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도 - 괴기.번안편 김내성 걸작 시리즈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난 이제까지 우리 나라 장르문학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영미나 일본 장르 문학작가들에 비해 작가수도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스토리 역시 영미나 일본 쪽 장르 소설의 경향을 답습한 듯한 글들을 보면서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작가들이 우리나라만의 장르문학을 만들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영미나 일본 장르문학에 길들여져버린 나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노력이 더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끔 만들었다.

김내성. 부끄럽지만 난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만약 이 백사도란 책이 복간되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 이름을 끝끝내 알 수 없었으리라.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김내성은 일본에서 먼저 데뷔한 작가로 에도가와 란포와 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같은 장르의 소설을 쓰는 동료로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라고 한다. 

백사도는 괴기편과 추리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괴기편은 5작품, 번안편은 3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총 페이지 수가 300페이지가 안되기 때문에 각 작품은 단편들이라 보면 될 것이다.

괴기편에 수록된 작품중 첫번째 작품인 광상시인은 상처한 한 화가가 M마을이란 곳에서 만난 시인 부부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의 부인에게서 자신의 아내의 모습을 보는 화가와 화가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의 모습을 보는 시인의 아내, 그리고 사랑과 증오의 갈림길에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시인 추암. 그후 아내의 시체에 화장을 하고, 안거나 업고 다니는 기행을 보이는 시인의 사랑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이걸 진정 사랑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자는 맨 뒤에 우리에게 궁금증을 하나 남긴다. 과연 당신은 로맨티스트인가, 현실주의자인가.

무마는 추리 소설 작가들의 이야기이다. 본격 탐정 소설을 쓰는 주인공 나는 추리 소설 마니아인 허군에게 기괴하고 변태적인 소설을 쓰는 백웅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은 밤, 안개속에서 백웅이 허군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진실은?

손 페티시를 가진 한 남자의 사랑과 증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이게 1930년대에 씌어진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안개는 사물을 희미하게 보이게 만든다. 안개가 주는 착시와 기괴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가의 이야기는 마지막 반전으로 유쾌함을 더했다.

표제작인 백사도는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백사도를 그린 화가를 찾아가 그 그림에 얽힌 끔찍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진행되는데, 결국 세사람의 죽음이란 참극을 낳은 그 사건의 뒤에 숨겨진 진실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본격 추리 소설이라면 이런 결말에 대해 분개하겠지만, 기담에 가까운 이 이야기에서는 이런 결말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웠다. 이 작품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비명횡사로 죽은 화가의 부모의 이야기도, 아내를 의심해 추궁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내의 죽은 모습을 보면서 멋진 그림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고, 그것을 실행하는 화가의 모습과 그 마음이 소름끼쳤다. 가끔 천재적인 예술가들을 보면 기행을 저지르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소름이 끼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악마파는 일본 유학생들의 이야기이다. 그림을 전공하는 주인공과 두 동기 노단과 백추, 그리고 주인공의 동생 루리 사이에 얽히고 설킨 관계는 비극을 낳는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노단과 백추라는 캐릭터이다. 부잣집 도련님에 덩치도 크고, 리더십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휘어잡는 강자인 노단에 비해 백추는 작은 몸집에 장애가 있는데다가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약자의 모습을 보인다. (확대해 보면 노단은 사디즘의 경향이, 백추는 마조히즘의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두 사람의 화풍은 악마파란 것으로 똑같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사람은 강자의 모습을, 한사람은 약자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는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사라진 백추, 그리고 노단과 루리의 결혼. 하지만 그 결혼은 루리의 실종과 노단의 자살이란 것을 막을 내린다. 그후 다시 나타난 백추가 나에게 보여준 진실은? 이 모든 걸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묵인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예술적 광기의 끝은 없는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이단자의 사랑은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이었다. 시인과 의사라는 대조적인 직업을 가진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애련. 애련은 시인과 결혼을 하지만, 결코 의사를 잊지 못하는 듯 하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애련의 목을 조르고 만 시인은 그녀를 앞마당에 묻고, 그녀의 무덤위에 수밀도를 심는다.

4년을 기다려 첫 수밀도를 수확한 날, 의사가 시인을 찾아 오게 되고, 술자리에서 서로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드러내는데..... 사실 시인이 아내의 무덤에 수밀도를 심어, 아내의 몸을 먹고 자란 수밀도를 먹을 날을 기다린다는 설정도 기가 막힌데, 의사가 한 일은 더욱 기가 막혔다. 죽여서라도 자신의 애련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던 시인은 의사의 말에 자신이 했던 일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걸 알게 된다.

