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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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최규석 작가와의 나이 차이는 단 한 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도대체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히려 내 부모님 세대를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왜 난 이렇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일단 내 이야길 조금 해 볼까? 난 깡촌에서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보다 2주 정도 일찍 태어난 나는 첫째아이였다. 엄마의 갑작스런 진통에 병원 갈 엄두도 못내고 아버지는 송아지를 받던 기억대로 날 받으셨다고 한다. 그후에도 몇 년 더 시골에서 살다 초등학교 2학년에 지방의 중소도시로 이사를 갔고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대학교는 조금 더 큰 지방도시에서 다녔고, 일은 서울과 경기 쪽에서 했다. 어찌보면 최규석 작가의 어린 시절과 비슷하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은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였고, 난 여동생 하나만 있을 뿐이란 것. 깡촌에 살던 것은 부모님은 두 분 다 신규 발령받은 교사였기에 그랬던 것.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있어서 시골 생활이란 그저 산으로 들로 뛰어 놀던 기억이 조금이 남아 있고, 그후엔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느라 또래들과 노는 것도 모르고 자랐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났지만 그다지 부족함은 몰랐던 것 같다. 책도 맘껏 읽을 수 있었고, 마론 인형도 가지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달 어린이 잡지를 구독했고, 피아노 학원이나 웅변학원, 주산학원도 다녔고, 중학교 때부터는 아이템풀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금세 시골에서 살던 기억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물론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가서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과 뛰어 놀곤 했지만,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난 나름대로 도시 생활 - 중소도시일지라도 - 에 적응했던 것 같다.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난 이렇게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가 낯설기만 할까. 어쩌면 작가와 나의 생활 터전이 달랐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너무 어린 시절이라 그다지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살며 만난 내 친구들은 대부분 아파트나 주택에 살았고,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는 집도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 생각외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은 것은 스무살도 넘어서였다. 그때 만난 친구네 집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남매의 막내였던 친구의 이야기 역시 내게 낯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둘째 누나를 서울에 있는 갈비집에 일하러 보내려 했다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누나는 박박 우겨서 전문대에 진학했지만, 나로서는 왜 그렇게 해야 했었는데? 라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처럼 삼십대 중반의 사람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요즘 아이는 낯설어 할 것이다. 그때는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고, 자가용을 가진 집도 거의 없었고, 아파트보다는 일반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를 쓰고 취학전 연령부터 영어공부니 뭐니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거의 없었고, 조기유학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갭이 더 크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의 나도 작가가 그려낸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낯선데,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동시대를 살던 사람의 이야기에 이렇게 놀라게 될 수 밖에 없을까.

그건 우리의 시야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의 틀 밖을 바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범한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자란 내가 서울 사람들이나 부자들의 삶을 모르듯, 시골 사람들의 생활이나 가난하게 살던 사람의 생활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낯설고 어찌 보면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는 선을 그어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바깥쪽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게 아닐까. 보이지만 보려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깡촌이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런 삶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는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의 한구석에서 여전히 이런 삶은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전통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도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물 마른 강바닥에서 소용도 없는 아가미를 꿈벅대는 물고기처럼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그들을 키웠던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어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고 이름 붙였다. (6p)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제껏 최규석 작가가 그린 작품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내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난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라고 이야기해도 그저 가난하게 살았다, 라는 말만으로는 그 이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라고 이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라는 호기심용으로도 이 작품을 그린 건 아니라 생각한다. 난 이 작품을 우리의 시야의 사각에 묻혀 쓸쓸하게 잊혀져가는 사람들을 기억해 달란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역지사지란 말을 가슴 속에 새겨도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감정적으로는 완벽하게 동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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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하면 왜 개, 고양이를 버릴까?
권지형.김보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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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부터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난 우리나라는 반려동물과 생활하는 가정도 많이 늘어났지만, 반대로 키우던 반려동물을 유기하는 가구도 많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개같은 경우 집 마당에 묶어 놓고 키웠다거나, 고양이의 경우 방목하는 형태로 많이 키웠지만,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늘다 보니 요즘은 집안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이렇게 집에서 키우던 반려동물들이 유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어릴때는 작다고 귀여워 하다가 크면서 귀엽지 않다고 버리는 경우, 데리고 올 때는 겉모습만 보고 데리고 와서 나중에 감당이 안된다고 버리는 경우, 늙어서 뒷치닥꺼리를 하기 싫다거나 죽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버리는 경우, 그리고 반려동물이 병이 들었을 때 구입한 금액보다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버리는 경우, 마당 딸린 집에서 살다가 혹은 재개발로 살던 집이 철거되면서 아파트나 다른 집으로 이사하면서 버리고 가는 경우 등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임신으로 반려동물을 버리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임신하면 왜 반려동물을 버리는 것일까. 아니, 임신이 아니라 이미 결혼할 때부터 키우던 반려동물을 정리하라고 주변에서 간섭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럼 그 이유는? 사실 그 이유란 건 황당하기 짝이 없다. 동물을 키우면 임신이 안된다거나, 동물은 균이 많고 더럽기 때문에 임부에게나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 더럽다, 라... 그건 집밖에서 관리도 안하고 키우는 경우에는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집안보다는 외부에 균이 더 많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집에서 키우는 경우의 반려동물은 정기적인 접종과 구충, 미용 등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집밖으로 나다니는 사람보다 더 깨끗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짐승'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꼬리표를 붙여 집밖으로 퇴출시킨다. 

