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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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책은 별로 읽어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을 더 많이 본 듯 하다. 캐리, 미저리, 그린 마일, 돌로레스 클레이본,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등. 영화를 생각해 봐도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만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래서 더 놀랍다. 공포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설마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잘 쓰겠어? 라는 편견과 선입관이 와르르 무너진다. 모두 재미있게 혹은 감명깊게 봤던 영화인지라 새삼 이 작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내가 고른 책은 스켈레톤 크루 (상). 이 작품집 속에는 몇년전 개봉한 영화 미스트의 원작 소설<안개>가 실려있다. 짙은 안개 속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시시각각 그들의 목숨줄을 조여오는 미지의 생명체들. 아무것도 모른체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공포에 대한 반응은 정말로 피부에 직접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도 좋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마음에 든 이유는 결말부에 있었다. 결말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괴물 영화로 끝났을테지만, 경악할 만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결말은... 최고다.

그렇다면 원작 소설은 어떨까. 영화는 - 사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기억이 가물가물 - 원작 소설을 잘 재현해 놓았지만, 소설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아, 왠지 영화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드는 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것은 영화를 먼저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그렇다고 원작 소설의 결말부가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원작 소설의 포인트는 마트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것에 있다.

단 몇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람을 노리는 괴물. 하지만 그 괴물은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주 일부분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크기는 얼마나 큰 것인지, 어디에서 인간들을 노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괴물은 모습을 다 드러낼 때보다 살짝살짝 보이는 게 더 무섭다. 안개는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맡고 있다. 맑은 날이었다면 괴물이 그토록 무섭게 다가왔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각이란 감각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 시각이 차단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공포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주위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공포를 극에 달하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마트안에 갇힌 80여명의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커모디 부인의 광적인 연설이 극한의 공포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생존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 가치관 등도 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지의 존재에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의 군상극. <안개>는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일듯 말듯한 미지의 괴물과 작은 공간안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심리가 잘 반영된 소설이다.

중편 소설인 <안개>뒤에 나오는 8편의 소설은 모두 단편소설이다. 환상과 공상을 넘나드는 작품을 비롯해 인간의 편집증적인 광기를 보여주는 작품,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 타인에 대한 모멸과 멸시가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으며, 미지의 존재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등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원숭이>는 악령이 들린 인형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인데, 실제로 이 원숭이가 하는 것이라곤 심벌즈를 울리는 일밖에 없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편집증적인 광기와 공포를 선사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사탄의 인형처럼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만 원숭이가 심벌즈를 울리는 행위는 누군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정말 인형의 짓인지 아니면 우연한 결과인지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혹시 할이 보는 것은 모두 환상이나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어른이 된 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정말 악령이 들린 원숭이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가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토드 부인의 지름길>은 공간을 통해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조운트>는 공간 이동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유쾌한 반면, 후자는 음울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미지의 괴물, 환상과 망상, 편집증적인 광기, 인간끼리의 차별과 모멸과 멸시, SF적인 면이 돋보이는 시공간 사이로의 이동 등 소재도 다양할뿐더러 결말 부분도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총 9편의 작품들은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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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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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은 소년이었던 때를 그리워한다. 소년은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자신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 많을 뿐이라고 생각할 뿐.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이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보았던 어른의 여유는 어른의 허세였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어른이 된 소년 역시 허세를 부리고 만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의 무모한 용기, 어설픈 열정 같은 것들을. 그래서 소년과 어른은 서로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늘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여기 아직 소년이지만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아이가 있다. 이름은 강연우. 고교생이다. 싱글맘인 엄마 신민아씨와 함께 살아간다. 연우의 어린시절부터 엄마의 육아방침은 철저한 방목. 자유를 주는 대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는 울타리 역할을 엄마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우는 편모가정의 아이일지라도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때론 사춘기적인 일탈을 하고 싶어 '나 비뚤어질테야'라는 행동을 보이긴 해도 늘 그자리로 돌아온다.

