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전집 1 다시 읽는 우리 문학 2
이효석 지음 / 가람기획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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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이효석 작가 하면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 으로 알려져 있죠.

한때 여름을 봉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밤 풍경을 보진 못했네요. 오히려 현실에서 본 적 없는 풍경이라 더 낭만적으로 상상했던 것 같아요. 숨이 막힐 지경이라니, 이 정도의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운 밤 풍경이라야 장돌뱅이의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테니... 그 뒷이야기는 어찌 되었을까, 궁금하면서도 더 알고 싶지 않은 건 앞서 느낀 감동을 깨질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이 작품 외에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더라고요.

《이효석 전집 1》은 가람기획의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시리즈로 나왔네요.

첫 장에는 이효석 작가의 사진들과 친필 사인, 친필 원고, 2002년 개관한 이효석문학관 정경 사진이 나오네요. 그 중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놀랐어요. 1938년 크리스마스 날 저녁 평양 창전리 자택에서 찍은 사진인데, 여기가 과연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인 데다가 시간마저도 헷갈리게 만드네요. 벽에는 MERRY CHRISTMAS 라고 적힌 포스터와 장식들, 그 옆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져 있고, 양복 차림의 작가는 전축 앞에 LP판을 들고 앉아 있네요. 사진 아래에는 '그의 엑조티시즘(Exoticism)이 잘 드러난다'고 적혀 있네요. 문학평론가이자 덕성여대 명예교수인 김우종 교수는 이효석 문학은 "화려한 '순수'에의 미몽"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순수문학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는 새로운 문학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화려하고 순수하기만 했다는 점, 그의 문학에 역사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요. 마치 그의 삶처럼, 사진 속의 모습은 1930년대를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네요. 서양의 것을 우리들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나고 아름답게 바라보던 작가가 토착적인 우리말과 감각적인 표현기법으로 빚어낸 순수문학이었다는 거예요. 깊이 있게 작품세계를 들여다 본 적이 없던 터라, 마흔두 편의 단편소설을 몰아 읽으면서 다시금 순수문학의 장단점을 살펴볼 수 있었네요. 한국 근대문학에서 이효석의 문학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다른 작가들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네요. 한국 근대사에는 지식인들이 대중의 미몽(헛된 꿈, 무지, 착각)을 깨우치려 노력한 경우도 있지만 도리어 미몽에 빠져 현실을 외면한 이들도 있었다는 것, 이제는 누구나 배운 지식인이기에 스스로 깨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네요.



"가을만 되면 또 어떻구. 수확이 적거나 말거나 불한당의 지주는 받을 것은 다 받지 안 받고 배기나. 아무리 비가 와도 가물어도 그들은 태연하다. 놀래? 오히려 좋아할 걸."

"아무튼지 결국 고생······ 아니, 죽는 놈은 우리지 뭔가?"

"어쩐 일인지 세상이 점점 이상해 가는 것 같애."

"확실히 점점 흉악해 가, 모든 것이······ 사람은 물론 초목, 금수나 토지라도 진화가 아니고 오히려 퇴화하는 것 같애. 그렇지들 않나? 나 젊었을 때는 땅도 지천이요 일만 하면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모 한 폭 심을 땅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심어도 우리의 것은 되지 않으니 참 기막혀!" _ 「황야」 (39p)


'밝아 가야 할 나의 생의 서광이 왜 점점 어두워져 가나. 나에게는 살아갈 권리가 없을까. 혹 무슨 죄를 졌는가? 게을리 했는가? 화려한 생활을 했는가······? 아니다. 내 기억 속에 그런 적은 조금도 없다. 나는 일하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일을 시키지 않았다 작업을 주지 않았다.' 극도로 피로한 발을 옮기면서 그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면 좋을까? 이 자리에서 얌전하게 죽어야 할까?' 좀 더, 일순간이라도 좀 더 살아가려고 그는 싸움하고 애썼다. 눈물은 벌써 안 난다. 푸른 얼굴에는 광적 웃음을 띠고 부르짖었다. "누구의 죄이냐?" 경련적으로 돌리는 발은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고 한 걸음 두 걸음 떼 놓았다. _ 「누구의 죄」 (42-43p)


"팔자가 다 뭐냐. 다 같이 이목구비를 갖추고 무엇이 남만 못해서 부모를 버리고 동기를 잃고 고향을 떠나 이 짓까지 하게 되었단 말이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왜 모두 그런 기박한 팔자만 타고났겠니."

