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허 (완역판) - 그리스도 이야기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7
루 월리스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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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많은 어르신 세대에게는 (요즘 말로) "인생 영화"나 마찬가지인 작품이 1959년작 <벤허>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여튼 청교도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어지는 미국에서는 크게 흥행에 성공하고 격찬 받은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도 인구가 절대 다수라고는 할 수 없는 한국에서까지 그만큼 호응이 좋았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관람해도, "과연 그럴 만하다"는 게 세대를 초월한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확실히 저 고전 영화는, 감동적인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매우 영리한 전개를 취합니다만, 그런 기술적 분석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신비스러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지닙니다.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완성도를 달성한 저 대작을 한번 보고 나면, 그 영화가 원작 소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사람도, "혹 영화를 본 감흥이, 소설이 취하는 설정상의 부분 차이 때문에 깨어지지나 않을지" 하는 마음에 책을 펴길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19세기풍의 장편 소설이란 외관이, 그 분량의 위압감, 표현 개성의 이질감 때문에 현대의 독자를 지레 밀어내는 면도 없지 않거나 말이죠. 사실 윌리엄 와일러의 저 명작이 워낙 모든 면에서 완벽하기 때문에, 그 총체적 감흥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분들은 다른 매체를(그게 원작 소설이라 해도) 구태여 파고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저렇게나 강렬한 영감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명작의 원동력이, 꼭 감독의 연출 솜씨나 배우들의 연기, 혹은 각색 단계에서의 재해석 센스, 뭐 여기에만 그 출처가 있지 않으리라 믿는 분들은, 이 오리지널 장편을 꼭 읽어 보시길 추천 드리고 싶어요. 이 장편은, 그저 "영화 <벤허>의 원작", 그 이상의 문예적 깊이와, 작가의 경건하면서도 치열한 성찰의 결과, 성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영화와는 어쩌면 별개로 자신의 영성을 튼튼히 다지는 데 멋진 컴패니언을 하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와 이 "원작" 소설은 전개와 설정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몇 가지만 좀 짚어 보면,

영화에서 선량하기 그지 없는 명문가의 모녀가 그토록 참혹한 운명을 맞은 데 대해, 많은 관객들이 사정 없는 비판을 메살라에게 가하는 게 흔한 반응이며, 또 지극히 당연하죠. 저는 와일러 감독의 그 영화에서, 캐릭터 메살라가 (아무 직접 원한이 없는) 모녀(자신의 모친, 혹은 여동생과도 같은 이들)에게까지 저런 해코지를 하는 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악인이라 그렇다고 단순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편하죠), "메살라형 악인"은 노리는 결과만 깔끔하게 달성하는 경로를 취하지 애써 저런 사디스트식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만약 그런 성격이었다면 와일러 감독이 앞부분에서 더 복선을 깔았을 테고). 그런데 이 소설을 읽어 보니, 여기서는 꽤나 다변으로 스타일이 바뀐 메살라가 충분히 그런 음모, 비열한 시도를 할 만큼 성격이 구축되었더군요. 이 점은 영화가 (구태여 비판을 하자면) 좀 실패한 부분이고, 반대로 소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을 갖췄다며 평가해 줄 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은 반대로 좀 과잉 설명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화에선 별 존재감도 없던 "신임 총독"이, 소설에선 이름까지 제시되며 제법 적극적 역할을 하는데, "암살 시도로 충분히 오인 받을 만한" 사고를 당한 후, 화풀이를 겸해서 불법적으로 벤허 가문의 재산을 모두 탈취한다는 설정이 있어서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총독쯤이나 되면 법적 절차를 밟아서 몰수할 수도 있을 텐데(ㅎㅎ), 저런 무리수를 둬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머리가 나쁜 건지 도둑질이 천성인 건지 이 신임 총독은 그 방법을 택하고, 여기에 메살라가 공범처럼 가담합니다. 이미 설정된 메살라의 성격만으로도 충분히 악행을 저지를 만한데, 차라리 총독이 주범이라 할 만큼 범행의 은폐에 더 적극적이고, 이 과정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녀가 유폐되어 몹쓸 병까지 생겼다는 게 소설 속의 진로입니다. 이 총독의 이름은 "그라투스"인데, 이름값을 전혀 못한다고나 봐야겠죠.

영화에서는 유다 벤허 개인의 "로마에 대한 적대감"이 그리 선명히 표출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유대 명문가의 자제로서(이 소설에서는 "왕자"라고 번역되는데, 王子가 아닌 王者로 해석해야겠죠?), 또 정통 민족주의,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청년 답게, 이민족 제국의 폭압에 대한 반항심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정치적 대립보다, 개인의 악행에 대한 응징을 기독교적 가르침으로 순화하는 쪽에 초점이 놓였고, 제국의 질서는 은근 주인공 청년을 돕는 환경으로 더 부각되는 편입니다. 영화에서는 메살라의 전차를 놓고 "저건 그리스식이다!"라며 그 공격적으로 변형된 구조에 대중들이 경악하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 소설은 정반대로, 벤허의 전차가 "축대가 낮은, 실용적이고 튼튼한" 그리스식입니다. 소설에서 "로마적인 것"은 거의 노골적으로 악(惡)의 상징이며, 유다 벤허는 열혈 청년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펼칠 준비까지 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분이 나의 손에서 칼을 뺏어가셨어."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이 내적 갈등이 좀더 깔끔하게, "한큐에", 해결됩니다. 소설에서의 벤허는 내면의 복수심과 분노를 제거하는 데 몇 단계를 더 거치죠.



