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고양이 -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안녕 고양이 시리즈 2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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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의 이용한 작가의 두 번째 책이 나왔다. 먼젓번 책은 도심에 사는 길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면 이번 책은 시골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곳에서 만난 고양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자가 이사한 곳에는 꽤 많은 고양이들이 거주한다. 물론 도심보다는 그 밀도가 낮은 편이지만 어림잡아 약 60마리의 고양이와 인연을 맺었다고 하니 시골치고는 꽤 많은 수가 이곳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참고로 내가 여름마다 가는 시골집 근처에는 고양이의 수가 10마리 남짓 정도밖에 없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 여름과 가을, 겨울, 봄, 다시 여름에 걸쳐 이야기가 진행되며, 많은 고양이들이 각각의 꼭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아니라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이야기이기에 각각의 고양이에게는 이름도 있고, 저마다의 사연도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바람이는 이 동네 왕초고양이로 저자의 집에서 급식을 하던 녀석이다. 처음에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다가 3개월이 넘어 가면서 슬쩍슬쩍 얼굴을 보여주었고, 좀더 지나서는 밥을 달라고 으냥냥거리기도 하고 저자의 집에 있는 고양이 랭이와 랭보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도 한 녀석이다. 매일매일 밥을 먹으러 오면서도 절대 곁을 내주지 않던 바람이지만, 급식에 대한 고마움으로 새를 잡아 선물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죽은 새를 가져 오더니 나중에는 살아있는 새를 기절시켜서 가져왔는데, 사람이 선물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자 선물의 상태(?)를 달리하는 배려를 보였던 것이다. 고양이의 선물을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양이가 선물을 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이 역시 무뚝뚝한 면이 많았지만 속정은 깊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인연을 맺은지 1년정도 지나 바람이는 희귀 기생충에 감염되어 고양이 별로 돌아갔다. 바람이는 그곳에서도 왕초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달타냥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녀석이다. 할머니가 노인정으로 가실 때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 마중을 나가는 궁극의 접대냥이이자, 산책을 즐기는 궁극의 산책냥이기도 하다. 잘생긴 외모에 사근사근한 성격은 누구라도 반하게 할 정도. 달타냥은 깜찍이란 암컷을 만나 사랑을 키웠고 그 결과 아기 고양이가 다섯마리나 생겼다. 하지만 달타냥을 닮은 크림색은 한마리도 없고, 엄마를 닮은 고등어랑 올블랙이 태어났다고. 아무리 봐도 달타냥의 새끼는 아닌 듯 하지만 달타냥은 그에는 상관없다는 듯 깜찍이와 아기 고양이들을 위해 먹을 것도 집마당도 양보하는 착한 녀석이다.

마을 축사에 사는 고양이 가족은 길고양이 가족 수치고는 꽤 많은 11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비록 환경은 열악해도 가족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맨앞에 보이는 큰 고양이가 대모 고양이로 가족의 우두머리이다. 윗배 새끼들과 아랫배 새끼들이 사이좋게 살고 있다.

하지만 사는 환경이 너무나도 열악해던 만큼 대모 고양이가 병에 걸리기도 했다. 고양이에게 먹거리도 중요하지만 물은 더 중요하다. 오염된 물을 먹고 살았던 탓인지 병에 걸렸지만, 무사히 회복했다고.

길고양이들에게 가장 혹독한 계절은 겨울이다. 몸집이 작은만큼 겨울에 태어난 새끼는 간혹 얼어죽는 경우가 발생한다. 축사에서는 개사료를 끓이느라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데 그 여열이 고양이들을 따뜻하게 해준다. 때로는 남은 열기에 몸을 데우기 위해 아궁이로 들어가 재투성이가 되어도 추운 것 보다는 낫지, 싶다.

