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의 일 - 언어만 옮기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서
박소운 지음 / 채륜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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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많은 직업의 세계, 그중 통역사는 미지의 영역이에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역사의 일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느 영화 시상식 장면 덕분이에요.

통역사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의미 전달을 하는 소통의 매개체라는 점에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느꼈어요.

과연 현직 통역사가 이야기하는 <통역사의 일>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좀 놀랐어요. 한국인 강연자가 어차피 영어로 통역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전혀 유쾌하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유독 반말을 많이 해서 곤란했다고 해요. 강연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다간 무례할 수 있으니 담담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통역하면서 내내 입이 바짝 마르고 얼굴이 붉어졌다고 해요. 그날 청중이 제3세계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강연자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할 말, 못 할 말이 있다. 이 '못 할 말'을 통역해야 할 때가 가장 어렵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 전문 지식이 있고 없고 보다도 이게 더 힘들고 무섭다.

미처 모르고 범하게 되는 상대방에 대한 무례.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말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흔한 속담의 의미가, 통역 일을 하며 나날이 묵직하게 와닿는다."   (11p)


통역 현장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충뿐 아니라 통역사를 관광 가이드로 오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고 해요. 요즘은 AI 인공지능이 다 알아서 해주는 시대라고는 해도,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의 간극을 메워주는 건 통역사만이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자는 통역사만의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고 하네요. 훌륭한 태도인 것 같아요. 그건 일을 잘 해내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또한 통역에는, 소통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에요. 사람의 의중과 진심을 헤아리고 그만큼 전할 수 있는 깊이를 지닌 통역이라면 직업을 넘어 사명이 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통역사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해요.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화려한 직업처럼 비쳐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전문 통역사가 아니면서 행세하는 경우가 있었나봐요. 통역사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통역대학원 입시, 대학원, 그리고 통역 현장으로 나와서까지 계속되는 경쟁을 해야 해요. 드물게 국내 또는 해외 통역대학원을 졸업하지 않고도 본인이 구사하는 언어권에서 자격시험, 인증시험 등에 통과해 통역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공분을 사는 거래요. 실제로 자칭 통역사로 유명세를 얻어 중요한 국제 행사의 통역을 맡았다가 크게 망쳤고, 그 후 조용히 사라졌다는 후문이에요.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 진짜를 알아보자고요.

세상에 힘들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어떤 직업이든 제대로 알고 존중하면 좋지 않을까요.

아직도 남아 있는 편견에 몸소 부딪치고 맞서야 하는 통번역사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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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이 구린 건 맞춤법 때문이 아니다 - 밋밋한 글을 근사하게 만드는 100가지 글쓰기 방법
개리 프로보스트 지음, 장한라 옮김 / 행복한북클럽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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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저절로 눈길이 가는 책일 거예요.

밋밋한 글을 근사하게 만드는 100가지 글쓰기 방법.

이제와서 무슨 글을 쓰겠다고 글쓰기 방법을 배우냐고 딴지거는 사람은 그냥 패스!  절대로 이 책을 펼쳐보지 마세요.

스스로 내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야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법.


이 책은 꽤 유명한, 전설의 글쓰기 책이라고 해요.

『100 Ways to Improve Your Writing』라는 원제로 1985년 처음 출간되었다고 하니, 벌써 서른다섯 해를 맞이했네요.

이번 특별 개정판에는 지난 30여 년의 변화들이 반영된 내용이라고 해요. 펜이나 타자기를 사용하던 작가들이 컴퓨터로 작업하고, 자료 검색을 위해 반드시 도서관을 가야했던 상황에서 지금은 인터넷과 온라인 자료 검색이 가능해졌으니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요. 그런데 도구가 바뀐 것이지, 글쓰기의 본질이 변하지는 않았어요. 

글쓰기 방법 100가지는 여전히 유효해요.


일단 1장은 '쓰지 않고도 글쓰기 실력을 기르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시작부터 호기심을 자극하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

어떻게 쓰지도 않고 글쓰기 실력을 기를 수 있는지 궁금할 거예요. 여기에서 '쓰지도 않고'는 물리적인 글쓰기 행위를 뜻하는 것일뿐, 아무런 노력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머릿속에 뭔가 들어 있어야 끄집어 낼 수 있어요. 그 준비 과정으로 다음과 같은 노력들을 해보는 거예요.