와일러의 영화와 달리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시모니데스 캐릭터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벤허 가문 종가에 거주하지도 않고, 무역으로 크게 번성한 안디옥(안티오크)에서 지역의 대부호로 군림하는데, 이 성공의 종잣돈은 그라투스 총독의 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주인 가문의 재산 본체 소재를 굳게 비밀로 지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딸 에스더도 영화에서처럼 순종적이고 말 없는 아가씨라기보다, (최소한 소설의 첫 등장에서만큼은)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딸내미답게 자기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고 감정 표현에도 솔직합니다. 이러던 게 나중에는 아이라스(Iras)라는 연적 겸 강력한 안티테제를 만나 성격이 (와일러 영화 속의 하이야 해러릿에 수렴하듯) 변하는데, 뭐 이런 건 작가의 분명한 의도가 구현된 결과겠네요.

와일러의 영화에서는 마리나 버티가 (아주 잠시) 연기한 플라비아 캐릭터가, 극 중 미미하게나마 요염함, 섹시한 분위기 창출을 맡습니다. 세 시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 중 이 정도 양념은 있어 줘야, 미리엄, 티르자, 에스더 3인의 여성으로 이어지는 숨막힐 정도의 경건- 정숙 라인에 균형을 맞추겠죠. 그러나 소설에서는, 무려 동방박사 벨타사르의 친딸로 설정된 (예의) 아이라스가 등장하여, 갈등과 대립의 상당 부분 원인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이라스는 안티오크에서 벤허를 처음 만나는데, 그 인연(..)이 예루살렘에까지 이어지며 무대의 반을 주름잡습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런 강력한 악녀 스탠스를 부각하여, 이교적 타락과 세속주의적 경향 모두를 비판하는 데 있었겠죠. 이 아이라스는 경건하기 짝이 없는 소설 속에서 일종의 미스테리격 반전을 형성하는 데 기여도 합니다만("벤허에 무슨 반전이 다 있었어?"), 전체적으로 이 시도가 그닥 큰 성공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아이라스의 입을 빌려 길게 풀려지는 이집트 신화 두 꼭지도, 여튼 이런 반전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복선 노릇을 한다고 봐야겠죠.



이 소설에서는 공간적 무대로서 로마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여기서 개인의 평화와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악의 집결체로 내내 적대되기 때문에, 구체적 로케이션으로서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봐야겠죠. 과거를 회고할 때 간간이 누가 로마에서 벤허의 권투선생이었다는 식으로 간접 언급될 뿐인데, 영화에서는 반대로 집정관의 귀환 때 무려 개선식까지 열어 주죠. 이는 고작 해적을 상대로 거둔 "피로스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사실 고증 미숙에 가까운데, 원작 소설에선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벤허가 동료 죄수들의 족쇄까지 다 풀어준다거나, 집정관의 목숨을 노리는 해적 두 놈을 제거하는 장면도 소설에는 없고, 바다에 빠지는 과정도 집정관의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실수로 떨어진 걸로 되어 있더군요. 퀸터스 아리우스(이 책에서의 표기를 따릅니다)가 청년 유다 벤허를 입양하는 과정도, 영화에서는 무슨 황제가 원로원의 동의를 받니 마니 고작 그런 개인 사정을 자기 직권으로 해결 못 하고 쫀쫀하게 구는데, 소설은 당사자의 말 한마디로 끝이라서 독자가 보기에 후련합니다.

역사적 고증의 측면에서, 소설은 독자를 압도한다 할 만큼, 엄청난 배경지식을 거의 매 챕터 매 문장마다 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루 월레스 장군을 "퇴역 후 깊어진 종교적 신심으로 느닷 명작을 쓴 늦깎이 작가" 정도로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이력뿐이라면 (정말 신이 강림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이런 대작이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설적 기교 면에서 다소 투박한 면은 있지만, 인물과 풍경 묘사의 세심함이라든가 그 기술(description)을 일일이 의도한 메시지에 투영하는 솜씨는, 전문 문필가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죠. 부제는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되어 있지만(또 그 깊은 신앙심의 표현과 부각에 비추어 타당한 작명이기까지 하지만), 이 소설은 당대 인문 교양과 지식의 총체라 할 만큼 풍성한 육신까지 구비한 구조입니다. 물론, 예를 들어 동방박사 3인의 출신지라든가 준비한 예물 등을 설명한 대목에서, 통설적 입장이 따르는 정보와는 심각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구비 전승에 유일 정통은 없는 거고, 그런 설명들이 "루 월레스 장군의 독자적 연구 결과"라고 봐 주지 못할 것도 없죠. 장군은 전업 군인이 아니라, 명문대에서 젊은 시절 소양을 쌓은 다음 변호사 개업까지 거친, 당대 일류의 인문 지식인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감찬 장군처럼, 문관 출신이 자질과 관록을 바탕으로 장년 이후 시기에 무공(남북 전쟁에서의)까지 쌓은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윌리엄 와일러가 남긴 그 대작 영화의 근거, 저본, 원작이지만, 영화와는 별개로 웅대하게 성취, 건설된 문학 작품으로 따로 평가를 해 주는 게 마땅하겠습니다. 여전히 감동적이지만 방향과 색깔이 조금 다르고, 소양 있는 독자가 문학에서 마땅히 기대함직한 체험을 (누가 군 출신이랠까봐) 더 살뜰히, 더 자상히, 그리고 더 넉넉히 베풀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 동서의 교류 지점에서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거닐었는지(심지어 중국 이야기도 쬐끔은 나와요), 지금이나 그때나 온갖 악인과 비위와 모순이 판치는 험악한 세상에서 순수한 청년 벤허(성장도상에 있는 보편적 인간형이죠)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지, 그리고 (부제에 나온 대로) "그리스도 그는 누구였는지", 얼핏 보아 불가능할 것 같은데도 이 세 가지 엄청난 질문에 모두 답해 주는 "성실하고 위대한 문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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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의 첫사랑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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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귀한 신분과 태생을 지닌 이들은 주위에 주는 인상과 기품부터가 다릅니다. 민중은 대개 큰 복을 갖고 태어나 근심 없이 성장한 왕재(王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게 보통이지, 어떤 타도의 대상이나 저주의 객체로 삼으려 들지는 않습니다. 후사가 단절되었을 때 외국의 존엄한 핏줄이라도 모셔 와 국가의 긍지로 삼으려 드는 게 유럽의 지난 역사에서 오히려 상례였습니다. 다만 그 군주가 제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따스한 정치를 베푸리라는 기대가 그 전제로 붙습니다. 정녕 왕권이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닌 이상, 군주의 위엄과 복락은 생각보다 위태한 조건부 특권입니다.

