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영어의 정석
김병용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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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영어의 정석>은 영어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언어 생태적 특성에 따라 설명해놓은 해설서라고 할 수 있어요.

제목에서 '정석'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책인 것 같아요.

책의 구성을 보면 얼마나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설명되었는지 알 수 있어요.

일단 언어의 개요부터 시작해요. 영어를 배우면서 머리를 쥐어뜯어본 경험이 있다면 인간의 언어라는 근본적인 접근이 신선하게 느껴질 거에요.

생활영어에 관한 책이니까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회화 문장들이 열거되어 있으리란 예측을 했다면 완전히 빗나갔죠.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어떤 언어의 구성 체계인 소리, 단어, 문법 및 대화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어요.

즉 영어 소리, 영어 발음, 말 배우기, 말의 구조, 필수 어법, 회화와 질문, 회화의 실제, 영어 단어 순으로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어요.

성공적인 언어 학습을 위해서는 배우려는 언어와 그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학습 동기가 중요해요. 

이 책에서는 인지주의 학습 이론을 바탕으로 영어를 분석하고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유창한 영어회화를 하고 싶다면 말과 글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영어를 배울 때 말과 글이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배울 수 있어요.

영어는 중세시대에 모음 대변화 시기를 거쳐서 영어의 발음과 철자의 불일치 문제가 심화되었다고 해요. 때로는 원어민들조차도 발음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전에 발음기호를 사용하는 거래요. 정확한 영어 발음을 배우려면 발음기호를 익혀야 돼요. 원어민들의 대부분은 경험에 의존해서 발음하니까 원어민 발음이라고 무작정 따라할 것이 아니라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요. 발음기호에 익숙해지고 영어 발음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 원어민들의 발음도 개인과 지역에 따른 편차가 심하는 것을 알게 된대요. 발음기호를 확실하게 익히면 영어 발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어요. 


국어와 영어는 뿌리가 전혀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국어와 영어의 단어나 문법을 일대일로 짝짓는 방식은 오류가 있어요. 

이 책에서는 소리, 단어, 문법, 대화법 순서대로 영어를 국어와 비교해가며 각각의 특징을 알려주고 있어요.

발음기호에 대한 부분은 발음기호 구성부터 자음과 모음 발음까지 매우 자세하게 소리를 글로 표현하고 있어요. 국어에 없는 마찰음을 정확히 발음하는 연습은 쉽지가 않네요.

생활영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하게 시간관계만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일이 진행되는 양상도 함께 나타내고 있어요. 시제와 양상, 서법과 화법 그리고 태, 부정과 관계사라는 필수 어법을 통해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학습할 수 있어요.

워낙 내용이 기본 원리와 구조를 다루다보니 책으로 익히면서 동시에 저자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 같아요.

그야말로 영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 적합한 학습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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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스페이스 - 나를 치유하는 공간의 심리학
에스더 M. 스턴버그 지음, 서영조 옮김, 정재승 감수 / 더퀘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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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정원을 거닐면 행복해지는 이유가 뭘까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연이 주는 청량한 공기와 아름다움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이야기할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곳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힐링을 느꼈다는 사실이에요.

그곳이 바로 "힐링 스페이스"예요.


<힐링 스페이스>의 저자 에스더 M. 스턴버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건축학의 선구자예요.

지금은 애리조자주립대학교의 앤드루웨일 통합의학센터 연구소장과 '장소, 웰빙 및 성과 연구소' 설립소장을 맡고 있으며, 같은 대학 의학 및 심리학과 겸직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해요. 이 책은 나를 치유하는 공간의 심리학, 즉 신경건축학을 통해 치유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뇌과학까지 안내하고 있어요.

"치유의 메카니즘을 찾아서"가 부제라고 할 수 있어요.

자연이 치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은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지만, 실제 과학적 차원에서 연구된 건 20세기 말이에요.

2002년 8월, 매사추세츠주 우즈 홀 근처에서 미국건축가협회의 연구소장 존 에버하드가 건축과 신경과학 사이의 접점을 탐구하기 위해 과학자들과 건축가들의 합동 워크숍을 개최했는데, 그 워크숍이 발전해 신경건축학회가 탄생했어요. 로저 울리히는 1984년의 연구에서 자연풍경이 내다보이는 창문이 있으면 치유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입증해낸 환경심리학자로서 그 워크숍에 참여했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교환했어요. 마침내 신경과학, 건축학, 공학의 첨단 도구들을 결합하여 환자가 놓인 물리적 환경의 특성을 측정하고 분석하여 치유를 돕는 요인을 가려내는 공동연구가 이뤄진 거예요. 그리고 2003년에 샌디에고 출신 건축가 앨리슨 화이트로의 아이디어로 '신경건축학회'가 발족했어요.

