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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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것의 가장 큰 속성은 모호함이란 것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중에서 특별히 행복했고, 즐거웠고, 기분 좋았던 기억은 여러가지의 각색을 거쳐 추억이란 이름을 붙여 간직하게 되고, 그중에서 특별히 무서웠고, 두려웠고, 기분 나빴던 기억들은 단단한 상자 속에 넣어 마음 속 깊이 봉인하고 살기도 한다. 사실 내가 기억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 기억들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하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특히 유년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후의 기억들도 내 머리가 알아서 정리를 한 덕분에 사소한 것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뇌용량의 초과일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기억때문에 고통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이란 기제는 때때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느 정도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기도 한다. 대부분 그것은 너무나 끔찍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일이다. 이는 자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끔찍한 일이라면 생존 본능이란 것이 발동하여 기억을 무의식중에 봉인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스스로 봉인을 한 것이지만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듯 하다. 그럴 경우 결락된 기억에 대해 고통을 받는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기억이란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의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야카는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문제로 고민이다. 사야카는 그 원인이 결락되어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관련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지언대, 사야카는 왜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것일까.  

사야카는 '나'와 함께 사야카의 아버지가 남긴 열쇠와 지도를 가지고 사야카의 기억이 묻혀 있을 만한 장소로 찾아가게 된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중에 서 있는 집. 그곳은 아주 묘한 곳이었다. 그곳의 시간은 23년전에 멈춰 버린 듯 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남겨진 채 사람들만 사라진 듯한 모습. 이는 마치 마야인들이 발전된 문명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정도로 그곳은 기묘하기만 하다. 게다가 현관문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고, 지하실을 통해서만 집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니. 집안 구조도, 집안의 물건도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 집에서 발견한 일기장과 편지를 토대로 '나'와 사야카는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나씩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집에서 살았음이 분명한 미쿠리야 가족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호기심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픔과 슬픔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초등학생인 유스케의 눈으로 본 가족사이기 때문에 더 그러했으리라. 행복하기만 해야 할 어린 시절에 닥쳐온 끔찍한 일. 작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보아온 어린 시절의 사야카는 자신의 기억을 본능적으로 의식 깊은 곳에 봉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이가 견디기에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절망의 벽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로 성인이 된 사야카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야카가 그 당시 얼마나 두려워했고, 절망했을 것이란 건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가여울 수 밖에 없다. 사야카가 되찾은 기억이 현재의 자신을 더 큰 절망속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후의 사야카의 행동을 보건대 절망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듯 하다. 오히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더욱 강인한 여성이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으리라.  

책 제목인『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 주는 느낌은 오컬트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부를 보면 전혀 오컬트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 역시 낡은 그 집에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죽은 내가, 그 집에서 줄곧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사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는 것일 뿐. (320p)

사람에게는 누구나 잊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자신의 머릿속에 봉인하는 대신 그 일이 일어났던 곳에 봉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우리가 벗어던진 기억이 매미 허물처럼 수없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탈피일 뿐, 완전한 새것은 아니기에 언제든 기회가 있다면 기억이란 것은 우리를 뒤에서 잡아채 넘어 뜨릴지도 모른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모른체 하고 있을 뿐.  

이 책은 집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삼고 있다. 가장 아늑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인 집. 바깥에서는 어떤 일을 당하고 들어와도 집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집이다. 그리고 내 가족이라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무슨 일을 당했든지 일단 감싸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졌을때 우리는 큰 절망과 아픔과 슬픔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고통의 기억이 과거를 살았던 사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그 힘을 현재에도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살든지, 그것을 뿌리치고 극복하며 살아가든지의 선택은 당사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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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3초 - 뉴 루비코믹스 964
아니야 유이지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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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댔다. 한 손으로는 아무리 흔들어 봐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를 내고 싶어 자기 빰을 때리면 그건 자학이다. 사랑도 그렇다. 혼자서 아무리 두근두근 해 봐야 그건 짝사랑일 뿐. 상대가 자신을 마주 보고 같이 두근거려야 사랑이다. 사랑은 마음과 마음이 통했을 때 이루어 지는 것이니까.

고등학교 1학년 동갑내기인 치바나 마나부와 카지 히로토는 유치원때부터의 친구이다. 치바는 언제부터인가 히로토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히로토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치바의 성격은 왕소심한 편이라 히로토에게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백을 잘못 했다가 혹시 친구 사이마처 깨질까 두려워 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 치바에겐 독특한 버릇이 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앞에 닥치면 눈을 감고 셋을 세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는다는 것. 그것은 치바의 집안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치바의 아버지는 현재 여성인 미미로 살아간다. 요시미란 남자 이름을 버리고. 그래서 그런지 왠만한 충격에는 끄덕도 없는 치바이지만 히로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치바.

