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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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아직 아이였던 나는 그 시대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이 가장 큰 화제였던지라, 그것들이 아련한 기억 중 그나마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그런 건 낭만과 거리가 먼 듯하다. 하긴 그 나이의 꼬마가 낭만이 뭔지 사랑이 뭔지 알리가 없었지. 내가 생각하는 낭만의 시대는 90년대 중반이다. 내가 20대에 접어든 시기였고, 대학생이 된 시기였기에. 고교시절까지 학교란 테두리에 갇혀 감옥같은 생활을 했다고 느꼈으니 대학생활의 자유로움은 달콤한 낭만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낭만이란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픔과 상실, 그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천샹, 예러우, 그리고 망허가 살던 시대는 1980년대의 중국이다. 그 시절은 시의 낭만이 흘렀고, 시인들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시인들은 방랑자였고, 시인들은 발길 닿는대로 중국 대륙 곳곳을 누볐다. 천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시인 망허를 사랑했다. 그러나 방랑하는 시인을 붙잡을 수 없는 천샹은 그들이 나눈 사랑을 추억하며 몇 달을 보낸후 학교 선배인 라우저우어와 결혼한다. 일곱달만에 아기를 낳은 천샹은 아이의 이름을 샤오촨이라 짓게 된다. 천샹은 비록 망허는 자신을 떠났지만 자신에게 남겨진 샤오촨을 보면서 영원히 그를 곁에 두는 것이라 생각했다.

시를 사랑한다 해도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사람도 아닌 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평생을 내어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는 시를 쓸 수도 시인이 되지도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만약 망허가 아닌 다른 시인이었다 해도 그녀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었을까. 사랑이란 것이 때로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단을 내리게도 한다지만, 천샹의 선택은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 한순간의 열정이 그녀를 사로잡은 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샤오촨을 낳은 후 그녀가 샤오촨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던 모습을, 언젠가 샤오촨에게 전해질 편지를 쓰던 천샹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한순간의 열정이라 말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파멸은 소리없이 찾아왔다. 그녀가 시인의 아들이라 굳건히 믿는 샤오촨의 생부가 망허가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름을 사칭한 채 한 여자의 마음을 산산히 부서뜨린 자는 아마도 이런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토록 지극한 모성애를 보였던 천샹이었건만, 그 일은 천샹이 모진 마음을 먹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샤오촨은 천샹의 시골집으로 보내지게 되지만, 그곳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다른 남자의 아이란 것을 알면서도 샤오촨을 자신의 아이로 거두고 천샹을 숭배하다시피 하면서 살아온 라우저우어. 그는 무너진 천샹을 보면서, 샤오촨을 밀어내는 천샹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사랑해온 여자를 사랑하는 라우저우어는 결국 또다시 천샹도 샤오촨도 잃고 혼자가 되었다. 이미 커다란 상실을 겪은 적이 있던 라우저우어는 또다시 커다란 상실을 겪게 되는 것이다. 상실이란 자주 겪는다고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픔도 절망도 겪으면 겪을수록 더 큰 아픔과 절망으로 돌아올 뿐이다. 결국 라우저우어에게 남겨진 것은 상실의 기억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진짜 망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권위 있는 학술기관에 배치되지만 그곳의 딱딱한 시스템에 숨막혀 한다. 때때로 시를 쓰던 망허는 결국 사표를 내던지고 자유를 찾아 시상을 찾아 여행길에 오르게 되고, 미즈란 곳에서 자신을 알아 보는 예러우란 사회학과 대학원생을 만나게 된다. 첫눈에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게된 망허는 그곳에서 예러우와 하룻밤을 보내지만, 예러우는 다음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버린다. 예러우가 한동안 답사 여행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망허는 사후커우란 곳에서 예러우를 기다려 결국 예러우와 재회한다. 예러우는 왜 허둥지둥 망허의 곁을 떠났을까.

