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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7
루 월리스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6년 9월
평점 :
아마도 많은 어르신 세대에게는 (요즘 말로) "인생 영화"나 마찬가지인 작품이 1959년작 <벤허>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여튼 청교도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어지는 미국에서는 크게 흥행에 성공하고 격찬 받은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도 인구가 절대 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한국에서까지 그만큼 호응이 좋았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관람해도, "과연 그럴 만하다"는 게 세대를 초월한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확실히 저 고전 영화는, 감동적인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매우 영리한 전개를 취합니다만, 그런 기술적 분석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신비스러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지닙니다.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완성도를 달성한 저 대작을 한번 보고 나면, 그 영화가 원작 소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사람도, "혹 영화를 본 감흥이, 소설이 취하는 설정상의 부분 차이 때문에 깨어지지나 않을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펴길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19세기풍의 장편 소설이란 외관이, 그 분량의 위압감, 표현 개성의 이질감 때문에 현대의 독자를 지레 밀어내는 면도 없지 않거나 말이죠. 사실 윌리엄 와일러의 저 명작이 워낙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 때문에, 그 총체적 감흥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다른 매체를(그게 원작 소설이라 해도) 구태여 파고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저렇게나 강렬한 영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명작의 원동력이, 꼭 감독의 연출 솜씨나 배우들의 연기, 혹은 각색 단계에서의 재해석 센스, 뭐 여기에만 그 출처가 있지 않으리라 믿는 분들은, 이 오리지널 장편을 꼭 읽어 보시길 추천 드리고 싶어요. 이 장편은, 그저 "영화 <벤허>의 원작", 그 이상의 문예적 깊이와, 작가의 경건하면서도 치열한 성찰의 결과, 성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영화와는 어쩌면 별개로 자신의 영성을 튼튼히 다지는 데 멋진 컴패니언을 하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와 이 "원작" 소설은 전개와 설정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몇 가지만 좀 짚어 보면,
영화에서 선량하기 그지 없는 명문가의 모녀가 그토록 참혹한 운명을 맞은 데 대해, 많은 관객들이 사정 없는 비판을 메살라에게 가하는 게 흔한 반응이며, 또 지극히 당연하죠. 저는 와일러 감독의 그 영화에서, 캐릭터 메살라가 (아무 직접 원한이 없는) 모녀(자신의 모친, 혹은 여동생과도 같은 이들)에게까지 저런 해코지를 하는 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악인이라 그렇다고 단순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편하죠), "메살라형 악인"은 노리는 결과만 깔끔하게 달성하는 경로를 취하지 애써 저런 사디스트식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와일러 감독이 앞부분에서 더 복선을 깔았을 테고).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 보니, 여기서는 꽤나 다변으로 스타일이 바뀐 메살라가 충분히 그런 음모, 비열한 시도를 할 만큼 성격이 구축되었더군요. 이 점은 영화가 (구태여 비판을 하자면) 좀 실패한 부분이고, 반대로 소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을 갖췄다며 평가해 줄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은 반대로 좀 과잉 설명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화에선 별 존재감도 없던 "신임 총독"이, 소설에선 이름까지 제시되며 제법 적극적 역할을 하는데, "암살 시도로 충분히 오인 받을 만한" 사고를 당한 후, 화풀이를 겸해서 불법적으로 벤허 가문의 재산을 모두 탈취한다는 설정이 있어서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총독쯤이나 되면 법적 절차를 밟아서 몰수할 수도 있을 텐데(ㅎㅎ), 저런 무리수를 둬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머리가 나쁜 건지 도둑질이 천성인 건지 이 신임 총독은 그 방법을 택하고, 여기에 메살라가 공범처럼 가담합니다. 이미 설정된 메살라의 성격만으로도 충분히 악행을 저지를 만한데, 차라리 총독이 주범이라 할 만큼 범행의 은폐에 더 적극적이고, 이 과정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녀가 유폐되어 몹쓸 병까지 생겼다는 게 소설 속의 진로입니다. 이 총독의 이름은 "그라투스"인데, 이름값을 전혀 못한다고나 봐야겠죠.
영화에서는 유다 벤허 개인의 "로마에 대한 적대감"이 그리 선명히 표출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유대 명문가의 자제로서(이 소설에서는 "왕자"라고 번역되는데, 王子가 아닌 王者로 해석해야겠죠?), 또 정통 민족주의,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청년 답게, 이민족 제국의 폭압에 대한 반항심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정치적 대립보다, 개인의 악행에 대한 응징을 기독교적 가르침으로 순화하는 쪽에 초점이 놓였고, 제국의 질서는 은근 주인공 청년을 돕는 환경으로 더 부각되는 편입니다. 영화에서는 메살라의 전차를 놓고 "저건 그리스식이다!"라며 그 공격적으로 변형된 구조에 대중들이 경악하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 소설은 정반대로, 벤허의 전차가 "축대가 낮은, 실용적이고 튼튼한" 그리스식입니다. 소설에서 "로마적인 것"은 거의 노골적으로 악(惡)의 상징이며, 유다 벤허는 열혈 청년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펼칠 준비까지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분이 나의 손에서 칼을 뺏어가셨어."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이 내적 갈등이 좀더 깔끔하게, "한큐에", 해결됩니다. 소설에서의 벤허는 내면의 복수심과 분노를 제거하는 데 몇 단계를 더 거치죠.

