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시지 료코의 괴기사건부 5 - 흑거미섬(절판 예정)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진수 옮김, 카키노우치 나루미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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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 월등한 몸매, 비상한 두뇌와 재력이 빵빵한 집안을 제외하고는 장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경시청 캐리어 야쿠시지 료코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발견된 일본인 남녀의 변사체 사건을 수사하기위해 캐나다로 날아간다. 물론 충복인 이즈미다 준이치로 경부보가 동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외국이다 보니 아무래도 수사권의 범위가 좁아질 수 밖에 없지만, 마의 여왕 야쿠시지 료코에게 그런 것이 무슨 대수겠소. 이즈미다 경부보의 고생길이 훤하구려. 그래도 이젠 야쿠시지 료코의 월권행위(?)를 은근히 즐기게 된 이즈미다 경부보였다.

일본인 남녀가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라... 일본에선 이런 경우 동반자살(정사)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여긴 캐나다이다. 따라서 캐나다 경찰 역시 그런 쪽으로는 수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인이 살해된 사건이다 보니 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이 두사람이 이곳으로 날아오게 된 것이지. 하지만 어딜 가나 야쿠시지 료코에게 벌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있게 마련. 이번엔 총영사다. 아내를 때리는 건 일본인의 고유 문화라 주장하는 이 재수없는 총영사에게 벌을 주는 야쿠시지 료코에게 박수를... 하지만 이즈미다 경부보에겐 꽤나 곤욕이었겠구려. 그런(?) 모습을 목격해야했으니... 당신도 이럴 땐 참 안되었다니까.

뭐, 총영사는 이쯤 손봐주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선 두 사람은 헐리우드에서 잘나가는 영화감독인 그레고리 2세의 초청을 받아 그가 기거하고 있는 흑거미섬으로 향한다. 첫방문에서는 뽀족한 단서를 건지지 못한 료코와 이즈미다 경부보는 밴쿠버에서 딱 마주친 유키코와 키시모토와 동반 침입(?)을 시도한다. 이 두사람은 다른 일로 밴쿠버에 왔지만 어떻게 된 우연인지 료코 일행과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고지식한 유키코가 흑거미섬으로 잠입하는데에 동의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레고리 2세의 보디가드로 일하는 일본인 3인조가 전직 일본경찰로 문제가 꽤나 많은 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이 료코, 이즈미다, 유키코, 키시모토를 공격해 왔고, 그후 나타난 흑거미에게 이들은 공격받고 잡아 먹힐뻔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거대한 흑거미가 인간을 공격하다니. 분명히 이 흑거미는 흑거미섬에 서식하고 있는 게 맞다. 그러니 당연히 흑거미섬으로 가야 하는 것이지. 흑거미섬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음, 솔직히 말해서『야쿠시지 료코의 괴기 사건부 5 - 흑거미섬』은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재미가 덜했다. 싸움도 그렇고, 결말부분도 그렇고.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일본 남성들에 대해 엄청나게 씹고 있다는 것이지. 일본내에서의 사건을 다룰 때는 경찰청, 경시청을 세트로 씹어주시더니 외국에선 일본인 남자에 대해 씹어주시는 센스. 그도 그럴 것이 총영사도 그렇고, 괴한 3인조 역시 문제가 아주아주아주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런 범죄는 대개 남자들이 저지르고 다니지. 재수없는 것들.

