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책
김개미 글, 노인경 그림 / 재능출판(재능교육)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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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개미

개미가 쓴 사자책. 아주 작고 작은 부지런쟁이 개미가 크고 무시무시한 사자책을 쓴다. 
 작은 개미가 개미보다 작은 코안경을 쓰고 그 가늘기만 한 다리를 꼬고 앉아 가는 팔 다리보다 더 가는 펜을 들고 고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제목과 함께 보면 그저 사자에 관한 책이구나 싶어진다.
하지만..사자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책에 대한 사자의 이야기다.
무슨 소린지는 보면 안다.

#2 나도 사자를 알고 있다.

 


겁도 없이 사자의 콧털을 잡아당기는 아이. 저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용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이에겐 필요없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용기보다 더 큰 작용을 하는 건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목숨걸고 쇠젓가락으로 콘센트를 후비적대는 일도 했었다고 나의 어린 시절을 엄마는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위험을 알기 전, 호기심..
어쩌면 아이들의 책읽기도 그런건지 모르겠다. 호기심으로 먼저 손을 대게 되는것. 그래야 오래도록 친구가 될 수 있을게다.
등떠밀려 하는 일은 어떤 것이든 재미가 없다. 잘 하던 공부도 "공부 좀 하지"라는 말과 함께 김이 빠지며 하기 싫어지니 말이다.


도무지 입이 근질거려서 '책에 관한 사자'라는 부분을 참을 수 없다.
사자는 책의 다른 이름이었나보다. 매일 누군가 찾아주고 깨워주는 그렇게 친구가 되어 종일토록 놀아주는 책.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렝게티의 제왕 사자를 기르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얼마나 황당하고 짜릿할까?
하긴, 어릴 적 내게도 사자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생이가 있었고, 어린 왕자가 있었고, 마르코가 있었고, 앤도 있었고, 도로시랑 허클베리핀도 있었다.
그 친구들은 먼 나라에 있거나 산속에 있거나 우주 저편에 있었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었고 언제든 찾아낼 수 있었다.
친구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내가 깨워주었을 때, 책장을 펼치며 "왕자야 노올~자!"를 외칠 때 단 한번의 거절도 없이 놀아주었다.
매일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은 장미의 가시를 관찰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바오밥나무를 거꾸로 세워보기도 했으며 어느 날은 여우와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사자가 있었다.


오늘도 재미있었어. 내일 봐 사자야.
책을 덮고 누우면 사자도 잠을 잘까? 아침에 일어나서 깨워야하니까 필시 잠을 잘 것 같지만, 사자는 아마 깨우기 직전에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놀고 난 밤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낮에 읽은 책에 나왔던 모든 친구들이 모여 낮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놀이에 어두운 밤이 무섭지 않게 했다.
온 방안을 휘저으며 잠을 잔다고 엄마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땀에 폭삭 젖어 있던 머리카락에도 이유가 있었던거다.
사자와 나만 아는 이유.



책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그려진 그림.
어쩌면 이 그림이 이 책이 말하려는 메세지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책에 그려진 다리와 꼬리와 귀..숨어있지만 누군지 알것만 같은 이 그림이 좋다.

# 3.그러니까

나는 이 책이 왜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표지만 보고 홀딱 반했다. 저 익살스러운 사자의 표정에 반해버린거다.
부시시한 머리가 아닌 매직펌이라도 한 듯 단정한 사자의 갈기와 오징어의 긴 다리 같이 훌쩍 긴 양쪽 한가닥씩의 수염. 마치 말의 고삐처럼..
미출간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내는 알라딘. 단골이기에 기다리다 기다리다 판매를 하고 있는 다른 서점을 기웃댄다.
언젠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거래를 끊어버렸던 곳인데..결국 다시 그곳에 발걸음을 하고 구매했다.
사실, 이 책은(거의 모든 그림책이 그랬지만)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아 놓는다.
그랬지, 그랬어..라는 말을 무한반복하게 하는 그림책들이 요즘 부쩍 좋아졌다.
책욕심이 과해서 어느 순간 책에 깔려 죽을거라는 악담(?)을 듣곤한다.
실제로 책장위에 쌓아둔 책이 쏟아져 내린 적도 있다. 다 읽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자꾸 사들이냐는 핀잔에도 나는 자꾸 책을 산다.
살 수 없을 때는 얻기도 한다.
묻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사자책이 답해준다.
초원에 동물친구들이 얼마나 많은데..그 친구들 다 만나려면 아직 멀었어. 더 불러들여도 돼.
사자의 말이 맞다.
친구들을 구하러 또 나서보아야겠다.
사자야 고마워!