"그것도 다 팔자 탓이 아니냐."

"그래도 너는 팔자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팔자 밖에 우리를 요렇게 맨들어 놓은 무엇이 있는 것 같더라." _ 「깨뜨려진 홍등」 (145p)


"어차피 인간 생활에 엄격한 꼭 한 가지의 비판이라는 것은 없는 이상 소문을 무시하고 여론을 멸시하여 실속 있는 생활을 적극적으로 하는 살림이 더 뜻있지 않았을까. 어줍잖은 여론의 총아가 되고 착한 시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생활의 악마가 되었더라면 유라의 살림은 한층 빛났을 것이다. 이러한 권고는 쓸데없는 나의 역설이고 하릴없는 감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일까." _ 「수난」 (3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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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숲
전건우 지음 / &(앤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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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괴담, 공포 이야기를 즐기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네요.

전건우 작가님의 장편소설 《어두운 숲》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공포의 미로 같은 이야기네요.

아참, 《어두운 숲》을 읽기 전이라면 먼저 《어두운 물》을 읽어보세요. 전작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민시현과 윤동욱이 등장하거든요. 처음 두 사람이 만나서 무시무시한 그 일을 함께 겪었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민시현이 윤동욱에게 전화를 걸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네요.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이 있는 곳은 어두운 숲이라고 말하네요. 그녀는 왜 그곳에 갔을까요. 방송국을 그만두고 시골에서 글을 쓰던 민시현이 첫 작품을 보낸 출판사의 편집자가 이선미였고, 오컬트 마니아인 이선미가 고스트 투어를 제안했고 거절할 수 없었던 거죠. 왜냐하면 민서현은 공포 호러물을 쓰는 작가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요즘 제일 뜨겁게 떠오르는 심령 스폿이자 자살 명소! 한국의 아오키가하라 숲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괴담이 탄생하는 곳! 숲 깊숙이 들어가면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들이 빨래처럼 널려 있다 해서 빨래 숲으로 불리지만 정식 명칭은 아무도 모르는 바로 그곳! 다른 이름으로는 어두운 숲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오컬트 마니아의 최애 장소이지만 너무 무서워서 함부로 갈 수 없는 숲이 바로바로 빨래 숲이야!" (17p)

아무리 닦달을 해도 나였다면 절대 못 갔을 것 같아요.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간 민시현은 이선미와 함께 자칭 '오컬트를 사랑하는 모임', 줄여서 '오사모'의 멤버들을 포함한 여섯 명과 3박 4일 일정으로 떠나는데, 그곳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생생하게 겪었지만 아무것도 증거가 남지 않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벌어졌네요. "잡아먹는다. 숲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186p)라는 말 외에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일본의 아오키가하라 숲이 어딘가 했더니 괴담 프로그램에 나왔던 죽음의 숲 주카이였네요. 수해, '나무의 바다'라는 뜻의 '주카이'라고 불리는 그곳을 제작진이 직접 방문했다가 시신을 발견하는가 하면 장비 이상 현상까지 발생하는 장면을 봤던 터라 이야기 속 어두운 숲이 그곳과 겹쳐져서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제작진이 공항 검색대에서 두 명으로 인식되는 해프닝이 있었다는 후문이 더 오싹했는데, 여기에서도 숲을 탈출한 이후의 상황들이 더 기묘하고 서늘한 공포감을 줬네요. 그러다가 그 공포감의 실체, 저주의 근원을 생각하게 됐네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것은 그들의 의지였을까요, 아니면 홀렸던 것일까요. 무엇이든간에 이 이야기에 홀렸던 것만은 확실하네요. 무섭지만 재미있는, 그래서 끊을 수 없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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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물
전건우 지음 / &(앤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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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귀신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수귀, 물귀신이라잖아요.