아, 맞다. 내가 4권을 보지 못해서 그런데 료코는 이즈미다에게 확실히(?) 마음이 있는 듯. 무심하게 내뱉는 말도 그렇고, 여전히 이즈미다를 인간의자로 이용하는 료코의 행동도 그렇고. 근데 이즈미다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듯 하기도 하고, 그런 료코를 모른척 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달까. 하긴 아무리 아름답다해도 료코처럼 무시무시한(?) 여성을 사랑하려면 보통 사람의 간크기의 1,000배쯤 되는 간을 가지고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이 미모에만 반하거나, 료코보다 더 무시무시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료코와 다니면서 마주치는 사건 해결만도 뻑쩍지근,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그녀곁에서 평생 살아가려면 뭐... 그래도 모르지, 료코가 막상 결혼하면 사랑스런 주부가 될지도.... (푸핫,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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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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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렸을 때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지만, 어린 시절의 난 꽤나 별났던 모양이다. 그중 하나는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이다. 당시 4살무렵이었던 나는 집에서는 밥을 하나도 안먹어서 걱정이었는데, 동네에 계신 이웃 할머니댁에 놀러 가서는 강된장을 숟가락에 콕콕 찍어서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더란다. 그런 버릇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이어졌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갈때는 모퉁이를 돌아 할머니 집만 보이면 뛰어가서는 "할매, 밥!"이라고 외쳤다. 밥이든 죽이든 상관없었고, 더운밥이든 찬밥이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할머니 집만 보이면 배가 고팠다. 물론 우리 할머니니까 그렇게 응석을 부렸겠지만,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남의 집에 가서 밥 얻어 먹는 걸 좋아했다. (저학년무렵까지) 그중 한 집이 할머니댁 근처에 있는 집이었는데, 그집 딸이 나보다 3살정도 많은 언니였다. 놀러가는 건 핑계고 그 집에서 아침이며 저녁까지 먹고 왔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짓을 그때는 참 뻔뻔하게도 저질렀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그런 버릇이 싹 없어졌다.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가끔 친구집에 가기는 해도 밥을 먹는 건 고역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단순히 사춘기를 지나 그런 게 부끄러운 일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난 우리집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집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우리집과 다른 식사문화며 분위기 등이 좋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커서는 그런 일을 꺼리게 된 것이 내가 다른 집에 가면 그 집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였을거라 생각한다. 밖에서 만나면 내가 사는 집의 분위기는 상당히 많이 감추어진다. 하지만 집이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면 난 밖에서의 나와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된다. 친구도 마찬가지겠지. 밖에서 만나는 친구와 그 친구의 집에 놀러가서 마주하는 친구의 분위기는 분명 달랐다. 그 거리감이 난 조금 두려웠었다. 