그런 치바에게 위기가 닥쳤다. 치바의 아빠(삑!) 엄마 미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간다는 것. 고교생인 치바에겐 선택권이 아무것도 없었다. 치바는 히로토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만, 미미가 무심코 그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히로토는 크게 화를 내게 된다.
 
눈 감지마! 그거 정말 싫어! 언제나 자기 내면만 보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는 거잖아! (59p)

치바에게는 대면하기 무서운 순간을 회피하기 위한 3초. 그리고 속마음과 다른 마음으로 눈을 뜨기 위한 3초였지만, 히로토에게 있어 그건 치바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3초였던 것이다. 치바가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좀더 일찍 히로토의 마음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후 4년. 히로토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 만약 히로토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았다면 둘 사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렇다. 히로토 역시 치바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는 치바의 입장과 히로토의 입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그저 아이처럼 보였던 히로토에게 그런 속내가 있었을 줄이야. 4년만에 받은 치바의 쪽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히로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그렇게 아프게 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달까.

아니야 유이지라고 하면 하드보일드한 그런 작품만을 그릴 줄 알았다. 특히 <문신의 남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성 풍부한 작품도 그려내는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들었달까. 물론 <문신의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순정이란 면에서 빠지진 않지만. 이 작품과는 확실히 달랐다. 십대 중반의 소년이 이십대 청년이 되면서 겪는 감정을 순수하게 펼쳐 놨다고 할까. 사실 작화면에서 보자면 결코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는 가슴 속에 깊히 박힌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 뿐만 아니라, 미미와 미미가 결혼해서 함께 사는 남자 후지타니의 이야기가 특히 잔향이 많이 남았다고나 할까.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그들의 사랑 방식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각 작품마다 독특한 개성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 아니야 유이지. 다음 작품은 또 어떤 느낌의 작품일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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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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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카와 데쓰야란 이름은 무척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가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제 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특별상 수상작란 말에『리라장 사건』은 요즘 나온 책이고, 아유카와 데쓰야는 요즘 한창 뜨는 작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2001년에 처음 생긴 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중에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가들이 꽤 많은 걸 생각한다면 당연히 요즘 작가라 오해하기 딱 좋다. 하지만 아유카와 데쓰야는 1919년생이며, 이 작품은 1958년에 씌어진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깜짝 놀랐다.

『리라장 사건』은 늦여름 리라장을 찾은 대학생들에게 생긴 아주 참혹하고 끔찍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壯)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으니 왠지 연상되는 게 있다. 완벽한 밀실이라기 보다는 밀실에 가깝지만 밀실보다 공간이 확대된 곳, 트릭으로 말하자면 클로즈드 서클이 먼저 떠오른다. 보통 겨울 산장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눈폭풍같은 것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의 배경은 늦여름이다. 장마기간도 지난 시점이라 태풍이나 폭풍으로 고립되는 경우는 없을 듯 한데, 리라장은 어떤 식으로 이들을 고립시킬까.

리라장은 관리인 부부가 숙식하며 그곳을 관리하고 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이곳으로 온 학생은 총 6명으로 이들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감정은 각각 적대와 우호, 사랑과 증오 등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다. 첫날부터 갈등이 터져나오긴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날 형사가 찾아와 리라장 근처에서 남자의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체의 옆에는 스페이드 A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 카드는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학생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카드로 사체는 그 여학생의 비옷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에는 사고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카드가 그 옆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기에 그냥 넘기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차례차례 참혹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또한 그 사체들의 곁에는 없어진 스페이드 카드가 한 장씩 발견된다. 처음에는 A, 그다음은 2, 그다음은 3... 이렇게 사체는 늘어가고 결국 희생자는 모두 7명이 된다.

희생자들이 살해 당한 방식도 다양했다. 추락사, 독살, 척살, 교살, 둔기 가격, 독화살, 익사. 도대체 범인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한사람씩 죽이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첫번째로 희생당한 남자와 관리인의 부인의 죽음은 학생들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사건 현장이 대부분 리라장과 리라장 주변이기에 이들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결국 리라장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한 사람이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나중에 등장해 사건의 대부분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니조마저 살해당한다. 경찰의 수사는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진퇴양난에 몰린 경찰은 결국 호시카케 류조라는 명탐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10일동안 벌어진 대학살극의 진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와 달리 탐정이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리라장 사건에 등장하는 호시카케는 맨나중에 등장해서 모든 이들에게 사건 브리핑을 한다. (이부분은 비슷하긴 하지만) 이 두 탐정을 비교해 볼 때 재미있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긴다이치와 호시카케는 정반대의 타입이란 것이다.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까치집을 지은 머리에 구겨진 하카마, 수더분한 인상이라면 호시카케는 딱떨어지는 수트에 멋진 콧수염, 그리고 약간은 까칠한 성격의 신사 타입이랄까. (笑)

