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미래의 대이동
최윤식.최현식 지음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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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이 필요 없는 한국 미래학의 최강자 최윤식 박사님의 대담한 예측을 담은 새 책입니다. 그의 책은 언제나 최신 정보와 상황변화가 업데이트된 채 산출되는 예측을 담습니다만,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저서들에 뚜렷한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보통 미래를 내다보는 책들은 이 두 가지 미덕이 서로 trade-off 관계를 이루는 게 보통이어서 더욱 그렇죠.



1부에서는 "판의 이동"을 테마로 삼습니다. 최 박사님이 전혀 고려할 수 없는 사정이었겠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지진안전지대라 여겨졌던 한반도에 실제로 강진이 발생하여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떠는 일이 불과 며칠 전에 있었기에, 이 "비유"가 매우 피부에 와 닿기까지 합니다. 고체 상태에서도 "대류"가 가능함이 20세기 전반에 밝혀졌고, 오랜 세월 동안 충격이 누적되어 임계선을 넘으면, "판"들은 마침내 가장 약한 부위에서 지진, 화산 폭발 등의 재앙을 유발합니다. 최 박사님은 저런 비유를 써 가며(이런 대목이 여기뿐 아니라 곳곳에서 좀 길다는 게 독자로선 조금 불만이긴 합니다만, 저자의 박식함과 인문- 자연 현상의 통섭적 파악을 도모하시는 그 방향성 쪽으로 좋게 이해하기로 하죠), 지구촌에서 그간 아슬아슬 균형을 유지했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산업적 요인들이 드디어 누적된 모순의 폭발을 맞이하리라 예측합니다. 세상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할 때 흔히 "판이 바뀐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저자는 판구조론의 지구과학적 설명과 21세기 초반 문명의 대격변을 교묘히 연결시켜 독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셈이네요.



미- 중의 충돌을 설명하시면서 남중국해 논란은 큰 언급을 안 하시는데요, 여튼 최 박사님은 이걸 말단적 동요 정도로 봐 넘기신 것 같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 시스템의 실패를 만천하에 노정하면서 중-러가 대대적인 패권 도전에 나섰고, 저자께서는 전작들에서 이 점을 크게 짚은 바 있습니다. 미국 역시 그런 양국의 속셈을 잘 알기에, 특히 중국이 "더 크기" 전에 확실히 승부를 걸 마음임을 다시 지적하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리 밝은 전망을 내세우지는 않으시는데, 특히 내부 모순 중 빈부 격차, 도농 간 간극의 확대 등을 거론합니다. 지니 계수가 태평 천국 운동 시절의 그것을 능가하며, 이른바 루이스 전환점의 이슈를 꺼내면서 낙후된 농촌이 마냥 현실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다만 중국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엄청난 인구와 장차 서유럽- 북미를 압도할 경제력 성장 추세로 보아 더 이상 미국의 세계 패권이 이어지기도 어렵다는 쪽입니다. 하나 유념할 건 아시아를 어느 범위까지 단일 주체로 파악할 것인가인데, 책 조금 뒤에서도 언급되지만 인도와 중국 사이의 잠재된 분쟁 요소(수자원 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 역시 08년 금융위기가 매우 뼈아프게 노출시킨, 쉽사리 부정하기 힘든 이 시대의 위기 국면입니다. 책에서도 언급되듯 예컨대 아일랜드 감자 기근 사태처럼 탐욕과 착취가 절제의 지혜를 압도해 버린 비극적 구간도 있었지만, 많은 시간 동안 자본주의는 자체 혁신의 미덕을 발휘할 줄도 알아서, 특히 냉전 기간 동안에는 두 이념의 사이 좋은 보조를 유지해 온 면도 있었죠. 그러나 푸틴의 냉소적인 평가처럼, "지난 수십 년 간 쌓아온 수익을 한순간에 모두 날린 월 가는 이제 더 이상 그 자부심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관점이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가는 중, 한국이 맞게 될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있지만, 최 박사님은 언제나 변화의 홍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낙관주의의 기조지요. 다만 한국에게는 여전히 희망적인 변수보다, 크나큰 시련을 부를 조짐이 더 크게 보인다는 쪽입니다. 특히 2부 첫 장의 제목을 "기회의 이동 중(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계속된다"고 잡으실 만큼이네요. 미국의 금리 인상을 촉발점으로 삼아, 이른바 "다섯 개의 폭탄"이 연이어 터질 가능성이 매우 크며, 이 경우 한국경제는 끝을 모를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표현만 다를 뿐 가계 부채라는 시한 폭탄을 두고 조만간 정부(현 정부 말기 혹은 차기 정부 초기) 머리 위에 날벼락이 떨어질지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거의 일치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부동산에 방점을 두고(이쪽이 수적으로 더 우세), 어떤 이는 주식 섹터를 더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죠. 최 박사님의 진단은 그러나 "예측을 통해 리스크 요인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대위기의 파장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입니다. 합리적 기대이론의 한 결론 중에서도 충분히 증명되었듯, 치밀한 예측과 그에 따른 대응은 언제나 파국을 피해가는 집단지혜를 안출합니다. 최 박사님의 위기 진단은 이런 가계 섹터(다른 전문가들도 하는 이야기니까)보다 기업 쪽을 향해 한 말씀 하시는 게 큰 울림을 빚는데요. 이 2부보다는 뒤쪽으로 가야 좀 "쎈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 책의 표지를 보시면 영어로 "Exodus of Opportunity"란 글자가 나옵니다. 기회의 엑소더스! 한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기회가, 이제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와 다른 "준비된" 플레이어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다는 거죠. 박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기회는 "산처럼" 많다는 겁니다. 하긴 불확실성의 증대가 기득권을 위협하고, 기민하게 사태를 관측한 이들에게 큰 이익을 안기는 패턴은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나 발생해 왔죠. 박사님은 앞서 "우리에게 특히 위태로운 변수, 상수"가 도사림을 지적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역시 총체적으로 "기회의 산"을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최근 쏟아져나오는 "4차 산업혁명", "증강 현실" 등의 키워드를 단 여러 서적에서 거론하는 갖가지 첨단 산업의 부상을 최 박사님도 하나하나 짚으시는데, 그 중 저자께서 특히 주목하는 부문은 자율주행, 대체에너지 개발을 앞세운 자동차 산업인듯 보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역시 최박사님 다운 대담함, 거침없음이 돋보인 대목이 "테슬라를 과연 현대차(아님 삼성이나 LG라도)가 샀어야 했는가?"에 대한 똑부러지는 해답이었습니다(많은 이들은 아마 이런 질문, 이슈, 아젠다가 있었는지를 모를 겁니다). 실제로 엘론 머스크가 아직 입지가 단단하지 않을 때 간을 보러 한국에도 왔었고, 최 박사님 생각은 "그때 그가 분명히 팔 생각이 있었으며"(이렇게 잘라 말하시는 그 확신이 진정 놀랍네요), 앞으로도 그는 점점 베팅액을 높일지언정 구매자를 물색하고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는 "머스크는 그렇게 비전 좋은 회사를 왜 키우지 않고 팔려 드는가? 팔 의향이 없든가, 아니면 자신의 평소 주장과는 달리(책도 많이 썼죠) 미래자동차에 대한 구체적 전략이 부족한 것 아닌가?"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떤 영리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도, 항상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상황 봐 가며 가능성을 열어 두는 법이죠.



