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는 정신이 누른다
김남호 지음 / 슬로우북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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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길을 걷다가 하늘이 예뻐서, 음식이 맛있어 보여서,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서...

언제든지 스마트폰으로 일상의 많은 것들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요. 사진기가 처음 발명된 시점부터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진을 찍는 행위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요하는 분야였어요. 누구든지 손쉽게 사진을 찍고, 더 많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진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예술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셔터는 정신이 누른다》는 철학자이자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남호 교수의 책이에요.

이 책은 저자의 사진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과 '사진은 어떻게 정신을 반영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부산, 울산, 대구 등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보다 깊이 풀어낸 것이라고 해요. 사진가로서 꼭 필요한 것은 '정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 책에서는 각 장을 Large Piece 로 나누어, '나에 관한 어휘들', '장어로 세례를 받은 날', '어느 간판', '렘브란트와 신디 셔먼', '카메라와 화각의 선택', '장르 너머'라는 소제목으로 사진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사진이 어떻게 철학과 맞물리는지, '나'라는 존재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요. 저자는 11년의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16년 귀국했고, 2017년부터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바닷가로 나가 그냥 찍고 싶은 대로 찍었는데, 2019년 김홍희 사진가를 만난 뒤로 달라졌다고 해요. 바닷가, 수산 시장에서 찍은 사진 열다섯 장을 김홍희 선생님께 보내어 평가를 부탁드렸는데, "당신 사진엔 삶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50p)라는 평을 듣고는 그동안 작업한 사진들을 모두 버렸대요. 며칠 뒤 그분을 보러 부산 기장에 갔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대뜸 "장어구이 먹습니까?"라는 물음에 차마 먹지 못한다는 말을 못해서 기장 시장 안의 장어구이 집으로 들어가 껍질이 벗겨진 채 꿈틀거리는 장어를 마주하고 소름이 끼쳤대요. 원인 모를 뱀 공포증을 앓고 있어서 뱀을 닮은 장어를 좋아할 수 없었고 현실을 직시하기 싫어서 두 눈을 감고 싶었는데, 그때 장어의 잘린 몸통이 석쇠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지금까지 타인의 주변만 겉돌았다. 이건 나의 못난 모습니다. 논문에서 다뤘던 '인간'이 아닌, 살과 피를 가진 타인의 삶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52p)라는 강렬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요. 토할 듯 역겨웠던 장어의 살점이 다 익어 입에 넣으니 맛있었다고, 세상의 새로운 살결을 벗기고 엿봐야 한다는 깨달음 덕분에 그날은 구루 김홍희에게 장어로 세례를 받은 셈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예술가-자아는 결코 쉽게 창조되지 않는다. 그를 가로막던 나의 모습과 먼저 대면해야 한다. 그걸 인정해야 하고, 그 모습과 작별해야 한다. 니체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태워서 재로 만들지 않고는 내 안에 새로운 불꽃을 창조할 수 없다." (53p)

누구든지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모든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건 아니에요. 예술 사진은 사진가의 정신이 일관되게 반영되는 동시에 보편성을 지녀야 해요. 작가 정신을 갖는다는 건 퍼즐의 큰 그림이 무엇인지 숙고하는 것인데, 일련의 사진이 일관된 방식으로 작가 정신을 드러내려면 퍼즐의 큰 그림이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큰 그림의 부재는 곧 작가 정신의 부재이며, 작가 정신이 부재하는 곳에 그 어떤 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저자는 여섯 개의 프로젝트와 작업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퍼즐의 큰 그림을 맞춰가는 과정을 알려주고 있어요. 그토록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었네요.

"사진가는 남들이 쉽게 엿보지 못한 세계를 창조해 내야 한다. 그 결과물은 뛰어난 시각 예술에 반영된 형식적 구조를 갖춰야 한다. 더 나아가 그 결과물, 즉 사진이 작가의 정신과 잘 부합되어야 한다. 대개는 작가의 생각 따로, 작품 따로이다. 그 둘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큰 그림을 완성해 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큰 그림과 한 조각의 사진을 늘 함께 생각해야 한다."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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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감각 - 이상하고 가끔 아름다운 세계에 관하여
미시나 데루오키 지음, 이건우 옮김 / 푸른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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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한 번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거의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를 만나는 건 꽤 신선한 즐거움이에요.