연우는 전학과 이사를 동시에 했다. 이사 첫날 자신의 방을 올려다 보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 연우는 그 소녀가 이채영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자신과 동갑내기이며,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우에게는 또다른 친구인 독고태수가 있다. 그는 조기유학을 다녀온 아이이며, 그곳에서 무척 힘든 일을 겪은 듯 하다. 태수에게는 여동생 마리가 있는데, 태수와 같은 학년이다. 태수네 집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행복한 집이지만 어디인가 일그러져 있다. 그건 채영이네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일반 학교에서는 학습부진아로 낙인찍힌 이력이 있다. 마리는 모범생이자 어른들이 좋아하는 타입의 아이로, 어떻게 보면 어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다 꿰뚫어보고 있는 영특한 아이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오빠 태수를 걱정하는 부모님때문에 바른 생활 어린이로 살아가고 있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이렇듯 남녀 고교생 네명과 그들의 부모인 어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이다. 연우가 살아가는 10대 청소년의 세계와 연우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가 절묘하게 비교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연우의 환경은 특수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싱글맘인 엄마는 지금 연하남과 열애중. 연우는 지금 엄마가 사귀는 재욱에 대해서는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가 솔직하게 연우를 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여유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부모님들은 우리들에 대해 늘 강한 모습만 보이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연우의 엄마는 좀 다르달까. 그래서 연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털어놓는다. 친구같은 엄마와 아들이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엄마이기에 연우에게 자신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는다. 연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어차피 이해하거나 배려해줄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안다.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자식간이 얼마나 될까.

태수네 집을 봐도 채영이네 집을 봐도 부모와 자식은 단절되어 있다. 태수네 부모님은 마리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고, 태수가 혹시 마리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한다. 채영이네 역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마음을 닫은 엄마 사이에서 채영은 방황한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겉으로 보기엔 이상적인 집이라고 해서 속까지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연우네는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어 보여도 오히려 태수네나 채영이네보다는 부모자식간의 거리가 가깝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묘하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인지도 모르고, 진짜 현실속에도 연우네 같은 집이 존재할지는 몰라도 이건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너져 버린 현대 가족을 이토록 뚜렷하게 비교해서 보여주는데에는 이런 설정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소년시기의 사랑, 우정, 그리고 소년이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숨막혀 하는 아이들의 작은 일탈. 『소년을 위로해줘』는 가벼운 필치로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였던 시절을 깡그리 잊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여전히 아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체념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연우의 엄마의 글에 등장하는 채영의 아버지는 우리 시대의 평균적인 어른의 모습이자 부모의 모습이다. 자신도 꿈이 있었고 동경하던 것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결코 예전 그 시절에 품었던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어쨌거나, 대결할 힘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가치관에 따르는 척해야 하는 미성년자 신분. 우리들, 그래서 자꾸 비밀이 많아지고 자기 방으로 숨어드는 건가.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면 우리가 미워하던 사람들처럼 위선적이고 허세만 부리는 거 아냐? (310p) 

나도 서른이 넘은 어른이라 이런 마음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해 보이겠지. 왜 저러고 사나 싶겠지. 그러면서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는 게 이해도 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은 어른의 마음은 그 나이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나서 어른이 되면 자신이 그런 어른들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서서히 잊어 가면서 또다른 정형화된 어른이 되어가겠지. 

그리고 어른이 되어 실망하겠지.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에. 결국 이러고 살려고 그렇게 바르작대면서 살아왔나 싶어서. 제대로 된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세상에 갇혀 살면서 유일한 해방구로 여겨지던 힙합의 혁명 정신에 빠져 있다가도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유치해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어쩌겠니. 이게 현실인걸. 

겉으로 보기엔 딱딱해 보이는 정형화된 틀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도 소년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소년 시절의 열정을 되새기면서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소년시절의 열정과는 달라져버렸다. 인간이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달라지고, 그 시간이 그런 열정에 뭔가를 덧칠하거나 빼버리게 되면서 완전히 똑같은 열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 그저 비슷할 뿐. 그래서 어른들은 자신 안의 숨겨둔 소년을 혼자서 위로하며 평생 살아가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나이값 못한다, 철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까. 진짜 소년일 때는 어리니까 어른들로부터 그렇다고 생각해주고 때로는 배려받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연우도 이젠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서서히 그 의미를 깨달아 가겠지. 그리고 평생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겠지. 그리고 연우 역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겠지. 그런 연우를 보며 나도 나의 소녀시절과 지금과 더 나중에 대한 생각을 하며 위로받으며 살겠지. 위로란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란 걸 마음속에 담아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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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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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봤을 때만 해도 원작소설이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티븐 킹의 책을 통해서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는 호러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포 소설 파트에 등장한 리처드 매드슨, 그리고 그의 책인『나는 전설이다』와『줄어드는 남자』는 내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두 권의 책 중에 무엇을 먼저 읽을까 생각하다가 영화로 먼저 접했던『나는 전설이다』를 선택했다.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하다거나 아니면 영화에 맞게 스토리를 변형시킨다. 『나는 전설이다』는 어땠을까. 일단, 원작 소설을 읽고난 소감을 말하자면, 난 원작 소설 쪽에 손을 번쩍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는 아니다. 윌 스미스의 연기도 좋았고, 스토리도 좋았지만 난 영화보다는 원작의 결말 부분이 훨씬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또한 개를 등장시키는 부분도 소설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핵전쟁 이후 변종 바이러스가 인간들을 공격한다. 그 병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아있는 시체, 즉 흡혈귀로 만드는 바이러스였다. 로버트 네빌은 감염되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적적으로 회복,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의 가족이었던 아내와 딸은 바이러스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는 퍼져나갔다. 과학이 전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전설이 과학을 통째로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30p)

