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인간 - 내 인생 좀먹는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법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 지음, 변선희 옮김 / 알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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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찌 보면 막연하고,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개념이죠? "유해인간"이라... 하지만 관념과 원칙을 떠나, 생존을 위해 살벌한 현장을 뛰어야 하는 우리 일상인들로서는, "아, 왜 하필 이런 인간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나 내 귀한 인생이 이런 스트레스와 장애를 겪어야 하나!" "Get out of my life!"를 외치고 싶을 때가 수시로, 아니 거의 일상으로, 벌어지는 게 보톹입니다. 난감하죠.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엮이자니 심사가 파탄이 날 것 같고,... 참으로 해롭습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유독한 인간, 해로운 인간" 이 책의 번역 제목처럼 "유해인간"이라고 불러 줘도 될 것 같습니다(원제는 toxic people, 스페인어로는 Gente Toxica입니다).


유 해인간이란 어찌 보면 주관적 개념입니다. 나를 해롭게 하고, 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의 감정을 심각하게 해치려 드는 훼방꾼은 다 유해인간이죠. 이 중에서도 특히 직장 상사라든가, 사무관계에서 우월한 입장에서 갑을 관계를 지배하려 드는 중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절실하게 유해성을 실감시키는 인간이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 논의하는 유형 중 상당수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공개적으로 언어 폭력, 인격 무시, 모해 따위를 행하며 남을 괴롭히는 게 습성이 된 부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실 무서운 건 이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해 있을 때입니다. 나와 대등한 위치라면 그리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나보다 시니어의 위치에서 분쟁 해결 최종의 단계에 나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라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많겠죠. 그런데 이 책을 잘 살펴 보면, 그런 계층 사이의 상이점을 두고 "유해인간"의 대처 방법을 세분화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점이 좀 아쉬운 점이었어요. 대체로 보면, 직장 동료 같은 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를 괴롭힐 때의 방법이 더 비중 있게 제시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더군요.


유해인간의 부류는 다양하게 제 시되고 있습니다(이는 어느 정도, 모든 이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만한 유해인간의 통성은 없다는 걸 노출하는 부분입니다). 이를테면 첫 장에서는 질투쟁이입니다. 남이 가진 걸 못 가져서 부러워하는 이른바 envying의 부류죠, 이런 질투에 대해 나폴레옹 등 역사적 위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 나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일 테죠. 개중에는 무능한 직장 상사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보유한 부하를 착취하기 위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수도 있습니다. 능력이 다가 아니라는 둥, 관계 개선이 직장에서 더 중요하다는 둥 겉으로 내세우는 말은 그럴싸한데, 결국은 "내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고 굻어!" 이 한 마디로 요약되죠. 어떤 무능한 돌팔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제 무능이 폭로되므로, 지레 인턴, 레지던트, 간호사를 못살게 구는 유형도 있습니다. 열등감, 또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갖춰야 할 인격의 성숙성을 못 갖춘 시니어의 경우, 이런 행태가 눈에 띄게 보입니다. 이련 경우 저자는, "질투는 뼈를 녹인다" "나는 가장 나 다울 때 매력이 최고도로 발산된다" 등의 명제로, 자존감을 갖고 근거 없는 모해에 휘둘리지 않을 것을 당부합니다.


유해인간은 다분히 주관적 분류입니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건설적이지 못한 소모전 신경전에 일일이 대응할 게 아니라, 그저 정도(正道)를 묵묵히 걷는 선택이 상책임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리고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지사지, 나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는 혹시 타인에게 유해인간으로 기능하고 있으면서, 애꿎은 남만 매도하는 미성숙자는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바로는, 특히 "찌질이형 유해인간"의 경우 전혀 자신이 타인에게 저지른 악행을 기 억하지 못하고, 역학 관계가 유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타인을 공격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저자가 언젠가는 자기 잘못을 깨닫기를" 같은 무력한 평화주의자의 인상을 가장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찌질이형 유해인간은 정신과 치료의 대상이지, 소통과 교호로 나아질 문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런 이들을 상대하면 할수록 나도 그들과 닮아갈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겠더군요. 이 책에서 "법적 대응" 같은 걸 굳이 권고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찌질이는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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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RA 마켓 트렌드 2014 - 세계경제를 주도하는 신흥시장의 진출 전략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엮음 / 청림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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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청림출판의 기획이 여타의 유서(類書)와 는 다르다는 점을 느낍니다. 이 책에는 컬러 도판이나 그래픽 자료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각 챕터마다 도표 한둘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대신 현지(외국)에 진출하려는 우리 기업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들이 빼곡이 정리되어 있네요. 비즈니스 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정보가 필요한데, 경제경영서를 많이 내는 청림출판에서 소비자들의 니즈를 잘 알고 이렇게 맞춰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해외 시장은 11곳입니다.

