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향인 2
카라사와 치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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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7년. 카스가 시노부는 지난 봄 아편밀수 용의자와 대치하다 순직한 오빠 테츠야의 친구인 니오우노미야 백작가에 서생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여자이지만 다이쇼 시대의 히카루 겐지라 불릴 정도로 여성편력이 심한 백작을 걱정한 시노부의 오빠 테츠야는 백작에게 시노부가 남자라고 일러두었다고 한다. 백작은 표면적으로는 향도의 당주이자 향수 회사 사장이지만, 이면의 모습은 황실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자이다.

환상향인 1권이 자잘한 에피소드의 연속이라면 2권은 굵직한 사건 하나와 번외편 이야기 두 편이 실려있는 구조라 봐도 될 것이다. 일단 번외편 이야기부터 하자면, 1권에도 등장한 미나미진주의 젊은 사장이자 니오우노미야 백작의 친구인 싱고가 등장한다. 싱고는 이번에 인도의 왕자를 대동하고 나타나는데, 이 왕자, 눈빛이 끝내준다. 본문은 죄다 흑백이라 그의 아름다운 황금색 눈을 직접 보지 못한게 천추의 한이랄까. (笑)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도의 왕자님과 시노부 사이의 이야기, 굉장히 짧은 데도 여운이 길게 남은 에피소드였다. 특히 왕자님이 영국대사에게 허락한 '그것'에 정말 가슴이 찡해졌달까.

2권을 아우르는 사건은 아편을 환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중국마피아 흑룡회와 관련된 에피소드이다.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소우마란 소년을 구해주게 된 시노부. 자신의 형과 함께 흑룡회에 잡혀갔지만 자신만 탈출하게 된 소우마는 형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사연과 너무나도 비슷한 사연을 가진 소우마를 보면서 시노부는 소우마를 잘 돌봐주겠다고 결심하지만, 소우마 역시 커다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소년이었다. 소우마의 정체의 숨겨진 비밀과 소우마와 백작 사이에 있었던 어두운 과거는 점점 그 베일을 벗어가는데...


이 사건을 겪으며 시노부는 백작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뭐, 늘 그렇듯 일단 무조건 뛰어들고 보자는 시노부가 각종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것은 두말할 필요는 없겠지. 역시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같이 겪고 극복해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일까?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면 모든 사건이 다 그렇듯, 시노부가 위험에 빠진다 → 백작이 구해준다, 의 설정이 무한반복되고 있다는 것. 난 좀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말이지. 그리고 또 하나 더 아쉬운건 이번엔 향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제목에도 향인아란 말이 나오는데, 그게 좀 아쉽고, 또 아쉬운 건 백작의 '그림자'가 아주 잠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랄까. 난 '그림자'도 좋았단 말이지!! 아마도 이런 아쉬움이 큰 것은 아마도 2권이 완결이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2권에서는 냉혹한 암살자인 백작의 다른 모습을 많이 봤다는 게 큰 재미였달까. 특히 얼굴이 '익은 게처럼' 변한 백작의 모습은 익숙치 않은 모습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역시 그도 사랑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달까.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지만 진짜 사랑앞에서는 그도 한 사람의 남자에 불과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되려나? 그러나저러나, 시노부는 언제까지 남장을 하게 되는 걸까. 이제 그만 슬슬 본 모습으로 돌아오면 좋으련만. 그건 상상으로 남겨둬야겠지? 참, 마지막에 나온 싱고의 고민도 무척이나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갑자가 성균관 유생들에 나온 이선준과 김윤식이 떠올라서 더 재미있었달까. 자신이 남색이지 않을까 고민하는 이선준과 여전히 시노부가 남자인줄 아는 싱고의 싱크로율은 90%이상! 굳이 따지자면 난 싱고쪽이 더 귀엽다!?

시대물, 남장여자. 향도와 향수, 귀족이자 암살자라는 흥미로운 소재들이 결합되어 있는 환상향인 완결권. 이렇게 끝나 아쉽긴 하지만 새로운 소재의 만화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남자들을 실컷 봤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그만 달래야겠다.