환경도 열악하고 배 부르게 먹지도 못하는 생활이지만 축사 고양이네에 경사가 생겼다. 대모 고양이가 새끼 여섯마리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곧 축사가 철거되어 버렸고 아기 고양이 여섯마리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갑작스런 철거로 집을 잃은 축사 고양이네 가족은 생존을 위해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몇 마리 남은 녀석들은 축사 근처 호밀밭에서 생활하고 있기도 했지만, 축사철거로 인해 호밀을 소사료로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축사는 호밀밭마저 갈아엎었다. 근처에 동물 사체와 축사 쓰레기를 태우던 곳에 몸을 숨긴 여리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까뮈는 네마리의 아기 고양이를 낳았다. 빈집에 거주를 했었지만 이 집도 철거. 까뮈네는 엄동설한에 집을 잃은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까뮈는 두 마리의 새끼를 잃었다. 아기 고양이들을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바람을 막고 앉아 있는 카뮈의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남은 두 녀석인 당돌이와 순둥이에게 어미 까뮈는 맵고 짠 총각무 김치를 내놓았다. 그 전에 집이 있을 때는 저자가 사료를 가져다 주었지만 집의 철거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더니 이런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고양이라고 이런 게 맛있어서 먹겠는가. 배는 고프고 날씨는 추우니 이런 것이라도 먹어야 버틸 수 있으니 먹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새로운 영역을 찾았고 이곳에서 까뮈네의 생활은 순조롭게 이어진 듯 보였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어미 까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새끼 고양이들을 독립시켰나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해 죽은 채로 까뮈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고양이에 대해 편견과 적대심을 가지고 대한다. 그런 적대심에는 이유도 없다. 예전에는 시골 인심이 좋았다고 하지만 요즘은 그런 인심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귀찮아하고, 밭을 파헤친다면서 쥐약을 놓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해코지에 희생되는 고양이는 점점 많아져 간다.

하지만 늘 사람들이 고양이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 전원고양이들의 생활은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인다. 길고양이 한 마리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것으로 맺어진 인연이 이렇게 많은 고양이들을 불러 들였다.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 고양이들 꼬리가 한껏 치며올라간 것을 볼 수 있다. 완전 기분좋아, 완전 행복해 오라의 발산이랄까. 밑에 있는 사진을 봐도 그런 것이 느껴진다. 어묵을 먹으면서 웃고 있는 듯한 고양이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비록 고양이 사료가 아니라 개 사료나 사람이 먹던 밥일지라도 쫓겨나지 않는다는 것, 편히 쉴 수 있다는 것, 매끼 밥을 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이 녀석들은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욕심내며 살고 있는지.

전원고양이네에는 큰 개도 한 마리있다. 이 개는 처녀개로 새끼 한 번 낳아본 적이 없지만 아기 고양이들에게 젖을 물렸다. 그래서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고양이들은 개 뒤로 숨거나 개 집으로 피신하고 개는 이들을 보호한다. 비록 종은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는 굳건한 믿음과 애정이 있다.

이 마을에는 개와 고양이가 가족처럼 지내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까치와 고양이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추운 겨울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까치와 고양이가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다. 보통 고양이들은 까치를 공격하거나 쫓아내겠지만 이 고양이와 까치는 차례를 기다려 사이좋게 먹을 것을 나누어 먹었다. 비록 먹을 것이라곤 배추쪼가리에 생선대가리밖에 없었을지라도.

이웃마을 개울냥이 여울이가 여름에 새끼 여섯마리를 낳았다. 아기 고양이를 위해 캣맘에게 먹을 것을 얻어 물고 가는 여울이. 엄마는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추워도 아기들을 위한 먹이 원정을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여울이를 보니 시골집 근처에 사는 어미 고양이가 떠오른다. 겨우 2킬로 그램이나 될까, 눈에도 이상이 있지만 어미 고양이는 매년 새끼를 낳고 기른다. 눈 때문에 사냥을 하기 힘든 어미 고양이는 늘 구걸을 한다. 우리 집에 오면 사료를 줄텐데 얼른 와, 라고 말을 건네보기도 하지만 우리 집에는 이미 터줏대감처럼 눌러 앉은 녀석이 있어서 어미 고양이는 집 주위로만 지나갈 뿐이다. 이 긴 겨울, 어미 고양이는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어미 고양이가 낳은 새끼 고양이들도 잘 살아남았을까.

그해 여름 축사 고양이 중 한마리였던 가만이도 새끼를 낳았다. 총 네마리의 아기 고양이와 가만이는 돌담집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한여름 더위로 푹푹 찌는 가운데 가만이네 식구와 여리가 쉬고 있다. 하지만 이 장독대 옆의 풀이 베어지는 바람에 은신처를 잃어버린 후 장독대 가까이에는 잘 나오지 않게 되었다.