1) 유럽(중부 동부 유럽): 폴란드, 러시아

2) 근동, 중동 지역: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3)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4) 아프리카: 남아공

5) 중남미: 멕시코, 브라질


국 제 무역을 다루는 입장에서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적 사고 방식과 감성을 현지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주력해야 하는 건, 팔려고 하는 상품의 가격과 품질이며, 괜한 우리만의 감정적 만족이나 자긍심, 가치 따위를 상대에게 들이대어서는 사업에 유리할 게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죠. 사업가는 교육자나 전도사가 아니기 때문에, 비() 비즈니스적 팩터를 교섭이나 계약 체결 과정에서 중시해서는 일이 성사가 안 될 것입니다. 사업도 무역도 모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요소 외에 그들의 자존심과 긍지를 만족시킴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 음으로, 제아무리 인간 관계와 인맥을 잘 다져 놓았다 해도, 현지 시장에 아무 필요가 없거나, 경쟁력이 약한 상품을 안착시킬 수는 없겠습니다. 쉽게 말해,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겠다는 거죠.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되는 "이머징 마켓"은 다 그 나름대로의 부상(浮上) 이유가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라는 말처럼, 현지의 특성을 잘 알고 파고들면 가망 없는 사업도 의외의 대박을 칠 수 있습니다. 사업가는 모두 그 좁은 문을 트고 들어가는 쾌감에 그 업을 유지하는 겁니다. 마치 스트라이커가 골 네트를 기로지르며 구석에 꽂히는 공을 지켜 보는 희열과 비슷하죠. 골 득점이란 90분 내내 많아야 3~4골입니다. 사업의 흥성도 이와 같습니다.


제 일 처음에는 인도가 나오는군요. 사업가들이 주의해야 할 건, 이 책도 지적하고 있듯 인도에는 "레드 테이프"가 생각 외로 강력하다는 겁니다. 대단히 경직적인 관료주의가 아직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게다가 중앙 정부 차원에서 이야기가 잘 되어도, 지방에 내려와서 전혀 다른 상황을 만날 때가 많아요(이른바 "라이선스 Raj"). 이렇게 된 이유는 첫째 인도의 오랜 지역 분권적 정치전통 때문이고, 다음으로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네루식 사회주의가 남긴 legacy를 무시할 수 없어서입니다. 여 기서 주목해 봐야 할 건 의료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 외식 프랜차이즈 산업이 가장 두드러진 성장세라는 점(저는 한국인들이 여기에 주목해서 대박을 노려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만의 고유한 맛을 현지에 적응시키는 게 포인트입니다만), 워낙 국토가 광대하다 보니 스타벅스 같은 업체도 현지에서 원료(원두)를 조달한다는 사실(그러나 물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알다시피 인도는 인프라가 부실한 나라죠) 등이 흥미롭죠. 외국 기업에 배타적이기 때문에 현지 파트너와의 합작을 주로 권장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운에 맡겨야 합니다. 물론 자기 할 일을 다 한 후에요.


베 트남이 그 다음을 잇습니다. 베트남에 가 본 사람들은 알지만,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나름의 예의가 바릅니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옷은 대체로 협상 테이블에 나올 때조차 허름하게 입고 나옵니다(최근에는 의식을 해서인지 꼭 그렇지는 않더군요). 열대 지방이니까 이 점은 우리가 알아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챕터의 처음에 나오지만, 베트남은 아직도 1인당 GDP가 $1,500에 그치는 등 빈곤한 편이고, 가격 경쟁력은 어차피 중국산을 당할 수 없으니 한국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의견이 많죠. 이에 대해 이 챕터의 집필자는 강력한 반대 논거를 제시합니다. 소위 볼륨 존을 치고들어가면, 베트남의 신흥 부유층에서는 상당히 구매력이 높은 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시장을 공략할 때는, 추상적인 평균인을 상정하는 게 아닙니다. 국지적인 섹터에서 분명한 실체가 두터운 수요층을 형성하고 있다면, 아 통계상의 평균 수치가 무슨 소용이나 장애가 되겠습니까? 그 리고 최근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소비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싼 맛에좋다고 구매한 중국산의 품질이, 싧제 써 본 후에의 큰 실망감으로 다가온 후에는, 당연 재구매가 꺼려지더라는 거죠. 한국은 게다가 그 개별 브랜드의 명품 인식도는 낮은 편이지만(우리가 생각해도 국산에 명품이다 싶은 게 그리 많을까요? TV? 갤럭시? 아니면 샘소나이트?), 대신 한국이라는 국가 이미지는 대단히 고급스럽게 다가오더라는 거죠. 이 책에서는 베트남 지하 경제의 큰손으로 "비엣큐"를 들고 있던데, 이걸 한자로 쓰면 越僑, 월교입니다. "화교"가 중국의 해외 동포이듯, 한자 문화권인 베트남에서는 이런 단어를 쓰는 거죠. 책에서는 이것(월교의 본국 송금) 때문에 베트남에 빈부 격차가 늘어난다는 설명이고(동북 지방의 조선족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고 있죠), 우리가 군침을 흘리는 볼륨 존 형성의 원동력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는 겁니다.


