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의 소리 - 이와아키 히토시 단편집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애니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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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처음『기생수』를 읽었을 때의 놀라움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놀라웠던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이와아키 히로키의 초기 단편집을 만나게 되었다.『기생수』의 감각을 떠올린고 이 책을 읽는다면 분명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쓰레기의 바다>는 바닷가에 위치한 자살바위와 그 자살바위에서 떨어진 사람의 사체를 수습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맑고 깨끗하고 푸른 바다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며 자살하는 사람은 대개 바다에 떨어지지 못하고 바위에 부딪혀 죽는다. 그 사체를 매일 수습하며 다시 깨끗한 바다를 만드려는 소녀의 마음은 이미 황폐해져 있다. 시간이 지난 후, 그 소녀가 동경하던 도시의 빌딩위에서 본 도시의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한 바다였다. 아무리 치워도 깨끗해질 수 없는, 누군가 쓰레기를 보태도 더 더러워질 것도 없는 그런 바다였다.   

<미완>은 자신의 몸을 단순한 고깃덩이리라 여기는 한 여대생과 그녀의 조각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이야기이다. 이 여대생은 낙태 수술을 잘못 받아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룬다. 마치 생명을 잃어버린 고깃덩어리처럼. 이런 그녀의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는 그녀의 아픔과 진실을 꿰뚫어 보게 된다. 그후 그가 만든 건, 살아 숨쉬는 듯한 조각이었다. 어쩌면 그 조각으로 그녀는 치유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학생의 난입으로 조각상은 부서져 버린다. 사랑한다면서 그녀를 다시 한 번 망가뜨리는 그 남학생의 모습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몸에만 관심이 있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바 없었다. 그런 일을 겪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란 걸 확인받았기 때문인지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생기없는 그녀의 몸과 눈에서 생기를 찾아낸 조각가가 돌에서 또다른 생명을 찾기 위해 돌을 쪼는 것처럼.

<살인의 꿈>은 누군가의 살인 현장을 꿈에서 목격하는 하라다와 하라다의 친구 마유미의 이야기이다. 마유미는 하라다의 꿈 이야기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지만, 하라다의 입장에선 그게 달갑지 않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그 현장이 너무 생생했고,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기까지 하니까. 하라다는 결국 마유미에게 화를 내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살인마의 마수는 마유미에게까지 뻗어 왔다. 마유미의 죽음 이후, 연쇄 살인범은 하라다를 노리게 되는데... 단편이라 살인범이 어떻게 죗가를 치르는가에 대한 부분이 너무 급하게 마무리되지만, 그후 하라다가 꿈에서 본 장면은 더이상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아니었다. 마유미가 죽은 자의 세상에서 보여준 밝은 빛으로 가득한 세상은 하라다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줄 것이다.
 
<반지의 날>은 평범한 가족 가운데에서 유난히 튀는 존재인 불량한 여동생 히로코의 이야기이다. 언니 유미는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이런 히로코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히로코는 언니에 대한 반발심에 언니가 받은 반지를 가지고 집을 나가버린다. 그저 하루만 즐겁게 보내고자 한 것이었는데, 강에 빠진 개를 구해주다 그만 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리 찾아도 반지는 보이지 않고... 히로코는 사실 언니를 미워하는 것도 가족을 멀리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지 못해 심술을 내는 것 뿐이다. 히로코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떠올린 가족들의 모습은 히로코가 지키고 싶은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와다야마>는 고교동창회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고교 시절의 문제아 와다야마만 불참한 상태이다. 고교시절의 와다야마는 덩치도 크고 늘 잠만 잤지만 스위치기 들어가면 매직을 들고 사람들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통에 곤란을 겪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와다야마의 불참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 갑자기 흉흉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와다야마의 장난이 부활한다.

표제작인 <뼈의 소리>는 미술을 전공하는 한 여학생과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학생의 이야기이다. 카오리는 늘 혼자 다니며 뼈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카무라는 그녀의 눈빛이 섬뜩하면서도 자꾸만 끌리게 된다. 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의 자살이후 이상하게 변해버렸다는 그녀는 눈에 생기가 없다. 어쩌면 뼈 그림에 집착하는 이유도,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불량한 남자를 사귀는 것도 그런 것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앞에 나온 <미완>의 여학생과 비슷하다. 둘다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완>에서는 조각가가 여학생의 삶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면, <뼈의 소리>에서는 나카무라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황량한 벌판에 있는 두개골 그림에 털이 포실포실한 강아지 그림이 덧붙여진 건 아마도 그런 이유때문이겠지.