사진 출처 : 책 본문 中 (88~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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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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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생. 열다섯 살에 자신의 연극 발표, 열여섯 살에는 영화 감독으로 데뷔, 그리고 열일곱에 소설 발표. 천재 소녀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헬레네 헤게만. 내가 열다섯 살때는 뭘 했지, 하고 생각해 보니 이 소녀가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내가 지금 헬레네 헤게만의 또래라면 그녀의 엄청난 천재성에 질투라든지 동경을 가지고 있겠지만, 지금 그녀보다 약 두 배정도 나이를 더 먹은 어른의 입장이다 보니 참 대단하다, 라는 감탄만 나온다. 어른의 넓은 아량? 혹은 난 지금껏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절대 이루지 못할 이런 성과에 대한 질투를 감추기 위한 알량한 자존심? 뭐, 어느 것이라도 좋다. 어쨌거나 그녀가 '대단하다'란 것은 분명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아홀로틀 로드킬은 미프티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올해 열여섯 살. 어릴때는 알콜중독자인 엄마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살았고, 열세 살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이복 오빠 에드몬트와 이복 언니 아니카와 함께 살고 있다. 미프티는 학교에 다닐 나이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늘 약물과 마약에 쩔어서 지내며 그 영향으로 때로는 환각을 보기도 한다. 미프티의 주변에는 어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미프티가 마음을 여는 여자 어른 둘이 있다. 한 명은 알리스, 또 한 명은 오펠리어. 미프티는 알리스에게서는 자신이 갖지 못한 다정한 엄마의 모습과 그 사랑을 갈구한다. 오펠리어는 미프티의 영리함과 예술성을 알아봐 주는 인물로 미프티가 마음을 연 대화가 가능한 거의 유일무의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다. 열여섯 소녀의 무절제하고 파괴적인 삶을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또한 약물을 남용하는 소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성때문인지 때로는 이야기의 흐름이 잘 파악되지 않기도 하고, 우리들이 잘 쓰지 않거나 잘 모르는 용어나 단어들을 들먹이면서 선을 그어 버리는 바람에 미프티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잘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또한 거의 매문장마다 등장하는 뮤지션들의 이름과 그들의 노래 제목들은 절대 어른인 너희는 이해하지 못할 세계야, 라고 못박고 있는 듯 하다.

시퍼런 날이 선 언어,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 사회의 규범에 몸을 맞추고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나로서는 미프티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열여섯 살의 미프티에게 있어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반항이란 의미와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십대의 특권쯤으로 생각되는 반항. 하지만 반항이란 것으로 일축하기엔 그 정도가 심각하다. 물론 그 나이 또래에서는 어른들의 세계가 불합리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미프티처럼 똑똑한 데다 예술성이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미프티가 엄마에게 받은 학대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어른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살아왔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열여섯 살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잃지 않은 채 나를 학교에 다니게 하고 짓눌린 감정으로 끌고 가는 이 사회와 그 어떤 관련도 맺지 않고 스스로를 지탱해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 그것뿐이다. (32p)