사실 과학적 근거를 몰라도 우리는 이미 치유를 부르는 공간의 힘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그러나 막연히 느끼는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는 장소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장소를 만들어낼 수도 있어요.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있는 장소와 그 장소가 우리 내면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장소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보고 느끼고 냄새 맡고 듣는 경험을 통해 기억으로 만들어져요. 그런 장소에는 좋든 싫든 어떠한 감정들과 연관이 되고, 그 감정들은 나중에 그 장소로 갔을 때 무수한 감정의 층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해요.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도 그 장소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좌우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람이 너무 많으면 공간이 부족하고 전염병이 쉽게 생길 수 있는 반면에 사람이 너무 적으면 고립감을 느끼고 우울해질 수 있고, 적당히 있으면 서로 아프거나 힘들 때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안전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치유의 공간은 어디일까요?

가장 강력한 치유의 힘을 지닌 곳은 바로 우리 뇌와 마음 속이에요.

우리의 감정과 기억이 자신을 치유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빛과 어둠의 정도, 소리와 냄새, 온도와 접촉 등 감각을 통해 뇌로 들어가고, 뇌의 감정중추들을 작동시켜 우리가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만들어요. 이런 감정중추들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을 배출함으로써 면역세포들이 질병과 싸우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이런 소통을 통해 공간과 장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면역체계와 치유능력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또한 사건과 장소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자아를 감지하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해요. 즉 "기억이 나를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치매환자들이 기억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 장소에 대한 감각과 자아의식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기억과 함께 자기 자신도 조금씩 잃어가는 거예요.

치유에서 뇌의 역할을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스트레스를 줄이고 깊은 사랑이나 확고한 믿음, 엄청난 기쁨, 깊은 평온과 같은 긍정적 감정들을 강화시켜야 해요. 

마지막으로 저자는 도시와 세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어요.


19세기가 도시 전염병의 시대였고 20세기 초반은 도시 전염병이 소탕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전염병 확산이 증가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질병을 심화시키는 사회 기반시설과 환경을 바로잡는 것이 

정치 지도자와 보건정책 전문가들이 할 일이 될 것이다.

유엔 세계보건기구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2007년에 기후변화가 건강에 끼치는 역할에 초점을 둔 보고서를 발표했고,

같은 해에 세계 보건기구 사무총장인 마거릿 챈 박사는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강연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후는 전염병의 지리적 분포를 규정하고,

날씨는 그 심각도를 결정합니다.

기후변화는 금세기를 규정하는 건강문제입니다."   (412p)


소름돋게 정확한 예측이었네요. 우리는 전 지구적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지구온난화로 인해 과거에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던 지역에서도 병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면서, 일부 학자들은 지구온난화가 계속 된다면 전염병의 엄청난 확산과 대규모 기상재해가 더 자주, 더 심하게 발생할 거라고 예측했어요. 

이 책은 2009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우리나라에는 2013년 출간된《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를 2020년 재출간한 거라고 해요.

책 속에는, 서울의 스모그 사진과 함께 '2013년까지 5년간 한국의 연평균 스모그 발생 일수는 130일에 달했다. 2020년에도 서울은 여전히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라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어요. 비교 대상으로는 뉴욕을 들면서, '뉴욕은 어떻게 건강한 도시가 되었나?'라는 제목으로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도시환경의 장점을 소개하고 있어요. 세상에나, 그토록 건강한 도시가 코로나로 인해 최악의 도시가 될 줄이야... "이렇게 추운데 무슨 지구온난화?"라고 당당히 말하던...

하루 빨리 코로나 치료제가 개발되어 모두가 안전한 힐링 스페이스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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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에 딱 좋은 단위, 원소, 수식
나이스크 지음, 후나토 요시아키 감수 / 미메시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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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는 척"이라는 수식어를 보고 웃었어요.

실제로 누구 앞에서 아는 척 할 일은 없지만 뭔가 알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했거든요.

<아는 척에 딱 좋은 단위 원소 수식>

일상에서 거의 사용할 리 없는 단어 같지만 책을 펼쳐보니 새로운 눈이 생긴 것 같아요.

그동안 몰라서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길이, 넓이, 무게, 부피, 시간 ...