<황태자의 첫사랑>은 예전 세대 어르신들에게 각별한 추억과 낭만의 문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발표된 지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이 오래된 작품은,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의 원작 소설이나 희곡 포맷보다. 두어 손을 더 거쳐 각색된 오페레타라든가 영화 버전으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마이어-푀르스터는 (유감스럽게도) 비평, 대중 호응 양면에서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고, (의외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현저한 재평가가 시도된다든가 하는 경향도 못 됩니다. 다만 그의 작품들 중 특히 이 소설이 독문학의 한 교본처럼 동아시아(의 독문학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받아들여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대단한 선진국으로 여겨진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가와 그 낭만을 다룬 터라, 대학 문화가 아직 생소했던 이 지역에서 각별히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된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짤막한 소설의 주제가,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진 어르신들이 그리 여기듯,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독자로서 저는 오히려 그 원제목에 눈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싱겁게도 두 어절 "카를(칼) 하인리히". 이 소설은 알고 보면, 후계자 시기의 "졸업"과 젊은 주권자로서의 "입문기"를 겹치듯 겪고, 아울러 평민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며 세상의 맨모습을 잠시나마 엿본 청춘기의 황태자에 철저히 초점이 맞춰진, 아름답고 순수한 성장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성장물도 고통스러운 현실과의 조우가 남긴 상처라든가, 이후의 어떤 위안으로도 망각이 불가능한 좌절 따위가 내내 유령처럼 당사자의 뒤를 따르는 성장 스토리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요소가 전무하다시피합니다. 물론 "반달리아" 학우회의 키 큰 학생과 겨뤄 얼굴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런 것쯤은 젊은 군주의 고운 피부에 패용된 장난스런 훈장 정도로 봐 줄 수 있겠죠. 중반 이후 선왕(황태자의 백부입니다)이 붕어했을 때, 우리 젊은 후계자의 안색이 유독 침통하여 백성의 동정을 한몸에 받았을 때, 사실은 이 상처가 (의도치 않게) 효과적 소품 노릇도 했겠고 말입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간 궁정에서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위트너 박사의 엉뚱하고 천진스런 불평과 고민이 주도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농부의 소생으로 거친 식사에 위가 단련된 이가, 어쩌다 궁정까지 불려가 분수에 넘는 호강을 하다보니 각종 예법에 스트레스 받으랴, 기름진 식사에 일일이 적응하랴 그 나름으로는 큰 고생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정녕 돌이킬 수 없는 회오를 안겨 준 건, 태자를 키우느라 자신의 한 번뿐인 청춘기를 소진했다는 뜬금 없는 각성이었습니다. 그나마 선량하고 기품이 뛰어난 태자가 자신을 부친처럼 따랐으니 망정이지, 다른 어디에서 그 영어의 세월이 강요한 지루함을 보상받을 수 있었겠는지요. 재미있는 건 태자의 사실상 후견인으로서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해야 할 그가, "이 어린 청년(차라리 소년에 가까운)에게만은 그 청춘의 본능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풀어주고 싶다"는 제 나름 큰 결심을 하고, 하이델베르크의 어느 학우회에의 가입을 허락해 주는 대목입니다(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비콘 강을 건넘"). 여기까지가 분량상으로도 플롯상으로도 대략 절반의 지점인데, 이를 계기로 태자 역시 "다른 인생"에 한 발을 들여 놓습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이 맞습니다. 처음 식당에서 긴 줄을 서 기다릴 때 주문 방식을 몰라 당황하는 태자에게, 키 작고 귀여운 아가씨 케티(애칭 케트헨)가 편의를 봐 주던 그 순간이 둘의 첫만남이었습니다. 태자의 주변을 서성이며 학생의 본분이란 깡그리 잊고 온갖 못된 짓은 다 가르쳐 주는 폭한 같은 대학생들이지만, 이 "커플"이 과연 "선"을 넘었는지는 독자로서 대단히 회의적이며,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처럼 눈빛으로 손짓으로 마음을 나누는 그런 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첫사랑은 진짜 첫사랑(순수 문예적 의미에서)이 맞는 셈도 되겠는데, 이들의 나란한 손잡음은 태자가 백부의 임종을 지키려 칼스부르크로 소환됨에 따라 넉넉히 예견되었던 종막을 맞습니다. 정말 <춘향가>의 묘사보다도 훨씬 못할 만큼 담백하고 심심한데, 우리가 <소나기>를 두고 끈적한 표현과 설정이 많아서 좋아하는 게 결코 아닌 까닭과 같겠네요.

늙은 식당 종업원 켈러만이 큰 마음 먹고 국경을 건너 한때 단골로 모시던 대학생 손님 "작센- 칼스부르크 대공"을 알현하러 옵니다. 이제는 군주가 된 태자가 그윽한 눈길로 묻습니다. "그, 식당에서 시중 들던 케티는, 내가 지금 다시 하이델베르크를 찾으면 만날 수 있을까?" "당연합죠." 한참 뜸을 들이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무심한 듯 묻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그 여자애, 케티, 걔는 어쩌던가?" "많이 울었습죠." 현지에서 끝내 건강을 회복 못 하고 저세상 사람이 된 박사의 묘도 찾을 겸, 젊은 군주는 다시 철도편으로 서쪽을 향합니다.