독자로서 최박사님의 진단과 예측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며, 예컨대 "가상국가vs 현실국가" 같은 프레이밍은 그 설명력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 장벽이 2030년까지 해소되며, 그 즈음에 뇌 구조가 다 해독되리라는 전망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기술적 난관이 한둘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제퍼디 쇼"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챔피언을 이긴 사건도 벌써 5년이나 지난 토픽이며, 그이후로 의미있는 진전이라면 몇 달 전 알파고의 대국이겠는데 이 역시 그 효과를 더 신중히 지켜 볼 필요가 있죠. 하지만 최 박사님의 책에서 가장 생산적으로 취할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이런 격변하는 추세 속에서 개인들이 어떤 전략으로 미래를 맞을지에 대한 자상하고 성의 있는 충고입니다. 학자들의 모든 예측이 다 실현되는 건 아니며, 일부는 정반대의 결과에 직면하기도 하죠. 그러나 미래의 유력한 예측들과 전망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방향으로 대비를 한 사람과, 마냥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선택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판이 송두리째 바뀌고 기존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 지금, 역으로 엄청난 기회의 산이 우릴 향해 달려 오는 중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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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풍의 진앙지 일본 가와치 河內 일본에 남은 문화강국 백제의 발자취 1
양기석.노중국 외 지음 / 주류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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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고대사 그 바른 내역에 대해서는 워낙 기록이 불충분하게 남겨진 까닭에 누구라도 논쟁의 고비에 확언 정설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학자 모두가 열린 마음 공정한 자세로 겸손되이 진리를 탐구해 나가야 할 텐데요. 이런 학자적 양심을 기대하기에는, 근래 일본이 너무 막나가는 태도를 취하기에 뜻있는 이들의 우려가 매우 큽니다. 우리 겨레가 각별한 마음가짐으로 선조들의 노고와 유산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 빛나는 자취란 그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한류 열풍의 진앙지"라는 어구를 제목 일부에 쓰는데요. 완독한 후 이 표현이 책 내용을 정확히도 짚어내었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 말에서 "소녀시대나 카라의 활동상"이 혹시 오사카 일대에서 재조명되는 내용인가 잘못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대사, 특히 일본이 아직 야만과 무지몽매의 늪에서 채 못 벗어날 시절 우리 조상들에게 문화적으로 진 빚의 깊이와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었습니다. 한국의 연예인들이 열도에서 맹활약하는 모습도 물론 자랑스럽지만, 이 책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한 단면은 우리가 과연 이렇게 태만히, 덜 각성된 후손으로서 몰역사적 의식을 이어가도 되는 건지, 심각한 자기 반성을 촉구하더군요.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로는 불충분한, 근본에서부터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집니다.