출판사가 재능교육인것이 좀..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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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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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중심에 선 경제학.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경제학이 그 가운데 끓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결국은 분배다. 피케티의 분배모델이 궁금하다. 번역에 다소 논란이 있었던 것도 같지만, 자본이 두려워하는 자본론의 실체를 볼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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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구도자의 시시비비 방랑기 - 과거의 습(習)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다
윤인모 지음 / 판미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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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를 아십니까?
 
-道를 아십니까?
가끔씩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을 때, 혹은 볕이 좋아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낯선 이들이 찾아와 묻곤 한다.
이 질문은 어찌 대답을 하든 피곤한 상황이 뒤따라 온다.
모른다고 하면, 알아야 한다면서 세상살이가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전생의 업이 어떻고...주절주절 말 그대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안다고 하면, 니깟게 뭘 알겠느냐 어디 시험 한번 해보자는 투로 선문답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른다'는 말을 할 때까지 정신적 고문이 이어진다.
이들은 초파리처럼 후르륵 날아들어 불특정 개인의 휴식을 방해한다. 그리고도 떳떳하고 당당하다. 우매한 중생에게 道를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담, 道라는 것이 그렇게 몇마디의 말과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의 뒤죽박죽 배열로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며 체득이 되어지는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를 제자라고도 하고, 동량이라고도 하고, 도인이라고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경우)
하지만 자기도 이해 못한 소리를 중언부언 늘어놓는 그들은 그냥" (도)를 빙자한 (깨)방정을 떨어대는 (비)위 좋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든 "도"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늘 있어왔다. 어떤게 바른 길(道)인가에 대한 의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어떤 기준과 깨우침으로 살아야할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며 잣대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인가.
궁금했다.
수염이 허연 도포 차림의 도사님이 자꾸 떠오르는 방정만 없었다면 꽤 진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2.
책의 저자를 소개하는 글이 재밌다.
"필력은 있는데 작가는 아니고, 학식은 있는데 교수도 아니며, 명상에 대해서 뭘 좀 아는데 도인은 아닌"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참 많은 수련을 한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수행처를 따지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구나 싶어진다.
사실, 이 소개 하나에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보아도 그리 과한 이야기는 아닐 듯도 싶다.
있지만 아니고, 있지만 아니며 알지만 아닌 사람인게다.
보여지고 평가되어지는 것으로 존재의 본질이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적 그가 필력이 있고, 학식이 있고, 명상을 하지만, 그가 그 아닌 어떤 것으로 본질적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것이다.
책의 뒷표지에 써있는 "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이 되거나 비범해지려 하지 마라. "는 말이 그냥 폼이 좀 나는 구호가 아니란 말인거다.
이 글은 저잣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글이라고 한다.
시골 닷새장에 나오는 할머니의 봄나물 채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던 옛친구가 생각났다. 물론 이런 사이비 같은 놈이라는 욕 한바지와 뒤통수 한 대의 댓가를 치렀었다. 그런 이야기일까? 싶었다.
명상을 하며, 수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의 면면이 생각보다 다채롭고 제법 무게감이 있다.

언제적엔가 들어봤던 이름들도 나오고..명상이라는 말과 함께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들도 제법 있다. 가끔 티비에서 기인? 혹은 도인?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사람들도 있어보인다.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허상을 버리고 진솔한 본질의 공부를 하고 싶은 저자의 시선이 여기저기 보여진다.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본질과 마주하는 훈련이란걸 해 본 적 없는 (해 봤다 해도 꾸준히 해 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소 어려운 단어들과 개념들이 잘 익은 과일나무 밑의 가시덤불처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의미를 찾아가며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적 확보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자신과 마주하기가 아닐까?
자신과 마주 서서, 아픈 모순을 스스로 확인하고 깨고 고쳐 가는 것.
자신의 본 모습을 정확히 마주하지 못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찾는 것에서 그 시작을 둘 수 있겠다.
# 3. ​까칠한 구도의 길.
보통 구도자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물아일체적 모습이었다. 티비에서는..
종교적 가르침에 의해 어떤 종교에 귀의하건, 스스로 도를 깨우치기 위해 수행을 하건 말이다.
이렇게 까탈스럽게 "그게 뭐요?"라고 반문하며 닥달하는 구도자는 낯설다. 하지만 어쩌면 구도자라면 그래야하지 않을까?
사상가들도 자신들의 신념과 이데올로기 앞에서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곤 하는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기 위한 수행의 길에 바른 배움이 아닌것과 마주 할 때는 분연히 까칠함을 떨어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싸우기도 하고, 황당한 사건,사람과 만나기도 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들과 그 사건들에서 배우고 가르치고가 상호 작용하는 것을 본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매우 드물다.
결혼이란 계약서로 맺어지면
선택의 여지나 자유도 없어진다.
사람들은 상대를 바꾸려고 하면서
좌절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시발점이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도 아니고,
할 수도 없다. "
 
