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 : 바닷마을 다이어리 1 바닷마을 다이어리 1
요시다 아키미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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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시를 읽었다. (그래 봤자 아직 2권밖에 못읽었지만) 미국을 무대로 바나나 피시라는 수수께끼의 존재를 뒤쫓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바나나 피시는 뒷세계를 무대로 하는 만큼 거칠고 난폭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런 이야기를 읽은 후에 접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정말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함께. 사실 작화야 작가가 활동을 계속하면서 달라지는 경우는 많지만, 이야기 자체가 이렇게 다른 느낌을 주게 만든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카마쿠라를 무대로 한 네 자매 이야기이다. 첫째 언니 사치는 간호사로 똑부러지고 반듯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딱딱한 사람처럼 보이기는 해도 속은 다정한 사람이다. 둘째 요시노는 마을 금고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원하고 화통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고, 남자들과 툭하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지난번에는 호스트에게 잘못 걸려서 된통 당하기도 했다. 셋째인 치카는 스포츠 용품점 직원으로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 사귀는 사람은 스포츠 용품점 사장으로 둘은 커플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일명 뽀글이 커플) 넷째인 스즈는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아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세자매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만난 스즈는 중학생답지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는 아이이다.

1권에는 총 세 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이자 첫번째 에피소드인 <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은 사치, 요시노, 치카가 재혼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스즈를 만나는 내용이다. 15년전 어머니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 둘째인 요시노는 너무 오래전에 자신들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에 그다지 감흥이 없어 보이고, 셋째 치카는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아버지라 아버지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 하다. 맏언니 사치는 아무래도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은 만큼 자신들을 떠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상태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이들 자매는 자신들이 모르는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첫째인 사치와 꼭닮은 스즈를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스즈와의 만남을 통한 재생의 이야기이다. 스즈와 세자매의 첫만남은 어색했지만, 사치가 유난히 어른스러운 스즈를 다독거리던 순간 터져버린 스즈의 울음을 보면서 나도 괜시리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뻔 했다. 또한 기차역에서의 사치의 제안과 스즈의 대답, 그리고 기차가 출발해 버리는 바람에 급하게 쓴 메모를 들어 보이는 자매들의 모습에 가슴 속이 따스해져 왔다.

두번째 에피소드인 <사스케의 여우>는 둘째 요시노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고 뻥을 친 요시노와 대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한 토모아키. 결국 둘은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인다고 슬픔이 없는 건 아니다. 가슴 아파하는 요시노를 보면서 꼭 안아주며 다독거려주고 싶었달까. 늘 명랑 쾌활한 요시노의 모습을 보다가 이런 요시노를 보니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세번째 에피소드인 <니카이도의 도깨비>는 스즈와 스즈가 가입한 축구부의 이야기이다. 병으로 수술을 받고 장기 입원을 하게된 축구부 주장과 새로이 축구부 주장을 맡게 된 아이, 그리고 스즈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어린 나이에 큰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전 축구부 주장 유야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런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에피소드를 너무 무겁지 않게 따스한 눈길로 묘사하고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1권『매미 울음소리 그칠 무렵』의 세가지 에피소드는 죽음과 상실, 사랑과 이별, 아픔과 절망을 담고 있는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재생과 새로운 출발, 희망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때로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감동을 안겨주면서도 때로는 깔깔깔하고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절묘한 스토리 전개는 정말 최고였다. 또한 각각 캐릭터들도 너무 튀거나 정형화된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충분히 존재할 만한 그런 캐릭터들로 이루어져 있어 카마쿠라에 가면 이들 자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따스하고 포근한 카마쿠라 네자매 이야기, 다음 이야기도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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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뚜르 -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0
한윤섭 지음, 김진화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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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면 자신과 비슷한 것을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이것은 해외로 나갈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방이 고향인 사람이 서울에서 살게 되었을 때, 우연히 동향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도 반갑게 여긴다. 나도 경상도 사람인지라 한동안 서울 경기 쪽에서 살때 나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 - 여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사투리 - 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다. 같은 나라에서도 그런데 해외에서는 오죽할까. 여행을 가서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이 반갑고, 한국 음식점이 반가운데, 그곳에서 살게 되었을 때는 비록 한국인이 아니라 같은 동양인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봉주도 마찬가지이다. 파리에 살다 뚜르로 이사온 봉주는 이사 첫날 책상 한 켠에 씌어진 한국어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움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씌어진 글귀가 너무나도 비장해 그 글을 쓴 게 누군지 궁금해진다. 집주인인 듀랑 할아버지에게 물어 봐도 그곳에는 한국인이 산 적이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그 글을 남긴 걸까. 봉주는 그 글을 쓴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 먹는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같은 반에 동양인 아이가 있다. 봉주는 그 아이가 한국인이고 아니고를 떠나 같은 동양인이란 자체로 반가움을 느끼게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은 토시, 일본인이다. 봉주는 토시와 친해지고 싶지만 의외로 토시는 봉주를 껄끄럽게 대한다. 게다가 한국의 역사를 발표하는 수업 시간에 토시는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봉주에게 시비를 걸 듯 질문을 던진다. 토시는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봉주는 프랑스에서 3년을 살았지만 자신이 한국인이란 것을 결코 잊지 않으며, 프랑스보다 한국을 더 좋아한다. 요즘처럼 금세 외국 생활에 물들어 바뀌어 가는 아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건 봉주가 처음 토시를 봤을 때 노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보면서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이는 건 정말 유럽이라는 염색약 속으로 뛰어 드는 느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엄마와 산책을 하면서 '이제는 한강이 더 좋다고 할 나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 보니 봉주는 토시에 대해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질감을 함께 느낀다.

