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건 죽음
앤서니 호로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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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스테리 장르물에서 가장 친근한 소재라면 사설 탐정의 좌충우돌, 영화 등 모험 사업 현장에서의 삐걱거림, 그리고 셀럽의 죽음 등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런 소재로 대중장르물에서 이처럼 풍성한 이야기가 가능한 건 오로지 미국뿐이겠다 싶었는데, 지금 우리 나라 모습을 보면 이런 쪽에서는 오히려 일본을 능가합니다. 거꾸로 20세기 들어 미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영국 작가가 쓴 이 작품을 읽고 느낀 건,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호손 시리즈 같은 게 나올 만하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온갖 연예인, 셀럽, 인플루언서 들이 대중과 접촉하고 희한한 화젯거리를 만들어내며 때로 미심쩍은 인명 희생까지 빚어지니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첫째챕터 씬#27을 보면 영화촬영현장이 얼마나, 더군다나 야외촬영이라면 온갖 애로사항이 돌발적으로 꽃피는지 잘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앞으로는 AI가 매우 정교하게 생성하는 그래픽의 위력 덕분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가 잘 힘들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제는 CG에 매우 질려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현지에서 찍는 건데(언론에 노출하여 토픽도 의도적으로 생산하고), 이 역시도(바로 이 소설에 잘 나오듯) (별 의미도 없는) 지출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영화 산업은 그저 가오에 죽고사는 대사업가가 돈 버린다 생각하고 주변의 찬탄을 즐기는 맛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 주변에서 양심없는 스탭들이 눈 먼 돈 "줏어들 먹는" 풍조도 어디나 비슷하고 말입니다. 

미국이나 우리나 능력은 부족하고 양심은 더 부족한 변호사들이 제도의 맹점에 편승하여 가뜩이나 더러운 판을 더 더럽히며 공익을 대변하기는커녕 있던 질서도 더 어지럽힙니다. 이 소설에도 별의별 희한한, 타락하고 배배꼬이며 나쁜 쪽으로만 혈안이 된 변호사들이 몇 등장하죠. 소설을 다 읽어 보면 애초에 이 변호사라는 작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만큼 꼬이지도 않았겠다 싶을 건데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호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없던 새 사건까지 만드는 판이니 말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영미(중에서도 특히 미국) 장르물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양념, 전채, 디저트, 코믹 릴리프, 나아가 메인 디시가 바로 탐정이라는 직종입니다. 한국에서는 그간 흥신소가 준불법이었기에 양지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제 법제화가 허용되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사회에 인식될지가 관심 대상이죠. 미국 장르물의 탐정들은, 어떤 경우 대단히 경박하고, 어떤 때는 귀족적이며, 어떤 때는 범죄자와 다를 바 없이 타락한 속성이었습니다. 호손은 경우 전에 형사였고 지금은 개인 영업이니 former or turned 공히 detective입니다. 그 성격은, 마치 현대 일본 장르물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처럼 예측불허형입니다. 작가 호로위츠(실물)가 우리에게 처음 이름을 올린 홈즈물(현대판)의 그 주인공과는 아주 대조적이죠. 

