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파드 백서 1 - 뉴 루비코믹스 886
오우기 유즈하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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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표지를 봤을때, 헉 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오우기 유즈하의 기본 작화는 둘째치고 이거 아슬아슬할 정도로 색기가 넘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뭐랄까, 기존 오우기 유즈하의 만화는 여성스러움이 넘치는 캐릭터였다면 이번엔 남자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캐릭터의 이미지랄까. 물론 앞에 있는 녀석은 색기가 풀풀 넘쳤지만..

일단 책을 읽어 보니 막강한 포스의 재벌 왕자님 X 아름답지만 야생성이 살아 있는 살쾡이 타입의 호스트란 설정이다. BL물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캐릭터가 재벌 후계자와 또한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호스트라 일단 캐릭터의 신분에서는 그닥 포스가 느껴지질 않지만, 이 둘의 성격이 장난이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후 돈에만 집착을 보이는 호스트 아야는 머리 색깔도 눈 색깔도 남들과 달라 눈에 확 띄는 외모인데다가 머리까지 비상해 호스트로서 잘 나가고 있다. 스스로 완급을 조절하며 자신의 용모와 말빨로 사람들의 지갑을 톡톡히 털어내는 그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야생 동물과도 같다. 곁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야는 신교지에게 선택당한 이후 자신의 마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교지에게 휘둘린다.
신교지의 경우 재벌 후계자. 멋진 외모에다 지배자의 풍채를 당당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업 수완도 좋다. 냉정하고 이지적인데다가 속마음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대이다.
계약으로 시작해 억지스런 만남을 이어가게 되는 두 사람. 아야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온갖 몸부림을 치지만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덫은 그리 만만한게 아니었다.

신교지는 말그대로 강공.
작가의 말대로 바보공 10년에서 강공으로 전환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신교지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특히 슬쩍 사람을 비웃는 듯한 미소는 최고랄까. 앙탈부리고 안달하는 것은 결국 아야쪽인데, 그걸 은근슬쩍 즐기는 듯한 신교지의 모습은 최고다. 원래 나도 바보공보다는 강공이나 귀축공쪽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그런지 신교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에 비하면 아야는 사납게 구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길들어가는 모습이 왠지 매력이 없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로 그 까칠함을 드러내 줬으니, 뭐 이래저래 만족스러웠다.

시종일관 멋진 포스를 내뿜는 두사람이지만, 중간에 날 미친듯이 웃게 만든 장면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과일을 깎는 아야와 그걸 넙죽넙죽 받아 먹는 신교지의 모습이었다. 이 장면에서 어찌나 웃었던지..... 나중에는 배가 아플정도였다.

사실상 재벌 이야기가 나오면 금액적인 부분이 천문학적 액수로 뛰는 데다가 보통 사람이라면 입에 담지도 못한 금액을 유유히 날리고도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다면서 뿌듯(?)해 하는 신교지의 모습은 왠지 거부감 든다. (아아.. 역시 난 소시민)
게다가 작화면에서 너무 섹시하게 그려내려다 보니 그게 지나쳐서 좀 난감했던 그림들이 몇장면 눈에 띄었다고나 할까. 그것 외에는 무난하게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단 한마디로 이 작품에 대해 감상평을 남기라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앙탈부리는 살쾡이는 조교하기 나름 이라고.

일단 신교지와 아야편은 이것으로 끝나고, 2권은 아야와 함께 일하고 있는 고등학생 호스트의 이야기라는데, 요것도 은근히 기대된다. 린카는 잠시잠깐 등장했지만, 특히나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설정은 폭력교사 X 고교생 호스트라니 이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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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마음에 검은 날개를 - 뉴 루비코믹스 625
야마시타 토모코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야마시타 토모코의 만화를 보면 단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단편을 참 잘 그려내는 만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장편도 좋지만, 짤막짤막한 이야기에 모든 걸 다 담아내는 건 역시 능력이란 생각도 든다. 소설도 장편보다는 단편이 어렵다고 하듯이 만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장편이라면 그 충분한 길이안에 천천히 담아내면 되지만, 단편은 짧은 분량안에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걸 다 담아내야 하므로. 

<사랑하는 마음에 검은 날개를> 역시 단편집이다. 표지도 마음에 들었고, 제목 또한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책인데, 생각보다 단편수가 꽤 많았다. 

전했으나 전해지지 않은 마음의 아픔을 담아 낸 <사랑에 못을 박다>는 너무나도 안타까워 속이 상할 정도였다. 정말 내가 모토히사의 누나였다면 아시다를 늘씬하게 패줬을 거다. 누나의 속마음이 너무나도 잘 묘사되어 있어, 다른 두 녀석이 아닌 누나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지금도 모토히사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찢어질 것 처럼 아파온다. 