잠시 사족을 좀 달자면, 사실 소설 속에서도 누누이 나오듯 작센-칼스부르크는 작은 공국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짐작 가능하듯 실존 작센-코부르크 공국을 모델로 삼은 가공의 정치 단위고요. "프로이센의 승인이 없어도.." 운운하는 대목이 암시하듯 이곳은 호엔촐러른 가문이 세습하는 독일 제국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카를 하인리히의 실제 신분은 "황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 여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한 세기가 넘게, 예전 세대분들에게 "황태자"로 눈감아져 통용되었으므로, 또 어차피 가공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연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아득하고 친근한 감정의 환기를 겪게끔 우리들도 이분을 그리 모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연히 불경스레(?) 족보와 법도를 따질 게 아니라 말이죠.

소설의 묘사는 구식 영탄조도 많았지만, 과감한 생략으로 독자에게 상상을 자극하는 게 좋더군요. "이봐, 왜 그 식당에 다들 발길을 끊은 거지?" "모르겠습니다. 대학가에서 그런 일은 흔하죠. 맥주가 맛이 떨어졌다든가 하는 이유로요." 옛 친구들인 학우회 회원들을 우루루 데리고 들어서자, 한때 하이델베르크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케티가 원망스런 눈길을 줍니다. "이제 다시 우리 식당에 오는 건가요? 나쁜 사람들." 그러고서 마치 유령이나 본 듯, 케트헨은 굳어 버립니다. 군주는 담담히, "이제는 예전의 귀여움이 안 느껴진 채, 나이든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케티였다."고 표현하네요. 왜 학우회가 식당을 바꿨는지도 이로써 짐작 가능한데, 케티는 일찍부터 밝혀 온 대로 십여 년 나이 차가 나는 비엔나의 어느 남성에게 곧 시집갈 계획입니다. 청춘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한 순간 격렬한 설렘으로 머물다 벚꽃처럼 아쉽게 지는 거죠.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아마도 마지막이 될 밤을 보내며, 젊은 군주 역시 자신의 철없던 시절과 영원한 작별을 고합니다. 슬픈 묘사가 딱히 없는데도 독자를 오래 애상에 잠기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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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척추 이야기
도은식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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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숱한 짐승과 생명체 중에 대지를 꼿꼿이 서서 다니는 존재는 인간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렇게 직립이 그 숙명이자 특권인 인간에게, 척추와 허리가 말썽이라면 그건 단지 신체 일부에 통증이 있고 병질을 앓고 하는 정도의 지경이 아닐 겁니다. "살 맛 자체가 안 나는, 지옥 같은 고통"이라 당사자가 토로해도 그게 절대 과장이 아닌 줄 압니다. 이게 꼭 노인들한테만 찾아오는 고생도 아니고, 나쁜 자세라든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어느 연령대에서도 치를 수 있는 질환, 증상이죠.

승풍파랑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는 도은식 박사님은, 밀도 넘치는 반생 동안 "그저 의술이 아닌 인술(仁術)"의 발휘를 직업인의 철칙으로 삼고 직분에 충실하신, 한국이 자랑스레 내세울 만한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현재 더조은병원 원장님으로 여전히 시술을 베푸시면서, 생의 근본 조건을 뒤흔드는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되찾아주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채우시는 멋진 분이죠. 저도 논현동 인근 지나치면서 자주 건물 외관을 접하곤 합니다.

일단 선생님은 (자신이 있으셔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허리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 권위 있는 병원을 찾아 오라고 하십니다. 보통 한국인들이 허리가 아프다고 할 때, 정해지다시피한 코스가 있죠(이 서평에다 적진 않겠습니다만). 그런데 이게 선생님의 관점에선, 괜히 치료의 적기, 골든 타임만 놓칠 뿐 전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MRI 촬영 사진만 봐도 한눈에 증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합당한 훈련을 받은의사를 찾아야지, 괜히 이것저것 해 보다 정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찾는 게 신경외과라는 식은 금물이라는 주장입니다. 더군다나, (바람직하든 아니든 간에) 한국 최고의 두뇌가 몰려있다시피한 洋醫 섹터를 두고 다른 어떤 수단, 전문가를 찾는 게 무슨 소용이겠냐는 말씀도 하십니다.

모든 양의, 신경외과가 일단 환자가 찾아오면 수술부터 권하고 본다는 것도 잘못된 통념이라고 하시는군요. 올바른 의사라면 환자의 증상에 따라 다양한 처방과 치료 코스를 권할 뿐, 무작정 수술이 방법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환자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또한,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과잉치료로 유도하는 일각의 행태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하십니다. 양심적인 의사라면, 치료의 적기를 놓쳤든 다른 근본적 원인 탓이든,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는 거죠. 어느 병원에 가 보면 "설명을 잘하는 의사가 되겠습니다"라고 크게 써붙여 놓았습니다. 이건 이것대로 바람직한 덕목이고, 선생님은 "화술이 뛰어난 의사보다는, 치료 수완이 좋은 의사를 택하라"라고도 하십니다. 이 책에는 은연중에, 의사 중에서도 양심적인 분들, 경험 많고 기술이 뛰어난 의사들이 따로 있음을 전제로 깔고 들려 주시는 충고들이 많더군요.

