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힘 -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는 비밀
박병학 지음 / 라온북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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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기는 비밀: 버티는 힘

저자는 충남 태안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p23) 열심히 노력하는 삶의 가치를 심어 주신 부모님의 소중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10대 청소년, 20대 청년들을 카운슬링하면서 저자는 이 시대에 젊은 세대가 입신양명하여 버젓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어떻게 해야 대입이나 취업이라는 험난한 관문을 뚫고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해 줍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는 다양한 내담자들과 소통하며 도움을 준 분인데, 그 중에는 워킹맘들도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육아의 몫을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문에 가뜩이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아기 엄마들이 더욱 힘들어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 중 하나는, 내 일과 내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 그저 운명이라고 체념할 게 아니라, 이처럼 전문가들의 상담을 받고 인생을 리모델링해 볼 생각도 과감히 가져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그런 말씀을 하는데, 내 감정이 나를 집어삼킬 듯 나를 압도하면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종이나 메모장 프로그램을 꺼내 이를 적어 보라는 충고를 저자도 하시네요(p70). 저자께서는 개인적 경험을 들려 주는데, 운전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하십니다. 운전 공포증은 여러 이유에서 생길 수 있는데 여튼 중요한 건 이걸 가능하면 빨리, 또 확실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익숙한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러 동작을 이어붙이지만 초보자는 하나하나가 힘듭니다. 저자는 마치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우듯, 처음에 보조 바퀴를 달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다가 나중에는 두 바퀴만으로 잘 달리게 되는 과정에 비유합니다.

다들 운동에 열심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운동에 관심 없던 사람은 더욱 위축되고, 겉보기에 자신이 없어지는 건 물론 건강마저 위태로워지는 것 아닌가 겁이 덜컥 나기도 합니다. p100을 보면 저자께서 운동 동영상(알고리즘이 추천해준)을 보고 정말 간단한 것부터 따라해봤는데, 이게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이면 자신에게는 성취감도 크게 느껴지고 전에 없던 자신감도 쌓이더라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일단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성장시키고 종전보다는 업그레이드된 인간으로 키우는 건 무엇인가? p126 이하를 보면 저자의 견해가 나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련을 극복하고 그로부터 오히려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어려운 시기에도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점을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는다고 하며, 저자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주환 저 <회복탄력성>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네요.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뜻깊은 일이 이뤄지려면 하나의 방향에서 하나의 힘만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미가 밖에서 쪼고 알 안에서 새끼도 쪼아줘야 껍질을 째고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p156에서 저자는 큰 방향(10배 목표)과 작은 루틴(플래너 작성)이 합쳐져야, 원대한 목표도 일상의 작은 계획도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립감을 동반하는 실패(p168)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감정정리의 시간(이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저자가 언급했습니다)을 가지라고도 조언합니다.