시인과 의사라는 대조적인 성향의 인물의 설정은 정말 최고였다. 감성적인 부분이 발달한 시인과 논리적인 부분이 발달한 의사가 선택한 방법은 그 둘의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이 정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괴기편의 작품들을 보면 시인, 화가, 소설가 등 예술 계통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이한 행동이 어느 면에서는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사랑과 증오라는 다소 흔한 소재에 예술가들의 기괴한 기질, 탐미적 경향, 그리고 관능적인 여인들을 묘사한 장면들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예술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고 묵인되어온 참혹한 진실들은 일반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들의 예술을 추구하는 마음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번안편은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소설을 우리나라 풍으로 고쳐 쓴 것이다. 즉,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둔 채, 지명, 인명, 시대등만 바꾼 것인데, 이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백발연맹은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셜록홈즈의 모험 편에 수록된 빨강머리 연맹의 번안작품이고, 히틀러의 비밀은 셜록 홈즈의 귀환에 수록된 여섯개의 나폴레옹을, 심야의 공포는 셜록 홈즈의 모험편에 수록된 얼룩띠를 각각 번안한 작품이다. 특히 여섯개의 나폴레옹을 번안한 히틀러의 비밀은 라디오 방송극에 쓰일 법한 극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러하기에 번안편은 특히 셜로키언들에게 또다른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책 뒤에 수록된 추리문학소론은 추리 소설 팬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본격 추리 소설과 변격 추리 소설의 계보와 특징들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백사도에 수록된 작품들 중 괴기편은 변격 추리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우리나라의 장르문학의 1세대이자, 현재에 이르러 재조명을 받게된 그의 본격 추리 소설 작품은 어떨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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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의 수수께끼 밀리언셀러 클럽 81
나가사카 슈케이 외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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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들이 쓴 작품이라.. (물론 이 말은 에도가와상 수상작품은 아니란 말이다) 당연히 관심이 간다. 이 ~색의 수수께끼는 적, 청, 백, 흑이라는 4권시리즈로 나와 있는데, 그중에서 처음으로 나온 적색의 수수께끼. 이 책에는 총 5명의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작가는 다카노 가즈아키뿐으로 <13계단>을 몇 년전에 읽었다.
 
첫번째는 나가사카 슈케이의 <'밀실'을 만들어 드립니다>. 호오, 밀실이라. 밀실 사건은 본격추리 소설에서 자주 애용되는 소재이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밀실이 탄생할까?

가와하라라는 추리 소설 작가로 지인들과 함께 사쿠 주점에서 추리 게임을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 '밀실 살인 사건' 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사쿠 주점 2층에서 살고 있는 회장이란 인물로 예전에는 폭력단 간부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깨끗이 손을 씻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그를 노린 것은 과연 누구이고, 그가 죽어 있던 밀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과거의 참혹한 사건과 아버지를 찾는다는 피노코라는 소녀에게 숨겨진 진실. 사실 밀실트릭보다는 사건의 동기와 숨겨져 있던 진실들이 가슴이 아팠던 작품으로 기억될 듯. 하지만, 회장이 제시하는 사건의 트릭과 회장이 만든 밀실 게임,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사람들의 토론 등이 흥미로웠다. 물론 나 역시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구로베의 큰곰은 추리소설이라고 하기가 좀 그렇지 않나. 약간의 미스터리 성향은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는 좀.... 하지만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과 그들을 구하기 위한 구로베의 큰곰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여기에서의 미스터리적 요소는 구로베의 큰곰의 정체었다고나 할까?

산. 특히나 겨울산은 날씨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아무리 산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언제든 조난당할 위험이 있고,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 위험한 산행에 있어서 전폭적인 신뢰를 쏟아부어도 위험할 판에 서로에 대한 증오를 숨기고 산에 오른 두 사람의 운명은? 거대한 자연앞에서 드러난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볼 수 있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라이트 서포트는 말기암 환자가 8년전 사라진 자신의 딸을 찾아 그녀의 행적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이야기이다. 사실 말이 사람 찾기지, 그건 실제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작정하고 행적을 감춰버리면 왠만해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끊길듯 하면서도 이어지는 딸의 행적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과정은 정말 흥미로웠다. 딸을 언니네 집으로 입양시킬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죄책감과 딸이 행적을 감춰야만 했던 이유, 그리고 그녀를 찾아가는 과정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딸이 '무엇'을 피해다녔던 것인지, 그리고 인간은 간단한 이유로 얼마든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존재인지를 다시금 알게 되었달까. 