<이츠 마이 초콜릿!>은 보다가 한순간에 웃음이 폭발해 버린 단편이다. 여섯형제중 첫째, 그러다 보니 늘 동생들을 돌봐야 하고, 늘 양보해야했던 미노리의 입장이 너무나도 절절하게 와닿았다고 해야 할까. 특히 미노리가 감정을 폭발시킨 장면, 더군다나 자신의 성벽을 저도 모르게 밝혀버린 장면에서는 이거 웃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하고 고민했지만 결국 웃기로 했다. 그러나 더욱더 웃어버린 건 동생들의 반응과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렸을 때, 부모님의 반응이랄까. 심각해질 수도 있는 소재를 코믹함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너무나도 즐겁게 읽었다.

<악당의 이>는 굉장히 안타까운 단편이었는데, 오랜 기간 상대를 사랑했지만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상대의 사랑을 눈치챘으면서도 되돌려 줄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왠지 바보같으면서도 순수해서 마음이 시려왔던 작품이랄까.

<사랑하는 마음에 검은 날개를>은 M속의 남자 이야기이다. 자신의 성벽이 M이라고 하며 나카즈에게 고백하는 후타카미. 둘의 실갱이가 귀여우면서도 안타깝고, 그렇게 밖에 전할 수 없는 후타카미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후타카미를 마구 응원해주고 싶다.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후타가미의 모습은 슬픈 코미디 영화같은 느낌이었달까.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와버릴 것 같은 그런 영화가 떠올랐다.

<그 불을 넘어와> 역시 <사랑하는 마음에 검은 날개를>과 비슷하다. 상대가 받아줄 것 같지 않아 기묘한 방법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어하는 바보 녀석. 비록 상대가 마음을 열지 않을지언정, 그래도 고백은 진지하게 하는 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게밖에 표현 못하는 두 녀석이 어찌나 귀엽던지. 학원물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귀엽다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FOOL 4 U>는 정말 제대로 된 바보 공이 나온다. 20년 넘게 사귐을 지속해온 두 친구. 한 친구의 시선은 늘 한 곳을 향해 있지만, 그 시선을 받는 주인공은 정작 '네가 여자였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말 뿐. 나중에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알고 보니, 공수 둘다 바보였잖아!!!!!

<포토제닉>은 워낙 짧은 단편이지만, 설정이 너무나도 웃겨서 폭소를 터뜨린 작품이다.

총 7 편의 단편, 나이대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이들이 등장해서 때로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때로는 슬픔과 웃음을 동시에, 때로는 연민을, 때로는 아픔을 한 권에서 동시에 느끼게 해 준 <사랑하는 마음에 검은 날개를>은 한 번 읽는 것보다는 두 번째 읽었을 때 그 맛이 더 진하게 우러나는 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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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의 고양이
사이먼 토필드 지음 / 인간희극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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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구매하게 된 동기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건 다름아닌 고양이 만화란 것이기 때문이다.
난 강아지를 키우지만, 고양이도 무척이나 좋아하며, 또 부모님댁에도 고양이가 두 마리 있어 늘 그녀석들을 관찰해왔다.
사실은 그 녀석들을 길에서 납치(?)해 온 것도 나였다.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 만화나 고양이 관련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눈에 띄는대로 구입하는 편이다. 이 만화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집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배송을 받고 책 표지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표지의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구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고양이같은 개구리!?
혹시 꼬리 달린 유전자 변형 개구리!?
오만가지 상상을 하면서 일단 책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왼쪽에 있는 스티커에는 유투브에 동영상으로 올라왔다는 게 보인다.
흐음... 평소 유투브는 별로 들어가지도 않는 사이트라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가끔 일본 니코니코동화에는 들어가도 유투브는 그닥 관심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다.

어쨌거나, 책을 펼쳐보고는 좀 당황스러웠다.
내가 상상한 고양이 만화는...
복슬복슬한 털...
초롱초롱한 눈.
애교만점의 몸짓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물론 책 표지만으로도 가히 고양이의 모습이 짐작은 되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라고 외치고 싶던 순간!!
역시 만화는 작화가 다가 아니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화는 작화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내용이 중요하다는 사실말이다.

비록 개구리를 닮은 고양이인데다가,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만화라서 그림으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다.
고양이의 기본적인 습성 +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만화라고 할까.

그 모든 것은 단 한마디의 말이 없어도 고양이의 행동이나 표정만으로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물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장면만 봐도 그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이의 습성과 관련된 묘사가 많다.