이런 근거없는 편견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알러지의 원인도 반려동물, 아토피도 반려동물 때문에 생긴다고 하고, 반려동물에게 피부병이 옮는다느니, 기생충이 옮는다느니 하면서 요란을 떤다. 알러지나 아토피의 경우 원인이 아직 불명확한데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동물부터 치우라고 한다. 제대로 아는 의사라면 그런 말은 절대 못한다. 원인이 불명확하니까 욕을 먹기 싫어서 동물 핑계를 대는 것 뿐이다.

또한 몇 년 전에 개회충이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방송에서 엄청 떠들어 댔는데, 그것도 선정적인 방송에 불과했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에게 주기적인 구충을 해주고, 사람들도 봄가을로 구충제를 복용하면 기생충에 감염될 우려가 없다. 아니, 그전에 동물과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기생충이나 피부병이 거의 없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 요란한 방송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반려동물들이 버려졌다. 제대로 된 조사도 없고, 전문가의 이야기도 듣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방송. 그 방송 이후 정정 보도가 나갔지만 이미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한 이상 정정보도의 효과는 미미했다. 이런 게 우리 현실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나 임신과 더불어 유기동물이 발생하는 사례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소문, 원인불명의 모든 것을 반려동물 탓으로 떠넘기는 의사들, 그리고 사기방송을 하는 방송국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이 책은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조근조근 반박하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물론 임신과 육아에 관한 것도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은 반려동물과 임신과 출산의 관계에 있어서의 부당한 편견과 근거 없는 소문을 일축하고, 반려동물이 임신과 육아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책임감이다. 동물을 사람이 사랑을 주는 객체가 아닌 생명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하면 거기에는 생명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그래서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것'이라는 뜻의 '애완(愛玩)'이라는 단어를 멀리해야 한다. 생명은 사랑하다고 즐기다가 버릴 수 있는 '장난감(玩)'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p)

나 역시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보다 동물이 소중하다는 등의 말은 하지 못한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동물병원에서 근무할 때 13살 된 반려견을 안락사시켜달라고 하는 사람이 왔었다. 아내의 임신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개를 맡긴 후 돈을 지불하고 그냥 가버렸다. 그 개는 몇 시간후 처분되었다. (사실 여기서 안락사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늙었지만 건강한 개를 처분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키우던 생명을 내다버리는 것. 과연 그들은 태어날 새 생명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럴 거면, 처음부터 반려동물을 키우지 말았어야 한다.

반려동물 인구가 늘어나고, 반려동물 용품 매출이 급등한다고 해서 반려동물 문화가 잘 정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겉보기에 불과하다. 일단 반려동물을 맞아들이고 싶다면, 그 동물이 수명을 다 할 때까지 돌보는 책임감이 먼저이다. 그렇지 않고 그후 어떤 일에든 흔들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사람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유기된 동물들은 병이나 로드킬, 혹은 유기견구조센터에서 처분당하는 끔찍한 일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내가 버린 동물이 다른 곳에 가서 예쁨받고 살 거란 생각은 일단 하지 않는게 좋다. 물론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에는 재입양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동물의 수가 더 많다. 이 책을 통해 근거 없는 미신이나 주변의 압력과 간섭, 잘못된 보도나 의사들의 잘못된 진단으로 반려동물을 유기하는 것이 점차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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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オカミの血族 (バンブ-·コミックス 麗人セレクション) (コミック)
井上 佐藤 / 竹書房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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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애 딸린 늑대를 읽고, 9월에 オオカミの血族 를 샀건만,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벌써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혼남에 애까지 딸린 젊은 남자 둘의 육아일기와 사랑을 그린 애딸린 늑대를 보면서 어찌나 웃었던지... 당연히 속편인 オオカミの血族 에도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클수 밖에!

