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재영 책수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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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선가'라고요?

처음 들어보는 일이라 궁금했어요.

박물관에서 옛 고서나 그림을 복원하는 건 봤지만 일반 책을 수선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나이가 길어봐야 이십 년 정도라서 낡고 파손된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살짝 색이 바랜 책들은 보관상 어쩔 수 없다고 여겼고요.  

알고 보니, '책 수선가'라는 명칭은 저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이 일을 하고 있는 저자도 불과 8년 전에는 미지의 영역이었대요. 원래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여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2014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 세부 전공을 정할 때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 분야를 선택했고 지도교수님이 책 수선가로 일을 하며 배우라는 조언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된 거죠. 운명인가?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수선하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부터 시작해 다양한 기술들을 배웠는데, 하루에 최소 4시간에서 많게는 6시간 동안 책을 고친 것이 대충 계산해보면 거기서 일을 하는 3년 6개월 동안 최소 1,800권 이상의 책을 수선했다고 해요. 

한국에 돌아와 일을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해결해야 했던 일이 이 직업을 잘 표현해줄 이름을 찾는 일이었대요. 망가진 책을 고치는 일을 나타내는 '복원', '보수','수리' 등 여러 단어들 중에서 '수선'을 선택한 건 천과 같은 직물을 고치는 경우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래요. 그리하여 '재영 책수선'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2018년 2월에 첫 작업실을 열게 된 거죠.

이 책에는 그동안 수선했던 책들과 그 안에 담긴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수선하기 전과 후의 사진만 봐도, "우와, 마법 같다!"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완전 새로운 책이 탄생한 것 같아요. 낡고 바래고 찢어진 책이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으로 변신한 자체도 놀랍지만 책이 가진 의미를 떠올리며 뭉클했던 사연이 있어요.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의 유품인 그 책은 표지가 아예 유실되었고 책등은 완전히 갈라져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해요. 어머님이 자주 펼쳐보셨던 탓에 많이 망가진 그 책은 작은 그림들을 모은 도안집으로 곳곳에 낙서들도 남아 있었대요. 보통 책 수선에서 낙서는 지우고 싶은 경우와 지우고 싶지 않은 경우로 나뉘는데 이번 건은 아무리 지저분해 보이는 낙서라도 어머니의 흔적이라 모두 그대로 유지했다고 해요. 또한 의뢰인과의 대화를 통해 평소 어머님의 성격이나 분위기, 좋아하는 색깔 등 새 표지를 상상할 만한 단서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새 겉싸개는 하늘색으로 정했고, 책 안에 아름다운 도안 중 작은 동백꽃을 책 커버에 새겼대요. 책 속에 완성된 사진이 실려 있는데, 의뢰인이 책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는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핑 돌았어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책 수선가로서의 기술뿐만이 아니라 예술적 감각과 의뢰인의 감성까지 담아내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업인 것 같아요. 아직은 수선이 필요한 책은 없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는 찾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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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맑음, 때때로 흐림
마연희 지음 / 처음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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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맑음, 때때로 흐림>은 국내 최초 여행 컨설팅 회사 '휴트래블 앤 컨설팅' 대표이자 여행 칼럼니스트 마연희님의 책이에요.

우선 저자가 여행사를 차리게 된 마음에 감동했어요.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만든 여행 루트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추억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대요.

사실 국내 여행사는 많지만 저자와 같은 맞춤형 여행을 제공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 힘든 걸 15년 동안 해왔다는 점이 대단한 것 같아요. 

이 책은 '아직 망하지 않은 여행사 대표의 좌충우돌 여행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요. 