일본 고대사는 구석기- 죠몬- 야요이 - 고훈 시대로 대개 구분됩니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시대가 저 중 마지막 단계인 고훈[古墳]기(期)이겠는데요. 거대한 무덤의 출현은 곧 계급 사회의 도래를 선포하는 상징이나 다름 없기에, 이 시대를 향한 분석은 일본 열도의 사회 구조가 어떤 심대한 변화를 맞이했는지 중요한 암시를 어떤 방면에서도 던져 줍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지배 - 피지배층이 본격 분화할 때, 문화적, 제도적, 의식적 면에서 적지 않은 공헌, 최소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 바로 "도래인"들이었습니다.



"도래인"들이라는 용어에 대해, 최근에는 이 말이 "일본 중심"의 시각을 전제로 한다는 지적이 있어 "도왜인"으로 바꿔 쓴다는 설명이 책에도 나옵니다. "왜"는 특정 시기, 그저 지역과 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뿐이니 어떤 비하의 의도는 없는 셈이죠. 이 책은 그래서 "텐노[天皇]"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당시 이르던 대로 "왜왕"으로 일관합니다. 이것이 올바르며, 당해 호칭이 쓰이지 않았을 때에까지 모두 소급 적용하는 저쪽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지요. 참고로 이 책은 "고훈[古墳]"에서처럼, 일본어 어휘의 보충 설명에서는 꺾은괄호를, 한국어 한자음 뒤의 병기에서는 일반 괄호를 씁니다. 행여 일본식 독음을 한국어의 그것과 같은 위상으로 둘 위험을 배제하려는 사려 깊은 표기법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시대로는 고훈 기, 지역적으로는 오사카 일대, 그 중에서도 가와치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의 활발했던 외교, 정치, 군사, 문화 업적상을 주목합니다. 지금까지 막연히 "조상"으로 칭해 왔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당연 삼국 중에서도 "백제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교근공의 논리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 또 그의 속국 비슷한 위상의 신라(일단 4세기 기준)를 견제하기 위해 바다 건너 왜의 군사력을 특히 탐냈는데요. 왜 역시 고구려의 강력한 위협, 인접 신라와의 잦은 분쟁 때문에 일단 군사역학 상으로도 협력이 시급했습니다.



먼저 접촉과 교린을 시도한 건 백제였는데, 이 때문에 지금도 일본인들은 얼토당토않게도 이를 "문화 노예" 정도로 왜곡, 비하하며, 상국의 위치에서 공물을 거두었다는 등의 낭설, 억측을 일삼죠. 하지만 백제는 영리하게도 인구가 많고 물산이 비교적 풍족했던 왜의 1차 자원을 이용하려 들었던 것뿐이며, 왜의 무력이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거나, 고구려, 신라 등과 파트너 체인징을 시도할 국면에는 지체 없이 교류를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사정이 급한 건 대개는 왜 측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훈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계급의 분화가 가속되었는데, 지배층으로서 하층민들을 향해 위신을 세우려면 세련된 문화의 향유를 과시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6세기부터는 열도에서도 불교 문화의 본격 도입이 이뤄졌는데, 왕실이 항구적으로 신민의 복속과 유연화를 이루려면 이런 고등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그 심리의 기층 저변을 통제할 필요가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백제 문화는 열도의 그것보다 외관, 성능, 미학적 가치, 심미적 만족 등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에, 심지어는 숙어적 표현으로 "쿠다라나이" 같은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산물이 아니면 질이 낮아 시시하다"는 뜻이 담긴 이 표현은, 열도의 지배층이 백제로부터의 문화적 세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왜왕은 살아서 백제 문화의 숭배자를 자처했고, 죽어서도 묘지를 그런 뜻에 맞게 조성한 후 묻히기를 바랄 정도였죠. 백제의 문화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람은 남 위에 설 자격이 더 갖추어졌다고 통념이 생겼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또한 불교는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그저 추상적인 신앙으로서 퍼진 게 아니라, 의식과 예배와 교리와 성직자가 혼연일체를 이루는 패턴이었죠. 이른바 삼보(三寶)는 불- 법 - 승을 가리키는데, 초기 백제는 이 불교 문화를 전해줄 때 승려의 파견은 누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두고 이 책에서는 "이미 널리 불교를 수용하려 든 현지(왜)의 실정을 감안"했다고도 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백제의 전략적 고려도 작용한 바 있겠음을 우리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죠. 아무튼 지금도 일본 국민의 40% 가량이 불교 신도임을 감안할 때, 고대 백제가 일본에 다져 준 문화의 기틀이 얼마나 아득한 역사를 갖는지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 특히 백제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은 이런 문화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인적인 교류가 직접 이뤄진 부분도 큽니다. 오사카, 특히 가와치 일대에 사는 현대의 일본인 상당수는, 그 조상을 실제로 한국계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유,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집단 이주를 일본에 도모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河內라 쓰고 가와치라 읽는 건 그 깊은 사연이 따로 있다는 거죠. 책은 특히 "고훈 시대",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들(지배층의 위신을 드러내기 위한)이 하나같이 백제 양식을 모방하여 조성된 그 추세에 주목하면서, 이런 물적, 인적인 "한류 열풍"이 얼마나 뿌리 깊고 항구적으로 일본 문화(그렇게 부를 만한 게 있기나 했다면)에 영향을 주었는지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유적과 문화재, 언어적 흔적들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그 실상을 왜곡하며 막무가내로 우겨대던 건 심지어 고대사의 한 국면에서도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송 황실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 왜국의 수장을 백제, 모한(=마한), 신라 등의 지배자로까지 책봉해 달라며 억지를 썼다는 거죠. 이런 주장은 당대인들, 혹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정치 단위 중 왜국인들 말고는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 망상이었습니다. 다만 한반도가 그들의 이런 방자한 태도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던 건 그저 무시해 버릴 만한 망동이어서이기도 하겠으나,근본적으로는 삼국이 분열했던 정치적 취약성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겁니다. 조상들의 찬란한 위업을 돌아보며, 우리 후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본분을 다하는 중인지, 진지한 역사의식의 각성과 분발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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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3
김창회 지음, 강윤정 그림,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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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없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의 세계를 무대 위에 마음껏 펼쳐 놓고, 자신과 같은 시대 청중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작가, 예능인이었다는 점에서 융합인재의 첫손에 꼽힐 만합니다. 표현과 비유가 천재적이었다는 사실은 단지 말재주의 세련되었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물과 관념을 그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알았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풍성한 색깔을 띤 언어로 가르칠 수 있었다는 뜻도 되죠. 신기하게도 셰익스피어는 아직 근대 영어가 제 모습을 갖추기 이전의 꼴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현대 영어 원어민들이 (고어[古語]에 대한 지식 없이) 읽어도 그 생동하는 활기와 천재적 영감이 주는 전율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널리 읽히고 여전히 사랑 받는 모습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과연 현대적 의미의 창의인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도, 이런 이유에서 셰익스피어는 닮고 싶은 인재의 대표, 모범이겠지요.