그간 척추 수술은 흉터가 크게 남고 여러 부작용이 있어 환자들이 가급적이면 꺼리는 선택이 되어 온 게 사실입니다. 책에서는 최신의 시술이라 할 여러 다른 기법을 소개합니다. "정상적인 근육과 뼈의 손상, 그리고 수반되는 통증을 최소화"하는 옵션으로 미니후방고정술이 있다고 하는데요. 일단 책에 나온 대로 "수혈이 따로 필요 없다"거나, 무엇보다 통증이 적다는 게 특히 노인 환자분들에게 장점인 듯은 보입니다.

척추체 성형술이라는 것도 눈에 띄는데요. 골절이 발생한 부위에 시멘트를 채워 넣어 지지해 주는 방식인데, 빠른 퇴원이 가능하고 흉터가 없다는 게 장점이라고 합니다. 피부 절개가 없고, 국소마취만으로 시술 가능하다는 게 역시 노인 환자분들에게 메리트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들은 바로는, 심부정맥을 통해 폐(肺) 색전(塞栓)이 일어날 수 있다고도 하던데요. 그래서 확실한 진료, 치료를 기대하려면 지인을 통해 선생님을 소개받아야 합니다. 명의라고 소문난 게 아닌 이상 모르는 병원에는 되도록이면 가질 말아야 해요. 그래서 사회 생활에는 인맥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뜻도 되겠고요.

참 존경스러운 면이, 선생님은 대기실에서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 모습만 보고도 벌써 증상 원인 등이 감이 온다고 하십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환자들에게 수술을 권할 경우, "이 의사가 또 한 건 올리려고 하는구나" 같은 불신부터 대뜸 보이는 세태인데요. 그건 그럴 만도 한 게, 지난 신해철 사건에서 보듯, 도대체 그 정도 경력과 평판을 쌓은 의사가 과오를 범하면, 누굴 믿고 의존하겠냐는 생각이 들어서죠. 그래서 선생님은 먼저 의사들이 "많이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환자에 따라 가장 적합한 의사를 추천해 줄 만큼 "협진 체제"가 공식, 비공식으로 갖춰질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장성 면에서 접근해도, 가장 규모가 큰 척추 질환 분야에서 병원들이 협조 체제를 갖춰야만 개개 의사들이 과잉 설비 투자로 도산하는 결과를 막고, 환자는 환자대로 양질의 치료를 받는 win-win 이펙트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병원장은 CEO이기도 하므로, 경영인의 자세로 병원을 돌보는 게 의사들에게 필요하다고 충고합니다. 당신도 그런 코스를 밟았지만, 많은 의사들은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해서 그저 인맥만 쌓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진지하게 경영 기법을 공부하여 자신의 병원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여기서 또 두뇌의 수월성론이 나오는데,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갖고 의사가 된 만큼 경영 쪽에서 수완을 못 보일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선생님 자신은 우수 논문 제출로 표창도 받으신 적 있다고도 하시네요. "산업의 중심이 이미 3차 부문으로 넘어간 지 오래인 만큼" 병원도 과감한 투자와 합리적 경영 마인드가 도입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영리화, 반공익화와 연결시키는 사회 인식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료수가는 어차피 법에 따라 정해진 바 의사 개인이 함부로 받을 수도 없다고도 하시고, 다만 관행처럼 통하는 리베이트 수수는 필히 근절되어야 함도 강조하십니다.

책에는 일러스트와 함께, 매일 10분 정도의 간단한 운동으로 미연에 척추 질환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제시됩니다. 바른 자세는 어찌 보면 바른 마음에서 나오고, 모든 병을 키우는 근본 원인은 조바심, 주위와의 트러블, 괜한 집착 등 마음의 요인이 큽니다. 97세 환자에게 시술하여 완치시킨 도 원장님 같은 분은, 평소에 캄보디아 등 취약지대를 순방하며 봉사하시는 등 사회적 책임을 항상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남을 원망하고 주변을 탓하기보다, 먼저 내 자신의 마음가짐을 깨끗이 간직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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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 라틴어 원전 완역판 세계기독교고전 8
성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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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구교와 신교가 함께 존숭(尊崇)하는, 기독교 공통의 교부(敎父) 중 한 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저작은, 유려한 문장과 깊은 성찰,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 비단 해당 종교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신실한 태도로 일상을 살고 직분을 수행하려는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어 왔습니다. 교인에게는 신앙에 대해 새로운 눈을 깨워 주고,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숱한 속인들에게는 한정된 인생이 결코 망상이나 부질없는 육욕으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따끔한 일침을 던져 주기에 족한, 경건하고 유익한 고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일반 독자들이 잘 알듯, 젊어서 방종한 생활에 빠졌던 탕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육적(肉的)인 면에서도 그러하며, 어려서부터 최상의 교육을 받았던(생각 깊었던 그 부모와 풍족한 환경의 영향이 컸죠) 처지를 감안하면 정신적 지향의 면에서도 큰 방황을 거친 인생이었습니다(단, 이는 정통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입니다). 얼마든지 세속이 제공할 쾌락과 방만함에 빠져 원 없이 욕구를 풀 수 있는 생을 지속할 수 있었지요. 이랬던 그가, 느닷 순수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면 수용하고, 그 신앙에서 요구하는 대단히 청순한(온갖 금지사항과 절제의 주문으로 가득한) 생을 내내 유지한 것, 주교로서 모두의 모범이 될 만한 삶을 실제로 살아낸 것, 그리고 이처럼 빛나는 윤리철학을 담은 저작을 여럿 남긴 것 모두가 당대인, 그리고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경이의 눈으로 비춰졌습니다.