저자 자신이 직접 겪어낸 고난의 시간, 그를 통한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치열한 과정이 나와서 큰 도움이 된 책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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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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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1월에 이서희 저자의 <방구석 오페라>를 리뷰했었습니다. 이 신간은 조선의 오페라라고 할 판소리가 그 주제입니다. 몇 달 전 정년이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새롭게 판소리에 관심 갖게 된 독자들도 있겠지만, 막상 접해 보면 어렵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라서인지 쉽게 공감, 몰입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 이입, 그러면서도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해설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책은 모두 다섯 파트로 나뉩니다. 1장은 현재 대본 전체가 온전히 내려오는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다섯 마당을 다뤘습니다. "조선의 오페라"라는 말처럼 대본이 온전해야 그걸 판소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인데, 나머지 일곱 마당은 아예 실전되었거나 일부만 전하는데, 일부라도 그나마 전하는 네 마당을 이 책의 제2장에서 다룹니다. 저자께서는 제2장 제목을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들"이라 붙였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판소리가 본래 신명 나는 놀이와 표현의 장(場)이지만, 특히 이 책에서 저자의 해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 만큼 흥겹고 독창적입니다. 심청가는 우리가 효녀 이야기로만 알고 밋밋한 이야기려니 생각하는데 무대가 중국 송나라까지 확대되는 등 스케일도 넓고 신분 상승의 정도도 훨씬 큽니다. 하필 송나라가 배경일까 생각도 저 개인적으로 해 봤는데, 당나라 때는 귀족 사회여서 사회적 수직 이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진, 몽고 등이 쳐내려와도 사대부들이 송조에 충성하며 끝까지 저항한 건, 이 나라가 그만큼 사대부를 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p35에는 심청의 효가 오늘날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 저자의 힘찬 서술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엄마의 미모를 닮아 예쁘기로 소문났던 춘향은 마침 이 고장 남원 부사로 내려와 있던 이한림 사또의 아들 이몽룡과 우연히 만나 연을 맺게 됩니다. 롱디 연애 중이면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어야 했는데 무심한 몽룡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20세기 초 김영랑 시인이 말했듯 잔인하기까지 한 모습이 보이는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요즘 젊은 여자들 같았으면 이런 타입은 변학도보다 더한 놈이라고 맞아죽을지도 모릅니다. p60에 점고라는 뜻이 나오는데 원래 지방관이 새로 부임하면 인력과 물자가 장부상의 수치와 일치하는지 점검하게 마련이죠. 기생 점고라는 말은 듣도보도 못한 말인데 이 춘향가 때문에 현대인들은 점고를 기생 점고라고만 알게 되었습니다. 19세기 관객들은 변학도 대사로 "기생 점고"라는 말이 나왔을 때 얼마나 손뼉을 치고 크게 웃었겠습니까.

<삼국지연의>가 조선 후기에 어지간히 인기가 있었는지 <흥보가>에도 장비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고 현전 다섯 마당 중에 아예 <적벽가>(p86 이하)가 있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가리켜 "바람과 불의 교향곡"이라고 합니다. 공명이 간절히 동남풍을 청하고 악의 화신(적벽가 안에서는) 조조의 진영, 이미 연환계에 넘어가 모든 전선(戰船)이 묶인 상태여서 한번 불화살이 날아오자 생지옥으로 화하는 묘사가 박진감 넘칩니다. 저자의 평가대로, 지배층의 야욕에만 기인한 동원, 착취에 신음하는 기층민중의 원한과 풍자가 곳곳에 표현되었기도 합니다.

노래와 세부 표현은 없어졌지만 줄거리라도 일부 전해오는 네 마당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하네요. 숙영낭자타렁의 줄거리가 p154 이하에 저자의 맛깔난 설명으로 이어지는데... 백선군에게 몸을 허락할지 안할지를 놓고 망설이던 숙영은 결국 그와의 사이에 동춘, 춘앵이라는 아이들까지 둡니다. 숙영 낭자 같은 훌륭한 야인에게는 비틀어진 영혼을 지닌 매월 같은 쓰레기가 옆에 들러붙어 해코지를 하려 들기 마련인데, 현실에도 나잇값도 못하는 이런 인간이 꼭 있습니다. 백공 부부도 참으로 잘못하는 게, 숙영의 죽음 경위를 저렇게 잘못 전하면 망인을 두 번 욕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미에 저자는 바리데기 설화와 이 숙영낭자타령을 대조하면서 현대에 재조명될 여지가 훨씬 큰 게 후자라고 강조합니다.

책의 3, 4, 5장은 향가(鄕歌), (후대의) 고전시가(시조, 한시, 그 외 이야기), 고전소설 등에 할애되었습니다. 역시 독창적인 시각으로, 의외로 현대인들이 잘 모르는 고전에 대해서도 그 의의를 잘 짚어 주시는데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이 읽어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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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책 인문학 세계 고전
사사키 다케시 외 83명 지음, 윤철규 옮김 / 이다미디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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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은 우리의 독서 의욕을 북돋웁니다. 인문이란, 사람의 본성과 사회의 작동 원리, 감정과 이성의 핵심을 통찰하여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일깨웁니다. 그래서 기술 서적, 공학 서적처럼 직접적인 효용을 전달하지 않아도 수백 수천 년 동안 읽히는 게 고전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 이하에는 고(故) 송자(宋梓) 교육부 장관의 추천사가 나옵니다. 책에는 직함이 연세대 총장(前)이라고만 나오지만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 명지대 총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활동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연대 총장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분입니다. 6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특강 오셨을 때 접한 그 맑고 깊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나더러 이 책과 고전 한 권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완성도가 높다는 뜻인데, 집필진 중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 전 도쿄대 총장도 포함되어 있고, 압축된 문장 안에 깊이 있는 통찰과 해설이 담겨, 이 책이 단순한 요약서가 아니며 문사철(文史哲)의 참된 경지로 독자를 이끄는 가이드라는 평가가 암시됩니다.