덩달이(좌)와 봉달이(우)는 마당고양이로 좋은 친구사이이다. 늘 함께 붙어 다니는 두 녀석. 눈밭에서 놀던 덩달이와 봉달이가 저자를 보고 반가워서 뛰어 왔다. 사료를 내 놓으시오~~~

누가 고양이는 눈을 싫어한다고 했던가. 덩달이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눈밭에서 뒹굴고 뛰어 노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이 아니라 눈 내린 후의 고양이처럼 즐겁다는 표현을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시골에서의 마당 고양이는 사실 길고양이와 다름없다. 그저 집이 있을 뿐이지 대부분의 생활은 밖에서 하니까. 봉달이는 개울가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특히 개울 건너뛰기 신공을 보여주는데, 이건 점프가 아니라 비상이다. 날아라 고양이!

하지만 하천정비사업으로 인해 봉달이가 뛰어 넘던 개울이 보로 막혀 버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봉달이는 여전히 비상한다. 이런 건 문제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이.

언제 어디에서나 발라당 신공을 보여주었던 봉달이, 꽃이 피는 봄날 꽃아래 앉아 진정한 낭만고양이의 모습을 보여줬던 봉달이, 그리고 점프가 아니라 비상을 보여줬던 봉달이는 이제 없다. 밭을 파헤친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이 쥐약을 놓았는데 그 쥐약을 먹고 희생된 고양이가 아무래도 봉달이인 듯 하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밭을 죄다 망쳐놓은 것도 아닐텐데, 그 정도 이유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무섭다. 우리 시골에도 가을에 땅콩같은 것을 보호하기 위해 독을 섞은 미끼를 두었다는데 그것을 먹은 고양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산에서 내려오는 동물들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애꿎은 고양이들만 줄줄이 죽어나갔다. 물론 산에서 내려온 동물들 역시 이런 희생을 당할 이유는 없다. 사람들은 이제 나눠주는 것의 미덕은 다 잊어 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시골 고양이들이 도시 고양이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시골에는 인심도 박하고 먹을 것도 없다. 농약을 뿌려대는 통에 개구리도 없고, 메뚜기도 없고. 쥐약을 놓아 쥐도 없다. 예전에는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길렀지만 쥐가 거의 없는 요즘, 고양이들은 그저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다. 고양이를 싫어한다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될텐데 굳이 해코지를 하고 죽이려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작고 여린 생명이 뭐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고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시골이든 도시든 고양이의 삶은 척박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늘 힘들고 아프고 슬픈 순간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편안함일지라도 그들은 그시간을 기꺼이 누릴 줄 안다. 삶이 고달파도 꿋꿋하게 참으며 살아간다. 짧게 반짝이는 순간의 행복일지라도 그들은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인간들이 못살게 굴어도, 주위 환경이 척박하게 변해도, 고양이들은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명랑하라, 고양이! 삶이 그대를 아프게 할지라도, 아무리 긴긴 밤이 있다 해도 밤이 지나가면 아침이 올 것이고,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 있을지라 해도 그것이 지나면 봄이 올지니.