당시 강조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그저 공자님 말씀 같은, 듣고 읽기에야 백번 타당한 공허한 설교"로 유명한 게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만 해도, 그저 안락하고 결핍된 바 없고 욕망이 있으면 그때그때 충족하고 사는 그런 인생을 최고로 여깁니다. 연암 박지원의 짧은 글에도, "짧지만 당대를 호령하다 요절한 젊은 효웅(용모와 집안 배경, 출중한 무용 등 모든 걸 갖춤)의 삶(특정해서는 손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무 잘난 바 없지만 딱히 배곯고 풍찬노숙하는 시절 없이, 제 천수를 다 누리고 가는 삶 중 무엇을 과연 택하겠는가"가 논제로 등장한 적 있습니다. 이게 선택지 간 밸런스가 맞춰진, 제법 세간에 논쟁이 될 만한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은, 저 두 가지 선택지가 하나로 합쳐진, 즉 생의 초기 조건 모든 청춘의 복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수명을 복 받은 그대로 유지할 옵션까지 주어진 인생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죠. 나면서부터 받은 개인적 자질이라는 축복은 자신이 자의로 포기할 수 없지만, 여생 동안 누릴 수 있었던 물질적 환락은 그가 자발적인 각성에 의해 깨끗이 놓아 버리고 절제와 불편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에는, 어떻게 해서 그런 회심과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 빼어난 두뇌로 살핀 기억에 따라, 또 (나중에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지기까지 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양심에 기반하여, 상세하고 진솔하며 독자에게 교화적으로 유익한 이 "고백록"까지 저술한 것입니다.

방탕한 젊은이였던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을 섭렵했으며, 그 중에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사실혼 관계에 접어들었던 여인들도 있었지요. 책의 역주에도 나오지만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서 정통성 있는 교리 확정을 위해 소집된 기관이었던 공의회, 그 중에서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사실혼을 오히려 권장하기까지 하는 등, 오늘날의 엄격한 각 교파의 가르침과는 꽤나 거리 있는 태도였습니다. 교회마저 이런 태도였던 데다, 사회적 평판과 부귀를 고루 갖춘 집안의 자제였던 그를 두고, 어느 누가 비난과 고발의 눈길을 주기란 거의 상상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그는 스스로 이 시간에 대해 비통한 참회의 기억을 갖고, 소상한 문장으로 이 책 속에 기록합니다.

"한 여인을 쫓아내고, 다시 다른 여인을 들여 스스로를 정욕의 노예로 삼았는데,... 나는 이런 여인들만도 못한 비천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재미있는 대목(?)이라면, 역시 종교개혁 이후 여러 연구자, 주석자들이, 이런 진솔한 고백을 읽으면서 대단히 당혹스러워했다는 겁니다. "어찌 이런 청춘기를 보낸 이를, 성인이라며 공경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컨대 남의 여인을 탐내 아끼던 명장의 죽음을 사주하고, 마침내 그 여인에게 죄의 씨앗을 심기까지 한 다윗 왕의 죄과는 어떻게 되는 거겠습니까? 기독교 신자라면 이런 극단적인 죄악의 사례도, "과오는 인간의 몫이로되, 그 용서는 신의 몫이다."라는 원칙에 의해, 통회자의 진정한 눈물을 전제로 다 포용해야 마땅하죠.

역시 최상급의 교육을 받고, 명철한 두뇌를 타고난 인물답게, 그는 자신의 "기억"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고, 이 "기억"이 궁극적으로 유발하는 참회라는 정신작용에 대해서도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의 오감이 두뇌에 정보를 전달하고...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밀한 구역들이 기억 곳곳에 형성되어.. 사물들 자체보다는 그 심상만이 기억의 영역에 남아, 우리가 불러내면 거기 결부된 가치 판단과 함께 떠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양 있고 감성 풍부한 수필가의 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살뜰한 기술이며, 자연과학적 지식(그 당시 수준에서) 못지 않게 자신을 이토록 격동시키고 때로는 미칠 듯한 죄책감, 때로는 존재를 초월할 듯한 환희(이는 육욕의 쾌감과는 다르며, 이를 준별하는 건 그가 세속의 환락이란 환락은 다 맛을 본, 극히 드문 케이스이기에 가능하겠습니다)으로 가득차게 된 그 정신의 체험에 한껏 고양되었기에 이런 문장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다.

과거와 미래와는 달리, 현재라는 시간은 그저 찰나처럼 지나가버리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는 동양적 사고와는 차이가 큰 이해인데, 예컨대 우리 동양인들은 자시, 축시 등을 설정할 때도 시간의 한 지점이 아닌, 대략 두 시간 정도의 넉넉한 구간으로 파악합니다(예: 子時라 하면 밤 11시~1시 사이). 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서양 철학(나아가 자연과학)의 관점에선 그저 1분 1초, 혹은 헤아릴 수 없는 작은 단위의 한 점이며, 여기에서 유명한 제논의 역설도 도출된 것입니다. 대체 포착할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으로 흘러가버리는 이 "현재"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인간, 이 필멸의 삶이란 대체 어디에서 안식과 정당성을 구하겠습니까? 여기에서 그는 모든 환락과 욕구 충족, 사출과 배설의 쾌감 따위가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영원 불멸의 존재인 신에의 귀의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 있음을 잔잔히 표백합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이처럼, 겪을 수 있는 모든 진세(塵世)의 체험을 다 치른 후에 도달한, "놀아 본 형"의 믿을 수 있는 가이드입니다.