 
책 속에서 만난 말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자칫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패배자의 모습이거나 회의주의적 모습이라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끕도 안되는데 괜히 이해한다고 설쳐대는건 완벽한 오해와 곡해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본질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상대를 바꾸겠다는 씨알도 안먹히는 만용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도의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전투적이고 까칠하게.
 
道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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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사과가 데굴데굴 심미아의 그림책 2
심미아 글.그림 / 느림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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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사과가 데굴데굴..굴러온다면??
쫄랑 거리며 여기 저기 기웃대다 우연찮게 만나게 된 책. 하필이면 사과람? 사실, 나는 사과에 대한 공포증이 있다. 하고 많은 것 중에 사과라니..
사람들은 곧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사과 알러지도 아니고..공포증이라니.
하지만 사실이다.
그러니, 커다란 사과가 데굴데굴 굴러온다면 어떨까? 아마 혼비백산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너무 무서워 꼼짝을 못할지도 모를일이다.
공포증의 정점을 찍을게다.

 
#1. 이야기.
어느 날 데굴데굴 굴러오는 커다란 사과를 만난 어린 쥐.
용감한 어린 쥐(?)는 행복해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과를 탐내는 친구들과 만나며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얼마나 조마조마할지가 표정에 너무나 잘 드러난다.
 

 

 
어린 쥐의 표정은 비밀~. 사과가 좋다는 친구 . 군침을 흘리며 뛰어오는 친구. 아예 자신의 사과라고 뛰어오는 친구.
어린 쥐는 "내가 처음 봤으니까 내꺼야!!"라고 간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 친구의 표정이 정말..섬세하다.
결국, 누군가에게 줘야만 했던 사과. 사과를 빼앗긴(?) 어린쥐는 마음이 아프다.
 

 
 
 
# 2. 사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잠을 자면서도 안타까워하는 어린 쥐. 누가 가져갔을지, 가져간 친구와는 어떻게 되었을지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누가 가져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어린쥐의 표정이 어땠을지를 상상하듯, 궁금해하듯, 이야기를 궁금해 하도록 하고 싶으니 말이다.
 

 

 

 

#3.
색감이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아이가 있는 엄마라면, 아이에게 사과 하나를 먼저 데굴데굴 굴려주고 "엄마꺼야"라고 말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아이의 반응은 어떨까?
두말 없이 엄마에게 내어주는 아이도 있을것이고, 뒤춤에 감추고 "내꺼야"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을거고, 다짜고짜 한 입 베어물고 싱긋이 웃는
아이도 있을게다.
어떤 아이여도 상관없다. 엄마는 아이 앞에 이 예쁜 그림책을 꺼내놓고 "이거 보자." 하면 된다. 읽어주거나 스스로 읽거나..
아이가 나처럼 사과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 손에 사과를 쥐고, 혹은 책 옆에 사과를 두고 읽어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
때때로 굴리면서.
무언가 개념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사과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하도록 유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
혼자 갖는 하나와 여럿이 나누어 갖는 하나의 의미를 눈치 채도록 ..
그림책이 좋은 이유는 그림과 글씨가 쓰여지고 남는 공간이 크고 넓다는 것이다.
그 속에 끄적이며 들어갈 색들과 그림들, 그리고 삐뚤빼뚤하게 쓰여질 글씨와 내용들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첨가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의 사과를 똑같이 1/n 로 잘라 갖는 것이 나눔일까? 에 대한 생각도 해 본다.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우리의 옛말이 정말 콩 하나를 사람 수만큼 잘라 가루가 된 조각을 맛본다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내가 갖은 작은 하나를
여럿이 나눌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얼지, 그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관심과 애정이다. 나눔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걸 깨닫게 한다.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친구를, 사물을, 내것과 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속에 해법이 있을것이다.
 
