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오해
E, Crystal 지음 / 시코(C Co.)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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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많고 많은, 널리고 널린... 비밀과 오해

어떤 이야기인지 시작도 하기 전에 공감해버렸어요.

굳이 숨기려고 한 게 아닌데 비밀을 갖게 되고, 누군가는 오해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기곤 하죠.

아마 세상에 모든 게 다 사라져도 '비밀과 오해'는 끝까지 남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완벽하게 솔직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애초부터 우리는 자기 마음조차 잘 몰랐으니, 그걸 어떻게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어요.


... 그 일이 있고부터 세주와 유주와 비주는 무얼 드러내고 숨겨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자매가 되어버렸다. 

너무 무서운 일이 순식간에 자매에게 닥쳤고, 자매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 염려까지도 감추는 데 급급해져 버렸다.

언제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부 별일 아닌 것처럼.  (175p)


<비밀과 오해>는 세 자매에 관한 이야기예요.

홍세주, 홍유주, 홍비주.

2년 전 그 일이 있고나서, 세 자매는 각자 떨어져 살았어요. 서로 마주보기 힘들어서 피했어요.

그 뒤로 한 번도 그때의 일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어요. 끔찍한 기억들을 마음에 묻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기어코 그 마음에 상처를 내고,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런 설명 없이, 세 자매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 역시 똑같은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세 자매가 함께 살던 집에는 막내 비주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충수염으로 입원하게 되면서 모두 모이게 됐어요.

인생의 모순인 것 같아요. 분명 안 좋은 일인데, 그 덕분에 모였으니 아주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일.

비밀과 오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비밀이 밝혀져서 받을 충격과 비밀을 몰라 오해하며 괴로운 것과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 충수염 진단은 100%까지 끌어올리기에 한계가 있대.

80%까지 의심되면 그냥 수술한다는 거야. 진단 정확도를 높이려다 충수돌기가 터져 복막염으로까지 번지면

환자가 위험하니까."  비주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막상 수술에 들어가선 설령 충수가 정상이라 하더라도 충수를 자른대."

유주는 비주가 무슨 말을 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난 그 충수가 우리 세 자매 중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

"일단 의심되면 그냥 떼어버리는 거지. 없어져도 상관없으니까."   (79p)


맞는 말인 것 같지만 틀렸어요. 충수돌기를 제거해도 우리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퇴화된 조직이라서 특별한 기능이 없다고 말하는 건, 아직 그 기능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한 마디로 "모른다"는 거죠. 충수돌기의 비밀도 모르면서 다들 오해하는 거라고요.

염증이 생긴 게 충수돌기 탓도 아닌데, 염증으로 아픈 충수돌기만 제거해버리고... 물론 맹장수술을 반대하는 건 아니고.

비주가 자신을 충수돌기로 표현한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만... 염증 때문에 충수돌기를 떼어버릴 수는 있지만 마음은, 아프다고 도려낼 순 없잖아요.

우리가 뭔가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덜 오해하면 좋겠어요. 비밀 중에서 가장 나쁜 건 들통난 비밀이에요. 

결과적으로 형석의 비밀이 최악이었어요. 스스로 판 구덩이 속에 빠진 남자. 

숱한 비밀과 오해가 폭탄처럼 터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요?"

     -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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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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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는 마르코 말발디의 소설이에요.

철학이나 윤리학에 어울릴 것 같은 제목과 소설의 주인공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두 가지 요소가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래 추리 미스터리 장르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천재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인물이죠.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사실 첫 페이지부터 깨알 같은 스포르차 가문의 가계도가 나와서 살짝 긴장했어요. 또한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된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어지러웠어요.

이 모든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를 주목해야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요.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어요. 사실과 진실 그리고 오해와 편견 그 어디쯤에서 그의 활약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라고 할 수 있어요.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전부 소개할 수는 없고, 주요 인물 딱 한 명만 언급하고 싶어요.

루도비코 일 모로.

그는 바리 공작이자 밀라노의 군주예요. 당시 사람들은 루도비코 일 모로에 대해 교황을 전용 사제로 부리고 황제를 집사로 부리는 밀라노의 주인, 한 마디로 대세라고 여겼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에게 고용된 예술가였어요. 원래 임무는 루도비코의 아버지를 기리는 청동 말을 제작하는 것인데, 벌써 4년이 흘렀고 미완의 상태라서 압박감을 느기고 있어요. 아무리 천재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거죠. 