사우디는 크게 두 가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미용 욕구가 갈수록 상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알다시피 사우디는 가장 강경보수의 원리주의 교파인 와하비 종파가 국교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눈만 내놓고 다니는 무슬림 사회에서 무슨 미용일까 싶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자세한 건 책을 찾아 보시고요).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LG와의 합작으로 인기를 모았던 브랜드 " 니베아"가 현지에서 인기라고 합니다. 사실 한국의 화장품 국제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죠, 이미. 또 하나는, 의료 시장입니다. 우리 생각과는 크게 다르지만, 사우디는 사람들의 식습관 때문에 당뇨병의 유병률이 그렇게 높은 편이라고 하네요. 가격이 대단히 중요한 변수라는 점, 알라신으로 시작해서 알라신으로 끝나는 현지의 분위기가 가장 큰 변수라고 합니다.


인 도네시아는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을 다녀간 유도유노 대통령의 실용주의 노선 영도 하에, 몇 년 째 착실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도 무슬림을 오랜 동안 신봉한 나라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한 인종 분포를 이루고 있으며, 화교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런 반면 아름다운 경치, 끝도 없이 부존된 에너지자원, 광대한 국토 등은 야망 가득한 외국의 사업가들에게 한없는 매력을 선사합니다. 물론 이들도 오랜 식민 지배 역사의 아픔과 대외 경계 심리를 떨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형편이 피기 시작하는 지금 각종 장벽이 다시 수하르토 때처럼 강화되는 느낌이죠. 이 나라에서 재미있는 건 첫째가 오토바이 시장입니다. 대중 교통이 거의 미비상태인데다 도로 사정도 안 좋으니, 오토바이는 개인마다의 필수품인데요, 최근에는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승용차가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우리에게는 그저 가볍게 스치는 야간 구멍가게 정도인 편의점이, 인도네시아에서는 사교의 장소로까지 기능한다는 사실입니다. 인도네시아 시장의 흥미로운 점은 예전에 제가 다른 책 리뷰에서 "포카리 스웨트"의 예를 들며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1998년 독재 체제가 최종적으로 붕괴된 후, 이 나라는 대한민국의 모든 체제를 하나의 롤 모델로 삼고 철저히 배워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여사는 경제 발전, 민주주의 등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한국을 철저히 동경했는데요, 그 예 중의 하나가 정부 조직 체계를 모조리 베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지만 한때 이 나라가 한국을 보는 시선은 정말 각별했습니다. 최근 일본이 이 나라를 위한 새로운 "대마"로 등장핶다는 말은, 이 기존 사정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좀 의이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왜 여기는 일본이 이제서야 설치는 거지?"). 인도네시아는 굳이 따지자면 한국을 위한 유리한 텃밭이 마련되어 있던 형편인데, 이제 와서 일본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 줄 수는 없죠. 게다가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있어 침략국의 입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故 수카르노 같은 사람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싸웠던 투사이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영어를 잘하는 외국 바이어들을 존중하고, 사업 준비를 치밀하게 사전에 해 오지 않으면 상대 안 해주는 세련된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특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다른 개도국에서의 느슨한 분위기와는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브라질, 남아공, 러시아의 중요성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런데 뒤의 두 나라는 사실 우리가 치고들어가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브라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현지에 한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편입니다. 저자의 말 중 "알고 보면 우리보다 더 정이 많은 사람들이 브라질 사람들이다."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노려 볼 만한 더 좋은 시장은 멕시코와 롤란드라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 모두 교통(육로 교통)상 의 요지입니다. 멕시코는 북미와 남이를 연결하고, 촐란드는 서유럽과 동유럽의 십자로에 위치하죠.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은 인건비가 매우 싸다는 것, 국민들의 자존심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말 조심해서 가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폴란드의 경우 인력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죠. 그런 점은 (우리 선입견과는 많이 어긋나지만) 터키도 마찬가지입니다. 터키 역시 상류층이 교육을 통해 부를 세습(정확히 말하면 세습이 아니지만)해 나간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의 성장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달해 있고, 살 길은 결국 해외에서 찾아야 함이 정답이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오타가 있었습니다. p153 표에서 5행 2열, "레토니아"는 "라트비아"로 바뀌어야 합니다(그런 나라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p128: 5에서 대상홀스 → 대상홀 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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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14 -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4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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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띠 해인 올해 2013년을 두고는, 김난도 교수님은 COBRA TWIST를 화두로 잡았었죠. 한 해를 예측한다는 분들의 능 력이나 솜씨를 두고, 한 해가 지난 후에 그 맞고 틀림을 평가해 보는 건 여러 모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사후적 평가의 매서운 칼날은 피해갈 수 있는 장사나 고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분들의 경우, 이런 자체 점검이나 자아 비판(?)을, 스스로 시도한다는 게 또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죠. 그 자신을 일류 브랜드 중 하나로 대중에 성공적으로 각인시킨 김난도 교수님의 경우, 알아서 이런 힘든 작업을 수고스럽게 수행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COBRA TWIST의 경우, 억지스럽다든가, 어떤 사항의 경우 무리하다든가, 현재의 추세를 두고 억지스럽게 내년에 적용을 시도했다든가 하는 비판이 작년 이 시점에 있었습니다. 억지스럽다는 비판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의 키워드가 아닌 허사(虛辭)를 두고(예컨대 It's 같은) 애크로님 구성에 동원한다든가 하는 그 "형식"을 두고도 이뤄진 면이 있었죠. 잘나가는 사람을 두고 비판이 있는 건 당연한데, 그 중에는 온당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그야말로 무리수가 꽤 되는 것 같아요. 자신 없는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애써 투사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하니까요.