이처럼 집이란 공간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특유의 분위기를 갖게 한다. 각각의 집안 사정이 따로 있어서 각각의 분위기가 나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집과 비슷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역시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집이란 공간을 소재로 씌어지는 이야기는 어느 집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듯 하다.『소란한 보통날』에 등장하는 미야자카家 역시 마찬가지이다. 엄마, 아빠, 4남매의 6인 가족의 구성은 얼핏 보기에 굉장히 평범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적인 큰언니 소요는 결혼해서 살고 있고, 둘째 언니는 직장에 다닌다. 셋째인 고토코는 지금은 무직 상태로 밤의 산책을 즐기고, 넷째인 리츠는 조용한 아이로 피규어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는 가족의 식탁을 차릴 때 한껏 멋내는 것을 좋아하고, 아빠는 규칙적인 생활을 중시한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들의 일상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큰언니는 결혼생활이 원만해 보이지만 갑자기 집을 나와 이혼을 한다고 하고, 작은 언니는 임신한 직장 동료가 아이를 낳으면 자신이 키운다고 한다. 고토코는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그와 대화하는 걸 보면 평범한 소녀가 아니란 생각이 들고, 리츠는 남자 아이인데도 피규어 작업을 즐기며, 또래답지 않은 세상을 초월한 언사를 자주 내뱉는다. 이들이 모이고 모여 생겨나는 이야기는 분명 일상의 이야기인데도 독특함이 물씬물씬 배어난다. 그렇다고 멀리하고 싶은 가족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족이고, 어디에나 있을 법은 일들이 일어나는 집안 풍경이라 마음이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저 정도는 특이하다고 할 만하게 아니잖아, 라는 감상이랄까. 그래, 특이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특별하다.『소란한 보통날』은 미야자키家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밀도 높게, 쫀득쫀득하게 표현되어 있다. 평소같으면 무심코 넘어갈 이야기, 평소같으면 모르고 지나칠 이야기이지만 이 밀도가 이들의 특별함을 더해준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싶어진다. 내 어린 시절의 버릇이 튀어나오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원제는 流しのしたの骨(싱크대 밑의 뼈)라고 하는데, 문득 영어 표현인 skeleton in the closet(벽장 속의 해골)이 떠오르는 제목이다. 벽장속의 해골은 가족의 감춰진 치부나 비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의 원제는 어떤 가족만이 가진 독특하고 특별한 분위기라는 의미를 가진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지만 집이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만 보이는 어떤 것, 그런 의미가 아닐까. 미야자카家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가만히 뜯어 보면 매우 특별하다. 이처럼 집이란 공간에서의 특별함은 세상의 모든 가족에 해당되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겐 그 가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보통날을 소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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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의 산책
구로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북애비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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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표지를 보면 하단부에 제 1회 일본 幽 괴담 문학상 장편부분 대상 수상작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은 참으로 다양한 문학상이 존재하는구나 싶다. 우리나라의 경우 순문학쪽은 다양한 문학상이 존재하지만 이런 장르소설 쪽은 거의 전멸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이런 일본이 꽤 부럽기도 하다. 다양한 공모전이 열리기 때문에 아마추어 작가들이 많이 발굴되고 그러다 보면 장르소설의 수준도 높아지는 것이겠지. 일본쪽 사이트를 살펴 보니 이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교고쿠 나츠히코다. 와우, 역시 이런 쪽 심사에는 빠지지 않는 분인 듯 싶다. 이쪽 장르에서 워낙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선택한 작품이니 마음 놓고 믿고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소설가 요네다 타쿠로는 1년전 아내 미사코가 죽은 후 딸 치아키와 둘이서 살고 있다. 치아키는 아직 어려서 엄마의 죽음이란 것에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그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치아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상하게도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된다. 치아키가 그리는 그림은 사람이 아닌 이형의 존재. 타쿠로는 치아키의 엄마 미사코도 좋은 그림을 많이 그리는 화가였으니 치아키도 그 피를 물려 받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만다. 게다가 아이들은 어른들의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곧잘 그리기도 하니까 그런 것은 단순히 치아키의 재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엔 다양한 그림을 그렸던 치아키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새파란 얼굴을 가진 여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얼굴을 엄마라고 부르며, 다른 그림은 그리지도 않고 그 여자 얼굴만 계속 그린다. 이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해도 치아키는 그림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런 치아키가 또하나 집착하는 것은 밤 11시의 산책이다. 잠을 자다가도 꼭 11시만 되면 산책을 나가자고 하고, 검은 물이 흐르는 강 근처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 이상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치아키의 이상행동은 점점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한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겁주고,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유치원 선생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 치아키의 행동은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또한 타쿠로의 담당자가 남자에서 여자인 미키로 바뀐 후에는 미키에게까지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쿠로는 단순히 엄마가 아닌 여자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런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일이 점점 더 커지고 두려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치아키의 유치원 선생이 치아키와 함께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치아키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괴상한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도대체 치아키는 왜 그런 것일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들여다 보기도 한다. 혹시 그곳을 통해 무언가 나쁜 것을 본 게 아닐까. 아니면 처남의 말대로 치아키의 엄마인 미사코가 성불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타쿠로는 미사키의 방에 있는 흔적들을 기반으로 치아키를 그렇게 만든 존재를 추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맞닥뜨린 진실은...