사전과 참고 자료를 가까이 둘 것, 이미 알고 있는 어휘들 중에서 좋은 것들을 자주 사용할 것, 철자를 올바르게 쓸 것, 잡지부터 전문서까지 무엇이든 읽을 것, 소리 내어 읽으면서 말의 소리를 들을 것, 글쓰기 수업을 들을 것, 주변 이야기에 귀기울일 것, 필요한 정보는 글쓰기 전에 조사할 것,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머릿속으로 써볼 것, 글을 쓰기 가장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을 것.

그러니까 '쓰지 않고도'는 머릿속으로 써보는 과정을 이야기한 거예요. 역시 개리 프로보스트의 글쓰기 비법은 다르네요.


좋은 글을 쓰려면 문법을 지켜야 해요. 작가라면 당연히 문법을 지켜야겠지요. 그러나 문법을 정확하게 지키려다 좋은 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해요. 좋은 글이 목적이고, 정확한 문법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에요. 무엇보다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면서 문법에 알맞게 쓰는 걸 원칙으로 삼되 예외적으로 어길 수 있어요. 이때 예외는 글이 더 좋아진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라는 걸 기억해야 돼요. 만약 글이 별로인 데다가 맞춤법까지 엉망이라면 더 볼 필요도 없겠지요. 문법을 희생할 만한 가치 있는 글이 아니라면 문법 규칙을 절대 어기지 말라는 것이 저자의 당부예요.

결국 좋은 글이 있고 나쁜 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 책에 실린 팁은 효과적인 글쓰기 기술이에요. 무조건 효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 팁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해요. 최고의 글쓰기 팁은 자신에게 적용하여 좋은 글이 나오는 바로 그것이에요.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이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완전히 내 것이 되어야 습득했다고 할 수 있어요. 100가지 글쓰기 방법이라면 충분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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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유튜브 프리미어 프로
좐느(이하나) 지음 / 진서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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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전성시대가 된 것 같아요. 

수많은 유튜브 채널들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채널들이 있어요.

한 번 보면, 또 보고 싶고, 자꾸 찾아 보게 되는 채널.

그러다가 문득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왕초보 유튜브 프리미어 프로>는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프리미어 프로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교재예요.

프리미어 프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A부터 Z까지, 알기 쉽게 하나씩 설명해주는 책이에요.

원래 영상 편집을 할 때 꼭 프리미어 프로를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왕초보자들이 쉽게 배울 수 있고, 어도비(Adobe)계열 프로그램과 연동하기 편하다는 장점 때문에 프리미어 프로를 추천한다고 해요. 

저자는 유튜브에서도 프리미어 프로 강의를 하고 있어요. 책에 나온 내용을 익히면서, 유튜브 강의를 참고 하면 좋아요.

일단 프리미어 프로 CC를 설치해야겠지요. 버전에 따라 뒤에 붙은 이름이 달라지는데, CS(Creative Suit)로 붙던 명칭이 2013년부터 CC(Creative Cloud)로 바뀌었대요. 이 책에서 사용하는 버전은 프리미어 프로 CC 2019 Version 13.1.5 인데, 현재는 2020 Version 14.3.1 으로, 앞에 붙던 CC가 삭제되었대요. 예전에는 프로그램을 CD로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는데, CC부터는 구독 결제 방식이라서 월 또는 연 단위로 프로그램 사용하는 동안 꾸준히 결제해야 한다는 점이 달라졌어요.

프리미어 프로는 7개 패널만 알면 나머지 패널들은 책에 나오는 예제파일을 따라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동영상 편집에 주로 쓰이는 패널로는 ① [Project] 패널, ② [Source Monitor] 패널, ③ [Program Monitor] 패널, ④ [Timeline] 패널, ⑤ [Effects] 패널, ⑥ [Tools] 패널, ⑦ [Audio Meters] 패널이 있어요. 각 패널을 제대로 아는 것이 기본이에요. 


저자가 알려주는 왕초보 코스는 다음과 같아요.