사진 출처 : 책 표지, 책 본문 中(10~11p,16+97+190+278p, 23p, 32~33p, 76p, 83p, 154p, 249p, 286~287p, 102p, 141p, 244p, 262p, 192p, 299p, 342p, 135p, 136p,163p, 203p, 256p, 368p, 372+3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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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텔레비전의 소멸 - 미디어 시장의 빅뱅은 시작됐다
사사키 도시나오 지음, 이연 옮김 / 아카넷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사사키 도시나오는『전자책의 충격』이란 책으로 한국에 먼저 알려졌다. 난 이 책을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토론을 보면서 난 그래도 아날로그인 종이책이 좋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전자책의 등장은 분명히 획기적인 일이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행위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책에 수천권의 책이 들어가든 말든 어차피 읽을 수 있는 건 한 번에 한 권 뿐이니까. 그리고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 책에서 나는 고유한 냄새도 좋아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 나의 경우 안구건조증도 있고 컴퓨터같은 것을 오래 들여다 보면 눈이 아픈 사람이라 전자책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그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또다시 이 저자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난 혼자 살아서 신문은 받아 보지 않는다. 부모님 댁은 예전에는 신문을 두 종류 구독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구독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집도 이런데 다른 집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신문을 받아보는 집이 많았지만 지금은 신문을 받아 보는 집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드는게 재활용 쓰레기장에 나가보면 확실히 드러난다. 신문이 수북하게 쌓여있던 풍경을 더이상 볼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사람들은 더이상 종이로 된 신문을 읽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신문은 중년층이상이 주로 구독했지만 이제는 중년층도 인터넷으로 신문을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뉴스를 본다. 또한 지하철에서 배포하는 무가지를 읽는 사람도 많이 늘었기에 굳이 돈을 주고 신문을 사서 읽지 않는다. 신문을 보면 보수나 진보냐의 경향이 있어 논평이나 기사의 방향이 좀 다르긴 하지만 결국 대부분 비슷한 기사를 담고 있다. 또한 자신이 궁금하지 않은 기사는 보지 않고 넘겨버리기 때문에 돈을 주고 신문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낭비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신문기사 보기가 무료이다. 이러할진대 누가 굳이 돈을 주고 신문을 구독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만들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문구독자수 감소 - 신문발행부수 감소 - 광고수입감소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 신문은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역시 요즘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신문을 읽는다. 

이런 변화에 대해 신문사측은 어떤 대응을 하고 있을까. 전자신문의 발행과 유료화 등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의 거대 신문사인 <뉴욕타임즈>역시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또한 여전히 신문사는 자신들이 "우리야말로 정보를 취급하는 사제이며 세계의 소리를 일반 백성에게 전달하는 예언자이다." (117p) 라는 전근대적인 고루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기사를 배치하고 편집하는 편집권을 가지고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종이신문에서는 이것이 통용되었겠지만,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기사만을 취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이런 편집권의 월권이 통용되지 않는다. 또한 요즘은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시대이고, 자신이 원하는 기사만을 빠르게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필요한 기사가 가득한 신문을 굳이 구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문은 그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기는 커녕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런 총체적 난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것은 시간낭비이다. 이용자가 요구하고 있는 정보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98p)

신문이라는 미디어는 소비자를 '지역'이라는 대충의 분류로밖에 타깃하고 있지 않다. 인쇄물인 신문을 전국적인 판매망을 통해 배부한다는 낡은 네트워크에 얽매여 그 이상의 세세한 타깃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13p)

물론 인터넷 신문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저의 클릭수가 광고수입을 결정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기사제목이나 검증되지 않은 기사, 몇마디 단어만 바꾸어 게재하는 기사들이 차고 넘치게 된다. 그러하기에 정작 중요한 기사는 사장될 수도 있다. 인터넷에 유포되는 정보중의 90%는 별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나의 경우 인터넷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는 별로 보지 않는 편이다. 특히 유저를 낚기 위한 제목이다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기사는 클릭하지도 않는다. 이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티비로 뉴스를 시청하게 된다. 티비로 뉴스를 보는 경우 난 지상파보다는 케이블 쪽의 뉴스 전문 채널등을 주로 시청하고 있다. 지상파의 경우 뉴스를 보려면 일정한 시간에 맞춰 뉴스를 시청해야 하는데 하루에 1~2시간도 티비를 보지 않는 나의 경우 시간을 맞춰 봐야 하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다.

요즘 지상파 방송을 보면 어이가 없다. 문화예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은 거의 사라지고 대부분 예능프로그램이며 드라마도 막장드라마에만 치중한다. 이는 시청률과 관계있고, 나아가 광고수익과 관계있는 일이기 때문에 광고수입이 줄어드는 요즘 지상파는 이런 것으로 살아 남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참 안쓰럽다. 특히 시대에 맞지 않은 소재를 끌어다 만드는 드라마나 막장드라마, 인기배우와 비주얼에만 집중한 드라마가 차고 넘치는 걸 보면 지상파도 돈벌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긴 요즘은 티비도 인터넷으로 보는 세상이니 지상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시청률을 확보해야 하겠지, 라는 생각도 들지만, 점점 질이 낮아지고 수준이 떨어지는 지상파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까.    