그 주인공은 바로 '잡화'예요.

《잡화감각》은 미시나 데루오키의 책이에요.

저자는 2005년 도쿄 니시오기쿠보에 잡화점 FALL 을 개점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고, 《잡화감각》의 그의 첫 책이고, 《잡화의 끝》 (2020), 《파도치는 곳의 물건을 찾으러》 (2024)를 썼다고 하네요. 그동안 살면서 딱히 잡화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보니 잡화점에 갈 일도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잡화를 소비해왔고, 나름의 잡화감각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했네요. 저자는 10년 이상 잡화에 둘러싸여 살면서, 사람들이 어떠한 물건을 보고 이게 잡화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기준이 점점 느슨해지는 현상을 주목했고, 세상의 모든 물건이 잡화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네요. 물건과 물건 사이에서 가치를 만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자의 말처럼 기준이 애매모호해질수록 잡화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서 물건의 쓸모는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물건 자체의 기능을 따질 필요는 없어진 거죠. 저자의 가게를 보고 누군가 반쯤 농담 삼아 무엇이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는 평을 했는데 이런 가게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이 별나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부터 저속한 물건까지 차별 없이 교류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된 거라고 하네요. 잡화의 탁류에 휩쓸린 탓이라고요. 아무래도 그 때문에 잡화세계를 열심히 생각하게 됐고, 잡화감각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나봐요. 잡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구석까지 잡화감각으로 꽉 찬 곳에서 잡화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행위만으로 퍼져가는 잡화화 현상을 어찌할 수는 없지만, 그 생각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독자들의 몫이 되었네요. 저자가 우려하는 점은 본래의 기능성을 밀어내고 귀엽고 멋지다는 이미지, 잡화감각에 의해 도구가 잡화로 인식도어버리는 현상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지점이에요. 디지털 시대의 욕망은 알고리즘에 의해 분류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밀려가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흘러가지 않도록, 잡화감각의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이네요.



"'잡雜'이라는 글자는 분류하고 남은 '그 외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분류에 속하던 물건들이 그 외의 것에 지나지 않았던 잡화에 점점 지분을 빼앗기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자연스레 잡화는 전문적인 사용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린 물건들을 발견하는 즉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예전에는 잡화점이라 부를 만큼 팔자 좋은 가계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생활필수품을 같이 취급하는 구멍가게 정도일까? 하지만 그런 가게는 잡화점이라기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갖춘 도구점이라 말하는 편이 옳다. 물건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왕좌를 차지해온 것은 분명 도구이며, 잡화는 언제나 그 외의 자질구레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서비스 자본이 도구를 대신한다.

(···) 서서히 도구를 멀리하는 대중에게 어떻게 물건을 팔 것인가? 그때 자본가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패션과 같은 이미지의 차이이며, 동시에 대중들에게 나타난 것이 잡화감각이다. 이미 가위든 망치든 페인트든 제품의 성능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멋지거나 재미있거나 아름다워야 한다."

(16-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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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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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유령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보이지 않는 건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어요.

특히 그 죽음이 예기치 못한 사고였다면 남은 이들에겐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서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는 강령의식이 생겨난 것 같아요.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 있었네요. 강령회 또는 교령회(seace)는 죽은 이의 영혼을 소환하여 그 영혼과 대화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서 영혼과 사람들을 매개할 영매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참가하는 사람들은 영매를 중심으로 접선을 위한 탁자에 둘러앉아 의식을 통해 망자의 혼이 영매에 빙의되어 소통하는 방식인데 19세기 중후반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성행한 강령의식의 일종이래요. 강령회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는 강령의식 자체가 하나의 과학으로 여겨져서 당대의 저명한 작가나 과학자들도 관심을 가졌대요.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가족을 잃은 후 심령 현상에 심취하였고,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도 함께 종종 참석했다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강령회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사기 행각이 탄로나면서 점차 유행은 사그라들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극소수의 오컬트 신봉자 사이에서만 유지되고 있고, 오늘날에는 악령을 부르는 의식이라며 유행했던 찰리찰리 챌린지가 있는데 분신사바, 위저보드와 흡사한 내용이라고 하네요. 공포영화에서 봤던 소재들이라 낯설지는 않네요.