일단 표제작인 オオカミの血族과 オオカミの血族  最後の楽園은 애 딸린 늑대의 속편이다. 타도코로와 미야모토 두 사람 + 그들의 애가 세 명. (하나는 타도코로의 애, 둘은 미야모토의 애) 아이들은 쑥쑥 자라 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그때부터 자신들의 가족이 다른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앗쿤(타도코로의 아이)는 칫치(미야모토의 첫째 아들)을 좋아하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기 시작하고,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버린다. 그후 시간이 지나 칫치는 결혼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앗쿤은 논(미야모토의 둘째 아들)과 재회한다. 앗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싱글파파가 되었고, 논은 브라질에서 일을 하다 잠시 귀국한 상태. 어느새 자신의 키보다 훌쩍 커버린 논을 보면서 앗쿤은 칫치와 닮은 그 모습에 가슴이 쓰리다.  (애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냥 자기들끼리 부르는 애칭을 썼음)

사랑은 돌고 도는 것. 앗쿤은 칫치를 좋아했고, 논은 그런 앗쿤을 좋아하고 있었다, 랄까. 이런 설정은 너무나도 작위적인 듯 보여도 실제로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든다. 혼자 고민하는 앗쿤을 늘 지켜보던 논이 앗쿤을 위로해주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곳곳에 나오기 때문이다. 찡찡거리고 울다가도 아빠 코트 속에만 쏙 들어가면 울음을 뚝 그치던 앗쿤을 위해 논이 그 작은 몸으로 앗쿤을 품에 감싸 안아주려던 장면,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으로 앗쿤이 집을 나갈 때 코트를 건네주던 장면은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비록 칫치는 절대로 앗쿤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논은 아주 어릴적부터 앗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달까. 정말 좋아하니까, 알 수 있는 거다, 그건.

그후에 나오는 sweetie, gloria, gloria!는 아이돌 오타쿠 세리사와 정체불명의 숍 퍼브 오너의 만남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 아이자와 세리라는 프랑스 소녀를 좋아했던 츠마모토 마스미는 잘 나가는 세리사이지만 아내와 딸과도 잘 지내지 못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미조구치 줄리안 소이치로라는 숍 퍼브 오너와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근데 이 미조구치란 남자, 참 재미있는 캐릭터다.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란 것도 그렇지만, 말투가 여자들 말투랄까. (여기서는 오네라고 하두만) 하여간 나도 잘 쓰지 않는 아타시(나)란 표현을 쓰는 걸 보고 빵 터졌달까. 보통 남자는 보쿠나 오레라는 표현을 쓰는데, 와타시도 아니고 아타시라고!? (난 아타시란 표현이 혀짤배기 소리 같아서 안쓴다) 근데도 세메다. 푸하하하핫..

게다가 츠마모토도 무척이나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어린 시절 프랑스 소녀 세리에게 열광했던 그가 지금도 여전히 그 소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팬을 넘어 오타구 수준!? 사실 이 남자 논케에 고지식한 면도 있는데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정말 일편단심이랄까. 특히 미조구치가 그 세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와우. 미조구치가 구박을 해도 이용을 해도 못되게 굴어도 말이지. 역시 사람은 생긴 것만으로 판단하면 안되는 법. 중간에 막스라는 소이치로의 옛남자가 등장하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처음엔 소이치로를 보러 왔다가 츠마모토에 푹 빠져드는 막스의 감정변화도 유의해서 볼 것!

