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빅
필립 K. 딕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수첩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난 원래부터 영화든 책이든 SF장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유빅은 표지가 너무나도 독특해서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필립 K. 딕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였다. 그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인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리콜>, <블레이드 러너>는 모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작자는 모르고 영화만 보고 좋아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긴다란 생각이 든다. 사실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배우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톰 크루즈, 토탈리콜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블레이드 러너는 해리슨 포드가 주연이었다 - 원작이 책이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지금에 와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SF영화의 원작자란 걸 알게 되니 이것도 인연인듯 싶다.

유빅은 1960년대 중반에 씌어진 SF 소설로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 벌써 2010년이니 책속의 배경이 되는 년도와는 거의 20년차이가 난다. 물론 책이 씌어진 1960년대에서는 30년 후의 미래이지만 현재는 20년전의 과거에 대한 상상이라 생각하니 그 갭에서 웃음이 먼저 난다. 1960년대에 상상하던 미래는 이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실상 1990년대를 지나 2010년인 현재에도 그런 기술은 안타깝게도 없다.

현대 사회의 과학기술에서는 유빅에 나오듯 사람을 냉동 보관할 수 있는 기술도 없을뿐 더러, 죽은 것도 아니요 산 것도 아닌 사람 즉 반생인(半生人)이란 개념도 없다. 외과적 수술이나 생명 연장 장치, 혹은 장기 이식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죽음은 현대 사회에 있어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빅에서도 생명 연장은 가능하지만 여전히 죽음 후의 세계는 산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와 마찬가지인 듯 하다.

프리콕(텔레파시 능력자)과 일반인들이 공존하는 사회이며, 프리콕들의 능력을 상쇄시켜주는 관성자들도 함께 공존하는 소설 속의 세상. 어느 날 기관의 감시를 받던 능력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런사어터는 그들을 찾기 위해 반(反)텔레파시 요원을 프리콕들이 숨어 있다고 판단되는 달에 급파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생한 의문의 폭발 사건 이후 살아 남은 자들에게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폭발로 런사이터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살아 남은 자들인 반텔레파시 요원들은 지구로 돌아옴과 동시에 세상이 쇠퇴해감을 느낀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 아니 거꾸로 돌아가는 건 그들 자체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자꾸만 빨리 돌아가 어느덧 1930년대까지 돌아가버리는데....

겨우 살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닥쳐온 시련은 너무도 컸다. 요원들은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왜 시간이 거꾸로 흐르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폭파 사고로 죽음을 당했던 런사이터의 메세지가 조 칩에게 흘러 들어 온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은 자의 메세지? 그런 설정이라면 기껏해야 호러 소설쯤이겠지. 역시 아니었다.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자가 런사이터였고, 나머지 요원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반생인이 되어 냉동된 상태로 죽은 자들의 시간을 살아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반생인들 가운데도 특출한 능력과 재력이 있는 조리라는 존재가 그들에게 남은 생명력을 갉아 먹고 있었던 것. 런사이터는 유빅이란 물질을 반생인들의 세상에 투입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하려고 하지만 조리는 점점더 과거로 과거로 회귀시켜 버린다. 유빅을 발견함과 동시에 혹은 발견 직전에 또다시 시간을 돌려 유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뒤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들의 사회도 어쩌면 산 자들의 사회와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천국과 지옥, 연옥등으로 나뉜 세상이 아니라 현재 세상과 맞닿아 있지만 결코 겹쳐지지 않는 세상. 유빅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세상에,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세상에 직접 관여는 못하지만, 독립된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 간섭하고 관여할 수 있다. 죽음 후 평온을 바랐지만, 죽음조차도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더욱더 두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생인들의 남은 생명의 찌꺼기를 먹어 치우는 조리. 그는 죽은 자들의 세상에 군림하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닥쳐오는 것. 하지만 예로부터 인간은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했다. 먼 옛날 진시황은 불로불사를 꿈꿨고, 일본의 이야기에서는 인어 고기를 먹으면 불로불사의 몸이 된다고 한다. 인간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간의 집착과 욕망은 끝을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죽은 육체인데도 나머지 반생인을 희생시켜 영원한 삶을 꿈꾸는 조리를 보면서 인간은 삶에 대한 집착을 영원히 놓을 수 없는 존재인가 하는 씁쓸한 기분이 든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그리고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한 수수께끼와 궁금증, 그리고 삶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는 필립 K. 딕의 유빅은 벌써 40여년전에 씌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비록 연대가 현재보다 20년전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혀 과거의 작품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세 작품은 하나같이 어둡고 암울한 미래를 다루고 있다. 유빅은 그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가볍고 밝은 느낌을 보이지만,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 세상, 죽음 뒤에 기다리는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다. 죽음 뒤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은 생명의 찌끄러기마저도 강탈당하는 기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은 뒤에도 권력과 재화에 따라 남은 생명마저도 빼앗길 수 밖에 없다면,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빼앗기게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제발 이런 미래는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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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야 가의 전설 - 기담 수집가의 환상 노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5
츠하라 야스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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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담이나 괴담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요소가 많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봐도 그렇다. 여름만 되면 방송했던(지금도 하고 있지만) '전설의 고향'같은 것을 볼 때, 여름이라 무더워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불을 꼭 끄고 봤던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교 시절에는 야간 자율학습시간 중 쉬는 시간에 교실의 불을 몽땅 끄고 모여서 귀신 이야기를 하고, 햇빛 쨍쨍 맑은 날보다는 천둥치고 번개치는 어두컴컴한 교실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무서운 이야기를 서로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야~~ 하지마, 무섭단 말야..."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귀는 반쯤 열어막고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가, 이불 뒤집어 쓰고 그 틈사이로 TV에서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분명 그건 괴담을 즐긴다는 증거이다.