미국은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에 유례가 없던 공화정을 꾸려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민주정, 공화정은 천 수백 년 전 그리스, 로마에도 있었지만 성문 헌법을 따로 만들고 삼권을 분립하며 대통령도 권한 행사를 이성적으로 자제하는 풍조는 여태 인류사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 신생국의 훌륭한 정치를 잘 분석했을 뿐 아니라, p110을 보면 현대 대중 사회의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 중산 계급이 주동이 되어 무난하게 중지(衆智)를 모아 가는 모범적인 정치를 차분하게 서술하는 놀라운 대목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사회계약론이라 해도 홉스, 푸펜도르프 등은 복종 계약을 전제로 논의를 편 반면, 장 자크 루소는 "주권자인 국민의 형성 행위(p45)"가 담론의 중핵이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본능에서 정의로, 충동에서 의무로, 욕망에서 가치로"라는 루소의 논의는 사실상 현대 민주주의, 주권재민 사상, 자유와 다양성의 존중 등 핵심 가치의 창안지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 계약 하에서 사람들은 종래의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한 자연인들이 아니라 일반 의지(volonte generale)의 영도 하에 새로운 법인격을 부여받는다는 그의 서술은 언제 읽어도 박력이 넘치고 심오한 울림을 유지합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이를 발전시키고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 이는 데이비드 리카도입니다. 리카도는 오늘날 세계인 모두가 추구하려 노력하는 자유무역의 효용과 비교우위론을 정초한 천재였습니다. p171을 보면 J S 밀(Mill)이 논의되는데 그는 천재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광범위한 지식을 교육받았고, 근대 사회를 이끌어갈 대원칙, 철학적 원리를 다듬는 데에 독자적인 기여를 남겼습니다. 재미있는 건 선배 격인 스미스나 리카도는 "가치론"을 중시했는데, 밀은 특유의 통찰력으로 가격 이론이라는 도구가 앞으로 가치론을 대체한다고 내다봤던 것입니다.

사자의 강한 이빨과 턱, 악어의 재생력 강한 껍질이 없었으나 인간은 생각하는 힘 하나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p330 이하에 나오는 <팡세>를 저술한 파스칼은 "한없이 연약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서 위대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업적으로 유명한데, p337의 설명을 보면 "순수 이성이라고 할 때의 '순수'는 경험이 개재하지 않은, a priori(선험적인)한 상태"라는 그의 유명한 규정이 인용됩니다. "근대 과학의 대자화(對自化)를 표방하지만 지식만능주의는 아니"라는 책의 설명에서 엄청난 공력이 느껴집니다. 이런 시원시원하고 정확한 문장들 때문에 송자 교육부장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나 봅니다.

이성만능의 차가운 근대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의 강력한 의지를 중시하는 니체 같은 철학자가 등장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적(詩的)인 문장으로도 유명한데 "내 적들은 강력해졌고 내 가르침의 초상은 왜곡되어 버렸다(p377)"라며 산을 다시 내려가는 거인의 내러티브를 장엄하게 낭독하는 니체 영혼의 위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구태여 저자들이 이 대목을 인용한 건 나중에 히틀러 세력이 니체의 사상을 잘못 끌어대어 프로파간다에 활용한 사실을 환기하는 듯도 합니다. 