네빌은 매일 밤 찾아오는 흡혈귀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밤에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한다. 고독한 생활이지만, 그는 어딘가에 자신처럼 살아남아 있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낮에는 밤에 공격당한 집을 보수하거나 음식을 조달하고, 흡혈귀들을 없애러 다닌다. 예전에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식욕이라는 본능만이 남은 어둠의 존재들. 그들 속에서 혼자 남은 네빌은 고독하다. 작품 전반에서 네빌의 고독이 느껴진다. 그래서 네빌은 때로는 그들과 같은 흡혈귀가 되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예전에는 인간이었어도 지금은 인간을 공격하는 무리일 뿐인 것이다.

거의 3년의 시간을 혼자 살아가는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매일밤 자신을 노리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지르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그에게 절뚝거리며 나타난 개 한마리는 한가닥 희망이었을 것이다. 잔뜩 겁먹은 채 밤에는 몸을 숨겼다가 낮에만 잠시 나타나는 개를 봤을 때 네빌은 춤이라도 추고 싶지 않았을까. 이미 다른 동물들 역시 흡혈귀의 존재로 변했기에 멀쩡하게 낮에 돌아다니는 개를 봤을 때 그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었을지라도 동지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간의 공을 들여 그 개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그리고 그 개와 함께 보낸 짧지만 의미있는 일주일은 네빌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고, 슬픔 역시 동반하고 있었지만 네빌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는 못했다. 나같으면 아마도 개의 죽음이 주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무척이나 강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미 이 세상에는 더이상 인간이란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살아있는 시체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력이 형성된다는 것을. 바이러스는 쉽게 변종을 일으킨다는 것을.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같은 흡혈귀의 존재가 있었다면, 변종을 일으킨 바이러스로 생겨난 흡혈귀들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세력권을 구축하고 신인류로 거듭나고 있었다. 결국, 현재 세상에서의 네빌은 구인류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221p)

그렇다. 예전에 인간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상에서는 흡혈귀같은 것이 전설의 존재였고, 비정상적인 존재였지만, 지금 인간들이 멸종하고 흡혈귀가 신인류로 등장한 시대에는 인간이 전설의 존재이자,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는 전설이야' 라는 마지막 문장은 네빌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네빌은 전설의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던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난 진한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깊은 고독을 느낀다.

뒤에 수록된 10편의 단편들도 무척 인상적이다. 기묘한 장례식이나 영혼이 담긴 인형, 어둠의 주술이 건 저주, 머릿속으로 걸려 오는 전화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공포를 유발하는 작품들이 장편 소설과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이 단편들 중에서 특히나 인상에 남았던 작품은 역시 <매드 하우스>이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공격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집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 뿐만은 아니다. 인간이 집안에서 하는 어떤 행동이 집의 기운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가 제일 큰 포인트로 보여진다. 매일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행위를 통해 집안 구석구석에 나쁜 기운이 쌓여간다. 어쩌면 영적인 에너지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에는 작든 크든 그 소유자의 기운이 깃들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왠지 동양적인 모티브같기도 한데, 사실 이 작품이 두려웠던 것은 난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건에는 사람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집 자체가 사악한 기운을 품고 사람에게 적대적이 된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지는 것이다.

장편소설인 <나는 전설이다>는 혼자 남은 인간의 고독과 깊은 슬픔을 보여준 소설이었다면 뒤에 실린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서 큰 임팩트를 주는 소설들이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반전의 재미를 살린 작품도 있고, 푸흡하고 짧은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모두 그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전설적인 소설, 전설적인 작가란 호칭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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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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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먼저 사랑 고백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누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고백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고백이란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한 기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책『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좀 다른 의미의 고백이다. 여기에서의 고백은 수치스러운 사실의 고백이다.