아시야가의 전설은 무직인 사루와타리와 괴기 소설가인 백작이 콤비가 되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괴담 연작 소설이다. 표제작인 아시야가의 전설과 송장벌레는 에드거 앨런 포의 오마주 소설로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면 아, 그 소설이라고 퍼뜩 떠올릴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다.

일단 사루와타리와 백작 콤비를 보면 참 안어울릴 듯 한 두 사람이 좋은 짝을 이룬 경우처럼 보인다. 단지 두부를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콤비가 되다니.. 이거 설정부터 무척이나 흥미롭다. 아니 솔직히 말해 난 많이 웃었다. 나도 두부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 둘을 따라가려면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笑) 게다가 두부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사람의 취향이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지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자면 대담 혹은 만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괴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면서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두 사람의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백작 캐릭터의 경우, 왠지 교코쿠 나츠히코의 교코쿠도 시리즈에 나오는 헌책방 주인이자 음양사인 교코쿠도를 닮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교코쿠도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첫번째 작품인 반곡터널의 경우 터널 괴담과 자동차에 씌인 혼령의 조화랄까,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백작의 해석은 조금 달랐다. 물론 터널에는 여러 가지 사고로 인해 나타나는 유령 이야기가 많이 존재하지만, 차에 유령이 씌었다기 보다는 자동차 자체가 사고에 대해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란 해석은 무척이나 참신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중고차의 경우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니 두려워진다.

아시야가의 몰락은 어셔가의 몰락(혹은 붕괴)의 오마주 소설로 소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서 따왔지만 설정은 사뭇 다르다. 이를 일본 특유의 이야기로 바꿔 놓은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너구리 요괴나 여우 요괴같은 것. 특히 아시야 도만과 그의 라이벌인 아베 세이메이의 이야기가 등장해서 내 관심을 확 잡아 끌었다. 아시야 도만은 내가 잘 모르겠지만, 아베 세이메이라고 하면 최고의 음양사가 아닌가. 결국 이 라이벌의 관계는 현대에까지 이어진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아시야가의 건물이 붕괴하기 직전 별이 그려진 아베 건설의 트럭이 지나갔다는 것을 읽었을 때는 완전히 자지러지게 웃어 버렸다. 아, 이런 식으로도 전개가 되는구나 하고...