호로위츠(실물 작가)는 언제나처럼 작품 중에서 self-referential한 스타일을 구사합니다. 작가는 미국에서라면 이미 영화제작 등 다른 인접 분야에 한 발 들여놓고 활동을 겸업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p138에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죠. 작가란 확실히 스릴 넘치면서도, 여성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즐겨받고 때로는 도에 넘치는 갈채를 받는(본인은 그렇게 생각않는) 그런 직종입니다. 대개는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학을 나와, 이런저런 여성들과 염문도 뿌리고, 그러다 오지게 사고를 쳐 신불자가 되고... "그녀는 정말로 일요일 저녁에 린드허스트 부근의 외딴 오두막집에 있었을까?(p191)" 당연히 그에게 먼저, 대뜸, 들었어야 할 의심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호손. 도우려는 사람이지(p241)." 그 말을 지금 새삼스럽게 하는 호로위츠(캐릭터)나, 이런 말을 새삼스럽게 상대방에게서 구태여 꺼내게 만드는 디텍티브 호손이나 참 답답하고 코믹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호로위츠의 작품들에서 독특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게 이런 불완전한 허점투성이들이 풍기는 매력이며 독자에게 선사하는 재미입니다. ㅎㅎ p354에서 호로위츠는 느닷 봉변을 당한 후에도 그답게(?) 해학적인 상황 해석을 늘어놓는데 눈치빠른 독자는 벌써 여기서 사건이 어떤 결말을 향해 치닫을지 감 잡았을 터입니다. 전개가 스피디하면서도 수다스럽고 아마도 영어 원문으로 읽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호로위츠-호손 요철 듀오의 본격 활약상이 기대되는 두번째 작품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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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보고 그림으로 듣는 음악인류학 - 불교와 세계종교
윤소희 지음 / 민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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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비잔티움 제국도 인근의 야만 슬라브 족을 다룰 때 우아하고 그윽하며 사람의 정서를 근원에서부터 진정시키는 교회 음악과 미술의 탁월함을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이처럼 종교 의식의 진행에는 진중하고 아름다운 음악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이런 이치는 아시아에서 훨씬 이른 시기부터 발견되고 구체화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는 "불교"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책의 내용은 그에 한정되지 않아서, 불교 음악을 중심으로 장대하고 정치한 논의가 이뤄지되, 가장 먼저 탄생한 종교음악인 불교 음악 이후에 등장한 유교, 도교 음악까지 분석합니다. 또 책 후반부에는 이미 중세때 접점이 있었던 이슬람에 불교 음악이 남긴 흔적(예컨대 황홀경 체험을 중시하는 수피즘)이라든가, 알고 보면 본질이 상통하는 기독교 음악과의 관계까지 논급되니 실로 엄청난 스펙트럼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세종은 우리 국어 교과서에도 나왔던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그 아들 수양대군 이유는 이에 화답하여 <석보상절>을 썼는데 모두 불교 사상이 가득 밴 문학작품이자 음악 가사입니다. 책 p143에도 나오듯 원래는 궁중악과 범패(=불교음악)이 함께 연주되었으나, 국행수륙제가 이후 폐지되면서 범패는 민속에서만 연주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범패의 속성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p146에 나오듯 불교 음악의 원류는 힌디 경전인 <베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세종과 그 아들 이유가 만든 정간보 역시 불교 음악의 큰 틀에 기대었습니다(p149). 

세종 연간에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된 게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입니다. 성종은 세종의 증손자입니다. 세종부터가 불교에 대한 그윽한 신앙심을 지닌 인물이었는데, 나라가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 사대부를 주축으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총명하고 조화로운 그의 정신이, 불교의 지극한진리에 깊이 감화된 바 있었던 덕이겠습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의 중심부에 재야 사림을 끌어들인 최초의 군주였으나, 조정에는 여전히 전통의 불교 진영에 한 발을 걸친 인사들이 포진했었습니다. p82에는 성종 대(代)에 완간된 <악학궤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선의 아악이라고 하면 궁상각치우의 5음계만 생각하지만, p85에 자세히 나오는 대로 격팔상생의 원리에 따라 12음이 탄생합니다. 이는 또한 적절한 대응 과정을 거쳐 24절기에 연결되는데 동양 철학 고유의 심오한 경지까지 음악을 통해 엿보는 게 가능하죠. 

유계(劉季)가 세운 한나라는 후대의 몇몇 통일 왕조처럼 마냥 국수적이거나 쇄국적이지 않았고 서역과 두루 교류했습니다. 이연년이라는 인물은 책 p105에도 니오듯이 사마천의 <사기> 중 열전의 한 부분에서 주제로 다뤄지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영행열전"에서 다뤄지는데, 영행이라 함은 권력자의 측근에서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총애를 입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사기>나 <한서>나 이연년이 독립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고 <한서>에도 열전 파트 중 "영행전" 속에서 평론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의 사랑을 받으려면 노래를 잘하는 게 하나의 방법인가 본데, 이연년이 확실히 음악 전반에 조예가 깊었는지 한실 조정의 악부(樂府)를 그가 만들었다가, 이후 실각한 후에는 대거 축소되었다는 말이 p107에 나옵니다. 

진나라가 북쪽 여러 오랑캐에 의해, 그 전에 황족 내분에 의해 멸망한 후에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이후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중원이 멀리 서역의 문화에 대해서도 관대해집니다. 또 이때 불교가 구마라집(p132)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본격 교세를 화하(華夏)에서 넓히게 됩니다. 저자는 이때의 대대적인 문화 교류와 발전에 대해 p112 이하에서, 퓨전(남), 크로스오버(북)이란 말로 그 격동상을 요약합니다. 또 이후 등장한 당나라의 영향은 실로 동아시아 일대에 큰 흔적을 남겼는데, 일본도 이무렵부터 중국 문화를 본격 수입하였고 그 대표적 유물이 p113에 나오는 쇼쇼인[正倉院] 소장의 당비파입니다.  