가로는 처음에 무차별 공격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도 그런 것이 면식도 없는 범인의 공격과 자살이란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피해자였던 사람이 사실은 '어느' 사건의 가해자였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야기는 점점 꼬여간다. 확실한 진상도 모른채 사건을 부풀려서 보도하는 언론, 참을성 없이 금방 폭력을 휘두르는 젊은이, 뒤틀린 부자관계, 과거의 유괴 사건등 어찌보면 사회파 추리소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두 개의 총구는 이중인격의 무차별 살인자와 같은 건물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일본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차별 살인이란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살인자와 함께 있다는 공포, 그리고 그 범인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것, 그리고 그곳이 폐쇄된 공간이란 것은 주인공의 공포를 극대화시킨다. 수록 작품중 가장 짧은 작품이고, 결말이 약간 허무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단편들이기 때문에 복잡한 사건 전개나 복잡한 인물 관계가 없어서 깔끔하고 가볍게 읽히는 것이 장점이다. 복잡한 트릭과 복잡한 전후사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좀 심심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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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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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독일 문학이란 것은 일종의 기피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을 것이란 편견과 독일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딱딱함 때문이랄까. 또한 순문학보다는 장르문학 쪽을 주로 읽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크다. 내가 이제껏 접한 독일 문학이라고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만을 읽은 게 고작이다. 두 작품 다 무척이나 낭만적이며, 정열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고, 고전이라 무척 즐겁게 읽었지만, 현대문학이란 건 일단 두려움이 더 크다. 

내게 있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은 처음이다. 아니, 독일 현대문학은 처음이라고 해야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책 뒷표지의 작가적 실험정신이라는 말에 일단 겁부터 집어 먹었다. 혹시 엄청나게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책 표지를 넘기기 전에 긴장부터 해버린 나....

책장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느낀 건, 무척 독특한 느낌이다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문장이 현재 시제로 서술되어 있는 건 몇 번 접해본 것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시제로 서술되는 것은 바로 내 눈앞에서 지금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며, 책 내용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독특하다는 점은 현재 시제로 서술되는 장면들이 아니라 표현력이란 부분일 것이다. 단순한 동작 하나도 마치 연극 무대 배우들의 공연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든지, 다양한 비유들은 작가의 표현력에는 끝이란 게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짤막짤막한 문장들은 익숙치 않은 작가의 문장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피아노 교사를 하고 있는 에리카 코후트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에리카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학생 발터 클레머이다. 에리카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으며, 어머니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라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폭력과 폭언으로 그녀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아무나 어울릴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즉, 에리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일뿐이다.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에리카이지만 가끔 어머니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새옷을 사들이고, 어머니 몰래 핍쇼를 보러 다니고, 포르노 극장에 가고, 밤 깊은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훔쳐보기도 한다. 또한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피지배자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모욕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주도권 장악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에리카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지배자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벌써 서른이 넘은 에리카에게 다가오는 20대의 청년 발터는 신선한 자극이기도 하지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구애를 해오는 발터. 그러나 에리카는 어머니가 두렵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발터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결국 마음을 허락키로 한 그녀가 발터에게 요구한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발터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발터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 그런 에리카의 요구에 발터는 당황과 더불어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이미 성장과정에서 비뚤어져 버린 에리카의 욕망을 이해하기엔 발터는 너무 젊고, 그녀에 대해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한 내용을 발터가 부정해주기를 바라고, 따스하게 그녀를 안아주길 바라면서도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한다. 에리카가 발터를 대하는 모습은 어머니의 지배를 받으면서 형성된 마조히즘 성향과 어머니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어 자해를 하다 형성된 사디즘 성향이 합쳐져 사도마조히즘이란 비뚤어진 욕구와 욕망으로 발전하게 된 모습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발터가 그녀를 이해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터는 진정으로 에리카를 사랑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피아노 선생으로, 예술가로 존경하는 모습과 세상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세계에만 틀어 박혀 있는 에리카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지 않을까. 그런 것은 중간중간 나오는 발터의 생각에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일시적인 관계이더라도 보통의 남녀관계를 원했다. 따라서 에리카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은 결국 강간과 폭력이라는 형태로 끝을 맺는다.