고양이등 여자의 경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란 우리 속담이 강하게 떠올랐던 작품이었다. 이게 괴담이 아니라 (소설의 설정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면 그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었으리라. 카르키노스는 지벌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문득 먹을 건 잘 가려 먹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를 일종의 미신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조금 찜찜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을 잡아 먹는다는 행위에는 잡아 먹히는 대상에게는 큰 고통을 준다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케르베로스는 일본의 풍습이랄까, 전승 설화이랄까 그런 느낌을 많이 주는 단편이었다. 물론 케르베로스는 서양 신화에서 지옥을 지키는 파수견을 뜻하지만 그걸 일본적으로 만들어 놨다고 할까. 쌍둥이가 태어나면 하나를 물에 띄어 보내는 솎기란 풍습과 그 저주를 막기 위한 결계의 형성 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가난했던 옛시절 쌍둥이를 다 키울수 없어 버려야만 했던 죄책감을 쌍둥이중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는 이야기로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가끔 지맥을 끊어 놓아 마을에 지벌이 내리는 경우 석상같은 것을 세워 그 재앙을 피하려고 하는 행위가 있어 왔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건데, 의외로 이게 꽤나 설득력있는 의견이라 생각한다. 무조건 미신으로 치부할 일은 아닌듯 하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역시 같은 동양권이라 그런지 일본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이 단편을 보면서 든 다른 하나의 생각은 물이란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서양의 경우 스틱스 강을 건너면서 이승의 기억을 잃게 되며, 동양의 경우 물(호수나 우물, 강등)은 저승으로 통하는 입구라 믿어 왔다. 뭐랄까, 인종도 민족도 나라도 달라도 어느정도 물에 관한 믿음은 비슷비슷하다고 할까. 

송장벌레 역시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혹은 황금충)의 오마주 소설이다. 지금은 황금벌레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개미에 기생하는 창형흡충에 관한 이야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본 내용과 같아서 무척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서양 풍습이나 미신, 믿음에 관한 이야기의 조화, 정말 일본다운 이야기,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 이건 정말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될 것 같은 이야기 등 아시야가의 전설에 실린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독특하다. 그러면서도 복잡하다거나 잡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것은 작가의 필력이 상당 부분 받쳐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가의 스토리 구성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들을 수 있는 괴담의 새로운 해석, 근친 상간으로 이어져 내러온 혈족의 비밀, 여자의 한과 집착, 지벌, 생태계 교란으로 인한 새로운 종의 등장, 기묘한 풍습과 인습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이는 작가가 가진 지식의 양이 방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오소소하고 소름이 돋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이유는 등장 인물의 캐릭터 설정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괴담이지만 의표를 찌르는 유머 코드의 결합과 괴담의 뒤에 숨어 있는 새로운 해석 등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기존의 괴담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놓은 느낌이랄까. 난 퓨전이란 걸 싫어하지만, 이런 식의 퓨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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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推奴) 앤솔로지 낙인 - 가슴에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고야성 외 지음, KBS 감수 / 허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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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노 만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약 판매를 걸어 두었다. 예약 판매 상품은 늘 기대감과 두근거림을 준다. 책을 받을 때까지 온갖 것을 다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를 안봐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하고 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내용 이해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시대 상황이랄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할 뿐이다.

책 띠지를 보면 '그녀들을 설레게 할 언니들이 돌아왔다'라는 문구가 있다.
처음엔 이걸 보고 그녀들 = 독자, 언니들 = 만화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들은 독자가 맞았지만 언니들은 다른 언니들이었다. 음, 그당시엔 남자끼리도 언니라고 불렀나? 아니면 그들만의 언어였나는 드라마를 아예 안봐서 잘 모르겠지만, 그 언니가 다른 언니라니... 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마구 웃었다. 수염 숭숭 난 남자들끼리 언니라니.. 왠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총 8개의 작품은 각각 다른 작가가 그렸고 그런만큼 작가들의 개성이 팍팍 묻어 난다. 가느라다랗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캐릭터도 있었고, 붓펜으로 거칠게 그린듯한 느낌의 캐릭터도 있었다. 또한 묘한 판타지랄까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었으며, 4컷 개그 만화까지 중간중간 들어가 있어서 무척이나 즐거웠다. 