하지만 미프티의 한계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프티는 언젠가는 자신이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어른이 될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지만 미프티는 그렇게 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억지를 부리는 어린 아이같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또 한편으로 미프티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지만, 미프티가 약을 하면서 쓰는 돈, 레이브 파티에 다니는 돈은 결국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란 것이다. 그렇게 질색하는 아버지이면서 스스로 돈을 벌 생각은 안하고 오로지 반항을 위해 아버지에게 손을 벌린다. 이 또한 미프티가 가진 열여섯 살이란 나이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미프티는 기존의 세상을 거부하고 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알리스에게 갈구하지만 자신이 만족할 만큼은 아니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오펠리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오펠리어가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해 떼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자꾸만 현실과 동떨어지고, 점점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자신 뿐임에도 불구하고. 미프티는 자존심을 내세우면서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미프티의 날카로운 말과 과격한 행동때문에 주변 사람을 점점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고 있기도 하다. 미프티의 앞날에 희망의 빛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한숨이 쉬어졌다. 결코 희망이라 말할 수 없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아홀로틀 로드킬의 본문 중에는 아이렌이란 사람의 블로그, 다양한 책, 개인 이메일 등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가져온 글들이 많다고 한다. 몇 쇄를 걸치면서 지금은 인용문의 출처를 밝혀 두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하고 새로운 창조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듯 출처없이 다른 사람의 글을 도용한 것에 대해 작가 스스로의 언급이 없다는 것은 나같은 사람에겐 놀라운 일이다. 지금은 단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저작권이 어떻니 저떻니 하는 문제가 거론되기 때문이다. 이는 십대 소녀의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고, 작가의 말대로 실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인용이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이 책은 무척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쓰레기 같은 소녀의 넋두리로 볼 수도 있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틀림없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 읽어본 나로서는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엔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헬레네 헤게만의 첫 소설이며, 아직 십대인 소녀가 쓴 글이기 때문이며, 이 다음에도 소설을 펴낼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예술이란 것에 도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기존의 문학에 대항하는 일종의 실험으로 보이기도 하고, 기존 사회와 문학에 대한 도발로도 보이기도 한다. 헬레네 헤게만의 작품이 실험이란 것으로 꾸준한 성공을 거두게 될지, 아니면 도발로 끝나게 될지는 시간이 더 흘러 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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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깔=꿀색 - 한 해외 입양인의 이야기
전정식 글.그림, 박정연 엮음 / 길찾기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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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한국인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민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재외 한국인들 중에서 국외 입양된 사람들은 무심코 빼놓고 생각하게 된다. 아주 어릴 때 국외로 입양되어 버린 사람들.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간간히 영화나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가 되어왔지만, 그런 계기가 있지 않으면 이미 우리들의 생각속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작가 전정식은 1970년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경찰에 발견되어 홀트 여사가 만든 고아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약 2,000여명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지내다가 두 달만에 벨기에로 입양되었다. 지금도 건재한 홀트 아동복지회. 지금도 건재한 홀트 아동복지회는 한국 전쟁이후 발생한 전쟁 고아들을 보살피고 국외 입양을 주선해온 단체이다. 

 1958년부터 한국은 200,000명 이상의 아이들을 방출했다. 50,000명은 국내 소비용, 150,000명은 수출용이다. (24p)

저자가 쓴 이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신랄한 단어 사용때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국내 입양은 국외 입양의 1/3수준. 지금은 국내 입양도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입양이란 문제에 대해 편견과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그다지 놀라운 퍼센트는 아닐지도 모른다.

자기 핏줄이 아닌 아이를 맞아들이는 것은 아이에게 두 번째 기회를 내 주는 것이다. (…) 고아원과 병원을 만들고 우리에게 가족을 찾아준 홀트 할머니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 하지만 … 홀트 할머니에 대해, 감사를 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지금은 모르겠다. 세계로 흩어져 입양된 한국 아이들이 200,000명이나 된다. 너무 많다. (28p)

작가가 입양된 1970년대의 한국은 가난했다. 자기 아이도 잘 돌볼 수 없을 만큼. 그런 상황에서 국외 입양이 활성화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말대로 너무 많은 한국인 입양아들이 세계로 흩어졌다. 자신의 앞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채...

이 책은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는 5살때 남대문에서 발견되어 홀트여사가 세운 고아원에서 두달을 보내고 벨기에로 입양되어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야기이고, 2부는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에 접어든 작가의 생활과 양부모로부터의 독립과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벨기에식 이름대신 정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양부모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남자 형제가 하나 나머지는 모두 여자애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정을 받아들였고, 나름 근사한 시간들을 보낸 것으로 추억한다. 게다가 입양아라는 것이 마음의 큰 상처가 되었던 탓인지 금세 한국어를 잊고 벨기에 생활에 적응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정이 취학연령이 되면서 생겨났다.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한국인 입양아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십여 명의 입양아가 있다. 거리에서 자기와 닮은 이미지를 마주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북한 느낌이 드는 건 입양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버려졌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군가로부터 거부됐다는 것이 내겐 수치심과 같았다. (79p)

정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처음 벨기에로 와서 어색했던 감정은 자신의 의붓형제와 지내면서 없어져 갔겠지만, 자신과 똑닮은 얼굴의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숨겨놓은 상처를 다시 헤집게 되는 일이었을테니. 