《런던 비밀 강령회》는 사라 페너의 오컬트 미스터리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19세기 런던 웨스트엔드 신사 전용 단체인 런던 강령술 협회의 회장 볼크먼이 살해된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예요. 그가 죽기를 바란 사람은 누구일까요. 런던 강령술 협회의 심령부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몰리는 볼크먼과 친분이 두텁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매인 보델린 달레어를 은밀하게 초대했어요. 보델린의 능력으로 경찰이 잡지 못한 볼크먼의 살인범을 알아내기 위한 강령회를 열기 위해서였죠. 보델린 곁에는 그녀의 제자인 레나가 함께 있었죠. 레나에겐 특별한 사연이 있어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유령 따위는 믿지 않았던 레나가 하나뿐인 여동생 에비가 살해당한 후 죽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영매 보델린의 제자가 된 거예요. 원래 에비는 영혼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어서 강령술에 빠져 있었고 잠깐이지만 보델린의 제자였어요. 레나는 유령을 믿을지 말지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여동생이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년에 갑자기 파리로 떠난 보델린을 찾아가 강령술을 배웠던 거예요. 과연 영매의 능력으로 런던 한복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소설은 1873년 2월과 3월, 레나와 몰리의 시점을 번갈아 교차하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페이지 터너, 바로 이 소설을 일컫는 말이네요. 첫 장부터 휘리릭,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네요. 유령보다 더 무섭고 험한 것을 보고야 말았네요.


"크게 뜬 검은 눈동자에 입술이 벌어져 있었다. 레나가 잘 아는 표정이었다.

욕정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레나는 희생자 아버지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았다.

슬픔과 상실감에 그토록 깊이 잠식당해서도 욕정을 품을 수 있다니 상식에서 벗어난 인간이요,

저열한 인간이라고 누군가는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한 감정이 얼마나 뒤틀리고 뒤엉켜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슬픔과 욕정은 역겨운 한 쌍인지도 모른다.

레나는 최근 이 한 쌍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시달렸기에 탁자 맞은편의 남자를 비난할 수 없었다."

(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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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 서사원 영미 소설
패트리샤 박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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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은 한국계 미국인 패트리샤 박의 하이퍼리얼리즘 성장소설이에요.