윤지운의 청명은 인조반정이후 송판관이 어떻게 노비의 신분이 되었나를 보여주는데, 당시의 비극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장같은 경우 작화도 마음에 들고 마지막 부분이 큰 여운을 남겼던 작품이었다. 애틋하달까... 이런 느낌이 강했다. 

심양일기는 소현세자와 송태하와의 이야기였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나를 볼 수 있었던 작품으로 송태하의 과거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가 가슴을 몹시도 저리게 만들었다. 꽃길별길의 경우 사당패에서 자라난 설화와 대길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고, 흑호는 거친 느낌의 펜터치가 오히려 안타까운 이야기를 더욱더 인상깊게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돌아가는 길의 작화는 부드러우나 판타지처럼 보여서 무척 인상에 남는다. 꽃 그림은 BL스러운 느낌을 가장 강하게 안겨준 작품으로 그 상황이 웃음이 터질 정도였다. 남자만 등장하는 야설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방화백의 각고의 노력이랄까...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마구 터져나왔다.

안타깝고 슬픈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무겁고 진중하게 그려낸 작품에서 가볍고 발랄한 작품까지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추노 드라마를 봤었더라면 더욱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이었다. 물론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내용상 이해에 무리는 없으나 드라마 속의 어떤 상황을 소재로 삼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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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일요일 - 촉촉한 감성과 자아를 찾아 떠나는 마음 여행
스가노 타이조 지음, 박진배 옮김 / 큰나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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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매할 당시 난 한가지 실수를 했다. 바로 책 제목을 잘못 보았다는 것이다. 소제목인 <촉촉한 감성과 자아을 찾아 떠나는 마음 여행>에서 마음마을로 봤다는 것이다. 당연히 여행 에세이일거라 생각하고 주문했는데, 알고 보니 카운슬러들의 카운슬링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다. 헉, 이거 어쩌면 좋지, 생각과는 다른 책을 주문했는데...라고 고민을 잠시 했지만 이렇게 이 책과 만난 것도 인연이다 싶어 찬찬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카운슬러, 특히 심리 카운슬러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 고민을 풀기 위한 길을 제시해준다든지 조언을 해주는 사람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로 설명을 한다. 카운슬러들은 의사처럼 '고치거나' 교사처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이라고. 그럼 도대체 심리 카운슬러는 무슨 일을 하지? 란 의문이 들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바로 밑에 줄에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인간은 심리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하거나, 누군가에게 상담을 하거나. 물론 혼자서 끙끙대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봐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분명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테지만, 그 상담할 사람이 누구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객관적이라면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생각한다'라는 마음이 들테고, 내 편을 너무 들어주면 오히려 '제대로 된 상담'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심리 카운슬러란 꽤나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거리감과 객관성을 유지해 줄테니까.

이 책에는 수없이 많은 클라이언트(상담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고민을 보면서 와, 정말 나랑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네라고 동병상련의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고, 뭐야, 이런 걸로 고민을 하냐?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고민의 경중은 객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역시 주관적으로 이 사례들을 접했다. 남에겐 사소한 것으로 보여도 본인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것일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여러 사연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 물론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지고 산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쉽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 알고는 있지만, 진짜 알고 있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이게 아닌가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던 것 중의 하나는 의외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많았다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란 것은 공감이 간다. 하지만 배려가 나쁜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나친 배려나 받기 싫은 배려도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는 아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괴짜로 사는 것이 나쁘지도 않다는 것이라든지, 너무 튀어나온 못은 맞지도 않는다라는 독특한 해석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싫든 좋든 간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 책은 인간관계, 사회관계, 가족관계 등 인간들이 맞닥뜨릴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에서 나오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는다. 그것은 강요는 아니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하다. 왜냐면 어차피 사람들이 가진 고유의 성질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여러 가지 카운슬링 사례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도 하는구나, 혹은 이런 것은 이렇게 뒤집어서 생각해볼 수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껴도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보면서 내 주위사람들의 고민을 짐작해 볼 수도 있고, 또 나보다 더 심각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작은 위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세상에서 힘든 건 나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니야.. 라는 위로랄까.

