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로 본 경영의 착각과 함정들 - 건강한 한국 기업을 위한 피터 드러커의 제언
송경모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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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방대한 저작을 남긴 경영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경영에 "사상"이 개입할 여지나 있을까 의심을 갖는 게 더 흔한 인식일 텐데요. 드러커 박사님은 이런 인식이 오히려 그릇된 속물적 태도임을 분명히 계몽이나 하듯, "혁신"이라든가 "사회적 책임", "동반 성장" 같은 개념을 그 이른 시기부터 명확히 규정하며, 대중과 CEO 모두에게 상생과 건전한 성장에 대한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 타당한 지표를 가르쳐 준 그의 저작이라 해도, 한 권의 분량에 압축된 내용을 독자가 접하거나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의문도 적잖게 들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음 이 한 권으로 드러커를 마스터했다"라는 생각보다는, "확실히 오늘날에는 드러커(의 가르침)란 이렇게, 혹은 이런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확실히 오긴 했습니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21세기에 재조명되는 드러커의 교훈에선 이런 지점들을 눈여겨 봐야 한다"라든가, "여태 못 읽고 지나친 드러커의 함의 중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종래 고도성장기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쉬웠고, 마냥 편한 보장이 제공되는 건 아니라도 "평생 직장" 개념이 (일본처럼) 자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규직"은 우리들에게 낯설기만 한 단어이며, 지금도 노동계에선 "모두의 정규직화"라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기도 합니다. 헌데 그렇게나 예전에, 드러커 박사가 "비정규직의 중요성"을 논한 적이 있었을까요? 서구나 북미에선 그때부터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비중이 컸었기에 (우리 막연한 인식과는 달리) 이 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긴 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고용 환경에서 일상화된 패턴 중 하나이기에 이런 한 마디가 나왔던 게 당연하지만, 그런 사정(비정규직의 보편화)이 아직도 낯설고 적대적인 우리로서는 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드러커는 "비정규직도 분명 소중한 지적 자본 중 하나"라고 규정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사가 당신을 실망시킨다면 과감하게 자유로운 유목민이 되는 길을 택하라."고 권유까지 하시는 저자님이지만, 독자로서 꽤 망설여지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도 4대 보험은 있어야죠.