건달이라는 말은 현대에 이르러 어떤 경우에도 좋은 뜻으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원 간다르바는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이며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었으니(p185),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 전개된 억불숭유의 잔재라고 저자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불교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바미얀 석굴 파괴라든가, 12세기 말 델리 술탄국 아이바크의 날란다 승원 절멸조치와 같은 여러 박해를 외부 세력으로부터 받았는데, 모두가 그 평화지향적 성격 탓이었습니다. 책 p187 이하에서는 산대극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내용상 변천을 겪었는지가 컬러 사진들과 함께 자세히 서술됩니다. 

어느 종교든 율법과 경전을 중시하는 게 정통파이며 명상, 황홀경,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분파는 이단시됩니다. 그렇다고 수피즘이 언제나 이슬람 주류에서 벗어났던 건 아니고 오히려 술탄이나 샤의 정책 기조에 따라 더 환영받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책 p242를 보면 20세기 초 튀르키예 이슬람이 수피즘을 이단으로 규정했다고 나오는데 이때는 이미 터키에서 세속주의에 밀려 이슬람이 크게 위축되었을 때입니다. 책에서는 시인, 음악가, 신학자, 수피 수도사였던 메블레비 루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됩니다. 저자는 문화상품과 종교적 순수성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17세기 투르크의 빈 포위는 기독교 세계의 존속 여부에 큰 고비가 되었는데, 이 영향으로 심벌즈라는 튀르키예 악기가 들어왔고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이 탄생했다는 저자의 분석은 흥미롭습니다. 

불교 음악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음악사, 문화사를 아우르는 저자의 필치에서 실로 통섭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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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세상에서 사는 지혜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이동연 편역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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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누구나 초월적이고 고아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세상은 대단히 타산적이며 그 나름의 합리성에 의해 빈틈없이 작동되는데, 이런 논리에만 따르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속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의 트렌드에만 따르지 않겠다며 간혹 우리는 귀여운 일탈도 꿈꾸는데, 난 너희들과 다르다며 공연히 엇박을 내는 이런 태도가 어쩌면 속물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이미 한국 독자들도 꽤 알고들 있는 근세의 철학자 겸 성직자인데, 현대인에게도 깊은 공감을 주면서도 솔직담백한 가르침을 남겨 오늘날에도 애독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보다 근 백 년 뒤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p33에서 저자는 자연 그 상태만으로는 세상에 널리 쓸모있게 불릴 수 없고, 다듬고 또 다듬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탁월함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탁월함을 수련하지 않고, 제멋대로 휘두르며 그저 내세우는 허영에 좌우된다면 이는 재능이 아니라 야만과 폭력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재주가 있으면 잘 다듬어서 쓸모있게 사회에서 활용이 되도록 해야지, 그대로 묻어둔다면 그 역시 큰 회한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성직자의 말씀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울림을 줍니다.  

빌타사르 그라시안의 책에서는 마치 세상살이에 달통한 노련한 선배의 팁 같은 충고도 여럿 나옵니다. 예를 들어 p100 같은 곳을 보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과제나 목표에,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에 매몰되어 너무 깊숙하게 빠져들기도 합니다. 몰입이나 열중은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단계이죠. 그러나 결국 목표가 달성 안 되고 좌절하기도 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마치 미노타우로스의 라비린토스에 빠져든 테세우스처럼(물론 테세우스는 이때 목적을 이룬 상태였지만), 아리아드네의 실패를 미리 마련하여 그를 통해 미궁을 빠져나왔듯이 이 수렁에서 발을 뺄 장치를 예비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중근세 성직자치고는 놀랄 만큼 실용적인 충고입니다. p212를 보면, 대비책이라는 건 여행 중인 나그네에게 고향과도 같다는 말이 나옵니다. 

동서고금의 재사(才士)들을 보면 공연히 상대를 자극하여 자신이 얼마나 머리가 좋고 상황을 잘 바꿀 수 있는지 과시하는 수가 있습니다. p152를 보면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고, 나중에 수습해야 할 이런저런 말썽을 미리부터 파종(播種)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라는 취지로 충고합니다. 복잡성이라는 게 갈수록 증가하는 요즘이며,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변수를 다 감안하여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모델을 만들어 일일이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하여,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숱한 변수를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 놓아야 합니다. 