특히, 빨래 건조대의 마른 빨래를 모조리 끌어 내려 그위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았을때 쓰러지도록 웃었다. 고양이들은 천성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녀석들이고 푹신푹신한 걸 좋아하는 녀석들이라 완전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또한 여행용 캐리어에 들어가기 싫어서 반려인과 기싸움을 하는 고양이의 모습은 어찌나 웃기던지.....
다만, 고양이의 의인화 부분이 많아서 순수한 고양이 만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 모든 것도 고양이의 습성을 잘 관찰한 것에서 나온 것이니 그다지 거부감은 없다.

한마디 말도 없이 단 한장면만으로 웃음을 안겨주는 사이먼의 고양이.
애묘가라면,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신나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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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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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책제목을 보고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이별에 좋은 이별이 어디 있어란 것이 원래 내 생각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럴 거라 생각한다. 이별은 슬픈 것이야. 이별은 아픈 것이야. 내게 이별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그런 식으로 연상되었다. 늘.
뭐, 가끔은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놓여나는 상태가 되는 이별이란 것에는 속시원하다라는 느낌도 받았지만 말이다.

닌 감정 표현에 서툰 편이다. 그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즐거워도 행복해도 잘 표현을 못한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도 표현을 잘 못한다.
그래서 좋아도 찡그리고, 아파도 찡그렸다.
그러다가 어느새 표정이 없어졌다. 아마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게 좀더 가속화되었고, 긍정적인 감정 표현은 어느새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나의 상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는 주변 분위기와도 상관이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한국인이란 것, 그리고 태생이 경상도란 것. 이 두 가지는 분명 나의 감정 표현에 있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이란 것도.

어릴 땐 속상하거나 마음이 아프면 눈물부터 나왔다. 그냥 엉엉 울면 되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꼴불견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후로는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 것으로 바뀌었다. 특히 연인과의 이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살면서 누구나 이별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은 가족일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으며, 내 경우에는 키우던 강아지와의 이별도 포함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상처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 두 차례의 입원을 계기로 동생과 한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이 내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난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으면 한시도 참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하기에 당연히 이별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내가 누군가의 죽음이란 것으로 이별을 한 케이스는 크게 많지 않다. 아직 부모님께선 젊으신 편이고, 건강하시기 때문이며, 동생도 잘 지내기 때문이다. 조부모님의 경우 외할아버지는 내가 너무도 어릴 때 - 즉, 죽음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 - 에 돌아가셔서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20대 중반에 맞이했던 할어버지의 죽음과 30대 초반에 맞이했던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충격이었다.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처음엔 멍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눈물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왠지 할아버지께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라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 왔다. 그리고 몇 년후,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상태였던지라 그나마 받아들이는 것이 수월했다. 물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나마 그전까지 할머니를 자주 찾아 뵈었던 게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도 커다란 상실감은 크게 느낄수 없었다. 물론 두 분다 초장수를 누리셨다는 것이 내가 그 이별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 것도 두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겠지만.

연인과 헤어질 때는 무척 힘들었다.
지금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이니 연애 한 번 안해봤다면 말짱 거짓말이고, 여러 번의 연애와 여러번의 이별을 거쳤다. 처음엔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울고, 잡아 봤지만, 이미 끝난 건 되돌릴 수 없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이니 그 충격은 내게 꽤나 컸던 모양이다.

연인과의 이별에서 난 여러 가지 패턴을 경험했다. 붙잡아 보기, 새로운 연애 하기, 도망치기, 착한 여자 되어 보기,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여러 가지를 써놓았지만, 각각이 다른 건 아니다. 대부분 두 세개가 연결되어 이별에 적응해 나갔다. 붙잡아 보다가 안되서 결국 헤어지면 애써 담담한 척을 했다. 누군가 그 사람 잘 지내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잘 지낸다고 했다. 난 그게 정답인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애써 착한 여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난 이별에 통 적응을 하지 못한채로 나이를 먹어 갔다. 헤어짐은 늘 아프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시킨채.