아무리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주권의 시대라도, 회사에서 민주주의가 절대 보장 안 된다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뿐만 아니라 사장님들은 종종 그 직원들의 "부족한 인성"까지 교정하려 듭니다. 회사는 특히 한국에서, 이익을 내기 위해 모인 파트너쉽이나 2차 집단이라기보다 원칙 없는 학교 같은 느낌도 줍니다(요즘은 학교라고 해도 선생님들 자의가 지배하지는 않죠). 보통 경영 관련 서적에서 가능하면 지배적인 리더십을 따르라고 충고하지 이런 문제적 상황을 지적하는 태도는 보기 힘든데요. 저자께서는 "CEO가 선의의 계몽군주는 아니다.'라며 드러커의 주장을 정면 인용합니다. 사실 이 (드러커의) 한 마디는 올해 초 선거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 김종인 씨의 전횡을 지적하며 조국 교수가 꺼낸 표현이기도 합니다. "군주는 선의건 악의건 현대 조직에서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죠. 민주화한 조직에서 개인의 창의가 최대한 발현되고, 조직 소기의 목적을 보다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의 본질은 직원의 연수가 아니라 경영자 개발이다" 드러커의 한 마디 중 이것보다 파격적인 언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소위 "목적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objectives. MbO)"의 관점에서, 당면 과제에 효용을 제공 못 하는 모든 자원은 다 낭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저자께서는 재미있는 비유로, "드러커"라는 이름은 중세 네덜란드어로 인쇄업자라는 뜻인데, 이때만 해도 인쇄업 기능이란 평생 한 번만 배워둬도 그 자손들까지 쓸 수 있는 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드러커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노동자나 경영자라도 지금처럼 어제의 지식이 오늘의 휴짓조각으로 급속히 변하는 시대는 겪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드러커의 대안은 "지식을 배우지 말고, 배우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드러커는 생전에 일본의 "개선"이라든가, "온 더 잡 트레이닝"에 주목하고 구미의 경영자들에게 적극 도입을 추천했죠. 노동자들, 직원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현장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무엇을 배울지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게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 직원임은 또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자율권, 참여권을 주고 혁신을 스스로 이뤄나가는 주체로 키우는 기업, 경영자 스스로가 무지를 인정하고 함께 기업을 꾸려 나가는 기업이야말로 이 혁신의 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블룸버그에서 혁신 지수 1위로 한국을 올려 놓았다는 뉴스는 저도 몇 달 전 웹에서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드러커가 파악한 혁신의 개념은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그는 첫째 혁신은 위험하지도 않으며, 둘째 뛰어난 아이디어나 기적적인 행운에 의하지도 않고, 셋째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며, 넷째 내부에서만 일어나지도 않으며 업종의 현황에 반드시 밝아야 할 필요도 없으며, 다섯째 (개인적으로 이게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영리 기관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여섯째 공무원이든 학자든 누구라도 일으킬 수 있는 게 혁신이라고 합니다. 혁신은 심지어 어린 청소년의 반짝하는 아이디어에서도 유발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는군요. 혁신의 이런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혁신이 그저 근로자나 사회 다른 섹터 성원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욕을 꺾는 데만 구호처럼 동원된다면 우리 나라는 곧 보잘것없는 변방의 활기 없는 소국으로 전락하리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드러커의 가르침이나 혁신에 대한 이런 통념이, 보다 실질적이고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경영 목표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잘 확인할 수 있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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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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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 존재의 본질은 "기억"이라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두뇌에서 쌓아온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다면(그리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우리가 마주하던 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억은 그 사람이 앞으로 특정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환경과 자극에 대해 어떤 감성적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기 머리에 저장해 두는 기억에 대해 대강의 그림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가깝고 먼 장래에 대해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기억은 그래서 그의 과거일 뿐 아니라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존재의 핵심을 규정하는 기억에 대해, 뜻밖에도 저자는 "인간 문명의 역사는 곧 기억의 외주화의 역사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개념 규정에 전혀 낯설었던 독자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무도 생각 못한 영역을 가리키는 탁월한 정의(定義)"라고 바로 느낌이 왔습니다. 사람의 기억 용량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기술 수준의 도약이나 습득한 지혜의 효과적인 전승, 전달을 위해서는 작은 뇌의 물리적 처리 능력에 마냥 기댈 수가 없고, "외주화"를 반드시 이뤄야 합니다. 기억의 외주화가 이뤄지고 나서 인류는 그 깨달은 지혜의 항구적 보존, 혹은 시공을 초월한 "공유"가 가능했고, 이 덕분에 문명은 비약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책은 이런 관점에서, 어떻게 과거에 인류가 "효과적인 외주화"를 이뤘는지 그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조명합니다. "배우는 방법을 배움"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애써 터득한 지혜를 외주화하여 개인의 한계, 시공간의 장벽을 넘어서게 하는 그런 지혜 역시, "메타 지혜"., 혹은 "지혜의 진정한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내용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일 뿐 아니라, (저자의 말씀처럼) 엄청난 저장 기술 발달(디지털 혁명)으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는 인류가 어떻게 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길 지에 대해서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 줍니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 데이터(의 저장)가 곧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이슬람의 정복자들이 이집트에 쳐들어와서 저지른 만행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운 것인데, 그 장본인이 남긴 말 "꾸란과 같으면 필요 없는 동어반복이고, 꾸란과 다르면 그릇된 이단이다."가 유명하죠. 하지만 이 현상 이면에는 지식을 통제하고 해석하는 집단의 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음도 또한 분명합니다.