주희도 격물치지(사물과 자연, 인간 사는 모습을 연구하여 그로부터 진리를 깨우침)를 강조했습니다만, 어린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퍼드(온 에이번)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성장하며, 풀밭에 날아다니는 풍뎅이의 모습 하나에도 그에 알맞은 표현을 떠올릴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고 이 책에 나옵니다. 우리도 큰 인물은 도시 아닌 시골에서 성장해야 감수성이 자극 받고 다양한 상상력을 어른이 되어서까지 지닐 수 있다고들 하죠. <한여름밤의 꿈> 등에 나오는 다채로운 표현은 이런 어린 시절의 자극으로부터 든든한 창작 소양을 갖추게 된 보낸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솜씨라는 게 저자님의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한 방식으로 아들을 가르쳤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분뿐 아니라 이 시절 잉글랜드의 많은 부모님들은 그런 식으로 애들을 키웠다고 하는데요. 윌리엄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은 "문법 학교"에 입학시켜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합니다. <좋으실 대로>에 보면 마치 달팽이가 기어가듯, 마지못한 태도로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 있는데, 이게 아마 이 시절 자신의 추억을 회고하며 창작에 반영한 게 아닐지 하는 작가님의 추측이 책에 나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엔 다시 "킹즈 뉴 스쿨"에 다녔는데, 여기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 어 등 유럽의 고전 문학에 접할 필수 수단일 여러 언어를 배웁니다. 라틴어는 그저 과거의 문예가 기록된 언어일 뿐 아니라, 그 엄정한 문법과 체계적인 어법을 배우면서 말과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표현이 기발한 것 외에도, 고급스럽고 규범을 (알고보면) 정확히 지키는 양식적 우월함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린 윌리엄은 특히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해석할 때 반에서 가장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이 때문에 젠킨스 선생님으로부터의 칭찬이 자자하군요. 삽화를 봐도 총명한 그의 모습이 잘 나와서 보는 독자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친구와 하굣길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윌리엄은 커서 훌륭한 극작가가 될 꿈에 부풉니다. 친구는 걱정이 되어 이렇게 말하네요. "그렇게 책을 많이 읽다 머리가 터지면 어쩌려구 그래?" 으악! 다행히도 셰익스피어는 머리숱이 좀 적어지는 정도에 그쳤지만 말이죠. 작가님의 말에 의하면, 어린 윌리엄은 그저 신화나 고전 속의 이야기를 즐겼던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생각, 생활 방식, 가치관" 등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할 줄 알았다는군요. 훗날 셰익스피어가 희곡 속의 인물 그 성격 창조에 대해 탁월한 솜씨를 보인 건 모두 이 시절의 깊은 생각과 교육의 덕분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네요.