와일러의 영화와 달리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시모니데스 캐릭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벤허 가문 종가에 거주하지도 않고, 무역으로 크게 번성한 안디옥(안티오크)에서 지역의 대부호로 군림하는데, 이 성공의 종잣돈은 그라투스 총독의 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주인 가문의 재산 본체 소재를 굳게 비밀로 지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딸 에스더도 영화에서처럼 순종적이고 말 없는 아가씨라기보다, (최소한 소설의 첫 등장에서만큼은)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내미답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고 감정 표현에도 솔직합니다. 이러던 게 나중에는 아이라스(Iras)라는 연적 겸 강력한 안티테제를 만나 성격이 (와일러 영화 속의 하이야 해러릿에 수렴하듯) 변하는데, 뭐 이런 건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구현된 결과겠네요.
와일러의 영화에서는 마리나 버티가 (아주 잠시) 연기한 플라비아 캐릭터가, 극 중 미미하게나마 요염함, 섹시한 분위기 창출을 맡습니다. 세 시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 중 이 정도 양념은 있어 줘야, 미리엄, 티르자, 에스더 3인의 여성으로 이어지는 숨막힐 정도의 경건- 정숙 라인에 균형을 맞추겠죠. 그러나 소설에서는, 무려 동방박사 벨타사르의 친딸로 설정된 (예의) 아이라스가 등장하여, 갈등과 대립의 상당 부분 원인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이라스는 안티오크에서 벤허를 처음 만나는데, 그 인연(..)이 예루살렘에까지 이어지며 무대의 반을 주름잡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강력한 악녀 스탠스를 부각하여, 이교적 타락과 세속주의적 경향 모두를 비판하는 데 있었겠죠. 이 아이라스는 경건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미스테리격 반전을 형성하는 데 기여도 합니다만("벤허에 무슨 반전이 다 있었어?"), 전체적으로 이 시도가 그닥 큰 성공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아이라스의 입을 빌려 길게 풀려지는 이집트 신화 두 꼭지도, 여튼 이런 반전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복선 노릇을 한다고 봐야겠죠.

이 소설에서는 공간적 무대로서 로마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여기서 개인의 평화와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악의 집결체로 내내 적대되기 때문에, 구체적 로케이션으로서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봐야겠죠. 과거를 회고할 때 간간이 누가 로마에서 벤허의 권투선생이었다는 식으로 간접 언급될 뿐인데, 영화에서는 반대로 집정관의 귀환 때 무려 개선식까지 열어 주죠. 이는 고작 해적을 상대로 거둔 "피로스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사실 고증 미숙에 가까운데, 원작 소설에선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벤허가 동료 죄수들의 족쇄까지 다 풀어준다거나, 집정관의 목숨을 노리는 해적 두 놈을 제거하는 장면도 소설에는 없고, 바다에 빠지는 과정도 집정관의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실수로 떨어진 걸로 되어 있더군요. 퀸터스 아리우스(이 책에서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청년 유다 벤허를 입양하는 과정도, 영화에서는 무슨 황제가 원로원의 동의를 받니 마니 고작 그런 개인 사정을 자기 직권으로 해결 못 하고 쫀쫀하게 구는데, 소설은 당사자의 말 한마디로 끝이라서 독자가 보기에 후련합니다.
역사적 고증의 측면에서, 소설은 독자를 압도한다 할 만큼, 엄청난 배경지식을 거의 매 챕터 매 문장마다 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루 월레스 장군을 "퇴역 후 깊어진 종교적 신심으로 느닷 명작을 쓴 늦깎이 작가" 정도로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이력뿐이라면 (정말 신이 강림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이런 대작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설적 기교 면에서 다소 투박한 면은 있지만, 인물과 풍경 묘사의 세심함이라든가 그 기술(description)을 일일이 의도한 메시지에 투영하는 솜씨는, 전문 문필가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죠. 부제는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되어 있지만(또 그 깊은 신앙심의 표현과 부각에 비추어 타당한 작명이기까지 하지만), 이 소설은 당대 인문 교양과 지식의 총체라 할 만큼 풍성한 육신까지 구비한 구조입니다. 물론, 예를 들어 동방박사 3인의 출신지라든가 준비한 예물 등을 설명한 대목에서, 통설적 입장이 따르는 정보와는 심각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구비 전승에 유일 정통은 없는 거고, 그런 설명들이 "루 월레스 장군의 독자적 연구 결과"라고 봐 주지 못할 것도 없죠. 장군은 전업 군인이 아니라, 명문대에서 젊은 시절 소양을 쌓은 다음 변호사 개업까지 거친, 당대 일류의 인문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감찬 장군처럼, 문관 출신이 자질과 관록을 바탕으로 장년 이후 시기에 무공(남북 전쟁에서의)까지 쌓은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윌리엄 와일러가 남긴 그 대작 영화의 근거, 저본, 원작이지만, 영화와는 별개로 웅대하게 성취, 건설된 문학 작품으로 따로 평가를 해 주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방향과 색깔이 조금 다르고, 소양 있는 독자가 문학에서 마땅히 기대함직한 체험을 (누가 군 출신이랠까봐) 더 살뜰히, 더 자상히, 그리고 더 넉넉히 베풀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 동서의 교류 지점에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거닐었는지(심지어 중국 이야기도 쬐끔은 나와요), 지금이나 그때나 온갖 악인과 비위와 모순이 판치는 험악한 세상에서 순수한 청년 벤허(성장도상에 있는 보편적 인간형이죠)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그리고 (부제에 나온 대로) "그리스도 그는 누구였는지", 얼핏 보아 불가능할 것 같은데도 이 세 가지 엄청난 질문에 모두 답해 주는 "성실하고 위대한 문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