인간은 호기심이 있었기에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무척추동물들의 평탄하고 모순, 갈등 없는 삶으로부터 멀리까지 궤도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진화는 마냥 고등생물로서 우월하고 안전한 생을 보장해 주는 경로가 아니며, "아담과 이브 설화"에서 보듯 위험하고 예측 불허의 개척을 요하는 새로운 생으로 옮아가는 도전 과정이었습니다. 거친 환경에 폭 넓게 적응하고 그로부터 성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축적된 지혜와 기술을 "외주화"하여, 동료와 후손에게 효과적으로 공유시킬 필요가 있었지요. 이런 수요가 성공적으로 충족되었을 때, 인간은 무한한 성취감을 느끼며 눈 앞에 이뤄진 성과 외에도 앞으로의 험난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인들은 "기억의 외주화"가 부른 착시 현상을 차라리 경계해야 한다고도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책만 가득 쌓아 두고 그 책 속의 지식이 책을 소유한 자신에게 당연히 체화되어 있으려니 하는 착각이, 그 당사자를 구제 불능의 바보로 만든다며 따끔한 경고를 날렸습니다. 저자께서 이 일화를 인용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방대한 지식에 대해 바로 모바일 기기를 통해 접근할 수 있고, 특별한 수련 없이도 바로 쓸 수 있게 가공된 지식을 어느 누구나, 심지어는 (소액의 데이터 이용료 말고는) 거의 치르는 비용도 없이(텍스트 정보는 바이트를 적게 소모하죠) 습득 가능한 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인공지능이 요즘처럼 세간의 뜨거운 화제가 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전에는 막연한 설정으로 인간이 묻는 질문에 기계음을 섞어가며 척척 대답을 내어주는 로봇이나 안드로이드, 혹은 엉뚱하게도 자동차 등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했지만, 저런 기술이나 존재가 현실화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는 다들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특히 구글 사가 선도하는 구호처럼, "빅 데이터를 통한 학습 능력을 갖춘 중앙 정보 처리 장치"가 이를 곧 현실화할 수 있을 듯 기대가 팽배하죠. 그러나 이런 기술이 바로 상용화하여 돈만 주면 사고 쓸 수 있을 만큼 두뇌(인공지능이 모방해야 할) 구조가 이론적으로 해명되었는지도 미지수일 뿐 아니라, (괜한 호들갑이겠지만) 그런 인공지능이 보편화했을 때 오히려 인류가 맞게 될 위기는 전혀 예기치 못한 재앙일 수 있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볼 수 있는 혜택이 손에 잡히기도 전에, 그 부작용만큼은 여기저기서 그 단초가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앙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기억을 태평하게 외주화한 인간- 제 삶의 주인이어야 할 - 들이,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어 간다는 징조입니다.

지금 우리가 외주화를 위탁한 매체는, 분별력도 없고 맹목에 가까운 식욕만 가진 디지털 디스크입니다. 반면 과거의 종이, 책, 파피루스 등은 그를 기록하는 인간의 지성과 판단, 재량이라는 에이전트를 거친 기록이며, 무작위 무차별의 정보 난장판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남자"의 예를 들며, 고통스럽게도 선별적으로 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 인간은, 그 정보(기억)의 홍수 속에서 아무것도 취사선택할 수 없게 되며, 마침내 무엇을 알아 볼 수도 표현할 수도 없어 기억의 장악은커녕 백치가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남자"나 결과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적인 우리 사정과 무슨 관계냐고요? 지금의 디지털 매체는 "어떤 것도 잊지 않고 유실하지 않고 모든 것 -사실뿐 아니라 거짓, 욕설, 사기, 허위 정보, 무의미한 헛소리 등 일체 -를 기록, 기억합니다. 이런 매체에 외주화를 맡긴 우리 인간은, 나중에 이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할 지 거의 선택의 마비지경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자는 그래서, 무슨 정보를 걸러야 할 지 "필터링의 효율화"를 의미하는 "디지털 리터러시(문해율)"을 강조합니다. 앞으로 정보의 진위와 효용을 판독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거의 문맹자나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정보와 가용 자원이 많을수록 더 바보가 되기 쉽다는 이 기막힌 역설, "기억의 외주화"로 문명사를 정의한 저자의 혜안 덕분에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문명이 발달한다는 건 어찌 보면 이런 뛰어난 스승이 얼마나 많이, 자주 배출되느냐 같은, 양이 아닌 질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간만에 너무나도 유익한 책 한 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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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 평전 - 조선의 얼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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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물이라면 자신의 분야 하나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아 뒤에 오는 이들의 발걸음을 매우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경우를 대개들 떠올립니다. 독립 운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며, 하나의 쾌거나 지속적인 조직 활동으로 이족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던져 준 이들을 그런 이유로 반 세기가 넘도록 영웅, 선열로 떠받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조선 반도에 당시 살았던 삼천만 생령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었겠고, 오늘날의 우리는 의무감과 애국심, 자긍이 얼마나 깎였겠습니까?

