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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투 런 Born to Run - 신비의 원시부족이 가르쳐준 행복의 비밀
크리스토퍼 맥두걸 지음, 민영진 옮김 / 페이퍼로드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해서 날 달리기를 잘못한다. 가을 운동회때 열심히 달려서 상을 타본 적도 없고, 중고교시절엔 체력장 때문에 억지로 달렸다. 생각해보면 가장 열심히 달려야 할 나이인 초등입학전에도 병으로 입원을 여러번 한 나로서는 어린애다운 달리기 조차도 못하고 지금껏 나이를 먹어 왔다.
티비에서 보여주는 육상 경기.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멋지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즐거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머릿속엔 '우승 ' 그리고 상금과 명예 등 부차적인 문제가 꽉 차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단거리 선수들의 모습도 그렇지만 특히 마라토너들을 보는 건 고통스러웠다. 난 단지 관람을 할 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42.195km라는 거리를 뛰면서 죽을 것같은 표정으로 뛰고 있다. 정말이지 우승이란 목표를 빼면 그들이 달리는 이유조차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티비 다큐멘터리에서 오지에 사는 한 부족이 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험한 산길을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채 즐겁게 뛰는 사람들. 그들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펄럭펄럭 날리는 화려한 색깔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발이 다보이는 샌들을 신고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주 즐거운 듯이. 달리기는 고통이라고 생각해 온 내게 그 장면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난 그들을 다시 만났다. 본 투 런 이라는 책을 통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신비의 원시 부족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코퍼 캐니언이란 험준한 오지에 사는 타라우마라 인디언이며,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살고 있다고 한다.
왜 그들은 조용히 숨어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책 제목인 본 투 런(달리기 위해 태어났다)란 의미는 무엇일까.
본 투 런은 크게 몇 가지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체 흐름은 타라우마라 족과 세계의 울트라 러너들과의 달리기 경주에 관한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세부적으로 보면 타라우마라 족의 역사와 그들의 생활, 울트라 러너들의 삶과 도전, 기묘한 방랑자 카바요 블랑코 이야기, 저자 크리스토퍼 맥두걸의 고질적 문제와 그에 대한 극복, 왜 인간은 달리기 위해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고찰등이 매우 흥미롭게 서술되고 있다.
특히 타라우마라 족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그들은 특별한 장비도 갖추지 않은채 협곡과 언덕을 뛰어 다닌다. 그것도 하루에 몇 백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뛰어가면서 담소를 나누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걸어서도 다니기 힘든 길을 뛰어가면서도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부족이기에 몸을 숨기려면 재빠른 발이 필요했던 건 당연하고, 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해서 그 잠재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보면 타라우마라 족이 잘 뛸 수 있는 이유는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울트라 러너들. 일명 익스트림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태어나고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루에 100km 가까운 거리를 뛴다. 잘 다져진 육상 트랙이나 마라톤 코스를 거부하고 힘든 지형을 택해서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완주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게 되는 것일까.
타라우마라 족과 울트라 러너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즐겁게 달린다. 상금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달리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중간에 닥쳐오는 피로마저도 달콤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달리기를 시작했을까. 어떤 계기로 시작을 했든 시작을 했기에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게 아닐까. 그 해답은 인류의 조상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뒷부분쯤에 나오는 문화인류학적인 접근 방식은 인류의 체형이 생존 방식을 결정지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 걷는 체형에서 뛰는 체형으로 인간의 체형은 바뀌게 되었다는 것. 인간은 뛰기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부시맨들과 함께 살면서 '사슴의 발굽이 닳을 때까지' 추격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와 있다.
이 부분을 보면 인류는 달리기에 적합한 존재로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인간의 두뇌는 효율성의 추구를 목적으로 발달해 더이상 달리지 않고도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달리기를 취미 생활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달리기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한다. 고급 러닝슈즈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편안한 신발은 달리기를 도와주고 부상을 막아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신발 회사의 농간이었다니!
타라우마라족은 맨발에 가까운 샌들을 신고 달리고, 울트라 러너들 가운데는 진짜 맨발로 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부상을 입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운동화가 운동중 부상을 더 많이 유발한다는 글을 읽고 충격까지 받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인간의 발은 수많은 뼈와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극히 예민한 기관으로 발이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하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인류가 처음 지구에 나타나고 오랜기간동안은 맨발로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다 문명화 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신발이란 것을 신게 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신발이 발을 변형시키고 외부 자극을 차단함으로서 발이 느껴야할 자극을 느끼지 못하기에 부상을 자주 입을 수 밖에 없다면? 물론 우리들의 발은 이미 신발에 길들여져 신을 신지 않고서는 외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바깥은 맨발을 상처낼 수 있는 흉기로 가득한 이상 신을 신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달리기를 하면서 신을 신은 비싸고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이 얇은 신이 좋다고 한다.
인간의 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신발 회사의 돈벌이 수단으로 천정부지로 값이 뛰어오른 운동화들. 그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동화가 생각이 났다. 원숭이와 꽃신이란 제목이었는데, 맨발로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던 원숭이가 어느날 너구리가 가져온 꽃신을 신게 된후, 그 안락함에 이끌려 너구리에게 계속 꽃신을 받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 좋은 얼굴로 꽃신을 무상 공급했던 너구리는 어느 순간 돌변해서 원숭이에게 꽃신 값을 요구하게 된다. 조금씩 조금씩 원하는 게 많아지는 너구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던 원숭이는 꽃신을 벗으려 했지만, 이미 말랑말랑해진 발바닥은 자갈이나 바위를 걸을 때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젠 울며 겨자먹기로 너구리에게 꽃신을 사야 하는 원숭이. 현재 인간의 모습이 바로 이 원숭이와 닮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너구리는 세계 유명 상표의 운동화 브랜드일지도 모르겠다.
타라우마라 인디언들과 울트라 러너들의 경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스포츠 소설을 읽는 듯 벅찬 감동이 밀려왔고, 타라우마라 인디언의 아픈 역사와 그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달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충격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인류가 어떤 식으로 진화해 왔고, 왜 달리기에 적합한 존재인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접근과 설명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가장 좋은 운동화가 부상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사실과 운동화가 오히려 달리기를 방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인간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비록 우리들은 타라우마라 인디언이나 울트라 러너들과 같은 달리기는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르게 달리는 것만큼은 즐거운 일도 없는 것 같다. 단지 자신의 신체만 있으면 가능한 달리기. 달림으로써 인간은 속에 쌓여있던 스트레스와 번민을 날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신체 건강의 척도가 되는 달리기는 발을 자극함으로써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병의 발생 확률을 낮춰줄 뿐 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 문제도 달리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차나 오토바이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을 내면서 달리는 행위는 우리의 발로 달릴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대체 수단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수단 - 그것도 살상 흉기가 될 수 있는 운송 수단 -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훌륭하게 사용하려는 지혜 역시 우린 타라우마라 족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