COBRA TWIST의 리뷰(이 책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비중입니다)를 찬찬히 뜯어 보면,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해도 맞는 예측이 참 많았음에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B, "BRAVO, Scandimom" 같은 것은 제가 작년 책을 다시 읽어봐도, 또 올해 판에 적으신 회고 섹터를 읽어봐도 참 잘 들어맞았고 시의적절하기까지 했다 싶더군요. 불만으로 남는 건 그 제목문구 작성의 다소 부자연스러움인데(...), 이 역시 이미 룰을 그리 느슨하게 자체 설정한 후려니 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난도 교수님의 트렌드 분석은 확실히 인문적 소양을 강력한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강점 덕에,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실물의 분석이요 어디부터가 화려한 수사의 아우라인지가 좀 헷갈리기도 하죠. 그런데 트렌드 분석이라는 게 KDI 보고서와는 다른 점이 또 그 부분이라서, 그것도 하나의 읽는 맛으로 간주하고 멀미 안 나게 이 시리즈 고유의, 혹은 저자 특유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가올 2014년은 갑오경장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근래 저자가 보여준 스타일과는 달리 좀 진부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DARK HORSE가 올해의 키워드 모음입니다. 이 시리즈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그저 두문자의 유희적 조합이라서 큰 의미를 둘 건 아닌데, 김난도 교수님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점쟁이 스타일이 느껴져서 재미가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님 책보다 (약간) 먼저 나온 다른 트렌드 서적도 언급한 것도 있고, 교수님 자신만이 언급하고 분석한 항목도 있지만, 그의 탁월한 점은 한정된 숫자로 키워드들을 제한하여 선정하는 능력(백화점식 나열이 아닌)이고, 그 각 키워드에 자신의 풍부한 인문적 지식을 덧입혀 해설하는 재주죠.


D는 SWAG입니다(왜 D인지는 책을 참조).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아이돌 저스틴 비버가 내한했을 때도, 강남 모 클럽에서 GD와 조우했을 때 이 단어가 새삼 화제가 되었는데요. SWAG 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은 경청할 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단어 하나가 이렇게 많은 뜻을 담고 있는가, 이 짧고 경박한 개념에 이렇게 많은 의의가 품어지면, 내년엔 또 어떤 신개념이 나타나서 그 시대의 좋다는 컨셉은 다 독차지할 예정일까,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일종의 회의감도 피할 수 없더군요. 아무튼 SWAG가 중요한 게 아니라, (교수님의 말을 빌리면) 유일한 절대태인 "자유"가 중요하다고 하시니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수님의 청춘 시절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서도 더 정교하고 넉넉한 형태로 다 나온 이야기 아닌가요? Dude!


A 는 Body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의 설명이 가장 좋았습니다. 딴지 거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바디"의 재발견 역시 20년 전에 서양의 모 인문학자께서 일찌감치 설파한 테마입니다. 자신의 존재감 확인(때로는 야릇한 고통을 매개로), 관계 회복의 욕구 등은 교수님만이 할 수 있는 장중한 언어로 이 "트렌드론"의 깊이를 배가하고 있습니다. "브라운컬러론" 역시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여 적절히 잘 삽입, 통합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R 은 "니치"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키워드입니다. 니치를 넘어 울트라니치를 찾아야 한다는 취지인데, 공학 역시 나노의 단위를 기반으로 첨단의 가능성을 물색하는 시대, 개인의 취향이 원자화, 쿼크화되는 시대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결과임을 잘 설명하고 계시더군요. 이는 작년의 트렌드 중 A의 "나홀로 라운징"의 연장선상에 있는 변형 마이크로트렌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K, 키덜트의 추세는 사실 몇 년 전부터 거론되던 단골 아이템이라 딱히 갑오년에 고유한 걸로 부각하기는 좀 그랬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 기회를 세대 전반의 담론으로 연결시키는 교수님의 내공이 빛났구요. H는 하이브리드, 이 역시 예전부터 사골 우려먹듯 인용되던 아이템이지만, 저자는 "패치워크" 개념과 연결함으로써(연결이라기보다 패치워크가 더 주된 개념으로 제시됩니다) 같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점을 부각합니다. O는 플랫폼론의 부각입니다. 한편으로는 유저들의 취향이 미시화 파편화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르는 생산 소비 어느 섹터이건 뭉쳐야 산다고 하는 "판"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R 은 해석의 재해석입니다. 리붓 역시 어느 새 대형 블록버스터의 제작 붐과 맞물려, 일상의 유행어가 되어 버렷습니다. 리붓은 리셋과는 다르죠. 재해석은 기존의 해석을 계승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것을 존재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요. S는 우연발견의 기쁨인데, 이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 리모트한 준비가 예정한 결과물입니다("세렌디피티"라는 개념과도 연결되죠. 왜 그걸 전면에 끄집어내지 않으셨을까?) E는 관음과 노출이 묘하게 결합한 트렌드를 지적하고 있고(오히려 노출, 피관음에 초점이 더 무겁게 놓여 있습니다), S는 교수님 특유의 섬세함으로, 없어도 무방할 복수 어미의 삽입이라는 정성이 깃들었기에 더 주목이 가는 키워드인데, 그 내포는 "돌직구"입니다. 과연 포기하기 아까운 트렌드가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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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인 러브
로지 술탄 지음, 황소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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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헬렌 켈러"