여기서 작가님의 말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존재하는 지식을 상황에 맞게 고치거나, 다른 분야에 적절히 응용할 수 있다면, 그런 어려운 일도 척척 해 낼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지요." (p53)

셰익스피어는 가게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많은 직종, 직업의 사람들을 접하고 그들이 쓰는 언어 습관, 행동의 특징을 눈여겨 관찰했다고 합니다. <베니스의 상인> 등에서 그가 그처럼 법률 용어와 관행, 제도의 운영 원리를 잘 알고 작품에 배경으로 적용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가 컸다고 하는군요(법률가, 혹은 송사에 휘말린 손님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경청함). 꼭 천재라서 이런 재능의 계발이 가능했다기보다, 주어진 시간과 집중력을 알차게 사용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할 수 있는 창의융합인재의 길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봐요 젊은이, 연극이 어린애 장난인 줄 아쇼?(극장을 처음 찾아온 셰익스피어에게 어느 단원이)" (p61)
"여봐, 극장이 너무 더러우니 정리 좀 해 주지 않겠나?" (p63)
"뭐야, 저 얼굴 좀 봐! 벌게진 게 꼭 으깬 토마토 같지 않나? 하하하 (대사를 잊은 초보 배우인 그에게 관객들이) (p66)

이처럼 배우로서 셰익스피어는 무대에서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대사를 까먹는 등 초보 시절 부족한 점도 너무 많았다네요. 그러다가 단역, 조연 배우로나마 차츰 자리를 잡아갔는데요. 이때 그의 뛰어났던 결단이라면 "다른 영역"에도 눈을 돌릴 마음을 과감히 먹었다는 점이겠습니다. 확실히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그 고비에선, 학벌이라든가 인맥이 경험 없는 젊은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는 이른바 "대학 재사(university wits)"라고 해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 명문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인재들이, 셰익스피어 같은 저학력 경쟁자가 나타나면 조소를 퍼붓곤 했다는 일화도 나와 있습니다. 창의인재의 꿈도 좋지만, 학과 공부도 열심히 병행해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곤란을 겪지 않는 것도 때로 필요할 것 같아요!



"이보게, 오늘 공연도 매진이야!"
"관객들이 소리 지르고, 울고 웃고, 아주 반응이 대단했어!" (p74)

이처럼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능을 갈고닦았던 셰익스피어는 불과 스물 여덟의 나이에, 극장가 최고의 스타 극작가로 대중 사이에 각인됩니다. 이때 로버트 그린이란 문인은 "우리들의 깃털로 아름답게 치장한, 벼락출세한 까마귀"라며 호되게 셰익스피어를 비난했는데요. 이런 태도는 어린이들이 본받아선 안 되지만 왜 그렇게 엘리트 그룹이 그를 싫어했는지 책에 실린 그린의 원문을 읽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어요(설령 온당치 못한 이유라고 해도).

흑사병의 유행, 연극계에 대한 정부의 탄압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집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성공, 창작 소네트가 (특히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받은 열띤 호응 등으로, 이제 그의 앞날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죠. 리처드 버비지, 윌리엄 켐프 등과 협력하여 로드 체임벌린즈 멘 극단을 크게 키운 그는, 이제 경영인으로서도 여왕에게 인정 받는 두드러진 거물이 됩니다. 여기서 작가는 그를 가리켜, "많은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평가합니다. 이 역시 창의융합형 인재상과 통하는 부분이죠.

이런 그에게도 작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으니, 아들 햄닛(Hamnet)의 때이른 죽음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술집에서 서로 크게 다투는 젊은 극작가(이제는 그가 이런 젊은 인력들을 건사하고 육성해야 할 위치가 되었어요)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연극이나 문예로서의 각본이 추구해야 할 바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크게 고민합니다. 이런 고뇌의 산물이 바로 그의 커리어 후반에 창작된 여러 비극들입니다. 희극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지만, 생의 본질과 영혼의 심연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비극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님의 결론은 이거네요. "경험과 관찰을 결합시킨 창의력". 확실히 그의 작품은 일찍이 대중 문예, 본격 문학이 짚거나 꿰뚫지 못했던 여러 국면을 생생히 잡아내었고, 말년에는 기교를 떠나 주제와 극 전개에 있어 여태 없던 성숙함과 심오함까지 보였습니다. 벤 존슨의 유명한 애도사로 책은 마무리되네요. "나의 셰익스피어여 일어나시오! 그대는 한 시대의 인간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속하는 위인이었소."

