산이 단지 각 민족의 배타적 자산일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주고 꾸어 받은 공통의 보고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평화와 박애의 정신을 작품 속에 담아 온 그는, 신화야말로 바벨 탑 이래 말과 글이 서로 달라진 인류가, 아날로그식 소통을 통해 다시 한 아버지의 자식들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아고라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죠. 파편적 개념이나 부호의 교환으로는 형식적 화해에 그치는 게 고작입니다. 마음에 쌓인 걸 풀려면 "속을 탁 터놓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속"이 어떤지는 피상적 기계적 논리적 사고로는 자신의 사정도 알지 못합니다. 나를 모르는데 타인, 이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속"에 감춰진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 신화가 큰 도움을 줍니다. "신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와 나의 사연이 의외로 많이 닮았음을 깨우칩니다. 많이 닮은 우리가, 더 이상 누가 다르고 누가 틀렸다며 서로 싸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의 웹툰이 세계적 인기를 모으는 현실은, "아날로그식 이야기"가 가진 무서운 힘, 따뜻한 힘을 실감케 합니다.

"눈은 다른 것을 보지만,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라는 라틴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 문명의 힘을 입어 자연을 지배하고 효율적인 사회 제도를 만들었지만, 짐승과 인간의 경계를 막 넘어설 무렵에 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인종과 민족으로 편을 갈라 잔인하고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도 자신이 낀 패의 시원에 대해 거의 무지합니다. 이뿐 아니라, 나 개인의 무의식에 어떤 욕구, 원한, 상처, 만족, 죄의식, 감사함 같은 게 자리하는 지 거의 무시한 채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똑똑한 척, 모든 것을 아는 척 행동하고 착각하죠. 우리는 어리석은 선조들과 달리 현명하고 과오를 피해 가며 환경을 지배한다는 양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폐기해야 할 "신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얼핏 보아 엉성하고 모호한 이야기로 가득한 신화는, 우리의 한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우리의 현재가 어떤 색깔이고, 우리의 앞날이 어떤 방향일지 넌지시 일러 줍니다. 나의 조상이 결국 지금의 나 자신이며, 그 면면한 세월 동안 계승된 온갖 가능성과 잠재적 자질 중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묻은 채 지나쳤는지 가르치고 가리킵니다. 겸허히 나 자신의 근원과 질료를 더듬고 살필 때, 우리는 앞날에 놓인 문제와 장애를 더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화가 곧 인류 문명공통의 블루 오션"이며, "신화와 현실이 소통하고 서로를 살찌워야 문화와 사회의 앞날이 밝을 수 있다"는 진단은 실로 독자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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