난 공포영화나 호러 소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괴물처럼 나오는 건 정말 싫어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원래부터 사악한 아이도 있지만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사악하게 변하는 아이들도 나오는데 그런 아이들의 사악함은 어른들의 사악함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악함이랄까, 그런 것이 더욱 소름끼치게 만든다. 치아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지는 것이다. 누가 믿겠는가. 5살짜리 꼬마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걸. 하지만 모든 괴이쩍은 일 뒤에는 치아키의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치아키로 가장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탁하고 검고 어둡다. 타쿠로는 치아키를 어둠에서 구하고, 재혼한 미키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 그림자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역시 호러소설의 전형적인 결말이로군, 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서서히 압박해오고 조여오는 느낌이 좋았다. 원래 갑자기 뭔가 팍 튀어 나오는 것 보다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게 더욱더 공포를 고조시키는 법이지 않은가. 모든 일이 시작된 그곳, 그리고 여전히 그 그림자가 숨어 있는 그곳. 그곳의 주박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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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스미야의 신부맞이
야마나카 히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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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라, 표지를 보니 시대물이 확실하겠고, 제목을 보니 상인의 집안과 관계된 이야기겠구나. 음, 그렇다면 앞에 보이는 저 남자는 상인이란 말이지. 상투를 틀고 있지만 무사와 달리 조금 느슨한 상투로고. 아, 그렇지. 이건 BL인데 아리따운 아가씨가 보인다는 건...!? 옳거니 감잡았으~~

무가의 서자로 태어난 스즈는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본처의 아이보다 더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혹 본처의 시기에 해를 입을까 여자아이로 성장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것이 상관이 없었지만 점점 성장해갈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스즈는 어느 날 시장에 나갔다가 불량배들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때 짠~하고 한 남자가 나타나 스즈를 구해준다. 그날 이후 남자에 대한 묘한 동경이 생긴 스즈는 아버지와 의절하고 남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집안의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마루스미야에 시집을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혹시 그날 자신을 구해준 남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기대는 기대에 그쳤던가. 하지만 첫날밤 나타난 신랑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 스즈였으니...

남자든 여자든 널 갖고 싶었어, 라고 고백해 오는 신자부로. 스즈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신자부로는 빚 4천냥으로는 마음까지 살 수 없다며 어디론지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는데... 와우, 이 남자 꽤 멋진데. 근데 말이지, 참 배포도 크시구려. 에도 시대에 4000냥이면 엄청난 금액일텐데 말이지. 이게 스즈네 집안의 3대를 대물림한 빚의 액수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신자부로의 이야기에 잠시 사라졌던 스즈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신자부로의 앞에 나타난다. 푸핫. 나 안웃으려고 했는데 미친 듯이 대폭소!

아, 지금도 웃기다. 솔직히 말해서 신자부로가 촌마게를 하고 있는 것도 웃겨 죽겠는데, 이 시기의 성인 남자들은 죄다 상투를 틀고 나오니 전혀 에로하지 않아. 오히려 웃겨서 감상(?)에 방해가 된다.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푸핫하고 웃게 만들어 버리는 상투 튼 모습에 도저히 적응을 못하겠다. (아마도 앞으로도) 물론 이것이 이 시대의 자연스러운 풍습이란 걸 인정해야겠지만, 인정은 인정이고 적응은 다른 문제니까 말이지.

스즈와 신자부로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난 스즈를 어린 시절부터 모셔왔고, 성인이 된 후에도 짝사랑하고 있는 쇼타의 이야기가 더 뭉클했다. 신분의 차이때문에 고백 한 번 못해본 채 아씨가 강제 시집을 가는 걸 봐야 했던 쇼타는 어른이 되어 스즈를 다시 찾아온다, 하지만, 쇼타 역시 스즈가 원래 남자였다는 걸 몰랐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꼬. 어려서부터 좋아해온 아씨가 남자였으니. 그래도 아씨에 대한 사랑만은 남다른 쇼타였다.