책의 결말부분은 씁쓸하기만 하다. 에리카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발터를 찾아가 칼로 찌르려 하지만 결국 멀리서 발터를 지켜보다가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에리카는 어머니의 지배, 어머니의 '작은 일인용 사립동물원'(360p 인용)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 에리카는 결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는 모녀 사이이자, 여자 사이인 사람들의 지배와 피지배관계, 그리고 예술가와 제자, 남녀 사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보이는 것은 상하 관계밖에 없다. 즉, 평등한 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헤게모니 다툼을 반복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적'인 평등한 관계는 없다고 본다. '평등해 보이는' 관계만이 존재할 뿐.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절대적인 굴종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무척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의 시선이 아주 냉담하다는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에 등장하는 여성 등장인물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낼거라는 예상을 마구 깨졌다. 물론 에리카가 특수한 성향을 가진 인물임이 분명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에리카는 결국 자신의 옭아매고 있는 올가미를 스스로 헤쳐나오지 못했고, 결국 그 올가미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으로 끝나버렸기에 더욱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딱 잘라 말해서,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게다가 같은 여자로서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자니, 굴욕감이 밀려들어 오기도 했다. 시쳇말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는데, 내가 꼭 그런 느낌이다. 에리카는 벌써 서른 중반의 어른인데도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 하지도 않았고, 현재상황에서 빠져나오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이양해서 만족감을 얻으려는 모습에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문득 에리카를 떠올리게 된다면 그때는 에리카를 동정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는 한다. 동정뿐, 이해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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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 1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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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라.... 카페란 단어가 들어가서인지는 몰라도 분위기 좋은 찻집의 맛있는 차와 커피 이야기가 중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책 띠지를 보니 내 생각과는 좀 다른듯한 느낌이 든다. 축제같았던 시간이라..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난 궁금증을 안고 책을 펼쳤다.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 카페 알파를 지키고 있는 알파형 로봇 알파. 그녀는 몇년전 카페를 떠난 자신의 오너를 기다리며 매일매일을 보낸다. 손님은 거의 없지만 요코하마에 가서 커피 원두를 사오기도 하고, 마을의 친목회나 새해 해돋이를 보러가는 등 알파는 인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하구의 숲에 산다는 미사고가 등장하기도 한다. 아이를 좋아하고, 어른을 싫어해 가끔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미사고. 그런 대부분의 아이들은 미사고의 이빨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치기 일쑤다. 미사고는 알파와는 대조적인 이미지로 비춰진다. 미래와 과거의 교차랄까.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서는 미사고가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미사고(みさご)는 일본어로 '물수리'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사고는 문명에 배치되는 개념인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여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에서 미사고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알파와 같은 로봇인 코코네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참 마음에 들었다. 미사고가 따뜻하게 타카히로를 품어주던 모습이나, 어린 시절 만났던 미사고를 다시 한 번 만나기를 기다리는 아야세의 이야기는 과거 인간들과 함께 존재했던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특히 나이가 들어 더이상 미사고를 만날 수 없게 되기 전에 고마움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타카히로의 마음은 무척이나 기특했다.

코코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10년의 세월도 1년처럼 느껴지는 알파의 삶은 우리 기준으로 볼 때는 길고 긴 삶이라 주변의 것에 대한 고마움이나 애틋함을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필요 없는 장면은 없다'는 알파의 말은 나 자신을 반성하게 만든다. 길어도 100년 남짓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가다가 죽는다. 매일매일 똑같은 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잊기 일쑤인데, 알파는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든다. 무척이나 인간다운, 아니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모습의 알파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먹고 마실 수 있는 기능과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로봇의 등장은 지금보다 한참 더 멀리 떨어진 미래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변의 모습은 몇 십년전의 시골마을 풍경이다. 사회와 문화는 융성과 쇠퇴를 거듭한다. 아마도 이 작품의 배경은 쇠퇴의 시기가 아닐까. 축제같았던 시간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융성했던 시기를 의미하고 저녁뜸의 시대란 것은 쇠퇴하고 있는 시기를 의미하는 듯 하다. 계절의 구별이 거의 없어지고, 춥지 않은 겨울. 그리고 점점 물에 잠겨가는 일본 열도. 여기에 등장하는 요코하마도 예전의 요코하마가 아니라 새로 옮긴 요코하마이다. 그리고 수도였던 도쿄의 이름은 무사시노로 바뀌었다. 지금의 환경 파괴 속도라면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과학 문명의 집적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형 로봇과 전설속에 나오는 정령같은 존재 미사고가 공존하는 시대를 그린 이 만화는 어떤 부분이 정말 좋았어.... 라고 할 수 있기 보다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참 좋지 않은가 싶다. 언제든 찾아가도 알파가 함박 웃음을 지어주며 반겨줄 것만 같은 카페 알파. 그곳에서  그녀와 내준 커피를 마시며 도란도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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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닉취미 - 뉴 루비코믹스 923
메이지 카나코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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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카나코의 책중 혹닉취미가 세번째로 읽게 되는 책인데, 책마다 느낌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위의 마법사는 본격 BL물 느낌은 아니었지만, 아련한 추억과 연정, 그리고 소년의 성장이라는 따스한 느낌이었고, 地獄行きバス는 본격 BL물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는 책이었다.