"폰티키아누스가 들려준 두 사람의 회심 이야기"는 다분히 동양적 처세의 미덕, 혹은 도교적(당시라면 아직 도교가 채 교단으로 성립하기 시작할 무렵이었겠습니다만) 각성의 어느 경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모든 지식을 체득하고, 무리 앞에서 성취를 뽐내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정적들을 지혜로 물리친 후, 우리에게 남는 것이란 과연 뭘까? 기껏해야 관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황제의 첫째 가는 벗으로 남음이 고작이 아닌가?" 청담 사상을 입에 올리던 위진남북조기의 귀족 자제들과 하는 말에 별 차이가 없죠. 아마도 여러 경로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불교 등 여러 동양 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결정적 회심" 전까지만 해도 마니교(기독교와 불교의 콜라보)에 심취했었던 사실 역시 이를 방증합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일신교의 절대적 표준과 영원성이 주는 신앙의 세계로 오롯이 자신을 던졌고, 이후 다시는 다른 종류의 회심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책 곳곳에서 모세의 기술(주로 구약의 모세 5경 지칭)을 인용하는데, 믿음이 미숙하고 영적인 토대가 약할수록 "위에는 물리적 의미의 하늘, 밑에는 역시 창조된 땅" 하는 식으로, 성경의 말씀을 자신이 지각하는 물질 세계에 한정, 혹은 유추하여 믿기 십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은 인식과 신앙을 물질계에 한정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믿음의 날개가 약해 마치 어린 병아리처럼 채 날지도 못하고 바로 마음이 꺾여 버릴 수 있는 이들"이라며 측은해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줄 모르고, 그저 현재의 자신이 편안해할 수 있는 가장 빈약한 뜻으로 새기면서, 자칭 독실한 신자임을 내세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근원의 안식을 얻기 위해 어떤 미망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통렬히 깨우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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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
캐런 엘리엇 하우스 지음, 빙진영 옮김, 서정민 해제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 우리 한국의 근로자들(지금은 다 할아버지 세대입니다만)이 건설 현장에 파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이슬람교의 종주국이자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뚜렷한 인식이 전세계에 박혀 있는 나라입니다. 아주 최근 뉴스로는, 오바마 미 대통령이 "9.11 테러 관련 소송을 못 하게 하려 행사한 법안 거부권" 관련으로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이 책 내용 관련으로는 시아파(정통 수니파에 입장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신도들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 이란과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던 소식이 몇 달 전에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로선 거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지만, 세계 정치 무대, 경제 섹터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어느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고, 그 나라나 그 주변이나 정치적 평온과 안정이 유지되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 곳입니다(특히 주식 투자자들 입장에서).

이런 사우디아라비아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진다는 게 이 책 저자의 분석입니다. "두 개의 성지를 관할하는", 아랍 세계의 큰형님과도 같은 이 나라에, 1) 사회 구조의 근본적 취약성에 기인한 동요, 2) 왕실 내부의 분쟁과 갈등 증폭, 3) 석유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가 맞이하는, 세계 산업 환경의 대폭적 변화에 따른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흔한 말로 "퍼펙트 스톰"이라 불릴 만한 국가적 재난이 닥칠 지 모른다는 내용입니다. 여성을 억압하고, 소수자(종교, 정치, 사회)를 탄압해 온 몹쓸 체제가 그 응보를 받겠거니 여기면 그만일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로 인해 국제 사회 전체가 받게 될 타격,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사는 선의의 피해자가 입을 비극을 어떻게 수습하겠냐는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거시경제에 닥치는 재난은 그 지역의 손해로 그치질 않는다는 점, 지난 브렉시트 위기나 그리스 재정 파탄 당시 우리는 똑똑히 지켜 봐 왔습니다. 아울러, 다 같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보편적 가치가 제 자리를 못 지키고 붕괴할 때, 마냥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국외자로 머물 수 없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어느 일부의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그런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일종의 책임감과 목적의식을 지닌 채, 공정하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현지 사정에 밝은, 위로는 왕실 주요 인사들, 아래로는 기층 민중의 간난에 대해 정확한 파악을 하고 있는 저자분이 쓰신 종합 보고서입니다. 분량도 만만치 않은데, 소설처럼 술술 읽히게 쓰신 덕분에 한달음에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보기에 막연히 그러려니 했던 선입견을 상당 부분 걷어낼 수 있었고, 근거 없는 짐작과는 정반대의 특이한 사정, 과거 내력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읽는 내내 눈빛을 반짝이게 되더군요. 게다가 저자는 언론기관에 오랜 세월 몸담은 "여성" 저널리스트이기도 해서, 특히 여성 문제의 제반 모순으로 신음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여성 할례 문제"부터 해서 우리 보기에 역겹고 혐오스러운 사건 사고들이 그간 한둘이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2년 전쯤 헐리웃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위 "닫힌 사회"일수록 근거 없는 믿음과 패거리를 모아 마구 우기기식의 한심한 작태가 횡행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달 착륙"이, 버젓이 당시 미국 정부가 소련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주장을,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이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게 제재까지 가하는 장면이 있죠. 헌데 이게 아무 희망과 미래가 없게 된 가상의 세계(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실제로 정통파가 종교의 가르침으로 전제적 지배를 행하는 신정 일치 사회에선 성직자와 권위 있는 기관의 "선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진리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쿠란이 그런 것까지 미리 예견할 수 없고 따라서 명문으로 기록된 바 없으니, 교단에서 이를 "인정"해야 애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고 일반에 통용되는 믿음 취급을 받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현대인의 보편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런 모습들이 이곳 닫힌 왕정 국가에선 당연하다는 듯 일상을 지배합니다.