10여 년 전에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그해 오스카, 골든글러브의 주요 부문을 휩쓴 적이 있죠. "사랑"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설, 신화화한 위인에게서, 의외로 "그도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애정 행각 같은 게 공개되면 사람들은 일종의 즐거운 충격처럼 받아들이나 봅니다. 이 <헬렌 켈러 인 러브>작년 발표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화제을 모으며, 이 무명 작가를 단숨에 유명 인사의 대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론 이 책의 소재가 화제를 모으는 건 단지 "사랑 이야기"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헬렌 켈러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읽으며 알게 된 것처럼, 여러 중증의 장애를 후천적으로 갖게 된,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큰 불행을 맞이하고서도, 이를 총명한 지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낙관적이고 선한 심성으로 극복하고 일어선 분이었죠. 그러니, "그런 극한적 장애를 지닌 이에게도 과연 사랑이 가능할까?" 하는, 장애를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의 한심하고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은 사실 더 큰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장애인(그가 아무리 유명인사였다고 해도)의 사랑"이란, 그것도 같은 장애인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이른바) 정상인과의 사랑이라면, 그것도 장애를 가진 쪽이 여성이고, 정상인 상대가 남성이라면, 우리의 의구심은 더욱 커집니다.


이 소설은, 작가 로지 술탄이 기존의 정평 있는 전기와, 켈러 재단 측이 열람을 허락한 편지와 각종 사적 자료를 기반으로, 대부분 사실에 기반한 채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은 분들이 놀라는 건,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매우 생생하며, 그 대화의 표현이 익살맞으면서도 심각하고, 그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들 간의 관계, 상호 이해의 정도가 대단히 심도 있으며, 특수한 개별적 개인들끼리에서 빚어지는 호감, 애정, 혐오, 불신, 갈등, 화해 등의 모습이 시대와 장소를 크게 달리하는 우리에게까지 주는 공감이 진한 농도로 다가온다는 점에서입니다. 헬렌 켈러 이야기라고 하면, 읽어 보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만 따분한 이야기" 정도로 정리하고 외면하려던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아마 충격이 꽤 클 것입니다. 사실 헬렌 켈러의 사연은, 그 가장 공식적이고 점잖으며 진지한 대목에서도 "따분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토록 심한 장애를 지녔던 한 인간이 스승과 주변의 따뜻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정확하고 감성적으로 세련된" 보호 아래, 결국 평균인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 할 지성을 갖춘 성인으로 자라나는 모습은,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래서 두 차례나 큰 자본을 들여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겠고요. 어지간히 감동도 주고 정서적 고양도 시켜 준 그 위인이, 러브스토리(대단히 드문 타입)의 주 인공까지 겸한 채, 미묘하고 치열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사랑을 틔워 나간다면, 게다가 주위의 결사적인 반대를 등에 지고서 가망 없는 항해를 밀고 나간다면, 독자는 어려서 받은 감동의 구조가 한켠에서 무너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미처 몰랐던 진실의 이면을 비로소 접할 수 있다는 기대에 동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말은 소설 서두에 이미 단정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야반도주를 꾀했지만, 연인 피터 페이건은 약속한 시각에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관한 서술들은 나중의 일부 반전도 예비하지 않은 채 확정적으로 모든 여지를 차단합니다. 소설의 대단원은 그 처음에 제시된 상황과 대부분 일치하며, 따라서 독자는 "이 아슬아슬한 평행 우주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붕괴를 유발할 정도로 발달 전개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심을 일단 마치고 로망을 관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말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도(작가가 그런 식으로 얼개를 꾸리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작품 외적 객관적 지식으로 이미 "별 일 없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물둘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대단히 미묘하게 꼬여갔다가, 참으로 그 내막을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해소와 봉합, 아니 발전적 승화를 맞이하는 그 모든 드라마를 지켜 보면서, 독자는 "아닌 줄 알지만,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 터지는 것 아닐까?"하는 조바심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독자는 객관적 역사의 경과를 알고 있으나, 동시에 이 오밀조밀한 인간관계의 실타래가 이 로지 술탄(이름도 참 특이하죠)이라는 작가의 손 안에서 빚어진 허구임도 역시 충분히 감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정과 한계가 뻔한데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이 읽는 내내 떠나질 않는 드문 체험을 하는 거죠.