어차피 일본의 텔레비전 시청률은 가구별 시청률로, 그 가구에서 누가누가 보고 있는지까지는 모른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은 고양이뿐이다." 라는 것이 시청률의 실정이다. (24p)

위 문장을 읽으면서 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집이랑 똑같네, 랄까. 조금 다른 점이라면 우리에서는 텔레비전 앞에 개가 앉아 있다는 것일까. 솔직히 요즘 세상에서 텔레비전을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몸을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층의 경우 다른 걸 할 수 없어 수동적으로 시청하는 것이며, 나의 경우 외출을 할 때 우리 개가 사람소리를 듣고 안심할 수 있도록 텔레비전을 틀어놓는다. 이런 걸 보고 시청률이 높다, 아니다를 결정할 수 있을까. 그러니 결국 지상파가 시청률에만 매달려서는 결국 스스로를 파먹고 말것이다.  

이런 변화에 대해 신문과 지상파 방송의 대응책은 없는 것일까. 예전에는 신문이든 방송이든 수직통합 사업자였다. 즉 과거에는 신문사나 방송국이 콘텐츠 제공 - 컨테이너(신문과 텔레비전) - 컨베이어(판매점과 전파)등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지금은 수평분산, 즉 콘텐츠 제공자와 컨테이너, 컨베이어를 담당하는 곳이 각각 달라졌다는 것이다. 콘텐츠 제공과 플랫폼 영역을 모두 가지고 있던 신문과 방송이 이젠 인터넷에 플랫폼을 빼앗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신문과 방송이 플랫폼을 다시 탈환하기란 어렵다.   

선택은 플랫폼이 되든지 아니면 깨끗이 콘텐츠 제공자로 남든지 두 가지 길뿐이다. (217p)

신문과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막강한 플랫폼을 인터넷에 빼앗겼다는 것이 분할 것이다. 이는 막대한 광고수입이란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인터넷 사업자를 배척하고 그들에게 소송을 거는 것만으로 더이상 신문과 지상파 방송은 존재할 수 없다. 대세는 인터넷으로 옮겨가 버렸으니. 이제는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것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른다.

신문과 방송이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역과 영향력이 상당부분 줄어들 것은 자명하다. 인터넷 시스템을 자신의 적이라 규정하고 배척하는 한 신문과 방송에 있어서는 자멸이란 결론밖에 남지 않는다. 구시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신문사와 지상파 방송국 역시 이젠 달라져야 할 것이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시스템으로 돌아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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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하기 좋은 날
마마하라 엘리 글 그림 / 삼양출판사(만화)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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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하숙집이라.
난 대학시절 이후부터 거의 혼자서 살아온지라 요런 하숙집 이야기가 참 좋았다. 뭐랄까 덜 외로울 것 같기도 하고, 밥도 내 손으로 안해먹어도 되니까. 사실 가족과 사는 것도 좋지만 가끔 서로 부딪히는 일이 생기곤 한다. 가족이 아니라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니 오히려 사이가 더 좋을 수도 있다. 물론 혼자 살 경우에 한정. 친구랑 살 경우엔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우정에 금갈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하숙집 이야기를 보니 이 사람들이 좀 부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살면 개나 고양이같은 반려동물과의 생활은 접어야 하니 내게 있어서는 그냥 그림의 떡일 뿐. 그러니 그저 부러워할 뿐.

하루에 할머니가 관리하던 등나무장. 그러나 하루에 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새로운 관리인으로 손자 마사치카가 이곳을 당분간 관리하게 된다. 마사치카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쿨한 외모를 소유한 남자로 등나무장에 사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런 선언을 한다. 등나무장을 처분할 수 밖에 없어서 6개월 후에 모두 나가달라고. 등나무장에 살던 사람들은 잠시 충격을 받지만 하숙하는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등나무장의 거주민 중 한 사람인 케이는 마사치카가 묘하게 신경쓰인다. 물론 처음엔 마사치카가 게이란 것을 알고 호기심이 생긴 거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그게 아닌 것 같달까. 원래는 이성애자인 케이가 마사치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우연히 좋아하게 된 사람이 동성이란 것으로 보면 될 듯. 가끔 이런 상황의 이야기를 보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예전엔 고민했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달까. 물론 사랑이란 것때문에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고, 마사치카와 헤어지면 오히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노선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근데 사실 난 이 둘 사이의 진전보다는 하숙생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분위기가 좋았달까. 내가 이런 상황을 오래전부터 부러워했기 때문에 더 그럴수도 있겠지만, 여튼간에 난 하숙생들 이야기 쪽이 더 매력있었다. 아무래도 번외편에서 마사치카가 이상하게 나와서 더 그럴 수도 있고. 썩 괜찮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와르르 무너졌달까. 차라리 번외편을 그리지 말지 그러셨어요, 작가님!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마사치카 X 케이, 노조미 X 오오제키의 이야기를 더 그렸어도 좋을테지만, 역시 무리일지도. 여전히 스토리 쪽이 약한 느낌이라서 그럴지도. (후아~~)