그러다가 20대 후반이 되면서 오랜 기간 사귄 연인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내 쪽에서 이미 이별 준비를 말끔히 마친 상태였다. 몇 년 내내 사귀면서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하는 동안 그 만남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질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만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공유했던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함께 먹은 음식, 함께 간 곳 등등 생각보다 이별 후에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30대 초반 마지막 연인과 헤어졌다. 그때는 분노로 가득했다. 나를 속였던 사람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진즉에 깨닫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사랑이라 여겼던 것이 모두 거짓같이 느껴져 매일매일 검은 오라를 내뿜었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의외로 간단한 해답이 있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긍정도 하지 않는다가 그 해답이었다. 너와 만든 추억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도 만들수 있는 거에 불과하다라는 생각. 그게 내가 찾은 해답이었다. 그렇게 되니,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한가닥 미련조차 남지않게 되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나이를 먹으면서 스스로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혀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 이별을 긍정하고 감싸안는 것. 무척이나 힘들지만, 의외로 시간은 잘 흘러가고, 감정은 무디어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해 왔던 이별의 패턴과 내가 이별에 대해 대처하던 여러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참.. 바보같았구나하고.
이별하면서 착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 대체할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껍질속에 몸을 움츠리는 달팽이가 될 필요가 없었다. 

다만 현실을 바로 보고, 이별을 긍정하고, 마음을 다독이며 스스로를 더 사랑하면 되었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닫긴 했지만, 내가 이별의 리비도를 잘 받아들이고,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받아 들였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왠지 속이 개운해진 느낌이랄까. 지금도 가끔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난 정말 괜찮다고 하는데도,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젠 더욱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이별을 잘 극복했고, 그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서 잘 쓸고 있다고. 비록 책에서 제시한 것처럼 야외 활동같은 행동은 별로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을 독서나 공부 혹은 다른 대체적고 긍정적인 활동으로 바꾸어 생활해 왔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혼자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충족감과 행복감이 충만하다. 

이 책을 좀더 일찍 만났으면 이별에 대해 더 잘 대처했을텐데라는 아쉬움도 들지만, 그러나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앞으로도 겪어야 할 수많은 이별의 패턴을 생각해볼 때, 지금에라도 이 책을 만난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왠지. 이제 더이상 이별은 두려워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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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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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에는 바다가 없는데...
이 책의 제목을 본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달에는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어. 그리고 토끼는 절구를 찧고 있지라고 아무 의심없이 믿었건만, 학교에 들어간 후 달에는 토끼도 없고, 계수 나무도 없으며 있는 거라곤 황량한 땅뿐이라고 배웠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주선은 이미 달에 갔으며, 우주인들은 달 표면에 그 발자욱을 남겼기 때문이리라.

뭐, 그렇다고 그후에 달을 보면서 현실적인 생각으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어둠속에서 빛나는 어슴푸레한 달빛은 신비로웠고, 우주인들이 보지 못한 달의 이면에는 다른 것들이 분명히 존재할 지도 몰라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비록 계수나무와 토끼는 없을지 몰라도.

책의 제목인 달의 바다. 먼옛날 육안으로 달을 관찰했을 때 달 표면에 보이던 어두운 부분은 바다라 여겨졌고, 지금 그것이 바다가 아니란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칭은 바다로 불린다. 아마도 굳이 명칭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소설 달의 바다는 내게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목도 그렇지만, 구성이나 스토리도 그렇다. 소설은 두개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편지 형식, 하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1인칭 화자가 서술하는 방식이다.

편지는 좀 읽다가 보면 알게 되지만 주인공의 고모가 자신의 어머니, 즉 화자의 할머니에게 보내는 것이고, 현재 일어나는 일은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주인이 되어 우주선을 타고 우주 정거장에서 일한다는 고모는 벌써 오래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혼 후 아이만을 한국으로 보냈다. 벌써 그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고모는 여전히 미국에 있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미국에 고모를 만나러가게 된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민이. 주인공인 은미는 기자로 취업하기를 희망하지만 번번히 낙방하는 신세고, 민이는 남자이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싶어 한다. 두 사람이 할머니의 부탁으로 미국에 가서 고모를 만나게 되고 고모와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된다.

얼핏 보면 줄거리 자체는 참 간단하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줄거리보다 간단하지 않다. 고모가 보낸 편지에 담긴 건 완전한 거짓도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알고 웃음이 터져 버렸지만, 고모가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니 고모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제목인 달의 바다처럼 직접 확인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상상만으로도 달에는 바다가 존재헀다. 물론 우주선이 달에 우주인들을 내려준 후 달에는 바다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있다고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비록 사실이 밝혀지만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그 꿈을 꾸는 동안은 사람들은 행복하다. 차라리 진실을 모르고 꿈을 꾸는 편이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모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전해주고자 한 것은 그런 꿈이 아니었을까.  
사실 행복이란 건 사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굳이 진실을 파헤치고 그 속에 숨은 걸 까발린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모른 척, 가끔은 속는 척 하면서 현실을 우회해갈 때 행복한 순간을 더욱더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현실 회피에서 오는 충족감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파헤칠 것 없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름답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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