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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 크림 봉봉

 

 

그림이 너무 예쁩니다.

내용도 흥미롭고요.

산딸기 크림 봉봉의 역사라고나 할까요. ^^

 

200년 전, 100년 전, 몇년 전.

그렇게 시작된 산딸기 크림 봉봉과 소녀와 엄마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가 따뜻합니다.

 

 

그 마지막에는 항상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맛있는 디저트 시간이 이어지고요.

훈훈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산딸기 크림 봉봉이 더 맛있어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맛있는 디저트와 가족의 포근한 이야기가 이 계절이 너무 잘 어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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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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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사람으로 묵힌 맛.

 

 

카메라맨과 리포터가 어느 맛집으로 들어간다. 밖은 줄 서 있는 사람들, 가게 안은 자리 잡은 손님들로 가득하다. 식당의 상 위에는 뭔지 몰라도 지글지글 끓기도 하고, 푸짐하게 오른 음식이 보인다. 너도나도 맛있게 먹기에 바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국물을 들이켜기도 하고,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 씹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묻은 흐뭇하고 만족스러운 표정. 리포터가 어느 손님에게 묻는다. "여기 음식 맛이 어떤가요?" 손님은 뭔가를 씹느라 바쁘면서도 기꺼이 대답해준다. "너무 맛있어요. (엄지 척)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해준 맛이 그대로 나요. 어머니 맛이 그리울 때 자주 찾는 곳입니다. 이곳 음식을 먹으면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대충 이런 대답이었다. 어느 한 사람의 대답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다르고 음식 메뉴가 달라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극찬이다. 어머니가 해주신 맛이 난다고 했다. 어머니의 맛? 고향도 다르고 손맛도 다를 텐데, 왜 모두가 어머니의 맛이라고 할까. 그냥 어떤 식당의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어머니의 맛이라고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머니의 맛이 뭐기에.

 

지금보다 어렸을 적의 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어머니의 맛’을 알지 못했다. 손님들 대부분이 ‘어머니의 맛’이라고 말할 때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향도 다르고 각자의 어머니가 다 다를 텐데 왜 그 맛은 같은 식당에서 다 똑같이 느끼는 맛으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내가 늙었다는 얘기인지 내 입맛이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젠 어떤 음식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어머니의 맛을 알 것 같다. 엄마가 담근 김치, 밑반찬, 밥, 국, 찌개. 엄마가 마당에서 키워 뜯어준 채소로 싸먹는 쌈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다 똑같은 재료에 똑같이 만든 음식인데 분명 엄마가 해줄 때만 나는 맛이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 순간부터 맛있는 음식의 기준이 달라졌다. 고급 레스토랑의 유명한 스테이크도 아니고 1인분에 몇십 만원짜리 한정식도 아니다. 힘든 시간에 찾아온 나의 허기를 알아채고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쌍엄지 추켜들고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 밥도둑인 거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그걸 인지한 순간부터 누구나가 말하는 어머니의 맛에 공감하게 됐다.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뭘까. 예전엔 몰랐던 그 맛을 지금 알게 되는 건...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찾은 답을, 이 책을 엮은 작가의 흔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작가와 내가 살아온 시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비슷한 시간을 경험한 우리네 기억이 있어서라고. 그리워할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그 시간 때문일 거다. 어려웠던 시절 넉넉히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그때는 무얼 먹어도 맛있었다. 무슨 음식이었는지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하는 건 차치하고, 이제 와 떠올리는 그때 그 시간이 묵혀놓은 맛으로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책을 풀어가고 있는, 전쟁을 경험하고 교도소에 다녀오고 망명의 시간을 겪었던 노작가에게는 그 맛이 더 넓고 깊을 듯하다. 작가가 걸어온 길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모를 게 더 많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더 들어보고 싶은 그의 궤적이자 맛이다. 편치 않을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간에 더 각인될 수밖에 없는 기억이 있다. 작가에게는 그 기억에 더해진 맛이 진하게 묻어난다. 어느 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국경을 넘은 맛까지 전하고 있으니 이 책을 만난 독자로서는 행운이다. 그 풍부한 시간의 맛을 이렇게라도 대신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의 흔적을 음식으로 듣다 보니 작가가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알게 하는 음식들이다. 음식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 음식을 앞에 두고 있던 작가의 상황, 사람들, 시간이 설명하는 맛이라고 해야 할까. 눈물 나게 어려운 시절인데 저절로 그리워 생각나는 하는 마력을 발휘한다. 망명 시절 타국에서 먹던, 이름조차 생소한 음식들. 지금과 다른 군대 음식의 설명이 낯설어 '군대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싶은 이해. 가출 같은 출가로 절을 헤매던 청춘의 과감하고 철없는 맛. 그 이상의 여러 가지 시간의 맛이 넘치는데, 특히 더 궁금했던 건 '노티'라는 평안도 지방의 향토 음식이다. 처음 듣는 음식 이름에 궁금증이 일다가도, 지명의 언급에서 분단국가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흉내 내려 해도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 없는 맛이어서 작가의 어머니는 더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찾아간 해남에서 그때의 토하젓 맛을 잃은 것을 확인했을 때의 절망도 안타까웠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 속 음식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젠 찾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일흔이 넘은 노작가가 기억하고 싶은 맛이 사라진다는 건, 언젠가 내가 만나고 싶은 맛도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니까. 내가 품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맛이 사라진다는 게 뭐 별건가 싶기도 할 테지만, 그건 단순히 음식으로만 여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공감하는 슬픔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의 나이만큼 살아가면서 내가 언젠가 겪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걸 아직은 완전히 인정하긴 싫다. 시간이 더 흐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변하면서, 저절로 같은 변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게 음식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이 순간 작가가 말하는 그 '맛'의 의미를 공감하고 새기고 싶은 거다. 그 변하는 세월 속에서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을 담을 수밖에 없으니까.