그러고 보면 시대물을 읽다 보면 시대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많다. 스즈의 경우 서자로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여자 아이로 키워지고, 그것도 모자라 빚탕감을 위해 강제로 시집까지 가야 했으니 말이다. 요즘 세상에선 이런 것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시대에는 이런 일이 빈번했겠지. 하긴 스즈같은 경우는 드물었을테고, 오히려 여성들의 삶이 더 힘들었겠지만 이 작품은 BL이므로,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에도 시대 이야기에 이어지는 작품인 <새로운 무기>는 그림만 봤을 땐 형사나 뭐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줄 알았다. 근데 알고 보니 평범한 리맨물이었다. 뭐, 리맨물이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니까 후후훗... <새로운 무기>는 칸다 이즈미와 소메야 코우를 각각 중심인물로 삼아 이야기가 진행된다. 일은 끝내주게 잘하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칸다 이즈미와 어린 시절의 큰 상처가 남아 있는 소메야 코우가 직장 선후배로서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관계를 쌓아가는 이야기가 참 좋았다. 뒤에 나오는 요시노의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어떻게 보면 칸다와 소메야가 요시노를 조금은 바꿔 놓았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좋아하는 시대물과 리맨물을 한 권에서 만나서 참 좋았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시대물 이야기가 좀 더 길었으면 한다는 것이었지. 뭐 나름대로 해피해피하게 살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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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모든 바에서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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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을 싫어한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싫어한다. 물론 적당히 - 사실 술을 마시면서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마시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대개 술마시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적당히를 모르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 오래된 친구는 놀란다. 너 술 잘 마시잖아? 그렇다. 난 술을 잘 마셨다, 예전에. 대학에 들어가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첫번째 길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업보다는 수업이 끝난 후 술을 마시러 가는 걸 즐겼다. 때로는 수업을 째고 술을 마시러 간 적도 있다. 낮부터 술을 마시다가 새벽까지 마시고 담날 수업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러다가 병원에 두어번 실려간 적도 있다. 그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술을 싫어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술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합없이 싫고, 술 냄새도 싫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렇게 마셨을까. 그래, 바보같지만 오기때문이었다. 그냥 술을 잘 마시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열심히 마셨고, 열심히 취했고, 마시는대로 주량도 늘었다. 때로 블랙아웃 -필름이 끊긴다는 것- 도 있었고, 기절해서 하루종일 잔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술로 찌든 대학생활을 거친 후에는 거짓말처럼 술에 입을 안댔다. 술 마신 후에 남는 기분 나쁜 감각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난 체질적으로 알콜이 잘 받는 체질은 아니다. 마시면 얼굴이 금방 빨개지고 손바닥 발바닥에 열이 나고 온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래서 마시면 안되지만 그땐 그렇게 마셨더랬다.   

그런 과정을 거쳐와서 그런지 지금은 일년 열두달 술을 한방울도 안마시고, 술을 마시고 싶단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와는 다른 이유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마시는 걸까. 술이 맛있어서? 맛있긴 개뿔. 사실 술이 맛있는 건 아니잖아?

술을 끊지 못하고 술만 먹는 사람들을 알콜 중독자라 한다. 그렇다. 술은 중독이다. 그렇다면 왜 중독이 되는 거지? 맛있는 음식에 중독되는 사람은 없는데 왜 술에는 중독이 되는 거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지마 이루루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왜 알콜에 중독되는지 알게 되고,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서른 다섯에 죽을 거란 예언을 세사람에게나 들은 고지마 이루루는 알콜중독자로 응급입원한 상태다. 조금만 더 술을 마셨으면 그대로 죽었을거란다. 고지마 이루루는 18년동안이나 줄창 술을 마셔왔고 알콜중독의 스텝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알콜 의존상태를 넘어 연속음주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정도 상태가 되면 술말고는 입에 들어가는 것도 없다. 때론 술도 받지 않아 피를 토하기도 한다. 피를 토하는 건 몸속의 장기가 나 죽겠다고 하는 소리없는 외침이나 마찬가지이다. 

