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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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작가는 소설 첫 부분에 한강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투명인간을 등장시킨 것일까?

그 투명인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투명인간 '나'는 헬멧에 고글과 마스크, 버프로 얼굴을 가린 채 자전거로 마포대교를 건너는 중이다. 다리 중간쯤에서 나이가 쉰살은 넘어 보이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이름 석자가 떠오른다. '김만수'

<투명인간>을 읽다보면 한 집안의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아들, 손주까지 4대를 걸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처음에 등장한 투명인간은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고 만다. 투명인간이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바로 그 김만수의 집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만수 할아버지 김용식씨는 부잣집 삼대독자였으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죄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살기 위해 온 식구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다. 그리하여 살게 된 곳이 개운리라는 산골동네다.

해방 이후 어렵던 시절에 인적 드문 산골에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는 잘 몰라도 만수네 가족들을 보면 가난이 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박식한 선비 타입의 할아버지와 무식한 농사꾼 타입의 아버지는 서로 원수지간 같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해도 육남매가 있으니까 그럭저럭 행복한 삶이 아닌가.

그런데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도대체 만수라는 사람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가족을 위한 희생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사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마지막 벼랑 끝에 내몰리고서야 그는 부르짖는다. 투명인간이 김만수를 발견한 그 곳.

똑똑한 맏형 백수의 삶이나 영악한 동생 석수의 삶이나 바보같은 만수의 삶이나 모두모두 가슴이 아프다. 개운리 산골에서 자식 키우랴, 살림하고 농사 지으랴 고생만 했던 만수 엄마나 트럭운전수에게 시집간 큰딸 금희나 야무졌던 둘째딸 명희나 막내딸 옥희까지 여자들의 일생은 또 어떠한가.

- 우리 할아버지가 젊을 때 빚을 져서는 증조할머니하고

할머니, 아버지 데리고 밤중에 도망쳐가지고 내 고향 개운리 산골짜기로 들어오셨다구만.

그래서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결혼해서 우리 육남매를 낳았지.

우리 할아버지가 빚 때문에 도망치지 않았으면 나도 세상에 없었을 거야.

나는 빚 때문에 태어난 거라고, 어떨 때는 빚도 고마운 거야.- (302p)

만수가 한 말이다. 세상에 만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는 투명인간이 맞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거다.

<투명인간>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만수네 가족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거물급 정치인들이나 경제 이야기가 아니다. 티끌같고 먼지 같은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존재가 미약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처음 투명인간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슈퍼 히어로처럼 뭔가 놀라운 능력을 지닌 주인공의 활약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이제서야 알 것 같다.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작가의 말>을 통해 털어놓는다. 현실의 쓰나미라고,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투명인간 그리고 만수가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 것뿐이다. 우리는 다만 고개를 돌린 채 살아온 것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긴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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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박광수 지음 / 청림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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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광수생각>을 즐겨 봤던 기억이 난다.

담백한 그림과 감성을 자극하는 짧은 글 때문에 좋았던 것 같다.

만화가 박광수라는 사람을 나는 잘 모른다. <광수생각>을 즐겨 보긴 했어도 항상 광수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사랑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 사랑은 사과입니다.

처음 우리가 사과를 깎을 때 우리들은 얼마나 정성을 들입니까.

하지만 사과도 그렇듯이 사랑은 신경써서 돌보지 않으면 금새 변색되어 처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과처럼......-

위의 글은 과거 광수생각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랑은 사과처럼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껍질을 깎은 사과의 색이 변했다고 해서 사과가 배로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만약 사랑이 사과라면 깎은지 오래되어 변색된 사과도 처음처럼 봐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은 사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과를 바라보는 한결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광수생각> 중에서 유독 이 사과에 비유한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현재 그는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 그 사람이 웃으며 내게 물었습니다.

"깨뜨릴까? 깨뜨리지 말까?"

계란이야 어찌되었든,

우리의 사랑은 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을 보면서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기에도 좋고 느낌도 좋다. 책 표지는 하늘빛을 닮은 파스텔톤으로 소녀의 일기장과 닮아있다.

이번 책에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싶었나 보다.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뭉클해지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그런데 왜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동이 없는걸까.