그후 정의 가족에게는 발레리(한국 이름 : 이성숙)이라는 여동생이 생긴다. 처음엔 질투했지만 금세 동생이 귀여워졌다. 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양어머니에게 매우 혼이 나고 정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후 정은 지나치다 싶은 말썽쟁이로 성장하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의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한편, 자신의 양어머니에게 반항도 하는 그런 나이가 된 정은 조금씩 사춘기에 접어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이 아닌 쿵푸 같은 중국 문화나 일본 문화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내가 쿵푸를 좋아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시아 문화는 내게 매우 이상한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뿌리, 내 문화에 이끌리고 있었다… 불가항력적으로 (120p)

사춘기에 접어든 정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 입양아들을 만나게 되고 조금씩 달라져간다. 특히 로리란 친구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에도 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의 막내 여동생 발레리가 사고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정의 주변에 있던 한국인 입양아들 역시 자살이나 정신병원 치료등을 받는 아이들이 늘어간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면 점점 성장해가면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으리라.

물론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우린 너무 귀여우니까.
삐걱거리는 것은 그 다음이다. 성장하고 나면 정말 너무나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입양한 부모들은 그런 일련의 상황 앞에 역부족이라 느끼고 때로는 서툰 모습을 보이며, 늘 적절한 대답과 적당한 반응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입양은 우리가 입양 가정에 인도되는 그날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입양 여정의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나아간다.
(257p)

이 책은 작가의 전기라고도 볼 수 있다. 서울에서의 어린 시절, 고아원 시절, 입양과 벨기에에서의 삶. 우리는 국외 입양아들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고, 모른체 해왔다. 물론 이 책은 전정식이란 한 사람의 사례를 보여 주고 있지만 그가 하는 고민은 모든 입양아들의 고민이 아닐까. 진짜 자신은 어디에 있고, 나의 조국은 왜 날 버렸을까 하는 그런.

몇년전 하워드 존스가 내한했던 때가 기억난다.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워드 존스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가 우리나라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그렇게 큰 이슈가 되었을까. 물론 하워드 존스는 혼혈아일뿐 입양아는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혼혈아가 성장하기 힘든 환경이란 것이다. 그때 그는 한국인의 피를 이은 농구 선수로 우리나라에 입국당시 어마어마한 환대를 받았다. 한국인의 피가 단지 절반이 섞여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국외 입양된 사람들은 순수 한국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외면을 받아왔다. 나 역시 이 만화가 아니라면 벨기에로 입양된 전정식이란 사람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해외로 입양된 한국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은 해외로 입양된 한국인들의 삶, 그들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해외 입양 실태와 국외 입양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의 병폐와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가부장적 사고방식, 입양에 대한 편견, 혼혈아에 대한 편견, 미혼모에 대한 편견 등이 한국인들의 국외 입양을 부추기는 근본적 문제라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유아 해외 수출 1위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내 입양보다는 국외 입양되는 한국인 아동의 수가 많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해외 입양아들이 한국을 떠나 어떤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작은 등불이 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민지들만이 아닌 한국인 국외 입양자들에게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길,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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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쓴 원고를 책으로 만든 책 - 새끼 고양이, 길 잃은 고양이, 집 없는 고양이를 위한 지침서
폴 갈리코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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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쓴 원고를 책으로 만든 책>이라는 다소 긴 제목에 <새끼고양이, 길잃는 고양이, 집없는 고양이를 위한 지침서>라는 더더욱 긴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도대체 어떤 고양이기에 이렇게 책의 초안을 잡을 만큼 영리한 것일까. 이 책을 펴낸 폴 갈리코는 끝내 이 원고의 주인인 고양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교묘하게 이름 부분이 지워져 버렸고, 고양이는 자신의 영특함을 감출수 있을 만큼 영리한 동물인데다가, 아주 비밀스러운 동물이라 함부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저자 서문과 후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떤 고양이에 의해 씌어졌다. 총 열여덟 개의 상황에 따른 행동 강령이 포함되어 있는 본문의 내용은 아주 체계적으로 인간의 가족을 접수하기 위한 지침을 담고 있다. 그렇다 보니 고양이 입장에서 본 인간들의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고 때로는 시니컬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저자 고양이는 생후 6주에 갑작스런 사고로 어미를 잃고 스스로 자기가 살 집을 찾아 다녔다. 일단 목표를 정하고 그 집을 접수하기 위한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제일 첫번째는 그 집에 사는 인간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집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생후 6주된 새끼 고양이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사랑스러울 때이다. 똘망똘망한 눈, 갸날픈 몸, 귀여운 목소리. 사실 아이돌과 새끼 고양이가 한 장소에 있다면 난 주저없이 새끼 고양이를 선택할 것이다. 그정도로 새끼 고양이는 사랑스럽다. 하지만 누구나 고양이를 키울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고양이 역시 자신이 접수할 만한 가정을 택했기에 이후 이 집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무척 유쾌했던 것은 정말 고양이가 쓴 책 아니야, 라고 생각할 만큼 고양이가 보는 인간과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각 인간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을 접수할 때 달라지는 접수 방법을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깜박 잊고 사는 부분이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재산 만들기에 나온 문장으로 설명해 보자면...