병원에서의 치료는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도 돌아왔고, 몸 상태도 좋아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서 이젠 치료가 다 된 것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한다. 이게 중독자들이 넘어야 할 첫번째 거대한 산이다. 보통 이 시기가 되면 다시 술을 마셔도 괜찮을 거란 착각을 하고 다시 술을 마시다가 급성 중독으로 쓰러지게 된다. 고지마 이루루는 심각한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같은 병실에 입원한 40대 남자는 간이 거의 다 망가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몰래 술을 마신다. 이 남자의 경우 환각증상도 꽤 심했던 모양이다. 난 마약같은 것만 금단증상이 심한 줄 알았는데, 술도 금단증상이 엄청나다는 걸 이 작품과 아즈마 히데오의 만화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연속음주상태까지 이른 사람들은 손이 떨리고, 벌레가 온몸을 기어다니는 듯한 감각에, 환청이 들리거나 환각이 보이기도 한단다. 게다가 자신의 가까운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피해망상증에까지 시달린다. 도대체 술이 몸속에서 어떤 짓을 하길래 이런 상태까지 이르게 되는 걸까. 아마도 술이 사람의 뇌에까지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겠지.
 
한동안 착실히 치료를 받던 고지마 이루루는 어느 날 꿈에서 20대의 나이에 죽어버린 친구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는 꿈을 꾼다. 천상의 음료같은 그 맛을 잊지 못한 고지마는 결국 산책을 나갔다 들어간 메밀국수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이어 또다른 가게에서 폭음을 한 후 병원에 돌아온 고지마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십대 소년이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 연극을 하고 싶어한 꿈 많은 소년,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소년. 고지마는 소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한편 친구의 여동생 사야카는 고지마에게 질타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고지마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죽은 후에 남겨진 추억속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지 말고, 상처투성이에 구멍난 삶이라도 현실을 살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숨겨왔던 자신의 집안 사정에 대한 글을 보여주며 그가 스스로 암흑의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도록 도움을 준다.

이 소설은 알콜중독으로 입원한 고지마의 투병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알콜중독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며, 알콜중독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작가 자신도 알콜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어 이런 소설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의 경험인만큼 더욱더 절실한 경고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의외였던 것은 알콜중독이 개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었다. 성격나쁜 주치의 아카가와와 고지마의 대화를 보면 그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공인된 마약 = 술이란 공식이 나오는데, 실제로 알콜중독에 이른 사람, 알콜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마약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 외국의 경우 합법약물과 술을 동시에 마시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엔 유명인들이 많지. 일본의 경우 특이하게도 술 자판기가 따로 있다. 컵술도 자판기에서 살 수 있다. 자판기란 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술을 살 수 있으니 누구나 마실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일본 정부의 주류산업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도 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술 권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아니던가. 어른들의 모임에서는 술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모임을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술때문이다. 밥먹고 나서 술을 먹든지, 밥을 먹으면서 술을 먹든지. 그리고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고, 나와서 또다른 술집으로 간다. 내가 보기엔 이런 모임은 절대로 건전한 모임이 아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에서도 불리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참 엿같은 현실. 요즘 들어서는 이런 부분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어른들의 모임은 술판이다. 

작품속의 고지마 이루루도 이 작품을 쓴 작가 나카지마 리모도 알콜중독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가 아니라 알콜중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알콜중독은 스스로가 자각을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난 술을 좋아하는 것뿐, 중독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콜중독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결국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상황이 되면 빈곤의 악순환이 아니라 알콜의 악순환이 되어 술에 절어 지내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알콜중독자들은 이 책을 읽지 않겠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고 난 저런 상태가 되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겠지.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나 알콜중독은 정말 무서운 거야 라고 몸서리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난다. 고지마 이루루도 알콜중독자들에 관한 책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으니, 알콜의존증이나 알콜중독인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안주 삼아 마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치만, 당신 그렇게 살다간......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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