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 ‘정상’ 권력을 부수는 글쓰기에 대하여
이라영 지음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평점 :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는 이라영 독서 에세이예요.
이 책은 저자가 답답하고 분노할 때마다 읽고 썼던 글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왜 분노했는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이유에서 출발했다고 해요.
피츠제럴드가 젤다 때문에 말년에 참 고생이 많았다며 젤다의 정신병과 남자관계 어쩌고저쩌고 읊어대던 지인 때문에 울컥했던 거죠.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다니...
저 역시 젤다를 모를 때는 영화에서 본 이미지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오해했던 적이 있어요. 순전히 남자들의 왜곡된 시선이란 건 나중에 알게 됐고,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어요.
젤다는 언론 기고를 통해 스콧이 자신의 일기를 표절한 사실을 밝혔는데, 실제로 젤다의 글은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알려지거나 스콧의 이름으로만 출간되기도 했어요. 남편 스콧은 젤다의 출판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젤다의 소설을 삼류라고 악평했대요. 여성의 창작 활동은 무시하면서 그 창작물은 제 것처럼 굴다니 그 뻔뻔함에 화가 치미네요. 똑같은 작가인데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젤다는 방탕하게 노는 여자로 낙인 찍힌 거예요.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은 백인 남자들의 저서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그것을 보편이라고 여기는, 즉 압제자의 언어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이에요. 아무런 의구심 없이 편파적인 세상을 살아간다면 고통과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저자는 매일 분노하며, 날아드는 공격적인 언어를 수비하며 다시 받아쳐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일상의 폭력에 대해서 '나는 몰랐다'라는 비겁한 핑계는 이제 그만해야 할 때라는 것.
다만 분노가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아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기에 끊임 없이 읽고, 보고, 쓰는 것이라고요. 오만을 다스리고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읽고, 보고, 써야 한다고요.
저자는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미국 작가 스물한 명을 중심으로 약자 혹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어요.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저자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며, 두 남성 비엣 타인 응우옌과 월트 휘트먼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작가라고 해요. 그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저자가 어떻게 내면의 분노와 소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또한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로서의 글쓰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애니 프루(1935~ )는 2017년 가을 전미도서재단의 평생공로상을 받으면서 수상 소감에서 오늘날을 카프카적 시대라고 표현했어요. 암울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부조리의 시대라는 뜻이에요. 믿고 싶은 가짜 뉴스를 신뢰하며, 불리한 사실은 외면하고, 소외와 차별의 역사에 일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폭력에 무뎌지는 것을 경고하고 있어요.
오드리 로드(1934~1992)는 '분노'를 반드시 유해한 것만은 아닌 불쾌한 정념이라고 하면서, 여성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억압당하는 감정이라고 했어요. 미국 사회에서 흑인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 폭력은 그들이 백인들에게 당하는 인종차별과 사회적 계급 차별 때문이기에 연민의 대상으로 정당화되지만, 흑인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어요.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는 《거짓말, 비밀, 그리고 침묵에 대하여》(1976)에서 많은 여성에게 고통의 근원을 제공하는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어요. 리치도 20대에는 완전한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결혼과 세 번의 출산을 했지만 가부장제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여성운동의 길을 갔다고 해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언어는 폭력적으로 지배받는다는 걸 작품을 통해 알리고 있어요.
조라 닐 허스턴(1891~1960)은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1937)에서 "흑인 여자들은 이 세상의 노새"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소설 속 재니의 할머니는 백인 주인에게 노예로 착취당했다면, 더 이상 노예 신분이 아닌 주인공 재니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남편들을 경험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해요.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자전 소설 《벨 자》(1963)는 저자가 거부감을 느꼈던 작품이라고 해요. 그건 실비아 플라스의 세계관이 여성은 살아서는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서사를 남길 수 있고, 여성은 죽어야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래요.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여성의 죽음을 미화시킴으로써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거죠. 죽어야만 좋은 여자가 되는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둘 중 하나를 강요당하는 거예요. 미치거나 죽거나.
루이즈 글릭(1943~ )은 2020년 여성으로는 열여섯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요. 그의 시집 《아라라트》에 실린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일부분이에요.
내 말을 듣지 말아요. 가슴이 찢어져요.
나는 어떤 것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죠.
(...)
우리는 손상된 존재이며 거짓말쟁이지요.
(163p)
저자는 이 시를 가장 오래 생각했다고 해요. 말이 믿어지지 않는 존재들, 신뢰받는 화자가 되기를 갈망하며 죽음을 향해간 이들을 떠올렸다고... 너무나 절망적인 슬픔을 느꼈어요. 그들에게 죽음은 결코 도피가 아닌 마지막 외침인 것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여전히 독버섯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여성에게 일어나는 성폭력과 살인,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등 아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도,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주장들이 본질을 흐리고 있어요. 권력이 강요하는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다양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인 것 같아요.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그것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