토시와 친해지려 노력을 하는 한편, 그 글을 쓴 한국인을 찾고 있을 때, 때마침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준원이 뚜르에 놀러 오게 되고, 봉주는 책상 한 켠에 씌어진 글귀에 대해 준원에게 이야기를 한다. 호기심이 생긴 준원은 봉주와 함께 수수께끼 풀이에 나선다. 둘이서 우연히 들른 아랍인 가게에서 들은 묘한 이야기. 점원은 일본인 가족이라 이야기하지만 주인 아저씨는 한국어를 쓰는 가족 이야기를 한다. 또한 듀랑 할아버지는 봉주네 가족이 살기 전에 살던 일본인 가족이 여전히 뚜르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조금씩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보이고, 준원과 봉주는 수수께끼의 중심으로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봉주의 호기심은 의외로 큰 난관과 부딪힌다. 바로 자신이 호기심이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봉주가 찾던 글의 주인과 자신의 집에 살던 일본인 가족, 그리고 토시의 가족이 전부 같은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토시의 가족은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어를 쓰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원래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다. 토시의 가족은 일본에서 프랑스로 온 후 반쯤 숨어지내는 도피 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일본인처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봉주는 토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선족이 사는 나라쯤으로 생각한다. 북한이라고 하면 알지만 원래의 국명은 알지 못한 것이다. 봉주는 이제껏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 핵무기, 가난 등의 이미지밖에 없었지만, 토시가 북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북한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어른이었다면 이런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예 처음부터 글귀 따위엔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글을 쓴 한국인을 찾을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만약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북한 사람이라면 아예 모른척을 했을 수도 있다.

난 삼십대 중반이다. 그럼에도 난 내 조국이 분단 국가란 것을 느낄 때는 일상에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몇 십주년 기념 방송이나 뉴스에서 나오는 북한 문제가 거론될 때야 비로소 우리나라는 분단국가였지, 라고 생각할 뿐이다. 하나의 국가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생겨난 이산가족과 그 시절을 살아왔던 사람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세대는 이제 점점 줄어들어 앞으로 일이십년만 지나면 그들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머릿속으로는 분단국가란 것을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것이 원래 그랬다는 듯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봉주같이 어린 아이들은 오죽할까.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원래 하나의 국가요, 하나의 민족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지도 모른다. 