당신이 시인이란 게 무서워요. 시인은 항상 새로운 감정을 갈구하고, 신선한 사랑, 낯선 자극을 원하죠. 영원히 신선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시인의 영감을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난 평범한 여자예요. 내게 필요한 건 평범한 사랑이예요. […] 당신은 결코 나와 함께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일생을 살 수 없어요. 그런 생활은 당신을 질리게 하겠죠. 당신이 내게 싫증이 나서 어느 날 갑자기 날 내팽개치고 떠날까 두려워요. 내가 당신 인생의 따분한 추억이나 해프닝으로 끝나버리는 게 무섭다고요. 그런 결말은 절대로 원하지 않아요. (129p)

예러우는 망허를 더욱 사랑하게 되기 전에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가 가진 시인의 마음, 그것은 예러우가 망허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겁내게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예러우는 재회했을 때 더이상 망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예러우와 망허 두 사람은 함께 답사 여행을 하면서 자꾸만 없어져 가고 무너져 내려가는 지방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곳 사람들의 한 편의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은 얼마 후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힘겹지만 꿈결같은 여행은 갑작스런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예러우는 자궁 외 임신 상태였고, 고된 여정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예러우의 갑작스런 죽음에 망허는 망연자실해지고 시란 것을 손에서 놓아버린다. 그후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나타샤란 여성을 만나게 되고 또다른 삶을 시작한다. 난 망허가 평생 그녀를 기억하면서 살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른 사람을 만난다. 순수의 시대는 예러우의 죽음으로 막을 내려 버린 것이다. 어쩌면 순수의 시대가 완전히 허물어지기 전에 아름답게 끝나버린 것은 예러우의 죽음이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톳빛 바람이 부는 황톳빛 대지에서 의지할 것이라곤 단 둘뿐이였으니 그들이 도시로 돌아가 다른 일상을 만나게 된다면 망허의 마음 속에 또다른 바람이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내겐 들지 않는다.

천샹은 자신이 사랑이라 믿었던 것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삶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시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허락한 예러우는 죽음으로 삶을 잃었다. 망허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시를 버렸다. 사랑했으나 아픔과 절망과 상실을 동시에 맛봐야 했던 이들을 치유해준 것은 시간과 사람이었다. 특히 천샹의 경우 샤오촨이 자신때문에 죽었을거라 생각했을테니 그간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샤오촨에게 편지를 쓰고 찢고 또 편지를 쓰고 하는 천샹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릿해져 온다. 비록 한순간은 샤오촨을 버렸을지라도, 어미는 어미였으니까. 그에 비하면 망허는 또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업까지 성공하게 되니 겉으로 보기엔 천샹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훗날 두 사람이 재회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상실을 극복하고 치유의 길을 더 잘 걸어온 것은 천샹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삶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요, 아픔과 상실과 치유의 반복일런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랑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던 사람을 불의의 사고로 잃을 수도 있다. 운명의 베틀에서는 행복과 희망의 실이 들어가 짜여지기도 하고, 절망과 아픔과 상실이라는 실이 들어가 짜여지기도 한다. 그 운명의 베틀에서 짜여지는 완성품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가 되어서야 그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예러우의 운명의 베틀은 이미 멈췄지만, 천샹과 망허의 베틀은 여전히 덜그럭거리면서 그들의 운명을 짜고 있을 것이다. 한때 천샹의 운명의 베틀에서는 시에 대한 사랑이란 실이 들어가 하나의 무늬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다른 실이 다른 무늬를 짜낼 것이고, 망허의 베틀에서는 예러우란 실이 들어가 하나의 무늬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다른 실이 다른 무늬를 짜내고 있을 것이다. 

시의 시대, 순수의 시대, 길 위의 시대는 저물었을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음 속에 그리고 정신 속에 새겨진 흔적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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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가게 바벨의 도서관 2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하창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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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조지 웰스는 영화 <닥터 모로의 DNA>의 원작 소설 <닥터 모로의 섬>과 영화 <우주전쟁>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닥터 모로의 DNA>의 경우 원래 영화 제목은 소설 제목을 그대로 따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나라에서 개봉할 때는 이상한 제목으로 바뀌게되었다. 여튼간에 그의 이름을 잘 모르겠다 하는 사람이라도 영화 제목을 말하면 아하, 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외의 유명 작품으로는 <투명인간>, <타임머신>등이 있다.