익사 사고가 빈발하는 강이나 계곡에는 수귀가 있는 거라고, 매년 여름 휴가철에 나오는 뉴스가 남의 일이 아니라서 더 무서운 것 같아요.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다가 같이 빠져버린, 물이 삼켜버린 안타까운 생명들... 물이 깊은 것도 아니고, 물살이 센 것도 아니었는데... 늘 그렇듯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네요.

《어두운 물》은 전건우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제목에서 짐작했듯이 검은빛이 감도는 현천강을 배경으로 한 공포 호러 오컬트 소설이네요.

방송국으로 걸려온 이상한 전화가 끔찍한 사건의 시작이네요. 제보를 받고 직접 현장에 나가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방송국 사람들, <비밀과 거짓말> 제작진이 겪은 이야기라서, 각 장이 테이크 TAKE 로 나뉘어져 있어요. TAKE 1 촬영부터 TAKE 10 결말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네요. 사실 제보 전화부터 소름이 오싹 돋았는데 가라앉을 틈이 없었네요.

ㅡ 네. 비밀과 거짓말 제작진입니다.

ㅡ 제보······ 해도 됩니까?

ㅡ 그럼요. 제보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어떤 걸 제보하시려고요?

ㅡ 수귀······

ㅡ 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ㅡ 수귀가 있습니다. 물귀신.

ㅡ 아! 물귀신이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물귀신, 그러니까 수귀를 목격하셨나요?

ㅡ 파주에 현천강이라고 있습니다. 거기 수귀가 삽니다.

ㅡ 파주, 현천강. 실례지만 이곳에 수귀가 산다는 증거 같은 게 있을까요?

ㅡ ······.

ㅡ 여보세요? 제보자님. 여보세요?

ㅡ ······ 강둑을 지나면 ······ 밤에 ······ 물에서 수귀가 나와 손짓을 한답니다. 같이 가자고.

ㅡ 아! 그러니까 그걸 직접 보셨다는 거죠?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ㅡ 넷이 들어갔는데······ 둘만 나왔습니다. 수귀가 끌고 가서······

ㅡ 익사 사고가 있었나 보군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습니까?

ㅡ 아무도 안 믿어 줘서······.

(···)

ㅡ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사고를 당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ㅡ 나야.

ㅡ 네?

ㅡ 물에서 못 나온······ 둘 중 한 명······ 나야. (30-32p)

도대체 현천강 부근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문제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나선 방송국 제작팀이 현장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고,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서 제작진과 출연진들, 전문가로 온 교수, 무속인과 애동제자까지 꼼짝없이 대피하게 됐다는 거예요. 마치 가둬버린 것처럼 말이죠. 단체로 뭔가에 홀린 듯이, 그들은 끔찍한 밤을 보내게 되는데... 죽고, 다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네요. 이들 중에서 막내 작가인 민시현은 남들에게 숨기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그게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하면서 어두운 비밀을 추적하는 역할을 맡게 되네요. 물은 소리 없이 스미고, 흔적 없이 모든 걸 쓸어 버린다는 말이 딱 맞네요. 폭우와 어둠을 몰고 온 수귀의 깊은 원한은 무엇일까요. 검은 강이 아무리 깊다 해도, 사람 속보다 더 깊고 어두울까요. 마지막 장, 검은 바탕 위에 적혀 있는······ 끝까지 소름 돋게 만드는 이야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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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한 철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에티카』 해설서
황진규 지음 / 철학흥신소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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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자연스러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 책에서는 그 답을, 우리에게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알려주네요. 근데 왜 실천이 어려운 걸까요. 그건 본성을 본능으로 오해하여 왜곡된 욕망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앎'으로 '삶'에 이르는 방법과 '삶'으로 '앎'에 이르는 방법이 지헤로움으로 가는 길이요,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네요. 바로 철학흥신소를 운영하며 앎과 삶을 연결하고 있는 황진규님의 책이 나왔네요.

