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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평점 :
아이들의 성교육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어가 있어요.
동의(同意)
어떤 사항에 대해 상대방과 의견이 일치한다는 뜻이에요.
성교육에서 동의는 허락하는 걸 의미해요. 하지만 언제든지 원할 때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해요.
어제 동의했다고 해서 오늘도 동의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매번 각각의 행동에 대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동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어요. 미성년의 아이가 과연 올바른 동의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충격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실화를 소설로 썼을 뿐, 주인공 V 가 G 에게 당한 건 성적 학대이며, 명백한 성범죄였어요.
겨우 열네 살 소녀 V 를, 현란한 말솜씨와 위선으로 유혹한 G 는 당시 쉰 살의 유명 작가였어요. 외로운 소녀에게 유명 작가의 연애 편지는 미끼이자 독약이었어요.
놀랍게도 G 는 프랑스 한림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수여하는 상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상을 받았던 작가더라고요. 프랑스 문단은 G 의 치부를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줬고, 옹호하기까지 했어요.
G 는 미성숙한 아동에게 성적 자기결정권, 즉 동의를 핑계 삼아 더러운 성욕을 충족해온 인물이에요. 아동성애자인 G 는 처벌받기는커녕 그 변태적 성향을 문학이라는 예술로 포장하여 돈벌이를 해왔고, 명성까지 얻었어요. 문득 우리나라 문단에도 오래도록 숨겨왔던 괴물선생 En 가 있다는 게 떠올랐어요. 괴물의 추악한 짓거리를 C가 폭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계속 속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또 괴물에게 당했을 거예요.
G 의 정체는 가브리엘 마츠네프라고 해요. 법적으로 G 를 처벌할 수는 없지만 세상의 모든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그를 그냥 놔둘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여든이 넘은 고령의 유명 작가, 그동안 그가 누려온 명성은 가짜라는 걸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할 거예요.
주인공 V 는 미성년자이며 피해자인데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받았고, 엄청난 트라우마로 고통을 당했어요. V 는 자신이 동의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자가 아닌 죄인 취급했어요. V 와 같은 피해자들은 트라우마 치료가 오래 걸리고 완전히 치유되기 어렵다고 해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만큼 피해자들은 평생 고통받는 생존자라고 봐야 해요. V 의 용기는 더 이상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동의라는 개념을 다시, 제대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잘못된 인식은 고치고, 바꿔야 해요.
이 책의 핵심은 'V 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 진짜 잘못은 V 가 아니라 G 가 했어요. 그리고 V 를 보호하고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V 의 엄마, 아빠 그리고 주변 어른들...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는 G 의 지인이었던 철학자. 만약 그 중 한 명이라도 V 가 처한 위험을 제대로 인지했다면 G 를 진작에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어요. 그 기회를 놓친 거예요. G 는 반드시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흉악한 중범죄자예요. G 의 교활함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아이들과 십대 소녀만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이에요. 다행인 건 늦었지만 이제라도 V 가 이 책을 출간했다는 것.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니까, 확실하게 자각하고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이 책을 읽고 찾아봤어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
우리나라는 작년 n번방 사건의 영향으로 법이 일부 개정되었어요. 일명 'n번방 방지법'으로, 관련 법정 형량이 상향 조정되었고, 미성년자 의제 강간 기준 연령이 만 13세에서 만 16세로 상향 조정되었어요. 만 16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서는 성관계의 '동의'라는 말이 인정되지 않아요. 사실 이 부분이 찜찜해요. 미성년자를 보호하려면 만 18세 미만 모든 아동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생각하고, 그 연령대 아이들에게 자발적 동의는 없으며, 성착취라는 것을 명백히 규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만16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하더라도 그 대상자가 19세 이상인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제한을 뒀기 때문에 미성년자간의 성범죄는 처벌을 피해갈 수도 있어요. 세부적인 부분들은 좀 더 현실에 맞게 개정되어야 할 것 같아요.
현행 프랑스법은 성인과 15세 미만 미성년자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지만, 미성년자가 동의했다는 점을 증명하면 강간 혐의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해요. 하지만 최근 프랑스는 유명한 정치학자가 30여년 전 의붓아들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다는 의붓딸의 폭로로 인해 근친상간 처벌을 강화하고 동의 여부에 관계없이 15세 미만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직 미투 운동은 끝나지 않았어요.