6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또다른 타인에 의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기도 한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선 파괴적인 존재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다른 이를 치유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기도 한다. 파괴적인 인간이 되든지, 치유의 존재가 되든지. 결국 그건 본인에게 달려 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작가가 너무 많은 것을 숨겨 놓고 보여주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고, 자꾸만『기생수』와 비교하다 보니 재미가 없게만 느껴졌다. 또한 단편이 6편이나 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급박하게 전개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작가가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은 부분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짚어가다 보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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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을 발로 찬 소녀 1 밀레니엄 (뿔) 3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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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뒷세계에서 은밀히 일어나던 여성 인신매매, 마약거래, 불법 무기 거래 등과 관련된 인물이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아버지 살라첸코란 사실이 드러났다. 리스베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살라첸코가 어머니에게 가한 폭행의 정도가 심해지자 결국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화염병을 던지지만 살레첸코는 살아났다. 그후 리스베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에는 후견인의 감시하에서 생활해야 했다. 아버지 살라첸코는 구소련의 첩보원 출신으로 스웨덴 정부에 기밀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모든 자유를 누렸지만, 정작 리스베트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은 오히려 스웨덴 정부의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여성인신매매에 대해 조사하던 두 사람이 살해된 엔셰데 사건을 비롯해 리스베트의 후견인 비우르만 살해사건의 3중 연쇄살인 용의자가 된 리스베트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악' 즉, 아버지 살라첸코에 맞서기로 한다. 그리고 살라첸코가 은신하고 있는 시골집을 찾아가 결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리스베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또다른 함정이었다. (밀레니엄 2부)

살라첸코를 죽이고자 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상당한 상처를 입혔고, 이복오빠 로날드 니더만은 도주했다. 총에 맞은 리스베트는 병원으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뇌에 박힌 총알이 문제다. 제거를 한 후 안정만 된다면 리스베트는 살아날 수 있지만, 어떤 장애가 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리스베트에 대한 긴급수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미카엘은 경찰을 상대하지만 경찰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그곳에도 한스 파스테같은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한 것은 리스베트의 개인 사물 몇가지를 미카엘이 잘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스베트는 무사히 수술을 받았고 안정을 찾아 가지만 골반과 어깨, 머리의 총상으로 인해 재활치료도 힘든 지경이다. 하지만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살라첸코가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역으로 살라첸코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리스베트는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살라첸코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살라첸코를 죽인 용의자 역시 자살시도를 한다. 도대체 갑자기 나타난 그 자는 누구란 말인가?

밀레니엄 3부『벌집을 발로 찬 소녀』1권 전반부에는 리스베트의 수술과 회복과정, 살라첸코 살해 사건을 비롯해 살라첸코를 비밀리에 보호하던 세포의 비밀조직이 드디어 드러나게 된다. 이제까지는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세포의 비밀조직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젠 드디어 그 뱀 둥지의 실체가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독자에게만) 이 비밀조직은 세포내에서도 알려진 바가 없으며 과거 냉전시대의 유물을 끌어 안고 사는 인물들이 주축이 된 소수정예 집단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 살라첸코의 행적이 보다 뚜렷하게 밝혀진다. 이들은 이젠 쓸모없어진 살라첸코를 죽이고, 리스베트를 다시 정신병원으로 넣을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리스베트와 가까운 미카엘에 대한 불법도청, 감시, 불법주거침입 등 온갖 불법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이는 분명 공권력의 오용이요, 남용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세포내의 비밀조직으로 존재한 수십년 간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공권력의 악용이 이루어졌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부분이다. 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안기부같은 데서 무슨 공작을 벌였는지 알게 뭐람. 알려진 것만 해도 후덜덜인데, 알려지지 않은 건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2권 후반부에서는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리스베트를 위한 여러 인물들의 활약이 그려진다.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퇴원할 무렵이 되면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모든 사건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미니 컴퓨터를 병실에 몰래 들여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리스베트의 주치의의 협력이 필수였다. 이 의사는 리스베트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는 인물 중 하나였고, 리스베트는 점차 이 의사에게 마음을 열고 그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미니 컴퓨터를 통해 리스베트는 자신의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 내용에 대해 파악하는 한편, 세포의 살라첸코 그룹에 대한 조사도 시작한다. 물론 병실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리스베트는 해커 비밀조직의 팀원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한편 밀레니엄 잡지사는 살라첸코 그룹에 대한 기사 대신 일단 다른 기사를 먼저 내보내기로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살라첸코 그룹에 대한 조사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레니엄의 헨뤼는 스웨덴 건설시장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불필요하게 높이 책정된 건축비에 대해 파고들게 되고, 이것이 동남아 시장의 아동노동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골치였다. 그 인물은 바로 에리카를 스카우트해 간 신문사의 이사였던 것이다.

