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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장폴 뒤부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월
평점 :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예요.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 봉투 안에는 사진 두 장뿐.
아버지의 자동차인 1969년형 트라이엄프 비테스 카브리올레의 측면 사진.
다른 한 장은 계기판의 주행기록계를 근접 촬영한 것으로, 주행거리를 마일로 표시하는 주행기록계에 '77777'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요.
그뿐이었어요. 두 장의 사진 말고는 다른 소식은 없었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마이애미에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딱 한 번 편지를 보내왔어요.
그 당시 편지에는 단 한 구절만 적혀 있었어요.
'언젠가는 네가 물려받을 거다.' (30p)
<상속>은 거부할 수 없는 상속에 관한 이야기예요.
주인공 폴 카트라킬리스는 프랑스 툴루즈 출신으로 의사면허증이 있지만 환자를 진료한 적은 없어요.
미국 마이애미에서 바스크 지방의 전통스포츠인 펠로타 경기를 뛰고 있는 프로 선수예요.
스물여덟 살에 가족을 떠나 미국으로 왔고, 1983년 11월 중순부터 1987년 12월 20일까지 4년간의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어요.
이제 곧 그는 가문의 비극적인 유전자를 상속받을 참이에요.
1987년 12월 20일 일요일, 폴에게는 아버지가 보낸 사진 두 장과 바다에서 건져낸 떠돌이 개 왓슨과 함께 있었고, 프랑스영사관을 방문하여 아버지 아드리앙 카트킬리스의 부음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사망시각은 프랑스 시간으로 어제 오후 4시 10분이라고.
아버지는 아파트 건물 4층에 거주하는 환자를 진료한 다음 곧바로 옥상으로 올라갔고 9층에서 떨어졌어요.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폴은 혈혈단신이 되었어요.
할아버지 스피리돈 카트라킬리스는 1974년 일흔네 살에 자살했고, 어머니의 남동생 쥘 삼촌은 1981년 쉰 살에 자살했으며, 그로부터 두달 후에 어머니 안나 갈리에니가 자살했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진료를 했던 사람인데... 아들 폴은 미국에서 지낸 4년 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냈어요.
도대체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그 두 장의 사진을 보낸 후 자신의 삶을 끝낸 걸까요?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고, 공감할 수도 없었어요.
가족 4명이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충격적인 비극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게 된 폴은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두 권의 수첩을 발견했어요.
가로 9센티미터 세로 14센티미터 크기의 몰스킨 검정노트.
첫 번째 수첩에는 환자의 죽음으로 끝난 열 네 건의 질병 기록이 적혀 있었어요.
각 질병 건마다 병증의 진행과정과 함께 환자의 마지막 순간이 연월연시로 정리되어 있었어요.
두 번째 수첩에는 그 열네 사람의 성과 이름, 나이 그리고 역시 연월일시가 적혀 있었어요.
질병 옆에 적힌 날짜는 사망 날짜.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아버지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고...
그제서야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던 건지,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 수수께끼는 아무도 풀 수 없을 것 같아요. 죽음의 비밀이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알게 된다 해도 진실은 오직 당사자의 몫일테니.
문득 몇 년 전에 봤던 해외뉴스가 떠올랐어요.
영국의 70대 여성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내용이었어요.
25년간 함께 한 남편과 두 자녀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렸고, 스위스에서 가족과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고 해요.
자신의 장례식 준비도 직접했던 그녀의 직업은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 간호사였어요.
평생 노인들을 돌봐왔고, 자신의 어머니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고 해요.
늙는다는 것이 암울하고 슬프다는 그녀는 지병도 없는 건강한 상태였는데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요.
그때는 굉장히 충격적인 뉴스라서 그 내용 그대로,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가족의 안락사, 과연 자살이나 다른 죽음보다 덜 충격적일까...
장폴 뒤부아의 <상속>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됐어요. 그저 나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죽음이란, 살아 있는 모두에게 전해질 상속이구나...
언젠가는 물려받게 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상속.
하루하루, 그 행복을 이야기하던 폴이 아버지의 자살과 함께 시작된 불행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지켜보면서... 죽음보다 오히려 삶을 더 생각하게 됐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삶이지 죽음이 아니라고.
77777
"어째서 7이냐고?
이것이 네 번째 소수(素數),
절대 '나뉠 수 없다는', '슈퍼 싱글'이라는 프라임 넘버이니까.
또 이 숫자는 두 번째 메르센 소수이고, 첫 번째 뉴먼생스윌리엄스 소수이고, 우달 소수, 캐롤 소수이니까." (4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