보통은 정치 사상, 철학의 조류 등을 요약 설명하는 데 그치지만 이 책은 마지막 5장에서 역사, 종교 분야애서의 명저까지 소개합니다. 에드워드 기번, 토인비, 알베르 마티에 등의 명저 소개는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대목만 읽어도 세계사 일부가 잘 요약되어 독자의 머리에 안착할 만큼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번역자 윤철규 대표가 권말에 쓴 후기는 "교양"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 혼란스럽고 천박한 21세기에 어떻게 변용, 승화, 재구축되어 독자와 마주할지에 대해 깊은 생각의 여지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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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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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에 나오듯이 독일어로 된 책이 원서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도 독문학자 모명숙 박사입니다. 영국인 버지니아 울프가 쓴 여러 글들(당연히 영어 원문)을 편집(번역)했고, 일기, 편지, <제이콥의 방>, <세월>, <존재의 순간들>, <등대로> 등이 그 출전입니다. 편집자는 유타 로젠크란츠라는 여성이며, 독일어 원제는 Eines jeden Glück, 즉 "모두의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의 방"이라는 어구와 묘하게 대구(對句)를 이룹니다. eines jeden은 ein jeder의 2격(속격. genitive)이며 영어로 옮기면 each and every와 의미 면에서 약간 비슷합니다(문법적 기능은 다름).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하니 그녀의 이름만 들어보고 20세기 전반의 그 고전들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아주 난해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오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책이 보여 주는 대로, 그녀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었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지인, 편집자,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상당 부분을 발췌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다정다감한 면모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역시 독일어로) Mit Virginia Woolf durch den Garten인데, 이 번역본은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로 옮깁니다. durch den Garten은 "정원을 거쳐, 통해" 정도의 뜻이겠는데 그래서인지(?) 책 중에는 정원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면 p57에서, "비가 내리고 난 후 기운차게 핀 자두꽃"에 대해 쓴 대목이 그렇습니다. 꽃은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가장 아름답게 대지를 수놓습니다. 여성들이 꽃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고 꽃의 본성을 닮으려 애쓰는 건 그 본능 안에 내재된 동기가 있어서입니다. 사람인 이상, 생명체인 이상 꽃을 싫어할 수 없습니다.

p131에서 p142까지는 <올랜도>의 일부가 인용됩니다. 버지니아 울프 이후에도 프랑스 페미니즘의 시조새 시몬 드 보부아르가 지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도 비슷한 내용을 다뤘습니다. SF 같은 건 아니고 성별의 전환 문제에 대해 깊은 고찰과 사색이 담긴 명작인데 책에서는 그 혹은 그녀 올랜도가 서펜타인 호수에서 책을 공물로 파묻는 유명한 장면이 인용되네요. 그런데 잰 모리스(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손녀뻘이었던)가 편집한 <버지니아 울프와의 여행>에서 재인용한 편지에도, 저 서펜타인 호수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묘한 기시감을 줍니다.

2차 대전은 히틀러라는 광인과 일부 추종세력이 일으켰다고 하지만 1차 대전은 명백히 독일 민족, 또 오스트리아의 상당수가 열렬한 민족주의적 지지를 실었던 대규모의 충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30대 초중반이었던 때 치러낸 전쟁은, 가뜩이나 신경쇠약이었던 그녀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리젠트 파크에서 전후(戰後)의 감상을 담은 p182 이하의 글들은 이무렵 그녀가 얼마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자신도 조심스러워하며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제이콥의 방>에서는 스튜어트 오몬드 씨와 키티 크레스트의 묘한 만남과 소통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데 p235에 나오듯이 국화가 최악이라는 문장이 유명하죠. Chrysanthemums are the worst. 이유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세계 어느 누구라도 국화라는 꽃을 알면 다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p254에서는 글라디올라스와 달리아에 대해 단상을 피력하는데 무심한 하늘, 교만한 꽃들에 대한 푸념도 재미있습니다(<질병에 대하여> 중), p287의 <막간> 인용문에서는 야생란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 엿보입니다.