이성과 충동 사이의 갈등이라고 한 마디로 정리하는 건 그 자체로 진부할 뿐 아니라, 이 개성 넘치고 독창적이며, "세련된" 이야기에 베풀 합당한 대접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는 내내, 켈러의 안타까운 마음, 비록 강도 높은 훈련 과정을 통해 고도로 단련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육신, 맨살, 혈관의 깊고도 가느다란 그 모든 은밀한 지점까지 흐르고 지나갈 욕정(가장 저평가된 채로 말한다면요)과 본연의 심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이점 위에 사서 속 편한(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타당한) 충고를 애니 설리번의 등에 업혀 내내 내뱉습니다. "켈러 양(이 당시 그녀는 삼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충 분히 공감은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테죠.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세요. 그분은 오늘의 당신 존재를 빚어낸 분입니다. 당신의 인격은 양도할 수 없는 당신 고유의 자산이요 본체의 일부지만, 오늘의 상태로서의 그것은 선생님께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봐서라도 당신은 그녀를 거역할 수 없고, 게다가 그녀의 충고는 당신을 둘러싼 현실을, (대단히 죄송하지만) 눈이 불편하고 귀가 온전하지는 않을 당신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텝니다."


그런데 우리 독자도 확신은 없습니다. 왜냐면,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끝까지 전개되며, 우리는 켈러 양의 진술로 걸러진 진상밖에 접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피터 페이건이라는 남자의 눈빛, 행동거지, (만약 숨기는 바가 있었다면) 이로부터 유츄할 수 있는 딴속셈 등은, 우리가 누군가의 설명이라는 매개 없이 접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떠셨는지요. 페이건이, 우리가 알고 있듯 공식적인 역사에서 석연찮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루저"라는 작품 외적 지식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켈러 양이 그를 좇았다면 두 사람 다, 최소한 켈러 양 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인생의 다차원적 비극을 남기고 말았을 못 미덥고 마땅찮은 인물 아니었을까 하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지들 않으셨는지. 페이건의 인품과 됨됨이에 대해서는, 우선 애니 설리번의 "입"이 맹폭격을 가하는 중입니다. 이 작품은 어림으로 1/10 정도의 분량이, "피터 페이건의 변변치 못함"을 질타하는 애니의 대사로 이뤄져 있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녀가 바라본 페이건은, 어딘가 좀 모자랍니다(음식을 입에 묻히고 흘리는 모습이라든가). 그러면서도 명성과 관심을 사냥하는 천박한 근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뺀질뺀질한 눈빛"은, 설리번 선생의 눈에 맺히고 전두엽에 각인된 그의 첫인상입니다. 그럼 어딘가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분명 속물이고 위선자라도, 두뇌가 좋지 못해서 속셈을 쉬이 노출하는 무능한 타입도 있을 것으므로 그닥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애니는 어느 시점 이후, 그녀의 지병 때문에 도저히 켈러 양의 곁에 머물 수 없어 따뜻한 남쪽으로 요양을 떠납니다(푸에르토 리코).


이후부터는 더 단호하고 더 실력을 갖춘 방해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케이트 애덤스 켈러, 그녀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도 물론 피터 페이건의 실물을 보았지만(고용인이니까요), 그런 직관적인 인 상보다는 다른 이유와 필요에서 그를 반대합니다. 소설 중반을 넘기면서 명확히 드러나지만, 켈러 가문은 남부 지방에서 유서 깊은 명문에 속합니다. 하잘것없는 아일랜드 뜨내기 혈통을 받아들일 의향은 없습니다. 큰 불명예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나 볼 법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의식이 있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페이건이 사회주의자에 가까운 리버럴이라는 점입니다. 이 가문에서 진보 성향을 갖춘 인사는 헬렌 뿐인데, 사위(헬렌에게는 제부) 워런을 포함해 모든 성원은 옛 남부의 긍지, 그리고 면도날만한 틈도 허용하지 않을 배타적 신분의식, 보수적 정치관으로 가득합니다. 페이건은 어떤 관점에서도 가망이 없는 구혼자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갈수록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페이건은 다소 불공정한 대접을 받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우 선 애니 설리번은, 유년 시절에는 켈러 가문의 피용인, 지금은 유명인사로서 독자 회계가 가능한 헬렌의 보조자 신분입니다. 선생님이다 뭐다 해도 여기는 동양이 아닌 이상 엄연히 계약 관계의 한 당사자일 뿐입니다. 만약 피터든 그 누구든 헬렌의 곁에 반려자가 등장하면, 그녀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헳렌이라는 존재의 양성, 완성, (냉혹하게 말하면) 흥행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게다가 애니는, 놈팽이 스타일의 어떤 남성(존 메이시)와 실패한 사랑을,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처지입니다. 여러 사정 때문에 객관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반전이 있습니다!). 어머니인 케이트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피터가 케이트라고 호칭하자, "미시즈 켈러라고 부르시오."라고 받아치는 장면도 있죠). 뭔가 변변찮은 인물이긴 한데, 그대로 내치기엔 좀 불공정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 모호한 느낌도 듭니다. 이 소설의 빼어난 점은, 결국 이처럼 모든 것을 흐릿한 장막 속에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방치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경계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진상을 고스란히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헬렌 켈러는 선하디 선한, 신의 계시자라기도 합니까? 소설 후반의 밀드레드(헬렌의 더동생)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언니는 지독한 고집 불통이었지.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어. 마사(마사 워싱턴은 집안 흑인 요리사의 어린 딸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사는 설리번의 고용 이전에 헬렌의 발달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동반자였다고 합니다)가 언니 손에 잡혀서 머리칼을 다 깎여야 했던 일 생각 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비로소, 이 모든 내러티브는 헬렌 개인의 주관적 관점을 짙게 품은, 변형 왜곡의 그림자가 만만찮은 범위로 드리우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일은 누가 보는지의 각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성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죠. 눈이 심하게 멀었느냐, 그렇지 않고 일곱 빛깔 가시 광선을 인지할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는 기실 눈 멀고 귀 먹은 장애인에 불과합니다.