대략 1권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세포 내의 비밀조직 살라첸코 그룹은 동면에서 깨어난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리스베트쪽 역시 이들을 옭아맬 올가미를 착실하게 준비해 간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 사건과는 별개로 밀레니엄의 다음 기사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공통점은 1권의 경우 모든 포석이 깔리고 말들이 움직일 준비를 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2권의 경우 1권에 비해 매우 속도감 있는 전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밀레니엄 3부는 2부의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2부와 3부의 연결점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짚어보면서 읽는다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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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소년들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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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다른 작품인『카시오페아 공주』에 다소 실망해서 이 책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책 소개를 보면서 미스터리라는 설정에 끌렸고, 그래서 다시 이 작가의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별로였다. 나와는 코드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결국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명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서연희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현우주는 고교시절 짝사랑했던 연희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워낙 유명한 연예인이었던만큼 매체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현우주는 연희가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왜 투신자살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그녀의 남편이자 고교 동창인 박대웅을 의심한다. 하지만 당시 박대웅은 미국에 있었다. 그럼 정말 연희는 자살한 것일까?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서연희의 마지막 행적이 담긴 CCTV화면이 공개되었고, 그 화면에 연희와 같이 있는 인물은 박대웅으로 추정된다는 뉴스가 떴다. 그럼 그 시간에 박대웅은 정말 한국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박대웅을 닮은 사람에 불과한 것일까? 현우주는 연희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고자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이 책의 기본 스토리는 현우주가 서연희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과정에 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곁가지가 너무 많다. 그 곁가지 하나는 고교시절의 이야기이다. 현우주가 박대웅을 비롯한 밴드 멤버들을 어떻게 만났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 정해진 길만 걸어가면 성공할 수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전교 석차가 떨어지면 서울대에 못가고 연고대에 가게 되는 걸 고민하고, 한달에 백만원이나 하는 고액과외를 받고 입시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밴드를 조직해서 연주를 하고 공연을 한다. 그후엔 서민적인 분위기가 나는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먹는다. 만나는 여자아이들은 유명 여고의 아이들로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이른바 엄친딸들이다. 그 여자아이 중 하나가 서연희였다. 현우주는 서연희를 좋아했지만 박대웅과 연희가 사귄다는 걸 알고 속으로 마음을 끓일 뿐이다.

이후 대학에 들어간 박대웅은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대웅은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인간이다. 야망으로 가득찬 남자랄까. 현우주는 신방과에 진학, 특별할 것 없는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늘 박대웅에 대한 열패감에 휩싸여 있었다. 스무살이 되어 연예계에 진출한 연희는 박대웅과 결혼, 현우주의 손에서 더더욱 멀어진 존재가 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박대웅에 대한 자격지심과 연희에 대한 그리움이 현우주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 것이다.

