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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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아시나요?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상관 없어요. 실제로 존재하는 고양이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생각하기 나름.

솔직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양자역학의 개념이 너무 어려워요.

설명된 내용을 읽고 그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모르는 거죠.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은 도쿄에 위치한 '마와타 장'이라는 하숙집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2층 목조 건물, 빙 두른 벽돌담에 '마와타 장'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고, 문에 손바닥만한 지붕이 달려 있고, 바닥에는 회색 돌이 박혀 있어요. 

마당에 세운 빨랫줄에는 시트와 목욕 수건 등의 큼지막한 빨래가 걸려 있어요. 

방의 창문들은 대부분 활짝 열려 있고, 2층 베란다에는 화분이 놓여 있어요.

책의 첫 페이지에 '마와타 장' 건물 평면도가 그려져 있어서, 잠시 '추리 소설인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끔 추리 소설에서 살인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면도가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참,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 아니에요. 살인 사건은 물론이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진 않아요.

앗, 그럼 무슨 재미?

대신에 하숙집의 동거인들을 추리 대상으로 보면 색다른 재미가 있어요. 

우선 야마토 요스케부터 소개할게요. 훗카이도 출신인 야마토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서 '마와타 장'에 하숙하게 된 남학생이에요.

새로운 하숙인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돼요.

총 6편의 단편이 연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이에요. 첫 타자가 야마토 요스케예요. 

야마토는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마음에 들려고 열심히 공부한 범생이였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자마자 그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가 뻥 걷어차였어요.

모태솔로 야마토는 절친 미도리카와 슈이치가 우연히 들려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덕분에 대학에 합격했어요. 상자 속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상자 속 자신의 능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과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야마토는 여학생에겐 차였지만 행복한 기분으로 친구에게 합격소식을 알렸어요. 미도리카와는 속으로 저런 착각을 하면서 대학에 붙다니, 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야마토에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설명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친구 사이뿐 아니라 인간 관계가 대부분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서로 안다고 착각하면서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기.

하숙집에 도착한 야마토가 처음 만난 사람은 산뜻한 교복 차림의 어여쁜 여고생 야에코였어요. 야에코는 하숙인은 아니고, 2층에 사는 야마오카 쓰바키에게 놀러온 친구였어요. 야마토가 살게 될 2층 맞은편 방에는 야마오카 쓰바키와 여대생 구지라이 고하루가 있어요. 

하숙집 주인 와타누키 치즈루는 1층 방에 사는데, 자신의 옆방에 사는 마지마 세우를 '나의 내연의 남편'이라고 소개했어요. 내연의 남편?

미혼여성이 치즈루는 왜 세우 씨를 애인, 연인, 남자친구가 아니라 내연의 남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타인들의 이야기.

서로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는 알 수 없는 은밀한 사연들이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조금씩 드러나게 돼요. 그래서 식구라는 말이 생겼나봐요. 타인 간의 거리가 좁혀지는 공간, 그게 집이 주는 힘인 것 같아요. 물론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 거리는 존재해요. 나와 너, 엄연히 다른 두 존재가 서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다만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상자 속 고양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만,

고양이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219p)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깨달았죠.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는 각자의 상자 속에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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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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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냄새들이 있지요.

어떤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기도 혹은 나쁘게 만들기도 해요.

그 중 따끈따근 구워낸 빵 냄새는 뭔가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요.

'행복하다'라기 보다는 '행복한 것 같은'이라고 표현해야 될 것 같네요.

상상만 해도 그래요.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김지현 작가님의 산문집이에요.

맛있는 빵을 볼 때의 심정처럼 이 책은 생김새 자체부터 마음에 쏙 들어요.

모카빵 하나를 손에 든 기분이랄까.

이 책은 문학 작품 속 음식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옥수수 팬케이크 [Hoecake]

 : 클로이 아줌마가 옥수수 가루 반죽으로 만들어내는 팬케이크, 튀김, 머핀,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빵은 그녀만큼 노련하지 못한 요리사들에게는 숭고한 신비와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수준에 오르려고 부질없이 애를 쓰는 동료 요리사들을 입에 올리며 신이 나서 우쭐거리며 두툼한 옆구리를 흔들어대곤 했다.