나는 인간의 우유부단함을 반기면서도 때때로 '정말이지 왜 저럴까' 하고 놀라기도 해.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고양이가 침대에 올라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올라오기를 은근히 바라지. 모순이라고? 그게 바로 인간이야. (49p)

나 역시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인간의 모순된 점을 잘 알고 있다. 침대에 올려놓으면 일단,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나 개를 위해 침대의 2/3는 내주어야 하고, 더불어 이불은 멀쩡한 이불도 앙고라 이불이 되는 것을 겪어야 하며, 때로는 날리는 털에 재채기를 하면서, 여름에는 더워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고 하면서도 침대 위에 올려 놓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고양이나 개를 키워본 사람이나 키우고 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동의할 사실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키운 뒤로 고양이가 주인이에요. 우리는 얹혀 살아요." (58p)

푸하하하핫.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난 폭소를 떠뜨렸다.
완전 나랑 똑같아, 똑같아.
사실 반려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외출을 해서도 집에서 기다릴 반려동물을 위해 귀가를 서두르고, 의자에 앉고 싶어도 푹 잠든 반려 동물을 보면서 바닥에 앉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반려 동물 입양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 바닥에는 반려 동물을 위한 장난감이 굴러 다니고, 주방 한쪽 선반에는 반려 동물을 위한 사료며 간식 등이 줄줄이 쌓여있게 된다. 또한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도 이건 우리 ○○가 좋아하는 건데 하면서 카트에 무의식중에 집어 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되면 그 반려 동물은 그 집을 완전히 접수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외에도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한 작전, 사람을 부리기 위한 작전등을 살펴 보면 사람에게 약간의 만족감을 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사람에게 문열어 달라고 하기나 원하는 음식을 내놓도록 하는 것은 인간이 고양이에게 베푸는 행동이 아니라 길들여져 해달라고 해주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또다른 것으로는 여행이나 동물 병원가기, 집에 손님이 왔을 때의 행동에 관한 행동 지침도 포함되어있다. 이런 것은 고양이가 인간과 살아가면서 약간은 양보해야 할 것들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을 잘하면 더욱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니 고양이에게 해가 될 것은 전혀 없어 보인다.

고양이들이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도 물론 있다. 두 집 살림 살기와 엄마 되기, 인간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두 집 살림 사는 고양이는 꽤 많다. 실제로 우리 시골 고양이는 세 집 살림을 살고 있다. 이름은 나비로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녀석인데, 본 집(우리 옆집)이 있고, 우리 시골집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살다시피 하고, 요즘처럼 시골집이 빈 상황에는 또 다른 집에 가서 살고 있다. 브라보!