봉주 역시 토시를 만나지 못했다면 북한에 대해, 그리고 현실의 분단 상황이란 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주는 토시를 만났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이 아이들을 갈라 놓는 계기가 된다. 아이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할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둘은 이미 친구가 되었는데, 동무가 되었는데... 비록 다시는 못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공기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아동문학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분단 문제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봉주에게 있어 한반도의 분단은 과거의 역사적인 일이고 자신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북한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토시를 만남으로 해서 분단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이고, 그런 문제는 언제든 맞딱드릴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프랑스 사회의 이민자 문제나 유럽인이 동양인을 대하는 시각에 대한 것도 간간히 드러난다. 특히 일단 동양인이라면 무조건 일본인이라 생각하는 것, 잘사는 사람은 일본인 못사는 사람은 중국인이라 생각하는 것, 한국인은 중국어를 쓴다는 생각 등은 유럽에서 한국이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뚜르에 이사온 봉주가 자신의 방 책상 한 켠에 씌어진 글귀를 쓴 사람이 누군지를 밝혀 가는 추리적 요소가 흥미를 더하는『봉주르, 뚜르』는  한국의 분단 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아픔을 겪는 것은 분단으로 생겨난 이산 가족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분단이란 것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1980년대 중후반이었는데, 학교에서는 반공 영화를 감상했고, 아이들이 산에 떨어진 불온 삐라를 주워오면 상으로 공책을 줬고, 반공 글짓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간첩신고는 ○○○이라는 글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평화의 댐 모금운동도 열렸었다. 참 날카로운 세상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북한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북한과의 관계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그들은 낯설고 먼 존재이다. 이 책은 그런 낯섦을 많이 희석시켜주고 있으며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 국가의 아픔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은 남한 아이과 북한 아이의 만남과 우정이란 이야기를 통해 우리 마음 속으로 한결 부드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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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상문학 단편선 Miracle 2
김재한 외 지음, 김봉석 해설 / 시작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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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이라고 하면 누구나 먼저 판타지 소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마법사와 드래곤등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던지라, 그런 것을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환상문학은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범위보다 더 넓게 정의되고 있다. 결국 환상문학의 범주 속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물, 미스터리, SF 등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책이 환상문학 단편선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된다.

첫번째 작품인 상아처녀는 실험으로 태어난 유사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유사인간은 복제인간과는 다른 의미이며, 아직은 실험실 밖으로 반출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실험실의 한 남자가 이 유사인간 갈라테이아를 데리고 탈출한다. 처음으로 실험실밖으로 나온 갈라테이아는 남자가 말하는 사랑이란 따스한 온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남자가 점점 변해감을 느끼는데... 처음에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도 나오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결국 인간이란 자신과 다른 존재는 다른 존재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어 씁쓸한 기분이 남았다.

카나리아는 제목은 참 예쁜데, 내용은 좀 무시무시했달까. 일단 뱀파이어이야기란 것은 말해 둘까나. 평소에는 평범한 여성이지만, 때로 불쑥 솟아오르는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재영은 어느 날 한 여성을 살해하고 만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뱀파이어 동규. 그는 재영을 뱀파이어로 만들어 함께 살아간다. 뱀파이어가 된 재영은 평소에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조차 없지만 살육의 시간이 돌아오면 말그대로 미쳐날뛴다. 인간이었어도 뱀파이어가 되었어도 결국 변함없는 재영을 보면서, 인간이란 그 어떤 존재가 되어도 자신의 본성을 바꿀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늘 자신이 한 선택에 후회하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우리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용의 비늘은 순수 판타지이다. 왜냐고 묻는다면,용이 나오니까? 우투족의 왕녀 레첸은 탄생부터 다른 형제자매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렇다 보니 늘 따돌려지는 존재였으며, 결코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게 내려진 명령은 용의 비늘을 구해오라는 것. 레첸은 용의 비늘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레첸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그 여행을 통해 알게 된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듯, 이란 표현이 잘 어울릴지도. 판타지 소설은 일종의 성장 소설이며, 늘 등한시되었던 존재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윈드 드리머는 인류 최초의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림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비공정은 비행기보다는 비행선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릴지도. 하늘을 나는 것은 인간들의 오랜 욕망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가 수도 없이 많지만,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만들기 전까지는 감히 인간이 하늘을 날아 멀리 여행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일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비공정은 비행석이라는 마법석을 연료로 하고 있다. 귀한 비행석을 차지하기 위해 비공정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황족의 혈족인 아시타르는 마법석이 아닌 순수 바람의 힘을 이용한 비공정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욕망이 만들어낸 처음의 비공정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갔다면, 아시타르가 만든 비공정은 인간의 순수한 소망을 담고 있는 비공정이었다. 그건 바로 '자유'라는 이름이었다.