그래도 재미있는 건 세메처럼 보이는 우케와 우케처럼 보이는 세메를 잘 그린다는 것일까. 이번에도 깜빡 속았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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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3 - 고양이 할멈 샤바케 3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몸이 약해 늘 자리보전하는 나가사키야의 젊은 도련님과 도련님을 수호하는 요괴들이 만들어가는 신기한 이야기, 제 3탄『고양이 할멈』.

어라, 너무나도 몸이 약해 아침, 점심, 저녁으로 다른 병을 앓다 죽을 정도인 도련님이 한그릇 더를 외칠 정도로 밥을 잘 먹는다. 그러고 보니 중고로 구입한 헌 장롱 속에서 금화가 발견되는 등 요즘 나가사키야는 복신이 들어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정작 들어온 것은 빈상의 긴지란 남자. 이 남자는 원래 오무라야란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던 사람인데 그 집 부부가 죽고 가게가 기울어지면서 나가사키야로 오게되었다. 오무라야에서는 이치타로의 이복형인 마츠노스케를 데릴사위로 들이고자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결혼상대인 첫째딸이 덜컥 죽어버리는 사건이!? 이치타로는 야나리와 다른 요괴들에게 사건을 조사하도록 한다. 그 결과 밝혀진 진실은...

어째서, 어째서 죽이면 안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게 저한테는 이득이 되니까…… 상관없지 않습니까, 상관없잖아요. (51p)

사람의 욕심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의 목숨이 귀한줄도 모르게 되는 걸까.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범인이 등장하는 <차행주 달걀>. 이런 걸 보면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만 든다.

어린 여자아이가 대로에서 미아로 발견된다. 이 소녀는 어려서 그런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요괴를 볼 줄 안다. 하긴 도련님도 요괴만 볼 줄 알지, 다른 능력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 아이는 왜 미아가 된 것일까. 주변을 조사해 봐도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집은 없는데, 알고 보니 꽤 먼 곳에서 아이가 왔던 것이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꽃비녀>는 병에 걸렸지만 여우에 씌었다는 소문때문에 괴로운 한 집안의 이야기이다. 에도시절에는 정신질환같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무지했을터이니,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면 여우같은 요괴에 씌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샤뱌케 3권의 제목이 <고양이 할멈>이라고 해서 고양이를 많이 키우는 할머니의 이야기거나 할머니로 변하는 고양이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둘 다 땡! 네코마타 이야기이다. 고양이가 오래 살면 꼬리가 갈라지면서 고양이 요괴가 된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네코마타이다. 이 이야기에는 네코마타가 등장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이야기랄까. 그것도 부처님을 모시는 승려가 저지르는 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2권에서는 하쿠타쿠 니키치의 과거지사가 나왔다면 3권에서는 이누가미 사스케의 과거지사이다. 사스케가 처음으로 인간과 만나 그의 가게에서 일했을 때의 일화로 터무니없는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부르는지, 그런 욕심을 부리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돈이란 것은 열심히 일해서 버는 것이지 노력없이 얻는 돈은 반드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다. <고향>은 욕심앞에서 자신의 가족마저 팔아넘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작품인 <방울이요 방울>은 도련님의 '나 이제부터 비뚤어질테다' 선언으로 시작한다. 에도에서도 손에 꼽을 크기의 가게인 나가사키야의 도련님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사람들과 요괴들의 보호를 받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다. 어려운 것, 힘든 것 모르고 자라서 방탕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도련님은 반듯하게 자라났다. 그런 도련님이 방탕해질테다, 라고 선언한 이유는?