이노우에 사토는 뭐랄까, 뻔한 소재도 특별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는 작가다. 게다가 그의 섹시한 그림을 빼놓을 수 없지. 각 캐릭터도 정형화된 캐릭터라기 보다는 특별함이 느껴지고, 이야기도 근사하다. 남자 작가라서 남자들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일까. 하여간 무척 매력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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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5
아리카와 히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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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카와 히로의 작품은 몇년전, 『도서관 전쟁』이란 작품으로 처음 접했다. 물론 책으로 읽은 것은 아니었고, 애니메이션을 통한 것이었다. 그 동기는 - 좀 불순하지만 - 내가 좋아하는 성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그 불순한 동기 때문이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성우는 7, 8회에만 나왔다. 단역으로. 음, 그러니까 그 성우는 이노우에 마리도 아니고, 스즈키 타츠히사도 아니고, 이시다 아키라도 아니고, 오노 다이스케란 말씀. 어쨌거나 처음에는 언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면서 보다가 결국 스토리에 푹 빠져들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는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이다. 이 책을 받고 책 날개를 보기 전까지는 『도서관 전쟁』의 작가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 날개를 보고, 앗!하는 말만 했을뿐. 『도서관 전쟁』이 워낙 탄탄한 스토리를 가진 작품이었던지라 이 책에도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천천히 이야기하자, 급할 것 없다.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는 25세의 다케 세이지란 청년의 취업 성공기와 붕괴된 가족의 재생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세이지는 이류대학 문과대 졸업, 첫직장은 석달만에 때려치고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살아가는 청년이다. 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증 달랑 하나. 그런데도 뭐가 그리 잘났는지 금세 취업할 수 있을거란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요즘 청년답게(?) 끈기도 없고 열정도 없고, 아르바이트도 대충대충, 아버지는 무서워하면서도 어머니에게는 막 대하는 정말 못난 아들이다. 그렇게 몇년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병이었다.

다케 세이지의 취업 성공기를 보면 꿈같은 동화같다. 아무 능력없고 끈기없던 청년이 야간에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사무직 직원으로 발탁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잘 잡아가는 이야기니까. 풀려도 참 잘풀린다. 또한 취업이 어려울 경우 아버지의 소개라는 방법도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만 보면 정말 동화가 따로 없군, 이라는 말이 나올테지만, 이 책이 현실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다케 세이지가 이력서를 작성하고, 고용지원기관에서 홀대를 당하는 것을 보면 남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직장이든 취직만 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 나 정도야 취직 걱정 없지라는 오만한 생각, 언젠가는 취직되겠지, 라는 태만한 생각 등은 내 심장에 직격탄을 꽂았다. 어질어질하다. 물론 나야 사무직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긴 했고, 능력제로 월급을 받는 특수 직종이긴 했지만, 지금 재취업을 하라면 할 수 있을까. (한숨)