자제력은 지혜를 지키는 문이라고 합니다(p222). 진정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어도 그 눈빛이나 태도가 진중하여 절로 그 사람됨을 눈치챌 수 있다고도 합니다. 사실 필요도 없는 상황에 공연히 큰 모험을 거는 건, 나의 소중한 재능이나 기회를 무익한 위험에 노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책 곳곳에서 자신을 쓸데없이 노출하지 말라고 하는데, 큰 싸움을 앞두고 내 정보가 노출되어 전략적으로 이로울 바가 무엇이겠냐는 취지로 읽힙니다. 그래서 복수 중에 재미있는 종류의 복수는, 적에게 무시로 일관하여 그를 망각 속에 빠뜨린다는 것이란 말도 p250에 나옵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건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목표에 걸맞는 수준이라야 하며, 지나치게 거창한 준비는 당사자를 거꾸로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인지 방향도 언제나 감 잡아야 하겠지만, 반대로 먼 지점만 보다가 현장을 놓쳐서는 또 곤란하다고도 합니다(p93). 나무와 숲을 동시에 주시하며 미시와 거시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게 처세의 핵심이겠는데, p68을 보면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타인과 차별되게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확실히 이 저자분은 현대적 감각을 풍기는 철학자이며, 다만 그 표현을 대중적으로 할 필요도 있다고 하며 소통과 융화의 미덕에 대한 강조도 끝까지 빼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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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철학자의 사랑수업 - LOVE is ALL
김형석 지음 / 열림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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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김형석 교수님의 책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을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새 책이 나왔는데, 그간 교수님이 당신의 책에서 잘 하지 읺으시던 흥미로운 회고담이 많았습니다. 교수님께서 여전히 건강하시고 과거사를 명확하게 기억하시며 그 의미를 새롭게까지 재생산하신다는 증거라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교수님은 1980년대 베스트셀러 저자이시기도 한 터라, 연세가 좀 있으신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교수님은 독자들이 다들 알듯 일본 조치대학, 즉 한국식으로 읽으면 상지대학 출신입니다. 한국의 강원도에 있는 대학은 한자를 尙志라고 씁니다. 뚯을 받든다는 의미지요. 반면 가톨릭 계열이 세운 상지대는 그 한자를 언제나 上智라고 씁니다. sophia를 지혜라고 옮기자니 다소 불교 색채가 배어 의도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앎이라는 뜻에서 저리 번역했죠. 아마도 청년 시절이다 보니 교수님도 본인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비추어 이 학교를 다니는 게 과연 맞는지 회의가 잠시 들었나 봅니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별 걱정을 다 하셨다 싶지만, 아직 세상에 대한 경험이 일천했던 청년으로서는 당연히 그런 불안감이 생겼겠습니다. 

대학이란 본래가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중세 영주들도 대학이라는 자치 공간에 함부로 침범하지 못했고 그 안에서는 학문의 자유는 물론 고도의 경제적, 정치적 자율이 실현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캠퍼스 밖에서는 군국주의의 시퍼런 서슬이 판을 치면서도 담장 안으로만 들어오면 이런 놀라운 자유가 숨쉰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이색지대"라 표현하는데, 이 표현부터가 사실은 옛날식이라서 독자는 조용히 한 번 웃게도 됩니다. 

군국주의로부터의 억압이 담장을 넘지 못하는 건 물론, 가톨릭계 운영 측의 종교적 간섭이라는 것도 일절 없고, 학자들은 그저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청년 김형석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 요즘 교수들 중 일부는 폴리페서 소리를 들을 만큼 정치에 과몰입하거나, 아예 수익 사업에만 빠져 있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만약 아시아태평양에서라도 일제가 승리를 거뒀다면 저런 아름다운 전통도 모두 말살되었거나, 마치 막부 치하에서 천주교 탄압이 벌어졌듯 일종의 문화소팅 작업이 시행되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 봤습니다. 교수님이 존경한 마하트마 간디는 다시 일제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을지도 모르고요. 