우리의 삶을 그려내고 이야기하는 일들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 그림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사과였다. 광수생각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여전히 예쁘고 따뜻하게 느껴질테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깎아놓은 사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뿐이다.

사랑이란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알맹이라면 그것이 변질되기 쉬운 사과나 계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푹푹 찌는 여름에는 더욱 그렇다. 흘러가는 물처럼 삶의 모든 것들을 지켜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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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
미헬 파버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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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책을 펼쳐 들었다면 과연 나는 이설리의 정체를 간파했을까?

"이설리는 벌써 몇 년째 이런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낡아빠진 붉은색 도요타 코롤라 승용차를 몰고 A9 간선도로로 나가 순찰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과가 좋아서 자신감이 한껏 치솟을 때조차 앞으로 두 번 다시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태운 히치하이커만큼 만족스러운 대상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설리의 이 같은 도전에는 약간의 중독성도 없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함께 집으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한 멋진 남자를 태우고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남자를 그리곤 했다. 옆에 앉은 남자의 튼튼한 어깨와 티셔츠 속에서 오르내리는 가슴을 훔쳐보며 그의 알몸이 얼마나 근사할지 상상하는 동안에도, 행여 그보다 더 멋진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쪽 눈으로는 계속 도로변을 주시하는 그녀였다." (15p)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책 소개와 광고를 통해 알게 된다.

<<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동명영화 원작소설 >>

"인간 신분으로 지구에 떨어진 외계 존재의 묵시록적 로드 무비장르적 상상력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SF 걸작"

그런 점에서 요즘 책들은 펼쳐 보기 전에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마치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그렇다. 이설리는 외계인이다.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지구인 남자를 사냥하는 것이다. 왜 사냥하냐고 묻는다면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좀 의외인 점은 이설리의 삶이다. 외계인이면서 지구인과 다를 바 없이 힘든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자신의 업무에 매달린다. 일이 끝나면 먹고 잠자고 씻고 다시 일을 나가는 반복된 삶이다. 그녀가 살던 외계행성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로 파견된 것은 굉장히 절망적인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슨 형벌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게 아니라면 순전히 생계를 위해서 밑바닥 인생을 사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랄까.

특별한 능력을 가진 멋진 외계인을 상상했다면 이설리의 모습이나 임무가 너무나 실망스러울 수 있다. 체격 좋은 근육질 남성만을 노리고 차에 태워 농장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위해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육감적인 가슴을 노출하면서 운전하는 것뿐이다. 어쩌면 단순 노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설리에게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일인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이설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건지 궁금했다. 외계인이라는 정체만 아니라면 인간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다.

무엇보다 황당하면서도 놀라운 존재는 농장 주인의 아들 암리스 베스다. 마치 흔해빠진 멜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돈많은 아버지 덕분에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서 생계를 위해 일하는 농장 외계인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동물의 인권보호와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전형적인 이상주의자 같다. 근본적인 해결책도 없으면서 혼자 착한 척 하는 느낌이다.

지구를 배경으로 인간의 형상을 한 외계인이 저지르는 인간사냥이 묘하게도 인간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고기를 보면서 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까? 반대로 소, 돼지, 닭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도살과정은 생략된 채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를 구입하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이나 혐오감 없이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 돼지, 닭이 자기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이 과연 동물을 잡아 먹을 수 있을까?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문득 이 책을 덮고나니 고기를 먹는 일이 굉장히 잔인하고 파렴치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이러한 생각만으로 육식을 끊기에는 이미 입맛이 길들여졌다는 사실이다.

under the skin 알면 알수록 섬뜩한 현실이다. 머나먼 우주 외계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들춰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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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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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에 관한 책이다.

제목에 비하면 좀 딱딱한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여러가지 사례를 읽다보면 조금씩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DNA 분자를 나타내는 A, C, G, T 라는 4가지 염기라는 것과 염기 배열 순서에 따라 유전 정보가 달라진다는 정도였던 것 같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는 DNA라는 우리 몸 속 이야기와 함께 역사적 이야기를 통해 유전학을 설명한다. DNA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도구이자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제목으로 등장한 바이올리니스트가 궁금할 것이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이탈리아의 니콜로 파가니니가 주인공이다.