나는 이 글이 단순히 흥미로운 기록에만 머물지 않고 상당히 유익하고 교훈적인 글도 되리라고 믿는다. […] 대개는 체면을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는 조심성 때문에 자신의 과오와 결점을 남들 앞에 드러내기를 꺼리지만, 그런 소망이야말로 내가 그 조심성을 버리고 기탄없이 내 잘못을 고백하는 이유일 것이다. (9p)

이글만 봐도 이 자전적 에세이가 작가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작품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작가 토머스 드 퀸시의 수치스러움이자 스스로 잘못이라 하는 것은 아편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통제로서 아편을 사용했지만 어느새 아편이 주는 쾌락에 물들어 아편을 과용하고 남용하게 된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해 어떻게 아편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편 중독이 되어 어떤 생활을 했고, 그후 아편 때문에 어떤 고통을 겪었으며, 아편을 끊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다른 이들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책의 1부는 토머스 드 퀸시가 아편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관한 글이지만, 대부분은 청소년시절에 겪은 고통의 체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누이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이후 후견인들에게 맡겨진 드 퀸시의 어머니와 드퀸시의 형제들. 그러나 그들은 후견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드 퀸시는 그들에게 반발했다. 결국 학교에서 도망 나와 런던에까지 이르게 되는 드 퀸시의 나날들은 굶주림등과 같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때 얻은 위장병은 20대에 몇년간 잠잠했으나 결국 재발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드 퀸시가 위장병 때문에 아편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치통이 심해 아편을 진통제로 처방받았고 그후 그는 아편의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오오, 맙소사! 얼마나 엄청난 변화인가! 내 마음이 가장 낮은 나락에서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 안에 세계가 계시되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이제 내 눈에는 지극히 하찮은 일이었다. 이 소극적인 효과는 내 앞에 펼쳐진 적극적인 효과의 거대함에         그렇게 갑자기 드러난 신성한 쾌락의 심연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 (86p)

그대는 낙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오, 공정하고, 교묘하고, 강력한 아편이여! (106p)

아편은 드 퀸시에게 있어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당시 아편은 일상적인 약으로 쓰였다고 책에 나온다. 또한 술값보다 싼 편이라 누구나 아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드 퀸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문인들 역시 아편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고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즉, 아편은 드 퀸시 뿐만 아니라 다른 문인들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드 퀸시는 아편을 복용함으로써 더욱더 머리가 명쾌해졌다는 이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습복용은 중독 현상을 수반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진통제역할을 했던 아편은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물론 창작의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옅어지게 되고 끔찍한 악몽의 시대가 펼쳐졌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깨어났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더 이상 잠자지 않겠다." (163p)

얼마나 고통스러운 꿈을 꿨으면 더이상 잠을 자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될까. 인간이 피로를 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데에는 휴식이 꼭 필요하다. 특히 수면은 인간에게 있어 꼭 필요한 부부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드 퀸시는 잠을 자는 것을 거부할 정도가 되었느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결국 그는 아편을 끊을 결심을 하게 된다. 아편이 주는 일시적 작용으로 자신의 인생을 담보잡히기엔 그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3부의 내용은 드 퀸시가 아편을 끊으면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앞의 1, 2부와 다르게 매우 딱딱한 문체로 씌어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은 몇년이 지난 후에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앞부분과는 좀 단절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앞부분이 산문시같은 문학적 느낌을 담뿍 담고 있었다면 뒷부분은 보고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부분의 내용에서는 세익스피어, 밀턴과 같은 문인들의 글이나 신화나 성경의 내용을 차용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뒷부분은 할 말만 하고 끝맺고 있다. 어쩌면 더이상 긴 이야기가 필요 없다는 작가의 판단이 개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 독자들의 관심이 맴도는 진짜 중심은 아편쟁이가 아니라 아편이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쾌락을 가져오든 고통을 가져오든, 아편의 불가사의한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이 글의 역할도 끝난 것이다. (164p)

이것은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아편이란 것의 속성을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알려주고, 그것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뒷부분은 간략하게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작가의 반생을 담고 있는 산문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희곡이나 시, 소설에서 따온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해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해 때로는 휘몰아치듯 올라가기도 하고, 때에 따라 감정이 뚝 떨어져 서글픔을 느끼게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번역본을 읽으면서는 보를레르처럼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보르헤스의 말처럼 '가장 슬픈' 이야기라는 표현을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작가의 이야기에 대해 서글픈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역자 후기를 읽으면서 이 책이 초판본을 바탕으로 번역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보통 책들은 개정판을 중심으로 변역본이 나오는데 그것은 왜일까. 개정판은 초판과 달리 앞부분의 이야기가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덧붙여져 있다고 한다. 아편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계기에 대해 지나친 변명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개정판을 낼 무렵에는 아편이 금지되었기에 드 퀸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자기 변호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서글픔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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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 공포에 관한 11가지 짧은 이야기
앰브로스 비어스 외 지음, 오경희 옮김 / 글읽는세상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공포문학을 좋아하면서도 이제서야 발견하게 된『괴담 - 공포에 관한 11가지 짧은 이야기』는 엠브로스 비어스의 작품이 실려 있는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책이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1년전. 그때는 다른 장르의 책들을 읽느라 공포장르에서 손을 뗀 시기였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종종 보곤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다.