어느 날, 루도비코의 성 안쪽 뜰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어요. 전염병일까봐 걱정이 된 루도비코는 왕궁 점술사를 불러 시체를 확인하게 했어요. 시체에는 어떤 종류의 징표도 없었어요. 칼에 찔린 자국도 단검의 흔적도 없었으며, 몸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어요. 왕궁 점술사 암브로지오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에 본 적 없는 질병일 거라면서 혹시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으니 시체를 옮겨야 한다고 말했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다음에 불려가 시체를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평소 해부학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부검을 의뢰했던 거예요. 이건 요즘의 과학 수사의 개념은 아니에요. 그 시대의 해부학은 금지는 아니어도 내과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는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고, 거의 점술처럼 여겨졌다고 해요. 더군다나 교회 재판소에 알려지면 오해받기 십상이라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대요. 암튼 부검 결과는 질식사였어요. 죽은 남자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던 거예요. 이 사실을 알리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두 가지 사실을 숨겼어요. 죽은 남자의 이름은 람발도 치티, 그가 누구인지 알지만 모른 척 했어요. 왜냐하면 그는 레오나르도의 예전 제자였기 때문에 의심받을까봐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던 거죠.

이런, 천재의 실수인가요. 도리어 숨긴 탓에 루도비토의 추궁을 받게 됐어요. 꼼짝 없이 살인범을 찾아야만 하는 레오나르도.

음, 그 과정이 셜록 홈즈처럼 스펙타클하진 않았어요. 

읽다보니 슬그머니 "인간의 척도"라는 제목을 상기하게 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요.

궁정의 대사로 일하는 지아코모 트로티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나누는 대화 주제는 '돈'이에요.

그러나 진짜 핵심은 '돈'이 아니라 돈이라는 도구을 통해 얻고자 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척도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아요. 비록 이 책 속에는 레오나르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건 수많은 답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왠지 이 소설이 우리에게 건네는 암호 같아요. 풀릴 때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암호.



"돈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돈이 웬만큼 있다면 그럴 거라는 뜻이죠."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아무한테도 돈은 웬만큼 있지 않지. 심지어는 어제 도착한 두 명의 프랑스 귀족도 돈에 대해서 계속 불평하더군."

... (레오나르도는 길가 상인에게 돈을 주고 나이팅게일 한 쌍을 사더니, 새장을 열었어요. 새들은 멀리 날아가버렸어요.)

"... 미안하네만, 자네가 돈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자네의 경우에도 더 많은 돈을 가질수록 자네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잖나."

"친애하는 트로티 대사님, 제 설명이 명확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방금 전에 저 새 장수와 저는 거래를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5개의 작은 금속 조각을 주었고,

그는 저에게 두 마리의 나이팅게일을 주었죠. 우리 둘다 그 5개의 작은 금속 조각이 어떤 의미인지 동의했습니다.

자, 돈은 언어죠. 돈은 그 나름의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모두 그것에 동일한 힘을 부여하는 데 동의했기 때문에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단어와 문장 전부보다 훨씬 강력한 언어죠."

"그렇지. 왜냐하면 모두가 그걸 이해하니까."

"그 반대로, 그게 암호이기 때문입니다."
"암호?"
            (151-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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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안온한 날들 -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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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작가님.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라는 책을 썼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두 권 모두 읽지 못했어요.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매일 밤 응급실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 현장을 지키는 이의 목소리라니... 솔직히 읽을 자신이 없었어요. 이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장이니까.

실제로 응급실을 가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느낄 테니까. 그래서 책조차 피했던 것 같아요.


<제법 안온한 날들>

책 제목에 끌려 작가 이름을 보니, 앗!

이번 책 부제는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라서 안심이 됐어요. 읽을 수 있겠구나... 겁쟁이 같은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첫 페이지를 여니, 다음의 문장이 있었어요.

"너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야. 너는, 그냥 외로운 사람이야."

우리가 처음으로 입을 맞춘 뒤,

당신은 바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아하, 당신이라는 존재는 과거 사랑했던 그 사람이군요, 라고 짐작했어요. 