저자는 뉴욕 퀸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재 브루클린에 살고 있고, 아메리칸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가르치고 있어요. 창의 예술 분야 풀브라이트 장학생, 제롬 힐 아티스트 펠로우십에 선정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며, 호평받는 소설 《리 제인》의 저자이기도 해요. 이번 작품에서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학교와 직장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느낌을 받았던 본인의 경험을 녹여냈다고 하네요. 진짜 솔직한 고백이라고 느꼈어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어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알레한드라 김 Alejandra Kim 이예요. 첫 장부터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네요. 매번 학기초마다 선생님들은 출석부에 잘못 적힌 글자라도 발견한 것처럼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한 적이 거의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동양인의 외모를 가진 여학생이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사용할 법한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부모님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라서, 알렉한드라 김은 한국-아르헨티나계 미국인이 된 거예요. 이름은 하나인데 퀸스 동네 사람들은 "에일", 엄마가 엄청 화가 났을 때는 "알레한드라 베로니카 김", 아빠는 늘 "알레하-야", 그리고 학교 친구들은 "앨리"라고 부른대요. 본래 이름도 정확하게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름과 얼굴, 인종, 민족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려줘야 한다는 건 너무 짜증나고 진이 빠지는 일이에요. 앨리는 현재 학비의 90퍼센트를 지원받으며 부유한 백인 고등학교 퀘이커 오츠에 다니고 있지만 나머지 10퍼센트 학비가 부모님에게 큰 부담이 됐어요. 아빠는 앨리에게, "꿈을 크게 가지렴, 알레하-야. 이 나라에서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어." (50p)라며 활짝 웃으며 말했는데, 정작 아빠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랐는지, 가장 소중한 것마저도 놓아버렸어요. 그 일을 겪은 뒤라서 앨리는 창의적 글쓰기 강사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넘겼어요. 왜냐하면 퀘이커 오츠에 입학할 때 아빠는, "넌 이 학교에서 손님 같은 존재야.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말아라." (75p)라고 말했고, 앨리는 조용히 지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근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친구 로럴이 그 사실을 전해듣고 가만 두면 안 된다면서 일을 키우고 말았어요. 로럴의 행동은 곤란에 처한 친구를 도우려는 선의에서 시작되었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볼 때는 선의만 앞세운 경솔한 이타주의적 폭력이었어요. 학교 총회에서 훌륭한 일을 해낸 로럴은 전교생의 박수를 받았고, 앨리는 문화적 무감각의 피해자가 되어 우스꽝스러운 상을 받았으니까요. 로럴은 앨리가 처한 어려움이 겉으로 드러난 인종차별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몰랐고, 자신이 나서는 것이 옳다고 믿었을 거예요. 그래서 앨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혼자 고통을 감내해야 했어요.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어릴 때 낯선 지역에 놀러갔다가 조금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나만 빼고 모두가 다른 말투로 이야기하는 환경이 너무 낯설었거든요. 속으로 저 말투를 따라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네요. 갑자기 세상이 바뀐 느낌이랄까요. 이방인, 아니 외계인이 된 것 같았어요. 겨우 말투만 달라졌을 뿐인데, 그들과 나를 가르는 경계가 생기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결코 앨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소한 경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앨리가 겪고 있는 상황들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네요.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여성,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면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했던 앨리, 그 가면은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지 본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럴 때 외치고 싶은 말은,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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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본 정원 속 작은 곤충들
프랑수아 라세르 지음, 이나래 외 옮김, 마리옹 반덴부르크 일러스트 / 돌배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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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로 산에 갔다가 다양한 식물들과 곤충을 만나고 왔네요.

푸르른 녹음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발견하면서 새삼 신기하고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도시에서는 곤충을 자주 볼 일도 없거니와 무심결에 마주하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숲으로 들어오니 이번엔 입장이 바뀐 것 같았어요.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세밀화로 본 정원 속 작은 곤충들》은 아름다운 곤충 도감이에요.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곤충들이 살고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어요.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인 정원에서 마주치는, 작고 소중한 생명체 100종을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고 있어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정원의 가장 평범한 이웃들을 간단하게 발견하고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해 주는 초대장' (5p)인 거예요. 수많은 곤충들을 그저 똑같은 벌레로만 여긴다면 지구 생태계의 상당 부분을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꼴이이에요. 생물 다양성의 중심에는 작지만 매우 큰 곤충들의 삶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곤충과 거미, 절지동물의 초상 백여 점과 그들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어요. 우선 외적인 생김새를 보고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다는 건 의미 있는 변화예요. 정원 속 어딘가에서 작은 친구들을 만날 때, 이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더군다나 이름 말고도 먹이는 무얼 먹는지, 천적은 무엇인지, 남다른 특징까지 알게되면 한결 친근감이 생길 거예요. 물론 곤충에 대한 공포심이나 거부감이 크다면 예외겠지만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뛰노는 시간이 필요해요. 맨발로 땅을 밟고 다양한 생명체를 만나는 경험은 빠를수록 좋은 것 같아요. 아무런 편견 없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억지로 배울 수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 체험해봐야 느낄 수 있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으니까요. 곤충을 싫어하는 어른들에게 작은 곤충들을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할 수는 있어요. 예쁜 꽃들과 싱싱한 과일들을 좋아한다면 그 식물들을 돕는 작은 손들의 고마움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작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던 거예요. 지구상에 인간만 존재했다면 우리는 이미 저세상에 갔을 거예요. 이 책은 우리에게 소중한 작은 생명체들의 존재를 알려줬어요. 정원이나 공원, 숲 어딘가에서 불쑥 마주하더라도 편안하게 관찰하며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를 떠올리게 되는 아름다운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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