교수님은 이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대해 매우 심취했는데, 교수님 책을 여태 읽어 온 독자라면 익히 잘 아는 사항입니다. 이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모한다스 간디 선생이 갑자기 김형석 소년을 군중 속에서 연단으로 끌어올리더니 "이는 나의 후계자입니다!"라고 선포하더라는 겁니다. 마치 예언자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를 반겨 들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동아시아와 인도를 편하게 왕래할 수도 없고,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지도 못했으니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며 젊으셨던 교수님 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하고 감격스러우셨으면 이렇게까지 즐겨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교수님 동창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있습니다. p47에서 그 성함은 직접 언급 않으시면서 "한국이 최초로 배출한 추기경"이라고만 하시는데 왜 성함을 거론 않으셨을까에 대해서도 제 나름대로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김 추기경보다 교수님이 두 살 연상입니다. 또 친분이 있었던 윤동주 시인(p70)보다는 교수님이 세 살 아래입니다. 이 책에서도 "윤동주 형"이라고 호칭됩니다. 윤동주 시인은 프로테스탄트 계열인 릿쿄 대학을 다녔죠. 읽다가 깜짝 놀랐는데 1980년대 수필 부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교수님, 그리고 안병욱 교수님 이 두 분이었는데 p101에서 성함이 바로 언급되어서입니다. 안병욱 교수님은 11년 전에 타계하셨으며 김 교수님과 연세가 같습니다. 책에 나오는 대로 두 분은 친분이 두터웠으며 두 분 다 연세대와 깊은 연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같이 절제되고 경건하게 사신 분은 "세속적 의미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언뜻언뜻 그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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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말을 참 예쁘게 하더라 - 말 매력으로 완성하는 ‘대화의 에티켓!’
김령아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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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도 합니다. 특히 2차 집단인 회사에서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어떤 워딩을 쓰느냐에 따라 소통의 결과, 발언의 파장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도 합니다. 말을 통해 주변의 인심을 아주 잃을 수도 있고, 반대로 조직 내 그 사람의 입지가 크게 상승하기도 합니다.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가식과 위선의 처세술만 펴는 건 그것대로 역겹지만, 진정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하면 부드럽고 유쾌한 말로 소통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역시 좋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잘못은 먼지에, 칭찬은 대리석에 새겨라(p47)." 사자성어 중 저 말과 비슷한, 춘풍추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당신에게 험담을 전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당신에 대한 험담도 남에게 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겠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없이, 이 정도 말은 저 사람에게 건네도 되겠거니 하는 기대로 아무 말이나 생각없이 꺼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상대방은, 이렇게 가볍게 남의 말을 하는 당신을 보고 나도 저런 취급을 다른 사람 앞에서 받겠구나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말도 아닌 걸 구태여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마구 퍼뜨릴 이유가 뭐겠습니까. 

또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험담을 삼가는 것도 삼가는 것이지만, 남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칭찬을 아낌없이 해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칭찬은, 마음에도 없는 아부 같은 게 아닙니다. 요즘은 아무리 그게 사화생활의 일환이라고 해도, 능력도 없이 오로지 아부만으로 때우려는 사람이라면 결국 승진에서 밀려나고 조직에서 도태됩니다. 직장에서 자기 원칙이라는 게 있는 사람은 구태여 남들에게 구질구질한 아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시는 칭찬은, 첫째 그 칭찬을 받는 상대마다 다 다른 말이라야 하며, 둘째 그에게 진정으로 의욕이 샘솟는 말을 통해야 합니다. 사실 이 두 사항은 결국 뜻이 통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다 개성이 다르고 장점이 다른데 어떻게 그들을 향한 칭찬의 표현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진심이면, 그 사람을 향한 칭찬 역시 (딱 맞는 칭찬이므로) 그 사람의 의욕을 북돋우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나야 다른 사람 마음 상하지 않게 말을 조심조심 가려가면서 한다고 쳐도, 남도 나한테 그리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을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나한테 공격을 해 온다면, 내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그에 대응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이, 바로 이곳, 즉 남의 험담에 내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가르쳐 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사회 생활이라는 게 나 혼자 잘한다고(=나만 말 이쁘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나를 향한 비판이라고 해서 하나로 퉁칠 게 아니라, 하나하나 그 타당성을 좀 따져봐야 합니다. 들어서 내 감정이 상한다고 다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들어서 잘 분석해 보면 그 말이 객관적으로 맞을 때가 있습니다. 단점을 고쳐 내가 종전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그게 그 비판자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남 좋은 일 시킨다는 꼬인 생각을 구태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그 비판이 비판이 아니라 배배꼬인 비난일 뿐이라면, 이는 나의 참된 가치에 아무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자존감이 매우 튼튼하여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어 표현에 agree to disagree라는 게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나와 생각이 다르지만, 적어도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이뤄지지 않았냐며 어떻게든 최소한의 접점을 마련해 보려는 노력이 배어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95를 보면, 챕터 제목이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즐거워지는 대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이가 아마도 엄마와 딸 사이일 텐데, 그 모녀조차도 "정리"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차이날 때 잠시라도 다툼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 엄마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애 말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게 아니라, 얘는 나와 생각이 좀 다르구나, 엄마로서 쿨하게 인정을 해 주라는 겁니다. 내 말을 남한테 관철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그게 카리스마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터무니없는 피해를 강요하는 나쁜 사람입니다. 어떻게 내 생각이, 일일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그리 확신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역지사지를 통해, 남과 얼마든지 공감의 지점을, 그것도 폭 넓게 마련할 수 있음을 배운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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