세상의 모든 것을 측정하는 척도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단위부터 소개하고 있어요.

미터, 야드, 풋, 피트, 인치, 해리, 광년, 제곱미터, 에이커, 시시, 리터, 갤런, 배럴, 킬로그램, 톤, 캐럿, 파운드, 온스, 일, 초, 분, 시간, 주, 월, 년, 세기, 노트, 마하, 칼로리.

제가 딱 좋아하는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어요. 마치 그림 사전 같아요.

색깔별로 단위는 분홍색, 원소는 파랑색, 수식은 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단위의 세계에도 <국제표준>이 있어요. 

<SI 단위>가 바로 그것.

SI란 <국제단위계>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의 머리글자를 딴 거예요.

18세기 말,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똑같은 단위를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1875년에 우선 <미터 조약>부터 채택되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통일되지 않는 분야가 있자 1960년 파리에서 열린 제11회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SI 단위를 단일한 실용 단위로 채용했어요.

2018년 11월 16일 국제단위계의 7개 기본 단위 중 질량, 전류, 온도, 물질량 등 총 4개 물리량에 대한 단위가 새로 정의되었어요.

SI 기본단위 = 미터(길이), 킬로그램(질량), 초(시간), 암페어(전류), 켈빈(온도), 몰(물질량), 칸델라(광도光度)

일상에서 많이 쓰는 <cc>는 국제 기준에서는 권장하지 않는대요. 

<cc 시시>란 <세제곱센티미터 cubic centimeter>의 영문 머리글자이며, 1시시는 1세제곱센티미터를 말해요.

SI 단위에서는 <세제곱센티미터>가 정식이며 <시시>의 사용은 권장하지 않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계량컵이나 배기량을 말할 때 일상에서 많이 쓰는 단위라는 것.


원소에 관련된 용어들은 원소, 원자, 원소기호, 원자 번호, 녹는점, 끓는점, 어는점, 동소체, 주기율표부터 알아야 돼요.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원소들 44개를 소개하고 있어요.

1번 수소부터 44번 라듐까지.


수식은 수학이나 과학의 세계에서 반드시 등장해요. 

여기에서는 수학, 생활, 과학, 경제로 나누어 각 분야에서 성립된 수식을 소개하고 있어요.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수학식, 시차 계산과 같은 생활식, 아인슈타인 공식과 같은 과학식, GDP 측정과 같은 경제식.

수식 자체의 풀이법까지는 몰라도 그 수식이 어떤 의미인지르 아는 것만으로도 조금 똑똑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만족을 위한 공부로 제격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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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하지 못한 말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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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어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몰랐으니 괜찮다고 넘길 수 없는, 넘어가지 않는 뾰족한 가시들이 있네요.

누구든 꼭 말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했던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누군가 용기내어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한다면 꼭 들어야만 해요.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읽으면서 다시금 <괴물>이 떠올랐어요.

이런, 시인의 모습을 한 괴물 하나 잡아서 끝날 일이 아니구나.

괴물들이 저렇게 커질 동안 우리는 무얼 했나.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다함께 힘을 합쳐 잡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


사실 이 책은 최영미 시인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신문 잡지 등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엮어낸 산문집이에요. 첫 번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이후 순탄치 않았던 시인의 삶.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보였어요.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 최영미로서 살기가 만만치 않았겠구나.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맞서 내 할 말을 하는 사람, 내 길을 가는 사람.

2017년 3월,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개정판이 12년 만에 출간되었는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에서 누락된 표현이 있음을 발견하고 속이 쓰렸다고 하네요.

소설 내용은 아버지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5·16 반혁명 사건'에 가담해 구속되며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시장에서 빵 가게를 차린 엄마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르던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하경의 70년대, 서울 변두리의 이야기라고 해요. 3년이 지난 지금 2쇄를 찍어 마지막 문장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을지 궁금하네요. 암튼 속이 쓰렸을 시인을 위하여, 멋진 마지막 문장의 완성을 위하여 누락된 '내겐 더'를 첨부하여 적어볼게요.


생성되고 잊혀지고 다시금 발굴된 과거도 지워지리라.

시간의 모래 위에 새겨진 낙서처럼, 해변의 발자욱처럼 이 밤이 지나면 파도에 씻겨질 것을......

스스로 할퀴었던 칼날을 세상 속에 그만 파묻고 싶다. 

내겐 더 흘릴 피가 없으니까.    
  
 (86p)


'내겐 더'라는 문장의 무게를 느꼈어요. 