이 책은 이런 백수 청년의 취업성공기만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더 무게가 실린 것은 해체되고 붕괴된 가족이 화해와 이해의 과정을 거쳐 다시 한가족으로 태어나는 이야기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무심한 아들을 둔 어머니는 사실 동네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다. 그걸 이십년동안 혼자 삭여 오던 어머니가 드디어 그 한계에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결과가 어머니의 중증 우울증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기적인 성격답게 그건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핀잔이나 주고, 아들인 세이지 역시 처음에는 조금만 지나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살았는지, 그게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보통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는 무서워하고 엄마는 편하게 대한다. 여기서 편하다는 것은 만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서열로 따지고 보면 어머니는 가장 하위에 존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집도 있겠지만) 세이지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보니 가족들의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어머니의 몫이요, 동네에서 왕따 당하는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세이지의 어머니 몫이었다. 세이지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존재를 어느새인가 가장 만만한 존재로 치부하고 막 대했던 것을 반성하는 한편, 무서워서 늘 피해다녔던 아버지와의 화해도 시도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세이지의 못된 버릇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불쑥 옛날 버릇대로 엄마에게 욱하고 대들기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못된 녀석!)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나온 세이지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대하기 어려워하는 한편, 반발심도 함께 가지고 있다. 대화라고 해도 일상적인 것 몇 마디, 이렇다 보니 엄마의 병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시비가 붙을 수 밖에 없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둘 다 잘못한 거 투성이인데, 서로 비난하는 것은 세이지나 아버지나 똑같다. (내가 보기엔 둘 다 똥 묻은 개라구!) 어쨌거나 세이지는 엄마의 병수발을 들면서, 구직과 직장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기를 시도한다. 즉,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취업 성공 이야기와 가족의 화해와 재결합을 다룬 이 책은 한편으로는 동화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취업과 관련한 문제는 파도를 잘 타니 절로 배가 잘 가더라, 는 것처럼 무난했기에 좀 동화같은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전의 구직활동에 있어서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공감이 많이 갔었다. 그리고 역시 가슴 찡한 것은 가족의 화해와 이해, 재생이란 부분이었다. 사실 여기에서는 내 집 장만기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지만, 세이지가 3년간 마련한 돈은 집 계약금 정도이고, 나머지는 2세대대출로 충당한다. 그런데, 왜 내 집 장만기냐고?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집을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산 집은 해체된 가족의 재결합과 행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는 <프리터, 집을 사다>이다. 프리터란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일본의 젊은층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우리나라와는 아르바이트의 개념이 사뭇 다른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만 해도 - 평범한 아르바이트라도 - 한달에 2~300만원은 벌 수 있다. 이러니 굳이 취직을 하지 않고, 프리터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정규직이 아닌 이상 그정도로 벌지도 못하고, 늘 막대한 업무 스트레스와 해고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고용불안정, 얼어 붙은 취업시장, 20대 백수, 가족 붕괴와 같은 것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참으로 많이 닮아있다. 프리터 문제만 빼면. (세이지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 내고, 저금이 가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불가능!) 아, 하나 더. 일본은 버블 붕괴후 집값이 폭락했다. 물론 도쿄는 비싸지만, 그외에는 우리나라보다 집가격이 좀 저렴한 편이다. 우리는 세이지처럼 일해서는 절대 내 집 장만 못한다. 이렇듯 일본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차이점도 존재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세이지네 집 이야기가 바로 우리 집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리라. 또한 주인공과 주인공의 가족이 잘 되고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에게 작은 희망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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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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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을 살 때 누군가 써놓은 리뷰를 참고하는 일이 별로 없다. 또한 내가 어떤 책의 리뷰를 써야할 때도 다른 사람이 써 놓은 리뷰를 잘 읽지 않는다. 그건 내가 똑똑하기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보다 리뷰를 더 잘 쓰기 때문에도 아니다. 아직 책을 읽고 리뷰(혹은 독후감)을 쓴다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혹시라도 먼저 쓴 사람의 리뷰를 읽고 내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누군가의 생각을 모방하게 될까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 일기 빌린 책 / 산 책 / 버린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읽어본 저자의 책이다. 저자에게는 이미 여덟번째이지만...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자의 책이라곤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선 꽤 유명한 모양이지만, 난 유달리 독서 편식이 심한 편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큰 카테고리 네 개로 나뉘어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나름의 분류를 하고자 해봤지만 역시 무리인듯 싶어 그냥 마음속으로 이런이런 책에 관한 것이라고 대충 정의를 내려버렸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책들은 대부분 인문학도서이고, 문학은 거의 없다. 나처럼 문학 편식주의자 - 특히 장르문학- 에게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었달까. 물론 인문학도서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내 관심의 밖에 존재해왔다. 안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더 복잡해지긴 싫어, 라는 변명이었을까. 대학교때 역사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책 보는 걸 참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 이상의 변명거리가 없다. 

난 책을 주로 사서 읽는 편이다. 물론 어릴 때는 부모님이 사주신 책이나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때때로 설세뱃돈 같은 용돈으로 부모님이 사주시지 않을 책 - 이미 난 초등학교때부터 추리 소설 광팬이었다 - 을 사서 봤다. 아마 내 독서습관은 그때부터 이어진게 아닐까 싶다. 내 독서 습관 - 이라고 말하기엔 좀 부족하지만 - 은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읽는 것이다. 하루에 쏟아져 나오는 책은 너무나도 많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만 골라 읽어도 허덕허덕할 정도니까. 그래서 난 무겁고 딱딱한 책보다는 가볍고 잘 읽히는 소설류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 빨리 읽는 건 아니다. (시간당 약 200페이지) 그런 나의 소원은 속독이 가능한 정독이랄까. 좀 웃기지만 책 읽는 것에 있어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바로 그런 것이다. 