보통 우리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지배하는 나라(특히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과 대조할 때)"로 이 사우디를 인식해 왔으나, 이들 왕실(현 집권자라 해도)이 미국에 대해 취하는 자세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주권국가가 강대국에 마냥 굽신대는 게 물론 정상이야 아닙니다만, 최근 필리핀의 두테르테 같은 이가 히틀러를 거론하며 막나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이들의 현실 인식 역시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우리식의 구태와 인습을 사회에 그대로 유지하려 나가는 시도에 다른 나라에서 웬 간섭이냐는 식의, 아주 퇴행적인 반항이라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지요. 이런 나라에서 보편적 인권 의식, 계급 타파, 평등 의식이 제 자리를 못 찾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한 독점적 이익은 그것대로 누려 왔으면서 "미국 등 서방 자본이 우리를 내내 착취한다"고 근거 없는 피해 의식을 갖는 것도 우습습니다. 구미의 자본과 기술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채굴과 판매, 유통도 못 했을 텐데도요. 만약 이런 나라들이 그저 취약한 수준의 담합(가끔)에 그치지 않고 모든 원유의 유통과 생산, 판매에 독점권을 가졌다면 우리 소비의 현실의 여러 국면, 양상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우디 왕실은 우리 생각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편이 아닙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와하비 운동"과 이 족장 세력이 연합하여 아랍 수니파 생활권을 통합하려 든 게 지지난 세기의 일인데, 이 종교 운동은 지극히 편협한 믿음을 가진 일부 과격파들이 주도한 과거 역사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왕실을 있게 한 그 열풍에서 주류를 장악했던 교리 일부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지닌 현실의 인식과 당위의 방점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점에 놓여 있는지 독자에게 경각을 촉구합니다.

사우디 왕실은 내부 분란과 비극적 대립으로도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네팔 왕실이 국가 장래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다 총격으로 가족 대부분이 사망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파를 탄 적 있습니다(혹자는 자작극이라고도 합니다만). 헌데 그런 작고 미미한 나라에서만 비극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이 왕실에서도 두 형제가 복수를 한답시고 현 국왕에게 총구를 겨눠 피를 본 패륜극이 모두가 보는 앞에 펼쳐진 적이 있었네요. 현재, 그 두 형제의 동생 되는 다른 왕자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진보도 보수도, 평민도 왕족도, 반미도 친미도 아닌 주변인의 삶을 삽니다. 이분을 저자가 밀착 접근하여 여러 재미 있는 취재를 한 기록이 길게 나옵니다. 저자의 태도는 매우 공정하여, 우리가 흔히 갖는 중동 왕족(더군다나 선대 왕의 직계 비속인)들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이들 실제 왕자들의 삶이 매우 큰 차이를 보임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왕족 출신들 중 많은 이들이,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학교를 졸업한, 전문 분야도 뚜렷하고 교양도 풍부히 쌓은 인재들입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마음에 응어리진 바 없이 성장한 덕에 인품도 좋고 균형 잡힌 세계관으로 외부인을 대할 도량이 넉넉한 이들이라는 군요(우리 생각으로는 막 자기 생각만 상대에게 강요할 것 같지만). 오히려 상대(기자라든가 기타 전형적인 서구인들)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우려를 가질 지 미리 알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매너가 돋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정확한 실상과 실태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저자 같은 분의 프로페셔널 저널리즘도 돋보이겠고 말입니다. 여튼 문제는, 이런 근 삼만 명에 달하는 왕족들이 마땅한 대우를 못 받거나, 개인의 적성과는 전혀 무관한 직역에 배치되어 불만과 좌절만 쌓여간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사우디에는 편협한 종교 교육이 우선이기 때문에, 과학기술 등 사회의 핵심 인프라를 일굴 실질적 지적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애써 과정을 이수한 이들(그나마 소수)이 제 대우를 못 받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우민화 정책의 영향인지 무지몽매한 이들이 아직도 과거의 폐습에 사로잡혀 무엇이 진짜 모순의 원인인지 감도 못 잡은 채 약자를 억압하는 게 현실입니다. 몇 년 전 이집트, 리비아 일대에서 보편적 실업과 빈곤에 분노한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가 일어났지만, 이곳 사우디만큼은 그런 움직임이 대단히 미미합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이슬람 종주국이라는 헛된 자부심 등) 보수적 움직임이 주류인데다, 젊은이들조차 패배적 마인드셋, 근거 없는 반미주의에 젖어 일어날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죠. 어찌 보면 미국의 근년 어리석은 외교 정책 과오가 좋은 구실을 마련해 준 셈입니다.

"왜 당신은 절대 진리인 이슬람으로 당장 개종하지 않나요? 혹시 당신 주변에서 그런 당신을 곱게 보지 않으려는 시선을 두려워해서인가요?" 심리학에서 이런 심리를 두고 "투사"라고도 부르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이 받을 비난이 두려워 미리 상대에게 같은 허물을 씌워 말문을 막으려는 비합리적 방어 기제를 뜻합니다. 지금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같은 여성이 보기에 매우 안타깝다는 듯 어느 사우디 여성이 이 책 저자에게 건넨 충고 아닌 충고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세계관과 의식에 발목 잡힌 것도 기가 찰 판인데, 남까지 물귀신처럼 자신이 빠진 함정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으니, 우리 독자로선 어이가 없지만 이게 사우디란 나라가 처한 엄연한 현실의 일각이라는 점 무겁게 받아들여야겠죠.

사우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정상적 산출량 증가로 도박을 벌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셰일가스/석유 업체들이 세기적 혁신을 도모하는 현황에 위기 의식을 느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이들을 도산시켜 독점적 자원 생산국의 이점을 누려 보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과거가 미래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화석 원료는 이미 탄소 과다 배출이 유발하는 환경 파괴에 심각한 경각심을 가진 인류에 의해, 그리 멀지도 않은 장래에 무대에서 퇴장할 운명입니다. 비단 (같은 탄소 기반인)셰일 산업이 아니라 해도 말입니다. 미래는 화석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적 팩터뿐 아니라, 전근대적 폐습이 개인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모든 전선에서 함께, 거대한 위력으로 진군하게 마련입니다. 계몽된 미래에 저항하는 사우디의 구체제가 붕괴하는 건 자명하다 해도, 어떻게 연착륙을 시킬 지가 우리 모두의 과제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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