이 소설의 최대 장점은, 등장 인물 사이의 대사가 너무도 재치있고, 신랄하며, 유머러스한 표현이 많아 그를 곱씹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거죠. 오 가는 말이 너무도 재밌어서, 이게 과연 작가 개인의 상상인지, 실제 서신에 그 비슷한 표현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라고 하면, 아마 당사자들 사이에선 입에 올리기도 꺼려지는 금기이자 저주일 겁니다. 그런데 헬렌과 애니, 심지어 나중의 피터 페이건까지, 장애 소재 말고는 농담거리가 없나 싶을 만큼, 쉬지도 않고 조크와 위트를 "눈멂, 귀먹음"에 대해 주고받습니다. 저주를 따뜻한 여유로 승화하는 이런 성숙한 태도야말로, 한 인간의 위대함과 그가 속한 문화의 숭고한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헬렌 켈러가 대단히 강경한 사회주의자였음은, 생각 외로 어느 정도는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시기의 미국은 욱일승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게, 고도의 자본주의 발달이 세계를 집어삼킬 듯 기세를 뻗는 모습이었습니다. 취임 전에는 가장 온화하고 기품 있는 박애주의자였던 윌슨 대통령이, 이 소설의 배경인 1916년(따라서 아직 선전 포고는 이뤄지지 않을 시점입니다) 즈음에 개입주의로 국가 노선을 바꾸고 드는 것도, 이제 커질 만큼 커진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어 보겠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죠. 헬렌은 이런 그를 두고 "나보다 더 눈이 먼 사람"이라며 맹공을 가하는 대목이 소설에도 나옵니다. 자본주의의 극적인 발달은 물질위주의 태도와 사고 방식을 곳곳에 스며들게 합니다. 예를 들면 헬렌의 아버지 아서 켈러 예비역 대령은, 설리번 선생에게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남부의 노예제가 벌어들인 돈으로, 당신의 봉급이 지불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라는 치명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대독 개전에 반대("우리는 독일을 향해 전쟁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하 며 서부 전선에서 부상하여 눈이 먼 독잂 병사에게 구호 기금을 전달하려는 헬렌에게 기자들은 "당신은 참전을 찬성하는 그 자본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이 시점에 국가 반역을 꾀하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아기자기한 심리의 변화와 재치 있는 대사, 심오한 인간 정신의 미덕을 깨우치는 재미 외에도, 이처럼 역사의 단면을 배울 수 있는 다른 교육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번역이 정말 정확하고, 원문의 미묘한 뜻이 잘 전달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겨진 것 같고, 제가 본 범위 안에서는 오타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책이 참 아담하고 예쁘게 만들어졌습니다. 약간 폰트가 작게 느껴질 분도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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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앱경제 시대 유틸리티 마케팅이 온다 - 정보가 보편화된 시대의 소비자와 마케팅의 본질적 변화
제이 배어 지음, 황문창 옮김, 이청길 감수 / 처음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그렇게 하면 손실이 기대이익을 상회합니다."

"마케팅 차원에서 봐 줄 필요도 있다구."

어 느 새 일상사무의 대화에서도, "마케칭 차원에서"라는 말이, 당장의 대차대조표 분석을 휴리스틱하게 뛰어넘자는 의미로 관용화한지가 꽤 된 듯합니다. 논리적으로는 근거가 박약한 말입니다. 손해면 손해고 이익이면 이익이지, 마케팅 차원에서 넘어가자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지만 분위기상 그것도 일리있다 싶을 때 그냥 묻어가는 의미로 잘 쓰이는 말입니다.


SNS가 혁명을 일으킨 건 정치나 사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의미가 다소 막연하지만 "소통"의 방식과 수단에서 그 의의를 다하고 마는 것도 아닙니다. SNS의 파워가 진정 큰 파고를 몰고 올 분야는 바로 비즈니스입니다. " 소통"이란 비경제적, 비물질적인 정서의 교감이 위주가 되는데, 사업을 끌어들이는 건 벌써 소통의 본질을 이탈하는 것 아닌가 거부감이 드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월든 식의 삶을 고집하는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누구에서건 무엇인가를 구입하 고 소비해야만 문명인으로서의 생존이 가능합니다. 누구에게서 무엇을 사는 문제가 우리를 떠날 수 없다면, 마케팅의 문제는 보편적으로 대중에 밀착된 이슈입니다. 누구한테서건 무엇을 사야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물건과 서비스를 사라고 권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마케팅의 본질입니다. SNS를 통한 소통이 일상화된 시대에, 마치 프라이빗한 친구처럼 다정하고, 가깝고, 신뢰감 있게 다가오는 마케터가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SNS 마케팅의 승자이고, 모바일 퍼스트를 넘어 모바일 온리를 예견하는 시대에 SNS는 마케팅 전쟁의 유일한 결전장입니다.