당장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어라!  동영상 제작 4단계에서 첫 번째는 동영상 촬영, 두 번째는 편집, 세 번째는 꾸미기, 네 번째가 출력(업로드)예요. 프리미어 프로에서 작업하는 부분이 편집, 꾸미기, 출력(업로드)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의 동영상만 자르고 붙이는 컷 편집이 기본이 되고, 컷 편집이 끝나면 꾸미기 작업을 할 수 있어요. 동영상 중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트랜지션을 추가하거나 배경 음악과 효과음, 자막을 넣을 수 있어요. 추가로 원본 동영상에 색 보정을 하고 이펙트를 추가하면 동영상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어요.

유튜브의 영상 구성은 크게 처음, 중간, 끝이라는 3단계로 나눌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유튜브 영상의 맨 앞에는 짧게 3~5초의 타이틀을 붙여서 채널을 소개하고, 중간은 메인 영상을 넣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마지막 영상에는 '구독'과 '좋아요'를 유도해요. 마지막 다른 동영상을 추천하는 종료 화면 이미지나 영상을 10~20초 정도 추가하면 3단계 구성이 완성돼요.

저자의 팁은 주로 한 테이크로 길게 찍는 것이래요. 저자의 유튜브 영상은 작업 중인 모니터 화면을 녹화한 영상과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어서, 복잡한 편집 과정 없이 NG 부분만 잘라내고 타이틀과 자막, 배경음을 추가해서 영상 출력 후 업로드한다고 해요. 편집 영상의 개수가 많으면 관리가 어려우니까, 한 번에 쭉 촬영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진행한대요. 왕초보자는 책에서 알려주는 기본을 익히고, 좀더 익숙해졌을 때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동영상 촬영도 바싼 카메라를 사용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시작하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스마트폰으로 영상 촬영을 해보고, 조금씩 영상을 찍어 올리다가 나중에 마음에 드는 카메라를 구입해도 늦지 않는다고요.


책의 구성도 왕초보 코스로 시작해서, 좀더 복잡하고 있어보이는 중고급 코스까지 자세히 잘 나와 있어요.

중고급 코스는 자막, 사운드, 화려한 영상을 나누어, 꼼꼼하게 예제파일로 익힐 수 있는 '도전 프리미어'가 준비되어 있어요.

유튜버가 되고 싶다면, <왕초보 유튜브 프리미어 프로>로 유튜브 동영상 편집 기술부터 배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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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직한 비밀
라라 프레스콧 지음, 오숙은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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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소름 돋았어요. 현실 공포!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보리스가 보낸 편지들, 공책, 음식 목록, 신문 스크랩, 잡지, 책들을 샅샅이 뒤졌어요.

그리고 여자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갔어요.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어요.

왜,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그녀를 태운 차는 로터리를 돌아 루뱐카*의 내부 중정으로 들어갔어요.

[* 루뱐카 :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국가보안위원회) 본부의 별칭. 

루뱐카 광장에 있어서 그렇게 불렸으며, 지금 이 건물은 러시아 FSB(연방보안국) 본부로 쓰이고 있다.]

차가 멈췄고, 남자는 차 문을 열면서 물었어요.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뭘까요?"

"물론 루뱐카죠. 그곳 지하실에서는 시베리아까지 한눈에 내다보인다고 하거든요."  (25p)


문득 남산의 부장들이 떠올랐어요. 남산은 중앙정보부(중정)을 의미했고, 중앙정보부장은 남산의 부장이었어요. 권위주의 시대 중정은 권력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중정 대신 남산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어요.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된 남산은 아직도 고문 현장이 남아 있어요. 아무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미화해도, 숨길 수 없는 피비린내가 있어요. 지금이야 우리는 남산을 휴식의 공간으로 여기지만, 역사를 안다면 공포와 억압의 공간이었음을 똑똑히 기억할 거예요.


끌려 온 여자의 이름은 올가 프세볼로도브나 이빈스카야예요.

검은 정장의 남자들은 올가를 두 여자 간수에게 인계했고, 감방에 가두었어요.

올가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고, 그녀의 몸을 훑어보더니 임신했냐고 물었어요. 올가는 보리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어요.

그들은 사흘 동안 시멘트 상자에 가둬놓고, 하루에 두 번 죽과 쉰 우유를 주었어요. 사흘이 지난 후 열네 명의 여자들이 수감된 감방으로 옮겨졌어요.

그리고 몇 주 후, 아무런 번호도 없는 문 안으로 끌고갔어요.