엄마 되기는 암컷 고양이라면 한 번쯤은 꼭 지나갈 과정이라고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야할 부분이 있다. 너무 잦은 임신과 많은 새끼 고양이를 낳을 경우 인간에게 고양이 없는 삶을 그리워할 구실을 만들어 줄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사실 그렇다. 새끼 고양이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커서 분양을 해야할 때는 좋은 집으로 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인간이 몹쓸 결정을 할 계기를 만들기도 하니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고양이를 통해 작은 생명이 주는 행복감을 맛본다. 하지만 때로 자신의 반려동물이 귀찮아졌다는 이유로, 집안의 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이유 등으로, 혹은 아프니까 병원비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버리는 사람도 많다. 그러하기에 이 저자 고양이가 쓴 이 문장은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든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런 인간의 사랑이 막대기로 맞는 것보다 더 아플 수 있으니 조심해. 인간은 사랑하다가도 사랑을 버리고 떠날 때가 많아. 우리 고양이는 절대 그러지 않지만. (152p)

사람의 사랑은 쉬이 변한다. 나도 그걸 잘 안다. 하지만 반려 동물들의 사랑과 믿음은 변함이 없다. 때로 자신을 버리고 간 반려인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반려 동물들도 있다. 특히 사람들은 고양이는 집을 따르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다. 집에서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자란 고양이들은 사람을 따른다. 그렇게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사랑이 변한다는 건 정말 큰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고양이의 영리함이라 영악함을 만천하에 공개하고자 출판된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책을 본 애묘가들이 고양이의 진짜 정체에 대해 알게 하게끔 출판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고양이의 영리함에 대해 더욱 사랑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애묘가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고양이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스스로를 고양이 집사나 하녀라고 칭하겠는가.

1964년에 초판 발행된 이 책은 시간의 흐름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바로 얼마 전에 초판이 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감각적이다. 고양이의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인간 가정 접수 작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으로 인간의 가정을 접수하고 그 가족들을 자신의 집사나 하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은 다 알면서도 눈감아 줄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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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 모그 - 3~8세, 개정판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42
주디스 커 글.그림, 최정선 옮김 / 보림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고양이라. 도대체 어떤 것을 그렇게 잘 잊어버리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을까. 표지를 보면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시침 뚝 떼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모그.
모그! 혹시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잊어 버린거야? (笑)


모그는 갈색 줄무늬에 얼굴 중앙에는 밀가루를 묻혀 놓은 듯한 동그란 얼룩이, 그리고 가슴에는 에어프런이라도 두른듯한 흰 털이, 그리고 네 발에는 하얀색 발목 양말을 신고 있는 아주 귀여운 고양이이다. 모그가 사는 집에는 총 네 명의 사람이 있다. 토마스 아저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딸인 데비와 니키. 이렇게 총 다섯식구가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모그는 늘 무언가를 잊고 산다. 저녁을 다 먹은 것도 잊어 버리고, 그루밍을 하다가 마저 남은 다리의 그루밍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새가 날아가면 자신에겐 날개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뛰다가 떨어지는 실수도 한다. 또한 모그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고양이 문의 존재도 가끔 깜박깜박한다.


그렇다보니 허구한 날 고양이 문대신 창문에 붙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야옹야옹 운다. 누가 그곳에 있으면 몰라도 아무도 없을 때는 사람이 올 때까지 울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아빠가 예쁘게 가꾼 화분의 꽃이 꺾이는 일도 자주 있다. 그런 아빠는 "성가신 고양이 녀석" 이라고 하지만 데비는 모그가 착하다고 모그 편을 들어 준다.


모그는 또 아침 식사 시간에는 우유만 먹어야 하는 것을 깜박하고는 니키의 달걀을 먹어 치운다. 사실 이 집에서 달걀은 모그가 상을 받을 때만 먹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저씨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가신 고양이 녀석!" 이라고. 물론 데비는 또 니키는 달걀을 싫어하니 괜찮다고 모그 편을 들어준다.