첫번째 작품인 <벽 안의 문>은 어린 시절 우연히 발견한 문 안쪽의 세상을 평생 잊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문 안쪽의 세상은 세상 어느 정원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난 한 여인은 그에게 그의 이야기가 씌어진 책을 보여주며 이미 이곳에서의 그의 이야기가 끝났음을 시사한다. 그후 그의 앞에 그 문은 여러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동경하던 문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일에 매달려 그 문을 번번히 지나치고 만다. 이미 그는 처음 그 정원에 들어갔을 때의 아이가 아닌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역시 그런 문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현실의 욕망이 앞서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버리고 그곳을 택했을 경우 어떤 것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시절에 보았던 것은 어린 아이만이 볼 수 있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플래트너 이야기>는 플래트너란 사람이 실험을 하다 실종된 후 아흐레 간 머물게 된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폭발로 인해 다른 차원으로 튕겨져 나갔던 것일까. 그곳에서 그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이 희미하게 비치는 현실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선과 악이 더 이상 우리가 선택할 대상이 아닐 때에도,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수많은 사건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여전히 지켜보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영혼이 만약 죽음 뒤에도 계속된다면, 우리의 관심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89p)

인간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어쩌면 수많은 영혼들은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지도 모르고, 우리와 아주 가까운 장소에서 -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 - 배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 엘비스햄 씨 이야기>는 여기에 실린 작품 중 가장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작품이었다. 늙은이와 젊은이의 영혼이 뒤바뀐다, 는 설정은 그 자체로도 끔찍하다. 물론 노인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의미는 아니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구만리같은 젊은이의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인간의 욕망에 치가 떨린다. 또한 젊은이 역시 노인의 사탕발린 말에 넘어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닌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렸으니 그 또한 추한 욕망의 제물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끔찍한 것은 마지막 한문장이었다. 최고의 반전!

<수정 계란>은 SF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우연히 획득하게 된 계란 모양의 수정을 들여다 보던 남자는 무엇을 보게 된 것일까. 그 안쪽의 모습에 사로잡혀 결국 사망하게 되는 한 남자. 남자의 삶은 불행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않고 아이들은 의붓자식들이다. 그렇다 보니 가족과 행복한 삶을 누리지도 못했고, 그렇다 보니 더더욱 수정 계란 안쪽의 환상적인 풍경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계란이 어디에서 온 것이고, 그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 오싹함을 느낄 것이다. 

<마술 가게>는 예전에 어디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 어느 책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역시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가져다 준다. 진짜 마술이 존재하는 마술 가게. 그곳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지만 어른과 아이가 느끼는 감각은 사뭇 다르다. 마술가게 주인의 마술 시범이 보여주는 환상의 시간. 그러나 그곳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은 아니다. 내 눈앞에 마술 가게의 문이 보이면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발을 들여 놓으리라.

바벨의 도서관 2권 허버트 조지 웰스 편에는 총 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있다. 각각의 단편들은 또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어 허버트 조지 웰스가 그려내는 환상소설 세계의 짜릿한 맛을 느껴볼 수 있으니 입문서로 더할 나위 없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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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괴동 3
모치즈키 미네타로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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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사고 이후 자신의 생각을 떠오르는대로 내뱉는 하시,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어 내뱉는 말마다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결국 자신조차 상처를 입고 있는 소년이다. 하시의 유일한 즐거움은 만화를 그리는 일이며, 그 만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음악을 늘 듣고 즐기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오르가즘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견뎌할 수 없어한다. 그때문에 친구와도 가족과도 멀어져 지금은 크리스티아나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 뚜렷하게 치료법이 없는 듯 하다. 

마리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아이로 처음에는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물체에만 반응을 보이지만 그 증상은 점점 심해져 세상은 반쪽으로 보였다가 이제는 움직이는 물체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히데오는 UFO와 접촉을 한 적이 있다는 소년으로 통각실조증에 걸려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또한 늘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심각한 건망증 증세로 바로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청년은 경찰차나 구급차의 경광등 불빛에 반응하여 폭주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을 치료하는 건 타마키라는 젊고 유능한 의사, 하지만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한 자신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진실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큰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으니.... 

완결편인 3권의 내용은 우울하고 슬프다. 진실한 자신을 찾으려했던 타마키는 자신을 받아들여 줬던 사람들 역시 자신을 우스개거리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시는 수술을 받을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3권에서 하시의 완전한 속마음이 드러나는데, 난 그걸 알게 된 후, 이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말하고 싶었달까.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면서 다른 사람을 상처줬지만, 그건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니. 수술중 타마키와의 대화는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하시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펑펑 우는 타마키를 보면서 하시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 그리고 히데오나 하나, 마리가 진정 원했던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큰 소망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랑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따스하게 내밀어준 손, 기댈 수 있는 어깨.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더욱 필요했던 것은 사람의 체온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해란 것은 상대적으로 강자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난 너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널 이해해줄 수 있어, 라는 느낌이랄까. 평등한 관계라기 보다는 상하가 분명한 관계. 때론 이해한다는 말보다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이 더 큰 치유일지도 모른다. 히데오가 마리에게 다가가는 방법, 그건 어른들은 간과하고 있던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하시가 그린 마지막 만화는 하시나 하나, 히데오, 마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빙벽안에 갇혀 그안의 세상밖에 모르고 살았던 펭귄들과 하늘을 날 수 있어 다른 펭귄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스카이워커. 그의 비행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고,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꼭 가보고 싶어. 저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도착하면 난 지금과는 또 다른 나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아. (163p)