책의 시작은 "나라에서 당신에게"라는 편지였거든요. 일본 긴키 지방의 시골 마을 나라에 머물던 저자가 1300년 전 궁궐터에 갔다가 그저 주춧돌과 기둥뿌리, 제단만 남은 황폐한 부지를 보았어요. 이 터만 남은 곳을 사람들은 왜 기억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 걸까요. 숙소로 돌아와 비좁은 침대에서 저자는 편지를 쓰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평범하게 사랑했던 옛사람들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믿는 지금 사람들이 떠올라, 저는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 제가 이 도시를 떠돌며 소원했던 것처럼 당신에 대한 마음이 계속 남아 당신을 그리워하게 되어,

당신이 나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각진 돌이 아닌 뭉툭하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주는 상상을 해요.

그걸로 저는 삶을 이어가야겠죠.

... 아, 1300년간 영속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내가, 사라지지 않을 견고한 모든 것을 떠올리며. 당신에게."  (18-19p)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이 편지를 받게 될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편지를 읽으면서 마치 제가 쓴 편지마냥 '나만의 당신'을 떠올렸거든요. 

가장 절박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당신.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라서, 그의 삶 중 상당한 부분을 응급실에서 보내고 있어요. 이 책이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저 혼자 단단히 오해를 했어요. 소설책이 아닌데...

네, 저자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응급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일상에서 마주했던 사랑이에요.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야기도 있고, 본인이 크게 다쳐서 의사인 자아와 나약한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도 등장해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응급실 이야기, 에휴... 읽다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죽기 위해 인간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죽음의 순간 하늘은 세금 따위를 부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죽기 직전까지 인간은 돈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이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 같지도 못한 죽음을 겪어야 한다. 

죽음에 가격이 있다면, 그 죽음은 마치 무료에 가까운 금액으로 제공되는 가장 저렴한 죽음이 아닐까."  (212p)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곳은 불행이 일렬로 지나가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77p)


"나는 죽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외에 누군가에게 더 알려줄 사실은 없다." (278p)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 심정지 환자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인 것 같아요. 

어머니, 저자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네요. 어머니라서 가능한 기적.

제법 안온한 날들은, 온갖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것 같아요.

책을 덮으면서 제 머릿속에 남는 건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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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도구의 세계 - 행복하고 효율적인 요리 생활을 위한 콤팩트 가이드
이용재 지음, 정이용 그림 / 반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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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빰빠~

과거에 큰 인기를 누리던 미국 드라마《맥가이버》의 시그널 음악이 떠오르네요.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원 맥가이버는 항상 위기의 순간마다 주머니 속에 만능칼로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자였죠.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만능칼 하나만 있으면 나도 맥가이버가 될 수 있는 줄 알았더랬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만능칼이 생겼다고 맥가이버가 될 수는 없었어도 만능칼을 비롯한 다양한 도구에 대한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분야를 막론하고 도구의 세계는 매력적이에요.


<조리 도구의 세계>는 저자의 15년간 노하우가 담긴 책이에요.

저자는 전공을 건축에서 요리로 바꾸면서 수많은 조리 도구를 섭렵했다고 해요. 직접 구입해서 사용해보고, 각종 조리 도구 리뷰와 관련 서적을 통해 이론까지 습득했대요.

이 책은 행복하고 효율적인 요리 생활을 위하여 콤팩트한 조리 도구를 알려주는 가이드북이에요.

"이럴 때는 이런 도구가 좋아요."라는 실질적인 조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평소에 사용하던 조리 도구뿐 아니라 새로운 조리 도구에 대해서 효율적인 사용법과 관리법을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재미있는 건 조리 도구에 관한 자료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거예요. 만화가의 전문적인 삽화 덕분에 조리 도구의 세계가 훨씬 친밀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우선 조리 도구의 세계에서 가장 첫 번째로 소개한 도구는 바로 '손'이에요.

"모든 조리의 출발점은 손이고,

기본 조리 도구는 손의 연장(extension)으로서 존재한다."  (13p)

본격적인 조리 도구에 대한 설명 전에 '손'을 언급한 점이 놀라웠어요. 모든 도구의 세계가 그렇듯이, 개념적으로 도구는 손의 연장으로 본다는 것.

그래서 이 책에 소개된 도구는 크게 손을 위해 두 가지의 역할을 맡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어요. 그건 안전과 효율이에요.