《스피노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한 철학》은 황진규님이 마흔 즈음에 쓴 『에티카』에 관한 해설서, 개정판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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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유령들
M. L. 리오 지음, 신혜연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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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우린 어쩌다 이렇게 끔찍한 인간들이 된 걸까?"

"모르지. 원래부터 끔찍했는지도." (306p)

서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 그들은 미처 몰랐을 거예요. 1997년 9월, 델러처 고전예술학교 4학년, 연기 전공인 일곱 명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예술학교 특유의 자유로운 캠퍼스 분위기에서 불쑥 살인 사건이 등장하리라곤, 저 역시 예상하지 못했네요. 놀랍게도 이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대 위가 아닌 현실에서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통해 펼쳐내는 데에 성공했네요.

《셰익스피어의 유령들》은 M.L. 리오의 데뷔작이자 셰익스피어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인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하네요. 첫 장에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 4학년생 일곱 명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어요. 리처드는 거침없고 솔직한 성격,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조각 같은 외모로 장군, 폭군 등 강렬한 배역을 도맡고 있으며, 넘치는 자신감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에요. 메러디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당당한 매력을 살린 유혹적인 배역을 주로 담당하고 있고, 2학년 봄부터 리처드와 사귀기 시작했어요. 렌은 리처드와 사촌 관계지만, 그와는 상반된 작은 체구와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어요. 알렉산더는 활기차고 장난스러운 성격에 어울리는 악당, 요정 배역을 자주 맡고 있으며, 늘 약물이나 알코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필리파는 매사 침착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큰 키에 올리브색 피부, 중성적인 매력으로 여성은 물론 남성 배역까지 모두 소화하고 있어요. 메러디스와 렌에게 밀려 비중 없는 배역을 맡고 있어요. 올리버는 여러모로 지극히 평범하고, 스스로 동기들 중 가장 재능이 없으나 4학년까지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역이든 적당히 맡을 만한 실력이지만 무대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에요. 근데 프롤로그에 올리버가 '나'의 화자로 나와서 깜짝 놀랐네요. 제임스는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로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배우예요. 친구들이 인정하는 잘생긴 외모와 아이 같은 순수한 감성을 지녔으니 누군들 싫어하겠어요. 그를 싫어한다는 건 그의 탓이 아니라 그를 시기하는 마음 때문일 거예요. 마치 잘 짜여진 연극 무대처럼 일곱 명의 캐릭터가 누가 하나 빼놓을 수 없이, 각자의 배역을 상징하는 듯 보이더니, 역시나 서서히 갈등이 고조되면서 실인 사건까지 벌어졌고, 잔인하게도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주제, 인간 심리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왔네요.


"교수님도 우리 모두 자신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어. 난 트로일러스 같은 사랑에 빠진 바보 역할을 하는 데 진력이 났고, 너도 늘 조력자 역할만 맡는 데 질렸을 거 아냐."

"그렇네, 네 말이 맞을 지도."

"뭐가 웃겨?"

"아무래도 크레시다 역은 네가 해야겠다. 우리 중에 그 역을 맡을 만큼 예쁜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25p)

"자, 누가 한번 말해볼래? 우리의 좋은 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뭘까?"

"두려움이요."

"맞아.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지?"

"약점을 들키는 거요."

"바로 그거야. 우리가 연기하는 건 기껏해야 인물의 50퍼센트밖에 안 돼. 나머지는 그냥 자기 자신이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자신의 실체를 내보이는 게 두려운 거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바보 같아 보일까 봐.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열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일 뿐,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러므로! 그 두려움을 없앨 거야, 바로 오늘부터. 숨기려고만 들면 좋은 연기를 해낼 수 없어." (46p)

"배우란 원래 불안한 존재니까. 감정과 자아, 질투라는 자극적인 요소들이 연금술을 만나 탄생한 신비로운 생명체. 그것을 한데 모아 뜨겁게 가열해 휘저으면 때로는 황금이 된다. 또 때로는 파멸이 되기도 하고." (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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