작가는 책 곳곳에서 우리에게 다음에 일어날 참극에 대한 귀띔을 해주거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하지만 눈뜬 봉사처럼 난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한가지로 조합을 할 수 없었다. 절묘한 서술트릭이랄까. 나중에 호시카케가 설명을 해주면 그때서야, 아하, 그랬군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알리바이 트릭의 경우 살짝 눈치채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범인 근처에도 못갔다. 사실 읽으면 읽을수록 의심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동기가 있는 것 같은데 모두 알리바이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절묘하게 엮이고 숨겨진 사건의 진상, 이 사건의 결말부를 읽으면서 흠칫하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띠지의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神)이란 표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와 더불어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야유카와 데쓰야의 작품은 다른 두 작가의 작품과 달리 이번에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다른 두 작가의 경우 워낙 유명하고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유달리 이 작가만 이제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온 건지 의문이 생긴다.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온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겠지. 앞으로도 꾸준히 번역본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자 후기를 보면서 <야유카와 데쓰야와 13개의 수수께끼>란 추리소설 시리즈에 대한 언급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이 시리즈는 도착 시리즈로 유명한 오리하라 이치, 아리스 시리즈로 유명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우리에게 미미여사로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해, 기타무라 가오루, 야마구치 마사야등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의 작가들과 야마자키 준, 이와사키 세이고, 가사하라 다쿠, 기다 준이치로, 쓰지 마사키 등의 작가와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들 중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작품들도 있다. 이런 걸 보면 이 작가가 후배 양성과 더불어 앤솔로지 작업에도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일본 독자들에게 본격의 신이란 애칭을 부여받을 수 없는 작가로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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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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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다 귀찮고, 아무도 보기 싫어지고.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걸 다 접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아 온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저 문제가 터지고 하는 통에 피곤했다. 만사가 짜증나기도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졌다. 그럴 땐 정말 직장을 관두고 그냥 쉬고 싶었다.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건 둘째 문제였다. 그저 쉬고만 싶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이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 직장을 관두면 당장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없어지는 셈이니 쉽게 직장이란 건 포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일도 관두고 집안에만 콕 박혀서 우리 강아지들 털을 쓰다듬으며 책이나 읽고 지내지만, 사회 생활을 할 때는 정말 수시로 모든 걸 관두고 속세를 떠나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가끔은 조용한 산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면 삶의 권태로움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늘 변함없는 생활에서 오는 염증이랄까.

세상도 어지럽고 경제도 어려운데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라고 누가 뭐라 그래도 난 할 말이 많다. 그들이 보기엔 내 생각이 어쩌면 배부른 투정일지는 몰라도, 일 안하고 논다고 고민 없고 생각 없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일할 때보다 지금이 이런 저런 잡생각이 더 많다고나 할까. 나이를 더 먹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등등의 구체적인 고민들. 그렇다고 지금 생활을 접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마음 내키는 곳에 정착해서 그곳을 터전으로 살 용기는 없다. 그래, 용기가 없다. 

그러하기에 나와 달리 용기를 가지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늘 부러움이 앞선다. 이 책을 보면서도 그랬다. 지리산 한자락에 터를 잡고 사는 버들치 시인이나 낙장불입 시인과 고알피엠여사 부부, 최도사등을 보면 누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랴. 책에 나오는 표현으로는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라고 했던가. 왠지 그런 것도 부럽다. 왜냐면 난 지금 돈도 못버는 주제에 욕심은 많아서 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흥이나 즐기고 하는 인생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런 자신에 대해 자괴감이 느껴진달까.

하나를 가지면 둘이 가지고 싶고, 둘을 가지면 셋을 가지고 싶고. 욕심은 정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제일 큰 소원이 하나 있다면 돈 걱정 없이 살아 보는 것. 이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겉으로는 체면차린다고 돈에 쪼들려 사는 티를 안내서 그렇지. 책을 읽다가 고알피엠 여사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가슴에 푹 박힌다. 돈이 있어야 걱정이 생기지. 맞다. 돈이 있어야 걱정이 생긴다. 돈도 없는데 돈 걱정을 해봐야 아무 쓸데 없는 거다. 쿡 하고 웃음이 터지면서도 그래도 난 여전히 돈 걱정을 한다. 도시에 사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연봉 200만원이라며 스스로 부자라 하고, 행복해 하는 최도사. 연봉이 보통 사람 월급 정도(혹은 월급이하)의 돈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건 아마도 모든 욕심을 속세에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은 욕심이었다. 욕심때문에 힘들고 불행하고 외롭다. 근데 그걸 버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책으로나마 이렇게 위안을 받는다. 스스로는 뭘 할 깜냥도 되지 않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 비겁할지 몰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이다.