세익스피어의 시대에 대한 친절한 설명, 어려운 말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나오는데다, 여러 도판에 대한 출처까지 다 달려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창작 일러스트가 더 비중이 높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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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아워 - 우리가 언젠가 마주할 삶의 마지막 순간
케이티 로이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모든 시작에는 그 끝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대사가 다시 짚어준 진리가 꼭 아니라도 인간은 이미, 한 번 있었던 자신의 출생이 언젠가는 "죽음"으로 대칭적 마무리를 갖는다는 걸 알고들 있었죠. 아직 젊었을 때는 자신의 청춘이 영원히 이렇게 이어질 줄로만 기대합니다. 이 책의 저자께서도 냉소적으로 표현하듯, 그러나 그런 헛된 믿음은 대개는 거울 한 번의 응시만으로도 흔들리겠는데요(예외도 있지만). 우리가 딛고 선 평면, 차원 외에 지평선 저 너머에 몸을 숨긴 진리를 묵시(reveal)한다고 믿어지는 뛰어난 작가들, 혹은 위대한 지성들은, 이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자신의 것들을 그 최후의 순간에 맞이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도 나오지만, "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란 인간의 영혼이 죽음 즈음에 체감하는 그 아득하고도 무섭고, 신비로우면서도 영원에 닿을 듯한 그 주관적 시간을 뜻합니다. T S 엘리엇의 長詩 <황무지>에 나오는 표현이죠. 죽음의 영접을 혹 색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제비꽃과 같은 빛일까요? 그럴 법하다고 여긴다면 평소에 진지한 생각을 해 본 분일테고, 모르겠다는 답이 나온다면 아직 나이가 어리거나, 생에 대해 그리 진지한 태도를 안 가져 본 분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죽음은 그로부터 환영을 받건 말건, 제 때가 되면 찾아가는 손님이죠. 우드로 윌슨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토머스 마셜은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례식에서 이런 弔辭를 했습니다. "죽음은 그가 잠든 동안 찾아와 영원으로 안내했으니, 이는 혹 그가 깨어있었을 시 벌어졌을 법한 다툼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성질 드센 이라도 사신과 싸워 이길 수는 없음을 잘 표현하는 일화입니다.

사신이 와서 갈 길을 청해도 쉽게 따르지 않았을 것만 같은 이들 중의 하나로 대뜸 떠오를 만한 위인이 정신분석학의 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인데, 마침 작가님도 책의 첫 주제로 이 사람의 죽음 그 즈음을 다룹니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비범한 두뇌의 활력, 명철한 지성, 거의 독재자에 가까웠던 고집과 의지, 독선적 성품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 편이었죠. 이런 분이 만약, 낯선 죽음이 이제부터 친구 하자고 찾아오면, 그리 고분고분 교류에 소통에 응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종양(구강암) 때문에 말년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모르핀 기타 진통제의 투여를 일절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프랑스 어느 문호의 모 작품(그가 그 무렵 읽던 중인)에 나오는 묘사대로, 행여 자신과 같은 대 지성이 약물의 효과 때문에 정신이 다소라도 흐려지는 지경까지 가는 걸 거부해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그 작품의 영향이 아니라도, 의사인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외인(外因)적 처방의 손에 조금이라도 넘겨 주지 않으려 한,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그 자신의 주인이고 싶어 한 집념의 소산이라 이해하는 게 온당하고 공정하겠습니다.

수전 손택은 이른바 "대중 문화의 퍼스트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평론(그 자신은 평론의 가치를 높이 두지 않았지만)을 이끈 참여형 지식인입니다. 2004년 타계했을 때 한국에서도 그녀의 저작들이 새삼 주목을 받았을 만큼 지명도가 높은데요. 권력과 미디어가 때로는 헛된 명분, 때로는 더러운 사익 추구를 위해 날조하는 거짓을 그리도 몸서리치며 혐오, 배격, 고발한 그녀였지만 역시 연약한 육신을 지닌 인간에 불과했는지 자신의 건강과 영혼의 평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주관적 환상을, 특히 말년에 갈수록, 지어내면서까지 선호했던 편이었다고 합니다. 웬만해서는 사후의 상태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는지, 지인의 안내로 불가의 교리도 접해 보았지만, 당찬 그녀 답게 대뜸 나온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참 매력적이더라고, 하지만 내겐 그 가르침들이 헛소리에 불과했어!" 그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을 때 이처럼 힘없이 고백하기도 했다는군요. "언제나 운이 좋았던 나지만, 이번에는 행운이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말들에서, 재능 있고 그 재능에 자부와 확신을 가졌으며 자신의 의지로 세파를 헤쳐 나간 이들의 공통된 attitude(생전의)가 보이는 것 같네요. 손택의 간병인 중 특히 친했던 피터 페론을 저자가 직접 만나 증언, 회고를 받아적어서 이 파트가 특히 역사적 가치까지 유지합니다. 애써 죽음의 공포를, "신화"까지 만들어 회피한 그녀의 심리에는 비교적 어린 시절 부친의 죽음을 목도한 그 기억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짐작합니다.

어떤 소설가들은 편집, 강박, 자기 도취 등 별의별 괴벽을 끝까지 지키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의 재능은 신의 선물인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면 어쩌지?" 헤밍웨이도 그러했고, 작가는 아니지만 정치적 시인이었던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평전을 읽고 리뷰도 썼던) 무함마드도 그런 타입이더군요. <달려라 토끼>로 유명한 존 업다이크 역시 갖가지 자기만의 강박과 습성에서 안 빠져 나오려 애쓰고, 그런 모습이 더 화제를 탄 소설가인데요. 이 사람은 이언 매큐언과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짐짓 과장된(그로써 타인에게 위안을 받으려는) self-pity를 드러냈는데, 이게 다 자기애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죠.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여성과의 성행위가 작가로서 자신의 소양, 영감 등에 특별한 원천이 된다"고 진심으로 믿었으며, 이런 취향, 생활 태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기까지 하여 일각으로부터 빈축을 샀습니다. 책에 인용된, 그 자신의 회고록 <자의식> 중의 유머러스한(이게 유머가 아니라면, 모럴에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 어느 문장처럼 "명철한 의식을 얻기 위해 카를 바르트를 읽고, 다른 남자들의 아내들과 사랑에 빠진"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정신의 선도를 유지했죠(전 처음에 롤랑 바르트의 오타인 줄).