여행중 만난 닭인 프라이드 우드는 스카이워커와 한동안 함께 여행을 하지만 결국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프라이드 우드는 스카이워커가 무척 외로운 존재였다는 것만은 알아주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정상이란 것의 범위는 어느만큼의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는 만큼 정상의 범위는 꽤 넓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범위를 살짝 벗어났다고 해서 비정상이란 딱지를 붙이고 그들을 외톨이로 만드는 건 스스로를 정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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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편지 바벨의 도서관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김상훈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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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한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를 보고 탄성을 내지를 사람은 나말고도 많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뛰어난 고전 소설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 작품들을 골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첫번째 책은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이다.

첫번째 작품인 <도둑맞은 편지>는『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이 등장하는 추리물이다. 도둑맞은 편지를 찾기 위해 파리경찰청의 경찰국장이 뒤팽과 '나'를 찾아온다. 경찰국장은 용의자의 집을 샅샅이 수색하지만 어디에서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의 재미는 경찰과 용의자, 그리고 뒤팽의 머리 싸움이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다. 여기에서의 뒤팽은 안락의자탐정같다고 할까. 경찰의 이야기를 듣고 추리한 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경찰국장은 용의자가 시인이라고 무시하고 깔봤지만, 결국 자신들의 논리로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거만한 경찰과 경찰의 머리꼭대기에 있는 용의자, 그리고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한 뒤팽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논리로만 상대를 볼 때 시야가 좁아져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병 속에서 나온 수기>는 여행을 하던 한 남자가 바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배에서 보고 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수기 형식으로 표현한 글이다.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란 것은 없다고 믿던 사람이 자신의 논리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세상을 만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이 작품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차츰 어떻게 받아들여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 한 줄이 압권.

<밸더머 사례의 진상>은 2년전에 읽었었는데, 여전히 오싹하다. 죽어가는 자에게 건 최면술은 언제까지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될까. 최면술이란 것은 무의식적인 부분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제하는 순간까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이 작품을 읽으면 영화 <얼굴없는 미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라 오싹해진다.

<군중 속의 사람>은 거리를 관찰하던 한 남자가 군중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 한 수상한 남자를 뒤쫓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자체로는 단조로워보일 수 있으나 그가 창너머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점들은 상당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롭다.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달까. 하지만 그가 뒤쫓던 남자의 이야기를 보면 문득 우울해진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혼자인 사람, 즉 아주 고독한 사람이며, 인간들 속에 늘 섞여 있는 악이기 대문이다. 사람든 군중속에서 더욱 고독함을 느끼고, 악인도 보통 인간과 섞여버리면 딱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집 속에서 최고의 작품은 역시 <함정과 진자>이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모습에 전율하게 된다. 종교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고 지하감옥에 갇힌 사람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 그것은 단두대나 교수형처럼 순간적인 죽음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자비로운 죽음일 뿐. 이 남자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 마땅한 사람인 것이다. 어두컴컴해서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의 중간은 뻥 뚫려 있다. 다행히 그는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지는 않았지만 그 뒤에 다가올 죽음의 모습은 한층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죽음이 눈앞에서 서서히 다가온다. 보통 사람같으면 미치지 않고서 버틸 재간이 있을까. 공포의 수위를 차츰 높여오는 전개방식에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몇 년에 한 번씩 읽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또한 역자가 달라지기 때문이란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작품 자체가 독특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제일 오래된 책은 1991년에 나온 단편집인데,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포의 작품을 읽고 실망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한 작품을 두 번 이상은 잘 읽지 않는 나이지만, 포의 작품만은 몇 번을 읽어도 그때마다 느끼는 재미가 다르달까. 때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좋았던 작품이 싫어지기도 하고, 싫었던 작품이 좋아지는 그런 작가도 있지만, 포의 경우 내겐 늘 신선한 자극과 재미를 주는 작가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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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 에도시대 약재상연속살인사건 샤바케 1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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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도시대의 요괴 이야기는 많이 접해 봤다. 에도시대의 수사 이야기도 많이 접해 본 편이다. 그런데 에도시대의 요괴 이야기 + 수사 이야기는? 글쎄.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요괴의 소행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사람의 소행이었다거나 요괴의 소행은 맞는데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요괴가 많았기 때문인듯 싶다.