  _ 해리엇 비처 스토, <톰 아저씨의 오두막>  (45p)


팬케이크는 집에서 자주 해먹는 간식이에요.  옥수수 팬케이크는 해본 적 없지만, 어릴 때 가게에서 파는 옥수수빵을 워낙 많이 사먹어서 추억의 간식이에요. 그런데 과거 미국 남부의 흑인들에게 옥수수 팬케이크가 소울 푸드였다고 해요. 원래 소울 푸드라는 말이  미국 흑인들의 아픈 역사 가운데 자신들을 달래주었던 음식을 가리켜 '영혼의 음식'이라고 부르면서 생겨났대요.

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다보면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조차도 애정이 생겨나요.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듯이, 음식에 대해서도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무엇보다도 책과 음식 이야기를 함께 즐길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생강빵 [Gingerbread]

:  "어라, 누나, 빵집이 없어졌어!"  마이클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러네."  제인도 그쪽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었다. 빵집은 그 자리에 없었다.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신기해라!"  마이클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런데 이 생강빵 진짜 맛있다."

그러고는 둘 다 생강빵을 베어 먹으며 사람, 꽃, 찻주전자 등의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내는 데에 열을 올리느라 그 신기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 <우산을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  (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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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 -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
리하르트 폰크라프트에빙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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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악무도한 성범죄들은 왜 일어날까요.

미제로 남았던 연쇄살인사건의 유력용의자는 주변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지능적인 범죄자였고, 

근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은 겉보기엔 평범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추악한 민낯을 숨기고 있었어요.

그들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공포스러운 건 죄의식과 같은 윤리의식의 부재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타인의 정신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어요. 짐작할 뿐이죠.

그러나 성(性)과 관련된 인간의 감정과 사상에 대해서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범죄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영혼과 정신이 병든 사람들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을 제대로 모르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성과 관련된 행동은 수많은 말썽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한 사람의 신체와 정신 건강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삶과 행복에도 직결된 문제다.

말썽은 온갖 법적 문제를 제기한다. 

특수한 이 문제를 다룰 유능한 역량이 절실하다.

     - 피에르 자네    (480p)


『광기와 성』은 리하르트 폰크라프트에빙 박사가 빈 대학 신경정신과 교수로 재직할 때 집필한 법의학 연구 보고서예요.

1886년 출간된 이 책은 초판이 나오자마자 성과 관련된 병리학과 법의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널리 회자되었고, 정신의학 전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이 더 열심히 읽었다고 해요.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일단 폰크라프트에빙 박사는 성생활이 사회생활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이해했던 사람으로서 억압받던 성을 과학적인 방식으로 치료했던 선구자였어요.

이 책의 핵심은 박사가 연구했던 수많은 사례들 중 대표적인 약 200 건의 사례를 소개한 환자의 편지와 수기라고 할 수 있어요.

일반적인 정신 병리부터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시즘, 동성애, 성도착, 특수 정신병리 문제를 가진 환자들의 사례가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다소 읽기 부담스러운 내용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왜 제목에서 광기라고 표현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심신이 건강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말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라서 정말 충격적이에요. 그러나 점점 읽다보면 그들의 이상 심리와 행동으로 인해 가장 많이 파괴되는 사람은 당사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불운하게 타고난 유전적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는 본인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들의 체험담이 고통스럽게 다가왔어요. 환자들의 입장에서 이상 증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성적 광기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성범죄로 이어지는 현상은 어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정신의학은 그들의 정신병적 의미를 증명해내는 일을 충실하게 해온 반면에, 법률 기관은 정신병리로 보이는 모든 사실들을 극히 편협하게, 경시한 측면이 있어요.

오늘날까지도 성범죄자들은 형기만 마치면 사회로 돌아오기 때문에 사회의 이익과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그런 범법자는 애당초 정신과 성 모두 퇴화한 인간이므로 처벌보다는 보호격리를 해야 한다는 점.