특히 시인들은 그 격정적 기질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딜런 토머스는 이 책에서 표현하는 대로 "스무 살의 나이에 정말 혜성처럼 문단에 데뷔한" 천재 시인이었죠. 그가 체질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탓도 있겠지만, 시사주간 <타임>이 노골적으로 지적했듯 그는 (요즘 정확히 개정된 용어대로) 알코올에 의존하는 정도가 지나친, 시인의 오랜 원형 중 나쁜 전통을 불운하게도 이어받은 케이스였습니다. 폭포처럼 솟아나는 영감과 눈부신 표현력으로 주위를 황홀하게 만들 줄 아는 재능을 가진 그였지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만은 병적인 강박처럼 혐오한 이중성도 드러냈죠(찾아오는 여성들은 구태여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과연 그 남편에 그 아내라 할 만큼, 서로에게 운명의 배우자였던 케이틀린 맥나마라 역시 미친 듯 똘똘뭉친 자기애로 남편의 그것과 한번 충돌했다 하면 답이 없는 싸움으로 이어졌죠. 여튼 딜런- 케이틀린 부부의 기묘한 부부관계는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그것에 비길 만큼 열정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는 게 매순간 전쟁이고, 그 격정의 폭발 순간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둘 만큼 지치고 예민했던 그의 정신을 생각하면.

<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한국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진 동화작가 모이스 샌닥은, 독자로서 저 역시 모르고 넘어갔지만 4년 전에 타계했다고 책에 나와 있네요. 명작 동화들이 흔히 그렇지만 그의 작품도 마냥 아름답고 가공된 꿈과 이상으로 부푼 작품 세계가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해 가르쳐 줘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작품을 통해 표현된 결과겠는데요. "어른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아이들을 그만큼 더 좋아한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겠습니다." 이처럼 유보적인 태도로 동심을 옹호한 그는, 죽음을 가장 멀리하고 싶은 심리에서 인생의 그런 시기를 막 지나치는 중인 아이들의 마음에 침잠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순간 반대급부라든가 치러야 할 시험이나 되듯 죽음을 의식한 사람이었는데요. 생(개인적 생이든 보편 개념으로서든 간에)에 가득한 수수께끼와 충돌 지점, 혐오스러운 요소들과 싸우는 걸 아예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두려움과 원망도 그치지 않았던 좀 특이한(특히 앞의 네 사람과 대조할 때) 경우 같습니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야말로 죽음의 필연성과 위력에 압도되어, 애써 (고작) 현세의 괴로움으로 그를 잊으려 드는 우리 모두의 나약함을 그대로 대변하는 정직한 정신의 몸부림과 순응이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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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음 맑음 - 지치고 힘든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시간
마스노 슌묘 지음, 오승민 옮김 / 생각정거장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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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수도에 정진하신 스님이라면 그 나오는 말씀이 참 예사 경지의 산물이 아니다 싶은 게 많습니다. 이 책도 참 평범한 이야기 같은데 읽어 나가면 그렇지가 않고, 치열한 직장 생활을 해 보신 적도 없을 텐데(여러 대학에서 환경 디자인학 교수직을 맡고 계시긴 합니다) 어쩜 이렇게 월급쟁이들 마음을 잘 알고 다독이시는지 신통하다 싶었습니다. 꼭 직장인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며 상처 받은 이들 그 생채기를 어루만지는 데 정말 능하신, 그저 노하우를 잘 아는 게 아니라 세상의 숨은 이치, 모순, 문제의 발원을 훤히 꿰뚫으신 달인의 토로이자 가르침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더군요.