같은 문장들이라도 어떻게 배열되고 무슨 주제에 편입하냐에 따라 의미가 새롭게 읽히는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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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대기
리디아 유크나비치 지음, 임슬애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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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극심한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저자는 그 후유증 때문에 온전한 대인 관계를 맺기 어려웠나 봅니다. 이 회고록의 제목이 "물의 연대기"인 이유는 일단은 저자가 수영 선수 커리어를 10대 때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멋진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그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았습니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이들(독자인 제 눈에는 멋있는 이들이 많았습니다)에 대한 회고가 구체적이며, 저자가 비록 큰 상처가 있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여 미국에서 그토록 큰 인기를 끌게 된 책이었겠다고 짐작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지난달 말에 마무리된 78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 이제 연출자로 초대된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트와일라잇 4부작의 벨라)가 감독한 작품 원작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합니다. 아쉽게, 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소재가 될 자격이 충분하게, 이 책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p59를 보면 가수 제임스 테일러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JT맨인 필립, 첫사랑이자 첫남편인 남자에 대한 애증(愛憎) 가득한 회고가 시작됩니다. 저는 처음에 제임스 브라운으로 잘못 읽고 작가가 남자 외모 절대 안 보는 분이구나 생각했는데, 제임스 테일러도 꽤 예전 사람입니다. 작가분도 나이가 꽤 많으시기 때문에 예전 연예인이 이렇게 언급되기도 하나 봅니다. 왜, 로드 테일러나 로버트 테일러를 예로 드시지 않고...(닮았으니까 닮았다고 했겠죠)

수영선수라고 하면 (여자라도) 어깨가 딱 벌어지고 건장한 체격이 바로 연상됩니다. 그런 작가가 열세살 때, 아니 열다섯살때 큰 욕구를 느꼈던 상대 시에나 토레스는 열일곱 살이었다고 나오는데(p174), 대체 체격이 얼마나 좋았으면 "나보다 큰 소년이 필요했다"고 하는 그녀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는 것인지. 물론 서양인들은 대체로 체격이 좋긴 합니다만 이 정도 예외적인 여성(여자 맞습니다)은 서양인들한테도 마찬가지 느낌인가 봅니다. 저는 여기서(p169) 저자 린다(당시 십대)가 하고 싶었던 행동을 꾹 참는 그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스스로 자랑스럽게, 자신이 그때 충동을 참아서 지금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대목도 그랬습니다. 물론 사람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충동을 일일이 행동에 옮길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우리는 이 당시 작가가 큰 위기에 처했다는 점 감안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이 북미 대륙에 이주하기 시작한 건 물론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이런 나이 많은 저자의 회고록 앞부분(대체로 저자도 젊었던 파트)에 한국계 셀럽이 등장하는 걸 보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여기(p179)에서 언급되는 이창래라는 분은 지금 이 작가보다는 나이가 몇 살 아래지만 글쓰기 멘토 구실을 하던 분인데, 작가(당시 대학원생)는 이분(교수)의 클래스에서 모욕적인 평가를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책에서도 여전히 앙앙불락하는 낌새가 느껴집니다. 뭔지는 독자인 제가 알 수 없으나, "당신의 글은 충격적인 소재로 사람들 관심을 끌려는 소재주의이지, 스타일은 진부하기 짝이 없어!"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책에는 그녀가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에서 캐디(골프 캐디가 아니라 캔디스의 애칭입니다)의 관점에서 소설을 썼는데, 교수 이창래씨가 그런 평가를 했다고 나옵니다.

p202에는 좀 특별한 서술이 있습니다. 앞에서 여성수영선수 토레스에 대한 묘사에서도 몸에 털이 보슬보슬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머리털을 상자에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영어로 체모와 모발은 철자가 같아서, 맥락으로만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p203에는 샤를 드브로스(Charles de Brosses)가 페티시라는 개념을 널리 보급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사실 좀 섬뜩해지기도 하는 문장입니다. 이 사람은 활동 시기가 사드 후작보다 더 앞섭니다. 이어 피부, 살갖에 대한 인문적(?), 자전적 회고가 이어지는데 영어로 skin이라고 하면 "목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작가가 꺼내시는 말들은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유도합니다. 집착, 욕망, 사랑, 치유 등에 대해서.

현재 린다는 영화감독 앤디 밍고와 부부 사이이며 재주 많은 운동선수 마일즈 밍고라는 99년생 아들이 두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남편이 십 년 연하이며 특히 이 책 p318 이하에 깨가 쏟아지는 연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책을 다 읽고,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과연 이 책을 대체 어떻게 스크린에 옮겼는지 무척 궁금해지기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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