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는 이유 - 던져진 존재들을 위한 위로
민이언 지음, 제소정 그림 / 디페랑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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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우리동네 목욕탕을 찾은 나는

한달에 두번 있는 정기휴일이 왜 꼭 걸리는 거야

오 꼬질꼬질 지저분한 내 모습 그녀에게 들키지 말아야지 하면

벌써 저쪽에서 그녀가 날 꼭 어이없이 바라볼까

세상에 그 어떤 누구라도 너와 바꿀 수 없다는 걸 우린 알잖아

세상에 그 어떤 어려움도 우리 사랑을 갈라 놓을 순 없잖아

세상 모든 게 다 내 뜻과 어긋나 힘들게 말 하여도

내가 꿈꿔 온 내 사랑은 널 위해

내 뜻대로 이루고 말테야 ~~~


제 사연이냐고요? 노노노!

DJ DOC 의 <머피의 법칙> 가사 일부예요.

머피의 법칙은 자신이 하려는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진행될 때, 점점 꼬여갈 때 사용하는 말이에요.

<불운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는 이유>라는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추억의 노래였어요.

저자는 "안 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겪고 가는 듯한 인생, 그러나 그 기억들을 꺼내어 글로 남길 수 있으니, 불운조차 콘텐츠다. 결국엔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 내 경험적 자산이 되었다고 애써 위로하며, 이젠 되는 경우의 수들을 기다려 본다."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이 책은 머피의 법칙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아온 저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가운데 초등학교 시절 야구의 추억과 백수 시절에 엎어진 김치통 일화가 기억에 남아요. 어떤 심정이었을지 공감되는 내용이라서 그런가봐요.

야구부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우연히 날아온 야구공을 멋지게 던졌을 뿐인데, 돌아온 건 칭찬이 아닌 꿀밤 몇 대였고, 남은 건 수치심과 미움이었다고.

저 역시 어릴 때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몇 개 있어요. 구체적인 장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는데 그때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문득 들여다보면 여전히 아프더라고요.

김치통이 엎어지는 일쯤이야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실수지만 타이밍이 문제인 것 같아요. 한없이 작아지고 쪼그라드는 마음, 그 약한 틈 안으로 엎어진 김치통이 들어온 거예요. 널브러진 김치 조각들을 보며 흐트러진 나를 마주하는 느낌, 너무 매워서 눈물 날 것 같아요.


내가 어쩌다 철학으로 글을 쓰게 됐냐고? 

문단이 하도 내 소설을 안 받아 줘서, 뭐라도 써서 먹고살려다 보니,

어쩌다가...  

그렇듯 발생학적으로, 열나게 깨지면서 조금씩 열리기도 한다는...  (214p)


불운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는 이유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읽은 건 아니에요. 여기서 관심을 둘 단어는 '우리'인 것 같아요. 

세상의 모든 불운이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는 일은 없으니까, 불운이 비껴가는 삶이란 없으니까요. 우리는 똑같이 행운과 불운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으니까요. 저마다 그 타이밍과 횟수가 다를 뿐이죠.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약간의 위로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네요. 

무엇보다도 제소정 작가님의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특별한 전시회를 관람한 느낌이었어요. 굉장히 독특한 그림이라서 수수께끼를 풀 듯이 한참 감상했어요.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삶의 이야기와 함께라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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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아이
시게마쓰 기요시 지음, 권일영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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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달 서초구 한 회사의 사무실에서 생수를 마신 직원들이 쓰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원인은 독극물로 밝혀졌어요.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같은 회사 직원이었고, 사건 발생 다음날 자택에서 약물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됐어요. 모두 동일한 독극물이었어요. 회사와 관련된 업체 사업자등록증을 이용해 연구용 시약 전문 온라인 쇼핑몰에서 범행에 사용된 독극물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그러나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뉴스에서 사건을 접하면서 의문이 들었어요. 정작 알아야 할 건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몰라도 될 정보들은 무엇때문에 누구를 위해 공개된 걸까요.

독극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위험한 독극물 이름과 구입한 경로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는 건...

도대체 범인은 어떤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걸까요.


<목요일의 아이>는 중학교에서 벌어진 독살 사건을 다룬 이야기예요.

7년 전 여름, 아사히가오카 중학교에서 한 소년이 급식으로 나온 채소 스프에 독극물을 넣어 같은 반 학생 중 아홉 명이 사망하고 스물한 명이 입원했어요. 