두번째 곁가지는 음악 이야기와 연예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목차는 모두 노래 제목으로 내가 고교시절에 좋아하던 헤비메탈 밴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즐겁긴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음악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미스터리 소설이라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음악 이야기 뿐이랴. 현우주가 갖춘 오디오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도 주구장창 끊이지 않는다. 뭐, 자랑질 좀 하고 싶나,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방송국 PD로 일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박대웅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어떻게 차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또한 박대웅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속한 아이돌 그룹 리더들의 열애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섹스 비디오 스캔들에 대해 조금 언급하지만 딱히 그럴듯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진짜 섹스 비디오 스캔들로 한때 힘들어 했던 두 여자 연예인의 이름을 실명 그대로 언급하는 부분이 불쾌했다. 그 비디오는 연인과 찍은 것이었으며, 이는 사생활의 일부로 원래는 지켜져야할 부분이었다. 작가가 정말 연예계의 더러운 부분을 다루고 싶었으면 장자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상납은 연예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 소설에도 그런 언급이 나오지만 알고 보니 노래 연습때문이었다고 급하게 끝맺는다)

현우주 개인의 삶에 대한 부분은 술과 섹스가 대부분의 이야기이다. 술마시는 장면도 꽤 많이 나오는데 대부분 위스키고 와인이다. 술에 대한 설명도 그렇게 자세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여자 이야기에선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는 알고 보니 유부녀였고, 고교시절엔 누굴 사귀고, 대학시절은 누굴 사귀고... 등등이 나오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도대체 서연희 미스터리에 있어서 현우주의 성생활이 그토록 자주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오히려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많았으면 이해라도 되겠지만, 잡지사 일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서연희 미스터리와 관련해서 아이돌 그룹 리더인 남태범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스포츠 신문 여기자와의 만남 정도가 전부다. 그 여기자의 이야기도 솔직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남태범이 그룹 탈퇴후 여기자에게 남긴 이야기는 도대체 왜? 라는 생각만 든달까. 물론 제대로 된 소스로 기사를 쓰란 그런 의미였겠지만, 그런 건 대수롭잖게 넘어가버리는 듯한 느낌도 든다.

따지고 보면 이 곁가지들이 소설 내용의 3/4를 차지한다. 결국 서연희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현우주의 조사와 관련된 내용은 1/4밖에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300페이지 좀 넘는 책에서 3/4을 추려내면 100페이지도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곁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보니 정작 중요한 부분은 대충 넘어간 경향이 보이고, 결말 부분 또한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었다. 결말을 보면서 뜨아~~했달까. 인간미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던 박대웅이 알고 보니 순정파 남자였다는 결론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허허참, 이런 괴리감이라니, 이런 위화감이라니.   

가장 어질했던 건 작가 후기를 읽을 때였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아주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은데, 작가 자신이 만족한다고 독자를 만족시키는 건 아니다. 내 경우가 딱 그렇다. 작가는 이 작품이 스릴러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스릴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현우주가 밴쿠버에서 납치되었을 때 정도인데, 그 장면도 너무 싱겁게 끝났다. 이 정도로 스릴러라고 하는 작가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평탄하고 무난하고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 와서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뭐, 본문에도 나와 있는 "경제적 · 사회적으로 능력 있는 아버지와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좋은 대학을 갈 성적이 유지되고, 마음만 먹으면 여자 친구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다. (…) 그 또래 아이들이 가질 법한 태생적인 결핍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우리가 져야 할 짐이 아니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봐서는 작가가 꼭 이런 길을 걸어온 듯 하다. 이러니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스릴이라고 하지 않겠나.

강남부촌의 아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 소설이 짜증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런 환경의 아이들일지라도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뭘 고민했지? 짝사랑? 서울대를 못가고 연고대에 가는 것? 고민다운 고민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나와 같은 사람과는 태생부터 달라서 이런 고민이 엄청 큰 고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감은 못하겠다. 또한 곁가지 비중이 너무 높은 것도 이 소설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특히 지나치게 세세한 음악 이야기나 술 이야기 등은 후까시 잡는 걸로 밖에 안보인다.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압구정 아이들의 힘이 빡 들어간 어깨를 보는 기분이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부분을 충분히 살렸다면 멋진 소설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표현은 여전히 특권 계급 의식에 사로 잡힌 강남중산층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현우주를 작가와 동일인물로 보든지, 작가와 동일 선상에 놓인 사람으로 보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들은 여전히 후까시나 잡는 고교생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책 뒷표지의 "일본 소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한국형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신기원!"이란 표현도 거슬리긴 마찬가지이다. 연예계 이야기가 나오고 음악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해서 엔터테인먼트는 아니다. 난 일본소설을 좋아하지만 한국 장르소설에 거는 기대도 큰 사람이다. 제발 이런 식의 후까시는 고만 잡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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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 - 러쉬노벨 로맨스 300
아이다 사키 지음, 사쿠라 사쿠야 그림 / 현대지능개발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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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사키의 신간이 나왔다. 음. 표지 그림을 보니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듯 하다. 빨간색과 파란색 작업복, 웬지 청실홍실같잖아. (푸힛)