자신을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세묘노프라고 소개한 신문관이 서류를 들추면서 물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무슨 짓을 했나요?"

"테레리즘적 성격의 반소비에트 견해 표명."

"제발요. 우리 가족한테 연락하게 해주세요."

...

"그자 쓰고 있는 소설에 관해 말해주시죠. 이런저런 말이 들리더군요."

"이를테면요?"

"말해보세요. 이 『닥터 지바고』가 무엇에 관한 소설입니까?"

"저는 몰라요."

"모른다고요?"
"아직 집필 중인걸요."
"만약 종이와 펜을 주고 잠시 당신 혼자 있게 시간을 준다면, 그러면 

그 책에 관해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전부 다 쓸 수 있겠죠.

좋은 생각이죠?"   (30-31p)


『닥터 지바고』가 뭐길래, 작가도 아닌 작가의 연인을 붙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걸까요?

이 책은 소비에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소설로, 10월 혁명에 대한 비판과 이른바 체제전복적인 성격 때문에 동구권에서는 금지된 책이라고 해요.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워낙 영화가 유명해서, 이제껏 슬픈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의 희망 없는 사랑을 다룬 장대한 서사가 어떻게 체제를 뒤엎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지, 정보국의 창의적인 분석이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들에게 『닥터 지바고』가 책이 아니라 무기였다면, 왜 작가를 직접 부르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왜?

보리스의 아내도 아닌, 연인이었던 올가를 3년 넘게 감옥에 가두고 중노동을 시켰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요. 그녀는 감옥에서 아이를 유산했어요.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보리스가 죽은 뒤 8년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고 해요. 『닥터 지바고』를 쓴 것도 보리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도 보리스인데 왜 그녀의 삶이 짓밟혀야 하는 건지.

정보국에서는 보리스를 통제하기 위해 철저히 올가를 이용했던 거예요.


<우리가 간직한 비밀>에서는 미국 정보국 CIA 에 소속된 여자 스파이들이 등장해요. 표면적으론 타이핑 부서에서 일하는 타자수일 뿐이지만, 은밀하게 정보국 지시를 수행하고 있어요. 그들 임무 중 하나가 『닥터 지바고』를 추적하는 일이었어요. 이탈리아에서 그 책 초판(1957년)을 입수하고, 그 소설의 러시아어 원고를 확보하는 일.

'지바고 작전' 이후 소설은 소련에서 지하출판물 형태로 유행했고, 1987년 파스테르나크가 복권되면서 이듬해『닥터 지바고』가 해금되었다고 해요.

근데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에요. 냉전 이후 정보국에 남아 있는 여자들, 한때는 전설이었던 그녀들이 어느 구석의 책상으로 좌천되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녀의 동료였던 아이비리그 출신 남자들은 그녀의 상사가 되었는데 말이죠. 

이 책은 바로 그녀들이 지켜낸 비밀과 놀라운 활약상을 그려내고 있어요. 샐리와 이리나의 이야기는 역대급 스파이 영화 같아요. 그녀들만의 비밀을 알고나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네요. 



내 이야기는 이제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집단의 상상력 속에서 나는 다른 사람, 여주인공, 한 등장인물이 되었으니까요.

나는 라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엔 그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도 나를 그런 식으로 알게 될까요?

그것이 그들이 기억하게 될 사랑 이야기일까요?

보랴가 썼단 여주인공의 결말이 생각나네요.


어느 날 라리사 표도로브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날 거리에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쪽의 혼성 수용소나 여자 수용소 중 한 곳으로 보내져,

나중에는 찾을 수조차 없게 된 명단의 이름 없는 한 번호로 잊힌 채

자취 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톨리, 나는 이름 없는 번호가 아닙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482-4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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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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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안.

스즈가미 세이치는 우울하게 전차 시트에 앉아 있어요.

피곤에 절어버린 직장인 세이치는 문득 눈에 들어 온 여자 덕분에 마음이 환해졌어요.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 눈을 감았어요. 여기에서 살짝 오해했어요. 연애도 한 번 못 해본 모태솔로인 줄.

계속되던 전차의 진동이 문득 사라지면서 한순간 무중력이 된 듯 묘한 감각을 느꼈어요. 음, 살짝 졸면 그럴 수 있지요.