서른한 명 학생 가운데 그 소년 혼자만 무사했어요. 체포된 소년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소년원에 수감되었어요. 이 사건이 '목요일의 아이'로 불리게 된 건, 사건이 일어난 7월 1일 점심시간을 앞둔 시각에 중학교 앞으로 온 편지 한 통에 적힌 내용때문이었어요.


이제 곧 많은 학생이 죽을 겁니다. 모두 목요일의 아이입니다.  (9p)


그로부터 7년 뒤, 시미즈는 가나에와 결혼하면서 아사히가오카의 단독주택으로 이사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집은 독극물 사건으로 죽은 여학생이 살던 곳이었어요.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시미즈는 결혼과 동시에 중학교 2학년 아들 하루히코가 생겼고, 아내와 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새롭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아사히카오키에서 불길한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졌어요. 너무나 걱정되는 건 7년 전 독살 사건의 범인과 아들 하루히코가 닮았다는 소문이었어요. 그리고 시미즈는 자신을 찾아온 사와이에게 그간의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사와이는 7년 전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였어요. 그가 여전히 '목요일의 아이'에 매달리는 건 결정적인 의문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소년은 왜 사건을 일으켰을까요, 왜 같은 반 학생 모두를 노렸을까요, 왜 그 가운데 아홉 명은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요... 아무도 우에다 유타로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를 모르고 있어요. 


독신으로 살던 시미즈가 의붓아들이 생기면서 아버지로서의 고민을 하는 장면들이 꽤 공감이 갔어요. 그는 하루히코의 14년 인생에 이제 막 들어온 입장이라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지만 열네 살, 중학교 2학년생은 친부모에게도 먼 존재예요. 가족은 가깝고도 먼, 알다가도 모를 그런 관계인 것 같아요.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들조차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거죠. 쇼윈도우 세상, 그러니 진실은 어둠 속에 있을 때가 더 많아요.

사람들은 범죄 사건을 보면서 범인이 누구냐에 관심을 두는데, 정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범죄의 진실은 범인의 내면에서 찾아야 해요. 그 험난한 과정을 <목요일의 아이>가 보여주고 있네요. 세상의 끝,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고야 말았네요.


"이게 세계야."

"이게, 어둠이야."

"어둠의 깊이를 알게 된 순간 세계는 끝날 거야."  (3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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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말하는 아동학대 - 법원 판결로 아동학대 알아보기
박우근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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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동학대 사건들은 끊이지 않는 걸까요.

지난해 10월 발생한 정인이 사건 이후에도 아동학대 범죄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났다고 해요.

끔찍한 범죄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사회적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아동학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과연 무엇이 아동학대일까요.

<변호사가 말하는 아동학대>는 법원 판결을 통해 아동학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어요. 

저자는 법률가의 시각에서 법원이 아동학대사건를 어떻게 판결하였는지 고찰하였으나 법원의 판결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며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판결의 경향도 시대와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아동학대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비극적인 사건들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아동학대 판례 분석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의 구성은 아동학대와 관련하여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법적 개념 설명과 다양한 아동학대 사례들의 법원 판결문으로 되어 있어요. 책에 소개된 모든 판결문은 사건번호를 기재하였고 판결색인에 정리하였다고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먼저 사례들을 살펴볼 수도 있어요. 

사실 법조인과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판결문을 읽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단순히 법률용어에 대한 어려움만이 아니라 아동학대라는 구체적인 범죄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서 굉장히 충격적이에요. 그럼에도 판결문을 공개한 것은 아동학대의 실상을 알리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 있어요.

우리가 주목할 부분들은 개별 사건에서 아동학대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현행 사법체계에서는 아이를 때렸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아동학대로 처벌받는 것이 아니며, 유형력 및 강제력의 행사 정도, 그 배경 및 목적 등등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서 고의성이 없어서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도 있어요. 각 사례마다 저자의 해설과 견해가 나와 있는데,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서도 법률자문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선제적으로 아동학대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변호사로부터 법률자문을 받아야 실질적인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아동학대를 근절하려면 입법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해요.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아동학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기에 다함께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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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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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제 마음을 설레게 한 책이에요.

처음 <개미>를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님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작품의 뿌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있다고 생각해요.

베르나르의 소설은 놀라운 세계관이 존재해요. 작은 개미부터 무한한 우주까지 우리가 무심결에 그어놓은 한계를 뛰어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이 책은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유용하고 재미있는 지식들만을 모아 놓았으니까요.