여행 이야기라고 하면 대부분 직접 여행을 떠난 당사자의 경험담이었는데, 여행사 대표가 들려주는 내용은 색다른 것 같아요. 일단 여행사 대표로서 고충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손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도 있지만 본인의 잘못을 여행사측에 떠넘기는 후안무치는 삼가해야 할 것 같아요. 여행을 떠난 뒤에 여권과 소지품 관리는 본인의 책임이라는 건 기본이죠. 여행 전날에 가족 여행 손님이 아이가 여권에 그림을 그려서, 밤늦게 방법을 찾느라 애가 탔다는 사연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여권에 그림을 그리면 훼손이라 출국도 안 되고 입국도 안 되는데, 운 좋게 출국했더라도 그 나라에 입국할 때 발견되면 되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네요. 인천 공항에 긴급 여권 발급 센터도 일회용 단수 여권이라, 이 단수 여권으로 입국할 수 없는 국가들이 있대요. 그때만 해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는 단수 여권이 안 되고 하와이는 여권이 바뀌면 ESTA 비자를 다시 신청해야 해서 당일은 절대 안 되는데, 그 가족 여행 손님은 태국이라 가능했다네요. 여권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할 것.

벌써 푸껫으로 떠났어야 할 신혼 여행 손님이 아직 출발하지 못한 채 대기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탑승해서 기내식까지 먹은 상황에서 비상구 쪽에 앉은 승객이 비상구 문의 손잡이를 당기는 바람에 이 난리가 났던 거예요. 비상구는 아무나 앉을 수 없고, 말 그대로 비상시에 승무원과 함께 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수속할 때 항공사 직원이 승객에게 직접 안내를 하고 동의를 받는데, 그 승객이 비상구 문을 열었던 거죠. 항공기 비상문은 일회용이라 열린 비상문을 교체하거나 다른 비행편을 변경해야 한대요. 일단 열렸던 비상문을 용접으로 막고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는데, 항공기 규정상 막힌 쪽 비상구 근처에는 승객이 앉을 수 없어서 원래 탑승 인원의 1/3인 70명만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공상 직원에게 강력히 엔도스 요청을 하여 탑승할 수 있었대요. 엔도스는 항공편이 부득이한 상황으로 출발이 불가할 경우 다른 항공사로 바꿔 주는 것인데, 엔도스를 할 경우 타 항공사에 티켓 금액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항공사가 꺼리는 일이라고 하네요. 역시 아는 것이 힘, 똑똑한 대표님 덕분에 무사히 신혼 여행을 떠났다는 해피엔딩 사연이에요. 그때 비상구를 열었던 호기심 많은 승객에게 항공사는 비행기 수리비와 지연 배상금 1억 원을 청구했다고 하네요. 그러니 비상구는 절대로 열지 말 것.

여행 일정 동안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고, 꼼꼼하게 현지 상황을 확인하는 대표님의 정성과 노력에 감탄했어요. 역시나 휴트래블을 이용했던 신혼 여행 손님이 아이를 낳은 뒤에 가족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네요. 그만큼 좋았다는 증거겠죠.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딱 한 번 여행사 차린 걸 후회했지만 아직도 여행이 좋고 설렌다니, 진짜 대단한 여행사 대표님이네요. 아직 먹구름이 잔뜩이지만 곧 맑아질 그날을 기다리며, 저도 휴트래블에 여행 컨설팅을 맡기고 싶네요.


# 2021년 10월

나도 백신을 맞았다.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된 거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김OO입니다. 기억하시죠? 

내년 구정 연휴에 가족여행을 가려고 하는데요."

1년 10개월 만에 여행 문의 전화가 왔다. 눈물이 왈칵.  

목이 메어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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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을까? - 선택과 모험이 가득한 인류 진화의 비밀 속으로
이상희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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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을까?>는 한국인 최초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님의 책이에요.

먼저 이상희 교수님이 고인류학을 선택한 이유가 재미있어요.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아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백만 년 전의 세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런데 웬걸, 알고 보니 고인류는 이미 내 안에 있더라는 거죠. 

이 책은 바로 인류의 기원인 고인류의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어요. 