우리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해서는 안되는 것에 대한 교육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 왔다. 그렇다 보니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해야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되기에 그런 압박을 견뎌야 했다. 신체적 피로는 바로바로 풀어주는 것이 좋다. 더불어 마음의 피로도 그렇게 풀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본인이 가진 모든 고민을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고민하면서 사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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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다이스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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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야기는 예전에 개미와 타나토노트를 읽은 후로는 손을 안댔으니 정말 오랜만에 읽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그 책들의 줄거리도 가물가물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았고,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하지만, 당시 무척이나 신선했고 독특했으며,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파라다이스는 표지부터 만화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려 있는 단편들의 제목을 봐도 톡톡 튀는 느낌이다. 물론 본문을 읽어 보면 한층 더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있을 법한 과거와 있을 법한 미래라는 두 카테고리로 나뉜 단편들을 읽으면서 음.. 이건 정말 공감이 가는군.. 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아아, 이렇게 된다면 정말 절망적일거야, 혹은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게 나을지도 몰라라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특히 난 있을 법한 과거보다 있을 법한 미래 쪽의 이야기에 더욱더 공감이 갔다. 그것은 정말 있을 법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경 파괴범은 교수형의 경우 제일 공감이 갔던 작품이다. 현재도 지구는 환경 오염으로 곳곳이 파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에서는 환경 오염을 시키는 어떤 행위라도 용서받지 못한다. 법적 처벌 대상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그만 두지 못한다. 그건 사람 마음속에 있는 반발심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켜야한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할까. 

더 웃긴 건,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되는 석유나 석탄등의 에너지 자원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 자동차, 비행기, 배등의 운행을 그만둘 법도 한데, 인간의 힘을 사용해서 여전히 그것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인간은 페달을 밟아 비행기를 띄우고, 자동차에 돛을 달고 다닌다. 게다가 지하철을 대신할 것으로 투석기까지 등장한다. 



이 그림은 바로 있을 법한 미래의 이야기인 환경 파괴범은 교수형에 나오는 삽화중의 하나이다. 물론 이 삽화 외에도 페달을 죽도록 밟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도 있고, 오토바이를 타고 총을 든 경찰 대신 말을 타고 석궁을 든 경찰의 모습도 보인다. 어쨌거나 이 삽화를 보면서 정말 책 내용과 너무 잘 어울려서 웃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어쩜 이리도 절묘하게 묘사할 했을까 하면서...

그 외에도 인간의 섹스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남성의 정자는 화수분의 형태로 바뀌고, 수정을 시켜주는 것은 나비가 된다는 설정의 이야기인 꽃 섹스란 단편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진화를 거듭하게 된 인간은 결국 나무가 되고 꽃이 되었다. 여전히 그들을 수정시키는 것은 나비의 몫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자손을 남기는 행위에서 파생하는 부정적인 일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삽화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진 인간의 성의 분류가 없어지게 되고, 여성만이 존재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발달을 거듭하지만, 그것은 인류 파멸로 이어진다. 인간은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난생(卵生)으로 진화하게 되고, 그것은 단성생식이 가능하므로 남성의 역할이 필요없어지게 된 세상이다. 남자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실제로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러고 보면 있을 법한 미래는 대부분 인류 파멸과 관련이 있다. 이 이상 환경을 파괴하면 인간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질 것이고, 인류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될 것이며, 인간은 멸종 직전 까지 갔다가 겨우 생존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사라진 문명은 인류가 멸종한 후의 이야기를 개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단편이다. 인류는 정말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행위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문명의 진보와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풍요롭게도 만들지만, 반대로 인간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도 되고 있다.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서술해 내려가고 있지만 그 뒤에 숨은 의미를 생각하면 섬뜩할 정도이다. 만화같은 상상력으로도 보이지만 결국 이건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다. 정말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처럼 있을 법한 미래가 아니라 있을 수 밖에 없는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 책 본문 중(38~39p, 146~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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