빠알간 사과 하나가 조금은 덜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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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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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으른 삶.
 
 
 

끊어진 풍선을 놓지 못한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저 풍선을 날려보내고 남은 손엔 빈 실만 후두둑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노랑 풍선이 있던 실, 붉은 풍선을 묶었던 실, 참치가 좋아할 파란풍선의 실..
끊어진 실을 놓지 못한다. 막막해서, 막막할까봐, 막막하고 싶지 않아서.


 
표지 앞면에 기울여 빛을 반사시키면 드러나는 글들이 있다. 올록볼록한 글씨들..그 글씨들을 읽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본다.
 
내 옆에 있어, 같이가.      귀찮아.

 

뭐가 그렇게 무서워?
             귀찮다니까.
뭐가 그렇게 귀찮아?
            어려워.
 
단지 표지를 훑어내는 것으로 이 서늘한 이야기의 온도를 감지한다. 녹녹치 않겠구나. 어디쯤에선가 또한 비슷한 경험과 시간을 끌어내겠구나.
몇번의 훌쩍임과 몇번의 한숨을 예비하기로 한다.
그것을 다 쓸지, 혹은 남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주체하지 못해서 감정의 과잉으로 몰고 가게 되는 추함을 미리 예방하고자 함이었다.
너구리, 참치, 날, 영수, 영식이, 희수, 엄마, 참치 엄마, ..고양이 침대, 파리, 호주, ..
몇몇의 이름과 장소를 내가 아는 어떤것과 바꾸어 놓고 읽어도 나쁘지 않다. 이런 느낌이 사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잘 아물고 있는 상처를 누군가의 상처를 보며
다시 기억해내고 딱지를 자꾸만 만지작대게 하니까 말이다. 결국 나는 이 소설 앞에서 내 시간의 어느 부분을 게워내게 된다.
이야기에 취한걸까? 아니면..체한걸까?
 
 
#2. 색.
 
홍매실과 파란 청매실과 노란 청매실이 생수통 안으로 굴러들어갔다. (...)
빨강, 주황, 노랑, 파랑, 분홍. 식용색소를 들이부은 알사탕들이다. 분홍색 알사탕이 가장 유해해 보인다.
불량식품이다. 캡슐을 열 때마다 분홍이 나오기를 빈다.(p23)
 
접시꽃은 주황이다. 호박색 같은 주황이다. (...)
상추에서 고추로 딸기에서 수박으로 바뀌었다. (p25)
 
파란 대문 앞에 고무대야가 있다. 접시꽃과 수박이 자라는 고무 대야 옆에는 파란 플라스틱 화분이 있다.(p26)
파란 대문을 지나 골목을 꺾으면 큰길이 나온다. 길 맞은편에 빌라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낡은 빌라다.
하얀색 페인트로 빌라 이름을 칠했다. (p27)
 
오색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탕도 유통기한이 있던가. 사탕들은 녹아서 엉겨 있었다. 노란 사탕, 오렌지색 사탕, 빨간 사탕이
엉겨 있는 덩어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죽을지도 몰라. 사탕은 달았다.(p85)
 
글의 도입부에서 만나게 되는 색색의 환(環)들과 풍경들이다. 원색의 대비 어쩌면 표지의 풍선들의 정체일까?
원색의 시간. 원색의 지배를 받는 시간 속에서 불량스러운 색일 수록 탐스럽고 유혹적이다. 그것에 한번쯤 혹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위험할줄 알지만 저질러 보고 싶은 욕구. 내것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어차피 분홍의 알사탕일 뿐이지만 그 유해함을 기꺼이 내 속으로 받아내겠다는
젊은 시간의 치기. 그 속에서 너구리는 참치의 색을 발견했을까? 참치는 과연 유해한 분홍의 알사탕이었을까?
 