따라서 성범죄는 법관과 의사의 연구가 완전히 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범행의 양상만으로는 절대 진실을 밝힐 수 없다고 해요. 범행이 정신병자의 행동인지 아니면 말짱한 정신으로 저지른 것인지 분간하려면 행위자의 심리에서 원인부터 찾고나서 비정상적 요소가 신경정신병에 해당하는지 확인해야 해요. 정신이 발달하지 못하거나 정지했는지, 정신이 퇴화하거나 병들었는지 확인해야 해요. 신경질환과 정신병은 경계가 불확실하지만 그런 만큼 성범죄자들을 더욱 명확하게 판결해야 돼요. 정신병을 원인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용서받게 하면 안 돼요. 그래서 법의학자의 역할이 막중해요.

알면 알수록 인간의 성(性)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야 할 영역인 것 같아요. 

바로 지금 시대에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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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나는 산책길
공서연.한민숙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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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따스한 봄날에는 '문득 걷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요즘은 더더욱 그럴 것 같아요.

그럼 어디를 걸으면 좋을까요.


<역사를 만나는 산책길>은 우리 삶 속에 살아있는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책이에요.

책으로 배우는 우리 역사는 다소 멀게 느껴지지만 직접 가보면 마음이 달라져요.

역사의 현장에 서 있노라면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안에서 뭔가를 뭉클하게 만드는 힘으로 느껴져요.

이 책에서 소개한 역사적인 장소들은 이미 가봤거나 알고 있던 곳이지만 새삼 그 곳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니 더욱 특별했던 것 같아요.

"아하, 여기가 거기였구나"

제일 처음에 소개한 서울역부터 계동 1번지 중앙고등학교, 혜화동 대한의원 본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단종과 정순왕후 이별길까지 역사 산책에서 서울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에요. 역시 서울이구나, 싶었어요. 이미 가봤던 곳은 맞는데, 그 근처만 가봤지 제대로 역사적 공간을 둘러보지 못했더라고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역사를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들이에요. 

흥인지문 일대는 '동대문'이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죠. 조선 시대에는 도읍인 한양을 들어오는 동쪽 관문인 흥인지문을 기점으로 한양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구역이었어요.

그 흥인지문의 바깥쪽, 서울 종로구 숭인동 일대에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단종과 그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장소가 있어요. 정순왕후 유적지는 지하철 6호선 창신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오래된 가옥들 사이를 걸어 큰길로 접어들면 정업원 터가 나타나요. 정업원 터의 입구는 굳게 잠겨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려면 청룡사를 통해야만 가능해요.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떠나기 전, 청룡사 우화루에서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해요. 

청룡사에서 언덕길을 조금 더 오르면 동망봉이 있어요. 정순왕후가 매일 올라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남편의 안녕과 명복을 빌었다는 동망봉. 현재는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숭인근린공원으로 꾸며져 있어요.

동망봉의 반대편, 청룡사에서 동묘쪽으로 내려와 청계천으로 향하면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이별 장소인 영도교에 다다르게 돼요. 이 다리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을 떠날 때 정순왕후가 배웅을 나와 이별한 곳이에요.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이별했다고 해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 등으로 불렸고,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할 때 지금의 새로운 다리가 개설되면서 '영도교 永渡橋'라는 이름이 붙여졌대요.

정업원 터에서 영도교까지 둘러본 후 동대문 성곽공원을 올라가면 흥인지문과 도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요.

높은 빌딩과 아파트들이 늘어선 서울 도심에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들이 숨어 있었다니, 왠지 보물찾기 같아요. 이 책은 그 보물같은 장소들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조선 시대의 불운한 왕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철종은 왕이 되기 전 강화도에 살았다 하여 강화도령이라 불렸어요. 강화도에 가면 '강화도령 첫사랑길'이라는 산책길이 있대요.

용흥궁에서 출발해 강화산성이 둘러싼 남산으로 오르는 좁은 산길을 따라 30여 분 정도 오르면 청하동 약수터가 있어요. 이곳은 나무를 하러 왔던 강화도령 이원범이 봉이를 처음 만난 곳으로 알려져 있어요. 혼인을 약속했던 두사람은 이원범이 하루아침에 왕위에 오르면서 생이별했다고 해요. 