스즈이시 토모야는 얼마전 3중 재난을 만났다. 2년간의 동거,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여자 친구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는 바람에 여자 친구와 친구를 동시에 잃었고, 그때문에 의기소침해 하다가 직장까지 잃었다. 한동안을 술에 절어 보내던 토모야는 거리에서 잠을 자다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어른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격려해주는 그 사람이 일하는 곳은 근처의 건설현장이었다. 토모야는 카츠라기 슈지라는 이름을 가진 그 남자의 일하는 모습이 너무 남자답고 멋져서 그에 대한 동경을 품고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네 달, 토모야는 육체노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아직 서투르긴 하지만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일에 있어서는 귀신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하지만, 한편으로는 토모야에게 자상하게 격려도 잊지 않는 카츠라기. 어느 날 둘은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된다. 둘만 있는 자리가 못내 어색한 토모야였지만, 의외로 소탈한 카츠라기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날 밤, 카츠라기의 집에서 묵게 된 토모야는 저녁식사를 했던 스낵바의 미츠키가 카츠라기를 찾아와 생떼를 부리는 걸 목격한다. 카츠라기는 미츠키와 사귈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술에 취한 미츠키는 막무가내다. 결국 키스 한 번으로 이 관계를 정리하자는 미츠키의 말을 따르는 카츠라기를 본 토모야는 혹시 카츠라기가 게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런 쪽은 아니란다.

처음에는 동경이었다. 하지만 미츠키에게 키스하고 있는 카츠라기를 본 자신의 마음이 몹시 심란하다는 걸 깨닫게 된 토모야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신은 카츠라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데... 와우, 이렇게 행동력 강한 수도 있군. 토모야는 성질이 급한 편인데, 여기에서도 그런 모습이 다 드러나는구나. 거절을 당해도 혼자서 끙끙 앓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꽤나 용감해 보인다. 보통 고백을 할 때는 거절당할 경우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않을 거란 결심을 하지만, 토모야는 그런 어중간함이 싫은 거였다. 24살이니까 아직 젊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토모야의 고백을 받은 카츠라기는 당황하고 만다. 하지만 때마침 다시 미츠키가 들이닥치게 되고, 미츠키가 카츠라기에 다시 매달리는 행동을 하자, 토모야는 자신이 카츠라기의 애인이란 폭탄선언을 하고 그에게 키스해 버린다. 푸핫. 정말 용감하구나. 어떻게 보면 참 귀엽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도 하다. 뭐, 마음이 없는 미츠키와도 키스를 했던 카츠라기니까 토모야와는 좀더 쉬웠을지도... 그도 그럴 것이 카츠라기도 토모야가 계속 귀여웠던 모양이니까.

이렇게 시작된 연애는 알콩달콩 단내 폴폴 풍기면서 진행된다.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하는 데이트를 하는 건 여느 연인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토모야가 반년만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여자친구와 바람이 났던 토모야의 친구가 급습하고, 카츠라기의 전 부인이 다시 나타나는 등 이 둘의 애정전선에 갑자기 혼란스러움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자, 그 다음 전개는 어떻게 될까. 토모야는 아이처럼 징징거리다가 화도 내다가 오해하는 등 혼자 별 망상을 다 하더이다. 사실 이런 갈등은 스토리 자체가 밋밋하지 말라고 넣는 것이긴 한데, 좀 억지스럽다. 카츠라기의 전 부인 이야기는 그닥 억지스럽지 않지만 토모야와 관련된 인물들 이야기가 좀...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지??

음. 아이다 사키의 작품은 아주 재미있거나 별로 재미없거나로 갈린다. 아주 재미있는 경우는 야쿠자, 마피아, 경찰 등이 나오는 경우이고, 별로 재미없는 경우는 이처럼 일반인이 등장하는 경우이다. 그냥 밋밋해져 버린달까.『그런 줄은 까맣게 모르고』의 커플도 알콩달콩 귀엽긴 하지만 공수 캐릭터 모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에스 시리즈, 데드 시리즈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스토리상의 짜릿함도 없고, 캐릭터 역시 남자다움보다는 귀여움이 강조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건축현장의 사람들이 주인공인데 수컷다움이 별로 없다니까. 카츠라기도 수컷 냄새 풀풀 날줄 알았더니, 의외로 양순하더이다.