조리 도구의 핵심은 손,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두려움을 극복하여 손을 적극적으로 쓸 수 있어야 요리의 수준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거예요.

처음 조리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도구의 원리와 쓸모를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저자와 같이 전문가의 길을 가게 되는 극적인 변화까지는 아니라도 요리의 첫걸음부터 제대로 배울 수 있어요. 손과 손의 연장으로 시작해서 계량과 측정 도구, 자르기와 썰기 도구, 다루기 도구, 섞기/ 갈기/ 혼합하기 도구, 거르기 / 분리하기 도구, 보관을 위한 도구, 익히는 각종 도구, 세척 및 정리 도구까지 일목요연하게 알려주고 있어요.

그 중 웍(Wok)은 정통 소재인 탄소강을 고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해요. 웍 길들이는 요령은 철 수세미와 세제로 웍의 안팎을 말끔히 닦아 보호막을 벗겨내고 말린 후 중불에 올려 달구고 식용유 2큰술을 두르고 쪽파 한 줄기와 생강 한 줌을 썰어 웍의 안쪽 면 전체에 고루 움직여가며 20~30분 볶으면 돼요. 볶은 채소를 버리고 웍을 뜨거운 물에 씻어 물기를 말끔히 걷어낸 뒤 중간 약한 불에 다시 올려 깨끗히 말리면 돼요. 은색의 탄소강이 처음 길을 들이면 짙은 갈색으로, 거듭해 쓸수록 검은색으로 변한대요. 

사실 집에 있는 조리 도구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조리 도구의 세계>를 읽고 나니 새로 구입할 게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는 조리 도구들을 좀더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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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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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연준님의 시를 읽기도 전에 산문집을 먼저 읽었어요. <모월모일>로 처음 만났고, 산뜻한 모과향 풍기는 일상의 면면을 보았어요.

<소란>은 두 번째 만나는 산문집이에요. 저자에게는 첫 산문집이래요.

오호, 첫 산문!

'첫-'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뭔가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아요.

역시나 시인에게도 <소란>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네요. 

제가 읽은 <소란>은 개정판이라서 초판 서문이 함께 실려 있어요.

2014년 가을 서울에서, 시인은 하루살이와의 에피소드를 '오늘 겪은 가장 큰일'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루살이의 미소 같은 것.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 騷亂 은 우리의 소란 巣卵 이 될 테니까요."  (13-14p)

2020년 3월 파주에서, 시인은 화가 조앤 미첼의 말을 빌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지 않고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뭔가를 느낄 수 없어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면 아주 강해져야 하죠. (메이슨 커리, 『예술하는 습관』, 걷는나무, 2020)"라면서, "맞아요. 소란을 쓸 때, 저는 강했던 것 같아요. 어떤 글도, 『소란』처럼은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어요. (9p)


네, 딱 그 느낌이었어요.

<소란>은 정말이지,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어요. 

앗,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본질이었구나.

<모월모일>에서 느낀 평온한 일상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라, 순간 동일인물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살면서 사랑은 숱하게 할 수 있지만 첫사랑은 오직 한 번뿐이듯, 시인에게 <소란>은 다시는 쓸 수 없는, 단 한 번의 고백 같은 글인듯.

왠지 은밀하면서 너무도 과감한 고백.

그래서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시인만의 비밀들.


*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다르다.

*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 불러온다.  

...

*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흐느낌, 입술을 비집고 겨우 나오는 말,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온몸에 끈끈한 막을 두르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말.

이런 것이 시에 가깝다. 숨쉬지 않는 부동의 망아지들이 원망스러운 적 많았으나 혀로 핥으면 살아나기도 했다.

절박함이란 목이 가느다란 것들이 타는 그네다.

*

따끈따끈한 두부 두 모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순간!

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속력으로 시를 쓰다, 식은 두부를 먹으며 천천히 시를 고치고 싶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사건은 두부를 만들기로 마음먹기 전에 일어난다.

그'전'에 뭔가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다.

*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    (137-139p)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요.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쓴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어쩌면 절박하고 치열한 시의 세계를 꺼려했던 건지도 몰라요. 

아름답고 예쁜 시만 보려 했으니.

시인의 시집 대신 산문집을 읽으면서 시는 잘 몰라도 시인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소란한 세상에서 나만의 소란을 찾는 길.

문득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 떠올랐어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소란>이 제게는 긴 여운을 남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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