위당 정인보 선생은 그러나 이 책(평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듯, 어떤 범주에 넣고 우리가 내내 기려야 할지 판단이 다소 어려운, 다방면에 걸쳐 위업을 이루고 겨레의 정신을 일깨운, 거대한 생을 산 포괄적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인보 선생의 함자를 들으면 대뜸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평전 작가(우리가 이미 다른 여러 저작, 명작을 접했기에 잘 알죠)인 김삼웅 선생도 책 중에서 언급하듯, 나이 든 세대에게는 그 배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여러 명작 시조로 잘 알려진 문학가이기도 하고, 저희 세대 같은 경우는 국사(근현대사)의 강점기 파트에서 "얼 사상"을 설파한 사상가, 민족 운동가로 널리 인식되었죠. 그의 업적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언론인, 역사학자, 유학자로서의 양명학풍 계승자로서, 비단 "민족 운동의 거목"으로서의 뚜렷한 위상을 떠나서라도 후학들에게 잔뜩 연구할 과제를 던져 준(물론 후진의 발걸음을 크게 가볍게 해 준 연구 업적도 지대하게 남긴), 현재 진행형의 실천적, 이론적 목표이자 지향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편이 인용되었지만, 그는 일단 조선 최고라 할 만한 학풍의 명문가, (김 저자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학문의 가문"에 태어나 그 시대 환경이 허락할 만한 최상의 교육을 받은 인재였습니다. 양명학이라 하면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다소 비주류 스탠스의, 조심스러운(반체제로 오인 받지 않기 위해) 학통 접근의 자세가 필요한 진영이긴 했으나, 여튼 핵심 집권층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면면한 평판과 진지한 기풍의 가문이었음은 부인 못 합니다(p16에 직근 가계가 잘 도시되었습니다). 이건승, 이건창 양씨 형제(이 이름들은 국사 교과서에서 작지 않은 비중으로 강조된 암기 사항입니다)가 어린 시절 정인보에게 끼친 영향 역시 책에 잘 설명되어 있고요. 그 모계 역시, 조선에서 학문과 입신 출세 면에서 공히 높은 평가를 받는 유서 깊은 가문이었죠.

단 이 책을 읽으며 작은 의문이 들었는데, 그 모친에 대해 "참판을 지낸 달성 서씨 성건호의 딸"이란 소개가 있으나 일단 성건호란 이름을 가진 분이 "달성 서씨"가 될 수는 없고요. 제가 업무 중 작은 시간 날때마다 여러 다른 책을 뒤져 보았으나 어디서 이런 출처가 나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그 모친께서 "달성 서씨'인지, "대구 서씨"인지는 책 전체를 통틀어 모호한 부분입니다. 저자께서는 여러 차례 "달성 서씨"로 못을 박으시는 것 같으나(이 부분이 중요한 건 이후에도 계속 나오듯 위당이 그 모친에 대한 애틋한 정과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인간은 이처럼 기본적인 혈육에 대한 존중이 확고한데, 비천한 정신이 이를 이해 못 함은 당연함), 정작 위당이 직접 쓴 글(책 중 인용문들)에서는 명시적으로 "대구 서씨"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대구 안에 달성이라는 지명이 있으니(이것 역시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면 해당 종문 인사들이 엄청 화내십니다. 보통 잘 모르는 이들이 "대구 서씨"를 그저 "달성 서씨"에 포함시켜 범칭하는데, 전자와 후자가 분명히 분파되었고 특히 전자 측에서는 아예 선조 대부터 구별되는 계열이라 주장하는 분들도 있으니 신중해야 하죠. 대구 서씨는 특히 경남 고성 일대에 집성촌을 이뤄 살며, 현재까지도 그 자제들이 명문대 합격률이 높아 고장에서 명성이 자자하니 이게 다 오랜 가문 내력의 소산입니다.

일단 위당은 통렬히 겨레에게 민족혼을 일깨운 위인이라, 책 편제에 무관하게 독자로서는그의 얼 사상(책에서는 제10장)을 우선 짚고 싶네요. 저희 세대는 "박은식의 혼 사상, 정인보의 얼 사상"을 항상 짝으로 두고 필수 암기하게 교육 받았는데, 정신에 이렇게 키워드가 한번 형성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학습과 사색, 심화 탐구의 동기가 생기니 저런 주입식 교육도 결코 나무랄 건 아닙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무슨 정인보 선생의 그 심오한 체계를 한 학기에 걸쳐 가르칠 것도 아닌 이상 말입니다. 신채호의 낭가사상은 이 두 흐름과는 조금 성격과 좌표가 달라 한 단계에서 함께 논할 류는 좀 아니죠. 그는 이 얼 사상의 정초를 닦을 때 문일평, 안재홍 등과 협력했다고 책에 나옵니다만, 이분들은 문우(文友)이자 같은 기관에 몸 담고 언론 활동을 편 동지들이기도 하죠. 위당뿐 아니라 어느 민족운동가의 생애를 살필 때에도, 초심은 꿋꿋하고 재능도 탁월했으나 혹심한 탄압에 결국 훼절한 안타까운 사례가 많이 보이지만, 이분의 경우에도 그 훌륭한 분들이 하나하나 곁에서 멀어져 가는 과정이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김삼웅 저자께서는 정인보 얼 사상의 핵심에 대해, 소장 연구자인 최지연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째 그의 사관은 정신사관이다. (유물론적 조류와 거리를 두었다는 뜻이겠죠)
둘째 그는 실학파(조선 후기)와 1910년대~20년대의 민족주의 학파를 직접 계승한 입장이다. (이는 그가 멀게는 실학파와 양명학의 거두들, 가깝게는 신채호의 학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적자임을 강조하죠)
셋째 1910~20년대 민족주의 학파가 빠진 함정인 영웅중심 사관을 극복하고, 역사의 중심에 다중과 집단으로서의 민족이 놓여야 함을 강조했다.
넷째 "얼 사상"으로 타율성론을 타파하려든 확고한 반식민주의 입장이다. (당연하죠)