목차를 살펴 보니 사실 엠브로스 비어스 외에는 아는 이름의 작가가 한 명도 없다. 그렇다 보니 좀 걱정되기도 했는데, 첫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걱정은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폐광산에서 노다지를 캔 기분이랄까.

이 책에는 총 11명의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것은 또다시 세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데, 첫 카테고리는 '미지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마리오 조르다노의 <지하의 집>은 뱀파이어, 아데라이데 네레프의 <늑대인간의 냅킨>은 제목 그대로 늑대인간이 등장한다. 귄터 잘만의<은을 자아내는 거미>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관련한 것이다. <지하의 집>의 경우 과학과 논리를 신봉하는 의사가 자신이 인식하고 있던 범위 밖의 세상을 마주했을 때, 그 공포는 어떤 것을 의미할까, 를 생각해 보면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더이상 전설을 믿지 않는다. 그저 옛이야기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현실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믿지 않았던 것이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 주는 공포만큼 가장 큰 공포는 없을 것이다. 

<늑대인간의 냅킨>은 저주란 것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보통 늑대인간이라고 하면 늑대인간에게 물렸을 때 늑대인간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은 늑대의 저주가 그 시작이었다. 가련한 동물을 재미로 학대하고 죽이던 조상의 업이랄까. 어쨌거나 이 냅킨이란 것이 이 작품에서 아주 흥미로운 포인트다. <은을 자아내는 거미>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일종의 전설같은 것이다. 그 전설이 실제였다면?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과 그 구원의 실마리가 되는 아이.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두번째 카테고리인 '혼돈이 낳은 기이한 아이들'에 속하는 작품은 총 네작품이다. 헨키 헨첼의 <메피스토펠레스의 오류 수정>은 SF적인 공포물이다. 인공지능 컴퓨터 메피스토텔레스. 사실 나의 경우 컴퓨터를 인간에 가깝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기계는 기계로만 존재하면 된다는 입장이랄까. 그것이 뒤집어질 경우, 그 끝은 파멸뿐이다. 헤닝 파벨의 <완성하라!>는 매일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 꿈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된 후,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작품이다. <개와 바다>는 조난당해 바다를 표류하는 한 남자와 한마리의 개의 이야기로, 남자의 이기심에 분노하다가 마지막 부분의 인간의 착각에는 쓴웃음이 나와 버린 작품이다. 엠브로스 비어스의 <폐쇄된 창>은 다른 작품집에서도 읽었었는데,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세번째 카테고리인 '홀로 남겨진 밤들'은 소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혼자'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원래 무서운 일은 혼자 있을 때 잘 벌어지지 않던가. 한스외르크 마르틴의 <13일의 금요일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한 한 아이의 이야기인데, 누군가 곁에 있어도 혼자만 잠들지 못하는 것도 공포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난 무서워서 미칠 지경인데,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잔다면? 이 작품 역시 마지막 반전이 압권. 헤닝 클뤼버의 <톰 홀로 집에>는 부모님이 한 집안에 같이 있지만 톰에게만 공포가 찾아온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포를 혼자 감당해야할 순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베레나 C. 하르크센의 <트롬벨리이 피튼 뱀>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고통과 분노를 안고 죽어간 무엇인가가 잠든 아이를 노린다. 클라우스 뫼켈의 <물고기들과 지낸 밤>은 복수를 하는 물고기들의 이야기이다. 보통 물고기는 머리가 나빠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세 잊어버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물고기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자신들을 괴롭힌 누군가가 혼자 있는 때를 노린다면? 앞으로 낚시는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지금도 낚시는 하지 않지만...)

전설속의 존재들, 구전으로 전해오는 존재, 인간의 우위에 선 컴퓨터, 악몽속으로 찾아오는 존재들, 혼자 있을 때만 찾아오는 두려운 존재들. 우리는 이것을 혼돈이 만들어낸 환상과 악몽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낯선 작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앤솔로지『괴담』. 이렇게 스토리의 짜임새와 구성이 좋은 책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낯선 작가들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존재하겠지만, 때로는 용기를 내서 선택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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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작품 보관함에 담아둬야 겠습니다~

스즈야 2011-03-14 23: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전 참 인상깊게 읽었거든요. 저도 엠브로스 비어스를 검색하지 않았으면 모를뻔 했어요. 교님께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