이들의 풋풋하고 순진하고 해맑은 삶의 모습을 보면서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때론 절망하고 좌절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지리산은 그들의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처럼 그들을 늘 품고 있기에 그들은 그들의 삶에 또다른 행복을 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에 그들의 행복한 기운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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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시마씨의 우아한 생활 : 영국여행편
토노 하루히 지음, 마마하라 엘리 그림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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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 명문귀족인 카야시마씨는 막대한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산다는 것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고독한 자산가이다. 호리호리하고 낭창한 몸매에 가느다란 선. 표정없는 얼굴.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몸짓.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밴 상류층의 행동은 그를 돋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을 하기 전까지의 카야시마씨는 잘 만들어진 프랑스 인형같았달까. 감정 없는 눈매와 입술은 아름다웠지만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만 했다. 갑작스런 부모의 사망과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어버려 너무나 큰 짐이 어깨에 놓여버렸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원하게 된 상대는 그의 정원을 가꾸는 오만한 정원사였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건 카야시마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을 늘 지켜만 보다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고백을 해온 카야시마씨의 행동에 정원사는 처음에 화를 내지만 의외로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카야시마씨를 보면서 정원사 역시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달콤하고 쌉싸름하게 진행중이다. 

카야시마씨의 우아한 생활 2권 영국여행편은 두 가지 이야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로 나오는 <파티와 레이디와 영국식 정원>은 카야시마씨를 사윗감으로 점찍은 재벌 토지 켄이치로의 허술한 음모편이다. 자신의 딸인 카즈코와 어떻게든 연결시키고 싶은 토지 켄이치로. 하지만 우리의 카야시마씨는 허술해 보여도 고집이 있어 그 수법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는다. 토지 켄이치로의 초대로 그의 별장에 초대받은 카야시마씨는 정원사를 불러 들인다. 영리한 카즈코는 이미 둘 사이를 짐작하고 있었다나 뭐라나. 카즈코 역시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었으니, 불미한 사고없이 이 이야기가 끝날 수 있었달까. 뭐 이건 중요한 건 아니고... 

우리의 오만한 정원사. 나중에 등장해서 카야시마씨의 표정없는 얼굴을 단박에 바꿔 놓아 주신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카야시마씨의 얼굴을 보는 것은 나로서도 무척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형같은 얼굴이 사람 얼굴로 바뀌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두번째 이야기인 <환희의 5월 - 영국여행 편> 이 단행본의 핵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국식 정원 순례라고나 할까. 다양한 정원들을 보는 것은 이 책의 또다른 재미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 재미있다고 말하면 심술궂은 표현이려나 - 카야시마씨의 질투 본능이 깨어난다는 것이다. 사실 앞 이야기에선 정원사의 질투 본능이 깨어났겠지만, 워낙 오만한 정원사님이시라 겉으론 표시도 안난다. (푸핫) 

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정원사가 (이 사람 이름은 한 번도 안나온 것 같은데...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 예전에 영국 유학을 하던 당시의 친구인 싱고의 집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2주간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이 최고의 에피소드랄까. 싱고는 지금 레슬리라는 멋진 영국 남성과 살고 있지만, 카야시마씨는 혹시 예전에 자신의 정원사와 싱고 사이에 무슨 썸씽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의외로 이런 면에서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을 마구마구 발산해주시는 카야시마씨.   

원래 마초 스타일보다 호리호리한 남성을 좋아하는지라 마마하라 엘리가 그리는 카야시마씨는 완전 내 타입이다. 순진하고 귀엽지만, 자신도 모르게 섹시함을 드러내는 남자. 물론 정원사 타입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난 카야시마씨가 더 취향이다. 으... 둘만 생각하면 아주 달달해, 그냥.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도 기대기대~ (간절!)

참, 카야시마씨의 우아한 생활 - 영국 여행편 -에도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이번의 주인공은 카야시마씨의 비서인 코이즈미 마사키의 이야기이다. 카야시마씨와의 면접이 주된 내용인데, 카야시마씨는 그때 이미 정원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笑) 문득, 2권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 비서인 코이즈미는 왠지 쿨뷰티 타입일 것 같은데, 코이즈미 이야기는 따로 없는 걸까?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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