혹닉취미는 총 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작품을 빼고는 모두 아저씨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아저씨는 사랑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것처럼 생각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아저씨들의 사랑은 적극적이고, 애틋하기까지 하다.

표제작인 혹닉취미와 전색취미는 대학생 오기와 사업체를 운영하는 츠즈키 커플의 이야기이다. 우연히 츠즈키의 눈에 들어 애인대행을 하게 된 오기는 츠즈키에게 점점 끌리지만, 비서인 카노의 충고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계속 억누른채 지낸다. 

두 사람의 정확한 연령차이는 잘 모르겠으나, 오기는 츠즈키를 볼 때마다 자신보다 한참 어른이란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즉, 츠즈키의 빙글빙글 짓는 미소속에 감춰진 속마음을 알지 못해 발을 동동구르고 마는 것이다. 사실, 연령 차이란 것은 큰 힘을 가진다. 어릴수록 상대에 대해 불안해 하고, 상대의 속마음이 궁금하고,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상대에 대해 초조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오기의 심정이 딱 그런 것 같아 보여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츠즈키 아저씨는 오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말이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오기에게 딱 어울릴 듯. 하지만 난 마지막 페이지에서 빵 터져 버렸다는.... 츠즈키 아저씨가 오기를 멀리하는 듯 보였던 건,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던거야?????

니구마의 목덜미는 이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중에서 유일하게 대학 친구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대학 친구인 타케나카와 니구마는 술을 마시다 우연한 계기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니구마의 사과에 마음에 상한 타케나카는 니구마와 절교 선언을 하게 된다.

사실 말이지, 니구마 같은 타입이 난 참 싫다. 타케나카가 니구마의 말을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 타입은 손봐줄만 하지.... 정말 무례한 일이잖아?

톡톡은 왠지 SF 느낌이 좀 나는 BL물이었달까. 젊은이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을 넣어 짝사랑해왔던 사람앞에 나타난다는 설정. 그렇게라도 상대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시키시의 마음이 참 안타까웠다. 그러나 날 기다리고 있던 반전은....!? 와우, 역시나 최고. 상대의 사소한 버릇까지 기억하는 건 역시 '사랑'이란 것.

베스는 개인적으로 이 단행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애견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걸린 시로와 그의 애견 대행을 하게 된 우메. 처음에는 애견 대행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진 우메였지만, 금방 그 일에 적응해 가는데....

문득 든 생각이지만, 우메에게 베스의 영혼이 씌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메의 수호신이 되어 우메와 함께 시로 아저씨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로 아저씨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말이다.

이 작품은 웃음이 나게 하기도 하고, 가슴이 찡하기도 했는데, 웃음이 나온 건 역시 '산책'이란 말에 반응하는 우메의 모습이었달까. 산책이란 말에 벌떡 일어나고, 비가 와서 산책 취소란 말에 금세 시무룩해지는 우메의 모습은 우리 강아지들을 보는 것만 같아 웃음이 나왔다.

부유하지만 호시탐탐 시로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 그리고 믿을 건 베스밖에 없었던 시로 아저씨. 그리고 그런 시로 아저씨를 지켜주기 위해 영혼이 되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베스의 이야기는 '개'라는 동물이 가진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서 사뭇 가슴이 찡해왔다.

마지막 수록작품인 빛나는 길은 무척 안타까운 이야기였는데, 당시 아츠시의 상황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도 어린 아키라의 눈에 비쳤던, 그리고 기억하는 아츠시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타까웠달까.

이렇듯 아저씨들이 주로 나오는 작품들이지만, 그 내용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리고 아저씨들의 사랑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라는 것도 무척 좋았달까. 젊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불쾌하지 않다. 그 이유는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저씨들이 자신의 연령대의 연륜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일과 사랑에서 모두 성공한 아저씨들은 참 멋지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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