어느 날 모그는 밖에 외출을 나갔다가 커다란 개에게 쫓겨 집으로 황급히 달아난다. 또 고양이 문의 존재를 잊어버린 모그는 창틀에서 시끄럽게 야옹야옹하고 운다. 엄마는 갑자기 나타난 모그에게 놀라 완두콩을 쏟아버리게 된다. 엄마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가신 고양이 녀석!" 이라고. 하지만 데비는 모그 잘못이 아니라며 모그의 편을 들어준다.  


모그는 낮잠을 자기 위해 자기 의자에 올라갔지만 그 위에는 엄마의 모자가 있었다. 깔고 자버려서 모자의 형태가 아주 찌그러지자, 엄마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가신 고양이 녀석!" 데비는 엄마에게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며 모그 편을 또 들어준다.


모그가 저녁에 졸려서 따뜻한 티비 위로 올라가서 잠을 청하려는데, 모그의 꼬리가 그만 티비 화면을 가려버렸다. 아저씨는 권투 중계를 보고 싶었는데, 그만 모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저씨의 시청을 방해해 버린 것이다. 아저씨는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가신 고양이 녀석!"

모그는 아저씨에게 혼이 나고 풀이 죽어서 데비가 자는 방으로 가지만, 자신의 몸무게를 생각지 않고 데비 위에 앉아 있다가 그만 데비가 가위에 눌리게 하고 만다. 데비는 엄청나게 큰 호랑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핥고 있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놀란 데비가 울음을 터뜨리자 가족들이 모두 달려오고, 엄마와 아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성가시고 성가시고 성-가-신 고양이 녀석"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모그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어두운 곳에 숨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헀다. 이 집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런 모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엌에 켜진 불빛이었다. 자신이 왜 밖에 나와 있는지를 또 깜박 잊어버린 모그는 창문에 붙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야옹야옹거렸다. 그런데 부엌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 아닌 도둑이었다. 모그의 야옹소리에 도둑을 잡게 된 것이다. 모그는 경찰 아저씨에게 칭찬을 받고, 근사한 메달도 받았다. 그리고 맛있는 달걀을 매일매일 먹게 되었다.

모그는 항상 무언가를 잊고 사는 듯 하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을 성가시게 하기도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어쩌면 이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모그의 행동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인지도 모른다. 고양이의 성격은 어찌 보면 좀 무심한 듯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야옹거리는 것은 밥 먹은 것을 잊어 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 배가 고프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나뭇가지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냥 본능에 충실하다 보니 앞뒤 생각안하고 뛰어올랐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고양이문은 사용하기 귀찮아서 쓰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창턱에서 야옹거리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엄마의 모자는 일부러 망가뜨리려한 게 아니라 자신의 낮잠 의자 위에 우연히 모자가 있어서 그랬던 것 뿐이고, 티비 위에서 자는 것은 일부러 아빠의 티비 시청을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티비위가 따끈따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비위에 올라가 데비의 머리카락을 핥았던 것은 그저 자신의 사랑의 표현이었을 뿐인데, 사람들 입장에서는 모두 고양이가 일부러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모그의 묘생 역전! 뭐, 따지고 보면 소 뒷걸음 치다 쥐 잡는 격으로 도둑을 잡은 것이긴 하지만, 이로써 모그의 위치기 상당히 상향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상으로만 받던 달걀을 매일 아침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사실 반려동물을 기르다 보면 종종 아~ 성가셔, 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이는 동물과 사람의 행동의 패턴 차이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인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반려 동물을 보기 때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그도 엄마 아빠에게 그렇게 보여진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모그를 고양이 그대로 봐주는 것은 데비나 니키처럼 어린아이들 뿐 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이다 보니 자신들처럼 장난꾸러기같은 모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도 개와 고양이를 기르지만 때때로 성가시단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동물들의 의사 표현일 뿐, 일부러 사람을 귀찮게 하려고 마음먹고 하는 일은 아닐 때가 많다. 때로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책 본문 中 (본문에는 페이지 표기가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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