특히 셋째와 관련, 이 책에서 다양하게 인용(이 책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된 그의 저술을 보면, 이런 경향성을 직접 비판한 대목이 실제로 보입니다. "외국의 영웅을 추숭하며 나옹이니 화옹이니 떠들지만..." 이때 나옹은 당시 표기로 나폴레옹, 화옹은 워싱턴을 가리키죠. 물론 이 언급은 충무공 이순신의 추숭을 강조하며 나온 것이니만큼 그 역시 영웅주의 사관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같은 역비판이 가능하지만, 충무공만이 갖는 역사 속에서의 특수 위상도 감안해야 공정한 접근이 가능하겠습니다.

고 천관우 전 동아일보 사장은 (이 책에도 인용되듯) 대략 1930년대의 트렌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죠. 1) 이병도 중심 실증주의 2)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사관 3) 실학, "국학" 유파를 계승한 신 민족주의 사학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며,
이 중 위당이 3)에 속함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재 신채호와는 동료이자 십여 년의 나이 차를 둔 일종의 사제관계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평가합니다. 재미있게도 위당은 자신만의 관점을 담은 "단재론"을 펴고 있어 우리 독자들이 시대상과 인물관을 동시에 찬찬히 살필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당은 단재의 천재성을 두고 극구 높이 받드는 평가인데, 그의 옛스러운 표현을 최대한 현대식으로 바꿔 요약한다면 1) 남이 못 보던 기이한 점을 문헌에서 잘 발견한다 2) 복잡한 논의 속에서 지엽말단을 제거하고 요점을 잘 파악한다 3) 숨겨져 있는 흐름을(때로는 의도적으로 위장된 속에서도) 그대로 통찰한다 등입니다. 이 책은 아마도 독자들이 가장 어려워할 만한 대목이, 당대의 명문장가로 손꼽힌 위당 자신의 인용문 속에, 너무도 고풍투의 표현과 어휘가 다수 포함, 활용되고 있다는 이유가 있겠죠. 그런데 위당의 재능 그 정수는 바로 이런 기발하고 적확한 표현력에 있으므로, 후학들의 눈 어두움, 배운 바 없음을 오히려 자책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정인보 선생은 특정 세대에게는 시조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분인데, 이 책에서는 우리 시대 연구자로 김인환 교수, 지난 시대 정인보 연구 권위자이자 본인이 시조 시인이기도 했던 고 이태극 교수 등의 글을 자주 원용하여 독자에게 좋은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태극 교수님은 바로 저희 세대가 배운 교과서에 작품이 자주 등장한 문인이기도 해서 특히 반가웠습니다. 옛 유가의 거학들이 자주 강조한 대로, 수신제가 이후에야 치국평천하인 법으로, 사람이 그 혈육과 존속에 대한 삼가고 받드는 마음이 없다면 그 천박한 입에서 나오는 온갖 미사여구와 명분이 다 허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자모사>(연시조)에 표현된 그의 간곡한 효심은, 어디서 위대한 정신이 민족과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타당하고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사람이 세상에 나와 제 활개를 폄에 있어 가정 교육의 바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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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 행동의 방아쇠를 당기는 힘
마셜 골드스미스.마크 라이터 지음, 김준수 옮김 / 다산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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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혹은 법학이나 기타 "인과 관계"가 논제로 끼어들 수 있는 모든 학문 영역에서, 원인(remote cause. 原因이 아니라 遠因입니다), 근인(近因. approximate cause), 그리고 trigger(최근접 동기, 촉발인), 이 삼단계 구조를 인용하곤 합니다. 사리를 판단함에 있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밝혀 내는 건, 가장 본질적이고 강력한 설명의 본체입니다. 이 부분이 해명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단계에 불과하죠. 어떤 결과를 빚은 "먼 이유", "가까운 이유", "결과를 발생시킨 직접 닿은 계기", 이 세 가지가 시원하게 밝혀지면 이론은 거의 완성됩니다.