저자는 마케팅의 개념이 어떻게 진화를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 속시원하면서도 적실성 넘치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제 1세대 마케팅 기법은 "최초상기"입니다. 구 매자, 수요자에게 "그 물건을 파는 내가 바로 여기 있소!"라며 "들이대듯" 각인시키는 방법입니다. 시장에서 상인들은 서로 질세라 목청을 높여가며 손님을 끕니다. 유흥가의 삐끼들은 준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갈 길 바쁜 손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일단 고객의 뇌리에 남기 위해, 잦은 반복과 노출로 웨어와 브랜드를 "들이대고" 보는 게 이 최초상기 수법입니다. p28에 나온 "히트곡제조기"라는 트위터리안이 그 좋은 예라며 저자는 소개하고 있는데요, 물론 긍정의 예가 아닌 "대단히" 부정적인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이 사람에 대해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고 있으나, 책 후반부에서 매우 희화화한 낵맥락에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합니다) 이 방법은 첫째 노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없는 먼 위치의 상대에게 전혀 쓸 수 없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이 기법이  기업의 신뢰를 깎아먹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마케팅의 다음 발전 단계는 "상위노출"입니다. 이 기법의 대표 주자는 전화번호부 옐로우페이지입니다.
과 거에는 이 기법에 대해 대단히 혁신적인 발상의 예로 많이 거론하였으나,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한 후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했죠. 이후에는 주로 검색 포털에서 이 상위노출의 이슈가 많이 문제되었지만,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대로, 한번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정보는 의사 결정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또한, 지금처럼 큰 변혁을 맞고 있는 시대에 있어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이제 "광고라면 그 내용의 양질 여부에 관계 없이 지긋지긋해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는 정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인포머셜"이라고 해서, 소비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마케팅에 삽입해 접근성 제고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기법 역시, 소비자가 결국은 염증을 낼 "트로이의 목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 체 그럼 이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소비자를, 어떻게 하면 나에게 충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소비자를 내 고객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게 바른 진로로 들어서는 첫걸음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소비자는 고객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나는 고객에게 판매자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친구로서 접근하는 겁니다. 만약 그가 전정한 친구라면, 당장의 이익이 없다고 냉정하게 서비스 제공을 거절해서 되겠습니까? 그건 이미 친구가 아니죠. 친구라면, 어려움에 빠져 있는 친구를 적시에 도울 줄 아는 게(a friend in need) 진정한 친구(a friend indeed)입 니다. 이제 결론이 나왔습니다. 무엇이 궁극의 마케팅일까요? "소비자를, 친구의 눈높이에서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이를 우리는 친구로서 "믿게" 됩니다. 이런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회사는 충성스러운 고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자는 멋진 격언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움(helping)과 판매(selling)는 글자 두 개 차이이다. 잘 팔려면, 평소에 잘 도와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SNS시대에, 사람들은 지역과 대면 접촉 기회를 떠나 다양한 이들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그 수단이 바로 모바일 SNS 입니다. 이런 관계의 유지에서, 신뢰는 소통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건입니다. 이런 친밀한 네트워크 안에, 기업은 더 이상 요란한 구호와 쇼맨십을 앞세운, "광고라는 게 팍팍 표시나는" 구태를 뒤집어 쓰고는 침투할 수 없습니다. 동창생처럼, 여친처럼, 은사처럼, 부모님처럼 그 망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네트웍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판매원의 복장을 하고서는, 더 이상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친구에게서만 무엇을 믿고 삽니다. 친구 아니면 팔 수 없습니다. 친구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어 떻게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처자는 그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모바일 기기에 적용되는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여, 광고 따위는 치워버리고 이용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무 속셈이나 계산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정말 친구에게 하듯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내 업종에서는 경쟂자 그 누구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대답도 명쾌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 종전과는 다른 수위의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았다 싶으면, 그 유사 분야가 아닌 전혀 동떨어진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겁니다. 고객의 눈높이가 이미 높아졌는데, 종전의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죠. 더군다나 경쟁자가 안이한 태도를 늑장을 피우고 있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업계 선두로 치고나가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저자는 상기하고도 있습니다.


어 렵사리 개발한 앱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앱이 소비자에게 널리 애용되게 방안을 따로 마련해야 하고, 처음부터 널리 쓰이고 입소문이 날 앱을 골라 개발해야 합니다. 앱의 기능 우수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용자가 그 존재 여부를 모르는 앱은, 벌써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마케팅을 마케팅하라."는 명제의 본 뜻입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과 이의 홍보, 진열은 마케팅 3.0의 한 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앱이 아니라, SNS 환경 그 자체고, 어떻게 하면 관계망 안에 "친구"로서 단단한 자리를 잡느냐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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