책을 빨리 읽고자 덤비는 사람은 효율과 생산이라는 현대적 방식의 삶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고, 느리게 읽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효율과 생산 너머의 무엇엔가 몰두하는 사람일 테다. (49p)

난 책을 빨리 읽고자 덤비는 사람 중의 하나이니 나는 효율과 생산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이 부분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난 이 말에 살짝 반박하고 싶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효율과 생산 너머의 무엇엔가 몰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다는 건 하루 중 몇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고, 그 몇 시간이면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출판사 서평이나 인터넷 뉴스의 책소개, 수많은 사람들의 독후감, 책 소개 티비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정말 효율과 생산성을 따지자면 그런 것만 훑어 보고 나 저 책 읽었네, 라고 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저 나의 생각이다. (금방 꼬리 내리는 1人)  

물론 이 경우에는 다치바나 다카시같은 사람의 경우를 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300쪽 책을 5분에서 10분 사이에 읽어내는 사람, 그리고 문학 작품을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이다. 정말 가히 놀라운 속도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정보를 얻기 위해 그리 읽는 사람이니 위에 언급한 문장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은 바로 이런 경우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나처럼 책욕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엔 약간 찔리긴 한다. 때로 너무 욕심내서 무리해서 읽다가 나중에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하는 것도 다 까먹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 중의 하나는 인쇄 문화와 책 문화란 것이었다. 난 대부분의 책은 선하다고 믿는다. 어른들 책이든 아이 책이든 만화든 잡지 등 자신의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어떤' 책을 읽다가 뭐 이딴 게 다있어, 라고 분노하면서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많다. 게다가 베스트셀러는 출판사의 상술이요, 그것보다는 그래도 스테디셀러가 낫지 않나 하는 소극적이고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들이 감동받았다라는 책을 구해서 읽으면서 때로는 나와 맞지 않아 - 실은 뭐 이딴 책으로 감동을 받았다는 거야- ,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리뷰를 쓸 때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해서 쓰기도 한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안티책 소위 잘 나가는 작가의 '찌라시'라는 표현에 푸핫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런 표현은 역시 나같은 하수는 절대 쓰지 못할 표현이고, 금기시되는 표현이지만 이렇게 씌어진 걸 보니 통쾌하달까.

또다른 공감은 헌책방과 문고판 서적에 대한 내용에 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다 보니 책 자체보다는 책 문화란 것에 더 흥미를 느끼고 이 책을 읽었다는 티가 나긴 하지만 하여간 난 그렇다. 난 새책을 주로 사서 읽는다. 일단 질러보고 좋아하는 타입인 것이다. 도서관에 가려니 귀찮고, 다른 사람 리뷰는 읽지도 않고, 그렇다보니 늘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만 골라 본다. 하지만 때로는 인터넷 중고서점을 뒤지다 꽤 괜찮은 물건을 건지기도 한다. 일단 가격이 저렴해서 좋고, 절판된 책을 찾을 수 있어서 좋으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게 바로 중고서적의 매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사는 도시에는 중고서점이란 이젠 찾아볼 수 없다. 그냥 서점도 축소되고 없어지는 판에 중고서점이 있을턱이 없지. 그래서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 참 부럽다.

글을 숭앙했던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책은 사용가치만 아니라 만만찮은 상징가치를 가진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본말이 전도되어 정작 책의 내용이 거론되거나 독서가 행해지기보다도, 그저 책의 물성을 물신처럼 숭배하는 가식도 생겨났다. 양장과 금박으로 치장된 전집물 시장은 바로 그런 유교적 과시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 그런데 재미난 것은, 맥락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많은 고명한 지식인들도 문고를 가리켜 '지식의 인스턴트화' 내지는 '교양의 규격화'라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276p)

문고판 서적은 나도 무척이나 원하는 바다. 요즘 책은 너무 크고 무겁다. 게다가 무슨 종이질이 그렇게 좋은지... 가끔 영미원서(페이퍼백)나 일본원서(문고)를 사보면 종이질의 차이, 그리고 크기의 차이에서 놀란다. 일본에서 나오는 문고판은 가격도 저렴하고 얆고 가볍다. 일본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그건 문고판이 많이 나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단행본이 나온 후 약 3년후에 문고판 서적이 나온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출판사들도 요즘 사람들은 책을 너무 안읽는다 소리를 하기보다는 문고판 서적으로 승부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 사실 도감같은 책이 아니라면 책이 굳이 양장본일 필요가 있을까. (소장용이라면 몰라도)

이 책은 흥미로운 점이 무척이나 많았다. 저자의 역사 인식이나, 책 문화에 대한 의견과 비판 -특히 다른 작가들에 대한 가감없는 의견 - 등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 책에는 솔직함, 진지함, 유머러스함 그리고 시니컬함이 공존한다.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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