책 속에 강화산성을 거쳐 남장대로 오르는 길 사진이 나와 있어요. 나즈막히 쌓아올린 돌계단을 보고 있노라니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네요.

역사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뒷이야기들 중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아요. 사실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라서 왕들뿐 아니라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그 당시 백성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절절했을지... 무엇보다도 그때 그들이 살았던 혹은 거닐었던 그 곳을 가보는 역사 산책은 역사를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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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 / 메이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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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은 종교서적이 아니라 디스토피아 소설이에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과 2015년 두 번이나 추천했다는 바로 그 책.

그 이유는 사상적 세계화의 위험성을 묘사한 작품이기 때문이래요.

사.상.적.세.계.화

강대국의 지배적인 문화가 저개발국에 물질적, 세속적 세계관을 퍼뜨려 사상의 획일화로 이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대요.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07년 출간되었어요. 100여 년 전에 그려낸 미래 세계가 마치 예언서처럼 상당 부분 닮아 있다는 점.

또한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게》(1932), 조지 오웰의 《1984》(1949)보다 30여 년 먼저 세상에 나와 최초의 현대적 디스토피아 소설로 평가받는다는 점.

그만큼 선구자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작품 해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서문보다 앞서 해설을 하고도, 책 말미에 부록으로 《세상의 주인》의 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어요.

물론 이 작품을 읽기 위해 해설을 꼭 봐야 할 정도로 난해한 내용은 아니에요.

오히려 저자 로버트 휴 벤슨이 1907년 케임브리지에서 쓴 서문만 읽어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책이 큰 파문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다른 부분에 대한 비판도 환영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내가 바라는 원칙(또한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원칙)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목소리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으려 했고, 

최대한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심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장황한 프롤로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하지만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필요한 부분은 아니다. "   (14-15p)


와우, 1907년이라니!

2020년 지금 시점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가서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 같아요. 

초고속 비행선이 등장하고, 지하 세계에서 인공 태양광으로 살아가며, 누구나 원하면 안락사를 선택하는 모습을 상상했다는 게 놀라워요.

저자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아들이자 촉망받는 성공회 신부였는데, 성공회 교리에 의문을 품고는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당시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라고 해요. 1904년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케임브리지로 부임해 사목 활동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면서 《세상의 주인》을 집필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네요.

어쩌면 그는 개종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세상의 주인》에서는 반그리스도교 세력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야기예요.

세계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줄리언 펠센버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그가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전쟁은 사라졌고, 모든 국가들이 그의 통치를 간절히 원했어요. 겨우 서른둘?  젊은 정치인 펠센버그의 이력은 미국 상원 의원에 당선됐고, 한두 번 연설을 한 후로 대표단에 뽑혔는데, 그의 연설이 뭔가 대중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초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인본주의가 실제 종교처럼 되어 버린 거예요. 그 중심에 펠센버그가 있고, 인간이 곧 신이 되는 범신론이 퍼지면서 펠센버그는 '사람의 아들'이자 '세계의 구원자'로 추앙받게 돼요.

이에 맞서는 인물이 가톨릭 사제인 퍼시 프랭클린 신부예요. 그는 마치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고통과 시련을 겪게 돼요.


'왜, 왜, 왜? 어째서 이 모든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가? 하느님은 어찌하여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215p) 라며 고뇌하는 퍼시 프랭클린 신부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에요. 신앙이란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니까요. 그는 견디기 힘든 시련에 몸부림치면서도 끝내 주님의 길을 걸어가요. 

반면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줄리언 펠센버그의 선택은...

솔직히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누가 나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선택을 강요한다면 어떨까라는. 퍼시 신부뿐 아니라 맨체스터 의원 올리버의 아내 메이블 역시 혼란을 겪는 인물이에요. 프랜시스 신부처럼 아예 변절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과연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아니 누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위기와 맞물려서 더욱 소름이 돋았던 것 같아요.

정해진 답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야 할 답.

퍼시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새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의심이나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나는 주님의 눈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눈으로 보며 걸을 겁니다." (419-4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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