얼마전 읽었던 데드 시리즈가 정말 강렬한 작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솔직히 이건 별로였다. 만약 다른 작가가 이런 작품을 썼다면 별 네개 정도는 주겠지만, 아이다 사키이기 때문에 별 세개. 하나 감점이다. 즉, 이 작품은 내가 아이다 사키란 작가에 대해 거는 기본적인 기대치에 못미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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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천 정사 화장 시리즈 1
렌조 미키히코 지음, 정미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정사(情死)는 동반자살을 의미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종종 듣는 동반자살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즘의 동반자살은 경제사정을 비관한 일가족 동반자살이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끼리끼리 모여 자살하는 집단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현세에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내세에서 사랑을 이루자는 의미로 함께 죽는 동반자살을 의미한다. 요즘은 정사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 함께 죽을 일이 별로 없거니와 다른 문제가 앞서 고작 사랑 따위의 문제로 함께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정사란 이야기를 들으면 근대의 로망이 담긴 유산쯤으로 여기곤 한다. 그런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로망이랄까.
 
한편으로 난 일본인들은 정사를 좋아한다는 그런 생각도 하곤 한다. 이 작품집에도 정사를 다룬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의『인간실격』, 와타나베 준이치의『실락원』도 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도 정사를 시도하는 부분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 속에서는 정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심심찮게 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시대물 만화책같은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일본의 독특한 문화 - 솔직히 문화라고 하기엔 거부감이 들지만 적당한 용어가 없다 - 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작가는 왜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썼을까.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 초기는 일본 역사에 있어서 무척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1차 세계대전 참전, 쌀값 폭등으로 인해 일어난 주민들의 폭동, 관동대지진, 경제 공황 등이 이 시기에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사건들이다. 또한 이 시대는 계층간의 눈에 보이는 차별도 남아 있었던 시기이다. 이런 시대를 살다 보니 사람들의 생활이나 마음은 피폐해졌을 것이고, 그렇다 보니 내세를 약속하며 정사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도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이 작품집의 제목은『회귀천 정사』이지만, 사실 모든 작품이 정사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정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그리고 사랑과 증오, 겉으로 보이는 사연 속에 감춰진 진짜 사연들은 때론 정사란 행위보다 더 아프고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등나무 향기>는 유곽이 늘어선 조야자카 고개에서 일어난 연속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야자카 고개의 유곽에 있는 여성들은 본가가 너무 가난해서 팔려온 경우도 있고, 오누이처럼 본가에 돈을 보내기 위해 유곽으로 들어온 여성들도 많았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 속에서 살던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몸파는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화자와 함께 사는 오누이는 시골에 있는 남편의 약값을 벌기 위해 여인숙에 취직한 경우로 남편 약값을 보내는 것에 등골이 휠 지경이다. 이는 유곽에 있는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처에 사는 대필가는 유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으로 과묵하지만, 가난한 유곽 여자들을 위해 무료로 대필을 해주기도 한다. 비록 팔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족이라며 꼬박꼬박 돈을 부치고 편지를 보내는 여성들의 사연을 전부 알고 있던 대필가는 이 여자들의 짐을 덜어주기로 했다. 대필을 하면서 편지 내용을 바꿔 이 여자들이 힘들게 번 돈을 집에서 편안히 받아 챙기는 술주정뱅이 아버지, 도박에 빠진 오빠, 병치레로 평생을 병상에서 보내는 남편 등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폐병으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그녀들 중에 몇명의 인생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인 <도라지꽃 피는 집> 역시 유곽을 배경으로 한다. 법적으로는 열여덟 살이 되어야 유곽에서 일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스즈에 역시 원래 나이는 열여섯이지만 열여덟이라 속이고 일하고 있다. 또래 소녀의 소녀다움이 짙은 화장과 나른한 표정 속에 묻혀 버린 스즈에는 근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사와 만나게 된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보여도 입을 꼭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스즈에는 형사와의 몇 번의 만남 끝에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그날 밤 목을 매고 자살한다. 살해당한 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도라지꽃과 같은 도라지꽃을 손에 쥐고 죽은 스즈에의 자살은 두번째 피해자인 인형사와의 정사를 결행한 것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그후 이 사건을 함께 수사한 다른 형사의 편지를 통해 스즈에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풀리게 된다. 그녀가 형사에게 도라지꽃을 던졌던 이유, 그녀가 도라지꽃을 쥐고 죽었던 이유가.