 

명절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 엄마는 우리가 명절에 먹었던 음식을 다시 한다. 전을 부치고 잡채를 만들고, 고기를 사 와서 불고기 양념으로 재워놓고 육개장도 끓인다. 그 음식들을 다 하면 냉동실에 넣고 이틀을 꽁꽁 얼린 다음 택배용 아이스박스에 차곡차곡 챙겨 넣어 단단히 밀봉한 다음 송장을 하나씩 붙이고 발송한다. 명절에 맞춰 다녀가지 못한 자식들에게 엄마가 보내는 마음이다. 명절에 다녀가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먹고 싶겠냐면서...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처음에는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다면서 굳이 명절 음식을 두 번씩 하는 이유를 공감하기 어려웠다. 어느 동네든 집 앞 마트나 식당에 가면 쉽게 사서 먹을 수 있는 건데, 굳이 여기서 그 고생을 해가며 만들어 보낼 필요가 뭐 있나 싶어서다. 그런 나의 투덜거림을 한 번에 들어가게 했던 일이 있었으니. 언젠가 언니 집에서 3주 정도 지낼 때가 있었다. 언니는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밥을 해주고 신경 써서 챙겨줬는데, 나는 갑자기 바뀐 환경에 물갈이하고 배탈이 났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식사 때마다 식탁에 앉았는데, 목으로 쉽게 밥을 넘기지 못하곤 했다. 그때 식탁에 올라온 반찬 하나. 엄마가 언니에게 보내준 매실 장아찌였다.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내가 3주 동안 언니 집에서 그 매실 장아찌 하나로 매 끼니를 해결했다. 짜고 달고 물만 먹히던 매실 장아찌가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때 이후로 나는 엄마가 자식들에게 보내는 택배 꾸리기에 토를 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게 존재하는, 슬픔과 허전함, 그리움을 이기는 맛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형편에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도 기적이라고 여기며 자랐던 때를 떠올리면, 엄마는 이제라도 자식들에게 보내는 음식에 그 미안함을 가득 담은 듯하다. 그렇게 배송된 음식을 먹는 엄마의 자식들도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고맙게 먹을 수 있는 것일 테고. 우리 살아오면서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그때 제대로 한번 먹지 못했던 명절 음식에 담긴 아픔을 공유하기에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노작가에게서 흘러나온 맛이 나에게 슬픔과 아픔으로 적혔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고생했던 시절의 음식이 더 와 닿는 건 다르면서도 비슷한 경험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지금보다 더하게 겪을 허전함과 그리움이 밀려오면 또 생각나겠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 고생마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 한 그릇으로 가득 채워지는 아이러니는, 시간과 기억, 그리움이 만든다는 걸 확인하게 한다. 오랜만에 엄마한테 달걀밥, 겨우 달걀 하나에 참기름과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게 세상 더없는 맛이었던 기억을 꺼내달라고 해야겠다. 지금 내 가슴에 소고깃국보다 그게 더 맛있는 음식으로 남은 건 어쩔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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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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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근원을 묻다. 《한국이 싫어서》