세이치가 눈을 떴고, 마침 그녀가 전차에서 내리려는지 출구 쪽으로 이동했어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 내렸어요. 와,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네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플랫폼에 내린 상태였고...

앗, 서류 가방을 놓고 내렸어요. 가방에는 오늘 6시까지 회사에 들어가 상사에게 줘야 할 중요한 서류가 들어 있었어요.

가방을 전차에 깜빡 두고 내렸다고 하면 어떤 욕설이 쏟아질지, 멘- 붕.

호흡이 힘들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거의 포기 상태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어요.


<멸망의 정원>의 첫 장면이에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에요. 여기까지는.

세이치가 엉뚱한 역에 내린 그 순간, 굉장히 간절하게 염원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우리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팽팽하게 버티고 버티다가 툭! 끊어진 듯한 느낌. 

놀랍게도 세이치는 자신의 염원대로 현실이 아닌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으로 들어 왔어요.

그곳 사람들에게 지명을 물어보니, '오오마쓰리 군 오오마쓰리마치'라고 했어요. 그들은 세이치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여기고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세이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어요. 모두가 친절했고, 마녀가 떠나버린 빈집에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었어요. 정령의 숲 너머에 있는 닭산에서 금빛 덩어리를 주웠더니 광물상의 노주인이 진짜 금이라면서 팔라고 했어요. 사실 닭산이란 이름이 붙은 건 닭이 매일 아침에 알을 낳는 것처럼 그 산이 금이나 보석을 낳기 때문이래요. 누구나 줍는 게 임자인데, 동네 사람들은 닭산에 가질 않았어요. 닭산에는 종종 곰이나 마물이 나타나서 위험하거든요.  

현실 세계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세이치에게 편지가 도착했어요. 발송인 스즈가미 가논은 세이치의 아내였어요. 그가 떠난 후 보고 싶다는 내용인데, 그 정도로 애틋한 관계가 아니라서 의아했어요. 뒤이어 온 편지는 내각총리대신이 보냈어요. 무슨 불길한 날 이후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다음은 '방위성 이공간존재대책본부'에서 보낸 편지였어요. 

스즈가미 세이치가 사라진 그 날, 20XX년 1월 19일 새벽 지구에는 '미지의 존재'가 찾아왔고, 퇴치가 불가능한 '푸니'가 지상 여기저기에 나타서 온갖 것들을 침식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푸니'라는 이름은 미지의 존재가 푸딩 같은 흐물거리는 생물이라서 붙여졌어요. 처음에는 푸니는 작은 조각이었는데 점점 성장하며 분열하더니 점점 개체 크기가 거대해지면서 거대한 해파리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1월 19일 이후 많은 사람이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는 사람이 연간 100만 명을 넘었어요. 

대개 생물종은 타자에게 잡아먹힘으로써 개체 수가 줄어드는데, 푸니는 잡아먹은 쪽이 푸니가 되고 있어요. 좀비처럼. 그러다 보니 이상증식이 계속되어 지구 전역이 새하얀 푸니로 뒤덮이는 지경이 되었어요.

그 '미지의 존재' 내부의 핵 바로 옆에 한 인간이 발견되었고, 시체인 줄 알았던 그 인간이 바로 스즈가미 세이치였던 거에요.

가상현실 같은 세계에 갇혀 있는 세이치는, 진짜 현실에서는 '미지의 존재'의 핵 부근에 붕 떠 있으며, 살아서 뇌파를 발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는 세이치가 갇혀 있는 이공간으로 편지를 보내다가, 급기야 돌입자를 파견하기에 이르렀어요. 

돌입자의 미션은 세이치를 설득하여 핵을 파괴하도록 만드는 것.

그 핵은 결국 세이치가 머물고 있는 이공간.

과연 세이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핵을 파괴할까요?


'미지의 존재'가 왜 세이치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세이치는 개인의 행복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했어요.

<멸망의 정원>은 각박한 현실을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놀라운 탈출구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나 주목해야 할 건 '미지의 존재'로 파괴되어 가는 지구와 인간들의 행태인 것 같아요.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너무 적나라한 것 같아요. 스스로 묻게 되더라고요. 나라면, 나는 다를까?

문득 첫 장면이 떠올랐어요. 세이치가 낯선 여자에게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으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저 물컹대는 푸니와 다를 게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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