사육은 카나리와와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카나리아는 뱀파이어, 사육은 흡혈귀. 카나리아의 뱀파이어가 강자로서 존재했다면 흡혈귀는 약자로 존재한다. 낮에는 돌아다닐 수도 없고, 밤에도 낮처럼 훤하니 사냥도 힘들다. 게다가 흡혈귀 사냥꾼의 존재로 인해 늘 도망을 다녀야 하는 입장이다. 포식자에서 피식자로 전락한 흡혈귀의 이야기. 분명 드라큘라 이야기나 여타의 뱀파이어 이미지처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사고의 전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달까.

목소리는 여기에 실린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요괴의 저주로 태어날 때부터 뱀의 혀를 가지고 태어난 원이라는 소년. 그는 집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늙은 쥐를 만나 자신에게 어떤 저주가 내려졌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를 풀기위해 뱀요괴를 찾아가게 된다. 작품의 배경은 중국이지만 요괴의 저주라든지 이런 것은 우리나라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아니, 일본의 요괴 이야기에도 이런 모티브를 가진게 존재하니 동양적 모티브라 봐도 좋을 듯하다) 이형적 존재의 탄생과 따돌림,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직접 풀고 결국 선인이 되어 이세상과 이별한다는 이야기는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이며, 가장 동양적인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바란 단 하나의 행복은 마법사의 저주로 행불행을 나눠지게 된 두 친구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행복해지면 다른 한사람은 불행해지리라. 사랑했던 여인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관직에서도 좌천되어 국경 근처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는 한 남자와 그 남자의 여인과 결혼해 성을 하사받고 떵떵거리면서 사는 친구. 어떻게 봐도 전자가 불행, 후자가 행복이란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역시 이 작품도 반전이 숨어 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며,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달까.

세계는 도둑맞았다는 판타지 + SF 작품이다. 왠지 두가지가 잘 안어울릴 것 같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 마법사와 악마군단과의 싸움은 판타지풍이지만, 마법사들이 가져온 신기술과 평행우주이론의 결합은 SF느낌이 풀풀 난다. 똑같은 지구, 지구인이지만 그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 신인류의 등장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또한 휘지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넘기고 선택한 것은 거대한 파괴의 흔적인 폐허 위로 움트고 나오는 여린 싹처럼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고 할까.

마지막 단편인 과거로부터의 편지는 산장을 소재로 하고 있다. 등산을 갔다가 폭우에 길을 잃고 헤매던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산장의 불빛을 보고 그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낡을 대로 낡은 산장.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괴이한 사람은 두 사람을 산장밖으로 쫓아내려 한다. 우리 주변에는 산장을 소재로 한 이런 공포물이 꽤 많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몇 편은 댈 수 있다) 산장이 공포물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깊은 산속의 아무도 없는 산장은 말 그대로 밀실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살아 남은 자만이 알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이 산장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또다른 산장으로부터의 초대장이 도착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한사람 정도만 살아남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산장의 희생자가 또다른 가해자가 되어 희생자를 찾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초자연적인 존재인 뱀파이어나 흡혈귀, 마법사, 용, 요괴, 악마의 등장, 그리고 마법과 과학 기술, 혹은 그 두가지의 결함 등 이 단편선에 실린 작품 9편은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다. 물론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긴 하지만(즉, 스토리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나, 정형화된 캐릭터), 우리나라의 장르문학이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것을 감안한다면 꽤 만족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환상문학은 서구문학의 지배를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앞으로는 동양적인 모티브의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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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3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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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작가 미쓰다 신조. 도조 겐야 시리즈 3권인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을 서점에서 만났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아, 그렇다고 내가 다른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다) 흥미를 유발하는 책 제목을 보면서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책을 배송받아 보니 책 표지가 기묘하게 접혀있었다. 부시럭대면서 일단 책 표지를 촥 펼쳤다. 헉! 기괴하면서도 아름답다! 안쪽 표지에는 우물이 바깥쪽 표지에는 붉은 기모노를 입은 소녀와 먼 곳을 응시하는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섬뜩하다기 보다는 아름다웠달까. 

책내용이 견딜 수 없게 궁금해진 나는 얼른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꽤 두꺼운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그정도로 흡인력 있는 작품이랄까. 특히 마지막 부분의 몰아치는 반전의 반전, 반전, 반전...... 은 정신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페이지의 <서재의 시체> 4월 호 표지까지. 정말 만족스러웠달까. 물론 약간의 의문은 좀 남았지만 말이다. 