언젠가 어느 기업의 연구원과 간부들을 상대로 진행한 강의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대요.


"원칙을 지키는 건 쉬워요. 그냥 (원칙을) 지키면 돼요.

그러나 타협은 어려워요." 

타협하면서도 망가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있으면 얼마든지 절충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킬 자신이 있으면 악마하고도 거래하는 게 정치 아닌가.

세상에 내가 타협을 가르치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더 변해야 쓰겠다. 

   _ 2017.06.03   (109p)


절충은 곧 배신이며 타락이고, 원칙을 지키는 게 어렵지 타협은 쉬울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젊은 시인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타협을 말하게 되었네요. 한때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추악한 변신을 보면서 나와 다른 진영에도 옳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대요. 

즉 늘 옳은 쪽도 없고, 늘 틀린 쪽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철이 들었다는 말. 백번 공감했어요.

또한 도로시 파커의 시처럼 선과 악이 미친 격자무늬처럼 얽혀 있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때가 있다는 말. 역시 공감했어요.

그러나 결정적 순간이 있어요.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때. 흉터와 무늬를 구분해야 할 때.

다른 건 다 변해도 오직 이것만은, 변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어쩌면 "아무도 못한 말"은, 이미(Already) 했던 말이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던 말이 아니었을까요.

이 시대의 바른 목소리.

들리시나요?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화> , 2017 겨울,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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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위로 - 산책길 동식물에게서 찾은 자연의 항우울제
에마 미첼 지음, 신소희 옮김 / 심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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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걷고 싶어요.

나무와 풀향 가득한 푸르른 길.

4월이 다 가기 전에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야생의 위로>를 읽고나서 더욱 그 마음이 커졌어요.

이 책은 엠마 미첼이 숲과 정원에서 찾은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저자는 자신이 지난 25년 내내 우울증 환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날마다 숲속을 산책하는 일이 그 어떤 상담 치료나 의약품 못지않은 치유 효과가 있었다고 해요. 

만약 처음부터 이런 고백이 없었다면 이 책은 사계절 숲에 관한 일기로 봐도 무방했을 거예요.

저자 개인에 관한 일기였다면 힘들고 우울한 마음들이 적혀 있겠지만 숲에 관한 일기는 늘 생생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득한 것 같아요.

참 신비롭게 느껴져요.

저자는 집 대문을 나서 800여 미터를 걸으면 동네 숲 어귀에 이른다고 해요. 솔직히 집 근처에 숲이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인 것 같아요.

우리가 숲을 만나려면 멀리 산을 찾아가야 해요. 요즘은 벚꽃 나들이도 못하는 상황이니 숲길 산책은...

숲을 산책하다가 여러 식물을 관찰하고 꽃과 잎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의 책꽂이에서 찾아낸 책 《영국 식물 컬러 소사전 The Concise British Flora in Colour》덕분이래요. 윌리엄 케블 마틴 목사가 이십 대에 영국의 야생화를 수채화로 그리기 시작해서 이 책을 출간할 때는 여든여덟 살이었다고 해요. 거의 평생을 바쳐 만든 이 아름다운 책 속에는 소형 수채화가 1,400점 이상 담겨 있다네요. 저자는 우울증이 극심한 날이면 《영국 식물 컬러 소사전》의 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원에 나가 있을 때와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고 해요. 어쩐지, <야생의 위로>가 탄생한 이유가 있었네요.

일 년 동안 자신의 집 주변의 숲을 거닐며 관찰한 자연들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 것들이 한 권의 책이 된 거예요.

책 속 사진들 중 숲 속 작은 오솔길을 한참 들여다봤어요. 왠지 저 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숲이 품어내는 싱그럽고 푸른 내음을 떠올리면서.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숲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어요.

숲의 마음이 있다면 사계절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는데도 매번 새로운 행복을 느낄 것만 같아요. 

사람의 마음이란 시시때때로 오르락내리락 변하곤 해요. 저 같은 경우는 유독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기분 조절이 어려울 때가 종종 있어요. 

숲을 거닌다는 건 변함없이 든든한 숲의 마음을 느끼는 일이에요. 뭔가 안심되고 평화로워져요.

무엇보다도 이 책은 숲이 주는 위로뿐 아니라 저자의 심경이 그대로 나와 있어서 공감할 수 있어요.

완전하지 않은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걸 숲이 도와주는 것 같아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가 교회에서 느꼈어야 마땅하지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모든 감정이 자연 속에서는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소설가 앨리스 워커 Alice Walker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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