그러나 마셜 골드스미스는 자기계발에 있어, "먼 이유나 가까운 이유"를 밝히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런 심오하고 근본적인 탐구는 순수 학문의 영역이며, 설사 그게 무엇인지 밝혀진다 해도 당사자의 생활에서 직접 유익한 결과를 낳는 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겁니다. 총알이 총구에서 발사되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 혹은 악의"라든가 "작용 반작용의 법칙, 인화를 유발하는 화학 반응" 따위가 아닌, 가장 상식적이고 실천적인 지점을 꼽으라면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일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며, 이곳을 손 안 대면 총알이 최소한 원거리까지 발사될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 역시, 어느 지점을 손 대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질 만한" 어떤 내적 동기, 습관, 자극 기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 방아쇠와도 같은 지점을 찾아 집중 공략하여(아니면 반대로, 그런 행동이 더 이상 유발 안 되게 장애물을 설치하든가)행위자의 삶, 일상, 습관을 바꾼 후 성과를 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셜 골드스미스뿐 아니라 (그가 이 책 속에서 지인이라며 몇 번 언급하는 사치 같은) 다른 일류 자계서 저자들도, 책을 쓸 때 일방적이고 추상적인 설교로 일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때, 독자나 청중이 지루해하며 별반 감화를 받지 않을 것임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쓰는 기법은 거의 언제나, 자신이 직접 인터뷰한 유명인사,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모범적인 인생 들의 사례를 인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책에도 그런 태도의 관철이 예외가 아닌데, 사치, 블룸버그 시장, 보잉 회장 앨러리 등의 구체적 예가 실려 있는데, 이렇게 책을 쓰면 다른 사람이 표절하기가 상당히 힘들어지기도 하죠.

"트리거"에 대한 위와 같은 정의는 사실 영어 네이티브에게는 일일이 반복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방대한 발화(發話) 환경에 노출되어 온 결과 당연하게들 알고 있는 겁니다. 4장에서 골드스미스가 정리하는 이 개념의 정의는, 이런 전제를 먼저 바탕으로 깔아야 그 풍성하고 정확한 의의가 (특히 비영어권의) 독자에게 다가오겠습니다. "간접적 트리거"라는 것도 원인, 근인에 비해서는 훨씬 가까운 거리에 놓인 거고, 요걸 손만 댔다 하면 바로 총알이 튀어나오듯 결과의 양상이 바뀐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습니다(그게 아니라면 이미 "트리거"가 아님). 가족 사진을 볼 때 전화를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그 사람에게는 이런 행위가 트리거라고 간주될 수 없습니다. 반면 "옛 생각"은 독립해서 그것만이 자극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트리거"가 되지 못합니다.

요약하면, 가족사진이 "옛 생각"을 직접 자극→ 옛 생각은 전화 거는 행위를 직접 유발 (그러나 가족 사진이나 그 어떤 다른 매개 없이 옛 생각이 정상적인 두뇌에 느닷 떠오르진 않음. 만약 그렇다면 일종의 정신 이상), 뭐 이런 기제를 거쳐 (행위자가 콘트롤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트리거(비록 간접적이긴 하나)가 "가족 사진 보기"가 되는 거죠. 트리거의 또다른 특징은 그래서 "행위자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고 내면의 자제, 절제, 조절에서 행위 변화가 가능하다면 일상인이 아니라 득도한 고승이죠. 골드스미스는 고통스럽고 달성 가능할 법하지도 않은 아득한 내면에서가 아니라, 쉽게 발견가능한 일상과 주변에서 계기를 찾아 나를 변화시키자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계서 본연의 기능이 그런 것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트리거는 예상한 것일수도, 예상 못한 것일수도 있다." 예상이 되는 건데 왜 이를 콕 짚어 내어 생산적인 실천 과정에 편입하지 못할까요? 만약 어떤 이가 성과를 제대로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골드스미스의 관점에서라면) 이런저런 트리거를 많이 찾아서 실천화한 사람이라는 겁니다("맞아, 난 이렇게 하면 달라지더라고."). 그러나 많은 이들은 트리거를 "귀찮게" 일일이 찾아서(설사 알고 있다 해도) 습관을 교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당사자가 그저 편하게 느끼는 루틴, 타성이 있는데, 자계서뿐 아니라 많은 두뇌과학 토픽 서적에서 언급하듯 대개는 이런 루틴에 그저 따르는 걸 자기 판단, 자발적 결정에 의한다고 착각하는 거죠. 골드스미스가 명시적으로 그 말을 하진 않아도, 루틴이 그저 당연한 게 아니라 의심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마땅하며, 트리거는 그 결과로 루틴 대신에 들어간 모듈이라는 주장을 결국 이 책에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상 가능한 트리거를 일일이 찾아내어서 대신 이식한 사람"은, 이제는 "예상 못했던 트리거"도 눈에 보이고 찾아 내며 이를 일상에서 핵심 계기로 활용까지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트리거"는 범용 만능 계기를 하나 찾아서 그날부로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A의 트리거, B의 트리거, ..... Z의 트리거, 알레프의 트리거,... 등등 거의 무한에 가까운 일상의 나쁜(혹은 좋은) 습관에 따라 개별 트리거가 다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범용 트리거를 찾고 싶은 사람은 역시 절에 들어가서 스님과 함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면서부터 훌륭한 부모님께 훈육을 받아 좋은 트리거만 몸에 배어 있다면 그 사람은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아이겠습니다. 11장에서 "하루 질문" 등 표를 만들어서 트리거 생성의 점검을 권유하는 건 다 이런 전제 아래에서 도출되는 실천적 방침입니다.