마스노(枡野) 슌묘(俊明)라는 이 저자 스님의 함자는 개인적으로 처음 들어 보는데요.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은 스님들에게 법명을 쓰게 하는 게 관행입니다만 이 저자께서는 그대로 속명을 쓰시는 듯합니다. 정원을 가꾸는 자세란 곧 내 마음의 잡풀을 제거하고 온갖 속세의 번뇌와 탐욕, 하잘것없는 집착을 뿌리채 정리하는 그 태도와 통합니다. 인간이란 결코 환경과 유리되어 살 수 없고, 인간을 낳고 품어 준 자연과 적대할 때 인간의 생존마저 위태로워지는 게 자명합니다. 스님께서는 환경에 적응하고 이를 보존하며 그 가장 소중한 고갱이를 돌보고 가꾸는 노력을 통해, 세상에 사람이 모여 사는 가장 깊은 원리를 깨닫고 이를 가장 쉬운 말로 어리석은 대중에게 설파하시는 스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말 회사원들과 많이 접촉하고 그들의 애환을 들어 보셨는지, 유독 이 책에는 그들을 염두에 두고 설복하시는 말씀이 많습니다. 할당량을 반드시 납기에 맞춰 조달하는 건, 특히 대기업을 상대하는 많은 중소기업 사원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과업일 것입니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마냥 속이 편한 건 아닙니다. 독촉하면 갑질한다고 뒷말이 나올테며, 납기가 늦어지면 일단 깨지는 건 담당자 자신이기에 남의 회사 사정을 자애롭게 고려할 처지가 못 됩니다. 그런데 스님은, 비단 자신의 회사 입장에서만 살펴도 품질을 무시한 기계적 할당량 달성은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화한 후 폐허의 앙상한 잔해처럼 다가올 "미션 완수"가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겁니다. 이게 현실에 맞지 않은 한가한 도리의 설법이라고 생각되시면 다음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이 파트 말고 책의 좀 뒤를 보면, 아무래도 스님이신 이상 장례식장에서 일정 역할을 맡아 주십사하는 촉탁이 많이 들어오는가 봅니다. 그것 관련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본 유수의 대기업 이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광범위한 인맥을 쌓고 업계를 호령하던 분이기도 하고, 그 풍채도 권위 가득한 모습이라 언제나 주위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런 분이 갑자기 타계하니, 유가족들이 많은 문상객들을 갑자기 맞을 걱정에 여러 채비가 많았고, 스님께도 각별히 당부하는 바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막상 조문객을 받으려 하니, 첫 몇 시간에만 줄이 이어졌을 뿐 오후부터는 사람이 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융숭한 예식을 다 갖춘 상가에 정작 조문이 뜸하니, 유가족이 상심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스님 자신이 민망해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는 거죠. 반면 늙은 나이까지 말단에서 근무하다 생을 마감한 다른 어떤 분은, 비록 차림은 빈한해도 "생전에 이분께 은덕을 입은" 이러저런 많은 문상객들이 성의를 보여 그 가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더 보람된 생을 살다 간 걸까요.


"불교식 사고방식에 양자택일은 없다." 저자의 아주 의미 깊은 말씀, 가르침입니다. 많은 직장인들은 소위 "책상을 뺏기고"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지금까지 맡아 오던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발령나기도 합니다. 대체로 능력 없는 이들, 사고를 치던 이들, 무사안일로 나날을 때우던 잡된 직원들이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겠으나, 개중에는 억울하게 밀려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때 스님은 "이것 역시 나쁘지 않고, 당사자가 즐겁게 혹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운명"이라고 가르칩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게 이분법 사고인데, 불교에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건 모든 게 동등하다는 태도입니다. 하긴, 나와 타물(他物)도 본디 분별이 없는 법인데, 자신이 처한 운명 역시 좋고 나쁜 고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관련 법사께서는 "대지황금(大地黃金)"이란 법어도 들려 주시는데, 자신이 밟고 선 누런 땅이 바로 복된 곳이라 생각하면, 황금덩이를 깔고 사는 이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읽고 나서 참 지당한 이치라며 수긍이 되었네요.


"유연심"을 가지면 "선입견"이 없어지는데, 이로서 무한한 가능성이 싹튼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흔히 "저건(혹은 저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다."는 말을 즐겨 하죠. 혹은 내 가치관에 현저히 미달하는 질 낮은 아이템(혹은 사람)이라며 폄하하기도 일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며 마주할 갖자기 선택의 순간에서, 당사자가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가는 무수한 가능성이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런 잠재한, 그리고 간과한 선택지 중, 나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 놓을 만한 보석 같은 옵션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물과 모든 인연은 (다시 말하지만) 나쁘고 좋은 품질의 차가 없고, 모든 형량과 분별이란 마음 먹기에 따라 결과가 딴판으로 바뀌는 법입니다. 마음의 벽을 헐면 모든 이가 나의 이웃이요, 나의 형제고 부모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는 이가 회사 일이라 한들 척척 못 해낼 리 없고, 상관이나 오너가 시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은덕을 조직에 베푸는 셈입니다.

임운자재. 참 불교의 가르침에는 좋은 구절이 많습니다. 사람이 애쓰고 버둥거려도 안 되는 일이, 그 나름의 운수와 정해진 바가 있어서 스스로 풀리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어르신들, 간부들이 종종 따끔하게 놓는 한 마디가, "요즘 젊은이들은 멘탈이 약해."입니다. 그런데 스님은 이미 기성 세대이시면서, "젊은이들은 너무 악착 같이 살 필요가 없다"고도 일깨우시네요. 때로는 모든 업무에 작은 틈을 주며 쉬어가는 게, 일의 여운을 주어 전체 과업이 잘 풀리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어제와 오늘이 한결같게 느껴지는 권태"야말로, 정신이 죽어가는 징후임을 지적하며, 당신에게 주어진 날은 그 어느 하루도 같은 시간이 아닌 축복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긴장과 강박은 다른 것이며, 성실과 집착 역시 다른 범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이를 준별하는가. 마음이 바른 곳을 보면 가능하겠습니다. 그 마음이 깨끗해지려면, 먼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독기를 품고 때로는 절망한 듯한 그 얼굴들을 편견 없이 봐야겠습니다. 그 얼굴들에서 내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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