 
#3.막막함
사는 것이 막막할 때가 있다. 젊은 시간 언저리의 어디쯤일 수도 있고, 나이든 언젠가일 수도 있다. 막막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때, 막막함은 배가된다.
어쩌면 막막함이란 발견되는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가수분열를 일으키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핵분열처럼..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고도의 압력과 열로
폭발하며 파괴적인 힘을 과시하는 그것처럼 말이다.
20대의 사랑과 시간과 일은 늘 막막함을 전제로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게임의 튜토리얼처럼 이런저런 간섭과 옹색하기 짝이없는 아이템으로 무장(?)한다.
튜토리얼은 보통 skip한다. 직접 부딪혀 잃고 부서지고 죽어봐야 이해할 수 있고 강력해진다. 강력해지지 못한다해도 최소한 할만한가 아닌가에 대한 깜냥이
생기는 것이다.
너구리의 막막함은 (p48~50) 도저히 수습이 안된다. 강력한 막막함의 분열기이다.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참치에게 유일한 무엇이 되고 싶은 너구리, 하지만 어떤 표정도 보여주지 않는 참치. 그 속에서 막막한 사랑은 이어진다.
성장통일 수도 연애질일 수도 있는​ 이 소설에서 비슷한 시절의 비슷했던 사람 하나가 스쳐간다.
-우리 사막에 가지 않을래?
-사막? 떠날 준비가 안됐어.
-준비따윈 필요없는데..마음만 움직이면 다 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건데? 극한 체험 같은거야? 사막에 숨은 보물찾기?
-아니, 그저 같이 가자고 말하는거야.
-지금은 힘들어. 할 일도 있고..나는 떠날 수 없어.
-그래..괜찮아. 떠나는 건 내 몫이니까.
-잘 다녀와.
-잘 가..라고 해야하는거야. 올지 안올지 모르니까.
-그래. 잘 가..
타클라마칸으로 떠난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직도 어딘가를 헤매고 다닌다는 소식도 있고, 먼 이국의 여인과 살림을 차렸다고도 했다.
거기에 묻혔다는 이야기에 막막함을 견뎌내야 했다. 사하라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막막했다. 이국의 여인과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막막함은
분열을 멈추고 기어이 폭발했다. ​타워크레인 위에서의 입맞춤과 폐선박 위에서의 노숙까지 그렇게 둘이 기대어 있을 때 막막함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예의의 다른
표현이었다. 서로에게 의미가 될 뿐, 그 어떤 부담과 짐도 되어선 안된다는 암묵적 약속..그 약속의 댓가로 만나게 된 막막함을 견뎌내야 했다.
우린 너무 어렸고, 세상이 재미없었으며- 재미없었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차라리 위로가 될 정도로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될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었다.
내 친구를 나는 <낙타>라고 했다. 때론 <라마>라고도 했다. 우린 타클라마칸과 히말라야에 한동안 미쳐있었으니까.
​막막함은 극복되는 것도, 스스로 소멸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뜨거운 폭발을 한번쯤 거쳐야 하는 젊음의 핵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분명한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 4. 그러므로
지나간 것들은 지나갔다. 그게 지나갈 것이었든 지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든 간에. 우리는 모두 떠돌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머물고 지나가기를 멈추기 않을 것이다.
참치와 나는 서로에게 잠시 머물렀고 이제 지나갈 것이다. 지나갈 것이든 지나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든 간에.
(....)
 밝은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선명했다. 반짝거리는 먼지 사이사이로 분홍빛 알갤이가 떠다녔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멈춘 듯이. 곧 멈출 듯이.
 너도 이렇게 보여? 아주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아.
 뭔가 평화로워.
 참치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평화롭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여기에.
(p143~144)
결국, 같은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 시간 밖에서 느껴지는 시간은 급하고 격하겠지만, 시간 속에서 시간은 어쩌면 더디고 느린 것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무중력상태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던져넣을 용기와 젊음, 혹은 여분의 시간이 있다면..이 나른하고 게으를 수 밖에 없는 막막한 무중력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단 한번도 막막해 본 적도, 좌절해 본 적도, ​무언가를 잃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하는 수 없지만, 무엇이라도 하나쯤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분홍색 알사탕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볼만 하겠다.
유난히 분홍색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흑백의 피사체들 속에 붉은 입술만 도드라지게 채색되어지는 어떤 포스터가 떠오르기도 한다.
서걱이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달콤한 분홍 사탕이 자꾸 눈에 박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5. 뜬금없지만..
이런 시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떤 나무의 말 /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결국..내 삶의 한 부분을 게워내 살피게 한 작품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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