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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자라날 때 ㅣ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순수하고 순진하고 밝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나도 어릴 때는 저랬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현재의 상황에 대해 조금은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난 이제 더이상 아이 때처럼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밝지도 않아, 난 세상의 때가 많이 묻은 어른이야, 라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정말 아이들은 그저 밝기만 한 존재들일까. 장담컨대, 어린 시절의 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고 있었지, 그저 밝고 명랑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본다면, 어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니까 자연스레 아이들은 당연히 발고 명랑하고 순수하고 순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과 아이의 다른 점은 욕망에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른이 되면서 자신의 욕망은 점점 숨기게 되지만, 아이 때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순수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모습이 잔혹해 보이거나 잔인해 보이기도 한다. 순수할수록 잔혹해진다, 라는 건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때때로 그런 점을 느끼게 된다. 호기심 역시 잔혹함을 부를 때가 있다.『손톱이 자라날 때』는 그저 밝고 명랑하고 순진하고 순수할 것만 같은 아이들의 어둠이 깃든 내면에 관한 이야기이며 총 다섯 편의 단편은 아이들이 접하고 사는 다양한 상황에서 아이들의 어둠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거기, 누구니? - 하얀 벽
중학교 2학년인 민희는 자타공인 예쁜 아이이다. 하지만 시쳇말로 공주병 증상이 중증인데다, 다른 아이가 자신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되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렇다 보니 교우관계가 원만할리 없다. 민희와 희진, 영주는 친구사이이긴 하지만 딱히 절친이라고 불릴 사이는 아니다. 민희에게 있어 친구는 희진이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자신이 속한 그룹의 친구들은 오히려 희진이와 더 친한 듯 하니까.
이렇게 어중간한 친구관계를 맺고 학교 생활을 하던 민희는 어느날부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스멀스멀 잠식하는 기운이. 이런 상황에서 민희에게 악의가 가득한 편지가 도착한다. 도대체 누가? 민희는 점차 공포와 분노의 감정, 그리고 이러다가는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데...
하얀 벽에 나오는 민희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아이이다. 무조건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자신에게로 쏠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구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자신보다 매력적인 친구가 있으면 어떻게든 깔아뭉개고 싶어한다. 민희의 짝 기주는 민희의 친구였지만 어느샌가 민희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아무런 저항없이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주는 어느날 사라지게 되고, 민희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따돌려 혼자가 된 아이들, 교실의 책걸상 취급이나 벽취급을 당했던 아이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들려주었고, 그 아이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았던 민희. 그 아이들은 민희에게 있어 그저 '벽'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이런 관계는 존재한다고. 어른들의 그룹에서도 주목받는 누군가가 있다면 정말 물건처럼 존재감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원해서 존재감이 없이 사는 경우도 있겠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란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 그걸 원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되어 버린 경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외로운 존재가 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들. 자기자신만 바라보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자신만 신경쓰고 살다보면 당연히 주변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얀 벽만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하얀 벽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삶 - 난 네가 되고
지영이와 주영이는 쌍둥이이다. 하지만 여느 쌍둥이와 달리 이 둘은 사이가 너무나도 안좋다. 그래서 매일 싸우게 되지만 어째서인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주영이 편만 들고 주영이만 좋아한다. 가족 모두 외출을 나가게 된 날 차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이 싸움은 결국 교통사고로 이어진다. 눈을 뜬 지영은 자신만이 유일한 생존자란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부터는 주영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자매일지라도 그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난 내 여동생과 나 둘뿐이라 싸웠다 친해졌다를 반복하긴 했어도 그런 생각까지는 안했다. 쌍둥이는 더 친하게 지낸다는데 도대체 지영이와 주영이는 왜 그런 걸까. 지영이의 눈으로 본 주영이의 모습은 지영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깔보고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영이의 일방적인 시선으로 주영이를 판단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오히려 교우관계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은 건 주영이었으니까.
지영이는 주영이를 너무 질투했기 때문에 자신의 매력이 뭔지,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잊고 살았던 건 아닐까. 나는 나, 주영이는 주영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학생인 지영이 입장에선 이러한 것들이 차별이라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영이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어린 나이에 이토록 큰 분노와 원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지영이, 그 아이가 너무나도 가엽다.
끈질기게 따라 붙는 - 붉은 곰팡이
한가족이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작은 가게도 집도 잃고 반지하 방으로 이사하게 되었지만, 그곳은 너무나 음습한 곳이었다. 습기가 많아 공기는 축축하고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어 숨쉬기도 어려울만큼 공기가 탁했다. 이곳에서 살면서 가족들은 점차 변해갔다. 엄마는 짜증과 분노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말이 늦었던 동생은 배운 말도 잊어버렸고, '나'는 점점 우울한 아이로 변해갔다. 아버지는 원래 세상만사 느긋한 사람이라 스스로 뭘 할 줄도 모른다.