『샤바케』1권 에도시대 약재상 연속살인사건은 요괴 이야기와 수사 이야기가 적절히 혼합된 소설이다. 주인공 이치타로는 대형상회의 외동아들로 방년 17세. 잘생긴 외모와 멋진 집안을 등에 업고 있지만, 문제는 병약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병에 시달렸고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결국 집에서는 밥만 잘 먹어도 고마워할 처지인 존재로 부모님을 비롯 주변 사람들의 과보호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행수로 있는 사스케와 니키지의 과보호는 그중에서도 최고점을 찍는데, 17살이나 된 도련님을 아기씨라 부르며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사스케와 니키지는 사실 요괴다. 사스케는 이누가미, 니키지는 하쿠타쿠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치타로가 5살때부터 옆을 지키고 있다. 일단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부탁이라지만, 요괴에게 그런 면의 인정과 의리가 있다니. 물론 요괴가 인정머리도 없고, 의리도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부탁으로 물심양면 골골 도련님을 비호한다는 게 좀 의아하긴 하다. (나중에 왜 이들이 도련님을 비호하는지 다 나오지만...) 사스케와 니키지외에도 수많은 요괴들, 특히 츠쿠모가미인 병풍 요괴와 조그마한 야나리들 역시 이치타로 곁에서 늘 이치타로를 지켜주는 존재이다.

이 골골 도련님은 외출도 거의 삼가는 입장이지만, 몰래 밤마실을 나갔다가 살해된 사람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무서운데 살인범까지 나타나 도련님 위기일발! 그러나 곁에 있던 방울 아가씨(방울 요괴인데 이 역시 츠쿠모가미이다)의 도움과 이나리 신사에 있는 요괴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그 순간을 모면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일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어느 날 한 봇짐장수가 이치타로의 약재상에 찾아와 어떤 약을 찾는다. 그는 갑자기 돌변하여 이치타로와 니키지를 공격한다. 그는 도대체 무슨 약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이치타로를 공격한 범인은 그자리에서 잡혔지만, 그와 비슷한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약재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에 공통된 것은 범인들이 특별한 약을 찾고 있다는 것 뿐. 도대체 그들이 원한 약은 무엇인걸까.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돌아다닌다고 해도 금방 피곤해져서 몸져 눕는 도련님인지라 요괴들을 풀어 사건의 단서를 모으기 시작하는 이치타로. 이치타로는 그것들을 조합해 어떤 한가지 가정에 도달한다. 이치타로는 어떻게 보면 이 사건 해결에 있어서의 브레인이고 요괴들은 그의 부하로서 활동을 한달까. 요괴가 인간을 돕는 경우는 특정한 이유에서가 많은데 이들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그래도 도련님이 요괴들을 잘 챙겨주니 요괴들도 기분이 좋아서 더 잘 도와준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가 기브 앤 테이크란 것은 아니고, 도련님 자체가 사람이 좋아 요괴들을 꺼리지 않는달까. 하긴 5살 꼬마때부터 요괴들에 둘러싸여 자라왔으니 요괴가 사람만큼 친근한 것도 그 이유일지는 몰라도.

건장한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누가미, 하쿠타쿠도 멋지지만, 요괴들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츠쿠모가미인 병풍 요괴이다. 화려한 기모노에 성질도 까칠하시지만, 도련님을 생각하는 것만큼은 다른 요괴들에게 지지않는달까. 또한 야나리들도 무척이나 귀엽다. 특히 책에 실린 삽화중에 야나리들이 도련님에게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모습은 아이들이 도련님에게 놀아달라 떼쓰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도련님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는 요괴들의 모습을 보면 때론 정말 사람같달까. 하지만 요괴는 요괴인게 분명하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사악하진 않지만... 사악한 것도 있긴 있다.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방법이 나빴지.

도련님의 밤마실에 얽힌 비밀과 약재상 연속살인사건의 비밀, 그리고 도련님 자신에 대한 비밀이 요괴이야기와 어우려져 한편의 멋진 소설로 탄생했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과 에도 시대의 풍속과 풍경에 대한 섬세한 묘사, 유머스러움과 미스터리함의 조화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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