20장은 다소 "감동적으로" 이뤄지는 책의 마무리인데요. 이렇게 일상에서 소소한 습관 하나라도 생산적인 교정이 이뤄진 사람은, "어, 저 친구 봐?"라며 주변에 어떤 자극을 주는, 공동체와 사회의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정도가 된 사람은 저자 골드스미스처럼 책 쓰고 강연 다니면서 올린 소득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상 받는 건데, 뭐 그런 단계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일단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자신이 만나는 문제라도 시원하게 해결하는 인생이라면, 먼저 자신의 몸이 성취로 인한 정직한 상쾌함을 맛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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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핑크 출애굽기 강해 아더 핑크 클래식 4
아더 핑크 지음, 지상우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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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이하 이 책의 표기를 좇아 "아더"로 씀) 핑크의 생애와 저작을 읽으면 저는 언제나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올바르다고 믿는 원칙과 소신을 위해 구태여 주변과 마찰을 빚어가면서, 협소한 자아의 욕구와 만족이 아닌 "더 큰 이상"의 실현에 기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하는 것.  그 과정과 결과가 개인의 아집과 독선에 그치지 않았음은, 그가 교계에 남긴 신학적 업적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현재의 실태를 보면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남에게 듣기 좋은, 솔깃한 말만 골라 하는 건 특별한 노력을 요하지 않는 법이죠. 엘리야나 이사야, 나단 같은 이들도 대중에게 호응과 존경을 얻은 게, 감언이설과 공감을 빙자한 선동 따위를 통해서가 아닌, 진실과 실체를 향한 갈구와 선포가 그 비결이었음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typology는 비단 신학에서뿐 아니고(신학에서의 등장이 가장 시기적으로 먼저인 것도 아니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방법론, 혹은 유파로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진영"입니다(예를 들어 언어학에서는 유형론, 고고학에서는 형식론). 하지만 다른 학문 분야에서 발전한 방법론이 신학의 이 입장 태동과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더군다나 "모형론"은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만) 신학에서 꽤나 입지가 탄탄할 수밖에 없는 "태생"을 갖췄는데, 이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신약 텍스트 중에서, 거의 직접적이라 할 만한 "모형론적 언급"을 수 차례 하고 있음("모형론"이란 용어 자체가 아니라)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뿐 아니라, (스승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이 당연한) 사도들도 여러 대목에서, 현대 용어로 "모형론적 태도"로 볼 수밖에 없는 깊숙한, 그리고 울림 깊은 발언을 어려 차례 행합니다. 만약 "모형론적 방법론"이 어떤 이유에서 송두리째 신학(중 주석학)으로부터 퇴장하는 일이 혹 생긴다면, 신학의 전 체계가 붕괴하리라는 예측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초기 유력 교부들 중 여럿은(비록 다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본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타나크")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했습니다. 이런 교부들의 태도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인 기준이라 해도) 아주 수긍이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중에 목사님이 되실) 신학생들 입에서 나오는 "성경(聖經)이 성경(性經)인가?" 같은 대화를 듣기도 했는데, 물론 경박한 표현인데다 그게 당사자들의 최종적 결론은 아닌 줄 알지만, 여튼 구약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미약한 인간의 지혜라서인지는 모르나) 상당히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구절들은, 설령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들어도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합니다. 경전의 문면(文面)이 이런 형편이기에, 성경을 읽을 때(마르틴 루터 이래 평신도들 누구나 성경에 접할 수 있으며, 또 그게 의무의 일환입니다) "주석과 해석"이 없으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고(깊은 신심과 영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또 그게 주석학자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에 주(註)를 다는 근대적 기법과 지혜는 역사적으로 다른 어떤 학문보다 먼저 기독교 신학에서 비롯, 발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법학에서의 주석서(Kommentar. 영어의 commentary) 서술법이 있죠.