일단 소설의 구성은 히메노모리 묘겐이라는 여성 추리작가가 쓴 원고를 바탕으로 도조 겐야란 방랑 환상소설가가 엮고 재구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소설은 당시 사건 담당 경찰인 다카야시키와 이치가미가에서 일하던 하인인 요키타카라는 소년을 각각 중심 인물로 세워 서술된다. 그러나 시점은 모두 3인칭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 2차 세계대전중에서 시작하여 그후 약 30년간이다. 지역은 간토의 오쿠타마의 히메카미 마을로 그곳에는 히가미 일족이라는 구가(舊家)가 있었다. 그 히가미 일족에게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의 중심이 된다.
 
30년전 십삼야의 의식이 있던 날 밤, 이치가미가의 후계자인 조주로의 쌍둥이 여동생이 우물에서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그 사건은 히메쿠비산이라는 완벽한 밀실 상태의 공간에서 벌어졌고, 사건은 해결은 커녕 용의자조차 추리지 못했다. 그후 10년이 지나 이십삼야가 지나 조주로의 신부를 정하는 날, 신부 후보 한 명과 조주로가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또다시 후타미가의 고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발견되는데... 이 사건은 사람이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아오쿠비님의 지벌인 것일까.

언뜻 보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육지에서 먼 섬을 다스리는 일족간에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 게다가 거기에 신비스러운 요소까지 결합되는 것도 비슷하다.『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는 역사적 인물인 아오히메와 오엔님을 합쳐 아오쿠비로 부르는데, 이들은 히가미가를 수호하는 존재인 동시에 지벌을 내리는 존재이다. 특히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병약해서 일찍 죽거나 사고사를 당하는 일이 잦아 히가미가 내에서는 삼야라는 의식을 십년마다 치르고 있다. 히가미가의 일족은 이치가미, 후타가미, 미카미가로 나뉘어져 있으며 후계자를 내는 집안이 이치가미가 된다. 따라서 집안간에 자신의 집에서 서로 후계자를 내놓으려는 암투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여아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고 남아를 중심으로 집안이 돌아간다. (구가의 습성!)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 다른 점이라면,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것은 세 그룹이다. 첫번째 그룹은 경찰, 두번째는 에가와 란코라는 탐정 소설가, 그리고 세번째가 도조 겐야라는 방랑 환상소설가이다. 한 사람과 다수라는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경찰들의 토론, 탐정 소설가 에가와 란코의 추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못을 박은 - 그러나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 도조 겐야의 추리까지 이어지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흐름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그 진상을 밝혀가는 시기는 거의 10년을 주기로 한다)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범행 동기는 무엇인지, 트릭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는 추리소설 마니아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열심히 추리를 했다. 내가 알아낸 것은 딱 두가지. 그외는 다 틀렸다. 특히 마지막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부문에서는 책 내용을 따라가기만도 벅찼달까. 하지만 내 경우 추리 소설을 즐기는 입장이니 내 생각이 맞든 틀리든 간에 스토리가 재미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족 간의 후계자 싸움, 가문의 관습과 인습 그리고 지벌을 내리는 존재인 아오쿠비 전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엮여 그 재미를 더한다. 특히 이 작품의 트릭은 서술 트릭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정보는 넘치지만 유의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뭐가 뭔지, 라는 느낌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머리 없는 시체를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이상의 언급은 않겠지만, 머리란 것에 모든 비밀이 다 있다고 할까. 특히 에가와 란코가 정리한 머리 없는 시체를 분류하는 11가지 방법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중간에 갑자기 '심야의 목찢는 살인마'가 등장해서 미친듯이 살인을 저지르는 사건이 나오는데, 그게 왜 필요한 건지는 잘모르겠다. 아마도 독자에게 혼선을 주거나,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기 위해 그 내용이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어린 요시타카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나, '심야의 목찢는 살인마'를 찾아온 손님의 정체도 결국 드러나지 않았으니, 정말 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히가미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일단 첫 사건 발생으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에야 히메노모리 묘겐과 도조 겐야의 대화에서 그 전말이 다 밝혀진다. 특히 도조 겐야가 사건의 모든 수수께끼와 문제를 일괄적으로 정리한 다음 차근차근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여기에서 폭풍반전이 등장. 그리고 세가지의 신문 기사와 마지막 페이지의 잡지 표지의 글도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어야 그 나머지 수수께끼도 풀린다. 이건 독자 몫으로 남겨준 작가의 배려랄까. (笑)

정말 멋진 추리 소설을 만났다. 앞으로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전부 만나보고 싶다면 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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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다 햄버튼의 겨울 - 제15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김유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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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인생을 살아 가면서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과 만나 죽음과 동시에 세상과 이별한다. 사람이나 그밖의 존재와의 만남과 이별 중에는 따스하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아프고 쓰라린 것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아파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고 꼭 죽을 것만 같았던 만남과 이별도 있을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히고 퇴색되어 그저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을 수도 있다.