그의 놀라운 연주 실력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 재능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파가니니를 지배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DNA였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파가니니는 손가락을 아주 유연하게 만드는 유전 질환인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증후군이 있으면 결합조직의 주성분인 콜라겐을 많이 만들지 못하여 모든 관절이 심하게 뒤로 멀리 구부러지며 새끼손가락을 나머지 손과 거의 직각 방향으로 펼칠 수 있었다고 하니 바이올린 연주자로는 최적화된 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연주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장점이지만 평생 동안 관절통, 시각 장애, 호흡 곤란, 쉽게 손상되는 투명한 피부, 근육피로 등 건강상의 문제를 초래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다. 만약 우수한 유전자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다면 영화 <가타카>를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 유전학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면 더욱 알맞은 영화일 것이고 설사 DNA는 전혀 관심이 안 간다고 해도 정말 볼 만한 영화다. 이번 기회에 다시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의 머리카락이나 타액을 검사하여 우수한 유전자를 가졌는지 파악하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피 한 방울, 피부 한 조각, 타액만으로 인간의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건강하고 똑똑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면 유전자 선택을 100% 할 거라고 확신한다. 주인공 빈센트는 자연의 섭리로 태어난 아기였기 때문에 그의 유전자는 심장 질환에 걸릴 확률 99%에 범죄자 가능성을 지녔고 31살에 사망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부모는 빈센트의 운명에 좌절하여 둘째 아이는 완벽한 유전자를 선택한다. 바로 빈센트의 동생 안톤이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완벽한 동생과의 수영 시합에서 이긴 빈센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되돌아갈 힘들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거야"

완벽한 육체보다 앞선 것은 놀라운 정신이라는 것을 보여준 빈센트를 보면서 이것이 기적이구나 느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아무리 완전한 인간 유전체 염기 서열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인간의 본질을 밝혀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고백처럼 유전자 검사를 받았을 때 파킨스병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에 파킨스병에 관한 정보를 받지 않으려 했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어렵사리 결과를 봤을 때 파킨스병에 걸릴 위험이 높지 않아 안심했다가 이후에 결과를 갱신하는 과정에서 "파킨스병에 걸릴 확률이 약간 더 높아짐"이란 결과로 바뀌었으니 참 야속한 일이다. 현재 유전학의 수준은 개인에게 유전적 유죄선고를 내리는 데에 그친다. 앞으로 얼만큼 더 발전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위대한 정신이 존재하는 한, 유전과학은 확실성이 아닌 확률이라는 걸 기억해야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유전과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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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꿈결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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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마치 오래된 친구 이름처럼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좋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마음까지 흐믓해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간혹 외국작품 중에는 번역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부분 때문에 작품 자체의 매력까지 반감시키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읽었던 <데미안>은 번역이 문제될 만큼 안 좋았던 기억은 없다.

사실 <데미안>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읽었을 뿐이지, 번역이 더 완벽한 책이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반 독자에게 번역을 비교하라는 건 그만큼의 자신감이겠지만 <데미안>이라는 작품이 번역에 의해 좌지우지 될 정도로 난해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데미안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이제는 싱클레어의 시각이 아닌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의 시각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처음 만난 시기가 열한 살도 채 되기 전이라는 건 어른이 된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린애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심오한 내용이라 어른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뿐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과거를 돌아보면 열 살이라는 나이에는 뭔가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헤르만 헤세의 삶을 봐도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길을 가려고 했지만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로 힘든 십대 시절을 보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청소년 자살은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십대 아이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것일까. 헤르만 헤세는 에밀 싱클레어를 통해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십대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누구나 겪어야 할 혹은 겪었던 시절의 모습이며 인간 본질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낡은 생각들을 흔들어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생각이 생각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생각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소년이지만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고, 어떤 순간에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면서 늙거나 젊지도 않고, 어쩐지 천 살은 된 것 같은, 아니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전혀 다른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듯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때문에 연극으로 본 <데미안>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데미안인 척 한다는 건 용납될 수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데미안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내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똑같았다." (265p)

<데미안>의 마지막 문장이다. 문득 지금 이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내 모습을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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