모형론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구약의 상당수 사건과 선언, 기술(記述), 증언은 신약의 교리와 계명을 본따서 이뤄진 것이란 전제에서 시작하는 해석 태도입니다. "모형"이라는 말 자체가(신학뿐 아니라 일상언어에서도), "모방해서 만든 꼴"이란 의미죠. 시간적으로 먼저 이뤄진 일들(과거)이, 어떻게 이후의 진행(미래)을 모방할 수 있느냐며 의문이 생기는 게 또한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는 신학의 방법론을 주제 삼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연대적 순서가 시대구분적 합리성에서 벗어난다"는 핑크의 다른 맥락 언명도 있습니다. p452:17). 앞서 언급한 대로, 무엇보다 신약의 복음서 등이, 구약의 이러이러한 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이러한 행적과 가르침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사건의 발생을 "예언함"이었다는 식으로, 거의 직설적 서술을 행합니다.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 신도들은, 자신이 소박하게나마 이해한 대부분의 성경 해석론이 알고보면 "모형론이 그 전부나 마찬가지였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형론은, 기독교인이 성경을 받아들임에 있어 어느 정도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자세"라고 해도 과언이 역시 아닙니다. 물론 그 무차별적인 적용에 있어서는 크나큰 신중함, 자제가 필요하겠지만요.

"둘은 언제나 분리의 숫자이며, 셋은 언제나 현시(manifestation)의 숫자이다." 아더 핑크가 즐겨쓰는 문장인데, 최소한 전자를 위해 인용되는 예 중 different, diversion에서 di- 어근이 그런 의미임은 세속적, 언어과학적 맥락에서도 타당해서 재미있습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삼위일체에서의 3 역시 현시(顯示)로건 암시로건 묵시로건 간에, 이런 영원의 진리와 조우할 때 울림이 예사롭지 않은 숫자이죠. "삼 개월이 되던 날, ...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삼 개월이 아니라 삼 년, 삼십 년이 지나도 이 모세의 백성들이 얼마나 지도자, 구원자의 속을 썩이는지는 문제아가 그 부모의 속을 태우는 게 애교로 보일 만큼이죠.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인데, 여튼 신학적 문제에서 "과연 시내(시나이) 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의 섭리시대가 시작(dispensation)되었다는 확증이 있는가?"라는 오랜 물음을 아더 핑크는 도전적으로 내어 놓습니다.

그는 특히 p286 중간쯤에서 "어느 평판 있는 주석자"의 문장을 길게 인용하고, 이를 놓고 신랄하다 할 만한 어조로 비판을 시작하는데, 이 27장에서는 이에 관한 논의가 대부분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참고로 많은 분들이 큰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 "주석자"가 누군가 하면, 대략 아더 핑크의 시대보다 반 세기를 앞서 산 에드워드 데넷이라는 존경받는 학자, 성직자였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번역본, 혹은 영어 원문에도 명시적 언급이 없어서 정보 삼아 이 서평에 기록해 둡니다. 참고로 p468:10, p484:2 등에는 이 이름이 나오지만(이때에는 그 인용 주장이 핑크 자신의 의견과 같은 취지라 이름을 바로 밝힙니다), 데넷 말고도 다른 여러 주석자들(코츠, 라이다웃[이 번역서에서는 "리도우트"라고 쓰더군요], 솔타우. 크레인, 불링어, 브라이트)이 언급되는 터라,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줄 독자가 눈치채긴 힘들겠죠. 참고로 이 번역서는 소결(summary)을 편제상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제72장으로 다뤘고(다른 章과 동등한 지위로 봄), 원서나 번역서나 참고 문헌 목록이 없는데 이는 주석서의 성격, 편집상 이유입니다. 근엄하고 신실하기 짝이 없는 핑크의 문장과 어조에 다소 주눅이 들 수 있지만, 성경 구절의 진의가 항상 궁금했던 신도들(혹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가르침을 담은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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