지금의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고인류가 결국 우리 안에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인류학이란 지금은 사라진 옛 인류를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맨 처음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현생 인류의 조상인지 아닌지를 두고 몇십 년 동안 논쟁이 있었대요. 여기에는 옛 인류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대요. 네안데르탈인이든 호모 사피엔스든 모든 고인류를 대표해온 성별은 남자였다는 거죠. 당시 인류학자들이 인간을 모두 남자로 그려냈다는 점은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증거일 거예요. 최근에는 이러한 편견을 깨뜨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이 정말 맞는지 검증하고 탐구하는 거죠. 대부분 화석은 일부분만 남아 있기 때문에 사라진 부분은 우리의 상상력을 채우게 되고, 그중 어떤 부분은 가설이 되어 검증되는데, 이때 우리의 편견이 개입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20세기 전반까지는 네안데르탈인이 인류 진화의 단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자바인,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는, 인류가 거쳐온 하나의 단계로 생각했어요. 인류 진화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거치는 단계로 여겼는데, 유전자를 연구해보니 네안데르탈인의 수가 생각만큼 많지 않았던 거예요. 집단 규모가 작으면 근친교배 비율이 높아지고 그 부작용으로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는 연구도 있어요.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해 빙하기를 살아낸 많은 인류 집단은 이제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유라시아의 다양한 인류 집단과 유전자가 섞였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네안데르탈인을 유럽에서 주로 살았고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방까지 퍼져 살았던 고인류 집단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보는 견해가 더 일반적이라고 해요. 

현재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에 속한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은 고인류학적으로 정의내리기가 어렵다고 하네요. 20세기 초 인류학자들은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종이며 인종은 생물학적 단위가 아니라는 점에만 동의한 거죠. 또한 2010년도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현생 인류는 전 세계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토착민들과 유전자를 섞었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가설이 되었어요. 앞서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고 한 것은 실제로도 호모 사피엔스는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이에요. 호모 사피엔스는 하나의 조상에서 내려오는 하나의 후손이 아니라 여러 조상 집단의 다양한 섞임의 결과로 생겨난 존재인 거예요. 고인류 종은 모두 사라졌지만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결국 고인류학은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어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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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랑일지도 - 야마카와 마사오 소설선
야마카와 마사오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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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랑일지도>는 야마카와 마사오의 소설집이에요.

우선 "혜성처럼 나타나 단 한번 수상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비운의 작가"라는 소개글에 눈길이 갔어요.

「그 1년」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다수의 단편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와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했고,「여름의 장례 행렬」은 일본 교과서에도 수록될 만큼 쇼트쇼트(초단편소설)의 대가로 인정받는 작가였으나 결혼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1965년 2월 교통사고로 서른다섯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작가의 활동 시기, 즉 작품 연도를 보면 그 시대상을 느낄 수 있어요. 

1964년 작품인 <아마 사랑일지도>의 주인공은 스물아홉 살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믿는 남자예요.

스스로 고립되고자 하는 남자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그를 지탱하는 힘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인 것 같아요. 10대 중반부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보니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것 같아요. 아파서 장사를 그만 둔 어머니와 33세 미혼의 누나, 25세의 여동생과 함께 사는 일이 고달픈 건 가족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족쇄로 여기기 때문인 것 같아요. 때때로 불만을 폭발하는 어머니에게 지친 그는 하숙집을 구했고, 금요일마다 하숙집에서 가서 하루 종일 자거나 뒹굴대다가 일요일이 되면 일주일치의 일을 하곤 했어요. 그러다가 그 여자가 찾아왔어요. 토요일 저녁에 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떠나는 그 여자를 거부하지 않은 건 사랑하지 않으니 언제든지 끝낼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더욱 과장되게 꾸밀 수 있었고 여자가 듣고 싶은 "사랑해"라는 말도 쉽게 했던 거예요. 여자는 그걸로 만족했고 둘의 이상한 관계는 지속되었죠. 그녀가 발길을 끊은 뒤, 남자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사랑을 부정했던 자신이 사랑에 빠져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는 게 허무하고 슬프네요. 마치 남자의 운명처럼.