가난이란 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고들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다. 뭔 일이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도 없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뭔가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집안의 가장이 이렇다 보니 이제껏 악착같이 살아왔던 엄마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듯 살아가고, 그때문에 동생은 방치상태이다.
가난이 가족의 몰락 혹은 붕괴를 가져오는 경우가 꽤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난이 곰팡이란 것으로 드러난다. 반지하의 습한 방, 없애도 없애도 자꾸만 생겨나는 곰팡이는 이들 가족의 앞에는 가난이 계속 따라붙을 것이란 것을 암시한다. 곰팡이처럼 살아, 라는 아버지의 말이 참으로 무섭다. 끈질기게 살아남으란 이야기겠지만, 꼭 곰팡이여야만 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 - 손톱이 자라날 때
책 표지를 보면 예쁜 그림이 보인다. 손톱이 자라나 꽃나무가 된 그림인데, 아이의 표정은 묘하게 어둡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지의 손톱은 꽃나무처럼 예쁜 것이 아니라 남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마녀의 손톱이 되어 가기 때문이다. 유지는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할 장치 정도로 손톱을 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이 손톱은 다른 아이를 공격하고 괴롭히는 무기가 되어 간다. 이런 행위는 점차 멈출 수 없게 되고, 결국엔 일부러 한 아이만을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없다. 그저 그 아이만 보면 괴롭히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손톱을 이용해서.
또래집단에서 일어나는 집단따돌림 문제는 사회문제로까지 발전했다. 중고교생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 자신들이 사육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한 분노를 어른에게 풀 수 없어 또래 아이들에게 푸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런 것은 결국 서로에게 고통을 가져올 뿐이다.
나누어야 할 것은 마음 - 고누다
고누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이나 동물처럼 살아있는 것을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것에만 적용되고, 금세 둘이 합쳐지며, 한번 실행된 것은 두 번 다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지만, 고누다는 늘 새로운 대상을 찾아내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고누다가 나눈 것은 같은 반의 보라라는 아이로, 보라 2를 만들어 자신의 방에서 지내게 하고 있다. 친구가 필요하단 이유로 그렇게 만들었지만, 고누다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언젠가 진짜 보라에게 먹히도록 하면 보라 2는 자연스럽게 사라질테니 아무 걱정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일까. 대상이 둘로 나뉘어졌을 때 상대를 잡아먹는 것은 진짜였을까. 보라2는 말한다. 가짜는 진짜에 대한 분노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짜보다 힘이 세다고. 결국 고누다가 나눈 생명들은 모두 진짜가 잡아먹히고 가짜만 남은 것이라고. 그리고 남은 가짜들은 평생 자신이 가짜라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고누다는 변명한다. 난 사실 내 것이 가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아지도 고양이도, 친구도. 하지만 내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그렇게 실현하는 게 옳았을까. 마음은 나누는 것이다. 자신의 친구가 필요하면 마음을 나눠야 하는 것이다. 고누다는 그걸 몰랐다. 자신이 가짜로 바뀔 때에 겨우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예전의 고누다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고 느끼고 만드는 어둠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어둠이 발현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필요에 따라 친구를 사귀다 버리는 민희의 경우 주변 친구를 벽처럼 만들었고 벽처럼 대했다. 쌍둥이 자매를 질투한 나머지 그 아이가 되겠다고 생각한 지영이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순에 빠졌다. 처음에는 울컥하는 기분에 시작된 따돌림은 결국 멈추지 않는 분노의 수레바퀴가 되어 유지의 숨통을 죄어 온다. 고누다는 친구가 가지고 싶었고 자신만의 것이 가지고 싶어서 살아있는 것을 둘로 나누다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된 어둠에 마음이 먹혀 버렸다. 어찌보면 처음에는 순수한 욕망에서 시작되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은 집착이란 것으로 변형되었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상처입히게 만든 것이다. 붉은 곰팡이에 나오는 소녀의 경우 가정 환경의 변화때문에 타의적으로 어둠에 밀어 넣어진 경우이지만, 결국 그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욕망은 순수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자신의 욕망에 오히려 끌려가기도 한다. 보통 아동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은 어둠을 일정 부분 그리고 있어도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손톱이 자라날 때』는 철저하게 어둠에 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설정들이 판타지적 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판타지적 성향은 일상이 비일상적인 것으로 어그러져 가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만든 어둠의 늪에 점차 빠져들어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평범한 일상이 비일상으로 바뀌어 어그러져가는 것을 보면서 오싹한 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절망하고 후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안쓰럽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이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