도련님도 보면 참 안됐다. 이제 열여덟살, 에도 시대에는 보통 이 나이에 결혼을 한다. 그러나 몸이 너무 약해 결혼은 커녕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도련님. 게다가 친구 에이키치의 동생 오하루는 이치타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데... 오하루에게 들어온 혼담의 상대에 대해 직접 조사에 나섰다가 큰 일에 휘말린 도련님. 도련님은 이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까.

3권에는 도련님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 정도 나온다. 물론 실제 결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말은 도련님이 결혼적령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하지만 몸도 약하고 누굴 만나 연애도 한 번 해보지 못한 도련님이 나이가 찼다고 결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의 허약한 도련님은 그런 사랑을 해 볼 수 있을까. 힘내세요, 도련님!

세상에는 수상쩍고 괴이쩍은 일이 참 많다.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 이치에 닿는 일들이다. 물론 가끔 요괴나 귀신이 수작을 부리는 일도 있겠지만.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도 마찬가지이다. 여우가 씌었느니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종의 병이었고, 네코마타가 등장한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존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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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生続けられない仕事 1
                                        山田 ユギ / 竹書房 (2010)

  

오호, 이번엔 변호사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면 야마다 유기는 일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리는 듯 하다. (맞나? 역시나 기억이 가물가물) 대부분 리맨물이었는데 이번에는 전문직 종사자이다. 두근두근 기대만발!

신입 변호사 하야사카 요시히토는 수습생 시절에 자신을 지도해 줬던 미카미 하루히코를 동경, 그의 사무소에 취직한다. 미카미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로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 정성을 다 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무소에서 밤을 지새는 일도 많다. 아침에 맹~~ 한 상태로 몇 십분을 보내는 모습에 웃음이 빵. 무척 잘 생긴 남자인데 침 질질 흘리면서 눈은 멍하게 뜨고 말이지. (푸하핫)

어쨌거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일을 시작한 하야사카 요시히토는 미카미의 지도하에 착실하게 근무해나가지만 이 사무소에 빈번하게 드나드는 미카미의 동료 변호사인 가타야마 마사키에게 늘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엉덩이 조물락거리기라든지.... 뭐. 하야사카는 성희롱이라며 반발하기도 하지만 늘 가타야마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만다. 

하야사카가 미카미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후 처음으로 단독으로 맡게 된 사건은 불륜 사건이었다. 이 사건때문에 하야사카는 폭력사태에 휘말리는 일까지 생기는데, 이를 보는 미카미와 가타야마의 걱정이 특별하다. 알고 보니 이 둘에겐 아픈 사연이 있었던 것. 예의 사건으로 인해 둘은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후 미카미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가타야마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향했다. 그래서 가타야마가 미카미를 바라보는 눈이 묘하게 보였었나? 

하야사카 역시 나름대로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다. 변호사가 된 이유도 그런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다들 나름대로 아픈 사연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젊은 변호사들이다. 모리만 빼고.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모리는 어려운 것이나 힘든 것도 모르고 살아온 남자랄까. 어떻게 보면 너무 밝아서 부담스럽지만 이 어두침침한 과거를 가진 남자들에게 있어 좋은 친구가 될른지도. 아니 미카미 한정일까나?

처음에는 미카미를 동경해서 이 사무소로 왔지만 일을 하고 서로 부대끼고 위로받는 동안 부쩍 가까워진 하야사카와 가타야마. 이 둘의 러브 라인은 아주 깜찍하게 시작했지만, 미카미와 모리의 경우 아슬아슬한 관계로 시작되었달까. 아무래도 미카미가 균형을 잃고 무너질 건 뻔해 보이는데, 모리가 미카미를 어떻게 잡아줄지...

변호사 이야기라고 해서 좀 쫄았다. 사실 사건 이야기도 나오고 법관련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원서로는 좀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루비도 충실하게 달려있고, 한자를 보면 대충 뜻이 파악되서 스토리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행) 또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들의 일에 관한 이야기도 충실해서 좋았다. 가끔 보면 전문직 남성이 등장해도 일 보다는 사랑이야기에 중점을 둔 작품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달까. 몇 권까지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3권 정도로 마무리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야마다 센세, 연재 너무 늘리지 마시고 다음권 빨리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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