책의 주인공은 스물 여섯의 청년 K이다. 그는 쿨하고 모던한 부모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얼마전까지는 수입은 많지 않지만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S란 여성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S는 알 수 없는 이야기만을 남기고 K를 훌쩍 떠나 버린다. 갑작스런 이별통보에 K는 직장을 그만 두고, 몇 달을 폐인처럼 살아간다. 그때 찾아온 고양이 한 마리. 아주 익숙한 듯 베란다로 들어온 고양이는 사라다 햄버튼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녀석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녀석은 단지 잘생긴 도둑고양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사라다 햄버튼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비로서 녀석은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14p)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남들과 구별되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이름이 그 사람 자체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K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건, 자신의 마음 한 켠을 내어준다는 인증이나 마찬가지이다. 

K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전에 캐나다에서 재혼했다. K의 아버지는 친아버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K의 아버지이다.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는 하지만, 정은 그보다 더 진하달까. K가 사라다 햄버튼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도 아마 정이란 것 때문이었으리라.

K는 평범한 이 시대 청년이다. 취업이 잘되는 학과로 진학했었고, 그렇게 취직했다. 사랑을 했고, 이별도 했다. 그 이별의 아픔이 너무나도 커 방황도 했다. 자주 가는 가게의 R이란 여대생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K는 누군가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곁을 잘 내어줄 줄을 몰랐다. S에게도 마찬가지이고, R에게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깨닫지 못했고, 나중이 되어서야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그건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가까운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우리는 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에게 더 무심할까. 그건 아마도 언제나 그자리에 있을거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의 관계는 쉽사리 깨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신경을 더 많이 쓰고, 가족은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변함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가족과는 가장 아픈 형태로 이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이라는...

K는 일시 귀국한 아버지와 재혼한 아내 나타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며 가족의 의미에 대해 조금씩 깨달아 간다. 자신이 몰랐던 부모님의 과거의 모습은 자신과 어쩌면 무척이나 닮아있었으리라. 우리는 부모님의 존재를 인식할 나이가 되면서부터 그저 부모님이란 존재만으로 인식한다. 자신처럼 어린 시절도, 학창시절도, 사랑에 애태우던 시절도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이야기를 들으면 낯설다. K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친부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듣지 못하는 이상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K와 S의 이별, 그리고 사라다 햄버튼의 출현,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비밀스런 이야기는 K의 부모와 친부 사이의 이야기만큼이나 비밀스럽다. 하지만 여기에서 부모님 세대의 비밀은 밝혀지지만, S와 사라다 햄버튼, 그리고 사라다 햄버튼의 반려인인 PK의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진다. K는 S가 그 대답을 해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고, 독자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게 결말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별의 이유란 것은 우리 생각보다 덜 중요하기 때문이고, 이별은 인생에 있어서의 순환의 한 과정이기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새로운 만남과 새로 걸어 가야 할 길에 더 집중해야 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이별은 과거이고 폐쇄된 길인 반면, 새로운 만남과 미래는 열린 길이니까. 그렇다고 과거를 싹 무시하고 살라는 것은 아니다. 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을 그만두란 이야기이다. 과거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의 일, 사랑과 이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 인생과 사람과의 관계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고 있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에 때로는 괴로울 수도 있겠지만, 삶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들 것 같아도, 더 이상 이런 인연은 없을 것 같아도 그 때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 큰 고비는 몇 변이나 찾아 온다. 때로는 한번에 몰려서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그 다음에 찾아올 행복이 더 소중하고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K는 자신의 틀안에 갇혀 자신의 세상 바깥쪽은 살펴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 그가 바깥으로 눈을 돌린 순간, 그 밖에는 더 큰 세상이 열려 있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드러나는 모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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