제목처럼 백과사전이라서 크게 주제별로 나누어 흥미진진한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죽음, 땅울림, 초소형 인간, 제3인류, 신들의 신비, 신들의 숨결, 우리는 신, 천사들의 제국, 개미혁명, 개미의 날, 기타.

여기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소설이 아니라 베르나르가 열세 살 때부터 수집한 이야기 혹은 지식이라고 해요. 그러니 책 두께에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백과사전 시리즈가 더 나왔으면 좋겠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상상력 천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도 본 적 없는 세계를 현실감 있게 표현해낸다는 건 특별한 능력인 것 같아요. 단순히 상상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 거예요. 바로 이 사전을 펼쳐보면 베르나르의 작품이 가진 매력이 정체를 확인할 수 있어요. 

일상에서 마구 떠오르는 상상이 비누 거품이라면 과학적 지식을 기반한 상상의 세계는 열기구라고 생각해요. 하늘을 날고 있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미 베르나르 작가님에게 푹 빠진 사람인지라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이 책에 찬사를 보내게 되네요. 평범한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일은 저한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 책만큼은 소설처럼 휘리릭 읽을 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당연히 재미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곁에 두고, 언제든지 읽고 싶은 책이에요. 말의 힘은 아주 대단해요. 이 백과사전 속에 담긴 말들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아 더 놀라운 상상의 세계로 확장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죠. 말, 글 그리고 책... 에드몽 웰즈를 평생 기억하게 될 테니.

정말 완전 좋아서 누군가에게 권해주고 싶은데,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면 그냥 쓰윽 건네주면 되겠지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요.



나는 나와 생각이 같지 않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게 아니다.

이미 나와 생각이 같은 이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 에드몽 웰즈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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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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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중세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범죄와 스캔들과 결투 재판의 기록이라고 해요.

저자는 중세의 문서를 읽다가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 사건을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실존하는 모든 사료들의 기록을 수집하여 이 소설을 썼다고 해요.

6백여 년 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우리 눈앞에 펼쳐진 최후의 결투는 한 편의 영화였어요. 다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지난 달에 개봉되었다니 영화로 완성된 최후의 결투도 챙겨봐야겠네요.

1386년 크리스마스가 며칠 지난 추운 아침에 두 명의 기사가 목숨을 건 결투를 앞두고 있어요. 몇 천 명이나 되는 군중은 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공터를 가득 채웠고, 장방형 결투장은 무장한 위병들이 에워싸고 있어요. 열여덟 살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신하들과 함께 호화로운 관람대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최후의 결투 주인공은 바로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그리예요.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은 사이였고 카루주는 아내인 잔이 아들을 낳자 자크에게 아들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카루주와 르그리는 피에르 백작의 종기사가 되었는데 르그리가 백작의 총애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하자 조금씩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어요.

장 드 카루주는 아내인 잔과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은 직후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좋은 가문의 여성과 재혼을 했어요. 그녀가 바로 노르만 귀족 가문의 외동딸 마르그리트였어요. 거의 모든 기록에서 마르그리트는 젊고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어요. 트로이 전쟁에는 아름다운 왕비 헬레나가 있듯이, 여기 최후의 결투에는 아름다운 마르그리트가 있어요. 다른점이 있다면 사랑과 강간의 차이랄까. 헬레나는 파리스의 유혹에 넘어가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마르그리트는 자크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하며 복수해달라고 청했다는 거예요. 

중세 프랑스의 경우 강간 피해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편이나 아버지, 남성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범인을 고소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을 밝혀 봤자 얻는 건 수치와 불명예라서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대요. 비열한 자크 르그리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뻔뻔하게 침묵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어요. 

만약 카루주가 배신자 르그리에 대한 불신이 없었다면 아내의 고백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지만 카루주는 선뜻 행동에 나설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르그리가 피에르 백작의 실세였기 때문이에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폭력배가 르그리의 정체였어요.

파리 고등법원이 허가한 최후의 결투 재판은 세 사람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건이었어요.

범죄자의 처벌이냐, 억울한 피해자의 화형이냐. 14세기 말까지도 프랑스법에는 고대 관습이 남아 있어서, 그녀가 강간 사건에 위증을 한 것이 입증되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다고 해요. 과연 결투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읽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세상은 바뀌었는데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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