세번째 이야기인 <오동나무 관(棺)>은 야쿠자와 야쿠자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여인을 사랑해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이 형님으로 모시던 남자들 죽인 누키타와 누키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여인 기와 사이에 끼게 된 쓰기오. 누키타는 기와를 안고 싶으면서도 차마 그리할 수 없어 쓰기오가 그녀를 안게 한 후 쓰기오를 안는 남자다. 누키타와 기와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쓰기오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키타는 쓰기오에게 자신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두목을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이미 누키타에 길들여져 누키타의 명을 따르게 된 쓰기오는 결국 두목을 죽이고 만다. 누키타는 왜 두목을 죽이기를 원했을까. 기와의 말에 따르자면 기와를 죽이는 것이 맞는 일일텐데. 하지만 이 일에 대한 의문이 풀리기도 전에 쓰기오는 전쟁에 동원된다. 그곳에서 겨우 살아온 쓰기오는 그동안 기와가 누키타를 죽이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쓰기오는 기와와 누키타 사이에 있었던 일, 그리고 누키타가 두목을 살해하도록 한 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게 된다. 누키타와 기와가 했던 둘만의 주사위 놀이의 의미도.

네번째 이야기인 <흰 연꽃 사찰>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혼란을 겪는 시로의 기억 속에 숨겨진 어머니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로의 어머니는 불행한 별 밑에서 태어난 아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성장한 불운한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로의 어머니가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어머니가 네살되던 무렵에는 아무 이유없이 한 여자가 자살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던 시로의 어머니는 세이렌지라는 절의 주지에게 시집을 갔고, 시로를 낳았다. 하지만 그후 절에 불이나 아버지는 죽고, 시로와 시로의 어머니는 절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된 것이다. 시로는 때때로 어린 시절의 꿈을 꾼다. 어머니가 한 남자를 죽이는 꿈을. 또한 절이 불에 타는 것을 지켜보는 꿈도 꾼다. 그리고 어머니가 연꽃을 파묻던 장면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꿈이나 기억에 대해 어머니는 침묵을 지킬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시로는 어머니의 비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 결과 엄청난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다섯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회귀천 정사>는 다이쇼 시대의 천재 가인 소노다 가쿠요의 삶과 그가 남긴 작품에 관한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 각각 가쓰와라기 정가(情歌)와 소생(蘇生)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에 담긴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에 실린 다섯작품의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두 번의 정사 미수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쿠요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 작품이 씌어진 의도가 드러나는 순간 경악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진실을 알고도 가쿠요와 정사를 실행하려 했던 여인들의 사랑이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온다.<회귀천 정사>는 예전에 미스터리 앤솔로지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다시 읽어도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회귀천 정사>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다자이 오사무가 떠오르게 된다. 그 역시 두 번의 정사 미수 후 세번째 정사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한 부분은 미시마 유키오를 떠올리게도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쿠데타 해프닝 - 마지막 작품 <천인오쇠>를 출판사에 넘긴후 자위대 본부에 난입, 쿠데타 촉구 연설후 할복 자살 - 은 그가 오랫동안 동경해 왔던 죽음이란 의식을 치루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데 이 작품 속의 가쿠요 또한 자신의 작품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정사를 일으켰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렌조 미키히코의 화장(花葬)시리즈 여덟편 중 다섯편을 한데 묶은『회귀천 정사』의 각 작품에는 꽃이 등장한다. 등나무꽃, 도라지꽃, 오동나무꽃, 연꽃, 창포꽃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 꽃은 각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꽃이 주인공인 셈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남성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며, 이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시대 초기가 된다. 즉, 일본사에서 근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이나 물건들에서는 옛것의 향기가 물씬물씬 배어나오지만 스토리 자체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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