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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여행자, 사라진 시간을 걷다 - 문학과 예술이 태어난 곳으로 떠나다
김경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
삶에 지칠 때, 사람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하죠.
마치 그곳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여행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신기하게도 고생한 만큼 얻는 것이 있더라고요. 그건 어쩜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대단한 뭔가를 이룬 건 아니지만 조금 성장한 느낌이랄까요.
《인문 여행자, 사라진 시간을 걷다》는 문학과 예술,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사라진 시간'에 대한 인문학적 답을 찾아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자는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 언론인이자 청년기부터 인문학점 관점의 스토리와 역사 속 사람 이야기를 좋아하여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고 하네요. 전작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에서는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을 중심으로 그 장소에 깃든 역사와 인문학적 사색을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사라진 시간'을 읽어내며, 삶의 이유를 고민했던 거장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인문학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네요. 많은 도시를 방문하고 걸으면서 시간의 겹 속에 남겨진 흔적들을 보았다면서, '문학, 건축, 음악, 미술, 음식, 자연'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시간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렇게 과거의 장면들을 지금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사유하는 것이 바로 사라진 시간을 걷는 방법이었네요. 저자에게 있어서 여행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네요.
"까마득한 절벽 틈 사이로 석청이 매달려 있는 몬조를 지나, 히말라야 등반 코스의 체크포인트인 조살레 마을 근처의 계곡을 오르며 줄곧 생각에 잠겼다. '나는 자유인인가?' 현실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를 의도적으로 떠올리며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러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나 자신에게 얼른 와닿지 않았다. ··· 이번 여행에서 내심 히말라야 여신이 지배하는 이 영산에서 마음의 치유를 얻고 싶었다. 진정한 치료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로운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눈을 뜬 새벽, 나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체취가 묻은 낡은 침대 위에 생선구이처럼 구겨져 냄새나는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우리의 삶이란 꾸벅꾸벅 졸다가 깜빡 깨어나고 다시 꾸벅꾸벅 조는 것이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진단서다. 인간은 현실이 견딜 수 없어 꿈을 꾼다. ··· 라캉의 진단처럼 그날 아침 히말라야의 남은 길을 재촉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67-69p)
일주일 동안 매일 여덟 시간씩 무념으로 걸어 올라간 히말라야에서 저자는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처럼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그저 경이로운 산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한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네요. 히말라야 높은 봉우리들을 올라간 사람들은 다시 내려와야 하고, 산은 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치인 거죠. 좁은 산길을 힘들게 올라간 이들에게 주는 히말라야의 교훈은 삶의 고행인지도 모르겠네요. 알람브라 궁전은 신비롭고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궁전을 한 바퀴 돌아 성채 출구로 나올 때는 해가 기울었다고 하네요. 멸망한 왕조의 화려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어둠이 내린 뒤에는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환상으로 남는다는 것이 인생무상, 어쩐지 씁쓸하고 서글프면서도 현재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드네요.
"인생은 매순간 출구를 찾으면서도 영원히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미로와도 같다.
알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방황할 때마다 바다는 나에게 적절한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해답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줄거리를 알 수 없는 연극과도 같고, 막연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허용된 부조리극이다. 지쳐 헤맬 때마다 바다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무엇이 되어주었다. ··· 드뷔시의 음악이 적절한 중재자가 되어 나를 따라다녔다.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처럼 그가 만들어낸 예술은 희미하고 창백한 달빛이었다. ··· 현실이 태양이라면 드뷔시의 음악은 그 태양에서 달이 훔쳐온 창백한 불꽃이었을 것이다. ··· 예술을 향한 치열한 긍정의 세계가 위대한 작곡가 드뷔시의 그림자처럼 해협의 물결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196-197p)
런던 남쪽의 스톤헨지와 솔즈베리를 지나 도착한 이스트본의 바다에서 교향시 <바다>를 들으며 걷는 느낌은, 말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드뷔시의 생애와 음악을 들으며 상상해보았네요. 넘실대는 파도와 드뷔시의 음표들, 예술적인 감동으로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삶에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인문학 여행 이야기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