 

아이가 태어나면 아프리카에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던 친구를 떠올렸다. 푸른 초원에서 맨발로 자유롭게 뛰어노는 인생으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에 머물렀을 뿐이다. 친구의 아이는 지금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이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친구는 누구하고 비교하기 어려운 극성 엄마였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상할 게 없어 보일 정도다. 지금도 아이가 방과 후 학원순회는 기본이고, 주말에도 쉴 틈이 없이 여러 학원에 끌려다닌다. 엄마로 사는 그 친구의 갈증이 대단하다고 주변에서도 걱정이 앞섰지만, 누구 하나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동의한다는 듯이, 그런 동의로 함께 향할 곳은 행복일 테니까.

 

궁금한 건 그렇게 자란 아이가 대한민국에서 청년으로, 성인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거다. 완벽하게 갖춘 스펙으로 부족한 거 없이 살 수 있을지, 계속 뭔가 또 모자라서 더 채워야 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 같은 불안함.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주변 대부분 사람을 보면 보통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의 빡빡한 하루 일정을 보다가 나부터 답답해지곤 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 싶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채우고 있지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시간이 더 흘러야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긍정적인 기대보다는 절망적인 몸부림이 먼저 보이는 삶의 주체인 우리의 모습이니까. 그 안에 나도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행복하다고 말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 행복은 언제 찾아오는 건지 알 수 없을 뿐이다. 도대체 그 행복의 기준이 뭔데?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그 '정도'는 얼마만큼인데? 삼류대학을 졸업해도, 돈 좀 못 벌어도, 결혼이 좀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불안은 끝도 없고, 그 불안에 위장은 늘 말썽을 부리고, 불면증은 몇 년째 나아지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나아지기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래서 계나의 호주행이 다른 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슬쩍 기대를 품기도 했다.

 

계나의 선택이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 대학을 거쳐 사회로 나와 부딪힌 시간이 짧지 않다. 직장생활 3년여의 세월을 지낸 계나가 한국과 맞지 않는다며 호주 이민을 결정했다. 정말 떠났다. 나는 계나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끝, 계나의 행보는 나의 예상과 달랐다. 한국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계나가 어느 나라에 있든 중요하지 않은 게 된 거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 이후의 시간 동안 계나가 어떤 방향으로 변했느냐 하는 것만 도드라지게 보였다. 몇 년의 호주 생활을 버티면서, 한국에서와 다른 삶의 방향을 정하면서 계나가 얻은 건 행복의 기준점이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눈물이 차올랐다.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수는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160P)라고 말하는 계나의 표정을 눈감은 채로 그리고 있었다. 나는, 내 주변의 그 많은 사람은 그동안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걸까? 충분히 차고 넘치는 행복일 수 있는 상황들이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는지, 이제야 좀 알겠다. 계나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자면,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풍선 같은 그릇에 터질 때까지 채워야만 한다고, 그렇게 가는 길만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거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계나가 찾은 게 우리가 찾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오늘의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면 내일의 삶을 떠올릴 수 있을까? 오늘이 만족스러운 순간들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잘 알고 있는 그게 행복인 줄도 모르고 푸념해왔던 시간이 눈앞에서 지나간다. 무슨 행복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그냥 행복'인데, 지금까지 무얼 보고 살아왔던 걸까.

 

한국에서 우리가 바라는 그 행복을 찾는다는 게 희망적이지 않다는 불안은 여전하다. 계나의 선택을 보면서 그 불안이 조금 옅어졌을 뿐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수많은 '우리'가 당장 내일 계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게 달리며 열심히 살았는데도 달라질 게 없고, 계속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없다면, 여기서 행복해질 가능성은 없다던 계나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계나를 통해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과 그 안에서 각자가 바라는 행복이 다름을 확인하게 하는 거다. 그런 현실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행복의 길을 여러 방향에서 찾게 한다. 여전히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달리는 사람들과 다른 곳에 그 목적지를 두고 이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 솔직히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찾아가는 그곳이 어디든 지금껏 알아왔던 행복의 양상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 될 계나의 선택이 그런 의미다. 이 땅에서 조금은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직은 내일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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