"... 나는 이제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관계니 일상이니 하는 것 속에 있어서 

이제는 나의 불안만을 고집하는 것이 옳다고도 믿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계절은 끝났다."   (72-73p)


1958년 작품인 <그 1년>의 주인공은 열일곱 살 소년 오바타 신지예요. 한국전쟁이 한창 벌어질 때 일본 본토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해있고, 일주일에 한 번 군인들을 위한 밴드 공연과 댄스 파티가 있어요. 신지는 밴드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보이 역할을 하고 있어요. 다들 신지에게 '보야'라고 불러요. 마침 드럼이 빠지면서 신지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고, 무대 위에 오른 신지는 미군들과 춤추는 여자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검은 정장 차림의 여자를 보게 돼요. 그 '검은 여자'는 금발의 무테안경을 쓴 조용한 소년 같은 느낌의 키가 큰 오장(군대 계급 중 하나로 최하위 하사관에 해당함)과 늘 함께였고, 다른 남자와는 춤을 추지 않았어요. 밴드의 아다치는 신지가 '검은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어요. 하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밴드에서 쫓겨난 신지는 '검은 여자'를 잊지 못했어요. 만 열여덟 살이 된 신지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검은 여자'를 봤으나 신지에게 그녀는 '검은 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요. 신지에게 있어서 '검은 여자'는 흠 없는, 완벽한 존재였으니까요. 미군들에게 웃음을 파는 그녀들과 그 곁에서 비굴하게 살아가는 남자들... 신지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 꼭 1년. 그는 그 1년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자신이 끝없이 땅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검은 여자'는 과일 속의 썩은 씨처럼 자기 안에서 딱딱하고 검게, 과육에 파고든 채 응고하고 있었다."  (153p)


1962년 작품인「여름의 장례 행렬」은 정말 짧은 이야기예요. 주인공은 우연히 해안가 작은 마을에서 고구마밭 너머 일렬로 움직이는 작은 장례 행렬을 보았고, 봉인했던 십수 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어요. 전쟁 말기, 패전의 여름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아픔을 남겼어요. 왠지 일본이 우리에게 지녀야 할 마음이 아닐까... 

일본 문학계에서 극찬하는 작가의 소설집이기에 기대했는데 역시나 일본의 시대 정신을 보여주고 있네요. 전쟁 이후 젊은이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문학성은 인정하나 온전히 공감하기엔 괴리감이 있어요. 뭔가 불편하고 언짢았던 부분들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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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관 - 국내 최초 군대폭력 테마소설집
윤자영 외 지음 / 북오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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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관>을 읽으면서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봤을 때의 충격이 되살아났어요.

남자들이 흔히 떠드는 군대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끔찍한 지옥을 보고야 말았네요. 처음엔 "이게 실화냐?"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어요. 드라마와 소설이라는 픽션의 영역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군대 내 폭행과 성범죄 피해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니까요.

사실 군대 관련한 내용들은 극비인데다가 외부에 알려진 사건들조차도 축소 보도되는 경우가 많아서 웬만한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어요. 일부에서는 드라마가 옛날 군대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실제 군인권센터에 접수되는 피해 상담 건수는 매해 증가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소설 역시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니까요.

이 책에는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요. 

윤자영 작가님의「살인 트리거」, 박해로 작가님의「고문관」, 문화류 작가님의「불청객이 올 무렵」, 정명섭 작가님의「사라진 수첩」이에요.

네 편 모두 주인공은 일방적인 폭행과 모욕을 당하는 피해자, 일명 고문관으로 불리는 군인이에요. 이미 눈에 뻔히 보이는 비극적 결말이지만 그 과정은 저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 괴롭힘의 수준이 너무 잔인해서 할 말을 잃었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순간은 소름 돋는 공포를 느꼈어요. 세상에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이구나...

책 표지 그림과 제목 때문인지 박해로 작가님의 이야기 속 두 인물이 강렬하게 남는 것 같아요. 주인공 심소남과 대비되는 재벌2세 연예인 유신역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드라마의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이지만 영화처럼 장면들이 그려져서 참담한 비극이 더욱 크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여느 공포물과 달리 <고문관>은 군대 폭력이라는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과거보다는 군대 환경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가혹행위가 존재하며 그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사회적 관심이 변화의 시작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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